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82
182. 다시 찾은 무림평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음성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장부인이었다. 이것을 본 장성이 급히 손을 흔
들며 그녀를 만류했다.
“노부인께서는 상처가 매우 중하여 움직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장부인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늙은 몸이니 죽은들 무슨 유한이 있겠소?”
망정사태가 서글픈 표정으로 장부인을 바라보았다. 장노부인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악소채 때문에 준아가 미치고 상했으니 이 올케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소? 또한 일이 다급하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망정사태는 눈썹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많은 영웅호걸들이 정 때문에 상해 왔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군요.”
장부인의 말투는 힐난하는 어조로 바뀌었다.
“준아의 생명을 구해 놓지 않고 당신은 어찌 나보고 구천에 가서 당신의 오빠를 대하라는 것이
지요? 나는 기어이 이 일을 성취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녀는 홍노부인에게 눈을 돌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상한 것은 바람기가 있는 악소채를 보호하는 사람이 도처에 있는 것이오. 우리의 홍언니까지
도 왕년의 정을 돌보지 않고 악소채를 옹호하니…”
홍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그녀의 어머니는 나의 의딸이니 따지고 보면 악소채는 나의 외손녀입
니다. 당신의 손자가 이곳 모사까지 쫓아와 행패를 부리려 하니 내가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
소?”
“흥, 그런 억지는 얼토당토 않은 말이며 쓸데없는 참견에 불과합니다.”
“나는 이미 당신에게 많이 양보했소. 다시 말을 불손하게 하면 내가 살인을 못할 줄 아시오?”
홍노부인의 말에 장부인이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은 이길 자신이 있소? 나의 시누이가 돕지 않는다 해도 오늘 밤 나는 이 세심모사를 초토
로 밟아놓고 말겠소.”
“당신네 백운산장의 몇 사람으로?”
“두고 봅시다.”
장부인은 다시 소영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자네도 왔군, 그것 잘 됐다. 이걸 보고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지? 크고 작은 원한
을 모두 한데 모아 해결하게 되었군.”
망정사태가 장부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올케, 무슨 말을 하고 있지요? 또 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인가요?”
“있지요. 내가 얘기했잖아요? 정에 매어 하는 내 행동을 너무 탓하지 마시라고요.”
“누굴 청했습니까?”
“시누이님, 좋은 사람은 못 됩니다. 시누이처럼 좋은 사람이라면 올케를 도우려고도 않을 테니까
요.”
망정사태는 거의 숨쉴 여유도 주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나에게 얘기해 줄 수 없나요?”
“난 지금 얘기하기 싫은데요.”
“올케, 당신은 나쁜 일을 해선 안 돼요.”
“흥, 장가의 후계가 끊기고 백운산장이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되겠군요.”
망정사태는 갑자기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탄식처럼 말했다.
“올케님, 우리가 악소채를 굴복시킨다 해도 그것은 마음까지 정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준아와 악소채 둘 중에서 왜 하필이면 준아만이 심중의 상처를 입어야 합니까?”
장부인의 칼날 같은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한 망정사태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금부인, 소대협과 약속했습니다. 이번에 영문도 모르고 망동을 해서 나는 수십 년 쌓
아 온 수양을 깨뜨리고 말았지만, 그러나 준아를 위해 나선 것이니 후회는 않으렵니다. 하지만…”
“…”
“내가 이미 손을 댔드니 남이 참견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올케님께서 오늘 초청한 사람들은
모두 돌려 보내 주십시오.”
“그렇다면 시누이께서 홍노부인과 소영을 이길 자신이 있나요?”
“싸우기 전에 자신이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장씨가족의 사사로운 일 때문에 남
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됩니다.”
“시누이는 마음에 인자로움이 꽉 차 있으니 이 일전의 승패에 관심 두지 말고 곧 돌아 가십시
오. 결코 쉽사리 끝날 일은 아니니…”
장부인의 싸늘한 말에 망정사태는 격동의 빛을 얼굴에 미며 언성을 높였다.
“올케님은 꼭 유혈참극을 빚을 작정이군요?”
“홍노부인과 소영을 죽이지 못하면 준아는 영원히 악소채를 얻지 못하며, 얻는다 하더라도 그녀
가 기회를 노려 도망칠 우려가 있잖아요? 그러니 홍노부인과 소영을 죽일 수밖에…”
“올케의 고집에 나는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군요.”
장부인은 이 판국에 망정사태가 훌쩍 떠나 버리면 매우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더 말하지 않
았다. 그러자 망정사태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올케님, 어서 그들을 막아요!”
“늦었소. 그들을 막을 수 없어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오?”
장노부인은 메마른 어조로 대답했다.
“심목풍, 무공자…”
“무공자(巫公子)?”
“무산 오독문의 전인이지요.”
“그들 뿐이오?”
“또 한 분 홍의화상이 있어요. 그분은 신분이 매우 높으며 소영의 사부인 장산패와도 일단의 시
비가 있었다더군요.”
그러자 돌연 삼절사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장산패가 아직 살아 있었군요.”
소영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아직 살아 있으며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은사시오.”
“나도 알고 있소.”
삼절사태의 이 말은 칼로 베어내듯 매우 차갑고 날카로왔다.
소영은,
‘사부가 찾아 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바로 이 여자가 아닐까?’
소영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대방의 너무나 차가운 태도에 입을 다 물었다.
사실 삼절사태는 바로 장산패의 정인(情人)이었다. 장부인이 장산패란 말을 꺼내자 그녀는 마음
이 매우 격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삭발하고 수행한 지 오래되어 선공이 매우 깊었으므로 곧 평
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망정사태는 삼절사태와 소영을 둘러 본 뒤 다시 장부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올케님, 그들은 매우 악한 사람들인데 당신은 어떻게 그들과 사귀게 되었지요?”
“준아를 위해서요.”
이 때였다. 몇 사람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달려 오고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몸집이 크고 등이 굽은 심목풍이었다. 그 뒤를 한 명의 화상과 무공자, 금화부인,
독수약왕이 따라 왔다.
독수약왕을 발견한 소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불렀다.
“남궁 노선배님!”
독수약왕은 소영을 보더니 껄껄 웃었다.
“하하, 노부는 당신네 정의의 인물들과 어울릴 수 없어 역시 심대장주와 합세키로 했소이다.”
소영은 화가 불끈 치밀어 욕설을 퍼부으려다 가까스로 참았다. 심목풍이 장노부인에게 말했다.
“부인은 부상을 입으셨군요.”
“홍부인의 손에 부상당했소.”
“그래요? 그렇다면 조금 있다가 내가 부인을 위해 복수해 주겠소.”
심목풍은 음침하게 낄낄 웃더니 이번엔 망정사태에게 말했다.
“망정사태이십니까?”
“그렇소.”
이 때 홍의화상이 망정사태에게 말을 걸었다.
“장낭자, 아직 소승을 기억하겠소? 옛날 장방이 낭자를 데리고 와서 소승과 한 번 만난 적이 있
지요. 그땐 소승의 나이 이십 세도 안 되었고 낭자는 열 살도 못 됐었지요.”
“나는 기억나지 않는군요.”
“하하, 몇 십 년이 지났으니 우리 모두 늙었군요.”
“나는 법호가 망정이라 합니다. 옛날의 일은 이미 깨끗이 잊었소.”
홍의화상은 안색이 변하며 금방 망정사태에게 덤벼들 기세였으나, 심목풍의 눈짓을 받고 그대로
참는 눈치였다.
망정사태는 새로 나타난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장력인에게 말했다.
“올케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려는 생각입니까?”
장부인은 동문서답하듯 말했다.
“당신은 망정암으로 돌아가 이곳의 일에는 참견할 것 없어요.”
“내가 만일 당신이 이토록 많은 무리를 끌어들였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결코 당신의 일에 참
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늦진 않았소. 당신은 기왕에 손들 대지 않았으니 조금도 손해는 없었잖아요?”
소영은 두 노파의 언쟁에 관심 없는 표정을 지으며 홍의화상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저 화상은 분명 검에 맞아 한 쪽 팔이 잘렸는데 지금은 말짱하구나. 이상한 일이다.’
소영은 홍의화상의 손목을 유심히 살폈으나 넓은 도포자락이 손목까지 덮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두 팔이 그대로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상한 일은 또 있다. 홍의화상은 분명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텐데 지금 그는 나에게 전혀
무관심한 태도이니…’
이 때 망정사태가 성난 어조로 장부인에게 다시 항의를 퍼부었다.
“백운산장은 강호에 흩어져도 되지만 유구히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올케님의 이런 행동
은 바로 백운산장의 명성을 더럽히려는 것뿐입니다.”
무공이 심후한 망정사태도 지금은 더 이상 자기의 격동하는 심정을 억제키 어려운 듯 얼굴에 경
련이 일었고, 뭇 사람들의 눈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안색이 변해 가고 있었다.
장부인도 이미 망정사태의 붉으락푸르락하는 모습을 눈치채고는 어조를 높여 말했다.
“시누이님, 당신은 중외의 고수이니 이 올케로서도 당신을 이 일에 끌어 들이고 싶은 생각은 손
톱만큼도 없소. 또한 지금 나의 동조자들이 당도하였으니 시누이님은 이 일에 참견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소.”
망정사태는 장부인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시선을 심목풍에게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 장가의 일에 여러분이 수고하는 것을 나로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심독풍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요?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소이다.”
망정사태는 언성을 높였다.
“우리 장가의 일에 귀하와 귀하신 여러분들의 심려를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심목풍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신니와 어떤 약속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하겠는데요.”
심목풍은 망정사태를 무시하듯 말을 계속했다.
“나는 장부인과 약속이 있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따라서 장노부인께서 한 마디의 말
만 하신다면 우리는 즉시 돌아가겠습니다.”
망정사태는 홱 고개를 돌려 장부인을 쏘아 보며 말했다.
“올케님, 이것은 당신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이 한 마디 하십시오. 올케의 말 한 마디로 그
들은 즉시 돌아갈 것입니다.”
장부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키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누이님, 나의 권고를 받아 주시오. 시누이님은 돌아가시오.”
망정사태는 길게 한숨을 네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심목풍은 그들의 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영을 힐끗 바라보고는 말했다.
“장부인께서 저를 청하실 때 소대협이 이곳에 있다는 말은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어째
서…”
소영은 무엇이라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때를 맞춰 왔다고 설명하려 했으나 그것은
장부인을 위해 해명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열지 않았다.
장부인은 소영을 돌아본 뒤 서서히 말하였다.
“그것은 나도 모르겠습니다.”
심목풍은 장부인의 말을 가로막듯이 재빨리 말했다.
“생각컨대 벌써 부인이 이곳으로 복수하러 올 줄을 알고 악낭자가 소영을 이곳으로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되오.”
소영은 그들이 악소채를 들추어 내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악낭자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소대협은 우연히 왔단 말이오?”
“옛말에도 있지 않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그러자 심목풍은 비웃듯이 말했다.
“요컨대 소대협은 매우 자신이 있는 것 같군.”
“나는 오늘 밤이 우리들의 마지막 일전이기를 바라오.”
소영은 싸늘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심목풍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물었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바로 내가 죽는 것이오.”
심목풍은 서서히 말하였다.
“오늘 저녁 기왕 그를 만났으니 생사를 가려낼 수 있게 되었소.”
“나도 오늘은 기필코 생사를 가려낼 수 있기 바라겠소!”
소영도 날카롭게 심목풍을 쏘아 보며 말했다.
이 때 장부인이 말을 막으며 나섰다.
“우리가 얘기한 대로 당신네들은 먼저 홍노부인을 상대하여 악소채를 빼앗아낸 뒤 다시 소영을
상대하십시오.”
홍노부인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좋소. 당신네들은 이미 세심모사를 침범하였으며 그것은 곧 나를 향해 도전해 온 것과 같으니
당신네들은 먼저 나를 때려 눕힌 뒤 소영을 상대해야 할 것이오.”
심목풍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홍노부인께서 이렇듯 일전을 요구하시니 나는 사전에 명백히 해 둬야 할 일이 있소.”
“이 늙은이가 귀를 기울여 듣겠소.”
심목풍은 매우 여유가 있는 투였다.
“오늘 우리들의 싸움은 보통 어디서나 있는 명예를 건 싸움이 아니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이
오. 헌데 무슨 강호의 도의나 규칙 또는 술법의 정도니 비도니 하고 따질 것이 있겠소? 각자 자
기의 신통한 기지와 술법을 발휘하여 최후까지 싸우는 것뿐이오.”
홍노부인이 그 말을 듣자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네들은 많은 사람을 몰아다가 비도를 발됐해서 우릴 총격하겠다는 것이오?”
“그렇소. 군공발휘를 세외하고 이 많은 독물을 지닌 금화부인과 오독문의 무공자와 또 구환비를
지닌 비운대사가 출전할 것이오.”
소영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보니 이 홍의화상은 법명이 비운이로구나.’
그러자 망정사태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네들은 전혀 강호의 규칙을 지키지 않는단 말이오?”
“당신의 올케께서 우리를 청하여 도와 달라고 할 때, 강호의 규칙대로 처사하지 않고 수단을 가
리지 않으며 단지 악소채를 빼앗기만 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기 때문이오.”
심목풍은 고무줄을 튕겨 올리듯 재빨리 지껄여 댔다.
망겅사태는 안색이 변하여 장부인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올케님, 당신이 그런 말을 한 일이 있어요?”
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요. 내가 그런 말을 했어요.”
망정사태는 길게 한숨을 토해 내고 탄식조로 말했다.
“선형(先兄)께서 강호에 세운 명예를 당신이 매장시키려 하는 거요?”
그녀는 눈을 들어 홍노부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홍시주님, 우리가 싸우기로 한 약속을 여기서 끝맺읍시다.”
“좋소! 당신의 체면을 보아서 나와 백운산장의 원한은 모두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그러자 장부인이 재빨리 말을 가로챘다.
“너무 늦었소. 당신이 악소채를 내놓지 않는 이상 그렇게 되지를 않을 것이오.”
심목풍이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우린 장부인과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홍노부인이 악소채를 내놓는다고 응낙하더라
도 부인은 중도에서 발을 뺄 수는 없소.”
장부인은 멍하니 서서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말 난처한 일이었다.
“장부인, 난처할 것 없습니다. 나는 결코 악소채를 내놓지 않을 테니…”
홍노부인이 싸늘한 시선으로 심목풍을 바라보고 말했다.
“심대장주, 우린 시작을 해도 되겠소? 내가 먼저 나서겠소.”
죽장을 들어 심목풍의 앞가슴을 향해 날카롭게 찔러 갔다.
심목풍은 훌쩍 몸을 피하며 왼손으로는 한 자루의 자척(磁尺)을 뽑아들고 오른손엔 한 자루의
단검을 빼들었으나 즉시 반격을 가하지는 않고 높은 음성으로 장부인을 향해 소리쳤다.
“부인은 많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왔습니까?”
장부인은 마주 소리쳤다.
“나를 제외하고 노복인 장성이 있습니다. 다른 일곱 명의 검수는 이미 홍노부인의 손에 죽고 말
았소.”
심목풍은 불만이란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당신의 시누이인 망정사태는 무공이 고강하여 능히 홍노부인을 상대할 수 있으니 부인이 손을
쓰도록 명을 내리십시오.”
그러나 장부인은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녀는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오.”
홍노부인도 잠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듣느라고 선공을 하지 않았으며 망정사태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멈칫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당신네들 장가의 일이며 우리는 단지 부인의 초청에 응해서 도우러 온 것뿐인데 설
마 우리보고 목숨을 건 격투를 하도록 당신네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이미 홍노부인과 일전을 겨루다가 상처를 입어서 크게 상하긴 했지만 그러나 나도 독이
묻은 검으로 그를 찔렀으므로 지금쯤 그 독이 퍼지기 시작했을 테니 홍노부인도 고통을 당할 것
이오. 따라서 심대장주는 그녀를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장부인이 말하자 심목풍이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그 말은 당신의 시누이인 망정사태가 이 싸움에 뛰어 들지 않겠다는 뜻이오? 결국 우릴 돕지
못하겠다는 말이군!”
그러자 망정사태가 싸늘하게 쏘아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맞소. 나는 결코 당신들을 돕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당신들의 적이 되겠소.”
심목풍은 망정사태의 말에 그만 실색하고 말았다. 흠칫 몸을 도사리며 말했다.
“무엇이라구? 당신은 옥소랑군의 생사까지도 상관치 않겠다는 것이오?”
“장가의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 하더라도 나 망정사태는 무림의 청명을 버릴 수 없소.”
망정사태는 고함을 쳤다.
심목풍은 치미는 화를 억제치 못하고 붉으락푸르락 변색되다가, 그만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소! 장부인이 청해서 온 좋은 동조자군!”
장노부인은 난처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음성을 높여 소리쳤다.
“시누이님! 당신이 우릴 돕지 않아도 좋아요. 비록 그렇다라도 우리와 결코 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 이대로 돌아 가십시오.”
그러나 망정사태는 꼼짝하지 않고 오히려 단호하게 부르짖었다.
“올케! 우리 장가의 일을 제가 스스로 해결하려는데 어째서 올케도 저들을 돌아가도록 책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기왕에 내가 여기까지 도우러 왔는데 어찌 쉽사리 돌아가겠소?”
심목풍이 빈정거리듯 말하자, 망정사태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건 당신이 여기 온 것을 결코 우리 장가의 일을 돕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
로 증명하는 말이오.”
이 때까지 망정사태의 태도를 관찰하던 홍노부인은 이미 망정사태가 심목풍을 돕기 위해 싸움에
뛰어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강적이 하나 줄어들었다고 생각하자 약간 여유있는 태도
로 몸을 굽히고 일변 날카롭게 선공을 가하며 말했다.
“심목풍! 나는 오래 전부터 너의 악행을 익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맹세한 일이 있기 때문
에 너를 찾아가 무림을 위해 오늘에야 이렇듯 네 스느로 찾아 왔으니 나는 무림의 정도를 위해서
라도 좋은 일을 하게 됐다.”
그는 말을 끝내는 동시에 죽장을 들어 질풍같이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심목풍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자척을 휘둘러 죽장을 막으며 즉시 반격을 가했다.
순간적으로 악투가 전개되었다.
그 때 돌연 악소채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소문과 소홍이 초가집 안에서 질풍같이 달려나
와 한 자루의 경검을 악소채에게 넘겨주고 동시에 자신들도 등 뒤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소영도 서서히 품 안에서 한 자 여덟 치 길이의 복마금검 한 자루를 꺼내 들고 기세를 가다듬어
적이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며 적과 자기편의 형세를 가늠해 보았다.
만일 홍노부인이 심목풍을 상대할수 있다면 자기는 비운화상을 상대하고 악소채와 소문, 소홍이
전력을 다하여 금화부인, 독수약왕을 상대하며 또한 백리빙이 무공자를 상대한다면 억지로라도
싸움은 막상막하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망정사태가 어떻게 나올는지가 의문이었다.
망정사태가 끝까지 손을 써서 심목풍 편을 돕지 않는다면 승패 의 열쇠는 자기와 금노부인이 상
대하는 적과의 승부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때 코를 찌르는 비린내와 함께 각종 독물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망정사태가 수중의 불진을 휘둘러 대며 고함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독물을 때려 죽이며 소리쳤
다.
“빨리 피하시오. 저들은 이미 암중에 독물을 방출했소.”
“사부님, 모사 안으로 들어가 피하십시오.”
악소채가 잇달아 소리쳤다.
“소문, 소홍은 장부인을 보호하여라.”
장성은 곧 장부인을 소문에게 넘겨 주고 몸을 돌려 정면으로 가로막고 섰다.
이 때 각종의 독물이 일제히 모사를 향해 돌진해 왔다.
악소채와 망정사태, 그리고 삼절사태는 각기 무기를 휘둘러 독물을 격파하였다.
장성까지 합세했다. 이들의 무술은 비범하여 독물들은 비록 수가 많았으나 허사였다. 단 하나도
그들을 뚫고 모사를 향해 돌진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들을 물러서게 하지도 못했다.
소영은 복마금검을 움켜쥔 채 옆으로 두어 걸음 옮겨 서며 홍노부인에게 말했다.
“노선배님, 독물이 사방에 둘러 싸여 공격해 오니 이대로는 오래 싸울 수 없겠습니다. 우린 일단
모사 안으로 물러가서 잠시 대책을 세우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금검을 휘둘러 다가오는 독물을 쳐냈다.
“너는 물러가고 나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아라.”
홍노부인은 죽장을 바싹 움켜 쥐고 더욱 맹렬히 공격해 들어갔다.
소영은 이 노부인의 성미가 정말 괴상스럽다고 생각하며 금검을 휘둘러 그녀를 도와 가까이 다
가오는 독물을 격살해 냈다.
그 때 돌연히 비운화상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헛, 소영 너는 내게 일검을 명중시켰지만 나는 일진의 구환비발로 갚아 주겠노라.”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가 두 손을 들어 힘껏 뿌리자, 돌연 두 줄기의 금빛이 맴돌며 소영을 향
해 질풍처럼 닥쳐 왔다.
소영이 급히 금검을 휘두르자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불꽃이 퉁겼다. 그리고 어떤 쇠붙이가 땅에
떨어질 듯하다가 마치 날개가 돋힌 듯 다시 떠올라 회전하여 덮쳐 왔다.
이제 보니 비운대사의 이 구환비발은 구발로 만들어진 발진으로, 일단 쳐내면 다시 내력을 돋구
어 회전하며 손가락을 조종하여 연속적으로 적을 격타해 내는 무기로써 확실히 무림에서는 일절
에 속하는 것이었다.
소영은 순식간에 연환비발에 둘러싸여 도저히 막아 낼 수도 없었거니와 몸을 빼낼 수는 더욱 없
었다. 소영은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독수약왕의 음성이 가늘게 들려왔다.
“대사님, 제가 한쪽을 돕겠습니다.”
“좋소!. 당신은 왼쪽에서 소영을 공격하시오.”
그러나 비운대사는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돌연 두 눈이 핑 도는 것을 느끼고 몸을 앞으로 굽히
는 순간, 심하게 비틀거리다가 붉은 선혈을 왈칵 토해 내고 말았다.
그것은 독수약왕이 암중에 전신의 공력을 집중시켜 일장을 비운대사의 등에 내리친 것이었다.
비운대사는 마침내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고 선혈을 토해 내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비
운대사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의 내공도 누구 못지않은 것이었으므로 쉽게 고꾸라지지는 않았다.
그는 내장이 뒤집히고 뼈마디가 부서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어느 틈엔가 몸을 뒤채이며 독수약
왕에계 덮쳐들어 일장의 맹공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의 장력은 무시무시했다. 광풍처럼 뻗어나간 장력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독수약왕에게 부딪쳐
갔다. 독수약왕은 그가 돌연한 반격을 가해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간신히 피하면
서 손을 들어 비운대사의 장력을 옆으로 쳐내기에 바빴다.
마치 폭음소리와 같은 펑! 소리가주위를 뒤흔들며 땅을 뒤엎듯 저편으로 퉁겨져 나갔을 때 비운
대사는 더 견디지 못하고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비운대사가 쓰러지자 비발도 그 위력을 잃고 소영의 금검에 부딪혀 떨어지고 소영은 가볍게 몸
을 날려 비운화상을 향해 덮쳐 갔다.
금검을 들어 비운화상을 내리치자 싸늘한 불꽃속에서 비릿한 선혈이 사방으로 튀어올랐고 비운
화상의 머리가 곧장 일 장이나 멀리 날아가 버렸다.
소영은 곧 이어 몸을 훌쩍 날려 독수약왕에게 다가갔다.
“노선배님…”
독수약왕의 몸에는 이미 여러 마리의 독사가 엉키어 온몸을 물어 뜯고 있었다. 소영은 급히 금
검을 휘둘러 독사들을 격살하고 독수약왕을 부축해 일으켰다.
이 때 갑자기 한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큰나무 위에서 질풍같이 내려오며 소영의 곁으로 달려
들었다. 그것은 나무 위에서 전세를 살피던 백리빙이었다.
장내에는 엉뚱한 사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무공자도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목
처럼 땅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금화부인이 귓가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소리쳤다.
“이제 심목풍 한 사람뿐이오.”
무공자가 죽어 넘어지자 그가 조종하던 독물은 위력을 잃고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소영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숙연히 독수약왕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노선배님, 안심하시고 상처나 치료하시면서 내가 심목풍을 죽여 노선배님의 원한을 풀어 드리
는 광경이나 구경하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소영은 몸을 솟구쳐 금노부인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금노부인, 제게 한 번만 양보해 주십시오. 심목풍은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에는 호기가 넘쳐 흘렀고 힘이 있었다.
금노부인은 소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장을 공격하고 훌쩍 몸을 날려 저만큼 물러났다.
소영은 금검을 움켜 쥐고 심목풍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백 초 안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소.”
소영은 심목풍의 대답도 듣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육박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맞붙자 형세는 험악하게 변해 갔다. 돌풍이 일어나며 소영의 금검이 찬란한 빛을 발
하면서 심목풍의 주위를 둘러싸고 차츰차츰 그 간격을 좁혀 갔다.
심목풍은 마치 금빛 찬란한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홍노부인이 이 광경을 바라보며 가쁜 숨을 토해 내고는 망정사태에게 넌지시 말했다.
“심목풍의 무공은 결코 나보다 하수가 아니었소.”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나오니 우린 이미 늙었나 봅니다.”
망정사태는 두 사람의 격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때 홍노부인이 돌연 소홍의 손에서 장검을 뺏아 든 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의 왼쪽 팔
을 뚝 잘라냈다.
이를 본 악소채가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사부님!”
그러나 홍노부인은 남담히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며칠 더 살고 싶어 팔을 잘랐다. 이번 싸움에서 나는 이미 운기가 다하여 폐혈할 능력이
없어 독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 없구나.”
망정사태도 당황해서 영단을 꺼내 홍노부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악소채는 급히 약물을 가져다가 홍노부인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 때 돌연 천지를 뒤흔드는 고함소리와 함께 싸늘한 금빛이 확 퍼졌다간 홀연히 사라지며 심목
풍의 거대한 몸집이 반으로 쪼개져서 고목처럼 쓰러졌다. 검빛과 함께 심목풍에게서 떨어진 소영
은 삼 장이나 뒤로 물러섰다가 검을 팽개치고 독수약왕에게로 달려갔다.
이 때 금화부인이 뱀의 독을 제거하는 두 알의 약을 독수약왕에게 먹이고 있었다. 악소채, 망정
사태, 홍노부인도 모두 몰려들었다.
독수약왕의 얼굴엔 이미 검은 그림자가 덮혀 왔고 그의 고통에 찬 미소가 더욱 비감해 보였다.
“천하에 나를 구할 수 있는 약은 없소. 나는 평소에 많은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이제 죽는다 해
도 아무런 여한은 없소이다.”
독수약왕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망정사태가 몸을 굽히며 그를 위로하듯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개과천선하였으니 장차 성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한시바삐 꼭 할 말이 있소. 지금 나의 이 한 모금 호명지기는 수시로 흩어져 가고 있으
니…”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악소채 아가씨…”
악소채는 독수약왕이 자기를 부름에 깜짝 놀랐다.
“노선배께서 무슨 분부가 계십니까?”
“내 주머니에 편지가 한 통 있소이다. 빨리 읽어 보시고 내 부탁을 들어 주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악소채는 독수약왕의 주머니를 더듬으며 말하였다. 그의 왼쪽 주머니에서 편지가 한 통 나왔다.
겉봉에는 이라고 씌어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니 아가씨께서 응낙하실 줄 믿소…”
독수약왕의 입에서 피가 끊임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독수약왕은 소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 가지, 내가 대신 처리한 게 있소.”
“무슨 일입니까?”
“포일천이오. 나는 그의 몸에 독을 입혔소. 아직 반달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단번
에 아홉 명의 고수들을 묻어 죽였으니 그를 독살시켰대서 심한 것은 아닐 거요.”
소영은 머리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 위인은 너무나 음흉했습니다.”
“내가 이번 일에 성공한 것과 다시 심목풍의 신임을 얻게 된 것은 모두 금화부인의 공로였소.
그녀는 당신을 위해 심목풍에게 몸까지 바쳤소…”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눈을 감고 말았다.
소영이 너무 뜻밖의 사실에 놀라 금화부인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이미 어디론가 종적을 감춘 뒤였
다.
소영은 독수약왕의 시체를 보며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노선배님의 일생동안 남기신 공과는 남들이 평가하겠지만 나 소영에게 남겨주신 은의는 매우
두터운 것입니다. 당신이 이 일대의 무림동도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반드시 후에 영달이 있
을 것입니다. 후배는 감히 당신의 시체를 거두어 들이지 못합니다.”
하며 홍노부인을 향해 포권하여 예를 보이고 말을 이었다.
“노선배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후배는 이제 그만 떠나겠소이다.”
홍노부인은 소영의 소맷자락을 부여잡듯 간곡히 말했다.
“천하영웅들이 점심 때면 이곳에 당도한다는데 어찌 자네는 그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건가? 만나
고 헤어짐이 좋을 것 같구나.”
그러나 소영은 머리를 저었다.
“악의 거두를 이미 제거하였으니 천하에는 일단 태평한 나날이 있을 텐데 후배가 그들과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소영은 말을 마친 뒤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백리빙이 소영을 따르며 말했다.
“오빠는 이제 금검도 필요 없습니까?”
“악의 무리가 이미 제거됐으니 금검도 필요가 없다.”
“설마 나도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백리빙이 웃으며 물었다.
소영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백리빙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빙아는 빙아의 아버님을 만나 나와의 사이를 잘 말씀드리도록 해라. 만일 빙아의 부모님께서
우리들의 내정을 허락하신다면 내년 추석날 만나기로 하자. 나는 그 날 화산 설봉에서 오경까지
빙아를 기다리겠다. 만일, 오경이 지나면 영영 빙아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백리빙은 눈물이 글썽한 모습으로 소영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모두 쾌히 응낙하시리라 믿어요. 그리고 오빠의 말도 꼭 믿고 있으니
우린 내년 추석날 화산설봉에서 오경이 되기 전에 만나요. 잊지 않겠어요.”
그 때 악소채는 한쪽으로 물러서서 독수약왕의 편지를 재빠르게 읽고 있었다.
악소채의 눈에서는 어느덧 눈물이 흘렀다.
웬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허전해옴을 느꼈지만, 그녀는 남궁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두가
소영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다.
강호는 전에 없이 조용해졌다. 소영이 떠나 버린 후 천하영웅들도 각자 흩어져 제 갈 길을 찾아
갔고, 심목풍이 없어진 강호는 태평성대를 맞이했다.
모두가 소영이 어디로 떠났는지를 몰랐다. 다만 백리빙만이 가슴 속으로 그 날을 기다릴 뿐이었
다.
조용한 가운데도 세월은 흘러 추석을 맞이하는 가을밤의 보름달은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그 달
빛을 받으며 화산설봉으로 오르는 두 그림자가 있었다.
만남을 기대하며 가까와지는 두 그림자는 소영과 백리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