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21
021화
몇 달 전, 샌프란시스코.
베들레헴 대표는 뚫어지게 눈앞의 계약서만을 쳐다봤다.
‘좋다. 다만, 너무 좋아. 그래서 더욱 의심스럽고.’
구식 전함 오리건부터 신형 순양함 올림피아까지 모두 그의 손을 한 번은 거쳐 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진수 끝나고 갑판 꽃단장 끝나고 처녀항해를 한다. 근데 시범 항해를 바로 프랑스로?”
“문제가 됩니까?”
“시간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렇습니다. 막 해운업계에 발을 들였으면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야지요. 저희 프랑스와 미국 사이의 물동량은 지난 20년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늘어날 추세이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MH는 신생 회사 아닙니까?”
“그건 미국에서만이지요.”
베들레헴 조선을 대표해서 나온 찰스 M. 슈왑(Charles M. Schwab)은 더는 서류가 아닌 눈앞의 중년인. 스스로를 프레드릭이라 소개한 이에게 눈을 돌렸다.
‘프랑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여기 미합중국에서는 신생아나 마찬가지인 회사다. 자금력 하나는 엄청나다고 이미 뒤를 파서 확인은 했다만….’
자금은 확실한데 여전히 의심스럽다. 보통 프랑스 자본은 과감함보다는 보수적인 투자의 대명사 아니던가. 심지어 왕실 자금보다 더욱 안전하게 움직이는 게 프랑스 자본이다.
그런 프랑스 자본이 이리 서두른다?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다는 의미밖에 더 되겠나. 다만 그 사정을 알아내는 것은 아무리 찰스의 뒷배 힘을 빌려도 불가능했고.
“시범 항해는 최소 2주에서 40일 가까이 걸립니다. 일반적으로 이 기간 내에 고객들이 요구하는 수리 사항을 보완하죠. 이 기간을 진수 끝나자마자 바로 하고 곧장 대양을 지나는 원정 항해를 하겠다고요?”
“그래서,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저희야 좋은 이야깁니다만 추후에 말이 나올까 봐 걱정이지요.”
“그런 걱정은 접어도 됩니다.”
선박 수주를 제외하면 가장 까다로운 과정이 진수와 시범 항해다. 자칫하면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도, 심하면 소송까지 이어지기도 하니까.
“이런 조건에도 어렵다면 저희는 크램프 쪽과 약속을 잡겠습니다. 천천히 답을 주세요.”
“에헤이, 마음이 너무 급하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크램프 조선의 규모는 저희의 절반 수준도 안 됩니다. 한두 척도 아니고, 이리 많은 배를 만들어줄 수 없을 겁니다.”
전부 화물선, 혹은 수송선. 군함처럼 기술적으로 어렵지도 않거니와 부자들의 호화 요트처럼 까다롭지도 않다.
‘중간에 엎어질 일도 없겠지. 중도금 못 받으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되거니와 모든 배를 한 번에 도크 위에서 건조하는 것도 아니니.’
보장된 일감이 조선업계. 아니 철강을 쓰는 업계 전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슈왑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전부터 제의를 꾸준히 해왔지만, 결정이 참으로 늦군요. 그래도 베들레헴 조선의 모회사 카네기 대표까지 온다길래 큰 진전을 기대했는데….”
“잘 압니다. 이제 와서 다시 검토나 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고객님의 의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입찰 계약이 아니니까요.”
“뭐, 이해합니다. 정 그렇다면 종이만 보세요, 종이만. 저흰 돈이 있고, 배가 필요합니다. 서로 이 약속만 지켜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프레드릭의 말에는 단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음을 슈왑은 알았다.
왜냐면 계약을 어겼을 때 걸린 페널티가 장난 아니었으니.
온갖 법적 책임부터 위약금은 저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임하는지 부각해줄 정도였다.
‘저들은 자금이 있고, 우린 충분히 건조할 능력이 있다. 파투 날 수가 없는 계약이야.’
35살에 카네기 철강의 회장 자리에 오른 그의 비결은 바로 정확한 판단과 빠른 결단.
슈왑은 더는 대화를 끄는 대신 서류 하단에 이니셜을 휘갈기며 자신의 답을 보였다.
그리고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이에 프레드릭 또한 일어나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최고의 선박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약속만 지켜주시길. 뭐, 베들레헴 조선 뒤에 누가 있고, 그 뒤에는 또 누가 있는지를 생각하면 문제없겠지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카네기 철강을 등에 업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조선소를 닥치는 대로 인수까지 해낸 베들레헴 조선이다.
‘카네기 철강 뒤에는 이 나라 최고 부자가 있고.’
타이틀이 크면 명성과 힘이 있는 만큼 도망치기도 힘들다. 이는 신뢰의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나가시면서 식사나 하실까요?”
“안 될 게 있습니까.”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계약을 마친 둘은 웃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이기에 계약이 틀어지는 일은 없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
전쟁과 경제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세계 경제는 이번 전쟁을 통해 완전히 뒤바뀔 거다.
채무자와 채권자가 뒤바뀌고, 수입국과 수출국이 역전되는 계기.
이런 격변의 시대를 앞두고 중위 베르게르 모헬이 아닌 자본가 베르게르 모헬로서 이를 어찌 두고 볼쏘냐.
파이어족 몰라? 후딱 노후자금 모아야 할 거 아냐.
올해에 일어날 사건을 단계적으로 보면 이렇다.
일단 전쟁 시작과 동시에 국지전 정도가 아님을 인지한 자본가들은 모든 것을 끌어모은다.
주식, 부동산, 채권 모든 것을 시장에 던지고 그들은 오직 금을 찾을 거다.
그리되면 대부분의 금 인출을 감당 못 한 국가들은 금본위를 폐지하게 되겠지.
이에 가장 먼저 피해 보는 국가는 놀랍게도 미래 천조국인 미국이다. 미국 경제는 전쟁 소식이 터지고 군사적 움직임이 드러나자마자 폭락한다.
주요 수출국인 유럽 전역 시장을 잃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의 든든한 초기 투자자들이 전부 썰물처럼 빠져나갈 테니까.
‘다만 그것도 잠시지.’
그리 빠져나간 자금이 나중에 다시 ‘헉헉! 저희 전쟁이 길어져서 그러는데 급하게 수출 좀 해주세요!’라면서 고대로 돌아올 거거든. 자존심 강한 영국도, 프랑스도. 심지어 독일도 두 손 모아서 싹싹 빌면서 말이지.
결국 앞으로 4년 동안 경제가 호황일 유일한 국가는 미국뿐이다.
여기서 떨어진 미국 주식을 사거나, 사재기를 하는 것은 하수다. 그랬다간 뒤끝이 편하지도 않고.
나중에 변명도 못 하고 전쟁 전에 재산을 빼돌린 악덕 자본가 그 자체로 찍힐 수도 있다.
실제로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가 전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분노한 민중을 달래기 위해 해외로 자본을 유출한 이들을 때려잡는 거였거든.
‘자진 신고’라는 이름 아래에 알아서 기면서 돈을 바닥까지 긁어서 가져다 바치든지, 아니면 반국가행위로 처벌받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만든다.
‘전쟁 전에 뺐으니 처벌하긴 근거가 약하겠지만 난 다를 수도.’
이미 난 전쟁을 외친 놈이기에 ‘몰랐어요’ 같은 소리가 안 먹힐 수도 있다.
그렇기에 결론은 하나.
나도 돈을 벌지만, 트집 잡히지 않도록 프랑스에 이득이 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생각보다 실현하기 어렵지 않았다.
“선박 수주 계약서 사본들입니다. 대부분 대형 화물선으로 선박 인도를 프랑스까지 해주는 것으로 완벽히 계약이 끝납니다.”
혹시 파생 상품에서 선물 거래라고 아는가?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래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살 것을 약정하는 거래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난 합법적 선물 거래를 한 셈이다.
“대부분 첫 삽을 뜬 것 같습니다.”
“우리가 대금을 다 지불할 돈이 있나?”
“없지요. 설령 수주해도 문제고요. 저희가 해양 물류에 손대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가 돈이 많아도 계약금까지가 한계. 배라는 게 워낙 비싼 물건이라서 말이지.
근데 문제는, 저것들도 끝까지 건조해서 인도 절대 못 해준다. 그럼 어째? 다시 위약금을 지불하든 나랑 다른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든 해야지. 그도 아니면 계약을 다른 사람이 인수하거나.
“후후….”
세계 3위 선박 건조 국가 미국. 근데 그 국가 혼자서 이제 유럽 전체를 먹여 살려야 하게 생겼네? 과연 내가 주문한 선박 만들 생각이 있으려나? 글쎄요? 설령 가능해도 느그 정치인들이랑 모회사가 그걸 두고 보겠냐고.
“그 외에도 뭐 다 비슷한 내용입니다. 전부 10% 정도 선금을 주고 나중에 잔금을 지불하는 식으로 건조 계약을 맺었습니다.”
혹 나중에 내가 번 돈이 알려진다면?
‘난 전시에 전쟁 물자를 원활히 수입하기 위해 선박 계약을 맺었을 뿐인걸?’
전 재산을 건 애국이었다고. 암, 그렇고말고!
이것이야말로 20세기 코인 아닐까.
꼬까인보다 강렬한 게 끊을 수가 없다.
***
내가 방구석에서 프레드릭과 ‘누가 요즘 시시하게 주식 함?’을 시전하며 우히히거리고 있는 것도 어느덧 10일 가까이 지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죄인 끌고 가듯 어디 이상한 방에 나를 끌고 가더니 다리를 꼰 채로 수많은 서류를 뒤적이는 조사관. 이거 영화에서 많이 보던 그 장면인데. 검사가 밀실에서 범죄자를 압박하는 장면.
보통이라면 벌벌 떨면서 저 서류에 무슨 죄목이 나와있나 생각해야겠으나, 정작 내 신경은 다른 데에 쏠리고 있었다.
‘군사 재판은 기소 과정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재판 시간도 당일 날 바로바로 처리해버린다.’
그럼 재판이 열리는 시간 자체를 뒤로 미루거나 하다못해 행정적 과정이라도 늦춰야 한다.
아무 말도 않고 생각에 잠긴 내 모습에 무슨 오해를 했는지, 조사관은 비웃음과 함께 조언을 건넸다.
“너무 얼어있지 말도록.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으니.”
“그럼 조사하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정해진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지.”
이거 알고는 있지만 새삼 저리 대놓고 말하는 걸 보니 작정들 하셨구먼. 이 정도면 원한에 가까운 보복성 아닌가.
우리 둘의 대화를 기록하는 속기사는 펜조차 들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저거, 내가 처맞아도 눈 감고 있을 놈이다.
“어차피 기록도 안 되는 대화, 하나만 묻죠. 왜 일개 중위의 일탈이라 생각하면서 이리 분노한 겁니까?”
“자네 업보도 있고, 말하자면 본보기 같은 느낌이지. 자네같이 날뛴 놈은 나도 20년 가까이 군 생활 하면서 처음 보는데 기강을 잡아야 하지 않겠나?”
음, 외압은 없었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외압이란, 어중간한 것들이 씩씩거리는 게 아니다.
혹시나 저 높으신 청룡인들이 움직이셨을까 했는데, 그저 아래에서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일로만 봤나 보다.
‘하긴, 얼마나 우습겠어. 이제 막 사관학교 졸업한 애송이와 대독일전쟁 계획을 논하는 게.’
내 전부를 걸고 외친 비명은 역시나 저 위까지 들리지 않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의 대화는 기록될 걸세. 이건 조사임과 동시에 진술이니 거짓 없이 신중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일개 보병 중대를 조사해서 책상에 쌓일 만큼 서류가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긴 하다. 확실히 파비앵 말대로 총기 고장으로 재고 구라 쳤으면 큰일이었겠어.
“내가 확인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두 가지야. 첫 번째로는 군기를 어지럽히는 사상을 퍼트린 것. 두 번째로는 군수품 비리 의혹이야. 첫 번째는 작게 보면 일탈에 가까운 군기 문란이고, 크게 보면 반국가적 사상이네. 자넨 어찌 생각하나?”
이건 뭐 나보고 내 죄목을 선택하라는 것도 아니고 거참. 하나 확실한 건 조사관이 좋게 조사해줄 생각은 없다는 거다.
“질문을 조금만 정확히 해주십시오.”
“진술된 자네의 발언 몇 개만 발췌해서 말해주지. ‘애국심으로 무장? 시발, 그럴 거면 차라리 적군을 유혹해서 살아남는 게 낫겠다. 적어도 적군이 동성애자면 살 확률이 있으니까’, ‘전장에서 제식은 오직 노출증 환자들을 위한 자세다. 적한테 온몸을 내보일 수 있으니까.’, ‘대열 맞춰서 이동? 넌 설마 밤에도 박자에 맞춰서 떡을 칠 건가?’. 이상이야. 더 들려줄까?”
“…아닙니다.”
시발, 조사를 어디까지 한 거야. 저거만 들으면 지휘관이 정신병 걸린 놈이잖아.
조사 들어오기 전에 아래 애들한테 그냥 솔직히 다 불라고 말하긴 했는데, 얘들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나한테 쌓인 게 있는 거니?
“자네 어록이 너무 많아서 조사관 여럿이서 면담만 삼 일을 했네. 상관 모독은 뭐 일상이더만?”
“상관 모독이라뇨?”
“거참, 또 읽어줘?”
다시 서류 더미를 뒤적이던 조사관은 한 장을 쏙 빼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대대장님은 군 생활을 열심히 한 나머지 밤에 안 선다. 그래서 곧게 선 것만 보면 뺏지 못해 안달인데 총열이 너무 동그랗고 곧게 뻗어 있어서 대대장을 자극했다. 그러니 우린 동그랗고 곧게 뻗은 것을 숨겨야 한다. 자네가 부사관들에게 총기 보고에 관해 한 말이야.”
“…….”
“이후의 말은 차마 입에 담기 그렇군. 기관단총의 연사력을 상관의 성기에 비유, 소형포를 굵기에 비유. 자네 나름 점잖은 이로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부대 내에선 입이 거칠군?”
아, 그땐 하도 위에서 쪼아대니까 나도 뒤에서 조금 깐 건데 그걸 또 조사했어? 아무리 솔직히 말하라고 했다지만 배신감이 느껴진다.
“침묵하는 걸 보니 적어도 진술은 사실이군. 계속 그리 솔직해 달라고.”
이번 조사, 느낌이 온다.
내 팬티까지 다 털릴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