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80
00074 거리의 등불 =========================================================================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 월산이 되돌아온 것인가 싶었는지 소화가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월산이 아니라 성국이었다. 소화가 깜짝 놀라 서 있다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으나 성국은 소화를 보지도 못한 듯 지나쳤다. 연락조차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잠시 멈칫한 해경이 성국을 자리로 안내했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성국이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온 봉투를 해경에게 내밀었다. 해경은 그 봉투를 받아들어 열어 보았다. 현장 감식 보고서인 모양이었다. 성국이 코 밑을 두어 번 문지르더니 얼굴을 약간 찡그렸다.
“무어, 전에도 말했던 대로 화재는 영사실 안에서 시작되었답니다. 폭발로 현장이 훼손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문을 억지로 딴 흔적은 없다는군요. 남은 필름을 샅샅이 뒤졌지만 일부러 불을 붙인 흔적도 없답니다.”
해경은 보고서를 유심히 읽다가 철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철구는 여름에는 영사실 안에 필름을 보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영사실이 좁아 온도가 쉽게 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해경은 그 말을 생각하고 있다가 성국에게 물었다.
“영사실에 본래 창이 있습니까?”
성국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랬던 것 같군요.”
“창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아십니까?”
성국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보고서를 가리켰다.
“아마 감식원들이 대략의 도면이나 위치를 그려 놓은 그림이 있을 겁니다.”
해경은 보고서의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대충 극장 건물의 구조와 위치를 표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빠르게 그린 탓인지 형태는 대강 잡혀 있었으나 출입구와 창 등은 제대로 그려 놓은 것 같았다. 해경은 엉성한 도면을 펼친 채 머릿속으로 조선극장의 구조를 그렸다. 영사실이 있는 위치에는 작은 창이 나 있었다. 객석 뒤의 영사실에 그림대로의 창이 있었다면 그 창은 틀림없이 서향의 창일 터였다. 해경이 한참이나 그 도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자, 성국이 헛기침을 했다. 해경은 그 소리에 퍼뜩 얼굴을 들었다.
“아, 네. 무슨 생각을 좀 하느라고요.”
“오늘 온 건 사실 다른 일 때문입니다. 경성제대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허경두 사장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더군요.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의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그 와중에 대리인인 부인 측에 보상 요구가 들어와서……허경두 사장과 부인이 별거 중인 건 알고 있었습니까?”
성국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별거한 지 이미 몇 개월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아무튼 지난번 경찰서로 보상에 대해 물은 자와 같은 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금복 씨에게 한 남자가 찾아와 그 일로 며느리가 몹시 다쳤고 사경을 헤매는 중인데 치료비가 없다며 빨리 보상을 해 달라고 했답니다. 이금복 씨는 수중에 그 정도의 돈은 없어 보험사에 보험금 지급을 요청한 상태인데, 병원에서 허경두 사장의 의식이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답변을 듣고 바로 내일 오전 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조했답니다.”
“보험사기에 대한 혐의는 모두 벗겨진 겁니까?”
“일단 조사 결과 방화의 흔적은 없었고 보험을 든 지도 이미 여러 해라 보험사에서도 보험사기의 혐의는 없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상당히 고액의 보험금을 납부해 왔기에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에도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더군요.”
해경은 성국의 말을 들으며 팔짱을 끼었다. 금복을 의심하려 해도 그녀의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워 별거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뜻밖의 화재로 인한 폭발 사고가 일어났고, 남편이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보험금을 대신 수령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오게 된 것까지 금복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본다면 이해를 할 수 없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도리어 해경에게는 더욱 해결되지 않는 부분들을 남기고 있었다. 해경은 다시 한 번 탁자 위에 펼쳐진 도면에 시선을 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조선극장 직원 중 조찬용 씨라는 분을 만나 보신 적이 있습니까?”
“조찬용? 주임 변사 말입니까?”
성국이 되묻더니 의아한 표정을 했다.
“만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조찬용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극장을 그만두었다고 하던데요.”
“누가요?”
“직원들이요. 보험사기 조사 과정에서 직원들을 불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조찬용이 얼마 전 허경두 사장과 크게 싸운 뒤 극장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순간 해경의 머릿속으로 번뜩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직원 명부를 얻기 위해 하나코를 찾아갔을 때 직원들에 대해 묻자 하나코는 직원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며, 얼마 전 경두가 누군가와 크게 다투고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채 돌아온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성국의 말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그 상대는 찬용일 가능성이 높았다. 직원들이 모두 알 정도라면 상당히 큰 다툼이었을 터였다.
“조찬용 씨의 주소를 알 수 있겠습니까?”
해경이 다급히 묻자 성국이 미심쩍은 얼굴로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그이가 무어 의심스러운 정황이라도?”
성국에게 앞뒤 상황을 설명해 줄 수도 있었으나, 워낙 큰 건이다 보니 실적을 올리는 데 급급한 경찰들에 의해 찬용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해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좀 확인해 볼 것이 있어서요.”
“주소를 얻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워낙 인기 변사니까요. 서에 돌아가서 확인해 본 뒤 전보로 주소지를 발송해 드리지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괜찮은데요.”
“서로 돕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짐짓 한쪽 눈까지 찡긋해 보인 성국이 공연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해경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혹여 사건의 진상과 관련된 것을 알게 되면 꼭 연락을 주십시오. 허경두 사장이 그 꼴이 된 데다 기자들이 몹시 흥미를 보이고 있어 서의 입장이 좀 난처합니다.”
“물론입니다.”
해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경두에게 의뢰를 받은 건이었고, 사실 해경의 목적은 최초 의뢰한 대로 폭발 사고의 진상을 찾아 경두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 나머지 보험사기 투서 건이며 경두의 음독 건 등은 냉정하게 보자면 자신과는 관계없었으니 성국에게 기타 진상을 알려 주고 계속해서 상부상조하는 편이 해경에게도 좋았다.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국을 보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혹시 이금복 씨에게 보험금 지급을 요청했다는 사람들의 신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요청한 부분이라 저희도 잘 모르겠고, 잠시만…….”
성국이 품을 뒤져 작은 수첩을 하나 찾아내더니 손끝에 침을 발라 뒤적였다. 잠시 그러고 있던 성국이 펜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소화가 얼른 성국에게 펜을 쥐어 주자 성국은 수첩의 가장 뒷장에 무언가를 써 갈기고는 그 장을 찢어 해경에게 건넸다.
“보험사의 연락처입니다. 이리 연락을 해 보시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연락처를 받아든 해경은 가볍게 목례를 해 보였다. 성국은 괜찮다는 듯 손을 두어 번 젓고는 모자를 고쳐 쓰며 서둘러 해경의 사무실을 나갔다. 역시나 나갈 때도 소화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이었다. 해경은 닫힌 사무실 문을 한 번 돌아보고는 자리에 앉아 성국이 가져온 서류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소화가 살짝 까치발을 들고 해경의 어깨 너머로 기웃거렸다. 무엇을 그렇게 보고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해경은 서류에 눈을 둔 채 소화에게 물었다.
“영화를 보러 들어간 것이 몇 시인지 기억하고 있습니까?”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던 것 같아요.”
영문을 모른 채 소화가 대답했다. 해경은 서류 위에 그려진 영사실의 창문 위에 손끝으로 원을 그렸다.
“그 날의 날씨는요?”
“몹시 화창했습니다. 해가 잘 났어요. 바람이 선선했고요.”
주저 없이 말한 소화가 조금 더 몸을 옆으로 기울여 해경이 보고 있는 도면을 넘겨다보았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도면과 해경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사실의 창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계신 건가요?”
“이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고 했을 때 소화 양이 만약 방화범이라면 어떻게 불을 내겠습니까? 활동사진 필름은 온도가 올라가면 폭발하기 쉽다는 점을 알려 드리지요.”
해경이 수수께끼를 내듯 묻자 소화가 가만히 그 도면을 보다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남몰래 들어가서 불을 붙인 성냥이나 담배를 살짝 두면 어떨까요?”
“만약 폭발하지 않으면 방화인 것이 너무 쉽게 들통 나지 않습니까?”
해경이 짐짓 놀리는 투로 되묻자 소화가 한참 곰곰이 생각하더니 해경을 마주보았다.
“저, 그러면 창을 가리지 않은 채 닫아 두면 되지 않을까요?”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창이 서향이라 점심때가 지나고부터는 내내 해가 들 것 같아서요. 일전에 서향으로 지은 집에 갔던 적이 있는데 여름이면 더워서 살 수 없을 지경이었거든요. 영사실이 작으니 금방 더워질 것이고, 그러면 그냥 창을 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필름이 폭발할 수 있지 않겠어요?”
손짓을 하며 열심히 설명하는 소화를 본 해경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영민한 아가씨였다. 해경이 방화의 흔적이 없다는 성국의 말에 철구를 떠올린 것은 그 때문이었다. 창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향으로 창이 나면 오후 내내 해가 드는 위치이고, 철구가 여름철에는 절대 영사실에 필름을 보관하지 않는다고 한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 틀림없었다. 창을 열고 커튼 따위로 가려 놓는다 해도 여름철에는 날이 좋을 때라면 일곱 시간 이상 계속해서 해가 들 것이기에 필름이 폭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여름철은 지난 지 한참이었지만 만약 오후 내내 해가 들었다면 두세 시간 정도면 영사실 안의 온도는 충분히 올라갈 것이 분명했다. 만약 해가 드는 자리에 필름을 놓아두었다면 시간은 그보다 더 적게 필요했을 터였다. 해경은 철구가 두 번째 필름을 걸어 놓고는 변소에 갔었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떤 장면에서 폭발이 일어났는지 기억납니까?”
해경의 질문에 소화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요. 르나르가 루이즈에게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여자보다 루이즈가 아름답다고 노래를 불러 주던 장면이에요.”
소화의 기억이라면 확실했다. 완전히 영화에 푹 빠져 두 손을 모은 채 당장이라도 화면 속으로 들어갈 기세였던 소화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되새겨 본 해경은 피식 웃었다. 그 장면이라면 영화의 절반 정도가 지난 때였다. 당시에는 철구가 불을 지르지 않았다는 데 집중했기에 그의 말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따져 볼 여유는 없었으나, 앞뒤를 맞추어 보면 철구의 말에는 빈틈이 있었다. 자리를 비우고 변소에 가자마자 폭발한 것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일부러 성냥 따위를 던져 넣어 폭발시킨 것이 확실하겠지만, 만약 자신과 소화가 생각한 대로 창의 방향을 이용해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면 철구가 자리를 비운 것은 최소한 삼사십 분 정도는 될 것이 분명했다.
한 시간 반을 넘는 영화라면 대략 필름 아홉 권에서 열 권 정도가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사기는 각 권의 필름을 이어 붙여 권을 교체하지 않고도 계속해서 영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영화의 중간 정도에 폭발이 일어났다면 다섯 번째 권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을 테고, 철구가 자리를 비운 것을 문책할까 두려워 말을 꾸며냈다면 두 번째 권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영사실을 나간 것은 시간상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철구는 자신이 있을 때 영사실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고 했으니, 범인은 철구가 자리를 비운 약 삼사십 분 정도의 시간 사이 필름에 창으로 들어온 햇빛을 쏘여 폭발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했다. 철구에게 사실을 확인해야 했다. 해경은 손에 들고 있던 보험사 연락처를 소화에게 건넸다.
“소화 양, 힘들지 않다면 이곳으로 연락을 해서 이금복 씨에게 보험금을 요구한 사람들에 대해 좀 알아봐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잠시 확인하러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네, 그럼요.”
소화가 선뜻 해경의 손에서 수첩을 찢어낸 종이를 받아들었다. 해경은 소화가 그 종이를 확인하고 전화기로 향하기도 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섰다. 금복이 당장 내일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게 된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택시를 잡아탄 해경은 삼청동으로 향했다. 삼청동에 도착한 해경이 철구의 집을 찾아 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철구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철구가 대답도 듣기 전 문을 열었다. 대낮부터 술 냄새가 훅 풍겼다. 얼굴을 찌푸리며 해경을 올려다 본 철구가 눈을 껌뻑이다 해경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오오, 허 사장이 보낸 탐정 양반? 여기는 또 웬일입니까? 범인이 잡혔답니까?”
술 냄새가 진동하기는 했지만 많이 취한 것은 아닌 듯 발음은 또렷했다. 해경은 철구를 내려다보았다.
“윤철구 씨, 제가 찾아왔던 날 제게 하신 말씀은 전부 사실입니까?”
철구가 주섬주섬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으나 해경은 문 앞에 선 채 물었다. 물론 여전히 정중하기는 했으나 묘하게 날카로운 어조를 알아차렸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던 철구의 몸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해경은 다시 한 번 철구에게 물었다.
“제게 하신 말씀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전부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건 왜…….”
해경은 어물거리는 철구의 말을 끊으며 내뱉었다.
“필름의 두 번째 권이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 변소에 갔는데 곧 폭발이 일어났다고 했지요. 하지만 폭발이 일어난 건 필름의 일곱 번째 권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가 아닙니까? 삼사십 분 정도 자리를 비우신 것 같은데 그 사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해경이 대문 안으로 한 발 들어서며 더 강하게 밀어붙이자 철구가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내, 내가 두 번째 권이 걸렸을 때 변소에 갔다고 했다고요? 아닐 겁니다, 잘못 기억하고 계신 거겠지요. 일곱 번째 권이라고 제대로 얘기했을 텐데요.”
일부러 놓은 덫에 철구는 너무나 쉽게 걸려들었다. 해경은 팔짱을 끼었다.
“아니오. 실제로 폭발이 일어난 건 다섯 번째 권이 돌아갔을 때입니다. 두 번째 권도 일곱 번째 권도 아니지요. 거짓말을 할 생각은 그만두고 바로 대답해 주십시오. 자리를 비운 건 사실이지요? 왜 그렇게 오래 자리를 비웠습니까?”
갑자기 찾아와 혼을 쏙 빼놓는 해경 탓에 철구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눈을 굴렸다. 변명거리를 찾는 모양이었다. 해경은 등 뒤로 손을 돌려 열려 있던 대문을 닫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경찰은 없습니다. 이 일로 윤철구 씨를 문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진범을 찾는 데 아주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어디 계셨습니까?”
해경의 말에 철구가 닫혀 있는 사랑채 문을 돌아보았다. 안에서 밭은 기침 소리가 쿨럭거리며 새어나왔다. 그날 본 철구의 조모가 틀림없었다. 노파의 목소리가 장지문을 넘어 들려 왔다.
“철구야, 누가 왔니?”
“아, 아니에요, 할머니. 그저 아는 동무가 잠시 와서요.”
문에 대고 목소리를 높여 대답한 철구가 반쯤 열린 자신의 방 안을 가리켰다. 조모가 들을 수도 있으니 안에 들어가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해경은 철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한 방 안에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한데 뒤엉킨 채였다. 철구가 십오 촉짜리 전등을 켰으나, 그나마도 수명이 다 했는지 간헐적으로 깜빡거렸다. 철구가 해경과 마주앉은 채 초조함에 마르는 입술을 축이다 물었다.
“담배 한 대 피워도 됩니까?”
해경은 대답 대신 얼마든지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철구가 떨리는 손으로 궐련갑을 집어 들어 마지막 남은 궐련 한 개비를 빼어 입에 물고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으로 연기를 뱉은 철구가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 날 두 번째 권을 걸고 삼사십 분 정도 자리를 비웠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순희와 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순희?”
낯선 이름에 해경이 그 이름을 되풀이하자 철구가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잠시 말이 없던 철구가 궐련을 몇 모금 더 빨다가 화로 가장자리에 비벼 껐다.
“하나코 말입니다.”
해경이 멈칫하며 철구에게 되물었다.
“하나코 씨와는 끝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아휴, 이것 참…….”
철구가 어찌할 바 몰라 하며 다시 빈 궐련갑을 집어 들어 털어 보고는 더 이상 궐련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고는 해경의 소매를 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경찰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지요? 이건 진범을 찾는 일과는 관계없으니 이 일에 대해서는 허 사장에게 입도 벙긋하지 말아 주십시오. 허 사장에게 말하면 나도 순희도 모두 죽습니다.”
해경은 대답 대신 철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철구가 거의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순희와 나는 결혼 약속을 한 사이입니다.”
철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해경이 눈썹을 좁히자 철구가 끙,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땡전 한 푼 없는 처지라……순희가 허경두 사장의 첩이 된 것은 애초에 나와 작당하여 꾸민 일입니다. 부러 여배우처럼 꾸미고 자주 극장에 들락거리게 하여 사장의 눈에 띄게 만들었고 첩으로 들어갔지요. 허 사장이 눈엣가시가 된 나를 해고하려 했지만 순희가 해고할 필요 없다고 해 극장에 계속 들어앉아 있었던 겁니다. 애초에는 부인을 쫓아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사장이 뜻밖에도 순희에게 몹시 빠져서……재산이나 좀 뜯어 도망갈 생각으로 시작한 일입니다. 그 날도 순희가 나를 몰래 불러내 사장이 극장을 개편한 뒤에 자기 몫으로 얼마를 떼어 준다 했다고, 돈이 생기면 자기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가자는 이야기를 하러 왔던 것입니다. 차편은 자기가 마련할 테니 할머니를 모시고 몸만 오라고요.”
해경은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하나코를 떠올렸다. 철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그녀는 분명 묘하게 동정적인 구석이 있었다. 철구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던 까닭이 이 때문이었을까. 해경은 잠시 생각하다 철구에게 물었다.
“하나코 씨가 허 사장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철구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니오, 무어 잘 알 것이라고는……거의 하루 종일 사업 문제로 집을 비우고 저녁에나 들어온다 했습니다.”
“하나코 씨는 본인 때문에 허 사장이 부인과 별거한 건 알고 있었지요?”
철구가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극장 직원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습니다. 사모님은 사업에 간섭을 하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 달에 한 번쯤 직접 들러 극장 구석구석 살피기도 하셨고, 별거를 시작한 뒤로도 간혹 극장에 들르시기는 했습니다. 조 변사의 팬이라서 그렇다고…….”
해경은 철구의 입에서 나온 조 변사라는 말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찬용 주임 변사를 말하는 거지요?”
“네, 맞습니다. 워낙 인기가 좋은 이니까요. 작년 휴관 때도 직원 대표로 일했는데 휴관을 풀고 월급을 지급하게 된 것도 사모님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사모님이 힘을 써서 그랬다고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소문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들은 철구가 저도 모르게 아이구, 하고 중얼거렸다. 무언가 아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해경이 대답을 기다리자 철구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어, 전에 순희가 한 번 말한 적이 있습니다. 조 변사와 사모님이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있다고요. 나는 그런 말 하지 말라 했지요. 사모님도 그럴 분이 아니고, 조 변사도 신혼인데 남의 가정을 파탄 낼 일 있느냐고요. 나는 그 일에 대해서는 전연 모릅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내저은 철구가 누가 들을까 무섭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찬용과 금복의 불륜 소문을 하나코가 알고 철구에게 말할 정도였다면 극장 내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거의 다 알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해경이 철구를 마주보았다.
“영사실에 창이 있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듯 멈칫하던 철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걸림쇠가 고장 나 열리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평소에는 천으로 막아 두었습니다.”
“천을 걷으면 해가 잘 듭니까?”
“서향이라 오후 내도록 들지요. 청소하는 이가 실수로 걷어 두었다가 한 번 화재가 일어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영사실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누구지요?”
철구가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열쇠를 가졌으면 누구나 드나들 수는 있습니다.”
“그 날 극장에서 사모님을 보신 적 있습니까?”
철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요. 극장에 오시지 않은 지 한 달쯤 되었습니다.”
“조찬용 씨를 보신 적은요?”
“잘 모르겠습니다. 왔을 수도 있겠지요. 직원들과 사이가 좋아서 극장을 그만둔 뒤로도 가끔 들르곤 했습니다.”
해경은 철구의 말을 들으며 금복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러 극장 구석구석을 살폈다는 철구의 말을 떠올렸다. 그랬다면 극장 내에 어디든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날 금복이 찬용에게 영사실의 열쇠를 주었다면? 해경은 젊은 남자가 영사실의 문을 열고 창을 가린 커튼을 걷어 놓은 뒤 다시 감쪽같이 사라지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극장을 빠져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뇌리를 지나쳐 갔다. 이제 남은 건 한 사람이었다. 조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