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81
181. 끈덕진 집념
앞장선 사람은 백발이 성성한 백운산장의 장노부인이었다.
장노부인 뒤에는 회색 옷을 입은 노인과 남색 장삼을 입은 금면 철수인(金面鐵手人)이 따랐다.
‘역시 장노부인은 성질이 급하구나. 옥소랑군이 조금 상했다고 고수를 데리고 찾아 오다니…’
소영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 사람들은 모두 똑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모두 젊어 보였고 청삼을 입었으며 등에 장검을 꽂고 있었다.
소영은 그들을 주시하며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나 되었다.
회의 노인이 먼저 쪼개진 신상을 발견했다. 그 노인은 신상을 자세히 살펴 보고는 근처에 넘어
져 있는 장한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참 동안을 살피던 회의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노부인에게 입을 열었다.
“모두 신풍방의 인물들이오.”
장노부인은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받았다.
“그 할망구는 나에게 분명히 말했소. 세심모사에서 백 장 밖의 일은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이것은 필시 악소채의 짓일 것이오.”
회의 노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만약 세심모사의 주인이 악소채를 내놓지 않겠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정말 그런다면 세심모사를 불태워 없앨 수밖에…”
“부인, 이것은 제가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지만… 우리가 세심모사의 주인과 싸운다 해도 별 승
산은 없을 것입니다.”
장노부인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장성! 당신은 지금 몇 살이나 되었소?”
“예, 저는 이미 칠십이 넘었소이다.”
“그래요? 그럼 이제 죽어도 한이 없겠구려.”
장성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언성을 높였다.
“부인께서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 제가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 말을 했는 줄로 아십니까? 저는
다만… 다만…”
장노부인은 다급하게 다그쳤다.
“무엇이오? 다만 무엇이란 말이오?”
장성은 잠깐 사이를 둔 다음 무겁게 입을 열었다.
“노주인께서 금궁에 갇힌 뒤부터 우리 백운산장은 기울기 시작했소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정예 제자들을 모두 이곳에서 잃는다면 백운산장의 운은 끝장이 나는 것이외다.”
장노부인은 또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이길 수도 있지 않소?”
장성은 눈길을 돌려 신풍방의 신상과 쓰러져 있는 장한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것을 보십시오. 신풍방이라 하면 강호에서도 손꼽히는 방이 아닙니까? 더구나 그곳은 많은
고수들이 있는 곳인데… 불과 한 시진 사이에 모두 전멸을 당하고 신상은 부서졌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상대의 무공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장노부인은 수중의 죽장으로 땅을 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정 두렵다면 어서 도망가시오! 막지 않겠소.”
장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오이다. 노부가 어찌 이 자리를 피하오리까. 다만 백운산장의 장래를 위하여 좁은 소견을
말하였을 따름입니다.”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더 말을 마시오.”
장성은 어두운 신색으로 나직이 입을 열었다.
“큰아씨께서 노주인의 사랑을 생각해서 이곳에 와 주셨으면…”
장노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할 필요 없소. 큰아씨는 이미 세외(世外) 고인이 된 몸이오. 이런 사적인 일에 어찌 그녀의
도움을 바라겠소.”
“아닙니다. 큰아씨는 비록 불문에 몸을 담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도련님을 아끼고 있습니다. 더군
다나 노주인님께서 생전에 그녀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으므로 절대 모른 체는 안할 것입니다.”
장노부인은 싸늘하게 쓴웃음을 띠었다.
“다 쓸데없는 생각이오. 그녀가 우리를 도우려 했다면 벌써 이곳에 나타났을 것이오.”
그녀는 말을 끝내자마자 큰 걸음으로 세심모사로 향했다.
장성은 고개를 무겁게 젓더니 뒤에 대기하고 있는 일곱 명의 대한들에게 무어라 지시하였다.
그는 지시를 한 다음 주위를 둘러보고는 금면 철수인과 함께 쏜살같이 장노부인의 뒤를 따랐다.
일곱 명의 대한들도 오 장 정도의 사이를 두고 뒤따랐다.
“오빠, 저들은 정말로 세심모사의 주인에게 시비를 걸려는 거예요?”
“그렇다. 원인은 모두 악누님에게 있지만 저들이 기왕 우리에게 발각되었으니 모른 체할 수도
없지 않느냐. 더구나 신풍방을 누님이 죽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 사이에 장노부인은 세심모사에 당도하자 서슴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죽장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크게 두들겼다.
“여보시오! 주인 계십니까?”
잠시 지나자 대나무 문이 삐걱 열리며 세심모사의 주인 얼굴이 나타났다.
“누구시오?”
장노부인은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홍언니! 나도 몰라 보는구려.”
“아, 백운산장의 장부인 아니오? 웬일이오? 이런 밤중에…”
“아무 일도 없다면 홍언니를 찾았겠어요. 홍언니가 내 손자를 다치게 했나요?”
홍노파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죽었소?”
“조금만 늦게 손을 썼더라면 죽었을 것이오.”
홍노파는 쓴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군. 그가 살아서 돌아간 것도 내가 자비를 베푼 것이지.”
그녀는 장노부인의 일행을 쭉 훑어보고 냉랭히 말을 이었다.
“난 이미 강호의 어떠한 시비에도 손을 떼었소. 그러나 세심모사 백 장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 용서치 않소. 더구나 내 승낙도 없이 침범한 사람은 그대로 살려 보내지는 않는단
말이오.”
장노부인은 어깨를 약간 으쓱해 보였다.
“홍언니, 우린 악소채를 데리러 왔어요. 그녀만 내주면 즉시 이곳을 물러나겠소.”
“당신은 이곳이 우리집이라는 것을 잊으셨소? 나는 한 번 거두어 들인 사람은 절대로 남에게 빼
앗기지 않소.”
노부인은 눈빛을 번뜩이며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래요? 그럼 손자를 위해 복수를 하는 것도 탓하시려오?”
홍노파가 노기 띤 표정으로 무어라 입을 열려는데 장성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홍노부인, 이 소인이 몇 마디 하겠소이다.”
홍노파는 의아한 눈빛으로 장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당신은 누구시오?”
“예, 백운산장의 노주인을 모시고 있었던 장성이라는 종입니다. 수십 년 전에 노주인을 따라 다
니다가 홍부인을 만난 적이 있소이다.”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소?”
장성은 눈길을 돌려 장노부인을 힐끗 보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홍노부인, 우리 노부인과는 수십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닙니까?”
홍노파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나에게 복수를 한다고 온 것이군.”
“노부인께서는 악낭자만 찾으면…”
“당신의 손자는 내가 상해했는데 어찌 엉뚱한 사람을 찾으시오. 그가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면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오.”
장노부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련님의 복수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은거해 있는 악낭자와 우리 도련님은
이미 약혼한 사이였소이다. 그런데 낭자께서 그만 변심을 하시고… 그러니 옛날의 정리를 생각하
시어 악낭자를 우리에게 돌려 주시기 바랍니다.”
홍노인은 싸늘하게 반문했다.
“이제 이야기를 다 했소?”
“그렇소이다. 우리 백운산장의 체면도 좀 세워 주십시오.”
홍노파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알고 지냈던 정리를 생각해서 금지구역으로 들어온 것은 불문에 붙이겠소.”
그리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장노부인은 죽장으로 문을 두들기며 다급히 소리쳤다.
“나오시오!”
그러자 홍노파의 음성만이 새어 나왔다.
“내 인내에도 한계가 있소. 장부인은 너무 심하게 다그치지 마시오.”
“장가 유일의 후계자가 당신에게 화를 당한 것을 그냥 보고만 있으란 말이오?”
“당신은 너무 옹졸한 생각만 하는구려. 내가 왜 당신의 손자를 미워하겠소. 그가 하도 건방지고
귀찮게 굴길래 조금 혼을 내준 것뿐이오. 당신을 보아서 목숨을 부지하게 한 것이란 말이오. 내
다시 한 번 더 참고 그냥 들어가리다.”
장노부인은 거친 숨을 내쉬더니 수중의 죽장을 힘껏 휘둘러 문을 부수어 버렸다.
“우지직!”
대나무로 엮어 만든 문이라 쉽게 부서졌다. 그러나 홍노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장노부인은 다시 휘두르려던 죽장을 거두고 큰 소리로 외쳤다.
“홍노파는 어찌 비겁하게 몸을 숨기시오. 내가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
하시오?”
그러자 안에서 홍노파의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그럼 당신은 어쩌시겠소?”
“두 갈래 길이 있소. 하나는 당신이 순순히 악소채를 내놓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목숨을
걸고 승부를 겨루는 길이오.”
“꼭 그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오?”
장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둘 중에 어느 하나요.”
“나는 이미 악소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거두어 들였소. 한 번 맹세한 것이니 첫 번째 것은 불
가능하오.”
장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그쳐 물었다.
“그럼 두 번째 길을 택하겠단 말이구려.”
세심모사 안에서는 여전히 냉정한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당신이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오?”
“흥, 나는 도와줄 사람들을 데리고 왔소.”
안에서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가벼운 냉소가 들렸다.
“흐흐… 그 일곱 명의 젊은이들이오?”
“그렇소.”
이제까지 한 마디도 없었던 금면 철수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나도 있소이다.”
홍노파는 다시 냉소를 터뜨렸다.
“흐흐… 모두 열 분이로군.”
“당신도 악소채와 두 명의 여종까지 합하면 네 명이 아니오?”
그러자 홍노파는 늙은이답지 않게 간드러진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아니오. 난 혼자서 열 분을 상대하겠소.”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부서진 문으로 홍노파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장노부인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이 서서, 다가오는 홍노파를 뚫어지게 쏘아 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잔뜩 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와지자 일곱 대한들이 일제히,
“쨍!”
소리와 함께 장검을 뽑아 들고 홍노파를 에워 쌌다. 일곱 장검은 달빛을 받아 푸른 색으로 빛나
고 있었다. 홍노파는 십 명을 상대로 싸우겠다고 큰소리 칠 만했다.
그녀는 길다란 죽장으로 계속 몇 초를 휘둘렀다. 그녀의 죽장이 지나치는 곳에는 날카로운 소리
가 들리며 포위망을 죄어들던 대한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일곱 명의 대한 중에서 제법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두 명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두 대한은 서로 눈짓을 보내더니 검을 앞으로 내밀어 천천히 홍노파에게 다가갔다.
홍노파는 서 있는 그대로 두 대한을 노려 보더니 돌연,
“죽어라!”
하는 외침과 함께 몸을 굽히며 죽장을 휘둘렀다.
두 대한도 장검을 휘둘렀다.
한 대한은 홍노파의 가슴을 노렸으며 또 한 대한은 옆구리를 찔러 갔다. 그러나 홍노파가 몸을
낮추는 바람에 두 검날은 허공을 가로지르고 말았다.
“악!”
“으악!”
두 대한의 검이 허공을 찌른 것과 동시에 외마디 비명이 드렸다.
홍노파의 죽장이 대한들을 한꺼번에 가격한 것이었다.
소영은 가법게 고새를 끄덕이고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저 노파의 무공은 이미 초인적인 경지에 달하고 있으므로 열 명을 상대한다 해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린 장노부인의 원병이 오기까지는 나서지 말자.”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소영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일곱 명의 대한은 제대로 손도 못 써 보고 두 명이 쓰러지자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홍노파는 그 여세로 다시 두 명의 대한을 쓰러뜨렸다.
홍노파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연이어 일곱 명의 대한을 쓰러뜨린 후 죽장을 거두고 한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장노부인은 침통한 표정으로 홍노파에게 입을 열었다.
“먼저 내개 나서서 당신과 자웅을 겨루어야 될 것이었는데
… 당신의 유성비운(流星飛雲) 검법이 강호에서 제일 빠르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하였소.”
홍노파는 싸늘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싸움에서 한 수를 잘못하면 그것은 패배가 되는 것이오. 이제 당신이 믿고 있던 일곱 검진이
모두 쓰러졌으니 당신의 운도 마지막이오. 그러나 이 늙은이는 더 이상 살생을 하고 싶진 않소.
더구나 당신과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니 그냥 돌려 보내겠소.”
장노부인은 노기에 가득차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그런 동정은 필요 없소. 당신이 악소채를 내놓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생결단을 내야 할 것이오.”
홍노파는 장난기 어린 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장부인! 나는 당신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소.”
장노부인은 그 말을 듣고 수중에 들고 있던 죽장을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품 속에서 옥척(玉
尺)과 단검을 꺼내 양 손에 나누어 들었다. 그녀는 왼손에 쥔 옥척을 크게 휘두르며, 곧장 홍노파
의 가슴에 일격을 가해 갔다.
홍노파는 가볍게 몸을 날려 뒤로 일 장이나 물러났다. 그녀는 옥척과 단검을 서로 핀차시키면서
계속 십여 초를 휘둘렀다.
홍노파는 반격할 생각도 않고 그저 십여 초를 피하기만 하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장부인! 나는 이미 십여 수 이상을 양보하였으니 피차의 정리는 끝난 것이오. 이제부터는 나도
반격을 하겠소.”
“흥! 당신 마음대로?”
홍노파는 눈을 치뜨며 죽장을 치켜 들었다.
장노부인은 옥척과 단검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헛점만 노리며 천천히 원을 그렸다.
두 사람의 대치가 극에 달하여 서로 맞부딪치려는 순간,
“잠깐 멈추시오.”
장성의 다급한 음성이었다. 장성은 언제 뽑아 들었는지 장검을 움켜 쥐고 두 사람 가운데로 뛰
어 들었다.
그는 장노부인에게 가벼운 예를 올린 후 홍노파에게 눈길을 던졌다.
홍노파는 의외의 방해자가 장성이라는 것을 알자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무슨 가르침이라도 있으시오?”
장성은 긴 한숨을 쉬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 노주인께서는 금궁에 갇힌 몸이 되었고, 큰아씨는 속세가 싫어 불
문에 귀의한 몸이오. 백운산장을 지키고 영도할 분은 오직 노부인 한 사람뿐이오. 그런데다 장씨
문중에 유일한 후계자인 도련님을 당신이 상해했으니 어찌 노부인의 역정을 사지 않겠소? 이 모
든 것을 십분 이해하셔서 이후로도 그리 허물치 마시기 바라오. 저는 이미 늙은 몸이라 죽음 같
은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소. 다만 백운산장의 앞날에 오명이 생길까 두려울 뿐이오.”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장씨 집안의 종으로 이제까지 살았으니 죽을 때도 장씨 집안과 같이 죽겠
소. 그러니 당신은 이 점을 이해해 주시오.”
“아, 좋소. 마음대로 하시오.”
홍노파는 쉽게 대답을 했다.
장노부인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쉴새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그녀의 검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옥척도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발하며 허공에 큰 원을 그렸다. 장성은 장검을 머리 위로 치켜
세우고는 홍노파의 허점만을 노리며 바싹바싹 다가섰다.
홍노파는 죽장으로 옥척과 단검의 공격을 막아내며 반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좀처럼 반
격의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검을 치켜 들고 접근하는 장성 때문이었다.
장성은 비록 종의 신분이었지만 일류 고수급에 끼일 만큼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홍노파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저 놈은 보통 무공을 지니지 않았구나.’
그녀는 차츰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장성의 검세도 날카롭게 허공을 뚫었다.
홍노파는 다시 십여 초를 수세에 몰렸다.
그녀가 수세에 몰리자 장노부인의 옥척은 더욱 거세게 휘날렸다. 옥척과 단검, 그리고 장검이 한
꺼번에 휘날리자 주위는 온통 검영(劍影)으로 뒤덮였다.
세 사람의 모습은 그저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검영 속에서 돌연,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리과 비명소리가 멎는 것과 함께 장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장검은 바로 장성의 것이었다.
장성은 오른손목을 움켜 쥐고 검영 밖으로 뛰쳐 나왔다. 그의 표정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장노부인은 장성이 오른손을 일격당한 후 뒤로 물러서자 내심 조바심이 생겼다.
‘이제 일대 일이로군. 나 혼자서는 그녀를 당해 낼 수 없는데…’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최후의 힘을 다하여 무섭게 상대에게 덮쳐갔다.
‘그녀가 죽지 않으면 내가…’
그녀의 옥척이 번쩍 빛나며 상대에게로 뻗쳐 나갔다.
소영과 백리빙도 그녀의 옥척이 홍노파의 가슴을 꿰뚫으리라 생각했다.
구경하는 사람들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옥척을 쓰는 장노부인까지도 자신을 갖고 일
격을 뻗은 것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의 정적 속에 희뿌연 검영만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검영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모두가 놀랄 이변이 생겼다. 공격하던 장노부인이 왼손을 파르르 떨
려 옥척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장성은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대성통곡을 했다.
“이제 백운산장도 마지막이로구나. 이대로 죽는다면 어찌 눈을 감을 수 있단 말이냐.”
장노부인은 들고 있던 옥척을 스스로 땅에 떨어뜨렸다.
그녀의 손목에는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홍노파는 일 초가 성공하자 더 이상 공격하지는 않고 뒤로 물러섰다. 순간 생각지 않게 장노부
인이 역습을 했다.
그녀는 아픔을 참으며 오른손의 단검으로 홍노파의 가슴을 향해 짓쳐들었다.
이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홍노파는 장부인이 일격을 맞고 다시는 손을 못 쓰리라 믿고 있었으므로 돌연 뻗쳐 오는 단검을
막을 틈이 없어 피하지 못했다.
단검이 거의 가슴께로 다다랐을 때에야 황급히 몸을 돌렸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단검은 비록 가슴을 빗나갔지만 어깨를 깊숙이 스친 것이었다.
홍노파의 왼쪽 옷소매는 금방 선혈로 물들었다. 홍노파는 어깨의상처를 힐끗 바라보고는 쓴웃음
을 지었다.
“장부인, 이제는 되었소. 나는 죽장으로 일격을 가했으며 당신은 단검으로 피를 보았지 않았소.
그러니 서로 무승부로 하고 여기서 헤어집…”
장노부인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냉랭히 말을 받았다.
“안 되오. 당신이 죽지 않으면 내가 이 자리에 뼈를 묻겠소.”
그녀는 단검을 휘두르며 다시 홍노파에게 덮쳐 갔다.
장성은 사태가 긴박함을 느끼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노부인 안 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장성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장노부인은 마치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홍노파는 얼굴 가득히 살기를 담고 장노부인에게 달려들었다.
“어디 네 소원이 정 그렇다면 이곳에서 죽어 보아라.”
그녀가 죽장을 번쩍 쳐들고 막 내려치려는데 홀연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잠깐만 참아 주시오.”
홍노파는 깜짝 놀라서 죽장을 슬그머니 거두었다. 대나무 숲 속에서 두 명의 여승이 모습을 나
타냈다.
앞장선 여승은 월백승포(月白僧袍)에 허리에는 승대(僧帶)를 두르고 있었다.
대번 고귀한 여승임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수중에는 말총으로 만든 조그만 불진(拂塵)을 들
고 있었다.
그 여승의 뒤를 바싹 따르고 있는 사람은 청포에 장검을 든 삼절사태였다.
소영은 갑자기 나타난 여승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저 여승은 분명 장방의 여동생이겠구나. 그리고 악누님의 은사이기도 하고…’
홍노파는 그 여승을 보자, 대뜸 안색이 변하며 정중히 예를 올렸다.
“장대낭자께서…”
여승은 합장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무아미타불! 아니오. 소승은 이미 불문에 몸을 담은지 십여 년이 되었소. 장대낭자라고 부르
지 마시오. 소승의 법명은 망정(忘情)이옵니다. 망정이라고 불러 주시오.”
“망정이라고 하시지만 아직도 인정은 많으시군요. 좀처럼 속세에 나오지 않으시더니 오늘은 어
인 일로 세심모사에까지…”
망정사태는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망정이라지만 결코 친분을 끊지는 못하고 있소. 빈니가 이 일에 간섭하는 것은 바로 장부인 때
문이오. 그녀를 용서해 주시겠소?”
홍노파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태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이런 불상사도 없었을 것을…이 늙은이를 섭섭하게 하는 것
은 그녀가 단검에 독을 묻혀 암수를 쓴 것이오. 나는 부득불 한 쪽 팔이 잘리게 되었소이다.”
망정사태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쓰러져 있는 장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장노부인은 정신을
잃고 있었다.
망정사태가 그녀의 맥을 짚어 보더니 삼절사태에게 입을 열었다.
“기혈이 막힌 모양이다. 그 노란 영단을 한 알 복용케 하라.”
삼절사태는 품 속에서 영단을 꺼내 장노인의 입속에다 넣었다.
망정사태는 가볍게 혀끝을 차며 땅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주워 들고 유심히 살펴 보았다. 어두
운 밤이지만 달빛이 있어 단검에 묻어 있는 독을 식별할 수 있었다.
망정사태는 눈살을 찌푸리고 단검을 멀리 집어 던졌다. 그러자 홍노파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증거물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우기지도 못하겠구려.”
“홍시주, 오해 마시오. 증거물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장부인 이 독검을 썼다는 것은 실로 장
씨 가문에 수치입니다. 그래서 그 독검에다 화풀이를 한 것뿐이오.”
홍노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태께서는 인품이 뛰어나오이다. 늙은이가 존경해 오던 보람이 있구려.”
“홍시주!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무엇이오? 사태의 부탁이라면 힘 닿는 데까지 돕겠소.”
망정사태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악소채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소. 그녀를 만나 보고는 그대로 돌아서겠소.”
“좋소이다. 그 정도의 부탁이라면 과히 어렵지 않소.”
그리고는 몸을 돌려 초가집 안으로 들어갔다.
망정사태는 그제서야 눈길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장성에게 눈길을 멈추고 다정히
물었다.
“당신도 부상했나 보구려?”
장성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예, 그만… 팔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물러가 쉬시오.”
장성은 넙죽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큰아씨, 감사하옵니다.”
망정사태는 눈길을 돌려 일곱 명의 대한이 쓰러져 있는 곳을 유심히 보았다.
잠시 동안 그곳에다 시선을 고정시키던 망정사태는 밤하늘로 시선을 돌리며 긴 한숨을 쉬었다.
망정사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이란 것이 명리보다 백 배나 강하구나!”
잠시 후 세심모사 문전에 악소채의 모습이 보였다.
삼절사태(三絶師大)가 차가운 어조로 악소채를 꾸짖었다.
“악소채! 너의 배짱은 갈수록 커지는구나. 스승이 이곳에 도착했는데도 네가 감히 절을 하지 않
으니…”
악소채는 망정사태의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정중하게 큰절을 했다. 그러자 망정사태가 손을 흔
들며 말했다.
“일어나거라.”
망정사태는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며 비웃더니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네가 누구의 문하이건 나는 너에게 한 가지 묻겠다.”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준아는 너를 나에게 데려다 주고, 수차례나 네 목숨을 구해 주었다. 우리가 그 동안의 정을 생
각지 않는다 치더라도 너는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진 말아야 한다. 은혜에 보답을 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악소채가 무거운 어조로 대답했다.
“보답하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듣기 좋은 답변이군, 지금 준아는 너 때문에 숨이 넘어 가려고 하는데… 너는 어
떻게 보답할 준비를 했지?”
“저는 그를 위해 한 알의 영약을 준비했습니다. 이 약으로 그의 중병을 고칠 생각이었습니다.”
망정사태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약으로는 구하지 못한다. 그는 마음의 병으로 누워 있다. 마음의 병은 마음의 약으로 고쳐야 된
다.”
“저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를 치료하겠습니다. 만일 그의 병을 고칠 수 없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구명지은에 보답하겠습니다.”
망정사태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너는 죽지 않아도 된다.”
“은정(恩情)이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으니, 저는 생사를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아 구명지은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이 때였다. 홍노부인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빠르게 말했다.
“소채야.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을 응낙했는데 어찌 함부로 죽는다는 말을 하느냐?”
악소채가 홍노부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스승님, 지금 제자는 매우 난처합니다.”
“나도 안다. 그러나 너는 이미 나의 문하에 들어왔으니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그러자 망정사태가 홍노부인을 쏘아 보며 말했다.
“홍노부인, 노승은 서로 화기를 상하며 비극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홍노부인과 서로 약속을 하
고 싶은데요.”
“좋아요. 말하시오.”
“악소채 스스로 결정하게 하되 악소채가 결정하기 전에 우린 그녀에게 세 마디씩만 물읍시다.
그녀가 자기 의견대로 하도록 맡기는 것이지요. 그럼 먼저 홍노부인께서 말하십시오.”
홍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악소채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채야, 너는 나에게 애걸을 하며 문하로 거두어 달라고 했지?”
“그랬습니다.”
“나는 너에게 이미 응낙했으며 너는 나의 후계자가 되기로 했지?”
“예,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예, 제자는 알고 있습니다.”
홍노부인은 만족한 웃음을 띠며 망정사태에게 말했다.
“사태, 나는 이미 소채와의 문답을 끝냈으니 다음은 사태께서 물을 차례입니다.”
망정사태는 악소채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험악한 표정으로 악소채를 쏘아 보며 물었다.
“나의 무공은 어떠하냐?”
악소채는 섬뜩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매우 고강합니다.”
“나는 홍노부인과의 충돌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 한 줌의 분노는 소영에게 풀어야겠다.”
이 말을 들은 악소채는 깜짝 놀라며 외치듯 말했다.
“소영은 이 일과 관계가 없습니다.”
“너는 은혜를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원수로 생각하니 모두 그와 관련이 있어서이다. 이 빚은 자
연 소영에게 갚겠으며 너희들은 이곳 세심모사를 떠날 수 없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홍노부인이 크게 외쳤다.
“당신은 이미 세 마디를 물었소.”
망정사태는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악소채가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안 됩니다. 그건 안 돼요!”
삼절사태가 앞으로 나서며 망정사태에게 말했다.
“스승님, 소영의 부모는 아직 살아 있으니 우리가 복수를 하기에 매우 좋아요. 그들에게 슬쩍 손
만 쓰면 되고, 홍노부인은 세심모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우린 아무도 꺼려할 것이 없
어요.”
악소채가 삼절사태 앞으로 나서며 애걸했다.
“언니, 이것은 소영과 아무 관계도 없어요. 그의 부모와는 더군다나 무관한데 어찌 무고한 사람
들에게 손을 쓰려는 것이에요? 소영의 부모님은 무림인물도 아닌데…”
“이 일은 홍노부인과 무관한데 홍노부인이 오히려 참견을 하고 있잖니?”
“그건 소녀가 그 분의 후계를 계승하기 위해 문하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삼절사태는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은 지금 불문에 귀의하셨지만 그러나 장준의 이모잖니?”
“언니, 그건 나도 알아요. 그렇지만 언니는 줄곧 나를 사랑해 왔는데…”
“내가 너를 아무리 사랑한다 하더라도 이미 어쩔 수 없다.”
홍노부인이 끼어 들었다.
“망정사태, 당신네들 말이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소?”
삼절사태가 말했다.
“나는 홍노부인과 언약한 일이 없으니 말을 얼마든지 하든 간에 그건 별로 신경쓸 일이 못 되
오.”
악소채가 홍노부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스승님, 제자가 저분들과 얘기를 명백히 하려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홍노부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악소채는 삼절사태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언니는 속으로 나를 매우 미워하고 있겠군요?”
“너는 홍노부인의 후계를 맡기로 했으니 뒤가 튼튼하겠구나. 내가 너를 미워한다 해도 할 수 없
잖니?”
악소채는 삼절사태를 바라보다가 결심한듯 머리를 동여맸던 두건을 풀었다. 그 머리를 본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그녀의 삼단 같던 고운 머리는 한 올도 남아 있지 않고 빡빡 깎여 있었다.
“옛날 스승님께서 저에게 불문의 사람이 아니니 삭발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허나, 나는
방방곡곡에서 많은 화근을 일으킨 것을 깨닫고 머리를 자르기로 결심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장대
협의일에 관해서 다른 사람보다 언니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장왕의 소법을 그에게 돌려
주었으니 이미 은원은 깨끗이 청산된 거예요. 만일 내가 시집을 간다고 하면 그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며 악소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소영이에게 가야 해요. 어머니의 유서에 그런 명령이 있었고, 또한 처음 장준과 내가 사귈 때에
도 네 사정 이야기를 모두 들려준 뒤였어요. 그도 나의 이런 내막을 알고 교제한 것이니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삼절사태가 망정사태를 돌아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 악소채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망정사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악소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니가 만일 정으로 대한다면, 나는 이미 삭발을 했으니 누구의 아내도 될 수 없어요. 그러나
언니가 무공으로 나를 다스리겠다면 나는 목을 내밀어 죽음을 청하겠습니다.”
삼절사태가 다시 망정사태를 돌아보며 말했다.
“스승님, 우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망정사태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악소채가 품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내며 이
렇게 말했다.
“나에게 어떤 죄가 있다면, 그것은 조물주가 나의 얼굴을 남보다 예쁘게 만든 탓이에요. 만일 내
얼굴을 추하게 만들었다면 장준대협이 나를 연모하는 마음이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나는 얼굴을
뭉개어 모든 화근을 없애고 여러분의 분을 풀리게 하겠어요.”
악소채는 말을 마치고 나서 비수를 자신의 얼굴에 대었다. 그 때 홍노부인이 재빨리 손을 휘둘
러 악소채의 손을 쳤다.
“쨍그렁!”
악소채의 손에서 비수가 땅에 떨어졌다. 이 때 한 줄기의 그림자가 유성같이 날아들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비호처럼 나타난 사람에게로 쏠렸다. 그것은 흰 옷을 입은 소영이었다.
악소채는 소영을 보자 미간을 찌푸리며 화난 어조로 말했다.
“동생은 아직 가지 않았군요.”
소영은 홍노부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후배는 먼저 노선배님께 사과를 드려야겠습니다.”
소영은 말과 함께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홍노파는 답례도 없이 싸늘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냐?”
“후배가 너무 방자해서 세심모사 밖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세심모사 밖에서 일어난 어떤 일도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
“아닙니다. 그들은 노선배님을 향해 몰려오고 있습니다.”
“누구냐?”
“신풍방입니다.”
“신풍방?”
“예, 후배가 그의 호법을 상하게 했고 신상을 부수었으며 나마지는 모두 도망쳤습니다.”
“신풍방과 나는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세심모사를 침범한단 말이냐?”
소영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망정사태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선배님, 소영이 처음 뵙겠습니다.”
“소대협의 이런 예를 감당하기가 어렵군요.”
소영은 소리내어 껄껄 웃었다.
“하하, 사태님의 말씀은 이미 널리 들었습니다. 이제 천 리 길을 멀다 않고 나를 찾아 오셨으니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망정사태는 소영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나하고 싸우려고 하나?”
“사태님께서 저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여기에 있으니 사태께선 어떻게 할 작정입
니까?”
“너무 건방지군.”
“나는 사태님이 도를 닦은 고승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태님은 정에 못 이겨 손을 떼지 못
하고 있지요? 그러나 사태님은 이왕 손을 내밀었으니 반드시 결론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나를
죽이면 모든 문제는 깨끗이 해결되고 만일 일이 잘못되어 내가 이기면 사태님도 그만 단념하시는
것이 좋잖습니까?”
망정사태는 얼굴빛이 약간 홍조를 띠며 차갑게 말했다.
“자넨, 정말 내가 손을 대기를 원하는 모양이지?”
“사태께선 만일 나의 일전을 수락하지 않으면 다시 암자로 돌아갈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망정사태는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묵묵히 소영을 노려보던 망정사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영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삼절
사태에게 물었다.
“소영의 무공은 어떠하냐? 만일 떠도는 말대로 그의 무공이 고강하다면… 몇 수 겨뤄보고 싶다.”
“스승님, 소영의 무공은 매우 높고 심오합니다. 제자가 그와 겨룰 때에도 그의 무공은 탁월했는
데 그 동안 얼마나 더 진보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망정사태는 머리를 끄덕이며 시선을 악소채에게 돌리며 말했다.
“너는 물러나거라! 너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니까…”
“스승님, 소영과 겨루어서는 안 됩니다.”
악소채의 말에 망정사태는 담담히 웃으며 대답했다.
“무엇 때문이냐? 내가 그를 부상시킬까 두려워서냐? 아니면 내가 그에게 부상을 당할까 해서 그
러느냐?”
“그 누가 이기든 제자는 모두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됐다. 알고 있으니 너는 그만 물러서거라.”
악소채는 자기가 망정사태를 설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뒤로 몇 걸음 물러
섰다.
악소채가 물러서자, 망정사태는 소영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번 일에 대해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볼 수 있소.”
“악누나가 장형의 마음을 상하게 한 데에 대해서 나는 마땅히 사과할 의무가 있습니다.”
“매우 영웅답군요. 시비로 논한다면 나는 당신과 싸워서는 안 되오. 그러나 이왕 정은 끊을 수
없는 것이고, 견문도 익힐 겸 아무래도 결과를 봐야겠소.”
“후배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나는 당신과 조건을 얘기하고 싶소.”
“어떤 조건입니까?”
“만일 내가 패한다면 나는 이미 모든 심력을 기울여 손자를 위한 것으로 간과하고 더 캐묻고 덤
비지 않겠소. 그러나 만일 내가 이긴다면…”
“그 땐 어떻게 하실 준비가 있으신지요?”
“만일 당신이 패한다면 악소채가 우리 장씨의 며느리가 되어야겠소.”
“그것을 어찌 이 후배의 마음대로 하겠습니까?”
“당신이 만일 이길 자신이 있다면, 어찌 그녀가 응낙하지 않겠소?”
말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홍노부인이 끼어 들었다.
“악소채는 이미 나를 따르기로 약속했소. 소영과 악소채가 모두 응낙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응낙할 수 없소.”
이 말에 망정사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서두르지 마시오. 내가 소대협과 싸워 이긴 뒤 당신과 싸워도 늦지는 않으니까…”
그러자 홍노부인이 화를 발끈 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소영보다 나중에 싸워야 된단 말이오?”
“당신이 꼭 먼저 나서겠다면 할 수 없이 응낙해야겠군.”
“좋아요. 우리가 먼저 겨룹시다. 내가 당신을 이긴다면 소영이 나설 것도 없어지니까…”
“좋지요. 내가 패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암자로 돌아가서 다시 나오지 않겠소. 나는 이후 아무런
일에도 간섭하지 않을 테니 자연 이 일도 해결되는 것이지요.”
홍노부인은 죽장을 쳐들며 앞으로 나서다가 문득 멈추었다.
“이제 우리가 서로 싸우게 되면 둘 중의 하나는 상하게 될 테니… 한 가지 일을 우선 명백히 알
고 싶소.”
“무엇이오?”
“신풍방과 나는 생전에 원한을 맺은 일이 없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세심모사를 침범하려 했지
요?”
“그것은 나도 모르오.”
“당신이 안다 해도 말하지 않겠지요?”
그러자 망정사태는 뒤돌아보며 외쳤다.
“장성(張成), 이리 오시오!”
장성이 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망정사태, 무슨 분부라도…”
“당신네들이 신풍방을 청해 왔소?”
“노부인께서 청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소영이 끼어 들었다.
“신풍방을 청했다면 분명 다른 사람도 또 있겠군요?”
장성이 소영의 말에 대답을 않자 망정사태가 날카롭게 물었다.
“또 누굴 청해 왔소?”
“그것은 모릅니다.”
“장성! 솔직히 말해요!”
“저는 시, 실로…”
장성은 더듬거리며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이 때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를 추궁하지 마시오! 물으려거든 나에게 물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