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
002화 회생 2
* * *
불현듯 울려 퍼지는 소리.
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성과 남성이 반응했다. 뜻밖의 손님은 언제나 동요를 몰고 오는 법. 고개를 돌린 둘은 순백의 기사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기사도의 체현.
인간 세상에 강림한 신의 아들.
백기사, 아휀 슈발체베인.
그의 명성은 이미 국경을 넘어서 온 대륙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다음 세대를 이끄는 리더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안에서도 그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온 아휀이 가만히 고개를 움직였다.
“내분입니까? 성녀의 흔적을 따라 돌아다녔더니 보고 싶지 않은 광경도 저절로 보게 되는군요.”
별일도 아니라는 듯,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아휀이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도 싱그러운 웃음이었기에 보는 이까지 긴장이 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와 직면하고 있는 둘은 달랐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선 기사가 얼마나 강력한 적인지.
전율한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며 태세를 가다듬었다.
“당신들에겐 물어볼 게 많습니다. 성녀를 잡은 건 아마도 당신들일 테니까요. 여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집단이라니. 저도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말을 끝마친 아휀이 한 발자국 다가오자 남성은 해머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집중해라, 상대는 백기사다.”
상대가 상대였다. 순간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참사를 낳을 터.
“나도 알고 있어. 보채지 마.”
허리를 더듬은 여성이 채찍을 집어 들었다.
그들에게도 눈앞의 상대는 최악의 난적이었다. 도망치는 게 고작일까. 어쩌면 잡혀서 죽을지도 모르는 일. 남성과 여성이 허리를 굽히자 아휀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저항하고 보겠다는 겁니까. 필요 없는 과정은 건너뛰고 싶지만 눈을 보니 불가능하겠군요.”
이윽고, 그 말은 현실이 됐다. 남성이 해머를 휘두른 것이다.
쾅. 강렬한 굉음과 함께 지면이 터져 나갔다. 갈기갈기 찢긴 건물들 사이로 여성이 질주했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골목길이 시야를 어지럽혔으나 아휀은 유유자적 발걸음을 옮겼다.
여성이 발을 묶고, 남성이 머리를 노렸으나 그들의 합공이 닿는 일은 없었다.
아휀이 검을 꺼내는 일도 없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몇 번인가 떠오른 뒤에 가라앉을 뿐. 카인의 눈엔 그들의 공방이 보이지도 않았다.
십좌의 일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백기사, 아휀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두 사람을 상대했다.
일말의 양보도 없는 공방 속에서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을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채찍을 쓰는 가문을 본 것 같은데 말이죠. 제 착각이 아니라면 이건…….”
“시끄러워!”
여성이 아휀의 손에 잡힌 채찍을 거칠게 휘두르자 줄 사이로 가시가 돋아났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튀어나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휀이 한 걸음 물러났다.
“기이한 일이군요. 어째서 당신이…….”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쿠쾅. 남성이 힘껏 내리찍은 해머는 천재지변이 되어 지면을 가라앉혔다.
한순간에 지형이 돌변할 정도로 강렬한 일격. 아휀이 손을 젓자 지하를 향해 내려가던 충격파가 하늘로 치솟았다.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으나 그게 빈틈을 낳았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휀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지만 자리에 남아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망치는 건 일품이군요.”
갑작스럽게 끝난 야회가 아쉬운 건지 한숨을 내쉰 아휀은 등을 돌렸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저쪽에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까.
먼지구름을 헤치며 다가와 카인을 내려다본 그는 두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회생 불가. 하지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돌려 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상처가 심하군요.”
백기사, 아휀 슈발체베인.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동갑이라는 사실에 기묘한 동질감이 들어 예전부터 주의 깊게 보던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얽힌 사건이 많았다.
부질없는 과거를 회상한 카인은 실소를 머금었다.
같은 지점에서 시작했으나 하나는 정점에 다다랐고, 하나는 진창을 헤매고 있지 않던가. 우스울 따름이었다.
솟구치는 한탄에 입을 열었으나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소리는 갈 길을 찾지 못했다.
“으……, 그……. 스으으.”
그저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질 뿐이었다. 한 박자 늦게 목구멍이 뚫렸음을 인지한 카인은 고개를 내렸다.
하반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졌으며, 둘로 갈라진 배는 훤히 내부를 드러내고 있었다.
성녀를 도주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닌 대가였다.
신체 개조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했다.
애석하게도 이 뒤는 없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지만 카인은 알 수 있었다.
“안타깝군요. 천년동자라면 당신을 살릴 수 있었을텐데.”
아휀도 자신의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고 있었다.
천년동자는 성녀에게 이단자의 낙인을 찍은 장본인. 죽이면 죽였지, 성녀의 도주를 도운 이를 그가 도울 리 없었다.
“이대로 죽는 순간까지 기다린다는 건 당신에게 커다란 고통이 될 겁니다. 아마 살아난다고 해도 조직의 정보를 원하는 이들이 가만히 두지 않겠죠.”
그래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방금 전까지 조직의 정보를 얻기 위해 손을 휘두르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닐 것 같은데.
카인의 눈빛에서 그러한 생각을 읽은 건지 아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눈빛은 접어두시길. 죽어가는 이에게 닦달해서 얻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정보는 아니니까요. 다른 이들도 많지 않습니까.”
짝,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가볍게 손뼉을 친 아휀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러니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이대로 덧없는 희망에 매달리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마지막을 선택하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휀의 검집이 달그락거렸다.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는 건가.’
어찌 보면 호의라면 호의이리라. 카인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는 어느새 목 밑까지 다가온 상태. 우연에 우연이 겹쳐 살아난다고 해도 죽느니만 못한 삶이 펼쳐질 터.
‘마지막으로 성녀님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니 포기할 수밖에. 카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무덤덤했다.
애당초 이룬 것도 없으니 바랄 것도 없었다.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현실을 받아들인 결과일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건만.’
카인이 결정을 내렸다는 걸 직감한 아휀이 검을 들었다.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말이라도 있습니까? 독순술도 익혀서 짧은 말은 이해할 수 있으니 입만 움직이셔도 됩니다.”
없다. 그렇기에 고개를 저었다.
성의 없는 태도였지만 기사도를 그림으로 그린 듯한 남성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선을 넘어온 그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반응도, 이러한 순간도.
카인이 두 눈을 감자 아휀이 손목을 비틀었다. 순간, 발검과 착검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소리도 없이 나아간 검이 목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스윽. 피와 살이 둘로 갈라지는 소리가 아련히 울려 퍼진다. 어두운 골목길 위로 동그란 그림자가 눌어붙었다. 주인 잃은 머리를 내려다본 아휀이 히죽거렸다.
“성녀는, 제 겁니다.”
* * *
의식의 부상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뭐지?’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용병들, 목을 축이기 위해 잔을 드는 상인들 그리고 조용히 나이프와 포크를 움직이는 주민들.
떠들썩한 장소였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식당 속 풍경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자리에 앉은 카인은 멍하니 자문했다.
‘어째서 여기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으로 가득 찼던 몸은 깃털같이 가벼웠으며 몽롱했던 정신은 더할 나위 없이 또렷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더냐.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돌리다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카인의 입이 벌어졌다.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 하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게 건장한 체구. 눈에 비치는 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아니, 잊기 싫은 인물이었다.
‘바템 로무닌.’
그는 조직에 소속된 안내인이자 기본 교육을 도맡은 무술 사범이었다. 죽었을 게 분명한 자신의 눈앞에 어째서 그가 나타난 걸까. 애당초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이변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카인뿐만이 아니었는지 바템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구나. 혹시 돌아가고 싶은 것이더냐. 안타깝지만 그건 불가능하단다. 이미 끝난 이야기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접시에 코를 박고 동요한 기색을 감춘다. 현실이든 아니든, 그에게 약점을 보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허허롭게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얼마나 추악한 가면이 있는지 모를 카인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도망치고 싶지만 때가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것도 문제였지만 단련이 되지 않은 몸이 더 문제였다.
억지로 움직인다고 해도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물론 생각한다고 해서 뾰족한 해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강구해도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뿐이었으니까.
‘다시 돌아왔다는 건가.’
어안이 벙벙한 이야기였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으리라.
따뜻한 온기와 생생한 활기. 상상만으로는 재현할 수 없는 생동감이 이 자리에 있었다.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라는 격언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에 불과했다. 이렇게 고요하고 차분한 회상이 있을 리 없었다.
새로운 악몽인가, 또 다른 기회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꿈이어도 괜찮고, 꿈이 아니어도 괜찮다. 어차피 끝날 꿈이라면 실컷 즐기면 될 뿐. 허황한 소망이 조금 더 길어졌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꼭 알아야겠어.’
성녀가 어째서 버려졌는지.
짚이는 구석이 없으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나 걱정할 건 없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퍽이나 재미있는 시작점이었으니까.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보다도 더.
‘일단 바템부터 떨어뜨려야 해.’
결과를 알고도 조직에 들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야 했다.
달그락, 카인이 나이프를 내려놓자 바템이 고개를 끄덕인다.
“밥맛이 없나 보구나. 하긴 고향을 떠나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
방금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꼭 터전을 잃은 실향민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제멋대로 판단한 바템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너 또한 우리가 아끼는 구성원이 될 테니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네가 노력하면 그만한 보상이 따를 거란다. 그러니 그런 표정은 접어두거라. 너는 옳은 선택을 한 게야.”
노인의 말은 어디까지나 인자했다. 자칫 방심하면 진심으로 믿어버릴 정도로.
하지만 카인은 동요하지 않았다.
저 말에 속은 게 한두 번이던가. 바템의 말대로 조직에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다는 개념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희로애락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감정을 제어하고, 조직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제약했으니까.
항상 더 낫지도 않고, 더 좋지도 않았다.
조직이라는 시계를 돌리는 부속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성녀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렇게 살다 죽었겠지.
‘젠장……,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무조건 잘될 거라고 기대한 과거의 자신에게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전생을 자각한 11살, 지금 이 시절엔 무서울 게 없었으니까.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날뛰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