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137
137화 충돌 1
* * *
“국왕 전하의 명 아래 후계자가 변경되었습니다.”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야?”
“공주님께서 레디샤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말에 세르듀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마디로 말해 세라가 왕세녀로 인정받았다는 소리였다.
진상을 파악하고자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간 세르듀스는 회의장에서 나오는 세라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허리춤에는 처음 보는 검이 걸려 있었다.
“누님.”
“누가 네 누이라는 거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 세라가 일거에 부정했다.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안에는 절제된 분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적 없는 표정에 세르듀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성인 남성조차 주춤거리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기백.
며칠 못 본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미, 미안해. 네베티에 관한 일이라면 내가 전적으로 잘못했어. 이렇게 사과할게. 그러니 그렇게 꿍해 있지 마.”
“네 눈에 내가 그렇게 보였다면 큰 착각이라고 말해 주고 싶구나. 어리석은 동생아, 나는 마음이 언짢은 게 아니다. 진심으로 널 부수고 싶을 뿐이다.”
생애 처음으로 뉘우쳤건만, 세라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호의가 짓밟혔다는 생각에 눈썹이 들썩인다. 이쪽이 먼저 고개를 숙이면 알아서 받아들이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아무래도 세라는 용서할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세르듀스는 세라의 득세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당초 마크의 친자식도 아니지 않던가. 늦든 빠르든 진실이 밝혀지면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 것도 알지 못한 채 저리 반박하다니. 이죽거리는 소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잘 생각해. 어차피 누님은…….”
세르듀스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뒤에서 나타난 카인이 지팡이를 스윽 내밀었다.
“거기까지 하시죠, 왕자님.”
“백작, 오랜만이야. 몰라보게 달라졌는걸? 누님을 등에 업어서 그런가, 아주 신수가 환해졌어. 하지만 저번에 말했다시피 누님은 결코 여왕이 될 수 없어. 왜냐하면…….”
세르듀스에게 다가간 카인이 손을 들어 그 말을 제지했다.
“그만하라고 말했을 텐데.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지는 살기에 세르듀스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본능이 먼저 경종을 울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와 대치하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여기에서는 물러나는 게 상책이라고.
그제야 세르듀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인은 반푼이가 아니라는 걸. 모두 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르듀스가 움찔거리자 카인은 밝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처럼 조용히 있는 게 왕자님에게도 좋을 겁니다. 근거도 없는 소리를 나불거리다 등불처럼 꺼지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아예 살인 예고까지.
“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왕자님에게 소식을 전하러 간 시종. 누가 보냈다고 생각합니까?”
말문이 막힌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워낙 많은 이들이 돌아다니는 왕궁이다 보니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카인이 보낸 첩자라면?
침실까지 사람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음에는 시종이 아니라 조금 더 특별한 임무를 맡은 전문가일 터.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세르듀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카인이란 사내의 진면목이었다.
그때, 세라가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는 거지?”
“왕자님이 궁금해하는 게 많아 잠시 설명 중이었습니다.”
미심쩍은 눈으로 카인과 세르듀스를 번갈아 본 세라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시답잖은 잡담은 됐으니 이리 와라. 나는 백작이 세르듀스와 말을 섞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여부가 있겠습니까.”
카인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세라를 따라가고 난 뒤. 홀로 남은 세르듀스는 털썩 주저앉았다.
세라, 그녀는 알까.
자신이 누구와 손을 잡은 건지.
* * *
중앙 정계에 자리 잡은 중립파는 새로운 바람을 원했다. 그들의 목표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본디 피해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던 이들이었다.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일처리는 빠르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눈덩이를 굴리는 것처럼 몸집이 불어나는 건 당연지사.
왕실파와 귀족파, 그 사이에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중립파는 세라를 중심으로 단결했다.
“대단해.”
중립파에 소속된 이들을 면면이 살펴본 세라는 탄성을 터트렸다. 행정, 정치, 법무, 외교 등등 전부 각 분야에서 이름난 이들뿐이었다.
어째서 카인이 그렇게나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땅만 있다면 지금 당장 나라를 새로 세운다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마냥 근거 없이 떠든 건 아니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슬쩍 앞자리를 쳐다본다.
맞은편에는 중립파를 이끄는 수장, 로스 미티어벨이 앉아 있었다. 혈연으로 묶인 외조부이기도 했으나, 별다른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미리 말해 두지. 나는 백작을 존중하겠지만, 편애는 하지 않을 거다.”
“저희들은 왕세녀님을 떠받치기 위해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여왕이 되셔도 변함없이 받들겠습니다.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허투루 듣지 마라. 중립파가 조금이라도 부정을 저지를 경우, 내 살을 파먹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단죄할 생각이니까. 그래도 따라올 수 있겠나?”
“바라신다면 지옥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로스가 고개를 끄덕인 것도 잠시뿐. 세라의 늠름한 모습에 그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크흑, 언제 이렇게나 자라신 건지 감사스러울 따름입니다. 힘드시다는 걸 알면서도 역량이 부족해 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제 불충입니다.”
손수건을 적신 로스가 코까지 풀자 세라는 두 팔을 휘휘 저었다.
“그, 그만 울거라. 그리 반응하니 내가 꼭 나쁜 사람 같구나.”
두 사람을 쳐다본 카인이 밝게 웃었다.
“기쁘면 기쁘다고 말해도 됩니다.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건 행운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듯한 대답에 세라는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백작은 언제나 날 당혹케 하는구나.”
“언제나 왕세녀님을 위한 조언을 할 뿐입니다.”
자그마한 소란이 지나간 뒤, 세라는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환담도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래서, 귀족파는 어떻게 할 거지, 백작?”
“협의 중에 있습니다. 왕세녀님의 이름을 파니 득달같이 달려들더군요.”
물론 권력의 개가 된 그들과 손을 잡을 리 없었다. 카인이 손을 내민 건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끼어들 명분을 주면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왕실파는 분열해야 하니까.”
마크와 라일이 양패구상하는 게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전개였던 것이다.
그때, 로스가 고갯짓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마크와 공작, 둘 다 노련한 귀족이라네. 감정의 골이 아무리 깊다 해도 피해가 클 것 같으면 절대 싸우지 않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해결할 건가?”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자세한 속사정을 모르니 묻는 걸 테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마크와 라일은 충돌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비릿하게 웃은 카인이 지팡이를 두드렸다.
열심히 흩뿌린 분란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였다.
* * *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날아와 벽에 꽂혔다. 결린 어깨를 푸느라 머리를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대로 뒤통수에 구멍이 생겼을 터.
때아닌 날벼락에 집무실에서 정무를 보던 마크는 황급히 탁자 아래로 들어갔다.
“거기, 누구 없나! 습격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복도마다 불이 켜지고, 여기저기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될 즈음, 근위대장 저스트가 뛰어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현재,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왕궁에 침입했습니다.”
“알펜마 공작의 짓인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저 검은 코트와 가면을 쓴 무리가 침입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엠인가.”
매튜가 이끄는 집단, 리벨리온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식일 줄이야.
“대담하군.”
“함부로 단언하는 건 금물이지만, 아무래도 내부에서 동조하는 자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긴 범법자 무리가 이리 쉽게 왕궁에 들어올 리 없으니까.”
순간, 예전에 카인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필시 그를 지원해 주는 귀족이 있을 겁니다.’
리벨리온을 뒤에서 밀어줄 정도로 권세가 강한 가문은 그리 많지 않았다. 왕실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
인정하기 싫지만 라일이 가장 유력해 보였다. 그를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도, 시기가 너무나 공교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좋지 못한 소문이 귓가에 들려와 거슬리던 참이었다.
경망스럽게 미망인만 노리는 점하며, 왕이라도 된 것처럼 영지를 다스리는 것까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었다. 숨길 수 없는 버릇이 밖으로 드러난 거다.
아마 이건 라일이 보낸 경고일 터. 손에 쥐고 있는 패가 많으니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매튜를 부린 걸 테지.
이렇게 된 이상, 라일을 거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치지 않으면 당할 뿐이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마크는 즉시 왕명을 내렸다.
“공작가를 포위해라!”
그 시각, 라일에게도 결정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상으로, 살로메에 관한 조사를 마치겠습니다.]보고서를 와락 구긴 라일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살로메가 시녀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을 때부터 묘하게 싸하긴 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그녀의 청이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들어주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뻔히 볼 수 있는 곳에서 이런 참상이 일어났을 줄이야.
전속 시녀를 죽인 녀석에게 지금껏 충성을 맹세했다는 사실에 라일은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대국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하잘것없는 오점일지도 몰랐다. 혈육이 살해된 것도 아니고, 가문에 피해가 간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섬긴 대가가 고작 이런 거라니. 실망을 금치 못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고민하는 건 시간 낭비였다.
정황이 포착된 이상, 이 관계의 끝은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마크는 여러모로 부적합한 왕이었다. 단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 같아 눈감고 있었을 뿐.
분수를 모르고 날뛴다면, 그 전에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서구를 날려라. 오늘부터 제피로스 왕실은 알펜마가와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