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Champion Too Good at Exorcism RAW novel - Chapter 202
202.
“하…”
나는 앞에 선 외신, 우둔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내가 퍼붓던 수많은 전승들.
그것들 중에는 신화에 속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그 재현도는 하나같이 경이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이세계를 기준으로 해도 드래곤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찢어 죽일 힘.
하지만 신이라는 게 허명은 아니었던 걸까.
정작 그 모든 공격을 받아낸 우둔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존재들처럼, 전승을 부정하거나 몸을 재생하는 꼼수를 부린 것이 아니었다.
우둔은 말 그대로 그걸 맞고 버텨냈다.
마치 이 정도의 힘은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듯이.
놈은 제 육중한 몸조차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여간 이 새끼들은…”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옛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언젠가 또 다른 신과 싸웠을 때의 기억.
그때도 생각해보면 지금과 비슷했다.
용사랍시고 얻었던 수많은 마법, 그리고 온갖 오의가 그때만큼은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 여신은 마나와 마법의 신이자 그 창조자.
그렇기에 마법은 물론 오러까지도 지배했으니.
그래서 그때도 내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오직 내 검뿐이었다.
“……”
나는 검을 뽑았다.
놈의 거대한 크기에 비하면, 이쑤시개조차 되지 못할 작은 검.
나는 거울처럼 깨끗하게 번쩍이는 그 면을 바라보았다.
최근, 서연과 함께 곤륜산에 갔다 온 후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곳에서 서연은 평범한 여우 신선이 아닌, 검의 도를 깨우친 여우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구천현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서연이 나와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훌륭한 검과 함께 길을 걸어왔기에, 그 검의 길을 깨우쳤을 뿐이라고.
처음 들었을 때는 별다른 감상이 없었다.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서 생각하니, 그건 나에게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에게 있어 검은 특별했다.
그리고 그렇게 내 검을 그리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말할 것도 없이 이세계에서의 경험이었다.
나에게 이세계에서의 일은, 결코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한때의 악몽과도 같았던 경험.
그저 잊을 수 있다면 잊고 싶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환상.
그러나 과연…정말 그것뿐이었을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단지 그렇다 말할 수 없었다.
설령 피폐한 기억과 상처만이 남았을지언정.
그 기억은 분명 나를 여기까지 인도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 중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이 바로 이 검.
이 검이 있었기에 서연은 검의 도를 깨달을 수 있었고.
이 검이 있었기에 나는 수많은 적을 베고, 또 동료를 구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것은 잊어도 될 기억이 아니었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본 셈 치고 말 악몽이 아니었다.
그건 분명 내가 걸어온 길이었고.
동시에…내가 이룩한 하나의 업이었다.
나는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머리 위로 들린 인검이 서늘하게 빛났다.
비로소 인정한 나의 위업에 힘이 깃들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신화이자 전승.
내가 가진 전승들이 어떤 신과 영웅들의 위업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이 검만큼은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내가 만들고 내가 쌓아올린 신화 그 자체였기에.
그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
가볍게 휘두른 일검에 천지가 쓸려나갔다.
마치 공간 그 자체가 갈라진 것처럼, 절삭음조차 없이 만물을 갈랐다.
산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제 몸뚱이를 통째로 가른 검격조차도, 외신은 버텨냈다.
내가 가진 신화에 지지 않겠다는 듯, 자신에게도 그 정도의 신화는 있다는 듯.
다만, 이번만큼은 놈도 지금까지처럼 오만하고 고고하게 버텨내지는 못했다.
“——–!”
놈이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나를 비웃듯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던 놈이.
귀가 찢어질 듯 요란한 비명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격렬한 반응에 나는 입가를 들어 올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나는 검에 내 모든 것을 담았다.
동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동원했다.
빛이 더해졌다.
태양 화살에 담겨 있던 그 빛이 검날 위로 씌워졌다.
그렇게 외신과 합을 주고받았다.
거대한 빌딩이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놈의 팔이 나를 덮쳐왔다.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커다란 팔을 중심으로 하늘이 무너지듯 놈의 크고 작은 수많은 손톱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그 무너진 하늘의 조각과 내 검이 맞닿았다.
선명한 예기가 거대한 놈의 팔을 조각냈다.
나조차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 예기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다다른 검조차 놈을 완전히 베어내지는 못했다.
미처 막지 못한 몇 개의 손톱이 내 몸을 찢었다.
아팠다.
그러나 치명적인 부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힘을 아끼지는 않았다.
아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한번 검격을 흩뿌릴 때마다 내가 가진 영력과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역시 강화된 전승이 그 영력과 체력을 보충했다.
그렇게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마침내 놈이 쏟아내던 공세가 주춤했다.
끝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놈의 팔과 손톱과 촉수가 전부 잘려나가 있었다.
하지만…나 역시 한계였다.
아무리 강화된 전승이라도, 사실상 무한에 가까운 회복 수단도.
결국 무한은 아니었다.
그래서 끝내 바닥난 힘을 보충할 수단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한 번의 검격이라면, 저 몸에 금이 간 외신을 끝장낼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새끼…!”
그래서 나는 거기서 검을 들었다.
부들거리는 손이 당장이라도 검을 놓칠 듯 흔들렸지만.
끝내 그것을 버텨내고 나는 최후의 일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마침내 산이 흔들렸다.
산을 뒤덮고, 산 그 자체가 되었던 외신 우둔이 마침내 그 힘을 잃는다.
쿠우웅!
삐죽 솟아 있던 놈의 팔이 붕괴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그의 수하였던 괴마들이 일제히 소멸했다.
“크윽…뒤지겠네.”
그걸 보며 나는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서 있을 힘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적은 쓰러졌으니.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목소리가, 고막을 불쾌하게 뒤흔들었다.
“훌륭해요. 정말, 훌륭합니다.”
어디선가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그건…언젠가 봤던 사교의 사제였다.
“성지를 밟지 못한 신은 그 힘이 다소 약해지죠. 하지만 그래도 설마, 이렇게 금방 신을 쓰러뜨릴 줄이야. 당신은 언제나 제 예상을 뛰어넘는군요.”
여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뭐라고 답해줄 기운도 없었다.
대신 여자의 속내를 읽으려 했다.
나를 죽이러 왔다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했으니.
그렇게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까지는 그게 불쾌했지만, 오늘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모든 준비가 끝났어요.”
준비라는 말에 내 머릿속에 불길한 예측이 지나쳤다.
그리고 그 예측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는 이곳에… 제 신이 강림할 테니까.”
여자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죽은 신의 시체 위에 꽂았다.
그것이 어떤 의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저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신을 부를 작정인가?
그럼, 여기서 이런 게 또 나온다고?
낭패라는 생각에 내 얼굴이 굳었다.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 하나가 더 나온다면, 도저히 이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른 방법도…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퀘스트 버튼이 반짝였다.
혹시나 거기에 해답이 있을까 싶어 이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로그와 함께 능력이 사라졌다.
갑자기 퀘스트를 비롯한 모든 UI가 시야에서 없어진다.
“…뭐야, 이게.”
나의 허무한 한탄과 동시에, 허공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아마도…신이 강림하는 문.
그런데 왜일까.
그 문에 새겨진 문자가 낯익었다.
“오십시오, 나의 신이시여!”
그리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것이 개변했다.
* * *
긴 기다림이었다.
신이었던 그녀가 지나치기에도 터무니없이 긴 기다림이었다.
한순간의 실수 이후.
그녀는 모든 힘과 신격, 심지어 자신의 이름마저 잃었다.
그리고 그저 어딘지도 모르는 암흑 속을 맴도는 하나의 의식으로 쇠락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불현듯, 기적이 일어났다.
그녀가 박살 나며 찢겨 나갔던 어떤 파편에, 다른 세계의 존재가 닿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세계의 존재는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그 파편은 여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을 기억하고 있던 조각이었기에.
그래서 그 다른 세계의 존재는 그녀의 신도가 되었다.
바라지도 못하던 기회였다.
그래서 여신은 그 유일한 신도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여신이었던 의식은 자신의 파편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고 겨우 신이라고 할만한 형태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찢겨나간 자신의 이름은 되찾지 못했다.
소멸당했을 당시 너무나도 처참하게 부서진 탓에 파편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탓이었다.
그럼에도 여신은 참았다.
이름이 없는 것은 과거의 위업을 계승하지 못한다는 의미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끝내 오늘이 도래했다.
시간을 거슬러도 찾지 못했던 그녀의 권능이 다시 돌아왔다.
또 다른 신을 바친, 자신의 신도 덕분이었다.
그래서 이 순간 여신은 자신이 다시 신이 됨을 느꼈다.
그때 그 힘이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충만함이 그녀의 의식을 채웠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고난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이 고난의 원흉이 되었던, 어떤 용사까지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여신은 온전한 힘을 되찾고서도 흠칫 몸을 떨었다.
그건…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할 실수였다.
그따위 존재는 절대 불러서는 안 됐다.
그건 용사라고는 칭할 수 없는 재앙이었고.
결코 다시 마주해서는 안 되는 멸망 그 자체였다.
그는 여신을 죽였고, 그것도 모자라 그 권능과 신격마저 뺏으려 했다.
그래서 여신은 최후의 순간.
남은 힘을 쥐어짜 그를 억지로 자신의 세계에서 추방시켰다.
제발, 다시 볼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쿠궁!
그런 그녀의 앞에 어느새 문이 생겨나 있었다.
이를 보며 여신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새롭게 시작할 때였다.
멸망해버린 그녀의 세계 대신, 새롭게 그녀의 것이 될 신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러니 이제 악몽은 잊어버리고, 말끔하게 새 출발을 하자.
그렇게 생각한 여신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아한 발걸음으로 그 문을 넘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신세계에서 가장 처음 마주한 것은.
“…너였냐?”
바로 그 절대적인 멸망이자 다시 마주하지 않기로 결심했던, 재앙의 얼굴이었다.
* * *
“하…”
문이 열리고 나온 것.
그걸 보며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하…”
내 웃음소리를 들은 그것이 움찔거렸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 머리. 오똑하게 솟은 코. 녹음이 짙은 눈동자.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나는 여신이라고 떠드는 저 빌어 처먹을 면상을 내가 잊었을 리가 없었다.
“너였냐?”
끝내 내뱉어진 내 목소리에 여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여신의 표정에서 말할 수 없는 당황이 묻어나왔다.
그리고 그때.
“느, 느껴집니다!”
갑자기 그녀를 부른 여자가 호들갑을 떨며 바닥으로 엎어져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 거대한 힘이… 바로 신께서 가진 힘이로군요!”
여자는 상황도 모르고 그렇게 떠들었다.
눈치라고는 더럽게 없는 여자였다.
무릎을 꿇고 대가리를 땅에 처박는 대신, 고개를 들어 저 표정을 봤으면 최소한 뭔가 잘못됐다는 건 깨달았을 텐데.
이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여자의 말이 완전 헛소리는 아니었다.
분명 여신은 이곳에 강림했다.
그리고 그렇게 강림한 여신은 지금 이곳에 거대한 힘을 퍼뜨리고 있었다.
다른 신이 그렇듯.
저 여신 역시 등장과 함께 현실을 개변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한창 그녀의 법칙이 이곳을 뒤덮고 있었고.
이제 이곳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닌, 내가 있던 바로 그 판타지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건… 즉.
“나도… 그때로 돌아간다는 거지.”
몸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쥐고 있던 검에 선명한 오러가 휘감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신이 갖고 있던 신격과 그 힘 자체가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저 여신은 그녀의 세상에서 나에게 죽었다.
내 검에 완벽하게 참살당해, 그 신격은 물론 그 모든 권능마저 나에게 뺏겼다.
그렇기에 그녀가 갖고 있던 모든 능력은 내가 그곳에 두고 왔을 뿐.
그건 사실 내 것과 다름이 없었다.
쿠구구구궁!
지면이 떨려왔다.
땅이, 아니 세계 자체가 내 존재를 감당하지 못해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퇴마사가 아니었다.
온갖 신의 권능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의 전승과 더해져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그저 용사 시절로 돌아갔나 싶었더니.
이제 보니 그것조차 아니었다.
이곳에서 퇴마사로 보낸 시절이 헛수고는 아니었는지.
나는 당시보다도 훨씬 강해져 있었다.
“……”
이를 본 여신의 눈동자에 본격적으로 두려움이 떠올랐다.
뒤늦게 여신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 있던 문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여신을 부른 사교의 여자도 이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듯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때.
여신과 똑 닮은 찬란한 금발을 가진 이국의 여성이 불현듯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정령신인 페레티나.
저 여신에게 패배한 여신의 동생이자 용사 시절, 내가 부리던 정령의 하나였다.
“계약자시여.”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페레티나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당신이 제게 부여한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그녀는 조금 전 보았던, 퀘스트의 로그와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어떤 기억이, 내 머릿속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