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817)
을 위한 세계는 없다-817화(817/817)
EP.817 숲의 사람들. (8)
하늘에서 떨어지는 열 개의 화염검을 본 순간, 여명은 대령을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 하늘을 향해 뛰어올랐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
그건 마을로 쏟아지는 불길을 자신에게 모으기 위한 선택이었고,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마을로 떨어지던 열 개의 화염은 방향을 바꿔, 여명을 강타했으므로.
!!!
몸을 후려치는 마법의 위력은 아찔할 정도였다. 피부, 신경, 근육, 뼈- 육체를 이루는 모든 게 타오르며 감각이 흐려졌다.
당장이라도 변경백 가문의 가전 무술을 쓰고 싶었지만, 여명의 목표는 불길을 자신에게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전신에 급속 냉각을 두르며 불길을 버텨냈다.
이윽고, 프레시외즈의 파도가 그의 피부를 새까맣게 탄화시킬 때쯤.
여명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본과 달라.’
그건 직접 프레시외즈를 맞아보고, 주와이외즈를 계승한 여명이기에 알 수 있었다. 앞서 만났던 외인부대의 프레시외즈와 마찬가지로, 이 녀석들의 프레시외즈는 오귀스트의 원본과 달랐다.
하지만 두 프레시외즈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라헐의 프레시외즈가 일부만 익힌 미완성품에 가까웠다면, 이 녀석들의 프레시외즈는 빈공간에 뭔가를 억지로 쑤셔 넣은 것 같은 이질감이 선명했으니까.
원본의 파괴력만을 따라 한 모조품….
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이미 원본을 가진 그에게 있어, 모조품은 오귀스트가 끝끝내 프레시외즈를 물려주지 않았다는 증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퉤-
말라붙은 피를 뱉어낸 여명은 마을을 돌려 아래를 확인했다. 다행히 일행들은 무사했다. 대령이란 놈도 물탱크 위에 떨어진 덕분에 목숨을 건진 상태였다.
안심한 여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검은 군복의 마법사들을 바라보았다.
‘…엘랑 놈들.’
엘프 사냥꾼 놈들을 구하러 온 건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어느 쪽이건 저런 비정상적인 차원문을 열고 올 정도로 다급한 이유가 분명했다.
‘잡아서 쥐어짜 보면 뭔가 나오겠지.’
여명은 까맣게 탄화된 피부를 털어내며 자세를 잡았다. 직후, 열 명의 블랙 옵스는 또 한 번 가짜 프레시외즈의 주문을 엮기 시작했다.
그에 맞선 여명의 선택은 용사의 무술이었다. 그는 무장 혈청을 양손으로 잡으며 자세를 잡았다.
‘황금 사냥으로 불길을 흘려낸 뒤, 일격에 전부 쓸어버린다.’
스승님과 미리라면 어렵지 않게 다음 불길을 막아낼 수 있을 터. 불길을 받아내는 건 첫 기습으로 충분했다.
여명은 냉정한 태도로 검을 쥐고, 하늘 위에서 열 명의 마법사와 마주했다.
짧은 호흡, 타오르는 마나, 그리고-
발검.
열 자루의 불의 검과 한 자루의 무장 혈청이 동시에 허공에 선을 그렸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열 한 개의 선이 여명은 황금 사냥을 발동-
-하지 못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울리는 낯선 목소리 때문에.
[혈통과 연관된 건 쓰지 마라.]***
…뭐?
검을 휘두르는 찰나 속에서, 여명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하게 여명의 머리를 울렸다.
보고 있다고? 누가?
의아함을 삼킨 여명이 프레시외즈와 마법사들의 뒤편, 차원문을 본 건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하지만 불안정한 차원문 너머, 뭔가의 시선을 느낀 건 필연이었다. 그동안 그를 훔쳐보던 시선과는 또 다른… 닉슨을 닮은 시선.
어째서일까? 그 시선을 보자마자, 문뜩 아버지의 조언이 떠올랐다.
‘용사의 무술은 함부로 쓰지 말거라.’
여명은 본능적으로 황금 사냥을 멈추고, 용사의 무술 또한 천둔 검법으로 바꿔 휘둘렀다.
급격한 변화를 따라 간결했던 동작이 번잡스럽게 늘어나고, 터져 나오던 검기 또한 뒤틀렸다.
그렇게 검을 떠난 불완전한 검기는 그대로 가짜 프레시외즈와 격돌했다.
!!!!
용사의 무술 모조품과 프레시외즈 모조품의 격돌.
둘 다 원본이 비범한 탓인지, 결과는 극적이었다. 마을 위 하늘이 불길로 뒤덮이고, 폭죽 같은 폭발이 연이어 터져 나오며 불의 비가 내렸다.
하지만 여명도, 열 명의 마법사도 상처는커녕 공중에서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언뜻 보면 비슷한 위력의 무술과 마법이 서로 상쇄된 모습으로 보였고, 실제로 마법사들은 그렇게 판단한 것 같았다.
-…예상… 이상…
-…10강… 전투… 손해…
-목표… 우선…
-…확인…
녀석들은 여명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로 뭔가를 쑥덕거리다가, 프레시외즈와는 전혀 다른 주문을 엮기 시작했다.
정확한 능력은 알 수 없었지만, 증폭 수식과 마나를 연결하는 수식이 들어간다는 건 확실했다.
막아야 한다. 그렇게 확신한 여명이 마나를 끌어 올리자,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한 번 더 귀를 때렸다.
[내버려 둬라.]…당신 누구야?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
[나는 너의 편이고, 방해라는 게 아니라 널 돕는 거다.]…내 편이라고? 그걸 어떻게 믿-
그때,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덕배와 제임스가 옐로 하우스 주변을 청소하는 날마다 너를 떼어 놓고 간 건, 그곳의 창녀들이 널 노린 탓이다.]…??
[네가 당구로 춘식이를 처음 이겼던 날을 기억하나? 그건 사실 너한테 용돈을 주기 위해 춘식이가 봐준 거다.]…뭐??
[홍세티는 콩을 싫어하고, 성녀는 양성애자가 아니다.]….
[라쉬크가 가진 물약 중 유일하게 딸기맛이 아닌 물약은 춘약이다. 그리고 파순의 성별은 주인공과 반대로 정해지지. 또한 미리디스의 아공간에는 너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뭇잎 속옷이 있….]…너 뭐 하는 새끼야? 신? 아니, 신성은 느껴지지 않는데?
[다시 말하지만, 너의 편이다. 이렇게 억지로 시간을 끄는 것도 다 너를 위한 거다.]그의 말마따나, 여명이 목소리와 투덕거리는 동안 마법사들이 주문을 완성했다.
열 명이 각자 증폭한 주문을 차원문에 연결한 대형 마법.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명이 반응했을 땐, 이미 차원문이 포효를 내질렀다.
!!!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차원문이 출렁거리고, 주변의 대기가 요동쳤다. 마치 하수도로 빨려 들기 직전의 물처럼 공기가 휘몰아쳤다.
이어진 풍경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고오오오 – !!!!
차원문이 주변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무거나 빨아들였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차원문은 딱 정해진 대상, 그러니까 용병들과 그들의 장비, 버려진 시체, 그리고… 붉은 별의 아이들을 빨아들였다.
-아아악!!
-서기장님!! 살려주십쇼!!
녀석들이 노린 건 붉은 별의 아이들이었나? 뒤늦게 녀석들의 목적을 알아챈 여명이 차원문을 향해 날아갔지만,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차원문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속도가 너무나 빠른 까닭이었다. 어찌나 속도가 빠른지, 빨려드는 용병들끼리 부딪히며 사상자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여명은 순순히 녀석들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차원문과 마법사들을 동시에 토막 낼 생각으로 검기를 모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내 조언하건대, 저 차원문을 내버려두거라. 네 검기가 닿으면, 차원문이 폭발할 것이다.]…그럼 한 번에 싹 다 죽일 수 있겠네.
[그래, 저 아래에 있는 네 일행들도 폭발에 휩쓸려 죽겠지.]그의 말마따나, 사람을 빨아들이는 차원문은 너무나 불안정해 보였다.
이대로 목소리를 무시한 채 차원문을 토막 낼 수도 있었지만…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래선 안 된다고.
결국, 일행의 위험을 감수할 수 없던 여명은 검을 내리고 조금 전 대령에게 빼앗은 펜던트라도 챙기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난 직후.
하늘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의 전투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묵직한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을 만들어낸 열 명의 마법사는 여명이 차원문을 공격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다는 듯, 차원문에 반쯤 몸을 담근 채 여명을 노려봤다.
이대로 놓치긴 아까운데… 여명이 무장 혈청을 쥐락펴락하는 가운데, 목소리가 한 번 더 그를 말렸다.
[길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길에는 끝이 있는 법. 검을 내려라. 저들을 심판할 날은 멀지 않으니.]…그래? 검이 안 된다면, 도발은 된다는 말이지?
[아니, 그건-]목소리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여명은 도망치는 프랑스 놈들을 도발했다.
“오귀스트가 왜 한국인을 후계자로 선택했는지 알겠군.”
“….”
“나치에게 무릎 꿇고, 식민지인들을 학살하고… 기어코 샤를마뉴의 검이 동양인에게 넘어갈 정도로 영락하다니. 롤랑이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겠구나.”
주와이외즈가 언급된 프랑스의 서사시, 롤랑의 노래를 이용한 조롱. 문학적 소양이 제대로 먹혔는지, 마스크에 가려진 마법사들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심지어 개중 한 명은 차원문에서 빠져나와 프레시외즈를 시전했다. 다음 순간,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컴비네이션 건을 뽑아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날아간 총알은 정확히 마법사의 미간을 노렸다. 놀란 녀석이 프레시외즈를 멈추고 보호막을 펼쳤지만, 이미 코앞까지 온 총알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했다.
“크윽!”
녀석의 오른쪽 눈동자에서 피가 튀었다. 죽지 않고 허공에서 휘청거리는 걸 보아하니, 아슬아슬하게 총알을 피한 듯했다.
쯧.
혀를 찬 여명이 다시 사격했지만, 뒤에 있던 마법사들이 우르르 녀석에게 보호막을 씌우며 차원문으로 끌어당겼다.
-붉은 별… 기억하겠다.
손으로 피가 흐르는 눈을 가린 녀석은 마지막까지 여명을 노려보며 차원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렇게 모든 마법사들을 삼킨 차원문이 거칠게 일렁거리는 사이,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작별의 말을 남겼다.
[내 말을 잘 들어줘서 고맙다. 그녀의 아들치고는 성격이 괜찮군.]…뭐? 아들? 내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나?
[아주 잘 알지. 하지만 그녀에 대해 말하기엔 시간이 부족하군. 다음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도록 하지. 나는… 영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영묘? 잠깐!
여명이 목소리를 불렀으나, 목소리는 차원문과 동시에 사라졌다.
***
프랑스의 습격이 끝나고, 엘프 숲의 하늘이 정상으로 돌아온 직후.
땅으로 내려온 여명을 반겨준 건 코르부스도, 미리도 아닌 라쉬크였다.
허리에 손을 올린 그녀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여명, 그거 알아? 내가 도주하는 녀석들한테 추적용 마도구랑 독, 거기다 벌레까지 붙여놨다?”
“….”
역시 라쉬크라고 해야 할까. 여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라쉬크가 당돌하게 되물었다.
“…칭찬 안 하고 뭐 해?”
“잘했어요. 라쉬크.”
“그거보다 더 크게!”
“뭐, 뽀뽀라도 해드려요?”
여명이 그렇게 대답하자, 라쉬크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니 뽀뽀가 칭찬이냐? 그런 거 말고, 성녀한테 하듯이 찬양해 보라고!”
그걸 원하신다면야. 여명은 짝짝짝- 손뼉을 치며 말했다.
“역시 라쉬크 동무! 밥값의 달인이십니다.“
“….”
“이번 달 우수 당원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러다가 중앙당에서 훈장도 받겠어요.”
빨갱이 소리라도 칭찬이면 좋은 건지, 라쉬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나의 유용함을 칭찬하도록.”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짧은 콩트를 주고받은 직후, 여명과 나란히 선 라쉬크는 조금 전 주접이 어디 갔냐는 듯 한껏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나 말고 다른 일행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는 중이야.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모으고 또….”
“또?”
“…숲 인간들을 붙잡으러.”
“….”
그러고 보니, 프랑스 놈들은 붉은 별의 아이들과 엘프 사냥꾼들만 챙겨갔을 뿐, 숲 인간은 건드리지 않았다.
왜지? 녀석들은 공범이 아닌 건가? 아니면 챙길 필요도 없어서?
의문을 삼킨 여명은 라쉬크를 따라 빠르게 마을을 가로질렀다. 이윽고 두 사람이 마을 중앙에 도착하자, 팔이 묶인 마을 상인들이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오셨소?”
어느새 까마귀 형태로 변한 코르부스가 먼저 여명을 발견했다. 어두운 지붕 위에 앉아 있어서 그런가,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더 무섭게 보였다. 물론, 여명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따스한 스승이었지만.
“상태는 좀 어떻소?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 같았소만… 혹, 문제가 있는 것이오?”
조금 전 목소리 때문에 움직이지 못한 걸 보신 걸까, 코르부스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차원문이 폭발할 거 같아서 그런 겁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여명은 그런 말로 스승을 안심시킨 뒤, 미리에게 다가갔다.
팔이 묶인 상인들 옆에 선 미리는 명백히 감정이 실린 거친 손짓으로 상인들을 끌고 가고 있었다.
“미리? 괜찮아?”
“응, 괜찮아. 프랑스 놈들이 숲에 불을 지르고, 쓰레기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만 빼면.”
“….”
평소와는 다른 거친 말투. 그녀에게 끌려가던 숲 인간들은 벌벌 떨며 여명과 미리를 번갈아 바라봤다. 엘프와 숲 인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여명은 그녀를 말리는 대신,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지만, 미리는 여명의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해했다. 상인들을 질질 끌고 가던 그녀는 슬며시 손에 힘을 빼고 상인들이 알아서 마을 중앙으로 가도록 내버려 뒀다.
잠시 후, 미리는 여명의 손위에 손을 포개며 보며 말했다.
“우리 뒤통수를 친 용병들은, 원래 이곳에 주둔 중이던 약초꾼들을 전부 살해하고 약초를 강탈한 녀석들이래. 시체를 치우고 얼마 지나지 않은 타이밍에 우리가 와서 당황했다나 뭐라나.”
“…어쩐지, 녀석들의 방탄복에서 피 냄새가 나더라니.”
“원래 우리를 마을에 들일 생각 없었는데, 용병들이 엘프를 감지했다면서 문을 열고 우리를 받아들인 거래. 분명 엘프 사냥꾼이었던 거겠지.”
엘프 사냥꾼. 고개를 끄덕인 여명은 조금 전 대령이란 놈에게서 빼앗은 펜던트를 꺼냈다. 세계수의 결정이 박힌 마도구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증거였고, 미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엘프 사냥꾼과 프랑스라… 나치랑 일본도 그렇고, 왜 나쁜 놈들은 나쁜 놈들끼리 몰려다니는 걸까?”
“글쎄, 하지만 이번에 녀석들이 동시에 나타난 건, 우연일 확률이 높아.”
“우연? 무슨 우연?”
“프랑스가 노린 건 붉은 별의 아이들이었어. 분명 서기장이 직접 끌고 다니는 강도단의 근원이 자신들이라는 걸 숨기기 위해 블랙 옵스를 출동 시킨 거겠지.”
“….”
“하지만 하필 엘프 사냥꾼들이 우리를 먼저 습격했고… 뒤늦게 신호를 받고 습격에 합류한 게 아닐까 싶은데.”
그럴싸한 해석이었다. 딱 하나만 빼면.
“그러면… 저 상인들은 진짜로 협박 받아서 우리한테 독을 먹인 거다?”
“아마도?”
“그럴 리가. 분명 숲 인간 녀석들도 공범일 거야.”
‘숲 인간’을 언급하는 미리의 말투에서는 노골적인 혐오가 느껴졌다. 엘프와 지구의 평화를 위해 차원문을 넘은 그녀가 이만한 감정을 드러낼 정도라니. 여명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되물었다.
“…숲 인간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데?”
“은혜는커녕 신의나 명예도 모르고, 힘과 돈을 따라 밥 먹듯 배신을 반복하는 쓰레기들.”
“….”
“원래 이 마을에 있던 약초꾼들을 죽인 것도 숲 인간과 엘프 사냥꾼이 손을 잡고 벌인 짓일걸?”
그때, 옆을 지나가던 상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저희는 정말로 협박 받아서 그런 겁니다!”
“….”
소리친 상인을 확인한 미리는 팍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대화에 끼어든 녀석은, 일행에게 직접 독을 먹인 여관 주인이었으니까.
이름이 창크페였던가? 여명은 당장이라도 무기를 뽑으려는 미리를 막으며 물었다.
“증명할 수 있나?”
“그건… 그렇게 무장한 용병들 앞에서 저희 같은 일반인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음식에 독을 넣어서 먹이는 건 할 수 있었겠지.”
“….”
그러자 창크페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여명은 그를 비롯한 상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가 너희 독을 이겨낼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면, 모조리 잡혀가거나 살해 당했을 거야. 그런데도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야겠나?”
그 말을 따라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자, 다른 상인 중 하나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저, 저희도 노동자입니다! 서, 서기장 각하! 부디 자비를…!”
녀석의 행동이 신호가 된 건지, 아니면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거의 모든 상인이 녀석을 따라 무릎 꿇고 자비를 구걸하기 시작했다.
“자비를!”
“정말로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습니다!”
구경하던 일행들조차 정색할 만큼 노골적인 구걸이었다. 푹 한숨을 내 쉰 여명은 미리를 향해 말했다.
“어쩔래? 한 명 한 명 심문이라도 할까?”
“….”
상인들은 미리에게 선택권이 넘어갔다고 생각한 건지, 미리에게도 자비를 간청했다. 그러자 미리는 성녀가 국밥에 깍두기 국물을 부을 때만큼이나 정색하며 말했다.
“자비? 숲 인간이 나에게 자비를 찾는다고?”
숲 인간들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미리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귀에 걸어 놓은 환상 마법을 푼 까닭이었다.
엘프를 상징하는 기다란 귀.
만천하에 귀를 드러낸 미리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살해당한 엘프들의 피가 아직도 숲에 흐르고 있건만, 너희가 감히 자비를 바라느냐? 우리가 너희에게 베푼 자비를 너희가 어떻게 배신했는지, 벌써 잊어버렸느냐? 내가 정녕 그 악행을 다시 말해주어야 하느냐?”
설마 진짜 엘프가 있을 줄 몰랐던 건지, 상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심지어 개중 몇몇은 체념한 듯 눈을 감기도 했다.
대체 숲 인간들이 엘프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나 쉽게 포기하는 거지?
여명은 물론이고 네티와 시리조차 비슷한 의문을 품는 사이, 창크페라는 여관 주인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서기장 각하께 간청합니다! 부디 제 목숨 하나로 끝내 주십시오.”
“….”
“여러분께 독을 먹인 범인은 저입니다. 그러니 저만 죽이시고, 다른 상인들의 목숨은 부디….”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숲 인간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걱정, 불안, 그리고 슬픔.
누구도 입을 열진 않았지만, 여명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창크페란 녀석이 이곳 숲 인간들의 대표라는 걸.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리더라… 여명이 그의 처분을 고민하는 사이, 미리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여명, 여기서부터는 내가 해도 될까?”
“…죽이려고?”
“아니. 다른 생각이 있어.”
여명은 기꺼이 그녀에게 기회를 넘겼다. 그가 슬쩍 옆으로 비키며 길을 터주자, 미리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창크페, 애석하게도 네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다. 다른 숲 인간들의 목숨도 마찬가지고.”
“….”
아니, 죽일 생각 아니라며? 창크페가 질끈 눈을 감는 사이, 미리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희 비루한 목숨보다 가치 있는 걸 내놔라.”
“그 말은….”
살려주시겠단 겁니까? 창크페가 그렇게 묻기도 전에, 미리가 상인들의 얼굴을 싹 훑었다.
“돈은 필요 없다. 너희가 우리의 숲에서 고혈을 빨아 번 돈이 우리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그것은 흡혈귀에게 헌혈 받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 너희가 지불해야 할 건 돈도, 목숨도 아닌 정보다. 우리가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정보.”
“….”
살아날 수 있단 희망 때문인가? 상인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나름대로 쓸만한 정보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최근 불법 약초꾼들이 대량으로 늘었습니다. 장비도 대단하지 않은 게, 꼭 장벽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것 같았습니다.
-데, 데메론드가 숲에 없다는 소문이… 아, 엘프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부터.
-존슨&존슨과 화이자 휘하 군사 부대가 엘프 보호 구역 깊숙한 곳에 베이스 캠프를 지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프, 프랑스 제약 회사들이 최근 장벽의 일부 구간을 구입했습니다. 내년 초부터 병력을 주둔 시킬 예정이라고….
기업들과 국가의 이야기. 그리고-
-세계수의 씨방이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 용병들이 보호 구역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이유가 그거라고….
미리의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자극적인 정보까지.
“잠깐, 세계수의 뭘 찾았다고?”
특히 마지막 정보를 들은 미리가 어찌나 놀랐는지, 정보를 말한 상인의 멱살을 붙잡을 정도였다.
“그 정보, 누구한테 들었어? 당장 말해! 만약 헛소리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줄 알아!!”
미리에게 멱살을 잡힌 상인은 당황한 듯 숨을 컥컥거리며 대답했다.
“조, 조금 전에 쫓겨난 용병단! 그 용병단의 높으신 분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계수의 씨방을 찾았으니, 이제 그분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졌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