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eirs RAW novel - Chapter 113
119
순간 하운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리엘라가 뭐라고 한 거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에 하운은 대답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자신처럼 씻고 이제 잠이 들려고 했던 것일까. 머리카락의 끝이 살짝 젖어 있었다. 게다가 가까이 가면 언제나 맡을 수 있었던, 풀잎 향이 섞인 꽃향기도. 그녀의 가게 안에 언제나 가득 차 있던 향기이기도 했다.
하운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아직 발갛게 물들어 있는 얼굴, 보송해 보이는 겉옷. 그리고 안에 입은 얇은 잠옷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곧장 하운은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무, 무슨 일인데….”
독을 먹은 것도 아닌데 혀가 굳고 몸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얇은 옷을 입고 있음에도 갑자기 목덜미가 뜨거워지며 더워진 것 같았다.
“잠깐이면 돼요! 시간 많이 빼앗지 않을게요!”
하운이 곤란해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리엘라가 다급하게 말했다. 곤란하긴 했다. 리엘라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복도를 불안한 눈빛으로 보던 리엘라는 하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재빨리 문을 탁 닫아 버렸다. 더욱 짙어진 향기 때문에 하운은 다시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모습에 리엘라는 제 팔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다. 비누 냄새 밖에 안 나는데?’
그런데 왜 하운이 저렇게 비료 냄새를 맡은 사람처럼 멀찌감치 물러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다짜고짜 늦은 밤에 방에 들어선 무례까지 저질렀으니 할 일은 해야 했다. 리엘라는 하운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저에게 고개를 숙이는 리엘라의 모습에 이상하게 하운은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 정도 도와준 걸로 이렇게까지 고마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저 제가 도와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주었으면 했다. 그래도 되는 사이처럼. 그 말을 하면 리엘라가 이상하게 볼 것 같아 하운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야.”
사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었다. 처음 다뤄 보는 종류의 보석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전투에 특화된 보석술사였다. 다른 세밀한 조절이 가능하다고 해도 익숙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보석의 힘을 끌어내는 것은 자신이 했지만 그것이 너무 높은 온도로 올라가거나, 혹은 내려가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절한 것은 루시안이었으니까.
하운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조금 더 잘났으면 루시안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 탓에 도와주러 온 루시안에게 하루 종일 싸늘하게 대하고 말았다. 그가 리엘라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지.
다시금 속이 끓는 하운을 눈치채지 못한 채, 리엘라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다들 힘내서 정리할 수 있었어요. 꽃도 나무도 다 지킬 수 있었고요.”
환하게 웃는 리엘라를 보며 하운은 자신이 지킨 것이 꽃과 나무뿐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거… 꼭 오늘 일의 보답은 아니지만 감사 인사하는 김에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그제야 하운은 리엘라가 손에 무엇인가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리엘라가 머뭇거리면서 그에게 내민 것은 긴 은줄이 걸려 있는 은색의 로켓(locket, 안에 사진 등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상자 형태의 장신구)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을 주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운은 손을 내밀었다. 리엘라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바닥 위에 로켓을 내려놓았다. 꽉 쥐고 온 탓인지 금속제의 로켓은 리엘라와 같은 온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건?”
“열어 보세요.”
하운은 로켓을 잡고 열어 보려고 했지만 큰 그의 손은 작은 로켓의 여닫이 부분을 쉽사리 열지 못한 채 미끄러졌다. 아마 피곤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좀처럼 로켓을 열지 못하자 답답했는지 리엘라가 손을 뻗었다.
“……!”
거침없이 자신의 손을 덮어 오는 작은 손에 하운은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사이 리엘라는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달칵.
작은 소리를 내며 로켓이 열렸다. 할 일을 다 마친 손이 멀어지자 하운은 행사장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아쉬움을 느꼈다. 리엘라가 다가왔다가 멀어질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이제 매번 이래야 하는 걸까. 그건 너무 힘든데.
“하운 님?”
리엘라가 부르는 소리에 하운은 정신을 차렸다. 지금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하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 위의 로켓을 바라보았다. 무엇이길래 이 시간에 와서 이것을 건네주는 것인지 궁금했다.
옆으로 열린 로켓에는 얇은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유리 너머에는 하운도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빛나는 꽃…?”
정확히는 꽃잎이었다. 얇게 눌려 잘 말려진 노란색의 꽃잎. 그것은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빛을 품고 있었다.
“잎이 떨어지고 나면 빛을 잃어버리잖아요. 그래서 혹시나 싶어 열심히 말려 봤는데 처음에는 빛나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사라지더라구요. 그래도 계속해서 해 봤는데 다행히 이 두 장은 빛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었어요.”
“…….”
하운은 로켓 안에 들어 있는 꽃잎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마도 이것들은 사용하기 전까지 이 빛을 그대로 갖고 있을 것이다. 손대면 순식간에 바스러질 정도로 작고 약하지만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강한 것.
하운이 놀란 얼굴로 꽃잎을 바라보자 리엘라가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왜 그동안 저에게 한 번도 이걸 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빼앗아 가시지 않을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한 힘을 가졌는데, 그대로 사라지게 내버려 두느니 달라고 한 번쯤은 부탁하실 법도 했잖아요.”
리엘라의 말대로였다. 살면서 한 번 보는 것도 힘든 빛나는 꽃이다. 만약 들판에서 찾았다면 정신없이 달려가 손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엘라에게는 다른 자들을 조심하라고 했을 뿐 그대로 빛이 사라지면 아까우니 줄 수 있겠냐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 것이 아니라서.”
“네?”
“이건 그대가 호슨 공작에게 선물한 꽃이야. 그대가 특별히 아낀 꽃이라 이렇게 빛날 수 있게 되었지. 그리고….”
하운은 잠시 말을 멈췄다. 복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달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마음이 있었다. 자신이 리엘라에게 선물했던 엘피안 꽃.
하운은 그것이 이 노란 꽃만큼이나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운은 지금 제가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았다.
‘어이가 없군. 이미 세상에 없는 아흔 살 노인, 그것도 여자를 질투하게 될 줄이야.’
농담처럼 말할 수 있는 질투가 아니었다. 하운은 정말로, 제가 리엘라의 안에서 호슨 공작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했다. 그녀가 이성의 감정이 아닌 존경과 우정의 감정을 호슨 공작에게 가지고 있음에도 양보하기 싫을 정도로.
“아니야. 어쨌든… 정말 고마워. 이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잘 알고 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운이 입을 다물자 리엘라는 이리저리 하운을 살폈다.
하운은 보기 드물게 무척이나 피곤한 모습이었다. 네아가 말하기를 가성비가 최악인 보석이라고 했었다. 갖고 있는 힘이라곤 열기를 내뿜는 것밖에 없으면서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큰 힘이 드는 보석이라고.
그래서 행사장에 있을 때부터 하운을 흘끔거리고 살폈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내색이 없어서 괜찮나 보다 싶었는데 행사장을 나오고 사람들의 시선이 줄어들자 빠르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택에 도착할 때쯤에는 조금 비틀거리는 모습까지 보였고.
그 모습이 잠을 자려고 누워도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그저 괜찮냐고 물어보기 위해 찾아가기는 망설여졌다. 그래서 리엘라는 서랍에 넣어 두었던 로켓을 들고 하운의 방으로 향했다. 이것을 핑계로 하운의 상태를 보고 싶어서.
피곤해 보이는 그를 이렇게 붙잡아 둔 것은 미안했지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궁금한 것도 물어볼 수 있었으니까.
리엘라는 방을 둘러보았다. 하운이 오기 전에는 공작저에 있는 많은 방 중에 하나였던 곳이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방이었는데 지금은 하운의 무겁고 부드러운 체취가 제가 보내 두었던 꽃의 향기에 섞여 방 안에 가득했다. 마치 하운의 품 안에 있는 것처럼.
이 방에 처음 들어와 보았지만 리엘라는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조금 더 머물렀다 가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했다. 하운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보였으니까. 대신 리엘라는 이곳에 어떻게 해야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곧, 리엘라는 방법을 찾았다.
“저번에 주셨던 엘피안 꽃 있잖아요. 그거 이제 빛이 더 강해졌어요.”
아무리 바빠도 매일 직접 물을 주고 잠들기 전에도 꼭 살펴보고 자는 꽃이다. 덕분인지 그것 역시 점점 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그게 완벽하게 빛나면 또 가져올게요.”
그럼 꽃을 들고 다시 하운을 찾아 올 수 있겠지. 리엘라는 더욱 열심히 엘피안을 돌봐야겠다 다짐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볼게요. 오늘은 푹 쉬세요.”
인사를 하며 리엘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때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이 풀어져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순간, 하운의 손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리엘라는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꽃잎은 욕심 없는 하운 님께 드리는 제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시구요. 그럼 전 이만 갈게요!”
하운이 뭐라 하기도 전에 리엘라는 몸을 돌렸다. 풀린 머리카락이 둥근 궤적을 그리며 하운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짙어 아찔하기까지 한 향기에 하운은 나가는 리엘라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문이 닫히고 리엘라의 걸음 소리가 멀어졌을 때, 하운은 손을 들었다. 조금 전 리엘라의 머리카락이 스쳤던 자리였다.
만지고 싶었다.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을, 그 머리카락 아래에 있는 부드러운 뺨을. 입술을. 그리고….
‘욕심이 없다고?’
리엘라가 남기고 간 말에 하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자신은 보석술사이고, 보석술사에게 탐욕은 미덕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리엘라가 스쳐 지나간 자리까지도.
23. 욕심
하운은 눈을 떴다. 여전히 쏟아지는 비가 창문을 두드리고, 습기를 머금은 나무가 내뿜는 특유의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그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하운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계속해서 보다 쥐고 그대로 잠들었던 로켓 목걸이가 그의 손에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로켓을 밀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노란색의 꽃잎들이 보였다. 어제 보았던 그대로 연한 빛을 내뿜고 있는 꽃잎들.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로켓을 닫자 그 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네.”
혹시나 빛이 새어 나오면 놓고 다니는 방법을 선택했을 텐데, 이러면 계속 갖고 다닐 수 있다. 하운은 일어나 씻은 다음 목걸이를 걸어 보았다. 아무래도 리엘라가 저를 생각해 긴 줄을 달아 준 것인지 일반 목걸이보다 훨씬 긴 덕분에 로켓은 하운의 가슴까지 내려왔다.
그는 그것을 셔츠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차피 남에게 보여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혼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된다.
‘쓸 일은 없겠군.’
어젯밤, 리엘라가 제 손에 이것을 쥐여 주었던 모습이 생각났다. 로켓을 열 때 닿았던 체온도, 숨소리도, 표정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선물을 주고받았던 아주 짧은 시간이었을 뿐, 잠시 손이 닿았던 것 이상의 접촉은 없었다. 하지만 하운의 머릿속에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제 가슴을 더듬었다. 손끝에 만져지는 로켓의 감촉에 하운의 입가가 올라갔다.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편하게 웃게 된 것을 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기다리면 될 것 같고.’
리엘라는 제가 선물한 엘피안이 호슨 공작에게 선물했던 노란 꽃처럼 완벽하게 빛나게 되면 전부 그에게 주겠다 말했다. 하운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 꽃이 빛날 날을 기다리고 싶었다.
하운은 마저 옷을 걸친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한계까지 힘을 쓴 다음 씻고 푹 잔 덕분인지 허기가 몰려왔다. 지금 식당으로 가면 멜다 부인이 정성껏 차린 아침 식사와 함께 리엘라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식당으로 향하기 전, 하운의 발걸음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르가 최고예요! 사랑해!”
들려오는 리엘라의 목소리에 얼굴 가득했던 하운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