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36 (daily samsamyuk) RAW novel - Chapter 43
43화.
험악한 그녀의 목소리에 낮게 웃은 백구가 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은 채 그녀를 끌어안았다. 사희는 제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켜는 백구를 마주 안아 주었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체온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백구가 중얼거렸다.
“일주일은 너무 길었어.”
응, 하고 대꾸하며 사희는 그의 단단한 어깨에 뺨을 비볐다. 백구의 온도. 백구의 냄새. 백구의 목소리.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자리를 비우면 금세 곁이 허전해지고 만다.
어른스럽게, 되도록 초연하게 행동하자,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애초에 머리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백희는 별일 없었어 통화는 매일 하긴 했지만.”
듣기 좋은 목소리로 백구가 나직하게 묻는다. 사희는 그의 품에서 몸을 뒤척이며 빙긋 웃었다.
“동네 애들이랑 아옹다옹 잘 놀아. 애 보는 게 재밌는지 석철 씨가 일 끝나면 곧장 백희 데리러 간대. 미자 아줌마만 피곤하다고 난리셔.”
“그놈이랑 자주 어울려서 좋을 게 없는데.”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며 백구가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사희도 피식 웃으며 그의 듬직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출장 다녀오느라 수고 많았어, 여보. 이제 집에 가자.”
다정한 그녀의 말투에 눈을 반짝 뜬 백구가 조금만 더, 하고 속삭이며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물리고 따스한 숨결이 뒤엉킨다. 사희는 금세 도를 넘어서 농밀하게 제 입술을 할짝거리는 남편의 귓바퀴를 힘껏 잡아당겼지만, 백구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미정 슈퍼의 문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지만 백구는 뒷문으로 돌아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뒤따라온 사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손에는 찰랑거리는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나 열쇠 있는데.”
“……나한테도 안 주던 열쇠를 당신한테 ”
“이 시간엔 백희도 이모님도 잠들어 있을 때가 많으니까.”
그러나 사희가 열쇠를 끼워 넣기 전에 철컹거리며 문이 열렸다. 잠에서 막 깬 듯한 부스스한 머리의 미자 아줌마가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있었다.
“사희 왔냐 ”
“주무셨어요 문 열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이가 눈치 없이 문을 두드려서.”
“저놈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백희 저녁 먹고 금방 잠들었다. 그냥 여기서 재워도 된다니까 뭘 굳이 데리러 와 ”
백구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슈퍼 안쪽에 딸려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저 두 사람은 잘 맞는 건지, 안 맞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를 구박할 때는 늘 뜻이 하나라는 점이다. 백구는 피식 웃으며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작년 미자 아줌마 생신 때 사 드렸던 두꺼운 겨울 이불은 백희가 점령하고 있었다. 백구는 팔다리를 있는 대로 펼친 채 푸우, 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곁에 앉으며 사희가 중얼거렸다.
“……얜 대체 누굴 닮아 이렇게 아저씨처럼 자는 거야 ”
“엄마 닮아 예쁜 우리 백희, 코 잠들었네.”
헛기침을 하며 사희 곁에 앉은 백구는 몸을 낮춰 보송보송한 백희의 뺨에 조심스레 입술을 비볐다. 으응, 하고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지만 백희는 꿈나라에 푹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백구는 아이의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따뜻한 감각에 온몸을 둘러싸고 있던 녹진한 피로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다. 조그마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있는 그를 곁눈질하던 사희가 말했다.
“깨울까 엊그제부터 아빠 보고 싶다고 난리였는데.”
“이제 겨우 잠들었는데 뭘 깨워 너희도 피곤할 텐데 이대로 업고 가서 고대로 재워. 부녀 상봉은 내일 아침에 하고.”
퉁을 주며 사희의 어깨를 찰싹 때린 미자 아줌마가 길게 하품했다. 눈꼬리가 가늘어지는 사희를 눈치챈 백구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입술을 비죽이던 사희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고추조림은요 ”
“뭐 ”
“주말에 남은 거 준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거 낮에 백희가 다 먹었는데. 야, 걔는 어떻게 너랑 입맛이 똑같다니 너 잘 먹는 깻잎지짐이랑 고추조림만 귀신같이 골라 먹는다니까.”
“다 먹었다고요 ”
“아이, 깜짝이야. 애 깬다!”
언성이 조금 높아진 사희에게 눈을 부라리는 미자 아줌마를 멍하니 바라보며 백구는 눈을 끔벅였다. 그는 지금 제 곁에 있는 세 여자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죽을 때까지 저 입맛을 이해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심지어 사희는 백희를 임신했을 때도 미자 아줌마가 만들어 준 반찬이 아니면 밥을 먹지 않았다. 맛있다는 온갖 음식들을 사 와도 그녀는 꼭 미자 아줌마표 고추조림을 곁들여 먹곤 했다.
이런 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니 오히려 제 입맛이 의심스러워져 백구는 공방에 도시락을 싸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빗발치는 사람들의 흉악한 항의 속에서 그는 비로소 제가 옳았음을 몸소 확인했다. 그 이후로 백구는 제 혀를 의심하지 않았다.
“빨리 데려가, 얼른. 내일 또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내일은 저녁에 백희 데리고 목욕탕이나 가요, 우리.”
“아, 알았어. 얼른 가. 늙은이 졸려 죽겠다.”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목욕으로 극적인 타결을 이루어 내는 광경을 바라보던 백구가 등을 내밀었다. 사희와 미자 아줌마가 늘어져 있는 백희의 몸을 추슬러 그의 등에 얹어 주었다.
“가 볼게요. 보일러 좀 올려. 오늘 추워.”
“사희가 깔아 놓은 매트가 하도 뜨뜻해서 땀띠 나게 생겼다, 이놈아. 어여 가.”
손을 휘젓는 미자 아줌마를 뒤로하고 세 식구는 슈퍼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몇 년 전 설치된 가로등 덕분에 어둡지 않았다.
길을 타고 올라가면 제법 넓은 단독주택 하나가 있다. 그들의 집이었다.
백구는 사희가 머물던 집을 헐값에 사서 허물고, 그의 집과의 경계 또한 허물었다. 하나가 된 부지에 주택을 짓는 데는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결혼 축하 선물이라며 백구의 동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몰려들어 일을 거들어 준 덕이었다.
백구는 가구를 만들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는 동안 동네 목공소의 일을 도왔는데, 그의 솜씨를 눈여겨본 가구 공방 사장이 소위 ‘스카우트’를 해 간 것이다.
가구를 만드는 일은 재미가 있었다. 소재로 쓸 목재를 고르고, 그걸 다듬는 동안에는 어떤 잡념도 떠오르지 않았고, 아귀를 맞추며 부품들을 조립해 하나의 가구를 만들어 낼 때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람이 있었다.
처음으로 혼자서 장식장 하나를 만들어 낸 날, “어려운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낸 것 같다니까” 하고 땀을 훔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희는 까치발을 들고 나무 냄새를 풍기는 그의 뺨에 기꺼이 입을 맞춰 주었다.
힘 잘 쓰는 조수 정도로 백구를 쓰려 했던 공방 사장은 점차 백구에게 가구 제작을 맡기는 일이 잦아졌다. 그는 원체 체력도 좋았고, 건설 일을 오래 해서 균형 감각이 뛰어났다. 백구가 만든 가구는 투박했지만 무척이나 튼튼했다.
장사 수완이 좋았던 공방 사장은 카탈로그와 홈페이지를 만들어 가구를 홍보했다. 직접 발로 뛰며 서울에 있는 몇몇 인테리어 디자이너와도 연을 맺었고, 그러다 고급형 빌라에 공방 가구를 들여놓게 되었다. 그게 입소문을 타면서 공방은 더욱 바빠졌다.
다섯 명이었던 공방 식구는 이제 열두 명이 되었고, 가구 박람회에 개인 가구전 섹션에 출품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이번 출장은 제작자로서 얼굴도 비출 겸, 홍보 좀 하고 오자며 사장이 백구를 끌고 간 것이었고, 결과는 다행히 무척 좋았다.
“내심 오늘 돌아오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밖을 보니까 비가 오더라고.”
백희를 업고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백구에게 우산을 씌워 주며 사희가 중얼거렸다. 백구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고 온 거야. 비 오면 내 생각 나겠지 싶어서. 업체랑 회식도 뿌리치고.”
“넌 어떻게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지…….”
“내가 그러니까. 난 비를 보면 당신 생각이 많이 나거든.”
집에 다 왔다, 하고 중얼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간 백구가 팔꿈치로 스위치를 누르며 백희의 방으로 향했다. 그런 백구의 듬직한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거실과 부엌, 방 세 개에 욕실 두 개. 안락하고 튼튼한 집의 온기가 그녀를 감쌌다. 이 집은 마치 백구 같았다. 그가 살아온 터전. 앞으로 살아갈 터전. 집을 지은 백구를 고스란히 닮아 이 집에 들어오면 마음이 금세 편안해졌다. 마치 백구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백희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아이를 눕혀 놓은 백구가 제법 아빠다운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백희의 이마를 쓸어 주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을 들어 코끝에 비벼 대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사희는 그의 목덜미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빗물을 머금은 백구의 묵직한 체향이 짙게 풍긴다. 그게 좋아 마음이 간질간질거린다. 쫑긋하게 선 그의 귀에 조용히 뺨을 맞대고 있자 낮게 한숨을 내쉰 백구가 입을 열었다.
“……사희야.”
“응 ”
“10초만.”
“무슨 10초 ” 하고 고개를 기울이자 백구가 이불을 당겼다. 아이의 가슴팍까지 이불을 덮어 준 그는 두어 번 토닥여 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몸을 세우며 손을 떼고 물러서자 백구가 돌아섰다.
어둠 속에 은은하게 번져 있는 스탠드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새카맣게 빛나는 그 눈동자에 사희는 아차 싶어 손을 들었다.
“아니, 나는, 여보가 집에 있는 모습이 오랜만이니까…… 으앗!”
몸을 굽혀 그녀의 등과 무릎 아래에 팔을 넣은 백구가 가뿐하게 그녀를 들어올렸다. 몸이 훌쩍 들리는 느낌에 사희가 휘청거리며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스친다. 열띤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백구가 말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당신 늦게 일어나도 되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당신 좋아하는 슈트를 입고 있고.”
도발하듯 백구가 눈을 내리뜬 채 듣기 좋은 목소리를 뱉었다. 그 눈빛만으로도 기분 좋은 흥분으로 몸이 천천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거기다 비에 젖어 섹시하기까지 하지, 우리 백구.”
눈을 찡긋하며 나른하게 받아치자 짧게 숨을 들이켠 백구의 목 근육이 뻣뻣하게 경직된다. 사희는 그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어차피 피할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심지어 그녀는 충분히 즐길 용의마저 있었다. 이곳은 그와 그녀가 일궈 놓은 집이었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요새였으며, 사랑스러운 딸아이는 눈치 빠르게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제 어른들의 밤이었다.
“이제 백구 말고 개새끼 할 시간인 것 같은데.”
듣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속닥거리며 사희는 턱을 들어 백구의 도톰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낮게 신음을 뱉은 백구는 방을 나서며 그녀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아이의 방 문이 닫히고, 서둘러 저를 안은 채 거실을 가로지르는 남편의 몸이 단단해져 있음을 느끼며 사희는 어쩔 수 없이 행복에 겨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금요일 밤의 나른한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