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270
270화 연락 2
* * *
그때, 시계가 잘게 떨려왔다. 이브라면 직접 왔을 테니,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제로원.’
그토록 기다리던 신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손목을 흔들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그래, 그렇지 않아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으니 성공한 거같군. 어땠지? 루드니아 공작령은.]“예상대로 건질 게 있더군. 내가 원했던 거랑은 달랐지만 말이야.”
[대체 무엇을 발견한 거지?]당연하지만 용의 인자에 대한 건 숨겨야 했다. 제로원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고는 하나, 그의 본질은 안드로이드. 언제 등을 돌릴지 몰랐다. 아니, 그가 원치 않더라도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다.
카인은 제로원의 반응을 살피고자 미끼를 던졌다.
“.”
순간, 잡음이 흘러나온다.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알고 있나 보지? 듣자 하니 모든 신기를 다룰 수 있는 신기라고 하던데 말이야.”
[그런 ‘신기’는 내가 알기로 없다.]“변수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거지 않나. 어떻게 그리 단언할 수 있는 거지?”
[애당초 는 그런 곳에 사용하는 게 아니니까.]“그러면?”
장내에 적막이 흐른다. 한 번 닫힌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일 터. 하지만 카인은 이해해 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말해 줄 수 없는 건가? 이거 서운하군. 루드니아 공작령에 들어가 목적을 이룬 걸로 내 역량은 충분히 입증되었을 텐데?”
[그래, 아마 너라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테지.]“그런데도 왜 입을 열지 않는 거지? 설마 내가 이득만 챙기고 팽할 거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다.]“그렇다면 뭐가 문제인 거지?”
[일단 네가 를 발견하지 않았는데도 내게 거짓말을 고한 게 문제다.]제로원은 주저하지 않고 핵심을 꿰뚫었다. 그에 카인은 혀를 짧게 찼다. 속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이런, 들켰나.”
“네가 시치미 뗄 거라 생각했거든. 지금 이 대화 내용만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정직하게 물어봤다면 너는 모르는 척했겠지.”
[고딘의 추천이 없었다면 너같은 녀석하고는 상종도 하지 않았을 거다.]“칭찬으로 듣지. 그래서 대답은?”
제로원은 반쯤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일찍이 신의 시대에는 네 가지의 난제가 있었다.]카인은 제로원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4대 연구라고 한다지?”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는 그중 하나인 시간 도약과 관련된 신기다.]“시간 도약이라고?”
순간, 카인의 머릿속을 스쳐간 건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이었다.
‘회귀.’
전부터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기적이 만연한 세계라고 해도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건 차원이 전혀 다른 일이었던 것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신화나 전설 중에 그러한 이적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증거였다.
‘지금 이 상황이 만약 과학의 힘으로 이루어진 거라면?’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 보았지만 짚이는 건 없었다. 애당초 카인은 가 무엇인지 모를뿐더러,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마지막은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관련이 없는 모양새. 하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연구는 순조로운 편이었다. 무량대수에 가까운 경우의 수를 연산할 장치 또한 개발이 끝난 상태였으니까.]카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 무엇의 약자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디 타임머신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가까운 의미는―
‘테레사(Teresa).’
최초의 인공지능이자 인류의 마지막 발명품.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그녀는 시간 도약을 위해 개발된 준비물이 틀림없었다. 어쩌면 백성광이 바라본 건 더 먼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인은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왜 4대 연구에 들어갔지? 말만 들으면 성공한 것 같은데 말이야.”
[허블―르메트르 법칙에 의해 팽창되는 우주를 일시에 역재생하려면 그만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과거를 역산할 수 있는 연산 장치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하긴 자동차도 굴러가려면 연료가 있어야 했다.
[영구 기관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했지.]영구 기관이라면 카인도 알고 있는 단어였다.
무한대에 가까운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발전 기관. 흔히 말하는 무한 동력 장치였다.
솔직히 이쯤 되면 카인도 다음에 나올 말을 대강 유추할 수 있었다. 영구 기관은 시간 도약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이론이었으니까.
“설마.”
[그래, 그것 또한 4대 연구 중 하나였다.]“가설은 존재하지만 시도는 할 수 없었다는 건가.”
연산 장치와 발전 기관이 한 세트라니 무리도 아니었다.
“왜 내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군.”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는 대단위 냉각 시스템을 겸비한 대규모 양자 컴퓨터 단지다. 그 크기는 대영지에 필적하지.]그런 걸 발견했다고 했으니 통할 리 없었다.
‘가만.’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카인은 턱을 긁적였다.
알리파 제국의 초대 황제는 알파. 알파의 보구는 카타스트로피. 카타스트로피는 로 가는 열쇠. 그리고 슈발체베인 성에는 특정한 검을 꽂아야 열리는 신의 무덤이 존재했다.
마침 슈발체베인 공작령은 대영지, 제로원이 말하는 조건에 부합했다. 더구나 예전에는 알리파 제국의 국토이기도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공통점이 이어지니 카인도 한번 고려해 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 * *
제로원과 나눈 대화는 여러모로 유익했다.
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뿐더러, 하마터면 무시하고 지나갈 뻔한 카타스트로피를 회수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물론 엔지니어가 보유하고 있어 난관이야 많겠지만, 그렇다고 빈틈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마침 카르비나가 그들에게 실망한 참이지 않던가.
한 번 기회만 잡는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자니,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제 얼굴을 잊은 건 아니죠?”
자주색 머리카락을 곱게 말아 내린 여성의 얼굴엔 당당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바로 판토마 상단의 후계자, 로이나였다.
“고딘 상단주는 어떻지?”
“쾌유하셨어요.”
“그거 다행이군.”
로이나와 안부 인사를 나눈 카인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그녀에게서 색다른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마나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격정적인 무언가.
“성문을 새긴 건가.”
“이제 판토마가를 계승할 수 있는 후손은 저밖에 남지 않으니까요.”
카인이 빤히 쳐다보자 로이나는 옷깃을 여미며 살포시 웃었다.
“그나저나 공작님도 남자셨군요.”
“그게 무슨 말이지?”
“가슴골에 새겼거든요.”
그제야 카인은 자신이 성문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
헛기침을 내뱉으며 눈길을 돌렸으나 그걸 놓칠 로이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거리를 좁혔다.
“한번 보실래요? 다른 사람이라면 안 되지만 공작님이라면 보여 드릴 수 있어요.”
은근히 재촉하는 듯한 속삭임에 카인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고난을 이겨 내서인지 로이나는 한결 성숙해져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그걸 엄한 곳에 활용하는 게 문제지만.
카인이 무어라고 답하려던 찰나, 로이나가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자, 보세요.”
권유하는 듯한 말투에 카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이다음 행동이 떠오른 탓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레 눈꺼풀을 올리니 히죽거리고 있는 로이나가 보였다.
그녀가 품 속에서 꺼낸 건 수표였다. 그것도 꽤나 많은 금액이 적힌.
“은혜는 돈으로 갚는 거라면서요?”
그러고 보니 로이나와 헤어지며 그렇게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걸 건네기 위해 시답잖은 장난을 친 것일 터.
“업보인가.”
카인이 한숨을 푹 쉬자 로이나가 짓궂게 물었다.
“왜 실망스러우신가요? 차라리 돈 말고 다른 걸 드릴까요?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지도?”
여기에서 수긍해 봤자 놀림감만 될 뿐인지라 카인은 로이나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정신 차려라.”
“아파요.”
“그러라고 때리는 거다. 얼른 업무에 복귀나 해라.”
질책을 견디지 못한 로이나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카인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다음 기회는 없으니까 그것만 알아두세요.”
“아쉽군. 한 번만 더 다가오면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저, 정말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카인이 시큰둥하게 반박한 것과 피아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건 거의 동시.
무슨 일이냐는 듯 카인이 고갯짓하자 피아가 대답했다.
“가주님, 아리아가 깨어났어요.”
* * *
아리아는 기나긴 꿈을 꾸었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삶은 항상 무채색이었다. 고아가 되었을 때나 조직에 들어갔을 때나,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언제나 혼자였다.
절망도 슬픔도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했다.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이어갈 뿐인 인생.
평생 그렇게 살다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한 사람과 만나게 되면서 무채색으로 이뤄진 세계에 무지개가 들어찼다.
‘공작님.’
오직 그만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무한한 호의는 양분이 되었다.
덕분에 아리아는 카인을 통해 다른 사람과 이어진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카인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힘이 솟아났다. 그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고두고 보고 싶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내가 공작님을 생각하는 것만큼.’
꽁꽁 감춰 두었던 욕망이 폭발한 순간, 의식이 부상했다.
“아아.”
깨어난 아리아가 처음으로 본 건 카인의 모습이었다. 꿈에서 바랐던 소망이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 기묘한 우연이 그녀에게는 어떠한 계시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는 건 당연지사.
갑자기 아리아가 울자 카인으로선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눈물을 보인다는 건 심상치 않은 징조였던 것이다.
“아리아, 괜찮아?”
“네.”
“다른 건? 이상한 느낌이나 불편한 부위는 없어?”
“네.”
앵무새처럼 답한 아리아는 카인의 손을 뺨에 대고 문질렀다.
아리아가 마주 잡은 손을 놓지 않자 카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어떠한 광증이 발현되었는지 당장에라도 알아보고 싶지만, 이렇게 나오니 매정하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카인은 재촉하길 멈추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아마 죽다 살아나 혼란스러운 걸 테니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일단 아리아…….”
나지막이 읊조린 카인이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자 아리아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더 가까이 붙었다.
“안 됩니다. 안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