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80
180. 신풍방주의 정체
악소채는 온통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소영은 그녀의 변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언니, 오빠와 나는 무척 언니를 보고 싶어 했어요.”
악소채는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감사해요.”
그녀의 말은 매우 겸손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은 소영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었다. 악소채는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으니 이제는 이곳을 떠나세…”
소영은 악소채의 냉랭함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거기에 대해 더 말하지 못하고 앞에 놓여 있는 영
대(靈臺)를 가리켰다.
“저 영대 안에는 운이모의 법체(法體)가 놓여져 있습니까?”
악소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나는 이미 옮겨 놓았소. 동생의 마음이 변했으니 그것을 볼 필요가 없잖소.”
소영은 점점 그녀의 이야기가 엉뚱하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누님, 이곳의 주인은 나에게 운이모의 법체가 있다고 말했소. 그가 누님을 속이지는 않았을 터
인데요.”
“주인이 동생을 속였겠지.”
“아니오. 누님이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오.”
악소채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동생을 속이지 않아요. 내가 고인의 시체를 서상(西廂)에서 옮긴 것을 홍노선배가 모르고
있기 때문이에요.”
소영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누님께선 운이모의 법체를 어느 곳으로 옮겼습니까? 저를 데리고 그곳으로 갈 수 있겠지요?”
악소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동생은 이미 마음의 등불이 꺼졌으니 운이모의 법체를 볼 면목이 없을 것이오. 두 사
람은 어서 이곳을 나가세요. 내가 문까지 전송하겠어요.”
소영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누님께서는 나를 쫓으려고만 하시는데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오?”
소영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잔뜩 화를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옛날에는 악소채의 어떠한 말이나 행동에도 고분고분 순종하던 소영이었다.
악소채는 소영의 미간에 떠오르는 노기를 보고 가슴이 섬뜩함을 느껴 짐짓 부드러운 미소를 띠
었다.
“미안해요. 난 동생을 아직도 옛날의 어린애로 착각해서… 동생 도 성인이니 응당 자세한 내막
을 말해 주겠어요.”
“말해 보시오. 이 동생이 귀를 기울이겠으니…”
악소채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홍노선배님의 승낙을 받고 그의 계승자가 되어야 해요. 그러므로 앞으로는 이 세심모사에
서 지내야 되는 것이지요.”
“누님은 운이모의 복수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나는 홍노선배님께 지난 일을 자세히 들었어요. 왕년에 내 아버지를 해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어머니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며 어머님께서 비록 중상을 입으셨다지만 상대를 모두 죽이고…”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벽호(長壁湖)의 혈전에서 운이모는 원수를 갚은 것이로군요.”
“그래요. 어머님은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적을 유인한 것이지요. 어머님이 금궁의 열쇠를 세상에
내보인 것도 모두 계략이 있었던 것이오. 원수들이 모이자 일부러 배에까지 유인하여 혈전을 벌
인 것이에요. 그래서 원수는 죽고 어머님은 중상을 입었지요.”
“그런데 그 홍노선배가 어떻게 그것을 자세히 알고 있을까요?”
악소채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지난 과거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요. 노선배는 그날 밤 어머니를
도와 적과 싸웠다는 거예요.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원수도 못 갚을 뻔했지요. 그리고 그 배를
불태워 없앤 것은 흔적을 없애기 위함이었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누님은 이모님의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래요. 나는 벌써 이곳을 찾아 홍노선배에게 물어 봤어야 되었을 것이었소. 진작 이 사실을 알
았더라면 강호를 뛰어 다니며 겹겹이 번뇌를 만들지 않았을 터인데. 이 세심모사에서 편안하게
마음을 갖고 은거할 수 있었을 것이란 말이에요.”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며 포권을 했다.
“누님, 심중의 근심이 걷히고 이제는 번뇌를 잊게 되셨으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악소채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강호에는 은혜와 원수가 쉬지 않고 엉키고 있소. 난 어디까지나 여자의 몸이므로 그 거센 물결
을 감당할 수 없음을 느끼오. 그러므로 다시는 강호에 나가지 않을 결심이오. 이 세심모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서면 나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이곳에서 어머니의 법체를 보살피며 조용히 삶을
끝내려 하오.”
그녀는 눈길을 돌려 소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동생은 어린 나이에 강호에 협명을 날리고 있소. 앞길이 창창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이후부터는
나를 누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동생도 성인이니 자신이 갈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특히 백
리 동생을 잘 대해 주고 다시는 이 곳을 찾지 마세요. 난 동생을 기다리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그녀의 긴 말이 끝나자마자 백리빙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언니! 제가 몇 마디 할 말이 있어요. 이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니…”
악소채는 미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무슨 말인지, 서로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백리빙은 소영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말을 꺼냈다.
“오빠는 언니를 아내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록 말은 없었지만 언니를 깊이 사모하고 있단 말이
에요.”
악소채는 소영에게로 눈길을 돌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소생은 행복한 사람이오. 이렇게 마음 좋은 백리 동생을 데리고 있다니 동생은 응당 백리 동생
을 부인으로 맞이해야 될 것이에요.”
소영은 무어라 말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백리빙이 말을 받았다.
“언니!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제가 열이나 된다 하여도 언니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오빠도 그것
을 잘 알고 있어요. 언니는 이왕 원수를 잊으셨으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
째서 오빠와 저를 멀리하시려고 하세요? 오빠는 언니를 부인으로 결정하시고 있으신데요. 더군다
나 오빠의 영당에서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요. 오빠의 부인이라고요. 제게는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부인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정이 좀 틀린 것이에요. 지금이라도 동생이 죽으면 난 그의 부인이 될 수 있어요. 그
의 부인으로서 그가 못다한 일과 원수를 갚을 수도 있는 것이오. 그러나 동생이 살아 있으니 응
당 백리 동생이… 앞으로는 동생을 낭군으로 생각하고 전보다 더 가깝게 지내요.”
백리빙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만약 오빠가 응낙한다 하여도 저는 반대예요.”
악소채는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그럼 어찌하려는 것이오?”
“나는 언니에게서 한 가지 대답을 듣고 싶어요.”
“무엇인데?”
백리빙은 악소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언니가 오빠의 부인이 되겠다는 약속이오. 언니는 가모의 유언도 잊으셨단 말이에요?”
악소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백리 동생은 어떻게 하겠어요?”
“언니가 묻는다면 거짓 없이 대답하겠어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오빠에 대하여 정이 깊을 대로 깊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오빠곁을 떠날 수는 없어요. 그러
나 결코 언니와 오빠의 혼인을 시기하거나 방해하지는 않겠어요. 오빠나 언니가 승낙하신다면 첩
이라도 되겠어요. 만약 그것이 안 된다면 종이라도 좋아요. 오빠나 언니를 만날 수 있게만 되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악소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리 동생의 뜻을 알겠어요. 두 사람의 정이 그렇게 깊으니 나도 축하를 하겠어요. 나는 이미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한 사람이에요. 홍노선배님의 제자가 되어 이 세심모사를 이어받는 것이오.
이제는 남의 부인이 될 수도 없어요. 그러나 내 가슴 속에는 언제까지나 두 사람이 새겨 있을 거
예요.”
그녀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하더니, 조금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원래 이곳은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지만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문을 열지요. 그래서 두 사람과 함께 얼굴을 보고, 지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끔 말이에요. 어떠세요?”
오랫동안 듣기만 하던 소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누님의 생각이 정 그러시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안정되기 전에 또다시
한바탕의 재난이 있을 것이오. 누님께서 이 곳에 은거하신다 하여도 그 재난을 피하지는 못하오.”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 있어요. 홍노선배님께서 옥소랑군을 상하게 하셨으니 분명 그분을 불러 내겠지요.”
소영은 깜짝 놀라며 다그쳐 물었다.
“홍노선배님도 그 일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보시고 계신지요?”
악소채는 앞으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서 대답했다.
“홍노선배님께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심모사에서 백 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하셨어요. 강
호에서 어떠한 변화가 생기고 무림이 모두 뒤바뀌는 분쟁이 생긴다 하여도 그분에게는 하등의 관
심도 없어. 그러나 이곳에까지 그 일이 밀려 온다면 부득이 손을 쓸 것이오. 세심모사의 백 장 이
내에까지 들어섰다면 말이에요.”
소영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홍노선배님은 이번 분쟁에 대해 누님을 책망하지 않았어요?”
악소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었어요.”
“만약 장노부인이 많은 고수를 거느리고 이곳을 침범해 온다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보기에는 홍노선배님이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분도 어느 정도 자신
을 갖고 있어요.”
악소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밖에서 냉랭한 음성이 들렸다.
“너희들은 너무 오래 머물고 있다.”
소영도 눈살을 찌푸리며 큰 소리로 말을 받았다.
“제가 아직 못한 말이 있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나 밖에서 다시 냉랭한 노파의 음성이 들렸다.
“안 된다. 나는 항상 두 말을 안한다. 두 사람은 즉시 물러나라. 만약 내 말을 어긴다면 할 수
없이 손을 쓰겠다.”
소영은 그 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는 악소채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누님, 몸을 보중하십시오. 다음에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라겠습니다.”
악소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말했다.
“좋아요. 하여튼 어서 이곳을 떠나도록 해요. 괜한 일로 다치지 말고요.”
“누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저대로의 생각이 있습니다.”
소영은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악소채는 밖으로 나가는 소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는 상념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뜨거운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소영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리자 마침 소영도 고개를 돌렸다.
소영은 악소채가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는 것을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
는 처지였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세심모사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백리빙이 바짝 옆을 따르며 입을 열었다.
“오빠! 화났어요?”
소영은 짐짓 미소를 보였다.
“아니 난 아무렇지도 않아.”
“오빠는 거짓말을 하시고 있어요, 그렇지요? 무엇인가 가슴에 숨기고 있어요.”
소영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백리빙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빠는 언니의 말이 너무 무정하다고 생각하세요?”
“누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잘못하지 않았어. 오히려 누님을 괴롭히는 우리가 잘못이지. 그러나 누
님의 태도가 조금 차갑다고 느껴져.”
백리빙은 손으로 가슴을 짚으며 말을 받았다.
“저와 관계된 일인가 봐요.”
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거예요. 언니는 나를 원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나 때문에 오빠에게 냉랭하게 대
했어요.”
“빙아는 너무 깊이 생각해서 탈이야. 누님은 이미 자기 갈 길을 결정했다고 했잖아. 이제는 어느
누구도 누님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백리빙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오빠는 언니를 이해해야 돼. 언니의 처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두 사람이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벌써 초가집을 둘러 싸고 있는 대나무 숲까지 다다
랐다.
그들이 막 오솔길로 접어 들려는데 돌연 징소리가 들렸다.
소영은 안색이 변하며 나직이 외쳤다.
“신풍방(神風幇)이다!”
백리빙도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요?”
“우문선생의 말이 틀림 없다. 악누님의 절세 미모는 뭇 남자들에게 화를 일으키는구나. 누님이
어디로 가든 그 미모 때문에 끝없는 흉사가 뒤따르는 것이다.”
그 사이에 흰색을 띤 거대한 그림자가 멀리 보였다.
소영은 길 가운데에 우뚝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았다.
백리빙은 소영에게서 비장한 표정을 보고 걱정된 눈빛을 보냈다.
“오빠! 어쩌려고 그래요?”
“신풍방은 강호에서 그리 좋은 일을 안하는 편이다. 그러니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을 것
이다. 오늘 이 기회에 신풍방의 음흉한 내막을 알아내고 말 테다.”
이 때 다시 요란한 징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두 사람이 소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신풍방의 단전개도(壇前開道)로 있는 이귀(二鬼)였다.
하나는 철판 좌비요, 다른 하나는 원홍 방횡이었다.
좌비는 오른손에 낭아봉(狼牙棒)을, 방횡은 양쪽 손에 상문장(喪門杖)을 들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여덟 명의 장한이 무섭게 생긴 신상을 둘러메고 있었다. 그리고 신상을
호위하는 듯 앞뒤로 십여 명의 흑의 사나이가 섰다.
소영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빙아야, 이곳이 세심모사에서 얼마만큼 떨어진 곳이냐?”
백리빙이 뒤를 힐끗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백 장 밖이에요.”
“그것 마침 잘 됐구나. 우린 여기서 저들을 막기로 하자.”
백리빙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소영의 표정에서 살기를 느끼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신풍방의 이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소영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들은 길 가운데 우뚝 서서 움직
일 줄 모르는 소영을 보고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소영은 그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냉랭한 말을 보냈다.
“두 분께선 며칠 더 살고 싶으시다면 어서 발길을 되돌리시오. 그리고 귀 방주에게 내 말을 전
해 주시오. 앞으로 다시 귀신같은 행동으로 강호를 괴롭히면 용서치 않겠다고 말이오.”
좌비는 멍청한 시선으로 소영을 바라보았다.
“귀하의 말이 좀 귀에 거슬리오이다.”
방횡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우리를 몰라 보는 것으로 보아 분명 강호의 하룻강아지로군. 어디 귀하의 이름이나 들
어봅시다.”
소영은 빙그레 웃음을 띠었다.
“우리는 몇 번 만났던 기억이 있는데, 두 분께서는 어찌 그리 건망증이 심하시오?”
좌비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을 받았다.
“무림에는 많은 동도들이 있소. 그들을 어찌 다 기억하겠소?”
“좋소. 그럼 소영이 말하더라고 하시오.”
방횡이 눈을 크게 뜨고 다그쳐 물었다.
“당신이 소대협이란 말이오?”
“그렇소.”
좌비가 한 발 나서며 물었다.
“소대협께서는 혹시 세심모사에서 나오시는지요?”
소영은 엉뚱하게 묻는 좌비에게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는 울컥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두 분께서 말을 안 듣는다면 할 수 없이 내가 해야지.”
그리고는 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좌비가 소영의 앞길을 막아섰다.
“소대협! 멈추시오.”
소영은 재빨리 왼손을 내밀어 좌비 수중의 낭아똥을 움켜 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좌비의
아랫배를 힘껏 걷어 찼다. 좌비는 졸지에 당한 역습이라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비명과 함께 데굴
데굴 굴렀다. 그는 신음소리만 낼 뿐 일어날 줄을 몰랐다.
방횡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좌비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역시 소문에 듣던 바로구나.’
그는 이를 악물고 양쪽 상문장을 맹렬히 휘두르며 소영에게 달려 들었다.
‘어디 내 맛을 보아라.’
소영은 가볍게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다.
소영이 다시 반격하려는데 백리빙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방횡이 채 전세를 가다듬기도 전에
거센 일장을 뻗었다.
방횡은 백리빙을 너무 경시하였다.
‘저 계집애는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러므로 백리빙이 역습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었다.
백리빙이 뻗은 일장은 보기 좋게 방횡의 등줄기에 명중하였다.
“억!”
방횡은 비명과 함께 머리를 땅에 처박고 쓰러졌다.
그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으며 입은 온통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빙아야, 너는 이곳에 남아서 길을 지키고 있거라. 만약 신풍방의 방주가 나타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 말고 침착하게 행동하거라.”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조심하세요.”
소영은 빙그레 미소로써 대답하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신풍방의 신상은 거대하고 무섭게 생겼다.
소영은 그 신상을 흘끔 바라본 후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귀하는 이런 괴물 모양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오. 괜히 애쓰지 말고 어
서 정체를 보이시오.”
신상을 호위하던 십여 명의 사나이들은 모두 장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의 명성을
듣고 두려워서인지 방주의 명령이 없어서인지 달려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자 흥칙한 신상 안에서 은방을을 굴리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당신이 소영이오?”
“그렇소. 우리는 이번 말고도 몇 번 만나지 않았소?”
“당신은 강호 무림에서 우러러 보고 있는 영웅이구려.”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흥! 말재주가 좋군요. 당신은 그 안에서 무얼 하시오? 오랫동안 있으면 갑갑하지도 않소?”
“…”
신상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소영은 의아심을 갖고 유심히 신상을 살폈다.
‘필시 무슨 암수를 쓰려는 것이겠지.’
그의 생각이 막 끝나자마자 신상의 커다란 눈이 움직이며 붉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마
치 소영에게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소영은 옆으로 삼 장이나 비켜 섰다.
그러자 신상 속에서 간드러진 웃음이 흘러 나왔다.
“호호호… 두려워하지 마세요. 이것은 단지 당신을 자세히 보려고 하는 것이니까요.”
소영은 노기 띤 표정으로 버럭 소리 질렀다.
“당신은 나를 놀리는 것이오? 당신의 모습이나 어서 보이시오. 무엇 때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
는 것이오?”
“나는 이곳에서 자랐으며 이곳에서 죽을 것이오.”
소영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설마 당신은 그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겠지요?”
“나는 십사 세에 방을 계승받아 오늘까지 십이 년 동안을 이곳에서 살았소이다.”
소영은 잠시 멍청해졌다.
‘십이 년 동안이나…”
“그럼 당신도 밥을 먹소?”
“호호… 나도 사람인데 왜 밥을 안 먹겠어요.”
소영은 더욱 크게 의아심이 생겼다.
“어떻게 그 안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은 신상의 큰 입을 못 보았소? 그 입으로 모든 것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어요.”
소영은 자세한 것을 묻고 싶었지만 필요 없는 시간을 끌기 싫었다.
“방주께서는 밖으로 나오시겠소?”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것을 묻소?”
소영의 대답도 듣기 전에 신상 안에서는 다음 말이 나왔다.
“이 좁은 신상 속에서 십여 년을 살았는데 어찌 나가기가 싫겠어요? 그러나…”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신은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구려?”
그러자 신상을 호위하고 있던 사나이 중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방주님, 우리 방의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됩니다.”
소영은 얼른 눈길을 돌려 입을 연 상대방을 보았다.
그는 바로 심풍방의 단전호법(壇前護法)으로 있는 초혼수(招魂手) 상명(常明)이었다.
소영은 그에게 싸늘한 눈길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명성은 많이 들었소. 당신네 신풍방이 이렇듯 괴상하고 선을 모른다면 내가 직접 상대
하겠소. 저 신상에 갇혀 있는 방주라는 여인도 필시 당신네들의 수작에 말려 들었을 것이오. 내
우선 당신부터 그 죄의 대가를 치러 주겠소.”
그러나 상명이 먼저 거센 장력으로 공격했다.
“죽어라!”
그는 오른손을 휘둘러 장력과 함께 소영의 손목을 짚으려 했다.
소영은 신풍방의 방주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이미 교피장갑을 끼었다.
상명이 뻗쳐온 장력을 정면으로 맞서며 몸을 옆으로 돌리고 그의 명치께를 가격했다.
“펑!”
“윽!”
장력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상명이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상명은 안색이 파랗게
변하며 맥없이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자 호위 장한들이 일제히 덤벼 들었다.
소영은 주위를 둘러싼 장한들을 여유 있는 표정으로 둘러보았다.
‘흥! 별것 아니군.’
그는 천천히 진기를 끌어 모았다. 진기는 양쪽 손으로 잔뜩 몰렸다.
칠팔 명의 사나이들과 소영과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얏!”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소영이었다.
그는 동에서 북으로, 북에서 다시 남으로 번개같이 몸을 날렸다.
그가 한 번 스쳐간 곳은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장한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한 마디로 추풍낙엽이었다.
칠팔 명의 장한은 제대로 손도 못 써 보고 모두 중상을 입거나 혈도를 찍혔다. 이 모양을 본 나
머지 장한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하였다.
소영은 도망가는 사람을 뒤쫓지 않았다.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려 다른 상대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방주는 들으시오. 지금 방주를 따르던 장한들은 모두 부상당하거나 도망쳤소. 만약 이대로 놔둔
다면 필시 당신은 굶어 죽을 것이오.”
“그러나 본방에는 다른 고수들이 많아요. 비록 겁장이들이 도망을 쳤다지만 다시 나를 구하러
올 거예요.”
“그럼 그들이 오기 전에 당신의 목숨을 빼앗겠소.”
신상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조금 큰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이 어찌 신상을 부술 수 있소? 이 신상은 바위보다 더 단단한 것이라오. 더군다나 당신은
신상에 일 장 가까이도 못할 것이오.”
소영은 눈빛을 빛내며 다그쳐 물었다.
“왜 그렇소?”
“이 거대한 신상의 사면에서는 암기를 발사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어요. 그 암기는 모두 극
독이 묻어 있으며 한두 개가 아니오. 한 번 나가면 수십 개가 되어 아무리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
라도 피할 수 없을 것이오. 만약 그 암기가 조금이라도 몸에 스치면 당신은 무사하지를 못할 것
이오.”
소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크게 의아심을 가졌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런 비밀까지 말해 주는 것일까?”
그는 직접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방주께선 먼저 경고를 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소?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오?”
“믿지 못하겠다면 한 번 시험해 보시지.”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절대 독침이 없다고 믿소.”
그리고는 암암리 운기하여 온 몸에 강기를 퍼뜨려 천천히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거의 신상에 닿을 무렵이었다.
돌연 신상의 입에서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물체가 소영에게 덮쳐 왔다. 소영은 몸을 피하지도
않고 재빠르게 허리를 굽혀 그 암기를 피해 냈다.
그는 암기가 머리 위를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앞으로 내달았다.
소영은 신상 밑에 당도하자마자 십 성의 공격으로 신상의 머리에 일장을 날렸다.
그가 암기를 피하고 신상 밑으로 다가 선 것은 눈깜짝할 순간이었다. 더구나 일 장을 날린 것은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펑!”
거대한 신상은 소영의 장풍에 맞아 옆으로 쓰러졌다.
소영은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그 신상 바로 밑에 바싹 엎드렸다.
과연 방주의 말이 맞았다.
그녀의 말대로 넘어진 신상에서는 수많은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달빛을 받아 검게 빛나는 암기들이 허공을 뚫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소영은 땅에 엎드린 채 내심 감탄했다.
‘이렇게 많은 암기가 날으니 정말 어느 누구라도 당해 낼 수는 없지. 만약 나도 그 사실을 몰랐
었다면 지금쯤 암기에 맞아…’
잠시 지나자 신상의 몸에서 나오던 암기가 저절로 멎었다.
소영은 살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신상에게서 삼 장 정도 몸을 날렸다.
그가 땅에 내려 서자, 그곳에는 어느새 왔는지 백리빙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오빠! 괜찮아요?”
소영은 신상을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오빠, 저 신상 안에 방주가 있지요? 만약 그녀 부하들이 마음을 달리 먹고 버려 둔다면 그녀는
굶어 죽겠네요.”
소영은 백리빙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우리가 어찌 그녀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그녀를 상대해요?”
소영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그녀 스스로 나오게 하겠다. 그녀가 계속 꾀를 부린다면 우리도 방법을 강구해야지.”
“어떻게?”
“아주 쉬운 방법이지. 그녀가 안 나오겠다면 신상에다 불을 지른다고 위협하는 것이지.”
백리빙은 가볍게 맞장구를 쳤다.
“됐어요. 그렇게 하면 그녀가 안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저 신상에는 아직도 많은 암기가 들어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쏟아지는 암기를 당해 내지는 못
하니 너는 여기에서 엄호나 하여라. 직접 부딪쳐 보마.”
백리빙은 빙그레 웃음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조심하세요.”
소영도 빙그레 웃고는 신상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신상에서 일 장 정도 사이를 두고 큰소리로 외쳤다.
“방주 들으시오! 당신은 이제 나에게 잡힌 몸이니 만약 당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온다면 목숨만
은 살려 주겠소. 그러나 계속 죄를 부리고 나오지 않는다면 내 손에 목숨을 잃을 것이오.”
“당신은 무슨 수로 나를 밖으로 나가게 만들겠소?”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려 백리빙을 보았다.
백리빙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빨리 말하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영은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근처의 나무를 모아다 신상에다 불을 지르겠소.”
이 말은 분명 방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낭랑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당신도 말했었고요. 난 마음대로 이곳을 나가지 못한단 말
이오.”
“나는 믿지 못하겠소.”
“그럼 하는 수 없군요. 당신 생각대로 태워 죽이세요.”
소영은 다시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백리빙은 앞으로 다가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그녀의 말이 정말인가봐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신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내가 당신을 도와 신상을 부순다면 어쩌겠소이까?”
“그것은 불가능해요. 이 신상의 껍질은 매우 단단하여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뚫을 수 없어
요.”
“방주,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가 꺼내 드리리다.”
소영은 품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것은 금궁에 들어 있던 것으로서 쇠라도 쉽게 가를 수 있는 단검이었다. 그는 신상으로 올라
가서 머리에서부터 밑으로 단검을 내리그었다.
신상의 껍질은 북 소리를 내며 쉽게 갈라졌다.
소영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긋고는 먼저 자리로 내려섰다.
“방주는 어서 나오시오. 신상의 껍질을 잘라 놓았으니 그 안에서 조금만 힘쓰면 밖으로 나올 수
있소.”
신상 안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그녀가 믿지 못하고 힘을 안 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말하려고 막 입을 떼려는데 돌연,
“펑!”
소리와 함께 신상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 속에서는 청의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둠 속이라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청의소녀는 가벼운 걸음으로 소영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고 맑은 음성
으로 말했다.
“소대협! 감사합니다.”
소영은 가벼운 예로 답하고는 다그쳐 물었다.
“낭자가 바로 신풍방의 방주요?”
청의소녀는 머리카락을 궁등이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대답했다.
“일개 방주라고는 하나 이렇게 갇혀 있었던 몸이기 때문에 별로 달갑지 않소이다.”
“낭자는 여자의 몸으로 더군다나 어린 나이에 어떻게 방주가 되었소?”
청의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영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것이 제일 궁금한가요?”
“그렇소. 귀방에는 인재가 많을 터인데…”
청의소녀는 쓴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저의 아버님께서 처음으로 방을 세우셨어요. 그러나 아버님은 불구자였기 때문에 제대로 일을
못하셨지요. 그런 때문인지 저에게 방주 자리를 물려 줄 때 이렇게 신상 속에다 가둔 것이에요.”
백리빙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당신의 부하들에게 배반을 당하면 어떡하오? 황량한 곳에다 당신을 내려 놓으면 꼼짝
없이 굶어 죽게 되지 않겠소?”
청의소녀는 백리빙을 유심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방중의 몇몇 고수들은 제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어요. 그들의 몸에는 독성이 있는 고약이 붙
어 있어서 칠 일에 한 번씩 그것을 갈아 붙여야 돼요. 만약 칠 일을 넘기면 그 자리가 썩게 되고
나중에는 목숨을 잃게 되지요. 그 고약의 제조 방법은 저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일종의 독고약이로구려. 그럼 이제부터는 어쩌겠소? 신상도 부서졌으니 다시 들어갈 수
도 없는 일 아니오?”
청의소녀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소영과 백리빙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에 관심을 기울였다.
얼마 후 청의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방주 자리를 원치 않았어요. 그러나 저는 신상 안에 갇혀 있는 폼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이 일을 해 온 것이에요. 그 동안 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이제 뜻하지
않게 소대협의 구원을 받았으니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어요.”
그녀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세상을 이렇게 보는 것도 십여 년 만이에요. 이렇게 마음껏 움직이고 마음껏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앞으로는 심산에 은거하여 조용한 삶을 찾겠어
요. 그리고 신풍방도 해체하겠어요.”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낭자! 고맙소. 낭자를 구해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소. 나는 신풍방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지만 하나도 묻지 않겠소. 낭자의 행운을 빌 뿐이오.”
청의소녀는 흐느껴 울었다.
“소대협께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제 힘껏 노력하여 신풍방을 해체시키겠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한참 동안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청의소녀는 아무 말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백리빙은 사라지는 그
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 그녀가 불쌍하군요.”
그리고는 소영의 손을 힘껏 잡았다.
“오빠는 정말 강호에 없어서는 안 될 영웅이에요. 불과 한 시진도 안 돼서 거대한 세력의 신풍
방을 해체시키다니…”
소영은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백리빙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뜨거운 시선이 한데 어울렸다.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가까와졌다.
누가 먼저 다가서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몸이 막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두 사람의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을 방
해했다.
백리빙이 깜짝 놀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울리는 소리예요?”
소영은 주위를 살피더니 다급히 대답했다.
“오늘 밤에 일대 혈전이 벌어질 것 같군. 세심모사에 큰 변이 생기겠단 말이야. 어디 무슨 일인
가 볼까?”
그는 백리빙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큰 나무 위로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이 나무 위로 몸을 숨기자마자 몇 개의 사람 그림자가 질풍같이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