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ing to Fight Bulk RAW novel - chapter 174
하지만 시간도 타이밍도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 자신을 위협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클럽이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리라.
또한 이미 전쟁의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남영진이 어떤 방법을 쓴다고 해도 이미 그가 앞장세운 병사들과 장수들은 모두 대검 특임 검사실로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총장님.”
“어, 왜?”
“오늘 자진출두한 사람들과 법무부 장관님 조사 좀 지휘해 주십시오. 저는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대검.
모든 책임을 지고 있는 내가 당연히 붙어 있어야 했지만,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놈 만나러 가게?”
“네.”
강철호 총장 역시 내가 향할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그는 되묻지 않고 내 자리에 앉아 자신이 해야 할 업무를 준비했다.
“그래,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다녀와. 아니, 잡아와.”
나는 그의 말에 깊게 몸을 숙였다.
꾸벅−
강철호 총장에게만 인사를 건넨 건 아니었다.
문 앞에 서 있던 나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섞어 인사를 건넸다.
강철호 총장과 백성원 원장.
내 한마디로 기꺼이 달려와 준 민태호와 강서빈.
초임 때부터 나를 보좌해 준 수사관들과 실무관.
대검에 와서 만난 박하준 사무관과 그밖에 여러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수원 때부터 나와 같은 꿈을 갖고 걸어온 서윤호까지.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 나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 *
사람과 철저한 보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여의도 한복판에 유령 건물이 생겼네.”
클럽이 만들어 놓은 부띠끄 호텔에는 어떠한 투숙객도 찾지 않는 호텔이 되어 버렸다.
뭐… 애초에 투숙객을 위한 호텔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호텔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여전히 주차장이었고, 몇 번 와 본 탓에 능숙하게 호텔 입구로 향했다.
주차장에 보이는 차량에는 모두 검은색 천이 씌워져 있었지만, 고급스러움은 숨길 수 없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많이 주차되어 있는 차량.
클럽에서 받은 고급 세단 때문에 자신들의 죄가 추가될까 두려운 클럽원들이 놓고 간 것이었다.
“이 주차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차네.”
그리고 나는 문짝에 검찰 마크가 박혀 있는 차량을 주차장 가운데 떡하니 주차했다.
평소에 관리자인 나를 태우고 오던 고급 세단도, 우리 집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내 차량도 아닌, 국민의 세금으로 구입한 차량을 말이다.
“아니지… 이곳에 가장 필요한 차량일지도.”
검찰 마크가 새겨진 수많은 차량이 곧 부띠끄 호텔 지하 주차장을 가득 메울 것이다.
호텔 안에 숨겨진 어마어마한 양의 압수 수색 자료들을 수집해야 될 테니까 말이다.
백숙집과 그 안에 있을 제너럴 룸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수거된 물건들 중 국민들의 세금을 약탈해 구입한 고급 세단들은 처분되어 다시 국고로 환수되겠지.
“지켜보고 있나 보네.”
지하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는 로비에 다다르자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부띠끄 호텔의 모든 엘리베이터는 원격 조종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누군가 조작하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휴… 궁금하네.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이미 모든 게 까발려진 탓에 부띠끄 호텔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남영진밖에 없을 확률이 높았다.
클럽원들의 대부분은 이미 검찰 조사를 받고 있으며, 부띠끄 호텔을 관리하던 엔지니어들은 이미 대검에 의해 신변이 구속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앉아, 자신을 데려갈 저승사자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움직이는 남영진의 모습이 참 궁금했다.
띵—
문이 열리고 환한 대낮에도 부띠그 호텔의 복도에는 햇살이 스며들지 않았다.
밖에서 부띠끄 호텔을 본다면 건물 전체가 유리로 덮여 있어 채광이 잘 될 것 같지만, 건물 내부는 화려한 조명이 없다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 스위트룸에서 뵙죠.
“하하, 숨어서 지켜보는 건 여전하네.”
— 숨어서 지켜보는 건 이제 소용없죠. 검사님이 이미 모든 걸 알아 버렸으니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음성.
이미 마스터의 정체가 남영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 곧 보지.”
또각—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에 울려 퍼지는 구두 굽 소리.
스위트룸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만들어 낸 소리였다.
길고 긴 수사를 끝내 줄 남영진이 있는 스위트룸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스위트룸은 오랜만이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작은 문틈.
놈이 만들어 놓은 그 작은 문틈을 열고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갔다.
“수갑이라도 가져오실 줄 알았는데 안 보이네요. 아니지… 뒷주머니에 챙겨오셨나?”
“수갑 말고 다른 건 있죠.”
벨트 뒤쪽으로 느껴지는 무거움.
실린더에 들어 있는 총알에 공포탄을 섞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껏 보아온 남영진은 비열한 짓을 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모든 걸 잃고 패배한 사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챙겨온 것이다.
물론 녀석이 덤벼든다고 내가 질리는 없다.
그저 남영진의 돈을 받고 스위트룸 어딘가에서 칼을 들고 숨어 있을지 모를 남자들을 위해 대비한 것이지.
“하하, 수갑보다 더 무서운 걸 가져오셨구나.”
녀석이 빛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은 아마 스위트룸이 될 것이다.
아니, 녀석은 지금껏 빛을 보며 산 적이 없었다.
“혹시 햇빛 알러지라도 있습니까?”
스위트룸에도 창문이 있지만 모두 검은 천막으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넓디넓은 스위트룸을 굳이 어둡게 만든 이유를 물었다.
“아니요. 저는 썩어 있는 여의도 풍경을 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당신이 썩게 만들었다는 건 모르는 건가?”
“그렇게 말하시니 서운하군요. 창문 밖 여의도는 원래부터 썩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정화되지 않죠.”
“그래. 아무리 노력해도 정화되지 않겠지. 하지만 아무도 정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썩어 가 결국 손 쓸 수 없게 되어 버리지.”
“왜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런 노력조차 없으면…….”
“아니. 검사님 말대로 어차피 정화되지 않는 세상인데 왜 노력하냐고 묻는 겁니다. 계속해서 썩어 가 손 쓸 수 없게 되어 버릴까 봐? 아니요. 썩을 대로 썩고 녹이 쓸어야 결국엔 사라지는 법입니다.”
지금껏 들어 온 마스터란 놈의 뛰어난 언변.
남민지 앵커의 아들이자 카스티요란 인물을 대역으로 세워 전한 자신의 뜻.
내 눈앞에서 남영진의 입으로 들으니 녀석이 진짜 마스터였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의미 없는 사이클을 반복하느냐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당신 말대로 가만히 냅둬 전부 썩어 버리면 사라질 것 같나?”
“물론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죠. 다만, 모두가 썩어 버린다면 더 이상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썩은 것들끼리 더 많이 가지려 싸우다 자멸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자멸한다면 새로운 새싹이 돋아나겠죠. 그 새싹만큼은 깨끗하게 키워 썩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하하하! 개소리를 참 신빙성 있게 하는 재주를 가졌네.”
녀석의 말에 굳이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는 처음부터 한 검사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더러운 영광이네.”
“어쩌면…….”
“왜? 두려웠나? 지금처럼 당신 손에 수갑을 채울까 봐?”
이번에도 녀석의 입에서는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 나올 게 빤하기에 녀석의 말을 끊어 버렸다.
하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아니요. 당신이 어쩌면 나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난 단 한 번도 당신 같은 인생을 산 적이 없어.”
“인생의 목표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다시 태어난 인생을 말하는 거지. 정확히 말하면 다시 주어진 기회죠.”
“뭐?!”
“검사님 표정을 보아하니 제 예상이 맞는 것 같네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하하, 너무 정의로우셔서 그런가? 거짓말은 잘 못하시네.”
뽕!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 뚜껑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마지막 술이 될 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 수 있죠?”
“그러시던가.”
샴페인 병을 들고 말하는 남영진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술은 제가 아니라 검사님이 드셔야 되겠군요.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는 데에는 술이 최고니까요.”
“쓸데없는 소리 작작하고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해 보지.”
“당신에게만 주어진 기회라 생각했습니까?”
“무슨 기회를 말하는지 모르겠군.”
“저는 제게 일어난 일이 저 혼자만의 축복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미 모든 게 끝난 일이라 생각했다.
승자는 나였고, 남영진의 넋두리나 들어주다가 검찰로 끌고 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탓에 내 눈빛을 흔들리게 하였다.
“조금 쉽게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다시 한번 주어진 기회…….”
쪼르륵—
와인 잔에 샴페인을 따르는 남영진의 옆모습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온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 말입니다.”
“…….”
이번에도 남영진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까는 대답할 가치가 없던 거라면 지금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 너도…….”
“네, 맞습니다. 저 역시 한 검사님과 같이 과거로 돌아왔죠.”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하하, 그런 표정으로 ‘너도’라는 말씀을 하시고서도 발뺌하시는 겁니까?”
“아니. 발뺌할 생각은 없어. 다만, 내가 과거로 돌아온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거야.”
“반대로 묻겠습니다. 검사님은 제가 왜 과거로 돌아왔다는 걸 생각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건…….”
녀석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남영진이 어떻게 클럽의 마스터가 될 수 있었는지.
정치판에서 몇 십 년을 굴러먹은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는지.
지금껏 클럽이라는 존재를 숨기고 수많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지.
수도 없이 많은 고민과 진실을 파헤치려 했지만, 과거로 돌아왔다는 단 하나의 사건을 대입한다면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알기론 클럽은 역사가 오래된 걸로 아는데 당신은 이제 겨우…….”
“네, 맞습니다. 이제 겨우 서른여덟이죠. 하지만 제가 클럽의 마스터 자리에 오른 건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열여덟… 나와 똑같은 나이로 돌아갔네.”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알고 있었죠. 당신이 열여덟 살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수사 능력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 저는 검사님의 모든 걸 알아내려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괴롭힘 당하던 공부 잘하던 모범생이 변하기 시작하던 때가 바로 검사님이 열여덟 살인 시절이라는 걸 알아냈으니까요.”
남영진은 나의 모든 기록을 살펴본 것이다.
그렇게 내 인생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내가 처음 사고를 친 열여덟 살 그날을 발견한 것이고.
“그리고 당시 서부 지검장이던 강철호 총장의 딸을 살해한 범인을 잡아다가 바친 사건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언론에 발표되진 않았지만, 남영진은 알 수 있던 사건.
한낱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 마포, 은평, 서대문, 용산 경찰서까지 네 곳의 경찰서를 포함해 서부 지검 검사 전체가 매달려도 잡지 못한 범인을 가져다 바쳤다는 사실은 남영진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이 봐도 말이 안 된다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인생에서 한 검사 당신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렇게 좋은 삶은 아니었겠죠. 다시 주어진 기회에서 마치 병처럼 정의로움을 갈구하고 있으니.”
“당신은?”
“저 역시 그리 좋은 삶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 창문 밖 여의도 한복판에 있는 하늘색 지붕 밑에서 일어나는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국회의원이었다는 소리인가?”
“국회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국회의원만 있는 게 아니죠.”
“그럼?”
쏴악—
내 말에 녀석은 창문으로 향해 커튼을 활짝 펼쳤다.
“저기.”
그리고 녀석이 가리킨 먼 곳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기는…….”
“네, 맞습니다. 당신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곳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