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04
104. 흔적 (1)
“후회 없으실 거예요!”
후회할 것 같은데.
펍 안으로 들어서니 이제 막 튀기기 시작했는지 기름진 냄새가 가득했다.
“좀 더 앞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점원에게 부탁하자, 그녀가 흔쾌히 끄덕이며 무대 기준으로 가장 맨 앞자리에 나를 안내해주었다.
메뉴판을 받아 앉으며 만족스레 작은 무대를 훑었다.
무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드럼과 전자 피아노 같은 악기들과 기타, 베이스 앰프.
밴드의 본고장다운 구성이랄까.
방금, 저들이 빼앗은 토마스의 공방 자리를 보고 오는 길이지만, 사실 나한테 저 악기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굉장히 많았다.
이 세상에 없던 사운드를 만들어낸 악기들이잖나.
“여기, 공연도 하는 건가요?”
“그럼요. 곧 시작할 예정이에요. 게다가 손님은 정말 운이 좋네요. 오늘 공연하는 팀 중에 정말 실력 있는 밴드가 있거든요. 인디 씬에서 꽤 유명하답니다.”
“좋네요. 그럼 저 여기 피쉬 앤 칩스랑요, 비프 웰링턴도 하나 주세요.”
“두가지 다 드시게요?”
점원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내가 키는 작지 않지만, 몸은 마른 편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어쨌든, 두 갤 다 먹을 생각이라 그렇다고 끄덕였다. 아직 회귀 전의 키에 도달하려면 2cm 정도 더 자라야 하는, 한창 자라나는 새싹이잖나.
‘이럴 때라도 새싹 해야지.’
임진규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메뉴판을 덮는데, 점원이 갑자기 물어왔다.
“마실 건요?”
마실··· 거?
여기서 마실 거라 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
가장 단순하게 물이 있고. 음료수도 마실 것 중 하나다.
하지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은 전부 알코올 냄새 풀풀 풍기는 것들뿐이었다.
꿀꺽. 회귀 전엔 이 정도로 술을 마시고 싶어 하고 그러진 않았는데, 자유롭게 못 마신 시간이 벌써 8년째가 되니 자연스레 군침이 돈다.
그리고 여긴 영국.
만 18세면 술을 마시는데 전혀 문제없는 나이였다.
“기, 기네스 한 잔 주세요.”
“멋진 선택이네요.”
자부심 있게 답하며 여권을 확인한 점원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메뉴판에 꽂혀있던 시선을 거두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엔 해가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얼른 선글라스를 벗었다. 마침 고딕 양식의 건축물까지 건너편에 있어 거리 풍경에 입이 벌어진다.
‘저 노을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어 보이네.’
대로변에 위치한 펍이 아닌데도 현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조금씩 복작거리는 소리들 속에서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연필도.
촤라락 펼쳤다가 앞으로, 더 앞으로 휙휙 넘긴다.
[토마스 브로드우드(Thomas Broadwood)]그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에서 멈췄다. 그리고 밑에 남은 공간으로 연필을 가져갔다.
여기 어디에도 그대의 흔적은 없었다고.
하늘만 같은 색을 띨 뿐이라고.
사각사각 적어 내려가는 문장이 독문이기 때문일까. 자연스레 귀족적인 문체가 흘러나온다.
그때.
턱—.
눈앞에 큰 잔이 나타났다. 검은 액체가 거칠게 찰랑거린다.
“맛있게 드세요. 저희 가게 맥주는 런던에서도 최고랍니다.”
빙긋 웃으며 들이켜본다. 시원 씁쓸한 흑맥주가 목구멍에 콸콸콸 쏟아진다. 시원함에 머리가 띵해져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냉기가 가시길 기다렸다.
‘저 말은 진짜였네. 어쩌면 200년이란 시간 동안 음식도 맛있어졌을지도?’
그런 희망을 품으며 핸드폰으로 지도를 훑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하지 않나.
토마스를 추억하기에, 그리고 그가 만들었던 피아노를 쳐보기에 적합한 곳을 하나 더 알고 있었다.
바로, 브로드우드 앤드 선즈(Broadwood & sons).
이름으로 알 수 있다시피 토마스 브로드우드와 연관이 있는 피아노 제작 회사다.
그의 아버지인 존 브로드우드가 만든 회사.
물론 본사는 스트로드란 곳에 있고, 여긴 그냥 피아노 판매점일 뿐이지만 꽤 규모가 커서 온갖 브로드우드 사의 피아노를 쳐보기에 제격이라고 하더라.
위치를 핸드폰에 입력하고 호텔과의 거리를 체크 하는 사이, 어느새 테이블에 음식이 깔렸다.
그리고 한 입 머금는 순간.
“······이 흑맥주에만 진심인 나라.”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간이 좀 섬섬하달까. 기름지긴 또 엄청 기름지다. 그래도 그럭저럭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 허기는 충분히 달랬다.
그 사이, 펍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도 간단한 안주에 술 한잔을 곁들이며 공연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배가 차서인지, 영국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맥주 한 모금의 알코올이 아직 이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몸에 쫙 퍼진 건지.
살짝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이윽고, DJ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요즘 클럽씬에서 핫한 밴드를 모셔왔습니다! 허빈클루—!”
세 명의 남자들이 무대에 올라선다.
뒤이어 귀가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사운드가 공연 내내 울려 퍼졌다.
실력 있는 팀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마저도 거짓말이었나.
높은 음압으로 뭉갠 사운드는 실력과 음색을 덮어버렸다.
······30분 정도 이어진 공연을 모두 보고, 입맛을 다셨다. 귀가 좀 피곤하다. 슬슬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자작하게 남은 흑맥주를 털어 넣는데, 다음 연주자가 무대로 올라섰다.
푹 눌러쓴 모자 아래로 금빛 머리칼이 흩날린다. 그녀는 기타를 하나 손에 들고 있었다.
정확히는 넥(Neck)이 넙데데한 클래식 기타.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분명 점원은 ‘실력 있는 밴드’라고 했지만, 그러니 저 여자를 말한 건 아닐 테지만···.
악기만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곡에 ‘역시!’라고 쾌재를 불렀다.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반가운 이의 곡이 펍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밤과 꿈(Nacht und Traume)’.
본래 가사가 있는 곡이지만, 연주자는 기타만으로 편곡된 버전을 연주했다.
그리고 그게 퍽 어울렸다.
‘당연한 건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슈베르트가 기타를 다뤘었으니까.
사실 그냥 기타를 그냥 다룬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곡을 기타로 만들 정도였지.
상상이 가는가. 악기의 왕이라 불렸던 피아노가 아니라 저 기타로 그 위대한 가곡들을 완성했다는 게!
‘···그나저나, 정말 잘 치는걸?’
갑작스레 정적여진 분위기에 의아해하던 관객들도 점차 그녀의 연주에 빠져든다.
곡 하나가 끝나는 순간, 나는 곧바로 환호를 보냈다. 이어서 넋 놓고 감탄하고 있던 다른 이들도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뭐야, 우리가 기껏 띄워놓았더니 완전 분위기 망치는구만.”
이전 무대에 섰던 저 밴드같이.
속으로 해야 할 얘길 내뱉는 사람들이 어디나 있는 법이지. 연주자의 곡이 이어질 때마다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퍽 불편했지만, 또 연주가 워낙 훌륭해 쓸데없는 소린 금세 잊고 감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차례가 끝나고 연주자가 내려왔다.
그녀는 여전히 분위기 어쩌고 거리는 밴드를 가볍게 무시하고, 목적을 다 이룬 사람처럼 펍 밖으로 나갔다.
한마디 건네고 싶었던 나는 얼른 계산하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연주자님!”
“···?”
“연주 정말 좋았습니다.”
돌아서서 물끄러미 날 보는 연주자. 눈은 모자챙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어도 거리가 어두워 마찬가지였겠지만.
유일하게 보이던 그녀의 입이 천천히 말려 올라간다.
“고마워요. 연주 내내 가장 열렬하게 환호해주시더라고요.”
“그럴만한 연주였으니까요. 오랜만에 실연으로 슈베르트의 곡들을 들어서 기쁘네요.”
다시 한번 진하게 웃은 연주자가 고갤 살짝 숙인 후 돌아선다.
나도 잠깐 그녀 등에 매달린 기타를 바라보다가 호텔이 있는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
“왔어?”
에밀리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기타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소파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이 한창이던 단발머리 멤버가 손을 휘적였다.
짧게 끄덕인 그녀가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금발 머리칼도 휙— 던졌다.
비로소 붉은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공연은 어땠어?”
“···거지 같았지.”
“그렇다니까. 시끌시끌하고 신나는 곡을 들으러 간 관객들한테 클래식 기타로 클래식 곡을 연주한다?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하품부터 할걸?”
“괜찮을뻔했어. 중간에 웬 밴드가 비아냥거려서 분위길 흐리지만 않았어도.”
입술을 비튼 에밀리의 생각이 잠시 다른 곳으로 튀었다.
“그래도 한 명은 끝까지 제대로 들어주더라.”
하지만 이미 단발머리 멤버는 몸을 일으켜 전투태세였다.
“밴드? 어떤 밴드? 우리보다 유명해?”
“그럴 리가. 그냥 듣도 보도 못한 인디 밴드야.”
“참 내. 난 또 비틀즈라도 왔는 줄 알았네. 아니지? 존 레논도 우리 에밀리를 무시할 자격은 없다고!”
“그런 말조심해. 여기 사람들한텐 성역이니까. 혹시라도 공연 때 말실수 했다간 영국사람들한테 죽을지도 몰라.”
“설마~. 신사분들이 그러실까.”
에밀리가 붉은 머리칼을 절레절레 흔들자. 단발머리 멤버가 다시 눈을 좁혔다.
“그래서. 내일도 갈 거야?”
“응. 근데, 다른 펍이야.”
“거긴 같이 가줄까?”
“가면?”
“오늘처럼 비아냥대는 놈들 있으면 확—.”
“확?”
“얼굴 까는 거지. 우리 얼굴 보면 기겁할걸?”
“그래. 그리고 기사 뜨고 난리 나겠지. 난 앞으로 이렇게 몰래 공연할 수 없게 될 거고. 웬디 제발, 내 낙을 망치지 말아줄래?”
그때 호텔 화장실에서 또 다른 멤버가 수건으로 머릴 말리며 나타났다.
“왔어?”
끄덕이자 툭툭 물기를 털며 묻는다.
“내일 오전에 뭐해?”
“갑자기 왜?”
“나 오랜만에 피아노 구경 하려고.”
그러자 단발머리 멤버가 갸웃거렸다.
“갑자기? 어떤 피아노?”
“업라이트나 그랜드 같은 어쿠스틱.”
“그런 거라면 스타인웨이에서 지원해주잖아?”
“그렇긴 한데, 여기 온 김에 다른 브랜드 꺼도 쳐보고 싶어서. 검색해보니 근처에 괜찮은 매장이 있더라고.”
“음~그래.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 됐다. 난 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는 단발머리 멤버.
멤버의 시선이 에밀리에게로 향했고, 그녀도 별생각 없이 주억였다.
“뭐, 안 될 거 없지. 근데, 변장은 좀 제대로 해야겠다.”
#
거리가 어둑해져서야 호텔 방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걸어왔던 길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몰랐는데, 거리가 꽤 예뻤네.
그 사실이 내가 오늘 느낀 감정과 유사했다.
좀 더 지켜볼걸.
간판도 유심히 보고, 건너편엔 뭐가 있는지, 토마스는 누구에게 줄 피아노를 만들고 있었는지, 어디서 쉬는 걸 좋아하고 어디에서 출근하는지.
좀 더 물어볼걸.
“그러면 추억할 게 더 많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 동안 런던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음악이 빠질 순 없었다.
오늘 들었던 슈베르트의 밤과 빛을 틀어놓았다. 하지만 아까 펍에서의 연주보다 나은 버전을 찾기 힘들었다.
‘다음 악기는 역시, 기타가 좋겠지.’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도, 새로운 음색을 다루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그리고 기타 곡 작곡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창문을 닫고 곧장 오선지를 꺼내 들었다.
앞서 말했듯 아직 기타는 못 친다. 아예 다룰 줄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기타 연주곡을 작곡하기엔 문제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