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03
203화 도서관 1
* * *
“불쾌하네요. 때로는 일방적인 호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는 걸 공작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그렇게 계속 말씀하시니 또 다른 저의가 숨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되잖아요.”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게, 대꾸도 듣지 않고 밀어붙일 요량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상대를 잘못 골랐다.
“공주님. 아니, 델리아. 다 알고 있는 사람끼리 시답잖은 논쟁은 그만 두도록 하지.”
그 말에 깜짝 놀란 델리아가 두 눈을 부릅 떴다. 델리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카인은 슬며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무덤이 될 줄도 모르고 잘도 기어들어 왔군. 레서 왕국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일이 틀어지면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피아란, 아니 델리아는 되묻지 않았다. 지금 카인이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 짐작이 가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근위병! 없나요? 근위병!”
“내가 불한당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니, 그 바람대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지 않나.”
우드득,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압박감에 델리아는 침음을 흘렸다. 동시에 발이 지면에서 떨어졌다.
허공에 떠오른 그녀는 카인의 팔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옥죄는 압박감이 더욱더 심해질 뿐이었다.
실제로 카인은 델리아를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 직접 만져 보니 어렴풋이 알 것 같군. 네 얼굴은 정교하게 제작된 가면인 거지?”
“아, 안 돼.”
“돼.”
콰직.
호두까기 인형이 되어 델리아의 얼굴을 깨부수자 그동안 그녀가 감춰왔던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면 뒤에는 흉물스러운 기계 장치가 가득했다. 피와 살을 대신해 차가운 금속이 맥동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인간과 한없이 닮았지만, 결코 인간은 될 수 없는 존재.
털썩 주저앉은 델리아가 황급히 부서진 가면을 주워 담았지만,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한 번 깨진 유리 조각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이브 또한 정신 차리란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꺄.아.아.악!”
인위적인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놀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인위적인 비명이.
차라리 고성방가가 더 자연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나, 왕궁에 있는 이들을 불러모으기엔 충분했다.
둘, 하고 셋을 세기도 전에 기사들이 난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둘씩 등장인물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마침 회의도 지지부진하게 끝난 참이었다. 아직까지도 왕궁에 남아 있는 이들이 꽤 되었다. 아니, 중요한 이들은 전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건 군부파의 중심인 지니얼이었다. 왕궁, 그것도 피아란의 방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카인에게 대답을 촉구하듯이 고갯짓했다.
“이게 무슨 난리지?”
“글쎄요,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농담하자는 건가?”
“아닙니다. 저도 얼떨떨할 따름이니까요.”
그렇게 말한 카인이 한 걸음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자 그의 등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델리아가 차츰 많은 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본 이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터트렸다. 인간도 괴물도 아닌 제3의 존재가 그 자리에 있었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자태.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엔 기계 부속품이 무미건조한 소리를 내며 돌아갈 뿐이었다.
로스는 경악하고, 발트는 눈을 돌렸다.
맨 앞에 선 지니얼 또한 그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피아란은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이 아닌 존재였으니까.
“이, 이게…….”
“대화 중에 갑자기 넘어지더니 저런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갑자기?”
순간, 꺼림칙한 기운을 느낀 지니얼이 반문했지만 카인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빨리 심문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도 아니고, 하물며 아인종도 아닌 존재가 왕궁에 발을 들인 거 아닙니까. 물론 저는 타국에서 온 입장이니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요.”
장내에 침묵이 흐른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가타부타 논의하는 건 우스운 일이라는 걸.
사실 델리아의 처우는 사람들이 모였을 때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자신을 보는 시선들이 곱지 않다는 걸 느낀 델리아가 황급히 손을 저은 건 그때. 자칫 잘못하면 촌극의 주인공이 되어 끌려가게 생겼으니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설명할 수 있으니까 시간을 주세요, 지니얼 장군. 저는 사실…….”
신의 인형이다. 다시 말해 인간들을 보살피기 위해 내려온 천사다.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피아란이 된 것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용히 떠날 수도 있다. 내가 바라는 건 분란이 아니다, 등등.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변명은 백 가지가 넘었다.
당연하게도 델리아는 자신이 회생할 여지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지니얼은 그녀의 의지를 묵살했다.
“이제 보니 피아란 공주님의 이름을 빌려 들어온 괴물이었군.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듣도록 하지.”
그리고 더러운 걸 보았다는 듯 등을 돌렸다.
“어서 이 괴물을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라.”
“지니얼 장군! 아니, 다니엘 경! 부디 제 말을 들어주세요. 이건 다 사정이 있어요.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제발!”
섞이지 못한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윽고, 혼란은 사그라들었다. 지팡이로 가볍게 바닥을 내리찍은 카인이 사건을 정리하듯이 선언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말하지 않았군요. 그녀의 이름은 델리아라고 합니다. 착각으로라도 피아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 * *
지니얼은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피아란, 아니 델리아의 신원을 보증한 건 그였기에 저절로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군부파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중용파라는 난적이 곁에 있었다. 일이 이렇게 풀리니 그동안 억눌렀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부는 처리하고, 또 남은 일부는 격리해야만 했다.
다행히 대처가 늦지 않아 델리아는 극소수만 알고 있는 치부가 되었다. 대중에 그녀가 드러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 불행중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행운이 따랐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존재하던 피아란의 부재는 어떻게 알려야 하며, 또 레서 왕국에서 파견된 외교 사절단에는 무슨 대답을 내놓아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명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니엘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아버지, 공주님을 저대로 둘 겁니까?”
“말 똑바로 해라, 그녀는 공주님이 아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피아란 세이피르란 이름이 필요했던 거니까요.”
“슈발체베인 공작이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건? 모르는 척해 달라고 간청할 거냐?”
“그게 안 된다면 처형하는 척 시늉만 하는 건 어떨까요? 그런 뒤에, 다시 불러들이는 겁니다.”
시기가 공교롭다 보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될 테지만, 입증할 방법이 없는데 제깟 놈들이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다니엘의 묘안에도 지니얼은 고개를 저었다.
“너도 들었을 텐데, 그녀가 자신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신의 인형 말입니까. 뭐,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에 신기라는 물건까지 나온 시점입니다. 정말 그런 존재가 있다 한들 이상할 건 없다고 봅니다.”
“흐음.”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인 지니얼을 보며 다니엘은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델리아가 누구든지 이용할 가치가 있다 여겼던 것이다.
더욱이 그녀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게 밝혀진 이상 그 가치는 배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를 잡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버리는 게 상책이다. 더 이상 변수가 많아지면 곤란해.”
한꺼번에 많은 일이 터져 동맹 제안도 그 의미가 희석되고 있는 판이었다.
보수적인 지니얼의 입장에 다니엘이 송곳니를 드러냈다.
“정말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그녀 덕분에 우위를 점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고작 몇 달 만에 중용파를 누른 건 고무적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델리아와 함께하면 분명 하샤 왕국을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니엘은 인정할 수 없었다. 이미 그녀의 능력을 견식한 후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그런 식이군요. 정말 제게 왕관을 주고 싶은 건 맞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다니엘?”
“이렇게 설왕설래하다 다음 세대까지 넘어가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대륙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잔존 세력을 수습하지 못한 건 지니얼이 무능한 탓이었다. 그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다 늙은 후에 받는 왕위만큼 부질없는 건 없었다. 다니엘은 적어도 젊었을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다. 그러려면 델리아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 그의 옆에 있어야 하는 건 지니얼이 아니라 델리아였다.
주머니를 만지작거린 다니엘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델리아는 신기로 카인을 조종하길 바랐지만, 그녀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지니얼을 훑어보았다. 한때나마 그는 하샤 왕국에서 제일 용맹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지니얼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탄탄했던 복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수북했던 머리는 마지막 잎새만 간직하고 있었다.
검술 훈련보다 서류 작업에 더 능통해진 중년인.
그게 지니얼의 현주소였다. 전쟁 영웅은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노쇠했다. 그런 그에게 강한 정신력이 있을 리 없었다. 기적에 저항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터.
마음을 다잡은 다니엘이 메피스토를 들었다.
“아버지, 이쪽을 보시죠.”
시선이 마주친 건 한순간.
델리아가 말해 주었던 대로 기기를 조작한 다니엘이 버튼을 눌렀다.
번쩍.
순간 장내에 대낮처럼 환한 빛이 몰아쳤다.
눈이 멀 정도로 강한 광량에 다니엘은 두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조금 따끔거리지만, 참을 만했다.
“이제부터 아버지는 제 말만 들으시면 됩니다. 정상까지 단번에 달려갈 테니까요.”
“알았다.”
내내 부정적인 의견만 내뱉었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튀어나오자 다니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되뇌며 그는 히죽거렸다.
* * *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 줬으면 한다. 착실히 해명할 때까지 시간을 주면 좋겠다. 회의도 빠른 시일 내에 재개하겠다.
모두 입발림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하샤 왕국 측의 입장은 일관되었다.
물론 터무니없는 부탁이니만큼 다른 때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떠났을 테지만, 카인은 느긋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중간에 로스가 우려를 표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지니얼이 이기주의자에 기회주의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델리아를 선택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카인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여기입니까?”
“그래.”
[???]왕궁 안에 위치한 신의 무덤.
시계가 가리키는 곳에는 도서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