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urn of the Mount Hua Sect RAW novel - Chapter 1721
1721화. 잃지 않을 수는 없어. (1)
호가명이 잠시 걸음을 늦추며 뒤를 돌아보자, 뒤를 따르는 사패련의 군세가 눈에 들어왔다.
패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에게 막심한 피해를 준 건 사실이나, 그것만으로 면피하기엔 이쪽이 입은 피해 또한 적지 않다.
애초에 세웠던 목표가 좌절된 이상, 패배라는 두 글자를 부인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뒤를 따르는 사패련도들의 모습은 패잔병과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 외려 단단한 각오와 스산함이 느껴진다.
호가명은 알고 있다. 저 시린 눈빛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는 패했지만, 패군은 패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겠지.’
사실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다. 사패련의 패배는 곧 장일소의 패배. 어떤 말로도 그 평을 피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이 순간 저 낯뜨거운 면피는 분명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적어도 사패련의 련도들에게는 확실하게 말이다.
그건 아마도…….
호가명의 시선이 앞서 걷고 있는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이것까지 미리 생각하신 건가?’
만일 장일소가 제 실책을 인정하고 호가명을 처단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신상필벌(信賞必罰)은 명확히 할 수 있었겠지만, 이번 전투가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장일소는 인정하지 않고 힘으로 반발을 찍어 눌렀다. 심지어는 천면수사를 짓밟으면서까지 말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 모습이 패배감에 젖어 있던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련주님.”
이를 알면서도 호가명은 조심스레 장일소를 불렀다.
장일소는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스스로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모를 수 없으므로.
장일소가 슬쩍 시선만 돌려 호가명을 일별했다.
“할 말이 있더냐, 가명아.”
“련주님. 천면수사는…….”
“아아.”
장일소가 모기라도 쫓듯 손을 대충 휘저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언급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걱정 말거라. 뭐 그리 심하게 손을 쓴 것도 아니잖니?”
“그는 시류를 아는 자이나, 또한 원한을 잊지 않는 자입니다. 반드시 이 일을 기억하고…….”
“언젠가는 보복해 올 거다, 그 말이지?”
“……그렇습니다.”
장일소가 피식 웃었다.
“‘언젠가는’이라니. 이 마당에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가명아. 놈에게 그럴 시간이 있을 것 같으냐?”
“…….”
“놈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런 먼 훗날의 이야기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없지.”
장일소의 긴 눈꼬리가 가늘게 휘어졌다. 음산한 기운이 그 끝에 맺혀 있었다.
“중요한 건 지금이란다. 아니, 바로 다음이겠지.”
호가명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천면수사는 오늘의 일을 잊지 않겠지만, 당분간은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전투로 너무 많은 문도를 잃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끝이 난 것도 아닙니다, 련주님.”
“음?”
“상황을 파악해 보니 태양궁주가 하오문주에게 극렬한 원한을 품었다 합니다. 이건…….”
“쯧쯧쯧.”
장일소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다들 이렇게 속이 좁아터져서야 쓰나. 이래서 사파 놈들이란.”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놔두렴.”
“련주님…….”
물론 지금 호가명은 장일소에게 직언할 처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입을 뗄 만큼, 호가명이 생각하기에 이는 실로 중차대한 일이었다.
이미 만금대부와 흑룡왕을 잃은 상황이 아닌가. 이제 하오문주와 태양궁주는 사패련에게 있어 결코 잃어선 안 될 중요 전력이다.
그런데 만일 태양궁주가 원한을 누르지 못해 천면수사를 적대하기 시작한다면, 이미 장일소에게 굴욕을 당한 천면수사의 분노가 태양궁주에게로 마주 향할 가능성이 크다.
둘이 서로 원한을 품고 반목한다면, 이는 사패련의 존립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도 있다.
“사패련이 사분오열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호가명의 물음에, 장일소가 흥미롭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흐음, 가명아.”
“예, 련주님.”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말려무나.”
“…….”
“나는 실패한 이는 탓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실패에 눌려 무가치해진 이는 꼴 보기 싫다.”
호가명의 고개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사분오열이니, 원한이니…….”
중얼거리던 장일소가 붉은 조소를 진하게 머금었다.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남은 건 그저 누가 살아남느냐. 누가 거머쥐느냐. 누가…….”
잠시 말끝을 흐린 장일소가 뒤를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여명에 물든 무당산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만 결말을 지어야 할 시간이란다. 나도, 그도 남은 모든 걸 걸고 싸워야겠지.”
“련주님.”
장일소가 나직이 웃었다.
결말을 지어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말이다. 더는 여유를 부릴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맞겠지.
“걱정할 것 없다. 안배는 끝났으니. 꼴사납게 지긴 했지만…… 덕분에 꼭 얻어야 할 건 손에 넣었잖니.”
호가명의 눈에 순간 의문이 스쳤다.
꼭 얻어야 하는 것? 그런 게 있었던가?
그러나 장일소는 그 의문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저 생각에 잠긴 채 미소만 흘렸다.
‘내가 틀렸다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틀렸다 해서…… 네가 옳다는 보장도 없지. 안 그렇니?”
색 옅은 두 눈에 짙은 음울함이 감돌았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란다.’
그때는 지금처럼 둘 다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겠지. 이제 남은 건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 마지막 싸움뿐이다.
* * *
“아니, 저놈들이 왜…….”
모용위경은 무당산에서 멀어지는 사패련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어쨌거나 전투가 끝났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들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불안했다.
‘추격해야 하나?’
후퇴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모용위경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에 남은 이들은 아직 화산은 물론이고, 절벽을 타고 올라간 핵심 전력과도 합류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남은 이들끼리 무모한 추격을 벌이다가는 되레 크게 반격을 당할 수도 있다.
“군……사.”
혼란한 머릿속을 어찌하지 못한 모용위경이 임소병을 불렀다. 물론 ‘군사’라는 말이 입에 붙질 않아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말이다.
“놈들이 정말 물러난 것이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모용위경과 달리, 임소병은 일견 태연하게까지 보였다.
“눈으로 직접 보고 계시잖습니까.”
“아, 아니, 어째서요? 지금 놈들이 그리 불리한 상황은 아닐진대.”
“전쟁은 사기가 전부입니다. 그리고 사파 놈들은 눈치 빼면 시체인지라 사패련이 의도적으로 절벽 위의 병력을 희생시켰음을 이미 알아챘을 겁니다.”
“…….”
“그 와중에 전투를 이어 가 봐야 무의미한 희생만 늘릴 뿐이지요. 재정비를 하는 게 전략적으로 옳습니다.”
“그, 그럼 혹여…….”
무언가 더 물으려던 모용위경이 먼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묻고 싶었던 건, 그럼 혹시 이 일로 사패련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확률은 없는가였다. 한데 저 패군을 상대로 반역을 저지를 만큼 대단한 자가 아직 사패련에 남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다 해도 이게 말이 되는 일이오? 이렇게 물러나면 놈들도 많은 걸 잃어야 할 텐데?”
모용위경도 한 가문의 가주다. 판을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의문에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맞습니다. 놈들은 이번 전투로 독을 삼켰습니다. 그것도 해독할 길이 없는 맹독을.”
“내 말이 그 말이오. 그런데 왜…….”
“중독된 이가 싸움에서 이기는 법이 뭔지 아십니까?”
질문을 던진 임소병은 모용위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답을 내었다.
“독이 퍼지기 전에 상대의 목에 칼을 박아 넣는 겁니다.”
“그, 그게 무슨……. 그럼 이긴다 해도 결국 본인도 죽는 것 아니오? 해독할 방법이 없는 독이라면 말이오. 그걸 승리라 할 수 있소이까?”
임소병이 슬쩍 모용위경을 보았다.
그가 납득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때로 세상에는 제 목숨을 딱히 중히 여기지 않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때로는 무언가를 부수기 위해 제 목숨마저 웃으며 내던지는 이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어쨌든 확실한 건 하나입니다.”
임소병이 길게 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사패련의 군세를 보았다. 아니, 어쩌면 그 너머의 누군가를.
“이젠 저들에게도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마…… 이제 모든 것을 건 승부를 걸어올 겁니다. 퇴로가 없는 총공세겠지요.”
모용위경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들은 물러나고 있다.
하지만 임소병의 말을 듣고 보니 저 모습이 단순한 후퇴로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해일이 닥치기 전 해안의 물이 썰물처럼 죄 빠져나가는 것과 같이, 저들 역시 더욱 거대한 파도가 되어 덮쳐 오리라.
“어, 어쨌건 상황만 보았을 땐 우리가 유리한 게 아니오? 이번에 저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니.”
“글쎄요.”
임소병의 반응은 영 뜨뜻미지근했다. 아니, 오히려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기까지 했다. 모용위경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런 그를 빤히 보았다.
지금 임소병의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꽉 들어차 있었다.
‘왜지?’
화산검협 청명을 떼어 내면 이길 수 있다. 그건 분명 국지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일소가 굳이 그 역할을 맡을 필요가 있었을까?
호가명의 의도는 분명하다. 하지만 호가명의 의도가 장일소의 의도와 반드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장일소는 대체 이번 일로 무엇을 얻으려 한 걸까?
우득.
임소병의 부채가 악력에 서서히 우그러졌다.
‘호가명, 그리고 장일소.’
전쟁의 승패가 어찌 되었든, 그리고 저들이 얻으려는 게 무엇이었든, 임소병은 알고 있다.
이 전투에서 가장 꼴사나웠던 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너희가 무엇을 노리건…… 다음에는 다를 거다.’
그의 두 눈에 새파란 귀화가 피어올랐다.
* * *
“교주님.”
혈궁주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로 붕대를 다시 휘감았음에도, 여전히 진득한 불쾌감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이대로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할 말이 뭐지?”
“……한 번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두 번이나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교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저들이 혹시라도 감히 교를 우습게 보게 된다면…….”
혈궁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자 입을 열었던 호법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망설이다 다시 말했다.
“게다가 명령도……. 아니, 협의도 없이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말없이 빠져나온 게 알려진다면 사패련과의 관계가……. 컥!”
그 순간, 혈궁주의 손이 호법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게 붉은 붕대 너머로도 여실히 드러났다.
“잘도 주절대는구나.”
“교…… 교…주……. 끄륵.”
“선기가 뭔지는 알고 지껄여 대는 건가? 이 지렁이만도 못한 놈이.”
터엉!
혈궁주가 쥐고 있던 호법의 목을 내팽개치듯 밀치고는 땅에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호법을 노려보았다.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었다.
‘빌어먹을.’
생각해 보면 호법의 저 말도 틀리진 않았다.
‘어떻게 해야…….’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던 바로 그때였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낯선 목소리가 다른 곳도 아닌 그의 지척에서 들려왔다.
등골로 오소소 소름이 내달렸다. 혈궁주가 황급히 시선을 획 돌렸다.
이윽고.
“다, 당신은?”
혈궁주의 입에서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붕대 사이로 드러난 두 눈에 짙은 혼란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