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ighter Pilot's Love RAW novel - chapter 6
“……로저.”
지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아무리 비행경력이 짧고 기종변경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팰컨을 그대로 따라 착륙하지 못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도 우혁은 자신을 그저 보호해야 할, 아직도 날지 못하는 메추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었다. 생도 시절, 날지 못하는 조종사라 해서 교관들은 생도를 메추리라 부르곤 했다. 지윤은 자신이 마치 생도 시절로 되돌아가 날지 못하는 메추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로저.”
지윤은 화난 자신의 기분을 추슬렀다. 지금의 상황에서 괜한 감정 소모는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 뿐이었다. 지윤은 레이더를 살피며 팰컨1을 뒤따르는 팰컨3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고 팰컨3의 뒤를 바싹 뒤따르며 자신의 팰컨의 속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팰컨1의 고도가 현저히 낮아지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팰컨3의 고도가 낮아졌다. 지윤은 그대로 팰컨3와의 간격을 유지하며 착륙바퀴를 내리고 착륙준비에 들어갔다. 고도를 낮추자 그나마 보이던 가까운 주변조차도 모두 안개에 가려져 마치 구름 속에 자신 혼자만 갇혀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지윤은 다시 레이더를 확인하며 자신이 제대로 위치를 잡고 있는지 확인했다. 순간 지윤은 너무 긴장을 한 채 레이더를 보느라 저고도에서 갑자기 사라진 팰컨1과 팰컨3을 확인하고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 낮은 고도에서는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도 이런 위기를 처음 겪는 지윤은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자신의 위치에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순식간에 조종간을 당겨 다시 고도를 높이고 말았다.
지윤은 자신이 조종하는 팰컨의 고도가 높아지자 그제야 이성을 수습했다.
‘빌어먹을.’
그녀는 자신의 엄청난 실수에 온몸이 더욱 긴장하고 있었고 조종간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마저 믿을 수가 없었다.
지윤은 그의 부름에 대답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이 실수가 벌써 착륙을 2번이나 시도한 정우혁 중령을 커다란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가 조종하는 팰컨1의 연료가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그가 자신을 버려둔 채 착륙을 해야 했다.
“여기는 팰컨5. 죄송합니다.”
“로저.”
당신은 해내고 있죠. 이 위험한 상황에서 두 번의 착륙성공을 했으면서도 또 세 번째 착륙시도도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지윤은 그를 믿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자신의 조종능력을 시험하는 시험무대가 아니었다. 단지 기지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었다. 그가 인도하는 대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로저.”
지윤은 지금의 다급한 상황에서도 싱긋 웃음이 났다. 단순히 자신을 위로한 말이라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연료는 이미 거의 바닥 상태였고 단 한 번의 착륙기회뿐이었다.
지윤은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가 연료를 채우고 돌아온다 해도 그녀의 연료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그가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로저…… 감사합니다. 중령님.”
“로저.”
지윤은 힘차게 묻는 그의 질문에 더욱 결의를 다지며 그와 마찬가지로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앞에서 위치를 잡고 그녀를 활주로로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조종하는 팰컨의 바퀴가 활주로에 가볍게 랜딩 하는 느낌이 들자 지윤은 그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활주로에 켜지 무수한 유도등으로 시계가 약간은 밝아졌고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굴러가고 있는 그의 팰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또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이번의 착륙시도마저 성공하지 못했다면…… 생각하기도 싫었다. 바로 앞에 활주로를 두고도 활주로를 찾지 못해 연료 부족으로 추락한다면 이보다 더한 허무감이 없을 것이다.
지윤은 무사히 전투기를 주기장으로 몰고 가서 자신의 헬멧을 벗고 캐노피를 젖혔다. 그리고 조종석에 내려섰다.
“야. 이 대위.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잖아. 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 책임질 꺼야? 어쨌든 잘했어. 오늘 보니까 이 대위도 보통 강심장이 아닌데? 나 같으면 마지막 착륙만 남겨 두고 그렇게 침착하지 못했을 거야. 하여튼 냉정하자고 마음먹으면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독하다니까.”
“으이그. 김 대위야. 그 입 좀 다물어라. 넌 어째 그렇게 나설 때 나서지 않을 때 구분을 못하냐?”
김 소령의 구박에 그제야 지윤의 저조한 기분을 알아차린 김 대위가 수습에 나섰다.
“왜? 처음부터 착륙 시도에서 실수해서? 그래서 그래? 에이…… 괜찮아. 아까 중령님도 그러셨잖아. 다른 베테랑 조종사들도 할 수 있는 실수야. 뭘 그거 가지고 그러냐? 안 그렇습니까? 소령님.”
“그래. 이 대위.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그래도 훌륭히 해냈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결과만 좋으면 돼. 그리고 이런 일도 겪어야 더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겨낼 수 있어.”
네. 소령님…….”
지윤은 김 대위와 김 소령의 위로에도 여전히 풀죽은 목소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김 소령님. 이영훈 준장께서 불랙울프 편대 모두 단장실로 오라십니다.”
최 소령의 말에 모두들 그를 돌아보았다.
“어. 그래? 알았어. 가자. 이 대위.”
김 소령을 필두로 블랙울프 편대원들은 모두가 단장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윤은 자신들보다 조금 더 앞선 거리에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정우혁 중령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자 다시 자신의 실수가 떠올랐다. 하마터면 자신뿐만 아니라 공군에서 아끼는 커다란 인재 하나를 자신의 실수로 잃을 뻔했다 생각하니 다시 가슴 아래쪽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은 스스로의 비행실력에 자만심을 가졌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이 레이더에서 다른 전투기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초보적인 실수를 했다니…… 지윤은 다시 한 번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윤이 단장실로 들어서자 이영훈 준장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했다. 모두들 침착하게 정우혁 중령의 명령을 잘 이행해서 조금의 사고도 없이 무사히 착륙해서 정말 기쁘다. 특히 팀을 잘 이끌어 준 정우혁 중령. 수고했다. 귀관의 공이 크다.”
“아닙니다. 대원들 모두가 침착하게 이성을 잃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래. 그래. 모두들 수고했다. 오늘은 어차피 비행이 없으니 푹 쉬고 내일 비행이 있다면 그것도 취소하고 푹 쉬어. 내일까지 일시적인 휴가를 주겠다.”
“감사합니다. 준장님.”
정우혁 중령이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이영훈 준장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나도 좀 쉬어야겠다.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보던 나도 피곤하구먼. 그만 나가들봐.”
“네. 필승.”
이영훈 준장에게 인사를 하고 모두들 빠져나온 복도에서 정우혁 중령이 지윤을 돌아보았다.
“이지윤 대위는 내 방으로 와.”
그리고 앞서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윤이었다.
“가봐. 이 대위. 야단치시려고 그러시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긴장하지 말고 가봐.”
“그래. 이 대위. 한 입 갖고 두 말 하시는 분 아니셔. 아까 분명 있을 수 있는 실수라고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가봐.”
“네…….”
지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우혁은 자신의 앞에 우울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지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까의 실수가 마음에 걸리나?”
“…….”
“그럴 것 없다. 그때도 말했지만 있을 수 있는 실수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겁을 먹게 되고 이성을 통제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넌 마지막까지 침착했고 결국 이렇게 착륙에 성공했으니 그거면 됐다. 더 이상 마음 쓰지 마라.”
“…….”
지윤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다른 조종사들도 할 수 있는 실수라 위로했지만 편대에서 실수를 했던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런 말로는 그녀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후…… 이지윤. 자신을 계속 자학하면 앞으로의 비행 시 자신감만 떨어뜨릴 뿐이고,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더 이상의 비행은 힘들게 된다. 어쩌면 더한 위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일수록 빨리 실수를 인정하고 털어내라.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알았나?”
지윤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가 한 마지막말이 가슴에 진한 여운을 주었다. 실수를 빨리 인정하고 털어내라는 말…… 그랬다. 자신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기 두려웠다. 자꾸 실수를 실수라 인정하지 않고 상황만을 탓했다. 그의 말대로 용감하게 있을 수 있는 실수라 인정하고 반성해야했다. 그래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지윤은 눈동자에 가득 찬 물기를 없애기 위해 눈에 힘을 주며 버텼다.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더 이상 연약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지윤은 고개를 들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털어내겠습니다. 이번 일을 경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중령님께 감사드립니다. 절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윤은 그녀의 말에 싱긋 웃음 짓는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단 몇 걸음 만에 그녀의 바로 앞에 설 때까지도 그에게 눈동자를 그대로 고정했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지윤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그는, 곧이어 그녀를 살며시 당겨 안았다.
“어떤 순간이 와도 널 포기하는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잘했다. 이지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를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힘든 시간이었다. 그의 품에서 잠깐의 위안을 받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
2003년 8월 18일 . 09:10:33. 교육실
지윤은 축소된 대학의 강단을 연상시키는 교육실의 뒷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섰다. 맨 앞의 연단에 세워진 화이트보드 앞에서 그린울프 편대의 윤창호 소령이 9월 초에 있을 작전비행훈련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있었고 연단과 계단식으로 형성된 좌석의 공간 벽 쪽에 붙은 의자에 우혁이 앉아 있었다.
지윤은 이른 아침 비행을 마치고 지금 막 격납고에 KF-16기를 넣고 작전비행훈련 계획에 뒤늦게 참석하기 위해 들어섰다. 교육실은 이미 훈련 계획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이었다.
최강우 소령과 함께 비어 있는 맨 뒷자리에 살그머니 앉으며 전방을 응시하려는 순간 지윤은 우혁과 눈이 마주쳤다.
안개 속에서 위험한 착륙을 했던 그날 이후로 첫 마주침이었다. 그날 그의 품속에서 느꼈던 따뜻함이 생각나자 지윤은 살그머니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촉촉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찰나의 순간에 불꽃이 일렁이듯 타오르던 눈빛은 어느 순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차가움으로 얼어붙고 있었다. 더 이상 그의 뜨거운 눈빛을 견디지 못한 지윤은 살그머니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랜턴을 이용한 적외선탐지시스템으로 목표물을 조준. 앨램미사일을 발사하는 가상 요격 훈련에 대한 브리핑이었습니다. 9월 초 조종사들의 교육을 통해 성공적인 비행작전훈련을 마칠 계획입니다. 이상.”
윤창호 소령이 브리핑을 끝으로 연단에서 내려와 가서 앉자 255대대장 정우혁 중령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번 가상요격훈련의 최종 목적은 10월에 있을 보라매 공중사격대회의 탑건 선발을 위한 준비 훈련이나 다름없다. 이번 훈련 평가로 사격대회에 참가할 조종사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선발한다. 질문 있나?”
“예. 대대장님. 보라매 사격대회에 중령님도 출전 예정이십니까?”
블랙울프 편대의 대위 하나가 한 손을 번쩍 들어 질문하자 좌석에 앉아 있던 255대대 조종사들의 눈이 모두 전방의 정우혁 중령을 향해 집중되었다.
“왜? 내가 출전하면 안 되나?”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대장님께서 출전하신다면 어느 조종사가 출전하려 하겠습니까?”
“대대장님께서는 2년 전에 이미 탑건에 선발됨과 동시에 그해 베스트 파일럿에 선정되신 걸로 아는데…….”
그의 출전 가능성이 살짝 엿보이는 답변에 교육실은 일순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미 그의 공중사격술은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들 중 누구하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전설적인 실력이었다. 그가 또다시 출전한다면 자신들은 하나마나한 일이라는 공론이었다.
“그렇게들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이 없나?”
술렁임이 가득했던 교육실의 공기를 가르며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교육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최고의 전투조종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나보다 뛰어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요격하는가 하는 것이다. 탑건 선발은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일 뿐이다. 물론 우리 대대에서 탑건이 나온다면 그것 또한 영광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대의 결속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탑건이 되는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군들이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라는 것이다. 탑건이 되기 위해 나보다 뛰어난 동료를 넘어뜨려야 한다면 그건 진정한 탑건이 아니고 나아가 대한민국 공군 전투조종사로서의 자격도 없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그의 차갑고 절도 있는 말에 또다시 결속을 다지는 대대원들을 보며 지윤은 다른 조종사들이 말하는 그의 리더십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으로 휘하 조종사들을 휘어잡으며 하나하나가 소중한 대한민국 공군이라는 자부심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대대원들 개개인이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으로 더욱 결속하는 이유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참고로 이번 보라매 공중사격대회는 나는 참가하지 않는다.”
씨익, 입 꼬리를 올리며 그가 지나가는 투로 말을 하자 좌석에 앉아 있던 다른 조종사들 모두가 와아~ 하고 함성을 울렸다.
“아직 휴가를 가지 못한 블랙울프 편대만 남고 전원 해산. 이상.”
의자 끄는 시끄러운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모두 정리될 즈음 넓은 교육실의 맨 앞좌석에는 최 소령과 김 대위가 곧 예선전이 있을 편대별 스타크래프트 대항전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내고 있었다. 그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연단 아래서 김기홍 소령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있는 우혁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 얘기에 빠져 있는 그의 정리된 옆모습은 처음 단장실에서 보았던 차가운 그를 연상시켰다. 처음 느낀 차가움은 어느새 그녀를 향한 그의 뜨거운 감정으로 눈 녹듯 사라지고, 일에 있어 여전히 냉정함이 흐르는 그의 표정에서조차 따뜻함을 느끼는 지윤 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김 소령이 움직임을 보이자 지윤은 언제 그를 보았냐는 듯이 고개를 숙여 메모지에 의미 없는 선을 그어댔다.
“비상출격이다 뭐다 해서 휴가를 가지 못했는데 늦었지만 블랙울프 편대원 전원 4박 5일 휴가를 가기로 결정했다.”
편대장인 김기홍 소령의 말에 김유영 대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그럼 8월 28일에 있는 스타게임 대항전 연습은 어떡합니까?”
“그걸 꼭 연습을 해야 하나? 평소 실력으로 하면 되지. 정 그러면 넌 휴가 가지 마.”
“그럴 순 없죠. 저도 휴가 갈 겁니다.”
“김유영 대위.”
“네. 대대장님.”
“휴가 계획 있나?”
“네. 있습니다! 여전히 저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을 쭉쭉 빵빵 해변의 미인들을 위해 무조건 출동입니다.”
“도대체 너의 그 대책 없는 자만심은 누가 키워준 거냐?”
“아직도 모르셨어요. 소령님? 이 자식 모친이 ‘아이고 우리 잘난 아들, 잘난 아들’하면서 키우셔가지고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나인 줄 알잖아요.”
최 소령의 답변에 어이없어 하는 표정의 김 소령의 헛웃음이 뒤를 이었다.
“우리 어머니 말고 또 많아요.”
“누구?”
“우리 이모, 할머니, 고모…….”
“에이! 이 미친놈아. 다들 네 친척들이잖아!”
그들의 악의 없는 농담에 살짝 웃음을 머금은 채 앉아 있던 지윤은 갑작스러운 우혁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이지윤 대위. 휴가 계획 있나?”
“네. 집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음. 그래. 모두 잘 다녀오고 휴가 끝나고 보자.”
그 말을 끝으로 교육실의 앞문을 열고 사라지는 우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윤은 자신의 휴가 계획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그에 대해 왜 자신이 섭섭함을 느끼는지 알 수 없어 괜히 심한한 마음만 들었다.
지윤은 그날의 근무가 모두 끝날 즈음 자신이 비행했던 팰컨의 오른쪽 날개부분 이상으로 정비실에서 몇 시간을 보내고 근무종료시간보다 2시간 정도가 더 흘러서야 겨우 사무실로 올라 올 수 있었다.
“최 소령님 아직 안 가셨어요?”
아직 최강우 소령이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어. 이제 가야지. 날개에 이상이 있었다며?”
“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이상이 없는데 아무래도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 듯합니다.”
“비행 때도 이상한 기미가 있었나?”
“아닙니다. 비행 시에는 전혀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착륙하고 정비병이 기체를 점검할 때 보면 오른쪽 날개 부분에서 이상한 냄새와 열도 너무 미미해서 정비병조차도 이것이 이상인지 아닌지 감이 안 잡힌다고 합니다.”
“그래? 거참 이상하군. 그래도 모를 일이니 정밀검사 받아 봐. 기체의 결함은 곧 조종사의 목숨과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야. 거기다 특히 날개부분 이상이라면 아주 큰 문제다.”
“네. 알겠습니다.”
“대대장님께도 보고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
“그러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이상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아주 경미한 문제일수도 있는데 괜히 일을 크게 만들 이유가 없다가 생각합니다.”
“알았다. 우선 두고 보자. 그리고 우린 전부 대대장님께 휴가 인사 드렸으니까 대위도 잊지 말고 대대장님께 인사드리고 휴가 가도록 해.”
“네. 소령님.”
“그래. 휴가 잘 보내고 다녀와서 보자.”
“네. 안녕히 가세요.”
최 소령이 나가자 지윤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다시 그의 방으로 찾아가 단둘이 될 상황을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에 한숨만 나왔다.
혹시 벌써 퇴근하고 없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그의 방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으로 황망히 사라져 버렸다. 지윤은 그와 단둘이 마주칠 상황에 대비해 철저한 정신무장으로 자신의 대책 없는 떨림에 억눌렀다.
똑똑.
반쯤 열려진 방문을 노크하며 마저 열자, 책상위에 걸터앉아 전화를 받고 있는 그가 보였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들어오라는 그의 손짓에 방안으로 들어선 지윤에게 그가 다시 문을 닫으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내키지 않는 동작으로 문을 닫는 지윤의 표정은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에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으며 전화기 반대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의 눈빛은 흡사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의 그것이었다.
“아니, 당분간 시간 내기가 어렵습니다. 10월에 있을 사격대회가 끝난 후에야 가능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어쨌든 빠른 시간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여전히 시선은 그녀에게로 고정한 채 전화기를 내려놓는 그를 보며 지윤은 거수경례와 함께 휴가 신고를 했다.
“제20전투비행단 255대대 블랙울프 편대 소속 이지윤 대위는 8월 19일부터 4박 5일간 휴가를 명받아 이에 신고합니다. 필승.”
“그래. 조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는 건가?”
“네.”
“경기도 이천이라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냉정하게 잘라 대답하는 지윤을 우혁은 지긋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지윤과 그런 그녀를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바로 보는 우혁으로 인해 255대대장실에는 숨 쉬는 소리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생각해 봤나?”
“대대장님과 저 사이에 생각할 여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녀의 끊어내듯 차가운 대답에 우혁은 입술을 일자로 굳혔다.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군. 이지윤. 너와 나 사이에 생각할 것은 무궁무진하다. 쓸데없는 고집을 계속 부리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 후의 내 행동에 책임을 묻지 마라. 지금처럼.”
“무슨……?!”
책상위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킨 우혁은 한걸음 만에 성큼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의 눈과 마주치게 한 우혁은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고집불통. 이지윤.”
그리고는 지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얼굴을 꼭 잡은 채 그대로 입술을 내려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포겠다.
“난 내 품으로 날아온 새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다.”
여전히 입술을 포갠 채 움직임이 거의 없이 속삭이는 말인데도 지윤은 그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어냈다.
“난 당신 품으로 날아든 새가 아니에요!”
살짝 밀린 듯 우혁의 입술이 떨어진 것도 잠시, 그가 지윤의 손목을 움켜지고 그대로 끌어당기자, 그녀는 말 그대로 그의 품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혁의 한쪽 손이 지윤의 허리에 돌아가고 또 다른 손은 그녀의 머리를 고정한 채로 그의 입술이 격정적으로 부딪쳐왔다. 처음의 거친 접촉과 달리 부드럽게 달래듯 쓰다듬는 혀의 감촉에 지윤은 또다시 제 박자를 잃은 심장의 두근거림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지윤의 입술을 부드럽게 지분거리던 그의 혀가 슬쩍 깨물자 그녀는 순간의 아픔에 입술을 열고 말았다. 그 순간 우혁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그대로 침범해 들어왔다. 갑자기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온 이물의 느낌에 놀란 지윤은 다시 한 번 우혁의 품속을 벗어나려 그의 단단한 가슴을 힘껏 떠밀었지만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한 듯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끌어당길 뿐이었다.
어느 순간 자신의 입속을 부드럽게 훑어내고 있는 혀의 움직임에 알 수 없는 흥분이 피어오르고 그 열기가 피를 타고 흘러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우혁의 가슴을 밀어내던 지윤의 두 손은 이제 그의 군복을 꽉 움켜진 채 제 할 도리마저 잃고 있었다.
그가 겨우 자신의 입술을 떼어내 지윤의 입술에 자유를 주자 그녀는 급격히 밀려들어오는 산소의 공급을 위해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여전히 지윤을 끌어안고 있던 우혁은 급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귓볼에 키스하고 볼과 턱에 자잘한 키스의 여운을 남기며 그녀의 가녀린 목으로 미끄러지듯 입술을 움직였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젖히며 우혁에게 자신의 몸을 온전히 내어 준 지윤은 순간 복도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지윤의 거친 움직임에 그녀를 덮치듯 누르고 있던 그의 단단한 몸이 사라지고 그녀는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복도의 발소리가 사라지는 그 순간이 천년의 시간이라도 되는 듯 느끼며 지윤은 코앞의 남자를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그가 주는 흥분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그의 방에서…… 그는 자신의 직속상관인 255대대의 대대장이 아닌가.
지윤은 몇 번의 뒷걸음질과 함께 몸을 홱 돌려 그대로 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그가 뒤쫓아 오기라도 하는 듯 복도를 있는 힘껏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우혁은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지윤을 말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의 마음은 벌써 그녀를 뒤쫓고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은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손만 대면 이성이라는 것 자체가 저 멀리 사라지고 마는 자신의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우혁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억제하기 힘든가 하면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손끝, 발끝까지 저리듯 온몸으로 퍼져가는 행복감에 하루에도 몇 십번씩 극과 극을 오가고 있었다.
‘이지윤. 내 품에서 이런 식으로 도망가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녀가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보며 우혁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지윤은 서산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으로 가 다시 경기도 이천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서산기지를 출발한 지 4시간 여만에 겨우 자신이 자란 동네 어귀가 눈에 들어왔다.
냉방이 잘된 시원한 버스의 문이 열리자 지윤은 갑자기 몰려오는 더운 열기에 훅하고 숨을 몰아쉬며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대지로 내려섰다. 끝없이 펼쳐진 논, 밭 위로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대기 중에 피어나는 아지랑이가 8월의 한더위가 얼마나 뜨거운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윤은 집이 보이는 동네 어귀로 들어설 즈음 항상 들르던 동네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아이고! 지윤이 아니니?”
“네. 안녕하셨어요?”
“그럼. 우리야 항상 그렇지. 더운데 고생이 많지? 이리로 앉아라. 시원한 음료수라도 먹고 가.”
“아니에요. 아직 집에도 못 갔어요. 할머니 기다리실 거예요.”
“그래? 휴가니?”
“네. 4일 정도 있으려고요.”
“그래. 참. 옷 갈아입어야지?”
“네. 방 비어 있죠?”
“그래. 어서 들어가라.”
지윤은 기지를 출발할 때부터 입고 있던 공군 제복을 갈아입기 위해 가게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지윤은 처음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파란색 공군제복을 갖춰 입은 채 조부모님 앞에 나타났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의 할머니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할아버지의 비틀거림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했다. 자신의 공군제복이 20여 년 전 충격적인 그날, 아들의 죽음을 알리러 온 그 이름 모를 공군 장교를 연상시켰고 그 이후로 지윤은 다시는 제복을 입고 조부모님 앞에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당신들에게 파란색 제복은 바로 아들의 죽음과 같은 뜻으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간단한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은 지윤은 자신의 제복을 깨끗하게 접어 가방에 넣고 방문을 열고 가게로 나갔다.
“갈아입었니? 에휴…… 언제나 돼야 네가 그 자랑스러운 공군 복을 입고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까……? 아마 돌아가시기 전 까지는 힘들겠다. 네가 이해해라.”
“네…… 아주머니. 수박 한 통 주세요.”
“그래. 잘 익은 놈으로 하나주마.”
짐 가방을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수박을 한통 든 채로 골목 입구를 들어서자 저기 집 대문 앞에서 연신 부채질을 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
“아이고 우리 강아지 왔구나. 뛰지 마라. 뛰지 마…… 넘어진다 아가야?”
“할머니는…… 내가 아직도 아기에요?”
“그럼. 네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내 눈에는 언제나 아기지.”
“으이그…… 우리 할머니 고집을 누가 말려.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무거워.”
“됐다. 농사지으며 손마디 힘만 늘었는데 이깟 수박 한 통 들 힘이 없을까.”
말리는 지윤의 손에서 기어이 무거운 수박을 빼앗고 손녀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할머니가 작년보다 더 늙으신 것 같아 지윤은 씁쓸하기만 했다.
낮은 담벼락에 있으나마나한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마당 한켠에는 지윤이 태어난 해에 심었다던 아카시아 나무가 초록의 무성함을 뽐내며 향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요?”
“너 온다고 장에 가셨다. 너 좋아하는 포도도 사고 인절미도 사 오실게다.”
“이 더운데 뭐 하러…….”
“자 손 씻어라. 세수도 하고. 지금은 간단히 씻고 밥부터 먹자.”
“배 안 고파요. 오다가 휴게소에서 먹었어.”
“거기서 먹는 게 무슨 밥이니? 내 얼른 차려 줄 테니 먹어. 제대로 된 상을 차려서 먹어야지. 그러니 네가 그렇게 마른거야.”
“풋. 할머니. 나 마른 거 아니에요. 살 안 찌려고 운동을 얼마나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