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169
169. 한서호가 몇 명인데? (4)
“······.”
고갤 치켜든 김세진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크게 뜬 눈과 살짝 벌어진 입. 평소의 그답지 않은 표정을 바라보며 함께 기차에 앉아있던 이들이 킥킥거렸다.
“세진이 눈 돌아간다.”
“목 안 아파?”
“파리랑은 또 다르지?”
얼른 시선을 내린 김세진은 언제 멍청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시크한 눈빛으로 함께 기차를 탄 이들을 바라보았다.
파리 고등음악원의 수재들. 이번 쇼팽 콩쿠르 예선을 치르기 위해 온 학생들이었다.
“그냥, 날씨 좀 본 거야. 컨디션 조절해야 하니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등쌀에 밀려 제주도도 못 가본 그였다.
부산도 콩쿠르 때문에 한번 가봤을 뿐. 그것마저도 호텔과 공연장만 왕복했었지. 오며 가며 창문으로 본 바다가 전부였지.
그런 김세진에게 파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상케 하는 파리 고등음악원에서의 생활 또한 그랬다. 물론 그것도 아버지가 관리한다고 찾아오며 그 생활에도 먹물이 끼얹어졌지만.
‘······살 것 같다.’
그간 쌓였던 텁텁한 공기가 입을 통해 빠져나오는 듯했다. 시원한 한숨이었다.
“근데, 이번엔 왜 네 아버지 같이 안 오신 거야?”
“예선이라서.”
“음? 그러니까. 중요하잖아. 떨어지면 본선에 가지도 못하는데.”
“본선. 아니, 결승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
“아······아버지도 피아니스트셨다고 그랬지? 살벌하시네.”
학생들의 반응에 김세진이 덤덤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렇지도 않다. 늘 그래왔으니까.
“넌 호텔 도착하면 뭐부터 할 거야?”
누군가의 질문에 김세진이 다시 고갤 돌렸다.
“뭐부터?”
스스로 자문하고는 뭔가 생각난 게 있는지 ‘아.’하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곧장 핸드폰을 확인한다. 토독토독—화면을 뒤적이던 김세진이 물었다.
“우리 호텔 이름이 뭐였지?”
“왜? 여자친구라도 찾아와?”
장난스러운 질문에 도리어 김세진과 가장 멀찍이 떨어져 앉은 금발 여학생이 픽 하고 웃었다.
“여자친구가 있겠냐.”
“왜, 요즘 이런 스타일이 유럽에서도 인기잖아. KPOP 아이돌. 학교에서도 세진이에 대해 궁금해하는 애들 꽤 된다니까?”
“아니, 누가 외모 얘기하는 줄 알아? 쟤 성격 말하는 거잖아.”
“샬롯. 근데 왜 화가 났어.”
“내가 언제···!”
여학생이 발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세진이 무심하게 말했다.
“친구가 오기로 했어.”
“여자친구!”
“아니, 그냥 친구.”
그것조차도 신기한 일이었다. 김세진이 친구라니. 자신들도 이번 쇼팽 콩쿠르를 계기로 말을 섞기 시작했을 뿐이잖나. 게다가 한국에서 와서 파리에 아는 이가······.
생각해보니 한 명 있었다.
“설마 레오 뒤보셸?!”
몇 달 전쯤에 갑자기 찾아와 김세진을 찾았지. 모델 같은 차림으로. 덕분에 학교가 한번 발칵 뒤집혔었다.
“그 형은 바쁘지.”
“아 참, 퀸 엘리자베스 준비로 바쁘겠구나.”
끄덕거린 김세진이 말했다.
“한국에서 와.”
딱히 힌트를 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은 무슨 퀴즈라도 맞추는 듯 머릴 싸안았다. 그것도 잠시,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났다. 모두가 설마설마하던 이름이었다.
“설마··· 한서호!?”
“한국 연주자가 한서호 밖에 없는 줄 알아?”
“아, 그렇지. 근데 나 진짜 한서호 말고 모르긴 하는데···.”
아니었구나. 다시 자리에 앉는 학생.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김세진이 툭 말했다.
“근데 맞아. 한서호.”
“······!”
좀전의 김세진이 창밖을 보던 표정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학생들의 표정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열차 칸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야잇! 세진, 나도 같이 만나면 안 될까?”
“정 안 되면 만나다 끝에 10분 만이라도!”
“우리 진짜 얌전히 있을게. 그냥 지켜만 보면 안 돼?”
#
······연주를 마치고 건반에서 손을 뗐다.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쇼팽의 마음을 따라 달려왔으니까.
그 끝엔, 불타는 폴란드를 멀리서 그리며 침통해 했을.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악보와 펜을 찾아 울분을 쏟아냈을 쇼팽의 심정이 있었다.
격렬히. 연습이란 것도 잊고 연주했다. 그가 그린 음악 기호들이 이정표처럼 나를 도왔다.
그렇게 만족스러웠지만, 그래서 더욱 시린 연주가 완성되었다.
‘이거 당분간은 남아있겠는데······.’
너무 몰입한 탓일까.
큰 감정의 부산물처럼 남은 작은 감정들이 연주가 끝났음에도 남아 시큰거린다.
씁쓰름한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예정된 연락이었다.
[김세진: 메리어트 호텔이야. 언제 올 거야?]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하긴, 혁명을 몇 번 반복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로 내리 연주했으니······.
[한서호: 지금 준비할게.] [김세진: 근데······.]서둘러 외출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김세진이 묶는 호텔은 내가 있는 소피텔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로비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그중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체크인을 기다리는, 아마도 연주자일 것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누가 봐도 큰 카메라를 들고서 어슬렁어슬렁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는 기자들도 있었다.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기자들도 몇 명 있다.
얼른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코너를 돌자 김세진이 푹 눌러쓴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왜 톡을 안보냐.”
“아, 봤어. 바로 오느라 답장은 못 했지만.”
“올라가자. 친구들도 내방에 와있어. 근데 다들 좀······.”
김세진의 꺼림칙한 표정을 보며 내가 유추했다.
“인싸야?”
“어. 레오 같아.”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부 김세진, 한서호인 것보단 낫지.”
“그러네.”
인정하는 김세진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낄낄거리며 호텔 방으로 따라갔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 모여있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쇼팽 콩쿠르에선 한국인 참가자들이 꽤 많이 예선에 올라오며 화제가 되었지만, 가장 많은 참가자 비율을 가진 건 전통의 강호 프랑스였다.
그중에 세 명(-김세진은 한국인이라 제외)이 지금 여기 있는 거고.
“Bonjour!”
한바탕 인사가 오고갔다. 레오 재질의 인싸들이라 그런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소개했다.
그리고 주제는 자연스레 내가 파리국립 고등음악원에 갔었을 때로 넘어갔다.
“난 그때 있었어요. 홀랜드 교수 혼내줄 때.”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흑인 남학생.
레오가 데려가 준 특강 때를 얘기하는 거겠지.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혼내준 것까지야······.
“모두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여러 핑계 대면서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었는데. 멋졌어요.”
옆에 있는 학생들도 덩달아 주억인다.
“그나저나 예선곡 준비는 잘 돼가요? 하, 이제 정말 코앞인데 막막하네요.”
“전 혁명으로 정했는데—.”
운을 떼다가 도로 붙였다. 학생들의 표정이 묘해서.
“와··· 자신감.”
“다행이다! 나 혁명도 고민했었는데!”
“바로 오픈하시네. 알아도 상관없다는 거죠?”
맞긴 한데. 그게 뭐, 알아도 본선에 올라갈 자신이 있어서··· 이런 건 아니다. 오히려 우승이 내겐 더 상관없는 느낌이랄까. 이번엔 정말 경험을 위해서 왔으니까.
“어제 정했······.”
또다시 말을 삼켰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잖나. 이 말까지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제 뭐요?”
“어제 혁명 치다가 이걸로 곡 정한 걸 후회했다고요. 리스트한테 헌정한 곡이라서 그런가. 연습할 때마다 진이 빠져서······.”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김세진이 빵 터졌다. 이상한 소릴 들었다는 듯이.
학생들이 어리둥절 쳐다보자, 이내 옅은 미소만 남긴 김세진이 날 보며 한국어로 말했다.
“지금 힘들었던 척하느라 힘든 거 같은데?”
하하하. 눈치 빠른 자식···.
#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그들의 질문세례에 성의껏 답하면서도, 말하는 것보단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흥미로웠다. 모두가 쇼팽 콩쿠르를 통해 클래식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건 클래식에 진지하고, 또 그것을 갈구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학생들을 보며 나는 궁금해졌다.
이들의 연주는 또 어떤 모습일지.
‘콩쿠르가 더욱 기대되네.’
기대감을 안고 숙소로 돌아오니, 참을 수가 없었다.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눌렀다.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그러면서 나는 또다시 영화 ‘광대’의 주인공들이 되었고, 프레데릭 쇼팽이 되었다.
연주를 마치고 나서는 야행성 동물인 양 어슬렁어슬렁 거리로 나섰다.
기념품 샵에서 부모님 선물도 사고, 그러다 백한길 회장과 윤 교수 생각이 나, LP를 구매했다. 그들 취향은 또 내가 꿰고 있잖나. 사는 김에 내 것도 몇 개.
그다음 행선지는 어제도 왔던 펍이었다.
쇼팽의 후예.
다시 찾은 이유에 뭔가 큰 이유가 있진 않았다. 여기서 틀어주는 음악이 좋았고, 한편으론 ‘혁명’을 연주하고 남아있는 감정을 여기서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카운터에 있던 점원이 나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가서자 흥분해선 말한다.
“어제 못 알아봐서 죄송했어요. 저 가고 사장님이 알려주셔서 알았잖아요. 나쁜 영감탱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는지······.”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사장님은요?”
“나 여깄네.”
안쪽에서 가게 주인이 나타났다. 감자를 들고서.
“아직 다 못 깎으셨나 보네요?”
“어제 쟤가 하도 느릿느릿 깎아서, 내 차례인 오늘까지 넘겨졌지. 그나저나 연습 안 하고 왜 또 왔나?”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 내가 어깨를 들썩였다.
“여기 음악 선곡이 너무 제 취향이더라고요.”
“지금 이 곡도 알고 있나?”
“파데레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네요. 상호는 쇼팽의 후예인데, 어째 그분 음악만 나오네요?”
“그도 쇼팽의 후예니까.”
“아.”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꼬릴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음식을 시키고 계속 이어지는 파데레프스키의 메들리를 들었다.
내 잔에 담긴 게 콜라라는 게 한탄스러울 정도로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음악들.
오늘 아침에 연주한 혁명과 그의 곡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끊임없이 부산물들을 만들어낸다. 이제 어엿한 영감(靈感)이라 부를 수 있을만큼.
그리고, 나는 이것을 소모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마치 배우가 혼신을 다해 연기를 하고서, 가슴 한켠에 남은 감정을 그림이나 춤, 노래 등으로 풀어내듯.
나는 작곡으로 그런 것들을 사용해왔다.
그래서 이렇게···.
사락——.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선지를 꺼내는 경우가 꽤 많지.
연필을 쥐었다. 그리고 남은 감정들을 뚝뚝 떨어트렸다.
감정이 물방울처럼 오선지에 찍히고.
비로소 하나의 음이 되었다.
그 음에서 비롯된 수많은 선율이 파생되었고.
결국, 마침표에 도달했을 때쯤엔 곡이 완성되었다.
‘쇼팽의 후예’라 불릴만한 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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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글쎄!”
문화재단 건물 안에 위치한 카페.
백한길 회장과 양가호 대표의 애장품들이 하나의 박물관을 이룬 거대한 홀이 잘 보이는 한쪽에서 사람들이 화기애애하게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바로, ‘광대’ OST 작업에 동참했던 클래식, 국악 연주자들. 그들은 이미 녹음이 모두 끝났음에도 종종 이곳에서 만나 오늘처럼 시간을 보냈다.
서로 성격이 잘 맞는 것도 있지만, 함께 연습하고 녹음했던 그 상황이 즐거웠기 때문도 있으리라.
그렇게 한창 이야기가 오고 가던 도중, 그들의 수다를 멈춘 건 하나의 톡이었다.
“서호한테 연락 왔는데요?”
“어, 저도요.”
“저도.”
그러자 가야금 연주자 서유정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응원 문자 보내려고 했는데. 근데 이거······악본데요?”
웬 이미지만 덩그러니 왔길래 눌러봤더니 상단에 ‘가야금’이라고 적힌 악보였다.
이윽고, 새로운 톡이 도착했다.
[한서호: 여기서 작곡한 건데, 시간 괜찮으시면 녹음 부탁해도 될까요?]“······.”
정적이 흘렀다.
이 순간만큼은 클래식이나 국악 연주자나 할 것 없이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들이었다.
지금 대회 직전이잖나. 그것도 피아노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콩쿠르인 쇼팽!
“······서호, 얘. 내일모레가 콩쿠른데 대체 뭘하고 있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