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1
011. 뜻밖의 문제 (2)
윤짜르트의 제작사 M&ACT.
새빨간 안경을 소매로 뻑뻑 닦아대던 박동진 감독이 사뭇 깨끗해진 안경으로 스케줄 표를 응시했다.
하아······.
피곤에 절은 눈이 당장에라도 눈물 한 방울 흘릴 것처럼 촉촉해진다.
영화 촬영은 이제 시작이지만, 몸 상태는 막바지라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지쳐있다.
“이번 영화는 유독 힘드네.”
책상에 있던 커피잔을 홀짝이며 그가 낮게 하소연했다.
그러자 1인용 소파에 앉아 다릴 떨던 중년 남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너 전작 찍을 때도 그 소리 했어.”
“······그랬어요?”
박동진 감독의 물음에 끄덕이며 테이블에 올려진 박하사탕 하나를 입에 쏙 넣는 중년 남자. M&ACT 김관우 대표였다.
“그러게 음악 감독 따로 두라니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총감독이 그거까지 하고 있어? 유독 음악 영화만 하면 감정 이입해선 주체를 못 하네.”
“제가 한이 맺혀서 그런가 보죠.”
“영화감독으로 나름 히트작도 있고 이름도 날린 놈이 언제까지 음악에 한이 맺혀있을래?”
“그런 놈이 만든 음악 영화라 지금까지 잘 된 거 아니겠어요?”
그들의 말마따나 박동진 감독은 원래 음악 전공이었다.
재능의 벽에 가로막혀 음악 감독으로 전향했다가 결국 영화감독까지 된 케이스.
그런 탓에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에 집착했다. 이미 업계에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김관우 대표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동진 감독은 벽에 붙은 콘티를 보며 옅게 웃었다. 흡족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래도 역시 고치길 잘했어요.”
“뭐를? 아, 음악 선생이 주인공 재능 알아보는 장면?”
박동진 감독이 끄덕였다.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음악 선생한테 딱 걸리는 씬. 진부다면 진부할 이 장면에서 박동진 감독은 구태여 신선해 보이려 노력하지 않았다.
대신, 더욱 디테일에 파고들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예정되어 있던 연주곡을 바꿨다. 흔한 장면이지만 흔하지 않도록.
“아무리 생각해도 쇼팽의 겨울바람은 개연성이 없잖아요. 개연성이. 클래식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은 애가 갑자기 그걸 친다는 게 말이 되나.”
“관객들은 몰라. 그게 겨울바람인지 여름 바람인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뭔가 약해요. 천재성이 팍 보여져야 하는데, 좀 부족하달까.”
“왜, 그 곡 화려하니 좋던데?”
“속주는 클라이맥스에서도 많이 나올 거잖아요. 이 부분에선 좀 더 느낌을 살리는 곡을 보여줬으면 하는 거죠. 음악 선생의 심금을 울릴 수 있게.”
결국, 김관우 대표가 학을 뗐다.
“속주가 두 번이면 어떻고 세 번이면 어때? 에휴, 그래 맘대로 해라. 이미 곡도 의뢰해놨다며.”
그러면서 박하사탕을 아그작 씹은 그가 투덜거린다.
“난 분명 상업 영화 좀 해보겠다고 회사를 차렸는데, 어째 자꾸 예술 영화를 만드는 기분이지?”
쟬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쟬······.
중얼거리는 김관우 대표를 보며 피식 웃은 박동진 감독이 다시 콘티로 시선을 던졌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은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천재성을 확실히 각인시켜야 하는 장면이다.
그러기 위해선 연출도 중요하지만 음악이 속된 말로 쩔어야 하지.
“이제 곡만 잘 뽑히면 딱이겠는데.”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음산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작년에 개봉한 공포영화 OST이자 박동진 감독의 벨소리였다.
그 영화를 시사회에서 벌벌 떨며 강제로 봤었던 김관우 대표가 PTSD라도 온 얼굴로 성을 냈다.
“야, 너 그거 바꾸랬지?!”
“왜요 노래 좋더만. 이것 때문에 사운드필름한테 맡긴 건데. 그리고 형님, 여기 제 방이에요.”
“에라이!”
투덜거리면서도 나갈 생각 않고 애꿎은 시나리오 더미만 뒤적인다. 대표실은 일하는 곳이라 마음이 안 편하다나.
박동진 감독이 작게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사운드필름 한기준 대표.
발신인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돌연 심각해졌다. 그도 그럴 게, 곡을 의뢰한 게 불과 엊그제다. 벌써 곡을 뽑았을 린 없을 텐데 이렇게 연락이 왔다는 건······.
무슨 문제가 생겼나?
“여보세요?”
-네, 감독님. 사운드필름 한기준입니다.
다행히 목소리는 평온하다.
내심 안도한 박동진 감독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 네, 한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안 그래도 따로 연락 드리려고 했는데. 근데··· 혹시 무슨 문제 있나요?”
-아,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요청하셨던 피아노곡이 완성되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벌써요?”
-네.
박동진 감독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사람이 참 간사하지.
스케줄에 쫓길 땐, 뭐든 어서 보내줬으면 싶다가도 막상 이렇게 빨리 오면 ‘대충 만든 거 아냐?’ 하는 마음이 앞서니 말이다.
이거 되게 중요한 장면인데······.
-녹음파일 보내드릴 테니 한 번 확인해보시겠어요?
“그럴게요. 그러면 확인해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 네, 수고하세요.”
전화를 마무리한 박동진 감독에게 김관우 대표가 물었다.
“벌써 완성했대?”
“그렇다네요.”
“잘됐네. 학교 세트장도 곧 완성되니까······.”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를 보며 끄덕이던 박동진 감독이 못내 찝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곧장 이메일을 열고, 한기준 대표가 보내온 녹음파일을 띄웠다.
헤드셋을 뒤집어쓴 그가 재생 버튼을 누르고선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팔짱을 끼고 잡음 뒤에 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집중한다.
머릿속에 수십 수백 번 고쳤던 콘티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 위로 지금 듣는 피아노곡을 입혀보았다.
그래, 그렇지.
맞아. 그리고 여기선······.
한참을 중얼거리던 박동진 감독.
마침내 파형이 멎은 순간, 그의 등이 의자에서 툭 떨어졌다.
“이거지!”
“으엌!”
갑작스러운 외침에 깜짝 놀란 김관우 대표가 박하사탕을 꿀떡 삼키고 캑캑댔다.
환희에 찬 박동진 감독을 보며 그가 소리쳤다.
“놀랐잖냐,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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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확인해보고 연락주겠다더니 10분 만에 다시 전화가 왔다고?”
“사실 10분도 안 걸렸던 것 같아. 한 5분?”
아버지가 밥에 된장찌개를 슥슥 비비며 으쓱였다. 그러자 엄마의 눈이 커진다.
“그 정도면 노랠 듣자마자 연락한 거 아냐?”
“그렇다고 봐야지.”
스윽 올라가는 아버지의 입꼬리.
이내 부모님 두 분 다 방긋 웃었다.
“엄청 마음에 들었나 보다.”
“박동진 감독이 음악 쪽 전공이라 듣는 귀가 있거든. 바로 이 곡 진행하자면서 뜬금없이 고맙다고까지 하더라고.”
“근데 곡이 진짜 좋긴 해.”
“당신도 들었어?”
“그럼~. 난 여기 식탁에 앉아서 라이브로 들었지.”
그렇지? 하고 날 보는 엄마에게 빙그레 웃었다.
흐뭇하다. 내가 칭찬받아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웃음에서 피어오른 뿌듯함이 나에게까지 느껴져서. 그게 식탁에 온기를 더하는 것 같았다.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떴다.
진하고 칼칼하니 이거 아무래도······.
밥도둑이다.
아버지를 따라 밥에 비비며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녹음해요?”
“그래야지. 영화에 들어갈 사운드는 현장에서 바로 녹음 뜰 생각인 것 같은데, 그래도 녹음은 해야 해. 대역이 연습하려면 제대로 녹음된 음원이랑 악보가 필요하니까······.”
말끝을 늘린 아버지가 핸드폰을 들어 일정을 확인한다.
“내일과 모렌 녹음 일정이 꽉 차 있어서 안 되겠고. 주말엔 어때? 토요일.”
“음, 그때가 스케줄이~.”
나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텅 빈 캘린더. 피식 웃는 아버지를 보며 나도 씩 웃었다.
“되네요.”
“난 또 매일 작업실만 오던 네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생긴 줄 알고 기특할 뻔했네. 주말엔 친구도 좀 만나고 그래라.”
하하. 졸지에 친구 없는 애가 됐네.
장난스러운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진짜 얘가 친구가 없나? 하는.
덕분에 이호익, 양한길을 비롯한 친구들을 팔아가며 변명을 해댔다.
그렇게 엄마를 안심시키고 나니 어느새 밥그릇을 비운 아버지가 배를 두드리며 말한다.
“그럼 토요일로 확정인 거다? 작곡가님을 위해서 녹음 세팅 깔끔하게 해놔야겠구만.”
“네. 며칠 안 남았으니 연습 바짝 해야겠네요.”
의욕을 불태우며 밥그릇을 비웠다. 배가 터질 것 같다.
일어나기 전, 남은 물을 입안에 털어 넣는데 아버지가 다시 나를 불렀다.
“아, 서호야. 바이올린 레슨은 전에 얘기했던 대로 준서가 해주기로 했어.”
맞다. 바이올린.
작곡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렇다고 밀린 숙제가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골치 아픈 건 아니다. 오히려 작년에 입었던 옷에서 만원짜릴 발견한 것처럼 반갑다.
해야 할 일이 늘었는데 이렇게 기쁠 일인가? 기대되네···.
“내가 걔한테 네 연락처 줬거든? 오늘 중으로 연락하겠다고 했으니 아마 곧 연락 올 거야.”
재차 감사하단 말을 하고선 방으로 들어왔다. 곧장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배도 부르겠다, 노곤노곤 눈꺼풀이 무겁다.
편곡할 땐 몰랐는데, 깊게 집중을 해서 그런가. 체력 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 봤자 30분 걸리지 않았냐고 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나한텐 정말 3시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단 말이지.
눈을 감는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상태로 작게 읊조렸다.
“성공했다.”
아버지와 직원들, 그리고 박동진 감독이라는 클라이언트의 마음까지 잡았지.
내 첫 곡이, 영화에 실리게 된 거다.
이건 피아노를 처음 배웠을 때나, 첫 녹음을 마쳤을 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떨림이었다.
지금도 이러는데, 영화관에서 내 곡을 들으면?
좋아 미칠지도. 엔딩 크레딧에도 나온다는데, 애들 데리고 가서 놀래켜볼까?
‘그나저나···.’
상상만으로 흐뭇해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난리다.
무슨 톡이 이렇게 많이 쌓였어?
이호익과 양한길을 비롯한 같이 어울리는 친구들이 있는 톡 방. 빨간 뱃지가 167······ 168, 169. 계속 올라간다.
들어가 보니 대화가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게 또 재밌어서 졸린 눈으로 킥킥대며 대화를 주고받는데, 새로운 톡이 들어왔다.
[강준서:잘 지냈니? 나 준서 형이야.] [나:네, 형. 안녕핫ㅇㄹ······]타자를 치는 중에 대뜸 전화가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근데 왠지 알 것 같지.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서호~. 준서 형이야.
특유의 유쾌한 말투에 웃음 지었다.
그럴 것 같았다. 강준서답달까. 왜 그런 사람 있잖나. 톡은 답답해하고 전화가 편하다고 말하는······ 인싸 중의 인싸.
-내가 뭐 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지? 여자친구랑 데이트하고 있다거나.
“여자친구 없는데요.”
-합격! 넌 오늘부로 내 제자다.
······면접이었나?
어쨌든, 스승이 생겼다.
윤 교수 이후로 두 번째 스승님이시다.
‘교수님이 아시면 상당히 기분 나빠하시겠는데?’
자존심 상해하시는 모습이 뻔히 그려져 소리 없이 키득거리는데, 강준서가 말을 이어갔다.
-대표님께 작, 편곡에 도움이 될 목적으로 배운다고 들었는데.
“네, 맞아요.”
-저번에 보니 음감이 엄청 좋은 것 같더라. 아마 바이올린도 쉽게 배울 거야.
“열심히 할게요.”
-그래, 나도 열심히 가르쳐 보마. 잘 부탁해.
잠시 사제 간의 훈훈한 대화가 오가고.
곧바로 텐션을 올린 강준서와 농담만 주고받다가 첫 수업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바이올린······.
“재밌겠다.”
중얼거리며 대자로 누웠다.
천장을 보며 그게 악보인 양 음표를 떠올린다. 그렇게 나름의 바이올린 악보를 그리는데, 핸드폰이 다시 드륵거렸다. 친구들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단톡방?”
이 새로운 방에 날 초대한 사람은 강준서.
함께 들어와 있는 나머지 이름들이 익숙하다. 첫 녹음을 함께 했던 대학생 연주자들이다.
[강준서: 서호야. 여기 녹음날 같이 연주했던 멤버들. 기억하지?]잠시 끔뻑거리다 답장했다.
[나: 당연하죠. 근데, 제가 여기 들어와도 돼요?] [강준서: 너도 그날 우리 멤버였는데 당연하지.]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톡들이 주르륵 올라온다.
[이소현: 어, 서호네?] [김영태: 서호 안녕!] [나: 안녕하세요.] [강준서: 수아야 네 후배 왔어.] [강준서: 수아야~.] [이소현: 수아 톡 확인 느린 거 알잖아.] [김영태: 엄청 느리지. 아마 알람도 꺼져있을걸?] [강준서: 하긴.]연주자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주억거렸다.
신수아. 하루밖에 못 봤지만, 왠지 그런 스타일 같았다. 남 일에 관심 없는 스타일.
외려 단톡방을 나가지 않은 게 의외랄까.
그때, 톡 하나가 띡 하고 올라온다.
[신수아: 어. 안녕.]신수아였다.
[나: 안녕하세요.] [강준서: 뭐야, 오늘은 빠른데?] [신수아: 뭐래.]등장과 동시에 투닥거릴 예정인 듯한 두 사람을 보며 내가 물었다.
[나: 근데 이 방은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거예요?] [강준서: 용도? 음. 연주가 끝나면 서로 자잘한 피드백을 한다거나······.] [신수아: 그냥 밥 먹고 N분의 1하는데 써.] [강준서: 야잇, 제자 앞에서 프로페셔널한 모습 좀 보여줄랬더니 신수아 때문에 망했네······.]음성지원이 되는 것 같은 강준서의 톡에 피식 웃었다.
애초에 첫인상부터 글러 먹었다며 비웃는 연주자들.
주르륵 올라가는 톡방을 지켜보다가 핸드폰을 툭 내려놓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제 자야지. 졸려 죽겠네.
그때 잠잠해졌던 화면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
며칠 뒤.
회사 휴게실로 다가가자 봉지 과자를 탈탈탈 털어 넣던 강준서가 손을 휘적거렸다.
“여어~. 학교 잘 다녀왔어?”
“네. 일찍 오셨네요?”
“집에 있기 심심해서 미리 왔어. 주말엔 내가 좀 한가하거든.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준서 형 일 좀 더 주라고 슥 말씀드려. 슥이 중요하다? 뭔 말인지 알지? 스윽~.”
저렇게 자연스러운 청탁이라니.
“알겠어요.”
“역시 내 애제자.”
레슨 한 번 안 했는데 애제자가 됐다.
곧 수제자가 될지도.
“그럼 첫 레슨 시작해 볼까? 작업실이 어디라고?”
우리는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회사에 구비되어있던 4/4 크기의 바이올린과 나무 활, 그리고 에바 피라찌 현.
강준서가 내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슥 훑어보더니 엄지를 치켜든다. 꽤 고가의 바이올린이란다.
내 눈에도 썩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하다.
브리너가 봤던 올드 바이올린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연습용으론 나쁘지 않을 것 같지.
“먼저 활 잡는 방법부터 해보자.”
수업이 시작되었다.
강준서는 능숙한 과외 선생님 포스를 풍기며 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활을 천천히 말아쥔다.
나도 따라서 활을 들었다.
“여기가 은사라고 하거든. 여기를 두 번째 손가락으로··· 어, 맞았어. 그리고 세 번째 손가락을 엄지랑··· 어어, 맞아. 너 활 잡아본 적 있어?”
“아뇨, 처음이에요.”
물론 숱하게 보긴 했다. 그래서인지 꽤나 자연스럽다. 몇 번 잡아본 것처럼.
“그래? 한 번에 잘 쥐네.”
잠시 눈을 깜빡거린 강준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한 번 소릴 내볼까?”
강준서가 앞에서 보여주는 대로, 활을 현에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내리그어본다.
지이이잉-.
끼기기긱-.
구슬픈 소리가 울리는 강준서의 바이올린과는 다르게 나에겐 귀를 따갑게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이 소리마저도 내겐 좋게 들려서. 아니, 내가 이 소릴 냈다는 게 새삼스러워서.
그런데 강준서는 내가 부끄러워 웃은 거라 오해했는지 괜찮다며 위로한다.
“바이올린 처음 해보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게 소리 내는 거야. 보통 처음엔 모두 멱따는 소리만 나거든. 들어줄 만한 소릴 내는 데도 꽤 걸리고 좋은 소릴 내는 덴 그 몇 배가 걸려. 그러니 부단히 연습해야겠지? 한 번 더 해보자. 우선은 네가 어떤 소릴 내고 싶은지만 상상하면서 보잉해 봐. 그 외의 건 내가 보면서 교정해줄 테니.”
“넵.”
짧게 대답하며 활을 다시 올렸다.
“······.”
“부담가질 필요 없어. 소리 안 난다고 잡아가는 사람 없으니까.”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단지, 어떤 소리를 상상해볼지. 그게 고민이었다.
순간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이 머릿속에 쭉 스쳤다.
그중엔 볼프강도 있었고, 루드비히 선생도 있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지만, 그냥 넘겼다.
내가 내고 싶었던 소리는 따로 있으니까.
‘될까?’
근본적인 물음이 뒤따른다.
바이올린의 소릴 내는 것조차 강준서는 쉽지 않다 말하는데, 난 무려 ‘그’와 같은 소릴 내고 싶어 한다는 게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잖아.
하지만···
‘꼭 해보고 싶었단 말이지.’
언젠가 기적이 일어나 바이올린을 켜볼 수 있다면, 반드시 내보고 싶었던 소리다.
그저 한 음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쫙 끼치던.
수백, 수천의 좌중을 실신 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음색.
어떻게 했더라.
내가 보았던 ‘그’의 자세를 떠올린다. 그리고 듣는 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되뇌며 활을 현 위에 올렸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나?
지이이잉-.
서늘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
‘백작님,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회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