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30
130화 성년식 3
* * *
‘공주님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공주님의 의향을 따르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뇌리에 박힌 카인의 말이 아직까지도 귓가를 맴돌았다.
세르듀스를 대신해 레서 왕국의 정점이 되다니, 아니 될 말이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후계자가 정해지기 전이라면 그나마 승산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철이 들었을 땐 이미 중앙 정계에서 떨어져 나와 나뒹굴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사이한 마음을 먹더라도 쉬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마크가 조치를 취한 거라는 걸.
그래서 적법한 혈통이라는 걸 알고도 외면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자리였기에.
그때, 네베티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 성년식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네베티의 두 눈엔 생기가 흘러넘쳤다. 이번 세라의 생일은 특별했다. 그녀가 벌써 이렇게 자라 홀로 자립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자리였던 것이다.
뜻깊은 날인 만큼 실수 하나 없이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세라는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왕실의 지원은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많은 것도 아니었다. 아껴서 사용하면 체면치레를 할 수 있을 정도. 딱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마크에게 손을 벌리면 해결되겠지만, 혐오하는 이의 힘을 빌려서까지 치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평소대로 준비해라.”
“그래도 공주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성년식인데요. 장신구라도 하나 구입하는 게 어떨까요? 보니까 매물로 나온 것도 많던데. 한번 알아볼까요?”
“괜찮다. 재작년에 샀던 것도 있으니까.”
“그날의 주인공은 공주님이 되실 텐데요. 그 누구도 험담하지 못하도록 준비하셔야죠. 저번에도 영애들이 뒤로 쑥덕거리는 소리 들으셨잖아요? 저는 정말 속상해요.”
세라도 그 말엔 부정할 수 없었다.
사교계의 유행은 날마다 변했다.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뒤쳐지면 구설수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그녀도 사람인지라 의연하게 있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세라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문이 활짝 열리며 한 시녀가 들어왔다.
“공주님. 나,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여기가 어디라고 숨까지 헐떡이며 말하는 것이지? 내가 품행을 단정히 하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네베티가 짐짓 엄하게 타이르자 시녀는 덫에 걸린 여우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됐다. 무슨 일인지나 말해 봐라.”
“공주님 앞으로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선물? 가져오면 될 텐데?”
“그게, 가지고 올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대체 얼마나 되길래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수수께끼 같은 문답에 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성년식이 코앞이니 누군가 축하한다고 보낸 것일 터. 문제는 그게 누구냐는 것이었다.
세르듀스가 이런 기특한 짓을 할 리는 없었다. 하물며 페르마는 아직 영식이었다. 시녀가 놀랄 만한 선물은 준비할 수 없을 게 뻔했다.
궁금함과 의문이 섞인 채 이동하던 중 앞서가던 네베티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게 대체…….”
마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 있는 광경에 세라는 탄성을 터트렸다. 마치 번화가의 일부분을 통째로 뜯어온 듯했다.
마차에 실린 물품들은 어느 것 하나 쉬이 볼 수 없는 것만 가득했다.
특히 옷이며 장신구들은 전부 다 눈에 익은 브랜드였다. 우연은 아니었다. 왕실과 거래하는 곳뿐이었으니까.
이는 곧 품격 또한 갖추었다는 걸 의미하니, 겉만 화려한 수레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공주님, 이거 보세요.”
네베티가 다가와 편지를 건넸다.
[공주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간결하지만 진심을 담은 문장. 어렴풋이 누가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한쪽에 적혀 있는 이름은―
‘카인 슈발체베인.’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 * *
“일단 이번 임무는 너 혼자 처리해 봐라.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고 채점해 줄 테니까.”
매정한 명령이었지만 아리아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슬슬 단독 임무를 맡을 때입니까.”
“그래, 발전이 없으면 도태될 뿐이니까.”
아리아의 실력은 출중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위기라고 말할 만한 상황에 직면한 적이 없었다. 이번 임무는 아리아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터.
“성년식이 열렸을 때라면 네가 노려도 가능성이 높을 테지.”
“오히려 가장 경계해야 하는 날이 아닙니까?”
“하, 폭죽이 터지고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너도 귀가 있다면 마크 왕에 대해 들었을 텐데? 그런 녀석의 치하에 있는 놈들의 기강이야 뻔하지.”
“크롬 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꾸벅.
졸린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인 아리아는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그 아래에 커다란 왕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별빛보다 더 밝은 빛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곳만이 별천지라는 것처럼.
아마 내부는 미로처럼 얽히고설켜있을 테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작전을 구상한다.
경비의 수, 기사의 기량, 소비되는 시간까지.
이윽고, 총명한 두뇌는 단번에 결론을 도출했다. 생각보다 성공할 확률이 낮은 임무라고.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패하면 실패하는 거지.”
크롬, 그답지 않게 담백한 대답에 놀란 건 오히려 아리아 쪽이었다.
“말했을 텐데? 채점하겠다고. 너 보고 죽으러 가라는 게 아니다. 네가 잘하면 잘한 대로, 못하면 못한 대로 속행할 뿐이다. 그리고 구태여 한 번에 끝낼 필요도 없지.”
“그렇습니까.”
아리아는 나지막이 읊조리며 가면을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괴악하다고 생각했던 게 자주 보니 왠지 정감이 갔다.
* * *
덜컹거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주욱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세라는 돌연 입을 열었다.
“선물을 받았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백작의 부는 상당하구나.”
“자랑할 게 그거밖에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공주님의 마음에 들었다면 더 좋았을 테니까요.”
“아니, 이해할 수 있다. 대대로 슈발체베인 백작령은 척박하다 들었으니까. 그런 곳에서 영지를 다스리려면 돈을 굴리는 재주가 저절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겠지.”
분에 넘치는 찬사에 카인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에게 상재는 없었다. 그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 터무니없는 차익을 챙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관광 사업을 아바마마가 직접 막고 있다 들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나다.”
담담하게 진실을 고한 세라는 정말로 그리 느낀다는 듯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건 잊어 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은 공주님의 날이니까요.”
“고맙구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밖을 바라본 세라는 조심스레 입을 벌렸다. 이제 와서 느끼는 거지만, 카인이 타고 온 마차는 그 크기부터가 남달랐다.
언뜻 보기엔 집이 굴러다니는 것 같았다. 모르긴 몰라도 밖에서 보면 장관일 터.
그녀의 생각대로 사람들은 하나같이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이 시대에 마차의 크기는 곧 부를 상징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마차에 꽂힌 깃발을 쳐다본 이들은 금세 말을 바꾸었다. 그들에게 카인은 우연치 않게 많은 돈을 벌어들인 졸부에 불과했다.
“저것 좀 보세요. 그야말로 굴러가는 돈 덩어리예요. 사치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싶은데요.”
“저렇게라도 이목을 끌고 싶다는 거겠지. 일단 본인부터가 별거 없는 반푼이지 않은가.”
“저런 녀석이 라프만 님의 뒤를 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마차에서 내린 카인은 빗발치는 관심을 귓등으로 흘려 넘겼다.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건 오직 세라뿐이었다. 사실 즐거운 면도 없잖아 있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라프만이 떠올랐으니까.
“목걸이가 정말 잘 어울리는군요. 공주님의 눈동자와 똑 닮았습니다.”
“그런가?”
블루 다이아몬드 여섯 쌍으로 구성된 목걸이를 내려다본 세라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원 없이 구성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시기와 질투가 섞인 눈빛이 곳곳에서 보였다.
괜히 뺨이 홧홧거리는 듯했다. 평소에도 느꼈던 시선이지만 오늘만큼 강렬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구나. 아마 백작이 없었다면 초라한 모습으로 성년식에 참석했을 테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공주님은 언제 어디에서든 빛났을 겁니다.”
“후후, 이번에도 그 눈빛인가. 너는 나를 보지 않고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는 듯하구나.”
꽤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동요하지 않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무튼 내가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저 백작의 정성이 아까워 말하는 것뿐이니까.”
“저도 딱히 공주님의 마음을 얻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만 꾸미고 나오면 파트너인 공주님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 선물을 보낸 것뿐이니까요.”
힐끗, 카인을 쳐다본 세라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사로운 게 하나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마크의 지원 없이 따라가기엔 어려운 행색이었다.
“흐음,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좋지 않구나.”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걷던 세라는 카인과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절뚝거리는 카인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
“신경 쓰이면 먼저 가셔도 좋습니다. 저는 저대로 가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너는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었으니까. 그리고 오늘은 내가 네 파트너일 텐데?”
가까이 다가간 세라는 카인을 올려다보았다.
“내 몸에 기대라. 사양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괜찮으니까.”
“남자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하지만 나도 때와 장소는 구분할 줄 안다. 하물며 환자를 부축하는데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어불성설이지.”
“혼자서도 갈 수 있습니다. 다리가 불편할 뿐이지 몸이 망가진 건 아니니까요.”
“고집이 세구나. 솔직하지 못한 너를 위해서 내가 먼저 잡겠다. 자, 힘을 빼거라.”
세라가 팔짱을 끼자 카인은 헛기침을 내뱉었다. 가슴이 팔뚝을 집어삼킬 기세로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절름발이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위장의 일환이었다. 요컨대, 꾀병.
본디 질책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포상을 받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세라는 카인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그를 청장미궁으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