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word priest reincarnated as a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299)
검공가에 환생한 검제 (299)
에덴(Eden).
제국에서는 ‘천계’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은 공간이다.
옛 시대에 멸신전쟁으로 산산조각이 난 천상, 아스가르드와 올림포스 같은 신역을 통합하고 짜깁기해서 만들어낸 소차원. 태생부터가 신족들을 섬기기 위한 봉사종족이라 그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며, 지상의 필멸자들은 천계에서 몇 시간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영혼에 금이 간다.
반신급에 도달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다면전선으로 힘의 대부분을 소모당하고 있었던 제국에선 그 국경까지 비워가면서 천계를 공략하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신왕 폐하께 진상해야할 예물들의 준비는?}
{신대에서부터 귀중히 간직해온 보물들을 전부 모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신왕께서도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필멸자 태생이라지만 그 카르데나스의 혈통이니,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드래곤의 말예라고 할 수도 있는 분이시다. 용살 관련의 유물들은 따로 분류하도록.}
제아무리 신이 되었다지만 인간 태생이라고 깔봐야할 천족, 그 오만방자한 종족은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져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외신들에 유린당하리라 믿어의심치 않았던 중간계가 신좌의 주인을 탄생시키고, 지하세계로 넘어가서 결전을 벌였던 것도 모자라서 승리하기까지 했다. 다면전선을 모두 정리한 제국은 이제 천계조차도 간단히 무너트릴 수 있는 상태였다.
건국제 시절부터 무려 1,000년, 인류의 가능성을 모멸하면서 수없이 짓밟아온 천족들에게 있어 그 역학관계의 변화는 가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주계획을 진행하는 쪽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발키리여왕 [시그드리바]의 독백에, 에인헤랴르를 통솔하는 전사 [로드브로크]가 거칠게 맞받아쳤다.
{차원이주계획은 문자 그대로 살아남을 방법이 그 하나밖에 없을 때에만 시도해야하는 수단이었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날아가서, 무엇인지도 모를 것들과 싸우면서, 허무에서 만물을 재건해야할 일이 그토록 쉬워보이는가?}
{우리들을 증오할지도 모르는 신의 발 아래에 엎드리는 일, 그것보다는 훨씬 더 쉬울지도 모르지.}
아르카디아 제국과 천계 사이에 불가침협정이 존재한다지만 레너드는 그 굴레를 벗어난 존재였다.
황제 라일라의 체면 때문에 협정파기를 시도하지 않는 것에 불과했으며, 언제라도 천계로 쳐들어와서 그들 전원을 도살할 수 있는 절대강자. 천계에서라면 진신급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천족의 지도자들도 그 앞에선 허수아비나 다름없을 터다.
{하! 필멸자들을 위해서 우리처럼 쓸 만한 상위종족을 크게 징벌하신다고? 그럴 리가 있겠나!}
옛 시대를 경험해봤던 상위종으로서 ‘신을 대하는 태도’라면 사실 [로드브로크]의 말대로였다.
필멸자에게 때때로 정을 붙이거나 애착을 가지는 신이 없던 건 아니었으나, 상위종만 수천 명을 거둬들일 수 있는 기회를 케케묵은 원한 따위로 걷어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좋겠네.}
그러나 [시그드리바]는 그 말을 이해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큿?!}
{이건…!}
어마어마한 존재감이 나타났다.
힘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천족이라면 그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기척이었다. 신화시대에나 볼 수 있었던, 신왕 [오딘]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그걸 상회하고 있다.
신좌의 주인.
그 명칭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제서야 깨달아버린 [시그드리바]와 [로드브로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에덴의 통치권한이…신왕에게 넘어가버리고 있다!’
‘결국 신역은 그 근본부터가 신의 전유물이라는 뜻인가? 이 상태라면 7명의 지도자가 힘을 합치더라도 신왕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작하기도 전에 벼랑까지 내몰렸구나.’
레너드의 출현을 감지하자마자 두 명은 상공으로 날아올라, 음속의 벽을 쳐부수면서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몇 분만에 목적지로 찾아간 [시그드리바]와 [로드브로크]는 이내 동족들의 치욕적인 모습을 마주해야했다. 오색의 광휘로 이글거리는 신왕 앞에서 납작하게 엎드려있는 천족들.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일 자체가 수천 년만이니, 그 무렵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기분이 드는구나.’
신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하다못해 영광스러운 역할이라고 배우면서 실천해왔건만, 우두머리로 대접받아온 세월이 천 년 단위로 길어지다보니 굴욕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시그드리바]와 [로드브로크]의 접근을 알고 있던 레너드가 돌아서면서 그들에게 명령했다.―천족 전체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자들을 집결시키고,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거라.
{예, 신왕이시여.}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굴욕감을 애써 외면하며, 두 지도자는 다급하게 7인의 천족대표를 모두 불러모았다.
그들과 레너드가 간 곳은 바로 칠성궁(Septentrions).
옛 시대에서부터 살아남아온 상위종, 그들이 대소사를 정할 때마다 회합장소로 쓰이는 장소였다. 상중하의 좌석개념이 안 정해진 형태였으나,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레너드를 중심에 둔 좌석들이 일곱 명의 천족지도자로 채워졌다.
{{{신왕폐하께서 왕림하심을 경축드리옵니다.}}}
아다만티움으로 된 철판보다 뻣뻣한 허리가 구부러지고, 그 머리통까지 땅에 댈 기세로 조아린다.
레너드를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알게 모르게 출신을 얕본다거나 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수천 년만에 다시 보게 된 주신급의 위압감은 영혼에 새겨져있는 본능을 끌어냈다. 신의 일꾼이자, 시녀이자, 병사로서 절대복종하게 만드는 충동.
발키리 여왕, [시그드리바].
에인헤랴르 총대장, [로드브로크].
켄타우로스의 우두머리, [네소스].
숲지기 님프, [알세이스].
나가족의 군주, [카르코티카].
페어리 여왕, [아크티아스].
사티로스족의 현자, [파우누스].
천계에서는 진신급 하위권의 힘을 구사할 수 있는 천족들이 7체나 모였음에도 감히 레너드에게 무례하지 못한다. 그 몸에 새겨진 본능만이 아니라 강자로서의 직감, 절대적인 실력차를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잡담이나 하러온 것도 아니니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그들의 복종의사를 받게 된 레너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회담의 주제부터 꺼내들었다.
―다른 차원으로 이주하겠다던 계획을 철회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만, 내 휘하로 들어오겠단 걸로 이해해도 되겠나?
{사티로스족의 파우누스가 그 하문에 답하겠나이다.}
염소와도 같은 하반신을 지니고, 좌우 관자놀이에서 사슴뿔 한 쌍이 돋아나있는 노인이 정중하게 답했다.
사티로스(Σάτυρος).
올림포스의 봉사종족에서 자주 보이는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디오니소스]를 섬겼던 종족이었다. 장난기 많고 색을 탐하는 천성을 지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혈기를 잃어버린다면 현자처럼 변화한다고 전해진다.
{폐하께서 먼저 헤아려주신 것처럼, 저희들은 봉사종족으로 그 본분을 다하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아주 쓸모가 많습니다. [디오니소스]님을 섬겼던 저희 사티로스는 농작물의 생산량을 극대화시키고, 가축들의 생육을 도울 수 있습니다. 거둬주시면 영육을 다 바쳐서 신왕폐하와 신민들을 섬기겠습니다.}
공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저와 그 동족의 쓸모를 거론하는 모습은 과연 일족의 수장다웠다.
모범적이기까지 한 웅변에 느끼는 바가 있었나보다. 나머지 지도자들도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리더니, 자신과 자기 종족의 유용성과 충성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장황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바로 다음과 같았다.
에인헤랴르는 그 충성맹세로 결속된 신만 무사하다면 몇 번 죽어넘어져도 되살아나는 불사신의 전사.
켄타우로스는 제 신체의 강인함과 삼림의 친화력을 이용한, 동식물의 번성 및 생태환경의 정원사.
님프는 그저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번성하게 만들고, 오염되거나 황폐화된 지역을 복구가능한 요정.
나가족은 천 년 이상의 수명과 신에 가까운 격을 이용하여, 신족들에게 엄청난 양의 신앙심을 공급할 수 있는 사제.
페어리는 그 마법능력과 물질계와 영계를 넘나드는 특질에, 음악이나 미술 같은 분야에서 특출한 예술가.
마지막으로 지도자 중 하나, 발키리 여왕 [시그드리바]만이 거무죽죽하게 그늘져있는 얼굴로 침묵했다.
천족 지도자들은 그녀의 태도가 남아있었던 자존심의 발로, 오기 따위라고 곡해했는지 신이 나선 몰아붙였다.
{시그드리바! 감히 신왕께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네 오딘은 이미 사라졌다! 새로운 왕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이 차원에서 떠나라!}
{그대가 물러나더라도 발키리들은 책임을 피할 수 없소!}
에덴이라고 하는 울타리에 지켜지고 있을 때와 다르게 신의 총애를 받아, 새로운 시대에서 군림해야할 때였다.
분류상으로는 다 천족이지만, 결국 동족은 아니었다.
천족을 구성하는 일곱 종족에서 하나만 줄어들어도, 나머지 종족들이 차지하게 될 파이는 제법 커진다. 수천 년이나 함께 싸워왔는데도 전우애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발키리의 여왕, 시그드리바가 신왕께 죄를 고합니다.}
주변에서 쏟아진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너드의 앞에 오체투지한 발키리의 여왕이 고해(告解)를 시작했다.
{신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으로 인류를 적대해왔으며, 외신들과의 결전에 참가하지도 않고 도주를 계획했던 죄. 그 죄값부터 모두 청산하고 나서 귀의를 청하겠나이다.}
[시그드리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지도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고개만 갸웃거렸으나, 레너드는 처음으로 이채를 띤 눈동자를 들어서 발키리여왕을 바라보았다.발키리(Valkyrie).
천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최전방에 자주 출현한, 청룡기사단 베테랑들이 이를 갈아대면서도 숙적으로 인정한 종족.
인간들과 가장 빈번하게 충돌해왔기에, 그 사상과 이해도가 높아지기라도 한 걸까?
‘한 마리도 남김없이 죽여야하는가 생각했건만…, 하나 정도 살려놓고서 혈채를 받아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만약 [시그드리바]까지 나머지 지도자들과 비슷한 망언으로 굴종했더라면, 레너드는 오늘 이 자리에서 천계의 잔존인원을 남김없이 몰살해버릴 생각이었다.
그래도 몰염치하지 않은 자가 한 명 정도는 남아있으니, 그 하나에게 일임한다면 혈채를 받아내는 것도 가능하리라.
레너드가 말했다.
―옳다.
그와 동시에 그 손아귀에서 오색의 신검이 출현했다.
오행신검.
[켄 크루어히]의 목을 잘라내면서 한층 더 강력한 권능으로 거듭났던 섬광이, 여섯 명의 천족에게 날아들었다. 살려둬야할 값어치를 더 이상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뭣?!}
{자, 잠시만—!}
{신왕이시여!}
{부디 용서를!}
천계에서나마 진신급의 무력을 보일 수 있었던 지도자들이, 추풍낙엽처럼 갈가리 찢어지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로드브로크]의 쌍도끼와 수염, 두개골이 단숨에 쪼개졌다. [네소스]는 그 활의 시위를 잡아당기기도 전에 양단되었다. [알세이스]는 그저 체념한 표정으로 산산조각났으며, 몸의 방어력으로 일격을 버텨냈던 [카르코티카]도 두 번째 참격에 토막나버리면서 허무하게 숨이 끊어졌다. [아크티아스]가 영계로 도피하려고 시도했지만, 오행신검은 물질계에 구애되는 병기가 아니었다. 영체가 된 페어리여왕을 베어죽인 신검은 결국 [파우누스]의 심장까지 뚫어버리고서야 때 아닌 피바람을 멈춰세웠다.{…용서를, 빌어야했던, 겁니까…?}
{너희들은 군림하고자 하면서 책임감을 모르고, 지배하고자 하면서 애민하는 법을 모른다. 구세의 역할마저 떠넘겼으면서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니, 가차없이 죽어마땅하다.}
{그런…건, 신족들에게서…배우지, 못했습니다….}
[파우루스]는 허탈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띤 채, 칼날에서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잿더미로 무너져내렸다.서늘한 시선으로 그 최후를 마중한 레너드가 읊조렸다.
―배워야할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이 네 잘못이겠구나.
순식간에 여섯 명의 천족지도자를 도살해버린 레너드는, 제 앞에 아직도 엎드려있는 [시그드리바]에게 명령했다.
―유예기간으로 1,000년을 주겠다. 그 안에 발키리의 가치를 입증한다면, 오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계속해주겠다.
{…영광으로 알고서 받들겠습니다, 신왕이시여.}
의연한 태도를 지키면서도 두려움을 다 감추지 못한, 천족 최후의 지도자를 일별한 레너드가 그 길로 천계를 떠났다.
{………….}
수천 년만에 재림하게 된 신왕, 레너드.
그 불세출의 존재가 천족들에게 무엇을 바랐는지 읽어낼 수 없었더라면, [시그드리바]도 이 자리에서 절명한 자들과 다를 바 없이 소멸하고 말았으리라. 그녀는 레너드가 왜 1,000년을 유예기간으로 준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아르카디아가 그동안 감내해온 세월, 입니까.}
건국제 라그나와 삼공 가문의 시조들로부터 시작된, 인류가 중간계를 수호하기 위해서 피를 흘려왔던 기한. 그것이야말로 레너드가 결정한, 천족들이 앞으로 갚아나가야할 채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