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68
168. 한서호가 몇 명인데? (3)
-그쪽 공항에도 취재진 많지 않았어?
아버지의 물음에 캐리어를 끌며 웃었다.
나 스스로 이런 소릴 하는 게 민망하지만 정말 많았지. 바덴바덴에서 초연하기 위해 베를린 공항에 도착했을 때보다도 더.
“좀 있었어요. 한국인 기자분들도 많았고요.”
-그랬을 것 같더라. 네가 더 많은 연주자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한 기사는 봤어.
“조금 후회했어요. 주제넘었나 싶어서.”
-아냐. 주제에 딱 맞았다. 그 기사를 캡쳐해 올린 참가자도 있던걸. 고맙다고. 네가 콩쿠르에 참여하면 경쟁 심리 때문에 별로 안 좋게 보는 시선이 많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자랑스럽대. 너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서.
누가 그랬는지 이따가 한 번 확인해봐야겠다. 그리고 답신을 보내야지. 나도 고맙다고.
“더 열심히 임해야겠어요.”
결연한 목소리로 답하자 피식 웃는 아버지.
-지금 네 얘길 들으면 그렇게 말한 걸 후회하겠는데?
낮은 웃음 뒤로 아버지가 화제를 돌려 물었다.
-호텔은?
“지금 도착했어요. 체크인하려고요.”
-짐 풀고 푹 쉬어. 며칠 남았다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네엡.”
경쾌하게 대답하고서 통화를 마쳤다.
호텔 프런트로 다가가자 와인색 복장의 여직원이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반긴다.
“어서오세요. 소피텔 빅토리아 호텔입니다. 체크인하시나요?”
“네.”
“성함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한서호요.”
“네, 한서호 고객님. 여권 확인 부탁드리겠습니다.”
품에서 여권을 꺼내어 건네자, 여직원이 바빠졌다.
“확인되셨어요. 간단한 안내 드릴게요.”
호텔 투숙에 대한 안내가 이어졌다.
조식부터 피트니스 이용 등에 대한 안내가 끝나갈 무렵, 웬 남자가 근처에 섰다.
그리고 여직원의 안내가 딱 끝나자마자 그가 두 걸음 더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한서호님. 저희 호텔 측에서 고객님의 편의를 위해서 객실을 업그레이드 해드렸습니다.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저 일반 객실을 예약했을 뿐인데, 직원이 나서서 객실까지 안내한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뭐 그렇다고 하니 졸졸졸 따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도착한 곳은 가장 높은 층.
밖에서 봤을 땐, 건물이 길쭉해서 높이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막상 올라서자 바르샤바의 전경이 꽤나 잘 보이는 것 같다.
“이쪽으로.”
“아. 네.”
창문에서 시선을 떼고 복잡한 무늬의 카펫을 밟으며 복도 끝으로 향했다. 예약할 때 슬쩍 봤는데, 여기 비싸던데······.
심지어 가장 끝방.
“편히 쉬십시오.”
카드키를 건넨 남자 직원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순식간에 멀어진다.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문을 열자 화려한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자연스레 감탄사가 나왔다.
‘진짜 좋은 방 줬네······.’
결코 작지 않은 미니바를 지나치자 나오는 넓은 거실.
너무 좋은 방으로 업그레이드가 된 것 같아 어리둥절한데, 심지어 호텔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물건들까지 심심치 않게 보였다.
내 명치까지 오는 하이엔드 스피커······가 대체 왜 여기 있는 건데? 지난번 윤 교수 방에서 보았던 브랜드다. 그 외제차 하나 가격.
게다가 더 놀라운 건 거실 한쪽에 그랜드 피아노가 떡하니 있다는 것. 심지어 내가 공연 때 쓰는 것과 같은 종류였다.
······분명 사진으로 봤을 땐, 이런 방이 아니었는데?
백한길 회장이 먼저 떠올랐다. 가장 의심할만한 인물이긴 하지. 세계 어느 호텔에도 이런 요청을 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럴까 봐 일부러 내가 어느 호텔을 가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대기업 회장은 마음만 먹으면 다 알아내는 건가?
여긴 돈도 돈이지만, 혼자 쓰기엔 너무 크잖아.
‘지금 한국 시간이······.’
백한길 회장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싶어 소파에 앉았는데 테이블에 올려진 초콜릿과 편지가 나를 반겼다.
[한서호님, 저희 소피텔 빅토리아 호텔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주자님의 편의를 위해 저희 호텔 측에서 자체적으로 맞춤 서비스를 준비해봤으니 편하게 쉬시며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총지배인, 엘이누아 비엔-]아, 백한길 회장이 아니라, 호텔이 나인 줄 알고 준비한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피아노 앞. 내심 잘됐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주최 측에서 정한 곡 중 뭘 연주할지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고민 좀 해봐야겠지.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피아노 위치도 계산해서 뒀나 싶을 정도로 멋진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한 내부만큼이나 감탄스러운 전경.
전부 평지인 데다가 높은 건물도 얼마 없고, 방도 끝방인 덕에 바르샤바가 한눈에 펼쳐진다.
“······정말 멋지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덴바덴과 그리 먼 위치는 아니지만, 전생엔 이곳에 와볼 기회가 없었다. 폴란드 자체가 조금 뒤숭숭했던 나라이기 때문.
프랑스가 성공한 혁명의 표상이었다면,
이곳은 실패한 혁명들의 무덤이었다.
“······.”
아버진 얼른 쉬라고 했지만서도···.
아직 밤이 얕다.
어쩔 수 없잖아?
작은 가방만 챙겨 곧장 호텔을 나섰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건물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
···세상이 정말 편해진 것은 여기가 한 번도 발 디뎌본 적 없는 나라의 이름 모를 길이더라도 뭐가 맛있고 유명한지 몇 분이면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진위여부는 다른 문제겠지만, 어쨌든.
작은 바에 도착했다. 기준은 음식의 맛이나 분위기에 있지 않았다. 그저 가게 이름. ‘쇼팽의 후예’라는 독특한 이름의 가게라 SNS에서 보자마자 아무 고민 없이 찾아왔지.
심지어 세계 최고의 체임버 오케스트라라 불리는 ‘바르샤바 필하모닉 체임버 오케스트라’ 멤버들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고.
바 테이블에 앉자 뒷모습이 프랑코와 닮은 노인. 한 덩치 하는 가게 주인이 그득한 문신을 자랑하며 맥주를 손님에게 건넸다. 와, 맥주잔 크기가······.
관광객으로 보이는 손님이 양손으로 받아들면서도 휘청거리자 주인장이 껄껄 웃는다.
그리곤 내게 다가와 물었다.
“뭐드릴까?”
“아.”
여권을 꺼내려 하자 손을 휘적거린다.
“얼굴이 명함인 분이 무슨. 오늘 입국했다는 걸 아까 기사로도 봤는데.”
호탕하게 웃은 가게 주인이 양손을 펼쳤다.
“피아니스트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하네.”
피아니스트의 나라.
과연, 그렇게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려 쇼팽의 나라이지 않나.
동시에······.
자연스레 또 하나의 인물을 떠올리려는 찰나, 가게 주인이 말을 이었다.
“쇼팽 콩쿠르가 진행되는 동안 젊은 연주자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올해는 더욱 특별하군. 작은 거장, 한서호라니.”
그의 감탄에 멋쩍어하는데, 가게 문이 벌컥 열렸다. 손님이라기엔 너무나 바쁜 걸음으로 홀을 지나쳐 카운터로 다가오는 젊은 여자.
“저 왔어요!”
“빨리빨리 안 다녀? 손님들 밀려드는 거 안 보여?”
“전혀 안 보이는데요? 건너편 바르샤바댄스는 사람들이 줄을 섰던데. 여긴 뭐······.”
가게 주인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디스를 해대던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놓고 잠시 눈을 깜빡이는 그녀.
“······에이, 아니겠지.”
이내 돌아서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 감자 좀 깎아놓으라니까?”
“어제 절반 정도 해놨어요!”
“다 하라고 시킨 거잖아!”
잠시 노사간의 갈등이 이어지고.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고갤 털며 나온 유사 프랑코··· 가게 주인이 바 테이블에 팔을 턱 얹었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래, 주문해야지 참.
정신없어서 까먹을 뻔······.
“ 피에로기(-만두)랑 비고스(-스튜)주세요.”
“마실 건?”
“······콜라 주세요.”
고심 끝에 말하자, 가게 주인이 풀풀 웃었다.
“맥주 달라 했으면 뭐라 하려고 했어.”
“에이, 당연하죠. 안돼요, 안돼.”
“흐! 내가 즈라지(-고기튀김)도 드릴게.”
“네?”
“서비스. 우리 가게에서 제일 잘하는 거야.”
“으아악! 지긋지긋한 감자!”
마침 안쪽에서 절규(?)가 들려왔다.
가게 주인이 그쪽을 가리킨다.
“쟤가.”
요리사였나···.
픽 하고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저 구경 좀 할게요.”
“뭐 볼 게 있나.”
왜 없겠나. 쇼팽의 후예라는 상호답게 한쪽 벽에 큼직하게 쇼팽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도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음악가로 평가받는, 폴란드가 낳은 가장 걸출한 대가.
······내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소년 쇼팽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반드시 후원했을 텐데. 아쉽네.
입맛을 쩝 다시며 다른 벽면으로 다가갔다.
‘역시. 이 사람도 있구나.’
또 다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번엔 초상화가 아닌 사진. 물론 쇼팽의 얼굴도 아니었다.
마침 음악이 들려왔다.
저 사진 속 남자의 대표곡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가게 주인이 씩 웃는다. 조금 자랑스러운 표정까지도 엿보인다. 쇼팽도 아닌 이 사진 속 남자에게.
나 또한 빙그레 웃으며 다시 초상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럴 만도 하지.’
폴란드 국민들에겐 쇼팽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다른 의미에서 더욱 영웅적인 인물.
세계적으로 많은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이곳에선 영웅이나 마찬가지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
그에게 시선이 빼앗긴 사이, 3/4 박자 몽환적인 선율이 귀를 덮는다.
이토록 우아한 춤곡에서 문득 영화 ‘광대’ 속 한 장면이 떠오르는 건 우연일까.
정치가이자, 음악가.
그리고.
혁명가.
폴란드의 독립을 이끈 초대수상을 보며 나는 음악을 감상했다.
한참 동안 미동도 없이.
그리고 마침내 그의 미뉴에트가 끝났을 때.
바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참 좋은 곡이지?”
내가 끄덕이며 웃었다.
정말 좋은 곡이었다. 만약 쇼팽 콩쿠르에 쇼팽 곡만 취급하지 않았더라면, 예선 곡으로 정하고 싶을 정도로.
물론 그럴 수는 없지. 대신······.
이 곡의 작곡가인 파데레프스키와 가장 닮은 쇼팽의 음악은 알고 있었다.
혁명(革命).
#
이른 아침.
어제 예약해둔 알람에 눈을 떴다.
술을 마시지 않았건만, 이런저런 얘길 하느라 그랬나. 눈꺼풀이 무겁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침대에서 뒤척거리는데,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잠시 후. 테이블에 올려진 것 중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반대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피아노 앞으로 걸음을 옮겨 의자에 앉았다.
샌드위치 한입 베어 물고, 커피 한 모금 머금고.
오물거리며 건반을 눌러본다.
———.
역시나 익숙한 음색.
솔직히 다른 것들도 다 감동이긴 하지만, 이걸 준비해준 건 정말 감격스럽다. 체크아웃할 때 꼭 고맙다고 말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다. 마치 재즈연주자처럼.
자연스레 ‘샌드위치와 커피’라는 이름이 어울릴법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거기에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보이는 바르샤바의 전경.
‘완벽하다.’
피식—.
배도 어느 정도 채웠고, 손을 충분히 풀었으니 이제 본격적인 연주를 준비한다.
모레면 콩쿠르 예선이잖나. 당연히, 쇼팽의 곡을 선곡했다.
내가 불과 어제 예선에 연주하기로 결정한 곡.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프레데리크 쇼팽이 분노에 휩싸여 작곡한 곡이자,
피아노계의 파가니니,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된 곡.
결코, 의도하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최근에 내가 작곡한 곡 중 하나와 곡명도 같다.
바로, 영화 ‘광대’의 메인 테마곡 말이다.
—————!
에뛰드 Op. 10, 12번.
악보에서 느껴지는 당시의 격렬한 감정이.
건반마다 울컥거리며 치솟아 올랐다.
마치 피아노 전체가 쇼팽의 심장인 것처럼 미친 듯이 격동한다.
나는 어느새 깊게 몰입하여 그의 박동(搏動)에 동참하고 있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만약, ‘광대’가 아니었다면.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 OST를 만들며 영화 속 주인공들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쇼팽 콩쿠르를 목표로 그의 곡만 주구장창 연습했더라면.
내가 과연 이 곡을 이렇게 표현했을까?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쇼팽의 이런 감정이 내겐,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을 테니까.
우리는 예언가가 아니다. 설령 누군가는 음악의 예언가라 불렸을 지언정. 결코 미래를 알 순 없지.
그럼에도 다행인 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의 가치가 불분명한 것 같아 보여도 가치가 전혀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언제든 이렇게 의외의 상황에서.
의외의 결과로 돌아올 테니까.
······그래.
그게, 음악(인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