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7 Koryo III Corps RAW novel - Chapter 136
136. 금지된 사랑(2)
금지된 사랑.
그랬었군.
그렇지 않고서는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다.
서윤이 보이는 행동이나 말투는 첩첩산중의 산골에서 배우지 못하며 살아온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야 앞뒤가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다.
서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저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에게, 그리고 저의 서방님이 되어 주신 분에게 감추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맞다고 여겼습니다.”
이 말이 서두였다.
서방님이라.
정하연은 태영의 요구 때문에 서방님이라는 표현을 한 적이 없는데, 그 말을 들으니 전기에 감전된 듯한 느낌에 몸이 오글거리는 것 같았지만, 뭐 괜찮다.
“제가 살아오는 동안, 개경이란 곳이 있는 줄도 몰랐고, 어머니께서도 말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대장님을 만나기 전까지 아버지 외에 몸을 기댈 수 있는 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서두를 그렇게 시작한 서윤의 아픈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미는 너무나 예쁘고, 너무나 착하기만 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양반집 규수였다.
나들이를 나간 어느 날, 크고 사나운 개가 꽤 많은 사람을 해쳤는데, 그 개가 어미에게 덤볐고, 뒤를 따르던 노비인 행랑 댁과 그녀의 아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개를 막았다.
행랑 댁은 서윤의 어미에게 덤비던 그 개 앞을 막고 서서 대신 물렸고, 행랑 댁의 아들은 자신의 어미를 물어뜯는 개와 사투를 벌였다.
관군들이 와서 개를 창으로 찔러 죽일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다쳤고, 그 중에는 현장에서 죽은 아이도 있었다.
행랑 댁과 아들이 목숨을 걸고 보호한 덕분에 어미는 상처 하나 없었다.
대신, 행랑 댁의 아들인 노비는 팔과 종아리, 그리고 가슴을 물리는 상처를 입었고, 그보다 더 심하게 물린 행랑 댁은 열흘이 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어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치고, 어미를 잃은 노비인 행랑 댁의 아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미는 마음씨가 너무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비의 상처가 나아지고 있는지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찾아가서 확인했고, 갈 때는 늘 좋은 약과 좋은 음식을 가지고 갔다.
자주 찾아가다 보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걸 몰랐다.
행랑 댁 아들인 노비가 다시 일어서서 움직이기까지 한 달 이상이 걸렸고, 일을 다시 할 수 있을 때까지 회복하는 데는 두 달이 걸렸는데, 그사이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터 버린 것이다.
뻔한 클리셰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어미는 양반집 딸, 아비는 그 양반집의 노비.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 사이는 갈라놓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신분의 벽은 높고도 험했다.
양반집에서 두 사람 사이를 알았을 때, 이미 어미의 배 속에 오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결말이 필요했던 두 사람은 결국 사랑을 택했고, 야반도주를 결행했다.
그리고 도주에 도주를 거듭하여 간 곳이 제비골이었다.
태영은 인터넷에서 글로만 본,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의 스토리가 있었다.
양반 댁 아들이 너무나도 예쁜 노비 여인을 사랑하였지만,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다른 곳으로 팔려 간 이 노비 여인을 잊지 못해, 이 여인을 찾기 위해 추노꾼이 되었다는 드라마.
현대를 살아온 태영은 체감하기 어려웠지만, 이 시대로 날아와서 살아 보니 신분의 벽은 태영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태영의 영향으로 사포가 특이한 경우이지, 개경에서 그랬다가는 그 노비는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 21세기 사회라고 신분의 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감성과는 많이 다르다.
이 시대는 법으로 신분이 다르다고 정하고 있고, 21세기는 평등하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현대에서는 그 벽으로 인한 차이가 더 치욕적이고 더 비참하다.
드라마에 나올 정도이면, 신분이 다른 남녀가 사랑의 도피행을 하는 일은 제법 있나 보다.
지금 이 경우처럼.
그런데, 서윤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이제 1라운드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 더 큰 시련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미의 미색은 그 누구든 한 번만 보면, 어느 남자라도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게 고왔다.
어미를 본 제비골 남자들은 아비가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미의 몸을 원하거나 아비를 버리고 자신의 첩으로 오기를 강권했다.
두 사람이 야반도주할 때 가지고 나온 패물들은 도주 비용으로 일부를 사용했지만, 그래도 논 몇 마지기는 충분히 살 수 있을 만큼 값비싼 물건들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비골에서 쌀 한 되와 보리 한 되에 넘어갔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금반지 하나에 쌀 한 되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비싸고 귀한 것이라고 말을 해도, 제비골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작은 일거리라도 달라는 말에, 자신과 하룻밤을 자면 일을 주겠다든지, 어미가 소실로 들어오면 먹을 것을 주겠다고 했다.
동네에서 힘깨나 쓰던 사람들이 행한 횡포였다.
값비싼 패물을 받아 가고, 쌀 몇 섬을 주기로 약조했다가 다음 날 와서 쌀 한 되 값으로 다시 정리하고 갔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는지, 잠시 마을을 떠나 있던 한 사람이 돌아와서 이 말도 안 되는 행패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서윤의 어미에게 추파를 던지고 협박하는 사람들을 단속해서 그 이후부터는 가난하기는 해도 평안하게 살았다.
그러나 귀하고 비싼 패물들은 헐값에 이미 그들의 손을 벗어난 뒤였기에 극도로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봄에 그가 노령으로 세상을 떠났다.
통제가 사라지자, 과거의 행태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고, 아이 셋을 낳고 힘들게 일하며 고생을 했음에도 어미의 미모는 제비골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여전히 그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행패는 이제 어미보다 더 아름다운 여인이 된 서윤과 어미 두 사람에게 동시에 가해졌다.
일찍이 그런 행패를 보지 못했던, 오라비와 서윤은 아비와 어미에게 다른 고을로 이사 가자 했지만, 어디를 가도 이방인은 같은 꼴을 당한다며 참고 살아야 한다고 했단다.
그래도 2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낸 이곳이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라는 부모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비와 어미는, 지금도 여전히 도망자이기에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서윤은 몰랐다.
지난해 초여름, 아버지가 문경에 다니러 간 사이에 산비탈을 일구어 만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마을 사람 셋이 어미를 겁탈했다.
남자의 완력은 하나도 감당이 안 되는데, 셋의 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어미는 목을 매달았다.
세상에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지만, 아무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고 했단다.
그러나 그 일을 계기로 가을이 되기까지 한동안 잠잠했단다.
가을이 깊었던 어느 날, 서윤을 노린 청년들이 월동 준비를 위해 나무를 해 오는 서윤의 오빠, 동생, 서윤 이렇게 세 사람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공격을 했다.
여기서부터는 그 동네 사람들이 자기변명을 하는 과정에서 태영도 들었던 이야기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와 서윤의 이야기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그때, 서윤과 동생은 도망을 치고 오라비가 막았지만, 상대는 신체 건장한 남자 넷이었다.
동생이 달렸지만 한 청년이 발을 걸어 넘어트렸다. 마을 사람들은 굴렀다고 했지 발을 걸었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이 말하는 차이는 큰 것이다.
제가 도망치다가 구른 것과 발을 걸어서 넘어지며 구른 것의 차이이지 않은가?
경사가 가파른 곳이었기에 동생은 넘어지면서 산비탈을 굴러 내려갔고, 돌과 나무에 부딪쳐서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어지는 처참한 사고가 났다.
서윤은 동생이 비탈을 구르는 모습에 너무나 놀라, 도망치던 것을 멈춘 사이에 한 청년에게 뒷덜미를 잡혔고, 오라비는 다른 두 청년과 싸움이 붙었다.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를 듣고 아비가 왔을 때, 동생은 이미 의식이 없었고 온몸은 피로 물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라비는 그사이에 한 청년의 칼에 옆구리를 찔렸다.
아비의 개입으로 싸움이 끝나고, 동네 사람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했다.
동생은 달리다가 나무뿌리에 걸려 제가 넘어져서 다친 것이고, 오빠가 자기들에게 덤비는데 그럼 맞고 있으란 말이냐며 억지를 부렸다.
그때 입은 상처로 인해 고통 속에서 겨우 숨만 쉬던 동생은 사흘 후에 죽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골절상이면 내출혈도 심했을 텐데, 사흘간을 앓았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오빠는 마을 청년의 칼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가 안으로 곪았다.
상처 자리에서 계속 피고름이 나오고, 의원이 없는 동네이니 생활에서 얻은 민간요법이 전부였겠지만, 약초를 구해서 상처에 바르며 치료를 했으나 배가 점점 불러 왔고, 그렇게 두 달을 앓다가 죽었다.
죽을 때는 얼굴도 부었지만 배는 평소의 두 배쯤 부풀어 있었단다.
몸 안이 모두 고름으로 가득 차서 그랬을 것이다.
그 일로 오빠와 동생을 잃었다.
오빠와 동생 두 사람은 아마도 사람으로서는 견뎌 낼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 갔을 것이다.
관아로 찾아가서 고하자는 서윤의 요구에 아비는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도망자의 신분으로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때의 일로 얼마간 또 잠잠해졌다.
춥고도 긴 겨울이 지나는 동안 조용하더니 올봄에 또 시작되었다.
“그때, 대장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서윤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의 끝을 그렇게 맺었다.
서윤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덮였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흘린 눈물, 말을 이어 가기 힘들 정도의 격한 감정과 심적 고통에 괴로워했지만, 이야기를 모두 마쳤다, 하, 때려죽일 놈들이네. 아니, 잘근잘근 짓이겨서 죽일 놈들이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것도 한마을에 사는 사람을?
말도 안 나오고, 한숨도 안 나왔다. 분노로 인해 온몸이 떨려 왔다.
그 정도로 벌해서는 안 되는 것을, 지은 죄에 비해 벌이 부족했다는 것을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었다.
***
“진짜, 대장님이 개인 훈련시키시는 겁니까?”
군복에 베레모까지 갖추어 입은 서윤의 모습이 제법 군인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김윤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서윤이 입은 군복은 김윤경이 가진 여벌의 군복이었다.
서윤이 김윤경보다 키가 꽤 크기에 발목이 쏙 나오고, 윗도리는 바지의 혁대 부분을 겨우 가릴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체형이 날씬해서 몸에 잘 맞았다.
은자 한 냥이면 2벌은 지을 수 있을 텐데, 몸에 맞지도 않는 저 옷을 주고 은자를 열 냥이나 뺏어 갔다.
그나마 몸에 맞을 만한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비싸게 사시든가 아니면 사포에 가서 군복을 가져오시든지 하라며 배짱을 부렸다. 물론 장난이지만.
그래서 에라, 너 먹어라 하면서 열 냥을 더 얹어 주었다.
금오위 훈련장 한곳을 열흘 동안 빌렸다.
“넌, 학당에 안 가고 여기 와 있어도 되는 것이냐?”
“제가 할 수업은 오후에 시작하니까, 지금은 여기 있어도 됩니다. 진짜 개인 훈련시키실 모양이네, 부럽다, 부럽다, 부럽당, 부럽당, 부럽당, 나도 요기에 좀 끼면 안 돼요?”
코맹맹이소리까지 해 가며, 부럽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태영의 옆에 붙어 섰다가, 서윤의 옆에 붙어 섰다가 아주 오두방정을 떤다.
“너는 정규 훈련 과정을 다 마친 놈이 왜? 훈련 좀 제대로 받고 싶으면 유격 훈련 보내 줄까?”
“아, 절대, 유격 훈련은 절대, 저어어어얼대 안 갑니다. 아~후, 거기 다녀온 사람들이 다시는 안 가고 싶은 것이 유격 훈련이라던데.”
“나한테 와서 자꾸 엉기면, 올여름 유격 훈련에 너를 편성하라고 할 거야.”
“흥, 쳇. 대장님은 실장님밖에 모르더니 이젠 서윤이 밖에 몰라. 같이 훈련받는 거 핑계로 좀 엉겨 보려 했더니 바로 눈치 까시네.”
하여간 저놈 저거 말투하고는.
쟤는 21세기 현대 사회에 데려다 놓으면 남자들 꽤나 후리고 다니며 잘 살 거야, 아마.
삐친 모습을 보여 주고는 하인을 대동하고 훈련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재미있다.
태영은 기본 제식과 소총 사격, 그리고 권총 사격을 7일 동안 가르쳤다.
총소리에 놀라서 깜짝깜짝 뛰던 아이가 이제 충분히 적응되었고, 정확도도 꽤 높아졌다.
스피릿을 꺼냈다.
“권총과 비슷한데 아주 작아 보입니다.”
“맞다. 그렇지만 권총보다 훨씬 강력하고, 또한 소리도 나지 않는다.”
서윤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중에 설명을 추가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단 두 자루만 있는 무기이다.”
“혹시, 다른 하나는 실장님이 사용하나요?”
“맞다.”
태영이 서윤에게 사격을 가르치고 스피릿을 손에 쥐어 준 이유는 간단하다.
태영은 개경에 있을 시간이 길지 않다. 가을에 오겠지만, 그사이에 서윤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무리 금오위가 호위를 한다고 해도 스스로도 방어해야 한다.
“혹시 긴급한 일이 생겨서 무기를 사용해야 할 때라도, 가능하면 네게 이 무기가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내보이지 않아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대장님.”
권총이나 소총은 크기로 인해 어쩔 수 없지만, 스피릿은 옷 속에서도 얼마든지 사용이 가능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시대에 와서 함께한 두 여인에게 스피릿이 각각 한 정씩이었다.
처음에, 제비골에서 이 아이를 그놈들에게서 구할 때는 몰랐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지.
어쩔 수 없이 이 아이를 여기 두고 가야 하지만, 혼자 두고 간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려 온다.
***
최세헌에게 가을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금오위의 장군들과도 인사를 했다.
최세헌은 태영이 서윤과 작별을 하는 그 자리에 따라왔다.
“금오위 호위를 2배로 늘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대장님.”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닙니다.”
“……압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서윤을 개경에 두고 떠나는 마음을 짐작한 최세헌이 동감한다는 듯 말했다.
“서윤아.”
“네, 대장님.”
“마음 강하게 먹어야 한다.”
“네, 그리하겠습니다.”
대답하는 서윤의 표정에 약간의 그림자가 보였지만, 표시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영이를 자주 보내서 말동무도 하고, 적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혼인 후 함께 살고 있는 딸 이영이를 종종 보내겠다는 말은 어제도 들었지만 최세헌의 말을 들은 서윤이 그 말에 조금이라도 안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영이와 서윤은 동갑이니 친구처럼 지내면 좋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태영을 문 앞에까지 따라 나와 하인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많이 아프다.
***
“내 남자에게서 낯선 여자의 향기가 나는데.”
정하연의 그 말은, 한글을 가르치면서 언젠가 장난삼아 말해 주었던 영화의 대사였던가, 드라마의 대사였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태영에게 써먹는다.
정하연의 그 말에 이제야 생각나는 것이긴 하지만, 확실히 서윤의 몸에서 나는 체향은 정하연과는 조금 다르긴 했다.
“진짜야?”
“흥.”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바람에 얼떨결에 대답을 해 버린 상황인데, 정하연은 삐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무리 밤새 맨살을 맞대고 함께 있었다 해도, 개경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몸에 서윤의 향기가 남아 있을 리가 없잖아? 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대답을 해 버린 뒤다.
정하연의 저 표정은 삐치지 않았으면서 삐친 것처럼 하는 표정이란 것을 태영은 안다. 살을 맞대고 한 이불 덮고 자며 살아온 지 벌써 3년인데 그걸 모를 수가 있나.
“…….”
그래도 할 말은 없다.
어떻게 정하연에게 서윤의 이야기를 꺼낼까 하는 생각만 했지, 이렇게 훅 들어올 줄 알았나?
얼굴을 보자마자 서윤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말을 꺼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 어쩌면, 넘겨짚기에 당한 것 같기도 하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본부 사무실 안에 많은 비서실 직원이 있는데도 정하연을 끌어당겨 안고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우워~
그 모습에 여럿의 작은 함성이 들렸다.
“왜? 오랜만에 얼굴 보는 내 아내를 좀 껴안았기로서니 뭐가 문제야?”
“우이, 대장님이 개경에 혼자 갔다 오시고는 이상해지셨어.”
눈이가 이상한 감탄사를 발하고 하는 말에 정하연이 옆구리를 손으로 쿡 찌른다.
전에는 안 이랬나?
전에도 비서실 병사들 있는 데서 종종 볼에 입을 맞추고 입술에도 맞추고 했는데, 그게 새삼스러워 보이나?
“진짜 이상해졌어. 그치 눈아?”
“네.”
“맞아요, 이상해졌어요.”
가림이까지 한마디 거든다.
이 녀석들이 태영을 놀리기로 담합이라도 했나?
“실장님, 그래도 기쁜 소식은 전해 드려야죠.”
그때, 잔디가 한마디 했다.
“기쁜 소식? 뭔데?”
“실장님, 아기.”
눈이가 정하연을 대신해서 대답했다.
“뭐? 임신?”
“훗, 이런 상황에서 말해서 나도 이상하네. 하여간 몸이 이상해서 강 의원을 불러 진맥을 했더니, 글쎄 그렇게 되었다네요.”
태영이 의문을 표하자 정하연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래? 그래? 그래? 정말이야?”
태영은 다음 말 대신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듯 물으면서 정하연을 다시 와락 껴안았다.
“아, 숨 막혀요.”
아, 아이가 생기는구나.
21세기 현대 사회에 살았으면, 지금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정신없을 시기일 텐데, 제대로 된 회사에 취업하기 위해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들고 씨름하고 있을 나이인데, 결혼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을 텐데, 아이라니.
그렇지만, 이 시대를 기준으로 태영의 나이이면, 뛰어다니는 애는 물론이거니와 둘이나 셋은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니 뭐, 잘된 거지.
“호장 어르신은? 장모님은 알고 계셔?”
“네, 강 의원에게 듣고는 너무 기뻐하셨어요.”
대답은 눈이가 했다.
“아이참, 어떡해요? 이제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몸조심해야 한다는데.”
“실장님이 그것 때문에 아주 힘들어합니다. 대장님.”
정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잔디가 말했다.
하긴, 여태 왜국이나 송나라, 개경에도 다녔는데, 움직이면 위험하니 다니지 말라고 하면 얼마나 힘들까?
말 안 해도 안다.
“얼마나 되었다고 하는데?”
“한 달 보름쯤 된 것 같다고 하니, 명주에 있을 때 들어선 것 같아요.”
“그래? 그놈 국제적으로 노네.”
그때면 2월이니 년 말경에 아버지가 되는 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