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Only a Stepmother, but My Daughter is Just so Cute! RAW novel - Chapter 20
외전 3. 기억의 색깔
* * *
언젠가, 옷을 고르려고 옷장 앞에 섰을 때. 나는 그곳이 옷의 무덤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계절에도 색이 있다. 봄에는 화사한 톤의 옷이, 여름에는 시원한 색상이, 가을에는 차분한 칼라가 유행하듯이.
하지만 내 옷장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언제나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검정, 회색, 혹은 더 옅거나 진한 검정.
검정은 그 무엇보다 세련되고 고상한 색이라고 말한 의상 디자이너도 있었다. 딱히 그 말 때문에 검정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밝은색 옷을 입으면 살이 더 쪄 보이니까 검은색이나 회색 계열의 옷이 대다수였다.
창밖의 옷들이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로 색을 바꿔 가는 동안에도 나는 늘 검정이였다.
내게 옷장은 시침이 멈춘 시계. 정지된 흑백텔레비전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랬는데…….
“아! 이거 어마마마께서 제게 처음으로 만들어 주신 옷이에요.”
블랑슈가 슈미즈 드레스를 꺼내며 말했다. 희디흰 색깔이 마치 눈으로 만든 옷 같았다.
길이를 재보려는 듯, 블랑슈는 옷을 제 몸에 가져다 댔다. 역시 몇 년 전에 만든 옷이라 지금의 블랑슈에게는 무척 작았다.
와, 이걸 만든 게 대체 몇 년 전이지? 저렇게 옷이 작아진 것을 보니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갔구나 싶다. 왠지 모를 그리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게요. 오랜만에 본다. 어느새 이렇게 작아졌네.”
수년이 흘렀어도 슈미즈 드레스는 그저 새하얬다. 그 부드러운 옷감을 쓸어내리자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여름 햇살 사이에서 나비처럼 춤을 추던 블랑슈. 그때 홀에 흐르던 음악 소리마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 애는 그때나 지금이나 어쩜 이리 예쁠까. 흐뭇하게 추억을 더듬고 있는데 블랑슈가 옷장에서 또 다른 옷을 꺼냈다.
“앗, 이 르댕고트도 오랜만이에요. 아바마마랑 똑같은 거!”
아, 이게 여기 있었네! 이제는 내게 한없이 작아진 르댕고트지만 반가웠다. 본의 아니게 세이블과 커플 룩을 입었더랬지.
나는 이제 사이즈가 안 맞고, 세이블도 너무 많이 입고 다니는 바람에 못 입게 되었는데.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옷을 둘러보았다. 옷장에는 수많은 색깔의 옷과 수많은 시간의 기억이 있었다.
“이 벨벳 드레스는 겨울에 블랑슈에게 만들어줬던 거네.”
“무척 따뜻했어요! 아, 마린 룩이예요. 동부에 갔을 때 입었던 거네요. 동부에 또 가고 싶어요…….”
“다음에 또 가면 되죠. 이건 블랑슈 결혼식 때 쓴 목걸이네요. 웨딩드레스도 오랜만에 보고 싶군요.”
신기하다. 예전에는 옷장의 옷을 봐도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옷장을 볼 때마다 작년에는 뭘 입고 다녔더라, 왜 이렇게 입고 다닐 옷이 없지 하는 생각 정도?
하지만 이제는 옷장 속을 보면 마치 사진을 들여다보듯 옛날의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이렇게 드레스룸이 즐거운 곳이었던가. 블랑슈는 옷을 쓸어 보다가 다시 슈미즈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이 드레스 만들어 주셨을 때, 정말 기뻤어요. 처음으로 만들어 주신 거니까……. 어마마마랑 춤을 출 때도 즐거웠는데.”
블랑슈가 미소를 머금은 채 슈미즈 드레스를 꼭 껴안았다. 아이고, 우리 애 예쁘기도 하지.
우리가 서로 같은 추억을 떠올리고 있다니. 너무도 행복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게요. 그때 춤추는 블랑슈가 참 귀여웠는데, 이제는 베리테랑 추면 되겠네요.”
그때만 해도 블랑슈한테 별 관심 없던 베리테였는데. 이렇게 둘이 결혼을 다 했네!
오랜만에 결혼식 초상화나 다시 볼까.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는데 블랑슈가 놀란 눈이 되어 날 보고 있었다.
응? 왜 저렇게 보고 있지? 블랑슈의 목소리가 충격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마마마……. 저랑 춤 안 춰주실 건가요?”
“네? 어……. 베리테가 있으니까 저랑은 안 춰도 괜찮잖아요?”
그런데 내 대답이 뭔가 잘못됐나 보다. 블랑슈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는 엄마랑 춤추고 싶은데……. 안되나요?”
크아악! 우리 애의 눈빛 공격은 해가 갈수록 강력해지네. 버틸 수가 없다!
나는 블랑슈의 눈빛이 더 초롱초롱해지기 전, 다급히 소리쳤다.
“되죠! 당연히 되죠!”
“정말이지요? 약속하시는 거예요!”
그제야 블랑슈는 환히 웃으며 좋아라했다. 아니, 나랑 춤추는 게 그렇게 좋은가. 블랑슈가 나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번에도 어마마마가 만들어 주신 옷이 입고 싶어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그렇게 눈을 반짝이면……! 크윽, 당장 디자인을 그리고 싶어서 내 오른팔이 요동을 친다!
“물론이에요. 블랑슈가 입고 싶은 거 다 만들어 줄게요!”
“와아, 감사해요! 그리고 이베르 것도요……! 저랑 비슷한 옷이면 좋겠어요.”
“그래요, 그래요. 이제 곧 이베르의 세 번째 생일 연회기도 하고.”
시간이 참 빠르다. 갓난아기였던 이베르가 어느덧 세 살!
매 생일이 특별했지만 올해는 조금 더 특별한 생일이었다. 이 나라에서 세 번째 생일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연회를 평소보다 크게 열고, 외국에서도 여러 사람이 올 계획이라고 했지. 블랑슈가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는 인어 왕국과 요정 왕국에도 공식적으로 초청장을 보낼 계획이에요.
레타와 모르카, 그리고 크로넨버그에도 초청장을 보낼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크로넨버그요?”
흠. 거긴 아비게일의 모국이자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의 나라이기도 하지.
마음 같아서는 크로넨버그를 무시하고 싶지만, 일단 네르겐에 흡수된 나라였다.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요즘 들어 얌전히 지내는 것 같기도 했고. 징징대는 케인의 탄원서도 오지 않게 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중요한 자리니까 옷 만드는 거에 더 신경을 써야겠네요. 이베르 옷도, 블랑슈 옷도 멋지게 만들어 줄게요!”
“감사해요, 어마마마!”
블랑슈가 해맑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겼다. 따끈하고 말랑하고 귀여워!
요즘 들어 이렇게 단둘이 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너무 좋다…….
그렇게 블랑슈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볍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블리안입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아, 세이블. 들어와요.”
곧 문이 열리고 무언가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세이블치고는 자그마한데?
“엄마!”
이베르가 쪼르르 달려와 내 치마에 얼굴을 묻었다. 아휴, 자기 누나랑 꼭 닮았다니까.
“이베르! 이베르도 아빠랑 같이 왔어요?”
“네!”
이베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말도 제법하고, 잘 뛰어다니는 나이! 이베르가 내 옷을 꼭 잡고는 나를 올려다 봤다.
“엄마 뭐 했어요?”
“누나랑 옷 정리하고 있었지요.”
“누나!”
이번에는 도도도 달려가 블랑슈에게 폭 안겼다. 블랑슈도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후, 이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해서 미술관에 걸어놔야 하는데. 이 사랑스러움을 나만 보고 있을 순 없으니까.
나 홀로 명화의 한 장면을 감상하던 중, 이베르가 블랑슈에게 머리를 비비다가 블랑슈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직 블랑슈는 슈미즈 드레스를 들고 있었다. 이베르가 빤히 블랑슈를 바라보다 말했다.
“예뻐요.”
“옷이 예뻐?”
하늘하늘하니 예뻐 보일만도 하지. 하지만 이베르는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옷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누나가 예뻐요.”
신이시여. 여기에 천사가 있어요. 제가 착하게 살아서 저에게 이런 사랑스러운 천사들을 보내 주셨군요.
블랑슈가 키득키득 웃더니 이베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마워, 이베르. 이베르도 예뻐.”
“이베르는 누나가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블랑슈에게 매달렸다. 정말이지 애교 많은 건 이 집안 전매특허라니까.
그리고 또 다른 애교쟁이, 귀염둥이인 세이블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낮잠 잘 시간인데 누나랑 엄마가 보고 싶다고 투정을 부려서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졸음이 조금 묻어나 있었다. 아까 안겼을 때 체온도 조금 높은 것 같았고. 나는 슬그머니 이베르의 어깨를 끌었다.
“이베르, 자야지. 졸리잖아.”
“싫어, 이베르 안 잘래요. 옷 구경할래요. 여기 예쁜 게 많아요!”
이베르는 앙탈을 부리다가 후다닥 도망을 갔다. 그리고는 방 안 여기저기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것이 많으니 아무래도 눈이 가는 모양이었다.
뭐, 조금 더 깨어 있어도 괜찮겠지.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흐뭇하게 지켜보는데 이베르가 무언가를 집어 들고 물었다.
“엄마, 이건 뭐예요?”
이베르는 분홍색 보닛을 들고 있었다. 흰 리본과 꽃장식이 가득해서 이베르가 관심을 가질 법했다.
“이거는 보닛이에요. 머리에 모자처럼 쓰는 거랍니다.”
그러자 이베르가 보닛을 만지작거리더니 제 머리에 폭 썼다. 그리고는 세이블과 닮은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이베르 예뻐요?”
아니, 이럴 수가! 보닛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어린이는 블랑슈 이후로 처음이야! 나는 어느새 박수까지 쳐가면서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네, 예뻐요! 잘 어울리네요. 이베르. 누구 닮아 이렇게 예쁠까.”
이베르는 만족감과 쑥스러움이 섞인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그리고는 다른 옷장을 열심히 뒤지다가 뭔가를 집어 들었다.
“엄마, 이건 뭐예요?”
“아, 그건…….”
그것은 클라라가 만들어 준 캐미솔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이베르의 손에서 캐미솔을 가져 갔다.
“안 예쁜 거예요.”
아냐, 클라라. 이건 내 진심이 아니야. 사실은 예쁘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이베르, 낮잠 자야지요.”
“이베르는 자기 싫은데…….”
엄마가 귀여운 거에 약한 거 어떻게 알았니? 보닛을 쓴 채 그렇게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으면 엄마 마음이 약해지잖아!
이걸 어쩌나 고민하는데, 블랑슈가 다가와 이베르의 손을 잡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베르, 누나가 책 읽어줄게. 가서 낮잠 자자.”
“정말? 누나 안 바빠요?”
“응. 괜찮아. 무슨 책 읽어줄까?”
그 말에 이베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리고는 아까 전 투정을 부리던 사람은 어디 갔냐는 듯, 블랑슈의 손을 잡고 드레스룸 밖으로 이끌었다.
“어마마마, 아바마마. 그러면 저는 이베르 좀 재우고 올게요!”
“괜찮겠어요? 내가 해도 괜찮은데…….”
으음, 황제 폐하의 시간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블랑슈는 이베르를 꼭 끌어안았다. 마치 동생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듯이.
“요즘 이베르랑 많이 못 놀아줬는걸요. 그러면 이베르, 엄마랑 아빠한테 인사하자.”
“엄마, 아빠. 안녕!”
이베르는 손을 흔들고는 블랑슈와 함께 방을 나섰다. 떠나가는 동안 블랑슈와 이베르가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우리 애들. 정말 많이 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다 나오네.
마음 같아서는 양어깨에 블랑슈와 이베르를 올려놓고 우리 애들 좀 보라고 자랑하며 다니고픈 심정이었다.
이제 이베르가 커가면 이 옷장도 점점 이베르의 옷으로 채워지겠지. 그것은 또 다른 행복일 터였다.
세이블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살짝 걱정이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릴리.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닐까 모르겠군요. 뭘 하고 계셨습니까?”
“아. 잠깐 옛날 옷 좀 보고 있었어요. 이거 무슨 옷인지 기억나요?”
나는 옷장에서 르댕고트를 꺼내 그에게 펼쳐 보였다. 그의 눈빛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예. 기억납니다. 릴리가 저에게 처음으로 만들어줬던 옷과 같은 디자인 아닙니까. 아껴 입었는데 결국 옷이 상해서 아쉬웠었죠.”
그래, 그때 정말 열심히 입고 다녔지. 옷이 해질 때까지 입어서 빈티지 룩이 유행할 뻔했던 기억이 났다.
그나저나 그도 기억하고 있구나. 왠지 모르게 기뻤다. 이번에 똑같은 디자인으로 다시 커플 룩을 만들어볼까?
세이블이 나를 보며 가만히 웃더니 옷장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엠파이어 드레스를 한 벌 꺼냈다.
“이 옷도 오랜만입니다. 작년 초여름, 소풍을 갈 때 입었던 옷이군요.”
“어? 세이블. 그런 게 기억이 나요?”
“예. 물론이죠.”
작년 소풍 때 입은 옷이 뭐였는지 정작 나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이건요? 기억나세요?”
“예. 이년 전, 저녁 식사 때 릴리가 입었는데 당신이 참 예쁘게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와. 세이블, 기억력 엄청 좋네요.”
내가 그의 기억력에 감탄하는 사이, 그는 갸름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릴리에 관한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후후, 세이블리안. 그렇게 방심할 때마다 치고 들어오는 것도 벌써 8년째. 이젠 나도 익숙…….
……해지지 않았어! 정말이지 세이블도 꾸준하다. 어떻게 매일매일 이러지?
나는 괜히 부끄러워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자 세이블이 내 손을 끌어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이 르댕고트.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릴리랑 같은 디자인이라 더 좋았죠.”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듣자 괜히 놀려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머, 그랬어요? 그때는 우리 사이 안 좋았잖아요.”
그러자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봐달라는 듯 간절한 눈빛. 그 눈빛이 귀여워 소리죽여 웃자, 그가 괜히 말을 돌리려는 듯 옷장을 뒤졌다.
“음. 그나저나 아까 이베르가 찾은 란제리는 뭐죠?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만.”
그가 캐미솔을 집어 들었다. 아, 저거 예전에 클라라가 선물해 준 건데 까먹고 있었다.
“아, 이거요. 제가 예전에 사과 안 하면 동침할 거라고, 벗고 잘 거라고 했을 때 입은 속옷이랑 같은 디자인인데…….
사이즈도 안 맞고 낡았다고 하니, 클라라가 새로 만들어줬어요.”
그때도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최악이었지. 세이블에게 트라우마가 있는 줄도 모르고 협박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세이블 역시 당시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기묘한 표정이 되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가 입술을 꾹 깨물곤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과하지 말 걸 그랬나 봅니다.”
“네?”
“그걸 봐야 했는데…….”
아니, 이 아쉬워하는 표정은 뭐야?
웃으면 안 되는데 그가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자꾸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이블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는 여전히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다 말했다.
“릴리, 혹시 오늘 저에게 불만은 없으십니까?”
“불만이요?”
“예. 제가 사과를 해야 할 만 한 일 말입니다. 사과를 안 하면…….”
그가 뒷말을 흐렸지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이 요망한 흑담비 같으니라고.
“그러고 보니 오늘 뽀뽀를 좀 덜 받은 것 같아요. 사과하세요.”
“사과하지 않겠다면요?”
“합방할 거예요.”
나는 팔짱을 낀 채 새침하게 말했다.
“가운도 벗고 잘 거고요. 안에는 끝내주게 섹시한 속옷을 입은 채로.”
결국 세이블은 웃음이 터졌다. 그가 작게 소리 내어 웃다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나를 달래려는 듯, 가볍게 여러 차례.
“알겠습니다. 그러면 사과는 그 이후에 해야겠군요.”
오늘의 추억도 옷이라는 형태로 남게 되는 것 같았다. 올 생일 연회에도 새로운 옷이, 새로운 추억이 쌓이겠지.
……크흠, 그리고 오늘 밤에도.
* * *
“……이베르 왕자의 생일 연회가 열린다고?”
“예. 그렇습니다, 케인 저하.”
우중충한 목소리가 탑 안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우물 같았다.
말 그대로 우물이었다. 계단이 있는 우물. 탑은 아름다운 장식이나 세공 따위는 없이 그저 길쭉하게 위로 치솟아 있기만 하였다.
우물이 나은 점이 있다면 햇빛이었다. 그나마 우물은 위가 트여 있기라도 하지 않은가.
탑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구멍만 나 있었다. 그마저도 햇빛이 들어오는 것은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뿐.
그리고 그 감격스러운 햇빛은 시종이 내민 서신에 닿아 있었다. 아비게일의 오빠인 케인은 그 서신을 낚아챘다.
조카의 탄신 연회를 알리는 글임에도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가 찢듯이 말을 내뱉었다.
“제 오빠를 감옥에 처박아두고 자기는 호의호식하고 있군.”
케인의 두 눈에서 증오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들지 않는 이곳에 태풍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아들아, 너무 노하지 말아라.”
그늘 속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와 케인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입구에 아버지인 크로넨버그 왕이 와 있었다.
케인의 얼굴이 일순간 밝아졌다가 다시 어둑해졌다. 그가 어린아이처럼 투덜댔다.
“어떻게 화를 안 내겠습니까? 아비게일 때문에 제가, 우리나라가 이 꼴이 되었는데.”
국왕은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표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왕자였던 케인은 일순간 범죄자로 전락하였고, 패전국인 크로넨버그는 막대한 보상금을 치러야 했다.
누군가는 그래도 아비게일이 이제 제국의 어머니가 되었으니 좋은 일이 아니냐 했다가 태형을 치렀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다면 크로넨버그가 제국이 되었을 텐데. 속국이 되어 연명하는 꼴이라니……!”
“나 역시 그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아들아. 아비게일 그 계집은 제 고국을 챙길 생각은 하질 않고…….”
“얼굴마저 흉측하게 변했다고 들었는데 꼴 좋게 됐죠.”
그것만이 케인의 유일한 위안거리였으나, 사실 반쪽짜리 위안이었다.
모습은 변했어도 아비게일은 행복했으니까. 진작 궁에서 쫓겨나거나 냉대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제기랄. 왜 우리만 이렇게…….”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케인. 방법이 있으니.”
“방법이라뇨?”
케인이 기대감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국왕은 석상 같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외국 중 네르겐이 점점 커지는 것을 경계하는 국가가 많다. 연합을 맺으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가 감히 네르겐을 대적하겠어요? 요정과 인어와 손을 잡고 있는데.”
케인의 말대로 네르겐의 우군은 너무도 강력했다. 그럼에도 왕은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우선 종족 간의 연합을 와해시킬 생각이다. 요정이나 인어가 네르겐과 적대하게 되면 빈틈이 생기겠지.”
케인은 여전히 찜찜한 눈빛이었다. 과연 어떻게 와해를 시킬 거냐고 묻는 듯하였다.
“지난번, 마법사 하나를 데려왔다는 말 기억하느냐?”
“마법사……? 아. 그 검은색 마력을 지닌 자 말인가요.”
“그래. 왕자의 생일 연회 때 그 마법사를 보낼 생각이다.”
크로넨버그의 왕은 비스듬히 웃었다. 입술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케인은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들키지 않을까요?”
“들키지 않는다. 그리고 들킨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버리는 말이니까.”
국왕의 목소리가 얼음 조각처럼 날카롭고 딱딱했다. 그는 아비게일과 닮은 보라색 눈동자로 말했다.
“아비게일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보내 주자꾸나.”
* * *
고즈넉했던 황궁에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축하의 말과 안부를 전하는 여러 목소리가 함께.
수많은 마차가 궁으로 들어서고, 하인들은 바쁘게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오늘! 이베르의 세 번째 탄생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준비하느라 다들 며칠 전부터 분주했지.
바쁘게 움직인 만큼 궁은 멋지게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연회가 진행되는 홀 안에는 아름답게 세공한 얼음 조각과 수많은 꽃장식이 있었다.
그리고 장식만큼이나 아름다운 옷들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내가 만든 옷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블랑슈와 베리테는 왕관에 망토까지, 제대로 된 성장을 갖추고 있었다.
흰색과 자주색을 포인트로 잡아 우아함과 권위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망토에는 촘촘한 자수 장식이 보석으로 장식된 채였다.
황제와 황후에 걸맞게 위엄 있는 옷을 디자인해 봤는데, 그래도 귀여움은 가려지지 않는군.
이베르도 블랑슈와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줬다. 조금 더 귀여운 느낌으로.
그리고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이베르는 빛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겁먹은 얼굴로.
“엄마……. 사람이 많아요…….”
이베르는 인파에 놀라 어찌할 줄 몰려 하고 있었다. 원래 낯가림이 심한 편이긴 한데 오늘은 한층 더 한 것 같았다.
“이베르 왕자님, 탄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왕자님!”
중년 대신 일곱 명이 우르르 몰려오자 이베르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귀여운 왕자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왕자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았다.
나는 대신들을 거의 쫓아내 버리듯 물린 뒤, 이베르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베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베르. 전부 이베르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이에요.”
“그치만……. 무서운데…….”
으음, 이를 어떡하면 좋지.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게 정말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베르, 아빠도 어린 시절에 사람이 많은 게 무서웠단다.”
세이블! 그가 어느새 다가와 내 옆에 같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베르는 세이블의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빠처럼 센 사람도 무서웠어요?”
“그래. 이베르가 많이 무섭다면, 잠깐 다른 곳에 가서 쉬는 것도 방법이지.”
“으응……. 괜찮아요. 여기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누나도 있으니까…….”
이베르는 소리 없이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았다. 세이블이 장하다는 듯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어린아이의 가벼운 발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물고기가 헤엄치며 물방울이 튀어 오르는 듯했다.
“이베르! 이베르!”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힐드가 뛰어오고 있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부쩍 커진 모습이었다.
친구가 오자 이베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베르도 의자에서 풀쩍 뛰어 달려갔다.
“이베르, 생일 축하해!”
“힐드, 어서 와……!”
힐드가 바람처럼 달려와 이베르를 꼭 끌어안았다. 이베르는 평소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역시 또래 친구가 없어서 더 무서웠나 보네. 재잘재잘 떠드는 두 아이를 보니 안심이 되었다.
“힐드가 와서 다행이군요.”
세이블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선이 짙은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다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아까 어린 시절 겁이 많았다고 했지. 이베르를 달래려고 한 거짓말이었으려나?
“세이블, 정말로 어렸을 때 겁이 많았어요?”
“예. 이베르 또래일 때는 툭하면 울곤 했다더군요.”
그는 울상을 짓고는, 검지로 제 볼을 살짝 쓸어내리며 우는 시늉을 하였다.
크윽, 누가 이렇게 귀여운 짓 하래? 와중에 울먹이는 어린 세이블이 상상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어린 세이블을 봤다면 맨날 업고 다녔을 텐데! 물론 어른 세이블도 업고 다니고 싶다. 나디아에게 근육 트레이닝이라도 받아야 하나.
지금도 귀여운데 어렸을 때는 얼마나 더 사랑스러웠을까? 겁먹고 삐약삐약 우는 아기 흑표범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겠지?
주먹으로 벽이라도 치고 싶은데 공식 석상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하려 노력했다.
“어린 시절 겁이 많았다니, 의외네요.”
“의외입니까?”
“사실 겁 많은 당신은 상상이 잘 안 가요. 지금이랑은 꽤 차이가 있는 모습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사실 이 궁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은 저일지도 모릅니다.”
응? 그건 더욱 의외였다. 내가 아는 세이블은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는데.
“하지만 용 앞에서도 겁먹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보였습니까? 저는 그때도 정말 두려웠습니다.”
그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손을 잡았다. 그때 나를 붙든 것처럼 단단한 손이었다.
“당신이 다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언제나 두렵지만요.”
“네? 언제나요?”
“당신을 만나기 전,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는 것조차. 하지만 이제는……. 당신이 다칠까 봐, 상처 입을까 봐 늘 두렵습니다.”
그의 눈빛은 처음 봤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는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파랑이었는데.
이제 내가 이 사람의 두려움이 되었다니. 고마운 동시에 미안했다. 그러다 세이블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릴리가 저에게 질릴까 봐도 두렵습니다.”
“네에에?”
어이가 없어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았다. 아니, 내가 세이블한테 질린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는 거지?
“제가 세이블한테 질릴 리가 없잖아요. 질린다면 세이블이 저한테 먼저 질리겠죠.”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어떻게 당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렸다.
“제가 당신에게 질릴 거라고,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하고 계셨습니까?”
“아니, 뭐…….”
이 사람 콩깍지가 언제 벗겨질까 두려워하긴 했지. 답을 못하고 어물대자, 그가 내 뺨을 감싼 뒤 작게 입을 맞추었다.
어딘가 모르게 간절한 입맞춤. 마치 이 입맞춤이 없다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가 입술을 떼어낸 뒤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 소소한 불안을 하나하나 없애려는 듯.
“그런 일은 없습니다. 릴리, 당신은 이제 내게 호흡과도 같아요. 호흡이 질릴 수 있습니까?”
이 사람, 요즘 시집을 많이 읽더니 말이 점점 청산유수다. 으아, 얼굴은 왜 이렇게 뜨겁지?
쩔쩔매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경쾌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오, 풍경 좋은데?”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거기에는 나디아가 서 있었다. 카린과 함께.
나디아는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고, 카린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었다.
“변함없이 애틋하네. 덕분에 좋은 구경 했어.”
주위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온 클라라가 노마와 함께 흐뭇하게 미소 지은 것이 보였다.
아악, 맞아! 연회 중이었지! 이베르와 힐드도 빤히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힐드가 눈을 깜빡이다 물었다.
“뽀뽀 더 안 해요?”
“안 해요!”
“이상하다, 우리 엄마들은 뽀…….”
그때 카린이 날쌔게 힐드를 낚아채 갔다.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져 있었다.
“힐드! 그런 이야기는 하면 안 돼!”
“왜요?”
“예의에 어긋나요!”
그렇게 말한 뒤, 카린은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나디아 전하. 전하도 그렇게 휘파람 불면 돼요, 안돼요?”
“안돼요…….”
“집에 가서 두고 봐요.”
그 말에 힐드랑 나디아의 어깨가 축 처졌다. 이 집안의 최상위 권력자가 누구인지 참 자명하다.
“나디아 님, 먼 길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블랑슈가 다가왔다. 덕분에 주의가 그쪽으로 쏠리자, 나디아는 황급히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와야 하는 일이오. 초청해 주어서 고맙소.”
그렇게 말하며 나디아는 카린의 눈치를 보았다. 블랑슈가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듯,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말 편하게 하셔도 괜찮아요.”
“그렇지? 선물 잔뜩 챙겨왔어! 이베르 것도, 네 것도. 우선 이베르 것부터 줄게! 이베르, 이리 와볼래?”
힐드와 놀고 있던 이베르는 나디아의 부름에 재빨리 달려왔다. 나디아는 이베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베르, 네게 선물로 산호검을 주마. 날은 안 세웠어. 나중에 네가 더 나이가 들면 그때는 진짜 검을 줄게.”
그녀가 시선을 주자, 곧 인어 시종이 무언가를 들고 다가왔다. 흰색의 검이었다. 나디아가 이베르에게 검을 건네주었다.
“이베르, 인어와 같이 용맹하고 강인한 의지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생일 축하한다.”
“가, 감사합니다…….”
이베르는 칼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좋은데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디아가 이베르를 바닥에 내려주자, 베리테와 제르다가 그 옆으로 다가왔다.
제르다는 자기 눈이 의심스럽다는 듯 이베르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어머, 벌써 선물 증정식인가요? 인어는 검을 가져온 거예요?”
“당연히 검이지. 우리 딸은 태어나자마자 쥐여줬다.”
나디아가 팔짱을 끼고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힐드가 똑같이 따라 하는 게 보였다. 제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어린데 칼은 너무 일러요. 게다가 용맹함과 강인함만으로는 부족하죠.”
“헹, 그러면 넌 뭘 갖고 왔는데?”
“후후, 보고 놀라지나 말라고요.”
제르다는 보란 듯이 선물을 내밀었다. 그것은 금박이 박힌 책으로, 장정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기에 박힌 보석이랑 금만 떼다 팔아도 한 살림 차리겠다. 옆에서 베리테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학술적 가치가 더 큰 것 같았지만.
“이베르, 보라색 마력을 지녔다고 들었어요. 요정처럼 지적이고 뛰어난 현자가 되기를 기원하겠어요. 생일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품에 검과 책을 안은 이베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블랑슈가 웃으며 이베르와 눈높이를 맞췄다.
“두 분께 좋은 선물을 받았네. 그 모든 것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누구보다 상냥하고 선한 아이로 자라나길…….”
축복의 말이 끝나갈 때쯤, 블랑슈는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누나 선물은 이거야. 지난번에 갖고 싶다 그랬지?”
“아!”
블랑슈가 내민 것은 토끼 인형이었다. 이베르와 꼭 닮은 인형. 이베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로써 우리 가족 인형이 모두 모인 셈이었다.
세 개의 선물, 세 왕의 축복을 받은 이베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그저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흑흑, 우리 애 인사성도 밝고 귀엽기도 하지.
“저어, 블랑슈 폐하…….”
그때 쭈뼛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레타와 모르카의 사절들이 서 있었다.
“아, 어서 오세요.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블랑슈가 사랑스럽게 미소 짓자, 사절들의 표정이 순간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휴, 역시 블랑슈의 귀여움은 세계를 지배한다. 역사서에 오늘 이 순간도 기록되겠지.
오늘도 블랑슈 폐하는 사랑스럽고 깜찍하고 귀여우셨다고. 후대에게 미안하군. 나 혼자 이 장면을 보고 있어서.
사절들이 잠시 넋이 나가 있자, 옆에서 베리테가 가볍게 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이, 이베르 왕자님의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또한 네르겐의 번영을 기원하며, 블랑슈 폐하께 드릴 선물을 가져왔으니 부디 받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들은 부랴부랴 선물을 꺼냈다. 역시 이베르의 생일도 생일이지만, 가장 중요한 실세는 블랑슈구나.
줄줄이 들어오는 시종들은 다들 가지각색의 선물을 들고 있었다. 와, 엄청 많다.
블랑슈에게 전달된 선물도 상당한 양이었다. 블랑슈는 내가 이런 걸 받아도 괜찮나?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위엄을 되찾았다.
“정말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겠어요. 편히 쉬다 가세요.”
그렇게 선물이 쌓여가고, 여러 사절이 오고 가던 중 작은 인영이 다가왔다. 요정이었다.
“……블랑슈 폐하. 이베르 왕자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전부터 꼭 뵙고 싶었습니다.”
요정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앞머리를 길게 길러 왼쪽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제르다의 선물 증정은 아까 끝났는데, 블랑슈의 개인적인 팬인가? 요정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져 왔다.
“평소부터 존경하던 블랑슈 폐하께 드릴 선물을 가져 왔습니다. 제가 드릴 선물은…….”
그 요정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나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말로는 축하한다 하지만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외워온 대사를 읊는 것처럼.
그리고 순간, 역한 감각이 내 목을 틀어막았다.
요정의 옷소매 사이로 연기 같은, 검은 연기 같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마력. 내가 그를 말리기도 전, 검은 마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고 요정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블랑슈 프리드킨! 너에게 저주를 걸겠다! 너는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검은 마력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막으라고, 얼른 뛰어가라고 이성이 내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뒤늦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자식! 블랑슈한테 뭐 하는 짓이야!”
어느새 베리테가 블랑슈의 옆으로 달려왔다. 베리테의 은색 눈동자가 살기로 번뜩이고, 그 눈동자와 닮은 은색 빛이 블랑슈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은색의 방호막이 블랑슈를 지키고 있었다. 미처 닿지 못한 검은 마력이 죽은 뱀처럼 바닥에 떨어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요정이 작게 칫, 소리를 내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에게 뿌리려는 찰나.
“아악!”
“내 딸에게서 물러나라!”
요정의 비명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병이 떨어졌다. 어느새 세이블이 요정의 팔을 비틀어 꺾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모두가 아비규환인 가운데, 세이블이 악을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이 자를 당장 구속하라! 마법을 쓰는 자이니 마법 구속구도 함께. 경비병!”
그 외침에 다급히 경비병들이 다가와 요정을 끌고 갔다. 나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블랑슈, 우리 블랑슈……! 나는 다급히 블랑슈에게 다가갔다. 블랑슈가 놀라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베리테가 미처 막지 못한 검은 마력이 블랑슈의 주위에 감돌고 있었다.
“브, 블랑슈. 이리 와. 엄마한테 얼굴 좀 보여줘.”
내 아이. 내 딸이 죽는다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블랑슈의 얼굴을 감쌌다.
열쇠, 열쇠가 뭐지? 얼른 저주를 풀어야 하는데……!
미친 사람처럼 저주 수식을 풀던 중, 가까스로 해석을 할 수 있었다. 베리테가 방해를 한 덕에 저주는 미완의 상태였다.
나는 다급히 유리잔을 깬 뒤, 유리 조각으로 내 팔을 그었다. 붉은 피가 내 옷자락을 적셨다.
“엄마! 팔이……!”
“괜찮아, 괜찮아.”
나는 기겁한 블랑슈를 달래며 다급히 마법을 걸었다. 피를 사용해 저주를 해제하자, 블랑슈의 주위에 감돌던 검은 기운이 사라졌다.
저주가 풀린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내 손이, 팔이,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블랑슈를 와락 끌어안았다.
“블랑슈, 블랑슈……. 이제 괜찮아. 저주는 해제했어. 엄마가 해제했어.”
몇 분이 지나지 않았을 텐데 수십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블랑슈의 손이 내 얼굴에 와닿았다.
“엄마, 엄마. 저 괜찮아요. 베리테랑 아빠가 막아 주고, 엄마가 저주 풀어 주셨잖아요.”
블랑슈가 괜찮다는 듯 말했지만, 입술에는 핏기가 없었다. 얘는 죽을 뻔했는데 이 와중에도 다른 사람 걱정이라니……!
나는 블랑슈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모두가 흉흉한 사태에 술렁이는 가운데,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좌관, 저놈은 대체 누구인가요?”
제르다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함께 머물러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욱 당혹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이유를 뒤늦게 이해했다.
블랑슈를 죽이려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요정이었다. 보좌관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마 하인 중 하나인 것 같은데…….”
그는 서둘러 요정 사절단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도 의문이 어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보좌관이 제르다의 앞에 섰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저자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아무도 없다뇨?”
“말 그대로입니다. 이곳에 방문하기로 예정된 요정 중, 저자는 없었습니다. 명단에도 없고, 본 적조차 없는 얼굴입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흉악해졌다. 인간들의 눈에 불신이 깃들고, 소란 사이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정은 간악한 종족이라더니…….저 요정왕이 사주한 건가?”
“결국 이 좋은 날 배신을 하는군요. 역시 믿어서는 안 되는 자들이야.”
그 목소리가 들릴 것이 뻔한데, 베리테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짓기라도 한 듯한 표정. 그때 블랑슈가 입을 열었다.
“베리테, 걱정하지 마.”
그 목소리에 베리테는 퍼뜩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블랑슈는 나에게 놓아달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평생 품에 안고 있고 싶었지만, 놔줄 수밖에 없었다. 팔을 풀자 블랑슈는 내 뺨에 가볍게 뽀뽀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딸, 제국의 황제는 꼿꼿이 선 채 혼란에 빠진 좌중을 응시하였다. 블랑슈의 목소리가 등대의 불빛처럼 곧고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억측은 그만두세요. 저는 제르다 왕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믿지 않아요. 요정처럼 현명한 자들이 이렇게 노골적인 암살을 시도할 리가 없지 않나요?”
블랑슈의 차분한 목소리에 떠들썩했던 자리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요정들을 힐난하던 자들도 고개를 숙였다.
“우선 축하연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군요. 손님들을 모두 손님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블랑슈는 방금 전 암살 위협을 당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한 대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렇게 명령에 따라 연회는 끝이 나고, 모두가 방으로 돌아갔다. 홀에 남은 사람은 우리 가족 정도였다.
사람들이 떠나자 블랑슈의 표정이 삽시간에 풀어졌다. 그리고는 다급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마마마! 상처부터 치료해요. 피가 너무 많이 나요. 베리테, 어마마마 좀 치료해 줘!”
베리테가 내 옆으로 와 조용히 상처를 치료했다. 하지만 치료받기 전부터 딱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방금 전, 내 세상이 무너질 뻔했었다. 블랑슈를 잃는 줄로만 알았다. 상처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뿐만이 그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치료를 하는 동안 베리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 역시 범상치 않았다.
베리테의 눈동자가, 그 은색이 이렇게 흉흉했던가. 이토록 날이 서 있는 베리테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피가 멎자 베리테는 곧바로 발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블랑슈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베리테, 어디 가?”
베리테가 잠시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돌아서지는 않았다.
“그놈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려고.”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일 리가 없었다. 블랑슈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안돼. 그러지 마! 내가 가서 심문을…….”
블랑슈는 베리테를 따라나서려다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세이블이 다급히 블랑슈를 부축했다.
“블랑슈, 무리하지 말거라.”
“아니에요, 아바마마. 그냥 잠깐 다리가…….”
“너는 방금 전 죽을 뻔한 사람이야. 무리할 필요 없다.”
그의 목소리는 굳어 있었으나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이블의 우려와 분노가 그 떨림에 묻어나고 있었다.
블랑슈 역시 그걸 느낀 것 같았다. 잠시 망설이다 블랑슈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황제고…….”
“그리고 너는 내 어린 딸이지. 나와 릴리가 얼마나 걱정인지 알지 않느냐.”
억누른 감정이 단어 하나하나에 박혀 있었다. 슬픔, 증오, 분노, 경악, 두려움.
나 역시 그 모든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블랑슈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참고 있을 뿐. 나는 블랑슈의 손을 간절히 잡았다.
“블랑슈, 심문은 다른 사람한테 맡겨줘요. 아니면 내가 베리테랑 갈게요. 우리 둘 다 마력이 있으니, 오히려 그편이 상대하기 나을 거예요.”
블랑슈를 범인과 대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내 딸은 지금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였다.
무리를 한다면 강제로 기절이라도 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블랑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뒤 블랑슈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세이블이 블랑슈를 번쩍 들어 안았다.
“저, 저 걸을 수 있어요!”
“제발 이 아비 부탁 한 번만 들어다오!”
그 간절한 목소리에 결국 블랑슈가 지고 말았다. 블랑슈는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눈빛을 남긴 채 홀을 떠나갔다.
블랑슈가 사라지자 분위기는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블랑슈를 해하려고 한 것일까.
……무엇이든 간에 용서할 수 없었다. 베리테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장모님, 가자. 지하 감옥에 포박되어 있대.”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베리테와 발을 옮겼다. 계단을 밟고 내려갈 때마다 차가운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정은 철창 속에 있었다. 양 손목에는 마력 구속구가 걸린 채로. 마치 죽은 듯이 고개를 늘어트리고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어 신음만이 들려왔다. 그러다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자 요정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두 눈에 증오가 가득했다. 저 뻔뻔한 얼굴이라니! 감히 내 딸을 죽이려 했으면서! 나는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네게 마력 구속구를 달아놓았다. 그리고 네가 블랑슈에게 걸어두었던 저주도 해제했어.”
그러자 요정은 순간 맥이 풀린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었다.
누구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사이, 베리테가 시선을 주자 경비병이 조심스레 재갈을 풀었다.
“넌 누구지? 대체 누가 널 보냈지?”
베리테의 물음에 요정은 답이 없었다. 그러다 잠시 웃는가 싶더니 말을 툭 뱉었다.
“네가 날 보냈잖아?”
그 말과 동시에 베리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이 베리테의 증오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이 자식, 죽여 버리겠어!”
“베리테! 참아. 아직 죽이면 곤란해.”
“하지만, 장모님…….”
베리테가 억울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베리테의 심정은 백번 이해하지만, 일단 이 요정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문제라면 이 요정은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심문은 무리였다.
이제껏 배워온 저주 마법을 오늘 쓰게 되는가. 머릿속에서 온갖 저주 마법이 스쳐 지나가던 중, 뭔가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뭐지? 귀 끝에 살짝 금이 가 있었다. 요정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요정이 당황하여 몸을 뒤틀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반응은 대체 뭐지? 나는 귀 부분을 힘껏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자 무언가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장모님 힘이 셌구나.”
내 손에는 귀가 들려 있었다. 길쭉한 요정의 귀가. 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요정의 귀를 뜯어 버렸다.
…….
아니, 왜 귀가 내 손에 있지?!
뭔가 귀에 금 같은 게 보여서 당겨 본 건데! 나는 귀를 들고 당황하다, 잘린 단면을 보았다.
“아, 아냐. 이건 가짜 귀야.”
귀 끝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베리테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요정을, 아니 요정인 척을 하고 있는 인간을 보았다.
나머지 귀도 잡아당기자 쉽게 떨어져 나왔다. 동그란 귀를 보니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황망하게 암살자를 내려다보았다. 요정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바로 외모 때문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아이는 아무리 잘 쳐도 10살을 넘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요정들은 원체 늙지를 않으니 어린아이로 보여도 스무 살을 넘긴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것은 인간. 인간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남자아이를 향해 더듬더듬 질문을 던졌다.
“넌…… 대체 몇 살인 거니?”
“네가 알 게 뭐야!”
이 어린아이가 어째서 저주를 걸려고 한 것일까? 분노조차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혹시 다른 변화 마법을 써서 아이인 척하는 것은 아닐까? 자세히 살펴보자 변화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변화 해제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아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쳇.”
그 소리와 함께 아이의 금발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빛을 받아 색이 바라는 것처럼.
금색이 돌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표백이 된 것마냥 은발이 되어 있었다.
아이는 제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앞머리 때문에 왼쪽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왜 얼굴을 숨기는 거지? 나는 아이를 붙잡고 앞머리를 옆으로 넘겼다.
머리카락 너머에 숨겨져 있던 얼굴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멈추었다. 아이가 이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두렵나?”
아이의 왼쪽 얼굴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상처 때문만이 아니었다.
상처 사이에서 빛나는 저 눈동자.
그 눈동자. 어디선가 아이를 본 것 같다고 느꼈는데 지금에야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받았던 아비게일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아이의 눈동자는 아비게일과 마찬가지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어린 아비게일과 꼭 닮은 얼굴. 그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색 마력.
마치, 아비게일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았다.
* * *
마법관에 위치한 도서관에서는 나른한 약초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수많은 고서에서 나는 책 냄새와 함께.
나는 묵직한 책에 둘러싸인 채 멍하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블랑슈의 암살 사건으로부터 약 사흘이 흘렀다. 사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블랑슈가 죽을 뻔했다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암살자가 어린아이라는 충격.
그리고 아비게일과 똑같이 생긴 외모가 내 머리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릴리, 들어가도 괜찮습니까?”
그때 세이블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곧바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우리는 서로를 구조하는 사람처럼 입을 맞추었다. 실제로도 그것은 일종의 구조였을 것이다.
세이블 역시 며칠 전의 사태로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입술의 온기가 우리에게 짧은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팔의 상처는 괜찮습니까?”
그가 천천히 입을 떼어낸 뒤, 내 팔을 바라보며 말했다. 베리테가 치료해 준 덕에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다.
“네, 다 나았어요. 하나도 안 아픈걸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제가 조사하는 걸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마침 쉬려던 참이었어요. 란타나는 아직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나요?”
“예. 회유하고 협박해도 반응이 없더군요.”
란타나. 그것이 암살범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알아내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이는 8살이라고 들었다.
8살. 아비게일이 죽고 내가 이 몸에 들어온 것도 8년 전의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란타나는 남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성별은 다르지만 너무도 똑같은 외모, 그리고 검은색 마력.
그 모습을 보자,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랐다.
나는 죽은 뒤 아비게일에게 빙의했다.
그렇다면 죽은 아비게일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 세이블. 아까 이런 걸 찾았는데요…….”
나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책을 끌어왔다. 제목은『영혼의 순환』.
제목 그대로 환생, 빙의, 전생 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한 구절을 읽어내려갔다.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순환을 반복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계를 넘나든다.
이때, 자신과 동조율이 높은 사망자가 있으면 빈 육체에 영혼이 머무르는 예도 있다.」”
“그 말인즉, 릴리와 아비게일의 동조율이 높았다는 의미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모습만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고, 성격도 다르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색채학 수업을 들었던 적이 떠올랐다. 그때, 교수님은 검정(Black)과 하양(Blanc)은 사실 어원이 같다 했지.
세이블리안과 블랑슈의 이름을 떠올리고 간혹 웃곤 했었다. 이름의 뜻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은 똑같구나 싶어서.
그리고 나와 아비게일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정반대의 색이 결국에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아비게일이 듣는다면 비웃을까. 나는 쓰게 웃으며 천천히 다음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마력은 영혼과 육체, 양쪽 모두에 깃든다. 때문에 마법사의 빈 육체에 다른 영혼이 빙의해도 해당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
반대로 마법사의 영혼이 환생을 하는 경우. 그 영혼 역시 동일한 마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거기까지 읽고 책을 내려놓았다. 세이블은 살짝 충격받은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란타나가 아비게일의 환생이라면, 릴리와 마력이 같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맞아요.”
내가 원하던 답을 찾았지만, 후련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세이블은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릴 뿐.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조금 심란해 보였다.
“란타나는 어째서 블랑슈에게 저주를 건 걸까요.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건지…….”
단독 범행은 아닐 텐데 란타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사실 란타나는 지금 일종의 특별 대우를 받는 상황이었다.
란타나는 왕족 시해범. 왕족 시해범에게는 중형이 선도된다. 지금 당장 사형에 처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사태.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 처벌을 미루고 있지만, 사면받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사실 머리가 많이 복잡해요. 블랑슈를 죽이려 한 란타나가 너무 미워요. 하지만 동시에 마냥 미워할 수가 없어요.”
아비게일과 닮은 외모가 아니었더라도 심란하기는 똑같았을 터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블랑슈에게 걸린 저주를 해석할 때 살펴보니, 저주의 대가는 란타나의 수명이었어요.”
열쇠를 없애는 대신 란타나는 수명을 바쳤다. 베리테의 방해로 대가는 치러지지 않았지만.
8살 아이가 자신의 수명까지 깎아가며 블랑슈를 저주할 이유가 뭘까?
누군가가 명령을 한 것일 확률이 높았다. 8살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쓰레기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의 흉터……. 어쩌다 그런 상처를 입은 걸까요.”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화상 흉터.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 그런 상처가 생긴 걸까? 신경이 쓰이는 게 상처뿐만은 아니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 란타나의 눈빛. 그것은 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수십 년의 고통을 겪은 듯, 증오가 풍랑처럼 일어나던 눈동자. 그때 세이블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 때문에 블랑슈가 다쳤군요.”
“네?”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세이블은 지금 어딘가를 찔린 사람처럼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비게일의 환생이라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저를 미워했을 테니…….”
“세이블. 그건 아닐 거예요. 그러면 왜 당신이 아닌 블랑슈를 죽이려 했겠어요?”
“그건…….”
그는 뭐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말이 딱히 그에게 위안을 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란타나를 용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처벌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차라리 나를 공격했다면 용서하기가 쉬웠을 텐데. 그렇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마마마, 블랑슈예요.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아, 네. 들어와요.”
나는 책을 덮었다. 환생이나 전생에 대해서는 세이블과 나만 아는 비밀. 블랑슈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온 블랑슈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저 태연한 모습에 마음이 시큰거렸다. 몇 날 며칠 앓아누워야 하는 일이었는데.
“저어, 란타나의 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무슨 일이니. 말해 보거라.”
세이블은 자세를 바로 하고 블랑슈를 바라보았다. 블랑슈는 망설이다가, 뭔가를 결심한 듯 우리를 바라보았다.
“저어……. 란타나를 용서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 * *
“안 돼! 절대 용서 못 해!”
베리테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집무실을 빙빙 돌고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데 풀 방법이 없어 맴돌기만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장인, 세이블리안이 착잡한 눈으로 베리테를 보고 있었다. 베리테는 다시 한번 버럭 화를 냈다.
“나는 란타나 용서 못 해! 잘못했으면 블랑슈가, 블랑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 분노를 알기에 세이블리안은 베리테의 화풀이를 그저 묵묵히 들어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진작 내쫓았을 터였다.
베리테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제 감정을 노골적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책상 상판을 양손으로 쾅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인어른, 장인어른이 블랑슈 좀 설득해 봐!”
“나도 시도는 해 봤다만……. 베리테, 너도 알지 않느냐. 우리는 릴리와 블랑슈를 이길 수 없다는 걸.”
담담한 어조에 베리테도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세이블리안이 무언가를 씹어 삼키듯 말했다.
“나 역시 과거에 레이븐을 처벌하고자 했고, 릴리는 용서하고자 했다. 결국 릴리를 이길 수는 없었지.”
그렇기에 지금 베리테의 마음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란타나를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니까.
베리테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는 괜히 세이블리안을 한 번 노려본 뒤 거울로 다가갔다.
“장인어른은 도움이 안 돼! 내가 블랑슈를 설득할 거야!”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베리테는 망설임 없이 블랑슈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적막했다.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 정도만이 들려오고 있을 뿐.
블랑슈가 무언가를 쓰는 데에 열중하고 있다가 베리테를 발견하고 손을 놓았다.
“베리.”
그 목소리와 함께 눈꼬리가 휘자, 베리테도 희미하게 웃었다.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슈야, 많이 힘들지?”
베리테가 슬그머니 다가가 블랑슈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렀다.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베리가 평소에 많이 도와줘서 하나도 안 힘들어.”
그런 것 치고는 작은 어깨가 단단히 굳어 있었다. 베리테는 말없이 한동안 안마에만 열중했다.
블랑슈는 가만히 베리테의 손등에 얼굴을 기댔다. 어떤 위안을 얻으려는 듯. 베리테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나한테는 다 말해도 괜찮아. 란타나 일 때문에 더 정신없잖아.”
란타나의 이름이 조심스럽게 언급되자, 블랑슈는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굳은 표정의 베리테가 보였다. 블랑슈는 베리테와 눈을 마주치려 애쓰며 말했다.
“베리, 아직도 화났어? 내가 란타나를 용서한다고 해서.”
제 속을 들켜 베리테는 뜨끔한 눈치였다.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어,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그때 정말 무서웠어.”
어깨를 주무르던 손이 정적처럼 멈췄다. 뒤를 돌아보면 베리테의 얼굴이 두려움에 표백된 것을 볼 수 있을 터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란타나가, 세상이, 내가 너무도 증오스러웠어.”
베리테는 뒤에서 블랑슈를 꼭 껴안았다. 팔이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그 떨림을 억누르려는 듯, 블랑슈를 더욱 힘주어 안았다.
“혹여라도 란타나가 다시 널 해할까 봐 두려워. 내가 막지 못할까 봐 두려워. 나는……. 널 잃을까 봐 두려워.”
자신은 뛰어난 마법사라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자신보다 강한 마법사는 거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능력이 너무도 하찮게 느껴졌다. 블랑슈를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는데, 뭐가 잘났다고 자만하고 있었을까.
“난 최선을 다해 널 보호할 거라고, 보좌할 거라고 다짐했어. 그런데도…….”
그렇게 후회를 삼키던 중, 입술에 따뜻한 것이 와 닿았다.
블랑슈였다. 짧은 입맞춤에 자책이 잠시 멈추자, 베리테는 조금 진정한 것 같았다.
“베리,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나는…… 란타나를 용서해 주고 싶어.”
“란타나의 배후를 알아내려고?”
그렇다면 배후를 알아낸 뒤 처벌하면 될 일 아닌가? 블랑슈는 그런 베리테의 마음을 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란타나의 개인적인 복수여도 용서했을 거야.”
“뭐? 어째서?”
“나는 이 나라의 왕이고, 란타나는 내 백성이니까.”
블랑슈의 얼굴에는 자비와 결단이 동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조금 경계가 허물어진 얼굴로 쓰게 웃었다.
“란타나가 누군가에게 이용을 당했다면 란타나도 피해자야. 배후를 찾아서 처벌해야지.
그리고 만약 란타나의 자의라면……. 8살 아이가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의 일을 내가 한 거겠지.”
자비는 약자를 위한 것, 결단은 악인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란타나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베리테는 그제야 용서의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란타나를 용서해 주자. 응? 베리.”
블랑슈가 베리테의 이름을 간지럽히듯이 불렀다. 그토록 사랑스럽게, 선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미안해. 언제나 널 지지하겠다고 해놓고서 이렇게 반대하는 꼴이라니.”
이번에는 베리테 쪽에서 블랑슈에게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평소처럼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노력해 볼게. 란타나를 용서하도록.”
“정말이지?”
“음……. 역시 손가락 열 개 정도는 부러트려 놓는 편이…….”
“베리!”
블랑슈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이 성난 토끼 같았다.
베리테는 농담이라는 듯 키득키득 웃으며 블랑슈에게 뺨을 맞췄다.
“거짓말이야. 슈, 내가 널 어떻게 거역하겠어.”
* * *
‘이상한 일이야.’
란타나는 감옥에 몸을 구기고 앉은 채,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네르겐에 온 지 일주일. 즉 암살을 시도한 지 약 일주일이 흘렀다. 아직 목이 붙은 채로.
평온한 날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온 지 첫날, 그리고 둘째 날은 나름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네르겐 측에서는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했다.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낮과 밤. 협박과 회유가 번갈아 가며 찾아왔다. 그러나 란타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고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조금의 위해도 없었다. 그저 이곳에 가둬두고 방치하고 있을 뿐. 란타나는 쪼그려 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았다.
‘크로넨버그의 왕 말대로인가.’
그들은 란타나를 보내며, 잡히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네르겐은 위선자 집단이다.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는 자들이니, 어린 너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거다.]위선자. 란타나는 입안에서 그 단어를 발음해 보았다. 위선자라는 그 말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들 날 죽이고 싶어 할 텐데 참는 꼴이라니.’
네르겐의 선왕비만 해도 그랬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시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주제에,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다.
‘재수 없어.’
선왕비를 본 것은 처음이지만, 란타나는 오랫동안 알아온 것처럼 그녀가 싫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싫은 것은 선왕비 뿐만이 아니었다. 네르겐의 국왕도, 그 딸도 오래전부터 알아 온 것처럼 낯이 익었으며 미웠다.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자신에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크로넨버그의 왕이 그들의 험담을 입에 달고 살아서였을까.
[그 나라의 선왕비인 아비게일은 친가족조차 외면하는 악녀다. 이종족을 끌어들인 배신자고 너와 같은 검은 마력을 가진 마녀이기도 하지.]선왕비가 싫은 이유는 수두룩했으나, 마력의 색깔도 그중 하나였다. 란타나는 양팔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 여자. 검은 마력이 있는데도 행복해 보였어.’
란타나는 태어나자마자 화롯불에 내던져졌다. 검은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을지 모른다. 불에 태워져도 이 흉측한 검은 마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얼굴에 씻을 수 없는 상흔만을 남겼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란타나를 주워갔지만, 그 이후의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뭐? 검은 마력이라고? 당장 나가!] [물에 빠트려 죽여!]자신에게 다정히 말을 건네고, 따스한 식사와 잠자리를 주던 사람들 역시 검은 마력이 있다는 것을 알면 돌변했다.
그 이후로 검은 마력이 있다는 걸 숨겼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관의 다락방에서 얹혀살 때도 자신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란타나랑 같이 있기 싫어요. 얼굴이 무섭단 말이에요.] [저렇게 끔찍한 흉터를 가진 걸 보면 분명 저 아이도 문제가 있는 걸 거예요.]처음에는 억울했다. 이런 상처를 갖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은 아닌데.
란타나는 수차례 버림받았다. 마력 때문에, 그리고 얼굴 때문에.
서서히 웃는 방법을 잊어갔다. 세상이 미웠고 증오스러웠다. 고작 검은 마력이 있다는 이유로 세상은 란타나를 버렸다.
‘그런데 어째서 선왕비는 저렇게 행복해 보이지?’
선왕비도 자신과 같은 검은 마력의 소유자, 마녀였다. 배척받아야 마땅한 존재.
자신이 불행한 만큼 선왕비도 불행하길 바랐다. 그것이 공평하게 느껴졌다.
‘블랑슈보다 그 여자가 죽었으면 좋겠어.’
마음 같아서는 제 피를 모두 써서라도 선왕비에게 저주를 걸고 싶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해. 무사히 돌아오기만 하면, 크로넨버그의 왕이 포상을 주겠다고 했으니까.’
왕은 암살을 명하며 포상을 약속했다. 마법사를 불러 얼굴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새로운 신분과 막대한 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것만 있다면 새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탈출을 해야만 했다.
‘내 투명 물약은 처분했을까. 그것만 있다면 탈출이 쉬워질 텐데.’
크로넨버그 국왕은 도주할 때 사용하라며 투명 마법이 걸린 약을 주었다.
사용하기 직전, 세이블리안이 저지하는 바람에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일단 구속구부터 풀어야 해.’
구속구를 벽에 내리쳐 보았지만 소리만 요란했다. 그리고 동시에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란타나는 흠칫 놀라 손을 숨겼다. 간수가 눈치를 채기라도 한 것일까?
잠시 후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보고 란타나는 이를 악물었다.
증오스러운 얼굴, 증오스러운 여자. 선왕비가 눈앞에 서 있었다. 간수가 쩔쩔매며 말했다.
“선왕비 전하, 조심하십시오. 사나운 것이 마치 들개보다 더합니다.”
란타나에게 깨물린 전적이 있는 간수였다. 란타나는 안으로 들어선 릴리를 죽일 듯이 응시하였다.
반면 릴리의 시선은 차분했다. 제 딸을 죽이려 한 원수를 보는 사람 같지 않았다.
“뚱땡이. 왜 왔어?”
“나와. 같이 갈 곳이 있어.”
이제 고문을 하려는 참인가. 각오한 일이니 두렵지는 않았다. 산채로 불에 던져진 적도 있는데 고문쯤이야 가소로웠다.
곧 문이 열렸다. 란타나는 조용히 릴리의 뒤를 따랐다. 고문실이라면 어디에 있을까. 이 지하 감옥보다 더 낮은 곳에 있겠지.
하지만 릴리는 위로 향했다. 흐릿한 햇살이 눈에 닿았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모양인지 사방이 어둑했다.
‘고문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지하에 있을 줄 알았는데.’
다른 건물에 있는 건가 싶었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릴리가 어떤 방문을 열자 그늘 속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블랑슈였다. 순진해 빠진 얼굴이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어딘가 모르게 비장해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릴리에게 다가갔다.
“어마마마, 제가 갈 걸 그랬어요. 괜히 감옥까지 가시고…….”
“말했죠, 이런 건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블랑슈는 좀 쉬어야 해요.”
자신을 앞에 두고 저 태연한 대화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모녀가 애틋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은밀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블랑슈. ‘그것’은 다 준비되었나요?”
“네. 물론이죠. 철저하게 준비해 두었답니다.”
두 사람이 불길한 미소를 흘리며 웃었다. 먹구름 때문에 낮인데도 안은 어두웠다. 그 음산한 분위기에 란타나는 등줄기가 쭈뼛 섰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릴리가 소리 낮춰 웃다가 란타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빙긋 미소 지었다. 보라색 눈동자에는 계략이 가득했다.
“란타나, 앉아.”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자리에 앉았다. 이상하게 무릎이 떨렸다. 떨림을 가라앉히려 애쓰느라 괜히 센 척을 했다.
“나한테서 정보를 캐낼 생각인가 본데, 포기하는 게 좋아. 회유하든 고문을 하든 뭘 하든 말하지 않을 테니까.”
빈정대는 목소리에도 두 사람은 차분했다. 릴리는 그런 란타나를 가만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배후를 말해 주면 제일 좋지.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릴리가 덥석 란타나의 손목을 잡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손 같았다. 유령의 목소리처럼 릴리의 말이 들려왔다.
“손목이 나뭇가지처럼 말랐네.”
“……뭐?”
왜 갑자기 손목 타령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사이, 블랑슈가 하녀들을 향해 말했다.
“여기 ‘그것’을 내와 줘.”
릴리의 명령에 하녀들이 부지런히 무언가를 나르기 시작했다. 란타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라 더욱 두려웠다.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테이블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날이 잘 갈린 나이프, 찌르면 살에 잘 파고들 것 같은 포크, 그리고 스푼……?
곧 접시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하얗고 말랑말랑한 빵에 크림 스튜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겨왔다.
두껍게 썬 고기와 각종 과일이 그득히 쌓여 있었고, 디저트로 나온 체리 파이까지 완벽했다.
란타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릴리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블랑슈 역시 말릴 생각이 없는 듯 사악하게 미소 지은 채였다.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란타나가 입만 뻐끔대던 중, 릴리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 내 눈에 띈 이상, 표준 체중은 되어 줘야겠어.”
란타나의 예상대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밥 고문이라는 이름의 고문이었다.
* * *
“란타나, 얘는 또 어디 갔지?”
하녀들이 란타나의 방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흐트러진 침상이 아니었더라면 애초부터 빈방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식사 시간 때마다 사라지네.”
“그러게요. 선왕비 님이 알면 서운해하실 텐데…….”
이제 점심 시각이 다 되어 가고 있어 란타나를 데리러 왔지만 당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숨어 있겠지? 찾아보자.”
이런 일에 익숙해진 하녀들은 포기하는 대신 란타나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늘따라 란타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주위를 맴돌던 하녀들이 2층으로 올라가자, 란타나는 조각상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갔나?’
식사 시간 때마다 란타나는 원치 않는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뒤에야 복도로 나왔다.
‘젠장. 그 여자는 밥 못 먹어 죽은 귀신이 붙기라도 했나.’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배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란타나는 화풀이를 하듯 제 배를 한 번 퍽 쳤다.
예전에는 며칠 정도는 굶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 사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란타나는 그러한 변화가 싫었다.
‘일단 나가자. 여기 있으면 또 사람이 올 테지.’
란타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창문 너머로 훌쩍 뛰어넘었다. 아직 굳지 않은 눈이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밟혔다.
밖으로 나오니 주변이 한결 조용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중 문득 2층이 눈에 들어왔다.
릴리가 보였다. 그녀가 하녀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작게 한숨.
자신을 찾는 모양이었다. 란타나는 수풀 너머로 몸을 숨긴 채, 릴리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상한 여자.’
이상한 여자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 딸을 죽이려고 한 원수와 왜 밥을 먹으려 하는가?
사실 식사 시간이 싫지는 않았다. 싫을 리가 없었다. 8년이라는 짧은 삶을 사는 동안, 언제나 바라왔던 순간이었으니까.
따스한 식탁을 얼마나 꿈꿔 왔던가. 그 온기에, 향기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비어 나올 것만 같았다.
첫날은 이성을 잃고 먹었고, 다음날은 도망쳤다. 저 여자에게 길들여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이 상했고,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진짜 나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냐? 요즘 들어 악몽도 점점 심해지고.’
오래전부터 란타나는 이상한 꿈을 꾸곤 했다. 은발에 표독스러운 얼굴을 가진 여자가 나오는 꿈이었다.
자신의 또래일 때도 있었고, 스물을 훌쩍 넘긴 모습일 때도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녀는 언제나 질책을 들어왔단 것이었다.
[그만 먹거라, 아비게일. 식탐을 내는 것만큼 추한 모습도 없다.] [아름답지 못한 여자는 가치가 없어. 제발 자기 관리 좀 하거라.] [왜 우는 게냐?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꿈속의 여자는 늘 고통스러워했다. 자신이 아름답지 않아서 두려워했고, 방심한 사이 추해질까 봐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런 여자의 마음을, 란타나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추한 것은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 자신도 그랬지 않았던가. 이 얼굴 때문에 모두가 자신을 경멸하고 피해 왔다.
‘그런데 왜 선왕비는…….’
선왕비는 보편적인 미인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녀의 주위에 있는 시녀나 하녀들이 더욱 미인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 란타나는 그 사실에 화가 났다.
‘왜 너는 행복하지? 나는, 꿈속의 여자는 얼굴 때문에 이토록 불행한데.’
그런 판국이니 릴리와 대면하고 먹을 것이 목 너머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한 끼 정도는 굶어도 상관없었다. 나중에 주방에서 음식을 훔치면 되는 일이다. 예전에는 며칠 내내 흙을 씹은 적도 있다.
잠잠해질 때까지 어딘가에 숨어 있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풀에서 빠져나오는데, 그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 란타나 아니에요?”
블랑슈였다. 하필 마주쳐도 이 여자랑 마주치다니. 이 여자도 릴리만큼이나 달갑지 않았다.
오늘은 베리테도 함께였다. 베리테의 서늘한 시선이 란타나에게 닿았다.
“네 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란타나는 이죽 웃었다. 경계심이 가득한 반응이 오히려 반가웠다. 웃을 때마다 화상 자국이 땡겨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왜? 내가 또 암살이라도 할까 봐?”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베리테가 욱해서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블랑슈가 저지했다.
“란타나에게 그런 의도는 없을 거야. 베리, 괜찮아.”
베리테는 잘 길들어진 사냥개처럼 한 발자국 물러섰다. 블랑슈는 살짝 쓴웃음을 지은 뒤 란타나를 보았다.
“저기, 란타나. 마침 하고 싶은 제안이 있었는데요.”
“뭔데?”
“마법관에서 검은색 마력 연구를 진행 중인데,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봉급은 당연히 지불 할 거고요.”
그 제안에 란타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급료를 지불한다고? 노예로 삼는다면 차라리 이해가 갔을 터였다.
“참 웃기지도 않는군. 내 마력이 무섭지도 않나?”
“검은색 마력은 귀중한 재능인걸요. 왜 무서워해야 하나요?”
왜냐니. 당연히 무서워해야 한다. 검은색 마력은 불길하고 저주받은 능력이니까.
그런데도 블랑슈는 그것을 재능이라 했다. 란타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블랑슈를 노려보았다.
진심이라기엔 믿기지 않고, 연기치고는 참 훌륭했다. 그러고 보니 크로넨버그의 왕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블랑슈, 그 계집이 아비게일을 용서했다지만 그럴 리가 없지. 어린 시절, 아비게일에게 그토록 괴롭힘을 받았는데. 분명 칼을 갈고 있을 거다.]왕은 그렇게 말했지만 선왕비와 그 의붓딸은 무척이나 애틋해 보였다.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친모녀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다면 그 다정한 딸의 모습도 연기였을 것이다. 자신을 학대한 부모를 어떻게 용서하겠는가. 란타나 자신도 친부모를 용서하지 못했는데.
“너, 옛날에 선왕비한테 학대당했다면서?”
툭 내뱉은 질문에 블랑슈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동요를 보자 란타나는 희미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런데도 그 여자랑 잘도 지내는군. 참 대단한 연기력이야. 그 정도 연기력이면 내 마력을 보고도 태연한 척 할 수 있겠지.”
“……연기가 아니예요.”
이번에도 연기를 하는군. 란타나는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블랑슈를 보았다.
그런데 연기가 능하면, 눈빛도 바꿀 수가 있던가? 블랑슈의 벽안에 한점의 그늘도 없어 란타나는 잠시 당황했다.
“어마마마가 제게 못되게 구신 적이 있죠. 하지만 용서했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이곳에 어마마마의 편이 아무도 없었고, 어마마마께서 사과해 주셨으니까요.”
그 말을 듣자 란타나는 짧은 두통을 느꼈다. 또 그 꿈속의 여자가 잠시 환영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장면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황제와 닮은, 어린 여자애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장면.
그 뒤로 아이에게 물건을 던지고, 옷을 갈기갈기 찢는 장면이 차례대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 여자애에게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왜 저렇게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거지? 저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란타나?”
블랑슈의 말에 란타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걱정 어린 시선이 그 앞에 있었다.
그 시선에 순간 숨이 막혔다. 어째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란타나는 무작정 도망쳤다. 뒤를 따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한참이나 달음박질을 치던 란타나는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간 뒤에야 멈춰 섰다. 거친 숨을 토해내며 란타나는 중얼거렸다.
“……이상한 여자.”
이상한 여자였다. 검은 마력은 훌륭한 재능이라고 하질 않나, 자신을 괴롭힌 계모를 용서하질 않나.
이상한 것은 블랑슈뿐만이 아니었다. 선왕비부터 시작해 온 사람이 이상한 나라였다.
자신은 중범죄자다. 그런데도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궁 안이라면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왕이라는 작자도 이상했다. 자신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 버럭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난 네 딸을 죽이려고 한 사람이다!] [그래. 맞아. 그래서 네가 증오스럽다. 하지만…….]그 회한의 빛. 왜 저 남자는 그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 언제가 사과를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그렇게 말하고 선왕은 떠나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상한 놈들 투성이야, 여긴.’
그렇게 투덜거리며 란타나는 숨을 골랐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어느새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었다.
한적하고 고요했다. 마치 작은 숲 같았는데 그 사이에 온실 화원이 보였다. 안에는 사람도 없고 따뜻해 보였다.
‘여기라면 선왕비도 못 찾겠지.’
아이는 슬그머니 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은 마치 봄처럼 따스했고 좋은 향기가 났다.
향기가 무척 진했다. 오색의 꽃과 향기에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쭈뼛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중, 란타나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화원 한구석에 잘 가꾸어진 화단이 있었다. 여기에는 흰 꽃 한 종류만이 빼곡하게 자라나 있었다.
다른 꽃들도 관리를 잘 받았지만, 이곳은 특별히 더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취할 듯한 향기 때문에 더욱 얼떨떨했다. 이 아름다운 꽃의 이름은 대체 무엇일까?
란타나가 저도 모르게 꽃을 꺾었다. 꽃대가 반쯤 부러지는 찰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건드리지 마.”
란타나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세이블리안과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 금색 눈동자.
“……당신은 레이븐이군.”
레이븐은 무표정한 얼굴로 란타나를 내려다보았다. 꽤나 무관심한 시선이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레이븐이 입을 열었다.
“내가 더 이상 왕족이 아니라지만, 왕족 시해범에게 하대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관심이라 생각했던 시선에 일종의 경멸이 섞여 있었다. 란타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수년간 길바닥에서 길러온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이 자는 위험한 사내라는 걸.
란타나가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레이븐은 아이가 없는 것 마냥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발을 멈춘 곳은 화단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란타나가 반쯤 꺾다 만 꽃 앞이었다.
레이븐은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 꺾인 꽃대를 고정하였다.
고작해야 꽃인데 그의 손길은 무척이나 진중했다. 마치 중상을 입은 사람을 살피는 듯한 손길.
자신이 비싼 꽃을 꺾은 건가. 란타나는 변명하듯 구시렁거렸다.
“어차피 죽을 거잖아.”
“녹색 마력을 지닌 사람에게 회복을 부탁하면 된다.”
다행히 자신을 책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심한 어조에 마음이 놓이자, 란타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레이븐을 구경했다.
온실은 따뜻했고 좋은 냄새가 났다. 자신을 귀찮게 구는 그 여자보다는 레이븐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레이븐은 묵묵히 화단 가꾸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자신을 내쫓을 것 같지는 않아, 란타나가 툭 던지듯 물었다.
“그 꽃은 이름이 뭐야?”
“……백합.”
백합(Lily)? 선왕비의 애칭도 백합이었다. 레이븐이 선왕비를 한 차례 납치했다가 사면받았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떠올랐다.
“아직도 그 여자 좋아하는 거야?”
레이븐이 미간을 구긴 채 란타나를 노려보았다. 란타나는 도리어 웃었다.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너도 범죄자잖아. 나 좀 숨겨줘.”
방금 전까지는 무서웠는데, 레이븐의 약점을 잡았다는 생각을 하니 여유가 좀 생겼다. 긴장이 풀리자 재잘재잘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 여자도 참 이상해. 왜 자신을 납치한 사람을 용서해 줬지? 사실 널 좋아하는 거 아냐?”
“꺼지라고 했다.”
“너도 이상하지. 왜 좋아해도 그런 여자를 좋아해? 그런 못생긴 여…….”
그 순간, 쾅 소리를 내며 란타나의 몸이 붕 떴다.
“세 번이나 경고를 해야 이해하는 건가?”
정신을 차려 보니 레이븐에게 멱살이 잡혀 벽에 밀어 붙여진 채였다. 켁켁거리며 발버둥을 치는데도 레이븐은 미동이 없었다.
“그분은 다정하셔서 네게도 호의를 베푸시지. 하지만…….”
날카로운 가위날이 란타나의 목에 닿았다. 란타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나는 다정하지 않지. 그분께 미움받는 것도 익숙해. 만약 그분에 대해 함부로 말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미안, 미안해. 취소할게. 취소!”
뒤늦게 제정신이 들었다. 레이븐의 금빛 눈동자가 마치 칼날 같았다.
그는 잠시 노려보다가 란타나를 놓아주었다. 란타나는 제 목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이 자식, 완전 미친놈 아냐?’
레이븐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화단을 돌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에 닿아 있던 가위는 화단을 정리하는 데 쓰고 있었고, 시선은 평화로웠다.
‘그래도 차라리 이런 게 낫지. 저 위선자 집단보다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는 편이 나으니까.’
란타나는 레이븐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섭기는 했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었고, 또 레이븐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사각사각, 정원을 손질하는 가위질 소리가 들렸다. 란타나는 레이븐의 화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넌지시 물었다.
“저기…….”
“…….”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답하면 나갈 거냐?”
란타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븐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멈췄다. 그리고 뭐가 궁금하냐는 듯이 응시했다.
“나도, 너도 선왕비에게 용서받았잖아.”
“그래서?”
“음……. 왜 용서했는지 궁금해.”
위선이었을까, 선의였을까. 이 남자라면 답을 알 것 같았다. 레이븐의 금안에 순간 온기가 깃들었다.
방금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어쩐지 세이블리안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이었다.
“……선왕비님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사람이다. 우리의 고통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신 거겠지.”
고통을 이해한다니. 그 여자도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어봤나? 마력의 색깔만으로 죽을 뻔한 적이 있나?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아본 적이 있나?
모르겠다. 겉으로만 봐서 릴리는 그저 행복해 보였다. 그 어떤 고난도 겪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그리고…….
“왜 당신이 아직도 그 여자를 좋아하는지도 궁금해. 솔직히 예쁘지는 않잖아.”
어째서 아름답지도 않은데 그토록 많은 사람이 릴리를 좋아하는 것일까? 결국 사람들이 보는 것은 표면일 뿐인데.
은근슬쩍 두 개의 질문을 던졌지만 레이븐은 야박하게 셈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구원해 준 건, 선왕비님의 얼굴이 아니라 말이었으니까.”
란타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레이븐을 보았다. 선왕과 빼닮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내 얼굴이 싫었다. 증오스러웠어. 하지만 선왕비님은 내 얼굴이 아닌 레이븐이라는 사람을 봐주었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마저 떠오른 것 같았다. 레이븐이 천천히 고개를 틀어 란타나를 응시했다.
“너도 느꼈을 거 아냐?”
그 질문에 란타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반박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선왕비는 자신을 대할 때, 자신의 상처가 아닌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에는 답했다.”
나가라는 의미였다. 란타나는 망설이다 화원을 빠져나갔다. 침입자가 떠나간 뒤, 레이븐은 다시 꽃을 돌보기 시작했다.
* * *
유리창에 서리가 끼어 있었다. 마치 얼음의 깃털, 얼음의 잎맥이 퍼져나간 듯한 모양새였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가장 추운 시기를 지나 봄에 가까워져 오고 있는데, 꽃샘추위라도 온 것일까.
다행히 실내는 따뜻했다. 잠투정을 부리던 이베르는 새 옷을 입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블랑슈, 날이 춥네요. 감기 조심해요.”
나는 블랑슈에게 도톰한 케이프를 둘러주며 말했다. 베리테와 같은 디자인으로 만든 것이었다.
케이프 안으로 들어간 긴 흑발을 정리해 넘겨주었다. 블랑슈가 볼을 붉히고는 수줍게 웃었다.
“감사해요, 어마마마!”
“고마워, 장모님. 이번 옷도 멋지네! 그런데 그 옷은 누구 거야?”
베리테가 내 팔에 걸린 숄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 이거……. 란타나에게 가져다주려고.”
예상했던 대로 베리테의 표정이 굳었다. 란타나를 싫어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괜히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못 줄 것 같아. 요즘 안 보이더라고.”
그건 사실이었다. 란타나는 방에 거의 없었다. 잠도 다른 곳에서 자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로 간 걸까. 실내에 있다면 다행인데, 밖으로 나갔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베리테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베리테는 입을 삐죽대다가 고개를 휙 틀었다.
“……아까 보니까 정원에 있었어.”
“어? 뭐가?”
“란타나 말이야. 찾는 거 아니었어?”
나는 눈만 깜빡이다가 웃고 말았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결국 란타나를 챙겨 주는구나. 내가 웃자 베리테가 성질을 냈다.
“블랑슈가 용서해 주라고 했으니까 노력하는 것뿐이야!”
그 말에 블랑슈가 쿡쿡 웃더니 베리테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베리테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고마워, 베리.”
“……슈가 원하는 일이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어휴, 어휴. 오늘도 깨가 쏟아지는 커플이네. 둘이서 오붓하게 있도록 난 나가 봐야겠다. 란타나를 찾으러 가야 하기도 하고.
나는 과자를 조금 챙긴 뒤 방을 나섰다.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세이블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세이블, 세이블!”
“아, 릴리.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란타나를 찾으러 가는 중이에요. 옷이랑 먹을 것도 좀 주려고요.”
“아직도 란타나는 식사를 거부하는 모양이군요.”
“네. 예전에는 식당에서 식재료를 훔쳐 먹고 있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그것도 손을 안 대나 봐요.”
란타나가 훔쳐가기 좋게 입구 근처에 파이 같은 걸 놔달라고 요리사들에게 명령해 둔 참이었다.
예전에는 두는 족족 사라진다고 했는데, 요즘은 손도 대지 않는다고 요리사들이 울상이었지.
왜 란타나는 식사를 거부하는 걸까? 독이 들었다고 오해라도 한 것일까? 세이블이 나를 가만히 보다 입을 열었다.
“릴리는 블랑슈 때도 그렇고, 아이가 굶는 걸 못 보나 보군요.”
“당연하죠!”
애들은 잘 먹고 잘 커야 한다! 내가 의상실에 숨어 사는 동안, 굶고 지내는 아이들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블랑슈가 떠올라, 박봉을 털어서 어떻게든 맛있는 것을 잔뜩 먹였다.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로 식사를 할 때마다 나도 웃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위로받았고.
아이들은 잘 먹고 잘 노는 게 최고지. 그리고 란타나도 마찬가지다.
“그나저나 세이블, 어디 가던 길이었어요?”
“릴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마법관에서 연락이 와서.”
그렇게 말하며 세이블은 조심스레 서신 하나를 꺼냈다. 아, 마력 검사 결과인가보다.
마법관에는 나와 란타나의 마력이라는 걸 알려 주지 않은 채 검사를 부탁했다.
우리는 사람의 눈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심호흡을 하고 서신을 펼쳐 읽었다.
「두 종류의 마력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 동일 인물의 마력.」
역시 예상대로였다. 세이블이 서신의 내용을 함께 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면 란타나가 아비게일의 환생이군요. 역시 복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니,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나는 다급히 세이블의 말을 막았다. 이 사람, 블랑슈가 죽을 뻔 한게 여전히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다.
“생일 연회 때, 란타나가 품에서 병을 하나 꺼냈었죠?”
“예. 기억납니다.”
“그때, 란타나가 쓰려고 했던 마법약. 베리테가 내용물을 확인해 봤는데…….”
어쩐지 입이 바싹 말랐다. 나는 굳은 혀를 움직여 간신히 말을 뱉을 수 있었다.
“……사용자를 태워버리는 약이었어요.”
“예?”
세이블 역시 놀란 눈이 되었다. 산채로 사람을 불태우는 약. 란타나는 그걸 자기한테 뿌리려고 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 갔다.
“굳이 수명을 깎아서 저주를 건 뒤에 자살하는 건 뭔가 이상해요. 그냥 자기 목숨을 대가로 저주를 거는 편이 더 나았겠죠.”
그렇다면 왜 란타나는 굳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썼을까? 세이블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보통 입막음을 위해 암살자에게 자살을 명령하곤 하죠.”
나 역시 그 결론밖에 내지 못했다. 누군가가 란타나에게 암살을 사주하고, 자살을 하게 유도했다. 아마 란타나는 몰랐을 가능이 컸겠지.
나는 들고 있는 숄을 꼭 끌어안았다. 누가 대체 블랑슈를, 그리고 란타나를 죽이려 한 것일까?
“일단 란타나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옷이랑 먹을 것도…….”
“같이 갈까요?”
“괜찮아요. 여럿이 가면 더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세이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며 말했다.
“릴리도 몸 챙기십시오. 아이들 옷 만들어 주는 것도 좋지만, 릴리 겨울옷도 챙겨야죠.”
“작년에 만든 옷이 있어서…….”
“자꾸 그러시면 제가 릴리의 드레스룸을 하나 더 만들어, 가득 채워버릴 겁니다.”
그가 웃으며 진심을 말했다. 아, 안돼!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저도 겨울옷 새로 만들게요.”
그렇게 약속을 한 뒤에야 세이블은 나를 보내 주었다. 어휴, 잘못하면 또다시 세이블이 과소비를 할 뻔했네.
나는 정원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란타나는 보이지 않았다.
마른 몸만큼이나 옷차림도 얇은 애인데……. 그렇게 두리번두리번 란타나를 찾아다니던 중. 뒤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뚱땡이. 뭐하냐?”
돌아보자 거기에는 란타나가 서 있었다. 한쪽 눈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널 찾고 있었어. 이리와 봐.”
뭐, 오라고 해도 도망가겠지만. 그러나 의외로 란타나는 순순히 내게 다가왔다.
아니, 웬일이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숄을 둘러주었다. 내 손에 스치는 뺨이 차가웠다.
“……넌 왜 그렇게 행복해?”
역시 얌전하면 란타나가 아니지. 란타나는 뜬금없이 힐난을 던졌다. 나는 그런 란타나를 바라보다가 질문으로 답했다.
“왜 행복하면 안 돼?”
“넌 검은 마력을 지녔으니까.”
“그게 이유야?”
“그리고 넌…… 아름답지 않으니까.”
상처가 될 만한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왠지 그 말은 내가 아닌, 란타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자신은 검은 마력이 있으니까, 자신은 아름답지 않으니까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내가 빙의하기 전의 아비게일도 스스로에게 그런 저주를 걸어왔을 것이다.
안타까웠다. 전생도, 현생도 아비게일이 자신의 외모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게.
“마력의 색깔도, 외모도 비난의 이유는 될 수 없어.”
“……역시 넌 위선자야. 너는 몰라. 태어나자마자 불구덩이에 던져지지 않아서 몰라.”
뭐? 불구덩이에 던져졌다고?
경악해서 말을 잊은 사이, 란타나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나를 노려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나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말을 하지만, 너 역시 내 상처가 흉측하다고 생각하잖아. 내가 징그럽다고 생각하잖아.”
란타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란타나의 상처가 사고라고 생각했다. 사고라 할지라도 너무도 비극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의 고의였다니.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누가……. 누가 널 불구덩이에 던졌어?”
“내 친부모가.”
친부모라는 단어가 마치 상스러운 욕처럼 들렸다. 나는 그저 얼어붙어 있었다.
어린 란타나에게서는 이상하게 찬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열기와 함께.
그것은 란타나가 실제로 살아오며 겪은 온도였을 것이다.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란타나가 끔찍하지 않아.”
힘겹게 나온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란타나에게 손을 뻗었다.
란타나는 움찔하면서도 물러서지는 않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숄을 조심히 내리자 붉은 흉터가 드러났다.
“징그럽지? 내가 봐도 징그러워.”
“아니. 나는 란타나가 징그럽지 않아. 너에게 이런 상처를 낸 인간이 징그러울 뿐이야.”
왜 상처 입은 사람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왜 피 흘린 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는가. 징그러운 것은 오로지 가해자일 뿐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말했다.
“란타나, 난 네가 조금도 징그럽지 않아.”
내 것과 똑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 눈동자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란타나가 원한다면 그 얼굴의 상처를 없애줄 수 있어.”
그 말에 란타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어린아이다운 표정이었다.
“정말…… 정말로?”
식사마저 거부하던 아이가 이토록 간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손끝에서 보라색 마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변화의 마법이 란타나의 얼굴에 와닿았다. 그러자 붉은 흉터가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자. 다 끝났어.”
잠시 후, 왼쪽 얼굴에서 상처는 사라졌다. 손거울을 건네주자, 란타나는 황급히 거울을 낚아채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난생처음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 같았다. 거울 속의 자신이 믿기지 않는듯한 표정. 란타나는 더듬더듬 제 얼굴을 만져보았다.
“치료가 아니라 겉모습만 변화시킨 거라……. 통증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제대로 된 치료는 천천히 받자.”
일종의 눈가림이지만 이걸로 란타나가 위안을 받는다면…….
다행히 란타나는 자신의 얼굴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투덜대듯 말했다.
“어차피 내가 너에게 협조하지 않으면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거지?”
“뭐?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평생 가는 건 아니니까, 주기적으로 다시 마법을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럴 줄 알았지.”
말투는 여전히 삐딱했지만 목소리 톤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란타나가 나를 힐끗 보았다가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넌 이런 마법을 갖고 있는데도 왜 모습을 바꾸지 않아?”
“응?”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할 수 있잖아. 예전에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들었어. 그런데 왜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
여러 차례 들어온 질문이기에 대답이 어렵지는 않았다. 란타나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음……. 그냥 이 모습이 편해서? 난 이 모습에 불만 없어.”
역시나 란타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널 우습게 여겨도?”
“뭐, 가끔 겉모습만 보고 뭐라 하는 사람들이 있었지. 게으르다, 노력을 안 한다, 욕을 먹기 싫으면 살을 빼면 되는 거 아니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겉모습만 보고 욕하는 사람이 나쁜 거잖아.”
지금은 이토록 쉽게 말을 하지만,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생의 나는 내 외모로 인해 수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왜 살을 안 빼냐고, 네가 살을 빼면 욕 먹을 일도 없지 않느냐고.
나도 그 당시에는 그게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내가 욕을 먹는 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로하는 와중에도 다이어트를 병행하다 죽었다.
“네가, 그리고 내가 뭘 잘못했지? 상대의 모습이 어떻든 그게 비난의 구실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전생의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죽은 뒤,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된 뒤에야 나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
란타나는 고개를 숙인 채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얼굴을 들었다.
아이는 웃고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이상해, 진짜. 너도 이상하고 황제도 이상하고 이 나라 인간들은 전부 이상해.”
그래, 역시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러던 중, 나는 무언가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란타나가 내 소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구조를 요청하듯, 간절하게.
“나도…… 이 이상한 나라에서 살아도 돼?”
란타나의 말대로 이곳은 이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별종 취급을 받아온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 이상한 나라가 어울릴 것이다.
아비게일의 전생을 바꿀 수는 없지만, 란타나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는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란타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보라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는 웃었다.
“물론이지. 같이 살아가자, 란타나.”
* * *
“란타나가 결국 실패한 것 같더군요.”
오늘도 탑 안에는 우중충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날씨 탓은 아니었다.
케인은 의자에 등을 깊이 붙인 채 이를 갈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분풀이를 한 듯, 나머지 의자 하나는 박살이 나 있었다.
의자를 하나만 박살 낸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나머지 의자마저 부러트린다면 둘 중 하나는 서 있어야 할 테니.
“저주를 거는 데에도 실패했고, 마법 약도 쓰지 않았다더구나. 인간이라는 사실도 들통이 났고.”
왕은 덤덤하려 애썼으나 불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케인이 힐끗 고개를 들었다.
“우리에 대한 걸 이야기하지는 않겠죠? 젠장. 곧바로 자살하는 마법이라도 걸어놔야 했는데.”
흉흉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표정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케인이 손톱을 깨물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절실하게 란타나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계획은 실패했으니, 입을 다물게 하는 수밖에 없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때, 보좌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란타나가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케인과 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금 전까지 란타나의 죽음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생환이라니.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쪽이든 비밀만 지켜지면 되니까. 왕은 들여보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잠시 후, 란타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르겐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르고 허름한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초췌해 보였다. 그 모습에 왕은 한 차례 혀를 찼다.
“어떻게 잘 탈출했나 보군.”
구사일생하여 돌아온 란타나였건만 왕의 목소리에 다정함은 없었다. 도리어 호된 질책이 돌아왔다.
“블랑슈에게 저주를 거는 게 실패했다 들었다.”
“……네.”
“그런데 뻔뻔하게도 돌아오다니. 키워준 은혜를 모르는구나.”
방금전까지는 란타나가 사실을 고할까 두려워하더니, 이제는 살아 온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투명 물약이라 속이고 준 발화 물약을 쓰고 죽어 버리지. 그랬다면 요정과 네르겐의 사이가 순조롭게 틀어졌을 텐데.
란타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노려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화상 흉터와 살벌한 눈동자가 보였다.
“어쨌거나 저는 블랑슈 황제에게 저주를 걸었어요. 약속을 지켜 주세요. 이 상처를 지워줘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자 화상 흉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크로넨버그의 왕은 못 볼 것이라도 본 듯 시선을 틀었다.
“약속?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는데 뻔뻔하구나.”
“하지만…….”
“아버지, 애가 불쌍하잖아요. 최소한 솔직하게 말해 줘야죠.”
케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긋하게 말했다.
“그 흉터를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뭐?”
란타나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케인은 실실 웃고 있었다. 분풀이 상대를 찾은 것이 퍽 기쁜 모양이었다.
“그런 중상을 치료할 수 있는 마법사는 우리에게 없어. 그래도 공로는 인정해 주지. 이봐, 란타나에게 보수를 줘라.”
그 말에 보좌관은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던졌다. 초라하게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상처를 치료해 주겠다는 말, 새 신분과 막대한 돈을 주겠다는 말.
그 모든 거짓을 마주한 채, 란타나는 침묵했다. 케인은 란타나가 울며 날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란타나는 울지 않았다. 그저 두 눈에 분노만이 타오르고 있을 뿐.
“……그랬나. 역시 란타나를 속였군.”
그 말투에 왕과 케인은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 몸에 깃든 듯한 말투.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보라색 마력이 란타나를 감쌌다.
자그마한 아이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가고, 그들 앞에 나타난 흑발의 여인이 나타났다. 똑같은 것은 증오를 담은 보라색 눈동자뿐이었다.
“너, 넌 대체 누구지……? 마법사인가?”
케인과 국왕은 그녀를 보고 기겁하여 물었다. 릴리가 귀찮다는 듯이 뒷머리를 매만졌다.
“아. 당신들은 이 모습이 익숙치 않겠네.”
한 번 혀를 찬 뒤, 그녀는 다시 변화 마법을 걸었다. 이제는 그들도 아는 얼굴이었다.
거기에는 케인의 누이, 왕의 딸인 아비게일이 나타나 있었다.
“아, 아비게일……?”
“너, 란타나로 변해서 우릴 속인 거였나!”
그들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표했다. 자신들의 처지가 어떤지도 모른 채.
아비게일의 모습을 한 릴리는 증오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피가 끓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 어린아이를……. 그것도 당신의 자식을 닮은 아이를 죽이려 했지?”
란타나는 네르겐에 망명을 부탁하며,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암살의 대가로 돌아올 보상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란타나는 알지 못했다.
릴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굶고 고통받는 모든 아이에게서 블랑슈를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아비게일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보고도 사지로 몰아넣었다.
이미 아비게일을 한 번 죽였고,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란타나마저 죽이려 했다.
분노로 온몸이 떨려오고, 검은색과 보라색의 마력이 칼바람처럼 일렁였다.
그제야 왕과 케인은 뭔가가 잘못되어감을 깨달았다. 황급히 표정을 바꾼 뒤 비굴한 자세로 다가갔다.
“아, 아비게일. 용서해다오. 우리는 널 위해……!”
“날 위해서라고?”
“그, 그래! 블랑슈가 죽으면 이베르가 왕이 될 거 아니냐. 네 친자식이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윽!”
검은 마력이 왕의 목을 졸랐다. 그녀는 울고 싶었다. 아비게일을 위해, 란타나를 위해 울고 싶었다.
“경, 경비병! 당장 이 여자를……!”
케인이 소리를 지르기가 무섭게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크로넨버그의 군대는 아니었다.
네르겐 황실 문장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병사들. 릴리의 호위병이었다.
그 사실에 케인은 황망한 얼굴이 되어 주저앉았다. 점점 사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반역자고, 살인자야. 두 번의 용서는 없어.”
검은색 마력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두 사람의 눈을 가렸다. 어둠 속에서 아비게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목소리가 탑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너희는 평생을 혹한의 추위와 지옥의 염화를 겪을 것이다.
비아냥과 굶주림 사이에서 모든 낮과 밤을 맞이할 것이며, 거울을 볼 때마다 너희가 생각하는 가장 추한 얼굴을 맞이할 것이다.”
저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은 살을 엘 듯한 추위를 느꼈다. 그리고 화롯불에 던져진 것처럼, 고통스러운 열기가 뼈마디를 태우는 듯했다.
귓가에는 사람들의 비아냥과 욕설이 가득했고, 내장을 긁어내리는 듯한 허기를 느꼈다.
그 모든 것은 아비게일이, 그리고 란타나가 겪어왔던 것이었다.
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 끔찍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녀는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이 저주를 푸는 방법은…….”
열쇠? 열쇠가 있단 말인가?
케인과 왕이 헐떡거리며 자신의 가족을 올려다보았다. 자신들이 죽이려 했던 그 얼굴을 보며, 고통 사이에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런 둘을 바라보며 그녀가 칼을 내리치듯 말했다.
“란타나가 행복해지고, 너희를 용서하는 것이다. 만약 란타나가 조금이라도 불행해진다면, 너희의 저주는 다시 발동된다.”
그들은 뜻밖의 말에 당황했다. 란타나의 행복이라니. 용서라니.
그 저주가 있는 한, 그들은 란타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란타나가 조금이라도 불행해지면 재발동되는 저주라니. 평생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이 저주에는 열쇠가 없는 셈이었다. 왕은 멍청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아비게일. 대체 무슨 말을……?”
“말 그대로야. 너희가 선한 인간이 되면 저주가 풀리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이들에겐 그런 자비조차 아까웠다. 이들에게는 몇 차례나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정말 선한 인간이 되어 자신의 과업을 반성한다면, 죄값을 달게 받을 것이다. 정말 선한 인간이라면.
때문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쓰러진 두 사람을 뒤로 했다. 마지막까지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란타나에게 속죄하고, 그 아이가 행복해지길 바라라고.”
“아비게일……!”
고통 속에서 그들은 제 딸의, 누이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이미 문을 닫혀 있었다.
* * *
어제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아비게일의 꿈이었다.
마지막으로 꿈속에서 그녀를 본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막 빙의했을 때는 자주 꿨지만, 시간이 흐르며 빈도수가 점점 줄어갔다.
꿈속의 아비게일은 드레스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옷장에 증오하는 무언가라도 있는 듯, 그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옷장 안에는 옷들이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옷들. 모두가 선망할 법한 옷을 보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뜻밖에도 내 옛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색으로 가득 찬 옷장을 바라보던 나. 옷의 무덤을 바라보던 그때의 나.
아, 아비게일에게도 저곳은 화려한 무덤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나 그 자식.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든다니까.”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어젯밤 꿈을 더듬다, 베리테의 불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햇살이 응접실을 적시고 테이블에는 우리 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쿠,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던 중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딴 생각을 하고 말았네.
나는 황급히 화제에 귀를 기울였다. 베리테는 투덜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 자식. 무려 내가 치료를 해 주겠다는데 귀찮다고 안 오고 있단 말이야.”
란타나의 화상 치료는 베리테가 전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래된 상처라 꾸준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치료를 베리테가 자처해서 맡을 줄은 또 몰랐는데 말이지.
말로는 툴툴대도 다정한 아이라니까. 세이블은 조용히 차를 마시다 말했다.
“네가 편해져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
“아냐, 날 무시하는 거라고.”
베리테가 입을 삐죽 내밀자, 옆에 앉아 있던 블랑슈가 놀란 토끼 눈이 되어 말했다.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란타나가 베리를 편하게 생각하니까 투정 부리는 것 같다고.”
“그래? 듣고 보니 블랑슈 말이 맞는 것 같아.”
정말이지 블랑슈 한정 팔랑귀라니까. 세이블은 흐뭇한 눈으로 베리테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치료를 안 받는다니. 나한테는 종종 찾아와서 마법을 다시 걸어달라고 하긴 했는데.
그쪽이 더 편해서일까? 나야 란타나의 속을 알 수 없지만.
이베르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슈크림을 먹고 있었다. 블랑슈가 입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나저나 란타나가 이곳에 잘 정착한 것 같아 다행이에요. 벌써 한 달이 됐네요.”
그래. 어느새 한 달. 내가 분노하여 크로넨버그를 방문한 것도 한 달 전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케인과 국왕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그쯤 되면 네르겐에 찾아와 블랑슈와 란타나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뭐, 어차피 찾아와도 만나게 해 주진 않을 거지만. 고작 한 달로는 부족했다.
“그나저나 레이븐이 란타나를 맡다니, 좀 놀랐어.”
베리테가 밀크티를 마시며 말했다. 분명 달콤한 음료일 텐데, 쓴 무언가를 마신 듯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세이블 마찬가지였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븐이 란타나를 양자로 들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두 사람의 말대로 현재 란타나는 레이븐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란타나가 네르겐에서 살게 되면서 몇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보호자였다.
거처는 궁에 마련해 주면 되지만, 보호자가 없는 것은 조금 곤란했다. 8살 아이를 홀로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란타나를 입양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뜻밖에 레이븐이 입양을 하겠다고 먼저 제안을 했다.
레이븐이 란타나와 가까운 사이였는지 묻자, 그가 산뜻하게 웃으며 답했던 기억이 났다.
[딱히 란타나와 막역한 사이는 아닙니다. 그저 란타나를 아직 믿지 못해, 가까이에서 감시하려고 하는 것뿐이죠. 물론 보호자의 역할도 성실히 할 테지만.]이런 사람에게 란타나를 맡겨도 되나 싶었는데, 란타나 역시 레이븐을 양부로 받아들였다.
[다른 녀석들은 착한 척해서 기분 나빠. 범죄자는 범죄자끼리 어울리는 편이 낫지.]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차라리 이 둘이 같이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잘 지내는 것 같았고.
“살짝 못 미더운 감도 있었는데, 의외로 레이븐이 란타나를 잘 키우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마법도 가르치고 있고.”
“그래도 그 둘을 붙여놔도 괜찮을까…….”
베리테는 내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때 블랑슈가 밝은 얼굴로 답했다.
“사실 저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서 기뻐요. 레이븐 백부님은 저희랑 교류가 거의 없잖아요. 결혼도 안 하시고…….”
레이븐이 그 이후 홀로 살고 있었다. 연인은 물론 친구도 만들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와도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이 나와 세이블에 대한 예의라면서.
그런 반응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레이븐이 홀로 마법관에 틀어박혀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어딜 가나 란타나와 함께인 듯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애틋하거나 다정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때 가볍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밀러드였다.
“담소를 나누시는 와중 죄송합니다. 레이븐 마법사와 란타나가 알현을 요청합니다.”
“아, 네. 들라 하세요.”
응? 두 사람이 웬일이지? 블랑슈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븐은 우리와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정중히 고개를 조아렸다.
세이블의 얼굴에 순간 경계심이 스쳐 가는 것이 보였다. 블랑슈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뵈어요, 백부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다름이 아니라 란타나가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레이븐은 뒤에 서 있는 란타나를 힐끗 보았다. 그 시선이 제법 엄한 아버지 같았다.
란타나가 망설이다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우리의 눈치를 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께 저주를 걸어서.”
뭐야? 란타나가 지금 사과를 한 거야? 게다가 공대까지? 쟤가 갑자기 왜 이러지?
뜻밖의 사과에 블랑슈도 얼떨떨한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바뀌었다.
감격한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블랑슈가 그 모든 감정을 담은 채 미소 지었다.
“난 이미 다 용서했어요. 걱정하지 마요, 란타나.”
“감사합니다, 폐하.”
“란타나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레이븐도 함께 감사의 말을 남겼다. 그런데 아직 할 말이 남은 눈치였다. 란타나가 쭈뼛거리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릴리…… 전하. 뚱땡이라 해서 죄송해요.”
“……릴리를 뚱땡이라 불렀다고?”
그 말에 세이블의 살기가 한 단계 더 증가했다. 레이븐 역시 눈빛이 맹수처럼 빛났다.
“란타나, 그런 말을 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그, 그게…….”
이러다간 가까스로 만들어진 훈훈한 분위기에 금이 가겠어! 나는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난 괜찮아요. 사과를 받아들일게, 란타나!”
간신히 두 사람의 살기가 누그러졌다. 란타나는 고맙다는 듯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제 숄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숄 선물해 줘서 고마워요. 마음에 들어요.”
아, 그러고 보니 란타나는 내가 준 숄을 두르고 있었다. 사실 오늘 뿐만이 아니라 종종 마주칠 때마다 늘 두르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입을 게 없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들었던 거구나. 란타나의 말, 그리고 표정에 문득 어젯밤 꿈이 떠올랐다.
옷장 앞에 서 있던 아비게일은 무척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 어떤 옷을 눈앞에 두어도 기쁨이 없는 얼굴.
“사실…… 선물이라는 거 처음 받아봤어요. 고마워요.”
란타나는 작게 웃었다. 꿈속의 얼굴과는 달리. 어색한 미소였지만 내 눈에는 무척이나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반성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게요.”
그 말에 블랑슈는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평소라면 곧바로 괜찮다고 할 아이인데?
“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잠시 물러나 주겠어요?”
그 말에 레이븐은 곧장 란타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대체 뭘 시키려는 거지? 그때 블랑슈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기, 제안 드릴 게 있는데요…….”
그렇게 말한 뒤 블랑슈가 작게 속삭였다. 세이블과 베리테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괜찮다면 나도 좋다.”
“나도. 나도 장모님이랑 슈가 괜찮다면 좋아.”
그리고 나 역시 블랑슈의 의견에 동의했다. 곧 블랑슈가 다시 두 사람을 불러왔다.
란타나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블랑슈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란타나,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하겠다고 했죠?”
“……네.”
“그러면 여기 앉아요.”
방금 전, 하인들이 테이블에 의자를 가져다 놓아 빈자리가 있었다. 의자는 두 개였다.
레이븐이 조금 의아한 듯이 의자를 보고 있자, 블랑슈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백부님도요.”
“저 말입니까?”
“네. 백부님도 같이 차 마셔요.”
블랑슈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초대했다. 란타나는 의자에 앉았지만 레이븐은 여전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제가 감히 어떻게 이곳에 앉겠습니까. 저는 제 죄를 압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레이븐이 앉을 기색이 없자, 세이블이 그를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릴리가 용서했기에 당신을 이 자리에 앉게 한 겁니다. 선왕비의 명령을 거역할 셈입니까?”
모난 말임에도 불구하고 레이븐의 얼굴에 불쾌함은 없었다. 그의 얼굴에 드문 당혹이 지나쳐갈 뿐.
여전히 앉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이베르가 레이븐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레이븐 백부님, 란타나. 이베르가 이거 줄게요!”
그렇게 말하며 이베르는 두 사람의 접시에 슈크림을 턱 내려놓았다.
이베르는 해사하게 웃고, 다른 이들도 그가 앉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븐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닫혔다.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울 듯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벅참이 담겨 있었다. 레이븐이 가까스로 자리에 앉자, 더 이상 빈 의자는 없었다.
와, 뭔가 신기한 기분이다. 처음에는 혼자 식사를 했는데, 그 뒤에는 블랑슈와 둘이 앉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세이블이, 베리테가…….
외로웠던 식탁에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되었다. 다들 침묵을 유지하고 있자, 베리테가 란타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나저나 란타나, 너 자꾸 치료 안 받을래? 오래전 상처라서 꾸준히 치료해야 한단 말이야!”
“……어차피 선왕비님이 마법으로 바꿔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계속 장모님한테 부탁하려고?”
그 말에 란타나가 움찔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아비게일과 닮은 얼굴로 주눅이 들어 물었다.
“……부탁하면 안 되나요?”
“괜찮아. 매일 와도 돼.”
“정말? 정말이죠?”
순간, 란타나의 눈동자에 빛이 든 것 같았다. 그동안 늘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눈동자였는데. 란타나는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럼 맨날 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란타나는 웃었다. 환하게 웃는 그 모습이 평범한 아이, 평범한 사람 같았다.
란타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나는 아비게일과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모습은 많이 달랐지만, 그녀도 나도 같은 이유로 죽었으니까. 우리는 영혼의 쌍둥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다. 나는 죽은 뒤에야 행복해졌다. 그러니 아비게일도, 너도 지금 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다.
내 옷장이 행복한 기억으로 가득 찬 것처럼, 너 역시 그런 기억을 갖게 되면 좋겠다.
매일 나를 만나러 오렴. 매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자.
란타나, 너의 기억이 언제나 행복한 색으로 가득할 수 있기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