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38
238화 일장일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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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이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지만 엘리제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였다. 애당초 마음을 가다듬는데 시간이 필요해 찔러 본 거였으니까.
후, 하고 호흡을 정돈한 엘리제가 아리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리아, 여자아이는 함부로 피부를 드러내는 게 아니야. 특히 공작님 같은 남자 앞에서는.”
“그렇습니까.”
그 말이 맞냐는 듯 아리아가 카인을 힐끔 쳐다보았다. 유구무언이라, 카인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그마한 해프닝이 지나가고, 아리아가 옷을 다 갈아입은 걸 확인한 이브는 주의 사항을 읊조렸다.
“편안하게 누우면 됩니다. 그리고 비상시엔 꼭 제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억지로 나오려고 하면 상황이 많이 복잡해질 테니까요. 그 점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이브의 경고 때문일까.
유선형 캡슐이 열렸지만 아리아는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가녀린 어깨가 잘게 떨리는 걸 본 카인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진정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곁에 있어 줄 테니까.”
별안간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아리아는 긴장을 늦출 수 있었다. 카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으니까.
평온한 일상을 구가할 수 있는 것도, 이렇게 조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도 모두 그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지 않던가.
“감사합니다, 공작님.”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아리아를 보며 카인은 낮게 웃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지 알 것 같았기에.
어쩌면 이게 그녀의 새로운 족쇄가 될지도 몰랐다. 때로는 순수한 호의가 짐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회귀하기 전, 아리아에게 진 빚은 입에 발린 말 몇 마디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그녀가 자비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니까.
달칵.
유선형 캡슐 안에 푸르스름한 용액이 차올랐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아리아가 곤히 잠든 게 보였다.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디스플레이가 떠올랐다.
[동기화 완료.] [뉴런 구조 해석 완료.] [신경계와 접속 중입니다.]이브가 인터페이스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입력되는 명령어에 현황 또한 시시각각 변했다.
무언가 덜컥, 막히는 소리가 난 건 그때.
아리아의 입에서 공기 방울이 보글보글 터져 나오자 카인은 신음과 함께 이브를 쳐다보았다.
그건 엘리제 또한 마찬가지.
“설마 잘못된 건 아니겠죠?”
“괜찮습니다. 모두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되도록’ 중요한 사안만 건드리고 있으니까 안심하시길.”
그 말에 거짓은 없다는 듯 조정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용액이 배출되고, 덮개가 열리기가 무섭게 엘리제는 아리아를 안아들었다. 그녀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할 겁니다. 억지로 깨우는 일은 없도록 하시길.”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엘리제가 황급히 방을 나섰다. 카인도 따라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은 의문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브, 중간에 무슨 오류가 있었지?”
“역시 공작님의 눈은 피해 갈 수 없군요.”
유선형 캡슐을 손가락 끝으로 훑은 이브가 씁쓸하게 웃었다.
“예상하신대로 완벽하게 처리된 건 아닙니다. 엘리제가 보고 있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간 것뿐입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불안한 예감이 들어맞자 카인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자세히 설명해 봐.”
“조직의 족쇄를 풀기 위해선 2급 기업 기관에 해당하는 권한이 필요하다고 예전에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훈련소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보니 1급 기업 기관, 아니 중앙 연맹에 준하는 수준의 승인이 필요하더군요.”
“단말기에 기록된 것과 달랐다는 거야?”
“아무래도 자체적인 프로텍트를 사용한 것 같더군요.”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조직의 주적은 오토마타라는 걸.
그 오랜 세월 동안 안드로이드에게 잡힌 귀신이 한 명도 없었을까? 아니, 결단코 아닐 거다.
하지만 조직은 여전히 수면 밑에서 활동 중이었다. 그 말은 곧 한 번도 오토마타에게 정보를 건네준 적이 없다는 소리.
“우라는 이걸 말하고 싶은 거였나.”
짧게 혀를 찬 카인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브, 네 능력으로 뚫는 건 불가능해?”
“2급 기업 기관의 인가가 필요한 거였다면 제가 어떻게든 답을 구했을 테지만,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안에 있는 걸 활용하는 것과 안에 없는 걸 만들어 내는 건 별개의 이야기이니까요.”
“만능 열쇠도 통하지 않겠지?”
“그럴 겁니다. 전혀 다른 계통이니까요. 차라리 중앙 연맹을 통제하던 시스템이 존재했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공작님이라면 우회해서 접근할 수 있었을 테니.”
돌연 주머니 속에 있던 한 물건이 손에 잡힌다.
광증 유도약이었다.
우라가 제시한 또 하나의 선택지.
가벼운 마음으로 사용하고 싶은 물품은 아닌지라 카인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중앙 연맹이나 기업 기관 같은 개념은 어디에서 나온 거야?”
“일단 배경부터 듣는 게 이해하기 빠를 겁니다.”
“그사이에 기억이 또 돌아온 거야?”
“요 근래, 나노 마테리얼만 다루다 보니 자극을 좀 받은 것 같습니다. 누군가 닦달하는 바람에 1분 1초도 쉬지 않고 치료액만 들여다봐야 했으니까요.”
“알게 모르게 비난하고 있지 않아?”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인 이브는 묻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 화두를 돌렸다.
“그래서 제가 어디까지 말씀드렸었죠?”
“2090년. 인류의 7할 정도가 유전자 조작 기술의 혜택을 받아 신혈을 지니게 되었다고 했지.”
“분열이 빨라지는 지점이군요.”
“분열?”
“네, 분열. 공작님은 불로장생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 잘 모르겠는걸. 뭐, 시간이 부족한 삶은 아닐 테니 그 점 하나는 좋을지도.”
“맞습니다, 넘쳐나는 시간. 그게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무소불위의 힘을 쌓아 올린 권력자들이 죽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있는 자들끼리 더욱 더 끈끈하게 결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대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건 곧 고인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때문에 한번 양극화된 계층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벌어질 뿐이었다.
“정계와 재계의 구분이 희미해진 건 그때쯤입니다.”
수도, 전기, 교통. 심지어 감옥까지 민영화되어 정경유착의 끝을 보여 주었고, 공권력 또한 유명무실해져 형량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문명의 혜택을 받는 기득권층과 그렇지 못한 이들이 극명하게 갈리면서 불화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그게 시대의 흐름이요, 사회 현상이었다. 그 누구도 멈출 수 없었다. 전 세계 부동산의 99퍼센트를 상위 0.1퍼센트의 권력자가 독점한 후였던 것이다.
없는 이들은 땅 위에서 살아 숨쉬는 것조차 있는 자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결국 2121년에 부작용이 봇물처럼 터져나왔죠.”
국가는 개개인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결코 개개인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았다. 오히려 개인을 위한 칼이 되었을 뿐.
“분개한 국민들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일념하에 기어코 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회의 일부를 도려내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웃기게도 그 빈자리를 차지한 건 기업 연합체였습니다.”
2126년, 뜻을 모은 대기업들이 국가가 정상화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다. 전부터 정계와 재계의 구분이 꾸준히 사라지고 있던바, 국가는 기업 연합체가 정한 선에 따라 나뉘어졌다.
그 후, 각 지역마다 뿌리를 내린 기업들은 자기 자신들을 일컬어 기업 기관이라 지칭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각자도생하는 그림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3년 뒤인 2129년, 불로장생한 권력자 중에서도 특출난 이들이 모여 8인 의회라는 조직을 꾸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업 기관을 모아 중앙 연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덕분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기업 기관은 한 깃발 아래에 모이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세계에 새로운 규율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 국민의 뜻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독재 아닌 독재의 시작. 세상은 인류의 것이 아니었다. 있는 자의 것이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설명에 카인은 침음을 흘렸다.
요컨대, 대기업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자본주의에 함몰된 미래.
“예상은 했다만.”
궁금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왜 그렇게 극단적인 미래가 펼쳐진 거야?”
“백성광 박사가 불씨를 지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결코 전해서는 안 되는 문물을 전파했으니까요.”
“인공지능 말이야?”
“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브가 입을 열었다.
“기술의 발전은 체제의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건 역사가 증명합니다. 산업 혁명을 보십시오. 노예보다 더 효율적인 대체재인 기계가 나오자마자 동시기에 성행했던 계급 사회가 몰락했습니다.”
더 이상 노동력이 중요치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걸 알고, 권력자들은 신분을 버렸다. 그리고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노예, 아니 국민의 고혈을 쥐어짰다.
“4차 산업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국민이 있어야 사회가 돌아갔지만, 인공지능이 개발되면서 그 부분이 애매해지기 시작했죠. 안드로이드란 대체재가 제시되었으니까요.”
더구나 압도적인 능력을 지니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진보한 사회에서 머릿수가 의미가 있을까요?”
내일 당장 수만, 수억이 사라진다고 해도 세상은 정상적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소수의 기득권층이 사회적 약자를 고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구태여 제 몫을 나누어 주지 않더라도 자리를 지키는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경쟁자만 늘어나는 꼴이었다.
“극에 달한 물질의 풍요가 인간의 가장 저열한 일면을 들춘 겁니다.”
“과연 백성광 박사는 예견했을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백성광 박사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거라는 겁니다.”
카인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아마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전부 고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전부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지만.
아무튼 조직이 어째서 기를 쓰고 신의 시대가 열리는 걸 막고 있는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헤브니아가 더 나은 면도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하다 보니 길어졌는데, 그래서 결국 아리아는 어떤 상태라는 거야?”
“일단 급한 불은 껐다고 할 있습니다. 정신 제약도 감정 제어도 그대로지만, 조직의 명령에 거부할 수 있도록 조정했으니까요. 다만…….”
“다만?”
“어느 정도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반쪽짜리 구원인가.”
카인은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뜻하지 않은 행운으로 들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조직을 털어서 영업 비밀을 알아내든가, 신의 무덤에서 잭팟을 터트리든가.”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