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202
202
서로가 얼마나 아픈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는 묻지 않았다.
미소가 오간다. 따뜻한 눈길이 오간다. 말없는 가운데 수만 마디의 말들이 오간다.
“손 좀 잡아줘요.”
해과월은 비비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천하무적 고수가 되셨네.”
비비가 해과월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
또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약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과월은 만검(萬劍) 앞에 자신을 내놨다.
이문장이라는 넓은 초원에서 만 천하에 대고 해과월이 여기 있다고 소리쳤다.
비비는 안으로 숨었다. 기무영이라는 신분으로…… 그것도 죽음이 확실한 인검의 기무영이 되어서 무림에 나섰다.
서로가 만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만났다. 두 사람이 아무 위험도 없는 곳에서 서로 손을 맞잡고 있다.
“어떻게 기무영이 될 생각을 했어?”
“어차피 가가는 떠났으니까요.”
비비에게는 절망 밖에 없었다. 홍화문 소문주라는 위치나 기무영이라는 위치나 그녀에게는 똑같았다.
“가만…… 꼬박꼬박 말을 높이고 있네?”
“당신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이런 몸도 괜찮다면……”
해과월은 피식 웃었다.
웃음…… 그것이면 됐다. 두 사람 사이에 웃음보다 더 깊은 표현은 없다. 또 애정 표현을 잘 하지도 못한다. 이런 종류의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오랜만에 옛 정인을 봤는데…… 속상했죠?”
“속상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괜히 그럴 것 같았어요. 그녀가 잘 됐다면 좋았을 텐데.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으니까. 아니, 이제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으니까. 저 같으면 많이 속상했을 거예요.”
“연민이 없을 순 없지.”
“그것밖에 없어요?”
“뭐가 더 있어야 하나?”
“그래도 옛 여인인데…… 요염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고.”
“하하! 질투하는 거야?”
“아뇨. 가가는 지금 내 앞에 있잖아요. 제가 왜 질투해요? 안아줘요.”
“몸이…… 괜찮아?”
“누워있다고 정말 환자 취급하시네.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왔다고요. 진기도 충만하고.”
해과월은 누워있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병아리처럼…… 약간만 힘주어 안아도 부셔져 버릴 것 같은 여린 몸이 푹 안겨들었다.
“고생했다.”
“당신도요.”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이 순간이, 서로를 안고 있는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쟁취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행복이 점점 멀어진다. 고통만 가중된다. 그러니 행복을 일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밭을 갈아야 한다. 무엇이든 해야만 한다.
“혼인하겠습니다.”
해과월은 단호했다.
“비비와 상의한 일인가?”
홍화문주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혼인을 방해하던 장애물은 모두 제거되었다.
비비는 자신 스스로 기무영의 삶을 택했다. 그리고 인검에게 존재가 발각되는 순간, 기무영의 삶도 끝났다.
홍화문에서 그녀의 위치는 사자(死者)다. 이미 죽은 여인이다.
그녀에게 또 다시 소문주라는 굴레를 덧씌울 수는 없다. 기무영의 삶을 강요할 수도 없다.
해과월이 말했다.
“어머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비비는 저의 아내라고. 혼인이라는 의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겠습니다.”
“……”
홍화문주는 즉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해과월이 너무 단호해서 설혹 그녀가 반대하더라도 혼인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또 막을 명문도 없다.
그래도 그녀는 숙고했다.
톡! 톡! 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쿡쿡 찍는다.
그녀의 고심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다.
도대체 홍화문주는 무엇을 고민하는 것일까?
한참만에야 문주가 말했다.
“절차를 거쳐야겠지. 열흘 후에 하도록 하게.”
비비는 침상에서, 그것도 어머니에게 혼인 소식을 들었다.
“혼인요?”
“몰랐…… 구나.”
“몰랐어요.”
“호호! 그 아이에게 그런 면이 있었네. 저돌적인 면이 있었어. 매력 있다.”
“어머니!”
“허락했다. 열흘 후에 혼례를 치르기로 했으니까 몸이나 추슬러. 첫날밤에 합방은 해야지.”
“어머니, 안 돼요. 그 사람이 한 말은 잊어버리세요. 그 사람 제 멋대로인 거 알잖아요.”
비비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얼음처럼 딱딱했다. 두 눈에는 눈물도 그렁그렁 맺혔다.
홍화문주가 비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일생에 한 번 뿐인 혼례다만…… 서로 간에 예를 갖출만한 입장이 아니니 냉수 한 그릇 떠놓고 치르기로 했다. 그리 알고 섭섭해 하지 마라.”
손이 따뜻하다. 너무 따뜻하다. 그렇구나. 어머니에게도 인간의 피가 흘렀구나. 홍화문주로써가 아니라 어머니로써 잡아주는 첫 번째 손길은 너무 따뜻했다.
“어머니, 안 돼요. 제가 그 사람을 만나볼 게요. 어떻게 혼인을 혼자서 해요? 이런 말은 한 마디쯤 상의부터 했어야지. 제가 좋대요? 전 그런 말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만!”
“어머니!”
“그만! 그만 됐다. 됐어. 된 거야. 호호! 철부지 어린애인지 알았더니 다 컸구나. 예쁘게 컸어. 내 딸이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 왜 몰랐을까? 호호호! 이젠 시집보내도 되겠어.”
홍화문주가 맑게 웃었다.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
해과월의 단언은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와 비비의 혼인은 연정(戀情)에 구속되는 선례가 된다. 홍화문도가 사내를 만나서 사랑하고 혼인을 하는 금기 중에 금기가 깨지게 된다.
차후, 연정에 들뜬 문도들은 비비가 걸었던 길을 걸을 것이다. 자신 스스로 기무영의 삶을 택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사랑을 얻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게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감당할 수 있나?
이 일은 단순한 선례에서 그치지 않는다. 예외를 만들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한 번의 예외는 두 번의 예외로 이어진다.
이번에 이런 예외를 만들었다면, 다음에는 다른 예외를 만들어도 무방해진다. 합당한 이유만 존재한다면.
홍화문주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비비가 펄쩍 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한 사람의 혼인은 홍화문을 궤멸시킨다.
“어떻게 할 셈이냐?”
귀사령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할 셈이세요?”
“나야 뭐……”
귀사령주의 눈길이 어두웠다.
귀사령은 살 길이 없다. 무림에 나설 수도 없고, 은거할 수도 없다. 검을 버리고 도주할 수도 없다. 평범한 양민이 되어서 땅을 일구며 산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은 음살문의 표적이 되었다.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항상 죽음의 굴레가 씌워질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홍화문도 마찬가지다.
인검이 물러갔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그들은 한 번…… 그렇다. 한 번 물러났을 뿐이다. 인검은 언제든 다시 돌아온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공격해 올 사람은 많다.
그들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홍화문주가 말했다.
“홍화문을 존속시킬 이유가 없어요.”
“뭐라고!”
“이번 기회에 정리하려고요. 호호호!”
“으음!”
홍화문주는 웃었고, 귀사령주는 신음했다.
홍화문 정도 되는 음문(陰門)에게는 정리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멸문이나 몰락은 존재하지만 그들 스스로 정리할 수는 없다.
‘싸움을 생각하고 있구나. 물러서지 않을 생각이야.’
탕! 탕! 탕……!
홍화문에 ‘분란’이라는 불씨를 던져 넣은 당사자는 태연하게 망치를 두들겼다.
그는 검을 만든다. 한시도 쉬지 않고 강렬하게 일한다.
저벅! 저벅! 저벅!
성난 발걸음이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해과월에게 다가왔다.
“말 좀 해!”
“나왔구나. 몸은 괜찮아? 그래, 누워있기만 하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더 좋아. 무리는 하지 말고.”
“말 좀 해!”
비비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어! 반말?”
“반말이고 존대고 말 좀 해.”
비비가 해과월의 손에서 망치를 뺏어들었다.
“안 돼. 이거 지금 멈추면 버려야 돼.”
“버려, 그럼!”
비비는 기어이 망치를 빼앗아 대장간 한 구석에 홱 집어던졌다.
그때, 해과월이 비비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비비는 그 한 마디에 얼음처럼 굳어졌다. 성난 망아지처럼 씨근거리던 열기가 확 사라졌다.
“우리가 혼인하면 모두 좋게 될 거야. 걱정하는 게 다 날아갈 거야.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듯이. 비비,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두고 보자. 날 믿어. 그리고…… 우리 사랑하잖아.”
해과월의 표정은 진지했다.
혼례 전날, 마흔두 명의 여인들이 비비에게 대례(大禮)를 했다.
“종주(宗主)!”
대례를 한 여인이 토한 일성(一聲)이다.
그녀는 홍화문에서 사두(師頭)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스무 명의 교두(敎頭)를 이끄는 사부 중에 사부다.
그녀와 스무 명의 교두, 그리고 그녀들이 멸문 후를 대비해서 양성한 스물한 명의 기무영이 비비에게 대례를 취했다. 그리고 종주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무슨 소리야! 종주라니!”
비비가 토끼눈이 되어서 물었다.
“문주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이 순간부터 기무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녹슨 철검으로 쓰시던 보검으로 쓰시던…… 저희를 어떻게 쓰시느냐는 종주님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사두는 비비의 교두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기무영의 무공을 가르쳤다. 기무영의 술법을 전수했다. 기무영의 삶을 주입시켰다.
그런 그녀가 제자였던 비비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이미 결정을 내렸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례 전날, 해과월은 여덟 명에게 검례(劍禮)를 받았다.
“귀사령은 혈채(血債)를 잊지 않는다. 피 한 방울 빚졌으면 열 방울로 받아내는 게 귀사령이다. 인검은 우리 피를 취해갔다. 그러니 이 혈채를 반드시 받아야겠다.”
귀사령주가 검례를 취하면서 말했다.
“됐습니다.”
해과월은 웃었다.
그는 귀사령의 선택을 짐작했다. 이들이 방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다. 그리고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귀사령주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짐작했나?”
“짐작했습니다. 받아들입니다. 또 거절합니다.”
“……?”
“령주님의 뜻은 받아들입니다. 귀사령을 마음껏 쓰겠습니다. 하지만 수하니 뭐니 하는 말은 거절합니다. 제게는 곁에 있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 장로를 말한다.
그들은 해과월과 함께 있다. 하지만 본문이 있기 때문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해과월의 뜻이 아무리 좋더라도 본문에 반하는 일을 행한다면 거절하기 위해서다.
“그들처럼. 그 정도면 됩니다.”
귀사령주와 일곱 명의 귀사령, 그리고 해과월 사이에 뜨거운 눈빛이 오갔다.
“우리도 선택해야겠군.”
백운진인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일여화상은 염불만 외웠다.
그들의 선택은 매우 어렵다.
음살문의 뿌리는 마(魔)에 있지 않다. 정도 무림에 있다. 정도 무림 곳곳에 그들의 뿌리가 드리워져 있다. 전 무림에 걸쳐서 광대하게 분포되어 있다.
기무영이 비비를 종주로 모셨다.
종주…… 문파를 창건한 주인.
홍화문을 완전히 등지고 비비를 새로운 뿌리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귀사령이 해과월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들은 예상했던 바이다. 홍화문이나 귀사령에게 어떤 선택이 남아있겠는가. 다른 선택을 할 수나 있겠는가.
정작 선택을 해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다.
“클클! 난 해과월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놈이 하는 행동은 정당했어. 클클! 놈이 비비에게 한 말이 있잖아.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자며?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자고. 설마 정당함을 쫓아가는데 나쁜 쪽으로야 흐르겠어?”
적화자가 술병을 들이키며 말했다.
음살문의 뿌리만 생각하면 안 된다. 비성검문도 생각해야 한다.
그 사실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 음살문과 비성검문은 전단(戰端)의 양대 축이다.
해과월은 그 양 축을 모두 적으로 삼는다.
무림 문파 중 어떤 문파가 어떤 식으로 휘말려들까? 어떤 식으로 망가질까?
그들에게는 답답한 하루였다.
날이 밝고, 남여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니고 있는 옷 중에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맑은 정화수 앞에 섰다.
“아미타불!”
일여화상이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흔히 혼인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한다.
정말 새로운 시작이다. 이들에게나, 무림에게나. 그리고 이미 폐문(閉門)을 선언한 홍화문에게나.
3
사람이 없다!
운벽슬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희귀한 상황에 저억이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