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apon-eating bastard RAW novel - Chapter (364)
무기 먹는 서자님-364화 (완결)(364/364)
무기 먹는 서자님 364화
전쟁은 끝이 났다.
멸망이 사라졌음을 모두가 느꼈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빛을 되찾았다.
태초의 괴수가 가렸던 하늘에는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고, 몬스터들은 겁에 질린 듯 제각기 서로의 자리로 도망쳤다.
세상은 피폐해졌다.
멸망이 남긴 잔여물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들, 그것이 남긴 흔적이 복구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대지는 갈라졌으며, 국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모두가 나아갔다.
각자의 삶을 향해서.
그렇게 빛을 발하면서.
* * *
대한민국, 중부 지역.
그곳에는 하나의 가문이 존재한다.
투쟁을 숭상하며,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무인의 가문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몇 번이고 무너졌으나, 언제나 찬란한 영광과 함께 돌아왔던 그들을, 세상은 그렇게 불렀다.
숭무이가(崇武李家)라고.
“야야! 거기 얼른 치워라!”
“정신없어! 정문 공사 말고 일단 연무장부터 치우란 말이야! 아무리 재건이라지만, 무가에서 다른 곳부터 치우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숭무이가는 전란의 상처를 부지런히 하나둘 복구해 나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숭무이가의 부지는 생각보다 크게 망가져 있지는 않았다.
아니, 물론 처참하게 무너지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전투가 일어났던 땅은 이쪽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괜찮은 편이라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집채만 한 덩치를 가진 한 여인이 중얼거리며, 거대한 철근 수십 개를 동시에 어깨에 올리고 움직이는 놀라운 기예를 선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이진윤.
무광이라는 이명 대신, 불퇴(不退)라는 이명을 갖게 된 숭무이가의 자랑스러운 무인이었다.
……분명 그럴 텐데.
“가주라고 제 누나를 이렇게 막 부려도 되는 것이냐? 재학이는 돈놀이 하느라 안에 있고, 가주라는 놈은 어딜 훌쩍 떠나 버리고. 나는 이게 뭐냔 말이다. 제기랄! 썩어 빠질! 빌어먹으으으을!”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여인은 저속한 욕을 내뱉으며 철근을 획 던져 버렸다.
“으아아악! 누님! 무슨 짓입니까!”
“야, 야! 굴러간다! 잡아! 잡아!”
넷째와 다섯째, 이현재와 이현찬이 비명을 지르며 이진윤의 뒤치다꺼리를 해 갔다.
한편,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일단의 사람들이 허허, 낮은 웃음을 흘렸다.
“참, 숭무이가스럽군요. 원로원주.”
“총관께서도 그리 느끼셨소?”
“허허허.”
“허허허…….”
이태홍과 이동영은 찻잔을 기울이며 가만히 담소를 나누었다.
“그래도 진윤이는 워낙 과격한 면이 있으니 말이지요. 서현이는 그나마 좀 얌전한 편 아닙니까? 이제는 성검주(聖劍主)라는 이명까지 받았…….”
이태홍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잇던 그때.
“야 썩을! 이철 이 싸가지 어디 갔어! 나보고 청소나 시켜? 죽인다! 가주고 뭐고 죽인다! 이 새끼 어디 갔어!”
본가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아아, 숭무이가.
그 찬란한 투쟁의 이름이여.
대체 이 가문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정신이 없군요. 싸울 줄밖에 모르는 밥버러지들. 재건 비용에 구멍이 미친 듯이 많이 뚫려 있습니다.”
금검, 이재학은 두 원로에게 결재 서류를 가져오며 그렇게 말했다.
이제 본가의 재정을 담당하게 된 그의 말에 이동영이 허허 웃었다.
“그건 그렇고, 가주께선 어딜 가신 겁니까? 몸도 성치 않으시면서…….”
“못 들으셨습니까? 대공자와 함께…….”
숭무이가는 그렇게, 오늘도 분주했다.
* * *
중국, 구룡성채.
장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죽거리듯 입을 삐죽 내밀고,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장한이 이를 갈았다.
“지금, 이 자리를 내놓으란 말씀이십니까?”
“옳지. 잘 알아들었구나. 나는 네게 그 자리를 물려준다 말한 적이 없거든.”
“그 싸움 동안 싸돌아다니다 이제야 돌아와 놓고! 채주 자리를 내놓으라니 말이 됩니까!”
“하하하!”
구룡성채의 전대 채주, 철위성과 장한이 마주하고 있었다.
“……대체 어딜 가셨던 겁니까?”
“재미를 좀 보고 왔지. 뼈아픈 손해를 보긴 했다만.”
철위성은 슥슥 자신의 가슴어림을 문질렀다.
무언가 상처가 있는 것인지, 장한은 철위성의 마력 흐름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건지는 보고 계셨습니까?”
“물론이다.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미친놈.
장한은 목젖까지 올라온 그 말을 삼키느라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많은 준비를 해 놓았다. 숭무이가. 이제는 넘어야 하지 않겠느냐?”
철위성이 뱀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움찔 몸을 떤 장한이, 가느다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가문엔 그 녀석이 있지 않습니까.”
“그 녀석은 이제 문제가 아닐 텐데? 대관절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다더냐?”
“……아마도.”
장한은 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 * *
교국, 교황청.
그곳에는 대대적으로 시성식(諡聖式)이 거행되고 있었다.
“……고로, 세계를 지킨 칸나타 가문의 후예, 세레나 칸나타를 시성(諡聖)하여, 성녀(聖女)의 자리에 봉함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새롭게 교황이 된 프란시스 추기경이 뭇 사제들과 방문객들의 앞에서 그렇게 선포했다.
그의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듯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레나 칸나타가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새로운 그리스도의 검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영원히 주님을 섬기며, 성경에 적힌 뜻대로 만방에 복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오른 그녀였다.
시성식이 끝나고 연회가 열렸다.
그것은 위령제이자, 축제였으며, 신께 드리는 감사와 사죄의 미사였다.
전후의 우울을 가리기 위한 성대한 축제의 밤.
그 축제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세레나 성녀에게 크리스티나 성녀가 다가갔다.
“그는 오지 않았더구나.”
“바쁘겠지요. 누가 뭐래도, 세상을 구한 영웅 아닙니까?”
“괜찮겠느냐?”
돌연 툭 튀어나온 크리스티나 성녀의 물음에, 세레나는 그저 밝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예, 마음은 이미 정리했습니다. 저는 그의 좋은 친우가 되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크리스티나 성녀에게 환한 미소를 보인 세레나는, 다가온 친우를 맞이했다.
“세레나 성녀님.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록 다른 교파를 믿고 있으나, 성녀가 되신 것에…….”
“……론은 날이 갈수록 느끼한 말만 느는 것 같아요. 저희 친구 아니었나요? 서운하게 격식 차리는 거예요?”
“크흠! 그런가요?”
“그리고 인사라면 제가 해야겠지요. 러셀 ‘대공’ 전하.”
세레나 성녀가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영국에 대공(大公)이 등장했으니, 다름 아닌 세계를 구한 영웅 중 하나, 이스트그로우 공작가의 론 러셀이었다.
그는 그저 맑은 미소를 지었다.
“뭘요. 이철은 절 밍기적대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라고 욕하던데요.”
“지중해에서 1급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는 걸 들었어요. 교국이 이탈한 전선에서 시민들을 지키느라 바빴다면서요.”
“예, 뭐…… 그래도 늦은 건 사실이니까요.”
“어찌 됐든 대공의 첫 외부 공식 행사가 제 성녀 임명식이라니. 영광이네요.”
“뭘요. 물론, 세레나는 제 임명식에는 안 오셨지만…….”
론이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잠깐의 대화 후, 둘은 연회장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론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의 힘이 필요하겠죠. 우리들의 세상을 회복시키려면.”
“……많이 힘들 겁니다. 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진짜 어려운 일은 어쩌면, 지금부터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이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 사내가 보여 주었던, 그 빛을 본 자들이라면 모두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거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머나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 * *
대한민국의 북동쪽, 어느 항구 도시.
과거에는 수많은 배들과 항만 시설이 있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린 땅에 일단의 사람들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만 마리의 몬스터 사체가 늘어진 탓에, 이제는 미개척지대가 되어 버린 지역이었다. 그래서 군에 의해 민간인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사람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거길 통과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야, 통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려 세계를 구한 영웅.
숭무이가의 당대 가주, 이철.
인류의 구원자이자, 전 세계 모든 무인들의 정점이었으니까.
“후우.”
나는, 그 바닷가였던 곳에 선 채 먼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옆에 따라붙었던 첫째 형님이 숨을 몰아쉬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예, 괜찮습니다. 이 정도로 우는소리를 할 순 없죠.”
나는 씩 웃으며 첫째 형님의 손을 잡고 붕괴된 파괴의 흔적을 뛰어넘었다.
“그럼, 다녀오세요. 당신.”
그 무렵 뒤편에 서 있던 아나스타샤가 싱긋 웃으며 날 배웅해 줬다.
“잠깐. 당신이라니. 지금 뭐라고……?”
아나스타샤는 또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뒤로하고 첫째 형님의 뒤를 따랐다.
“결국 저분과 이어졌구나?”
“아, 예, 그렇게 됐습니다.”
“잘 어울리는구나.”
“감사합니다.”
나는 첫째 형님과 함께, 맑은 하늘 아래에서 폐허를 뚫고 걸어갔다.
무수히 많은.
그야말로 한없이 많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펼쳐져 있었다.
전투의 흔적이었다.
태초의 괴수와의 마지막 싸움으로 이 세상의 모든 흑기가 소멸했으나, 몬스터들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고, 당연히 사체도 남았다.
몬스터들은 마치 신비종들처럼 이 세계의 일부인 모양이었다.
위험은 여전하지만, 인류는 언젠가 몬스터를 넘어설 것이다.
‘본가의 무사들은…… 찾을 수 없겠지.’
나는 지독한 시취를 느끼며, 콧가를 찡그렸다.
여기서도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들의 죽음이, 우리의 삶을 이어지게 만들어 주었다.
우우웅!
그 순간, 첫째 형님이 내 주변에 마력을 퍼뜨려 주었다.
시취가 차단되며 조금 더 숨 쉬기가 편해짐을 느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첫째 형님을 바라보았다.
“……괜찮으냐.”
첫째 형님이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연히 괜찮지요.”
“네가 이룩했던 그 모든 게 사라졌는데, 정말 괜찮은 것이냐?”
“…….”
첫째 형님의 말에도 나는 그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첫째 형님의 말대로였다.
나는 마지막 싸움에서 모든 힘을 잃었다.
태초의 괴수를 베었던 그 일격은 내가 이룩한 모든 기적적인 힘을 대가로 펼친 것이었다.
태초의 괴수라는 세계의 섭리와 구조를 뒤바꾸는 일격이다.
아무런 대가가 없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잃은 건 되찾으면 될 뿐입니다. 아마…… 오래 걸리진 않겠죠.”
그릇을 빚는 것이 어렵지, 채우는 건 어렵지 않다.
나는 오히려 기대가 됐다.
뚜벅, 뚜벅!
두 형제의 걸음 소리가 폐허를 가로질렀다.
첫째 형님이 마력과 힘을 잃은 내 보폭을 따르느라 조금 시간이 더뎠다.
그럼에도 우리는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끝내, 어떤 땅에 도달했다.
“아버지.”
아버지의 최후가 있었던 자리.
그 위대한 전장에.
* * *
그곳에, 아버지가 있었다.
내리쬐는 볕을 맞으며, 평온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계셨다.
한쪽 팔이 없었고, 한쪽 다리가 없었다.
몸 어디에도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평온하게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앉아 계셨다.
후우우웅…….
그리고 바람이 불어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버지의 등 뒤에서 불어온 바람이 우리 두 형제를 지나 흘러간다.
-어서 오거라.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고 무감정한 그 목소리가 들린 듯하다.
“예, 아버지, 늦어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첫째 형님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잠시 미소를 짓고, 아버지의 앞에 공손히 자리했다.
“막내야.”
“예.”
예를 갖췄다.
술을 올리고, 검을 올리며, 천천히 절을 한다.
한 번 몸을 숙이고.
다시 한번 몸을 숙였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다시 일어섰을 때.
“……!”
내 눈앞에 비치는 광경이 변해 있었다.
환상이 펼쳐졌다.
절대적인 무력을 선보이는 이휼현과,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막내야?”
순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린다.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 세상은 원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평온한 표정을 짓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그리고,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마주했던 이휼현에 대해 생각한다.
이휼현은 수천 년 동안 결코 이루어져선 안 될,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해서도 안 될 독을 품고 망집을 쌓아 올렸다.
그의 그 바람에 희생된 본가의 무사들과 본가의 패도에 쓸려 나갔을 삶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버지는.
이태신이란 사내는, 그 마수를 걷어 내고자 했다.
아버지는 태초의 괴수 이전에 이휼현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겠다는 사명을 가진 분이었다.
잦은 외유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천명.
아버지의 천명은, 이휼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수천 년의 망집은, 자식들을 구하겠다는 한 아비의 바람에 의해 막힌 것인가.’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이휼현을 막아선 이유를 깨닫는다.
숭무이가의 가주로서도 아니고, 무인의 호승심도 아니고, 대의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나와, 첫째 형님의 아버지로서.
그토록 거대한 걸 꿈꾸며 외도의 길을 걸었던 이휼현의 계획은, 고작 한 아비의 바람에 의해 막혔다.
‘그리고…….’
뒤를 돌아 먼 하늘을 바라본다.
기어코 집착만이 남아 영체만으로 달려든 이휼현.
그리고 그가 마주한 것은, 이경화였다.
가족을 향한 고모의 사랑이, 그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낸 것이었다.
이 얼마나 기구한 것인가.
아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인륜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이휼현이 가진 수천 년의 망집이든, 태초의 괴수든, 그게 아닌 그 무엇이든.
고작 인간이 자연스레 가지고 있는 감정에 의해 막히는 법이었다.
‘……앞으로.’
나는 속으로 조심히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숭무이가를, 다시 영광스러운 위치로 올려놓겠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다짐이자, 아버지를 향한 다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투쟁을 통해 가문에 드리워진 마수를 걷어 냈다.
그것은, 그저 정상화일 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번성하고 이어 나가야 한다.
그 역할은 후대가 해야 한다.
당대의 가주인, 내가.
“수습하자.”
그때, 내 상념을 걷어 내며 묵념을 끝낸 첫째 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큰형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이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첫째 형님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나는 가져온 수건을 꺼냈고, 첫째 형님은 시신을 안치할 관을 꺼냈다.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아버지의 몸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후우우웅…….
불어오던 바람이 아버지의 몸에 닿았다.
“아…….”
그저 산들바람일 뿐이건만, 그 자그마한 바람에 아버지의 몸은 먼지가 되어 저 맑은 창공을 향해 날아갔다.
“우리들이…… 마음의 짐을 덜기 바라셨던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버티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나는 첫째 형님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참. 드디어, 자유로워지신 건가.”
첫째 형님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우리 사이에 흘러나왔다.
맑은 하늘이다.
아버지의 자유로운 여행을 위해선, 더할 나위 없는 날이었다.
* * *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한다.
폐허가 되고 부서진 세상 위에는 또다시 희망이 꽃피고 있다.
곳곳에 사람들이 저마다의 할 일을 찾아 또다시 삶을 가꾸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이겠구나.’
멸망은 사라졌고, 전쟁도 사라졌으나, 세상에는 많은 상처가 남았다.
태초의 괴수에게 말했듯, 이제부터 이 행성 위의 모든 생명들은 치열하게 투쟁하며 저마다의 삶을 꽃피워야 할 것이다.
예전부터 그래 왔듯, 앞으로도 영원히.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삶을 이어 갔다.
땅끝까지 번성하고, 저 하늘 높은 곳을 선망하면서.
과거의 사람들이 후대를 위하여.
의지가 의지로, 삶이 삶으로 이어지면서.
어쩌면, 내가 겪은 이 모든 이야기도 먼 훗날에는 낡은 역사책의 한 구절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든 말든, 우리는 채워 나갈 뿐이다.’
내가 모든 마력을 잃었지만 새로운 걸 채워 나가려 하듯, 세상도 비어 버린 그릇 안에 새로운 세계를 채우게 될 것이다.
“기대가 되네요.”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제부터 시작될 찬란한 삶의 빛들이.
그런데.
“또 뭘 기대한다는 거예요. 이철? 제발 좀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붙어 있어 주세요!”
나도 모르게 생각을 중얼거린 것일까.
버럭 소리친 아나스타샤가 날 놓지 않겠다는 듯 내 손을 콱 움켜쥐었다.
“안 그래도 지금 옆에 있잖아요?”
“그래요. 이철도 이제 일반인이나 다름없잖아요.”
“……그 정돈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빠르게 예전의 무위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게다가 단련된 육체 또한 그대로였다.
“하, 그럼 또 강해진다고 돌아다니겠네요. 하지만 안 돼요. 저 이제 홀몸도 아니니까 어디 가지 마세요.”
“당연히 아나스타샤는 제가 지켜드릴 겁…….”
잠깐.
내가 뭘 들은 거지?
“헉!”
“쿨럭!”
호위 겸 차를 운전하던 철령대주 이영성.
앞 좌석에 앉은 첫째 형님.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자, 잠깐. 아나스타샤. 지금 뭐라고…….”
내 당황하는 모습에 아나스타샤는 귀엽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내 손을 자신의 배에 가져다 댔다.
“아이가 있어요. 이철과 나의 아이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내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렇게 이어지는 건가?’
그리고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숭정최가의 피.
숭무이가의 피.
그리고 아나스타샤가 가진 정령의 피까지.
태어날 아이는 어떤 아이일까?
아이야. 네가 살아갈 삶은 어떤 삶일까?
“도, 도착했습니다. 가주님, 가모님, 대공자님.”
이영성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거의 도망치듯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
그때였다.
“가, 가주님!”
“가주님! 돌아오셨습니다! 살아 있으셨어요!”
차 안에서 걸어 나온 나와 첫째 형님, 그리고 아나스타샤에게 일단의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난리법석을 치며 떠들어 대는 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모. 유모가 말해 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가 살아 있었다니?”
“살아 돌아오셨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순간.
나는, 놀란 눈으로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나의 친우이자.
나의 스승이자.
나의 가족인 사람.
“아가!”
그 사람이 달려왔다.
나를 꽉 끌어안는 그 감촉을 느끼며, 나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본다.
그곳에, 숭무이가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무기 먹는 서자님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