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36
136화 파국 2
* * *
폭풍우가 잠들지 않는 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그사이에 이질적인 잡음이 섞인 건 한순간.
똑, 똑. 똑, 똑.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정도로 자그마한 소음. 하지만 카인은 그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느긋하게 지팡이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절뚝절뚝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도 똑똑거리는 소리는 멎지 않았다. 도리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선명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끼익.
문을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공주님이시군요.”
앞머리에 맺힌 물방울이 세라의 가슴팍에 떨어진다. 축 늘어진 어깨와 살결에 착 달라붙은 드레스까지. 처연하게 그지없는 모양새였지만, 다부진 눈동자만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마음 먹었을 때 네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렇습니까.”
“다른 귀족들이라면 분명히 이런 내 모습을 보고 헐뜯었을 테지. 하지만 너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호의적이었다.”
두서없는 고해성사였다.
하지만 카인은 나무라지 않고 경청했다.
세라의 마음이 어떠할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으니까.
이치를 초월한 재능이었다. 보유한 개념도 하나 없건만, 대기 중에 떠도는 마소가 그녀의 강렬한 의지에 공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자신 없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하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그녀라면 언젠가 도달할 테니까. 더 이상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 합당한 시간만이 필요할 따름이었다.
“여태까지 현실을 외면하고 무시한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없을지.”
라프만을 닮아 유약한 성정이 줄곧 걸림돌이 되었다.
“어쩌면 아바마마보다 더 암울한 치세로 후대에 기록될지도 모르겠구나.”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시하고 피를 보기 두려워하니, 천부적인 능력도 빛이 바랬다.
“그래도, 여왕이 되고 싶다.”
그런 그녀가 변했다.
세라의 결단에 미소 지은 카인이 손짓했다.
“들어오시죠, 날씨가 제법 쌀쌀합니다.”
* * *
“옷은 맞으십니까?”
“그래, 불쾌할 정도로 딱 맞는구나.”
“아시다시피 성년식에 입으신 드레스도 제가 맞춘 겁니다.”
“으으,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 내며 소파에 웅크려 앉는다. 낯선 장소가 영 익숙해지지 않아 이리저리 둘러보는 척 고개를 돌리는 세라의 귓가에 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말씀하시죠. 제게 바라는 게 있으니 이 야심한 시각에 오신 걸 테니까요.”
뜨거운 찻잔을 난로 삼아 손을 녹인 세라는 부루퉁하게 말했다.
“심술궂구나. 내 용건은 들어올 때 말했을 텐데?”
“여왕이 되고 싶다는 말씀 말입니까?”
“역시나 들었구나.”
“대가가 필요합니다.”
“대가? 하지만 그때는 네가…….”
“그때는 제가 바랐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공주님이 먼저 오셨지 않습니까.”
“이제 보니 수전노였구나. 내가 백작을 잘못 보았어.”
코코아를 홀짝인 세라가 흥, 하고 입술을 비죽였다.
“후계자가 되는 것과 여왕이 되는 건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그건 공주님도 아실 텐데요?”
그걸 어찌 모를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였다.
세라도 마크같이 후안무치한 이가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바라는 게 뭐지?”
“일단 백작령의 명물인 온천이 대중에게 알려졌으면 합니다. 그곳으로 이어지는 도로까지 있으면 금상첨화겠죠.”
카인은 기다렸다는 듯 나불거렸다.
본디 남의 돈으로 장사하는 게 제일 즐거운 법 아니겠는가.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슈발체베인가를 견제한 왕실의 돈이라니. 오랜 숙원이 풀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세라는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국책 사업과 국도 건설.
어느 것 하나 쉬이 볼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알았다. 내가 여왕으로 즉위하는 즉시, 백작령으로 향하는 대로를 개통하고 향후 5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 거기에 관광특구로 지정해 대대적인 홍보까지 해 주지.”
“과연 공주님이십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게 빠져 있군요.”
“그게 뭐지?”
“공작위.”
무거운 대가가 훅, 치고 들어오자 세라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에 물어본 건 이쪽이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나 엿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속내가 내심 얄미웠으나, 이 또한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건 어렵겠구나. 내가 원한다 해도 다른 귀족들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
“공주님은 아직도 묶여 있군요. 아니, 새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가 공작이 된다는 건 공주님이 여왕으로 즉위한다는 뜻이고, 그건 즉 기존에 있던 세력을 전부 정리한다는 뜻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숙청.
카인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눈치챈 세라는 새삼스레 가슴이 무거워졌다.
“설마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이 자리에 앉은 겁니까? 공주님이 여왕이 된다는 건 그런 겁니다. 그리고 썩은 뿌리를 제대로 뽑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즉위했을 때뿐입니다.”
세력 구도가 정해지기 전에 쓸어야 한다. 카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천년대계의 나라를 세우는 겁니다. 일찍이 알리파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내 손으로 모든 걸 결정해야 한다는 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제가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부정부패 세력의 인명록은 머릿속에 있었다. 분석도 끝났으니,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 리 없었다.
“알펜마가는 어떻게 할 거지? 공작에게는 걸출한 아들이 셋이나 있다.”
“알고 있습니다. 셋 모두 능력이 뛰어나 후계자가 쉽게 정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제피로스 왕실과는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쓰임새가 있었다.
“세 사람을 모두 백작으로 임명하면 됩니다.”
“반발이 극심할 텐데. 다른 두 사람은 몰라도 가장 공작에 가까웠던 이는 더더욱 엇나갈 거다.”
“앞으로 5년 동안 차지한 공작령만큼 영지로 인정해 준다고 선포하면 다른 두 사람은 공주님을 지지할 겁니다.”
“두 사람을 방패막이 삼아 그 기간 동안 내실을 다지라는 거군.”
“시간이 흐르면 그들은 공주님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막힘없는 답변에 세라는 탄성을 터트렸다.
조삼모사와 다를 게 없으나,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고 싶은 이들은 이쪽에 붙을 터.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어지간히도 열심히 준비했군.”
“그렇습니까?”
“칭찬이 아니다. 긍정적인 생각만으로 계획을 구상했다는 게 느껴질 정도니까. 백작의 뜻대로 움직인다 쳐도, 일단 알펜마 공작을 넘어서야 하는데 그건 어찌할 거지?”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그리고 라일은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수준은 일당백. 상황과 조건만 맞는다면 홀로 왕궁을 돌파할 수도 있었다. 왕실을 지키는 근위대장, 저스트도 그에게는 당해낼 수 없다고 시인했으니까.
정면 대결은 고사하고 뒤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왕실파가 득세하는 것도 모두 그런 그가 뒤에 서 있기 때문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혹시 알펜마 공작님의 성절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알고 말고. 어렸을 때 잠깐 배웠으니까.”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라일이 익힌 성절은 ‘캐논 울프’. 포함된 개념은 총 다섯 개였다.
검술 보정, 검격 상승, 전투 본능, 검기 중복, 검기 사출.
세라의 설명이 끝나자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념만 들었지만, 어떠한 성절인지 알 것 같았다.
“완전히 검술을 위해 만들어진 성절이군요.”
“그중에서도 특히나 주의해야 할 개념은 검기 사출이다. 한 번 베면 사라져야 할 검기를 허공에 잡아 두는 기술이니까. 언제는 화살처럼 쏘기도 하더구나. 처음에 나는 그가 마법사인 줄 알았어.”
“그 또한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공주님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레서 왕국을 다스릴지에 대한 고민만 해 주시면 됩니다.”
너무나도 쉽게 단언하는 카인의 모습에 세라는 머리를 긁적였다.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대화하고 있는 건지, 옆집을 털기 위해 작당을 하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솔직히 모르겠구나. 백작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걸 홀로 처리하겠다니…….”
“속시원하게 말씀하시죠, 믿기지 않는다고.”
“백작은 언제나 날 당혹하게 하는구나.”
“빙 둘러 말하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카인이 손뼉을 치자 피아가 함을 들고 왔다. 두 팔을 벌려도 모자랄 듯한 크기. 세라는 그게 뭐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라면 공주님도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달칵, 경쾌한 소리를 내며 경첩이 열린다. 그 안에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세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이건…….”
* * *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파벌, 중립파는 왕실파와 귀족파가 차지하지 못한 공백 지대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그리고 두 세력에서 떨어진 이들을 받아들이며 유명세를 탔다.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압도적인 자금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원동력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노도와도 같은 기세는 중앙 정계까지 이어졌다.
왕실에서 벌어지는 암투 같은 건 모르는 척 독야청청하던 이들이 로스를 따라 하나둘씩 나타나 목소리를 높이니 오랜만에 열린 회의도 절로 떠들썩해질 수밖에 없었다.
왕국 최강자인 라일이 등을 돌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게 작금의 상황.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의견을 내놓았다.
드드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
난데없이 들어온 불청객은 허락도 없이 당당하게 가장 높은 단상으로 올라갔다. 왕좌에 앉은 마크는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세라?”
“구해 왔습니다.”
쿵.
검을 뽑아 바닥에 내리꽂는다.
순간, 보석을 깎은 듯 영롱한 황금빛 검신이 회의장을 밝게 비추었다. 검 손잡이 사이로 뜨거운 열풍이 몰아치자 마크는 숨이 멎는 듯했다.
얕은수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보구가 그곳에 있었다.
어찌 그 자태를 잊을 수 있을까.
“……레디샤.”
미간을 일그러뜨린 마크는 뒤따라 들어온 카인을 향해 고갯짓했다.
“백작이 한 건가?”
“제가 했다니요. 가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전부 공주님이 직접 이룩하신 성과입니다. 저는 옆에서 거드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
거짓말이라는 게 빤히 보이지만, 반박해 봤자 추해질 뿐이었다.
마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터무니없는 약속을 한 건 어디까지나 세라가 실패할 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 저변엔 타나가 햇병아리들에게 레디샤를 양도할 리 없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란 듯이 레디샤를 가지고 올 줄이야.
베리타 제국이 무너져도 거래가 성립될 리 없다고 단언했건만, 그것도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가신들이 보는 앞에서 번복하는 건 악수였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표리부동한 언행 때문에 라일이 멀어졌다고 소문이 난 것이다. 구태여 구설수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더욱이 세르듀스의 행실이 가관인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최선책이 없다면 차선책이라도 노려야 할 터.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마크가 크게 소리쳤다.
“레서 왕국의 국보인 레디샤를 찾아와 당당히 그 능력을 입증한 세라를 제피로스 왕실의 후계자로 삼겠다. 먼저 선정되었던 세르듀스는 지금까지 그에 걸맞은 덕목을 보여 주지 못했다고 판단한 바, 다시 왕자로 받아들이겠다. 모두, 그리 알도록.”
회의의 시작, 세라의 등장, 그리고 마크의 인정까지.
일련의 과정을 쭉 지켜본 이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에 넋이 나갔다는 말이 정확할 터.
하지만 세라는 그들에게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 번 레디샤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나는 더 이상 일개 공주가 아니다. 아바마마의 지엄한 명에 따라 왕세녀가 되었으니까.”
황금빛 망토를 두르며 더없이 근엄하게 일갈한다.
“그러니 모두 고개를 조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