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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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결전
거칠었던 호흡은 계속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점점 진정되어갔다. 사방에 잔향처럼 남아 울리던 파괴의 굉음도 차츰 잦아들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무작정 감정을 분출시킨 적 없는 세현은 속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지간한 시체보다도 끔찍해진 몰골로 벽에 처박힌 검은 로브의 모습을 보자 더더욱 그랬다.
“죽은 척 마라.”
그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위 파편 하나를 거세게 튕겨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벌써 죽었을 리 없지. 내가 얼마나 질긴데. 내가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너라고 다를까?”
그는 무림에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질기게 잘 살아남았다.
분명히 죽을 거라 생각했던 적이 십여 번도 넘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살아남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서, 정확히는 포기할 수가 없어서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한 집념으로 발악했던 덕이다.
검은 로브는 또 다른 자신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어도 이리 무력하게 죽을 놈은 아니다.
검은 로브와의 거리가 오십여 미터 정도 되었을 때, 세현이 한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어디선가 굉음이 터지더니 한 자루 검이 빛살처럼 날아왔다.
청월(淸月).
그가 무림에 있던 시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물건.
세현은 그 애검을 낚아채며 동시에 몸을 휘돌렸다.
세상이 느려지고 구궁보(九宮步)의 묘리를 담은 발걸음이 대지를 딛는다. 전신에서 폭발하듯 뿜어진 자하신공(紫霞神功)의 기운이 신격과 어우러져 천지를 개벽하는 권능으로 화했다.
크게 휘도는 제복의 끝에서, 세상 그 무엇이라도 베어낼 수 있는 절대적인 예기를 품은 칼날이 튀어나와 빛을 폭발시켰다.
바로 그 순간 미동도 없던 검은 로브의 입이 움직였다.
[세계왜곡(世界歪曲), 시간정지.]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소음이 울렸다.
찰나에 멈춰버린 세상 속에서, 여전히 벽에 박혀 있던 검은 로브가 참았던 피를 게워내며 간신히 몸을 빼냈다. 그 일 초도 안 되는 순간 머릿속으로는 수십 가지 선택지를 고려했다.
공격 혹은 도주.
공격한다면 어떻게?
도주는 어디로?
주무기인 스태프는 신나게 얻어맞는 동안 어딘가로 날아가버려 찾을 수 없다. 아이템의 힘을 빌릴 수 없어 남은 마력으로는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 골라야 했는데,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는 너무나 확실했다.
애초에 시간정지 상태에서 세현을 죽일 수 있었으면 무림으로 보내는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때 공격해서 죽여버렸을 테니까.
멈추게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공격을 가한다면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만들 뿐이다.
결정을 내린 검은 로브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한 줌 남은 힘을 간신히 그러모아 마법진을 그려갔다.
장거리 순간이동을 마법진이었다. 저번의 경우를 비추어보아 상대는 일 분도 안 되어 정신을 차릴 테니 시간이 촉박했다.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장소를 신중하게 택해야 한다. 두 번의 기회는 없다.
저벅-
그렇게 정신없이 마법진을 그려가던 검은 로브의 귓가로, 나직하지만 천둥보다 더 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바로 뒤에서였다.
“이게 세 번째다.”
검은 로브의 마력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첫 번째는 마계에서였지. 두 번째는 네가 했고.”
“하……”
검은 로브, 또 다른 세현이 허탈한 웃음을 토했다.
그는 간신히 짜냈던 마력이 허공에서 덧없이 스러지는 것을 그냥 놔두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렇게 완전히 일어선 후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손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접근한 세현이 있었다.
“몰랐겠지.”
“……”
“만약 이게 두 번째였으면, 어쩌면 도망칠 수도 있었을 거다.”
“……빌어먹을.”
세현은 그 진심 담긴 욕설을 듣고 입가를 끌어올렸다.
반대로, 검은 로브는 방금 전의 세현처럼 표정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지금의…… 지금의 네가 있는 건 내 덕이야.”
그가 말했다.
“그래. 그건 인정하지.”
“내가 진짜다. 넌 가짜에 불과해.”
“가짜는 없다. 너와 나, 둘 모두 진짜야.”
“내가… 내가 너를 만들었어. 너는 내게 죽어야 해!”
콱!
빛살처럼 뻗어진 손이 재차 고함치려던 검은 로브의 목을 틀어쥐었다.
반사적으로 검은 로브 역시 손을 휘둘러 세현의 눈을 찌르려 했으나, 그것은 겉에 둘러진 호신의형기에 막혀 세차게 튕겨나갈 뿐이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무력하다.
신체를 보호하던 세계왜곡의 힘마저 시간정지로 돌려버린 탓에, 튕겨진 검은 로브의 손은 뼈가 으스러질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세현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발버둥치는 또 다른 자신에게 말했다.
“가엾은 것아, 내가 이겼다.”
“컥…! 커걱……!”
꾸드득-
목을 붙잡은 세현의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간다. 검은 로브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지고 하나 남은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졌다.
쏘아지는 선명한 보랏빛 시선에 극도의 살기가 담긴다. 분노, 원한, 통탄, 증오, 저주,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적대적이고 부정적인 감정들이 손으로 만져질 것처럼 진득했다.
세현은 그 모든 악의를 가볍게 받아내며 말했다.
“마지막인데, 그래도 칭찬 한 마디는 해주마.”
콰득!
목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린다. 여태까지의 싸움에서 발생했던 엄청난 굉음들에 비하면 정말 조그마한 소리였지만, 죽이려는 세현과 죽어가는 세현에겐 그 어떤 것보다 거대한 소리였다.
“네 덕분에 누이가 살았다. 정말로, 진심으로 고맙구나.”
“카아…아아아악…!!”
“이 공적(功績)은 잊지 않으마. 아, 물론 누이에겐 알리지 않을 거다. 괜히 심란하게 만들 필요 없지.”
검은 로브의 발버둥이 급격히 강해졌다.
어떻게든 세현을 죽이려는 듯, 목을 조르는 손을 부여잡던 것마저 멈추고 오직 그를 향해서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폭발할 듯 충혈된 시선은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곧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공포스러웠다.
“너는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거다.”
더없이 잔인한 선고가 떨어졌다.
그 후 손아귀에 힘이 가해지자, 붙잡힌 목이 완전히 압착되며 망가졌다. 검은 로브의 모든 발버둥이 뚝 멎었다.
사지에 힘이 빠지며 실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다. 시선만으로는 용이라도 죽일 법하던 흉흉한 보랏빛 안광이 천천히 스러져갔다.
손아귀에서 타인의 생명이 꺼지는 느낌이 그 어떤 때보다 생생했다.
다수의 시스템 메시지들이 정신없이 귓가를 울려대기 시작했으나, 세현은 그것들을 전부 한 귀로 흘리며 시체가 된 또 다른 자신을 가만히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시선 밖에 두면 금방 사라져버릴 것처럼 집요하게 살폈다.
끝났다.
정말로 끝났다.
이보다 더 거창하게 적을 죽였노라고 체감한 적 없다.
주변의 광경 중 그 무엇도 변화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는 타인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격렬한 변화를 느꼈다.
쪼개졌던 세계가 합일한다. 둘일 수 없던 존재가 하나로 합쳐지며 운명의 결투에서 패배한 검은 로브의 모든 것이 소멸해가고 있었다.
– 칭호 ‘완성된 자’를 획득했습니다. –
– 에레도스의 시련이 종료되었습니다. –
시스템 메시지들을 전부 한 귀로 흘려버리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그 두 메시지는 도저히 흘려지지 않았다.
그의 싸움이 끝났다.
동시에, 이 세계의 싸움도 끝났다.
승자는 언제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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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어두운 지하.
인공적으로 튼튼하게 건축된 통로에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빛 한 점 없었지만 길을 나아가는 자의 움직임엔 거침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확연하게 빛나는 자색빛 두 눈동자가 그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었다. 검신(劍神) 한세현, 고작 어둠으로 발목을 잡기엔 너무 대단한 존재다.
“삼일…… 예상보다 더 늦게 찾았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멈춘 장소는 드넓은 공동이었다. 공동의 중앙에는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천 이상의 케이블들과 연결된, 높이만 백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장치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타워 같기도 했고 혹은 SF영화에서나 나올 기계 괴물들의 둥지 같기도 했다. 나름의 미학이 있는 구조물이었기에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으려니, 그 구조물의 중앙에서 사람보다도 큰 눈동자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아사드였다.
– 한세현…… 결국 찾았냈나. –
“더 이상 남은 몸이 없는 모양이지?”
– 어이없게 파괴되었던 그게 내 마지막 몸이었다. –
“그럼 몸도 없는데, 다른 세계로 도망이라도 치지 그랬나.”
– 바로 그 몸이 없어서 도망치지 못했지. 며칠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
세현은 피식 웃으며 오른손으로 청월의 손잡이를 잡았다.
전투를 치를 몸이 없는 아사드는, 비록 보라색 등급이지만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구조물에 불과하다. 마법은 사용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 상황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 죽여라. –
“남길 유언 같은 건 없나?”
– ……한세현, 너를 증오한다. –
“하찮은 유언이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청월이 폭발하듯 허리춤에서 튀어나왔다.
한순간에 수백 수천 줄기로 분화한 의형기가 닿는 모든 것들을 으깨고 부수며 어마어마한 굉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사드의 영성이 느껴지던 보랏빛 기계 눈은 일 초도 버터지 못하고 박살났고, 연결되어 있던 케이블들은 모조리 끊어지며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세현은 이곳의 모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작정으로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공동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붕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색 의형기는 무너지는 천장과 벽을 지탱하며, 그 아래에 자리한 아사드의 몸체를 철저하게 박살내갔다.
자색빛 거대한 신화적인 짐승이 온 힘을 다해 패악(悖惡)을 일으키는 듯했다. 눈을 뜰 수조차 없이 휘몰아치는 자색의 파괴들이 스친 곳에는 오직 굉음과 폭발의 잔향뿐이었다.
십여 초가 더 넘도록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세현은 귓가에서 원하던 시스템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 칭호 ‘기계 세계의 종결자’를 획득했습니다. –
– 상점에서 취급하는 품목이 늘어납니다. –
콰콰콰콰콰쾅!
쿠르르릉-!
아사드의 죽음을 확인했음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아사드의 모든 부품들을 성에 찰 때까지 완벽하게 부숴버린 후에야 칼질을 멈췄다.
공동을 지탱하던 힘이 회수되자 잠시 멈췄던 붕괴가 이어졌다.
어마어마한 무게의 흙더미들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세현은 손을 위쪽으로 뻗은 채 땅을 박찼다.
한순간에 다가온 천장으로 의형기에 휩싸인 손이 충돌하며 폭음이 터졌다. 그렇게, 두터운 대지를 통째로 관통하며, 지상에서 화산이 분출하는 듯한 모습으로 세현이 튀어나왔다.
무성히 자란 숲의 바다가 보였다.
그 수해(樹海)의 끝에서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보였고.
저물어가는 태양에 의해 주황빛으로 물든 구름과 하늘이 보였다.
“하.”
세현은 상당히 높은 고도까지 올라온 후에야 시원함을 담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후련하면서도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더 이상 이 세상에 그의 적수는 없다. 에레도스의 시련이 끝났으니, 보라색 등급 같은 재앙적인 괴물들도 더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그것을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래 ‘한세현’의 본능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과 즐거움을 느꼈다.
아래쪽 지상에서부터 은은히 들려오던 붕괴음이 잦아드니, 이곳은 바람 부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평화로운 장소가 되었다.
세현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평화를 만끽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렸다.
처음 이 세상의 이변을 알아챘던 날.
골목길에서 좀비를 발견하고 편의점에 들러서 음식을 구매한 뒤 집에 들어가기 전.
평소와 같았던 밤거리를 보며 상당히 묘한 감정을 느꼈었다. 꽤나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째서인지 지금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이만 가야지.”
감상에 젖는 것은 조금 미루기로 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의 제자들과 수하들도 있었고.
세현은 허공을 박차며 빠르게 쏘아졌다.
뒤늦게 터져나온 굉음이 잠시간 평화로웠던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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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길었네요… 이제 에필로그만 남았습니다.
완결 후기는 거기서 써야겠지요.
그래도 마지막이라 신경 써서 썼는데,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추천도 잊지 말고 꾹! 눌러주시길 부탁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