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312
312====================
최종 결전
– ……역시, 걱정할 필요 없겠어. –
비틀비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전황을 살피던 레야의 말이었다.
용족의 눈이 일 초에도 수십 미터를 넘게 움직이는 세현과 검은 로브의 전투를 쫓았다. 상황은 마젤란이 검은 로브를 상대할 때와는 180도 다르다. 단번에 결판이 나진 않고 있었으나, 그건 레야가 보기에 세현이 신중하게 임하는 탓이었다.
상대가 마법사인 만큼 행여나 놓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대충 그렇게 이해하며 레야는 순수하게 그 전투에 감탄했다.
잠시 그렇게 더 지켜보던 그는 이내 지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도 신경을 쏟았다.
묵빛의 어둠을 두르고 걸리는 모든 것을 절단내며 질주하는 폭풍이 보인다. 일전에 세현에게 들었던 악마대공이 분명했다.
학살자.
그 단순하고도 직관적인 칭호가 더없이 어울렸다.
은빛 선이 번쩍이며 휩쓸고 지나간 곳엔 적들의 시체밖에 남지 않는다. 발작적으로 쏘아진 공격들은 악마대공의 잔상조차 따라잡지 못하고, 우연히 닿는 것들도 어둠에 휩쓸리면 힘없이 스러질 뿐이었다.
화아악!
질주하던 어둠이 잠시간 멈췄다.
흡사 전설 속의 마왕처럼, 사방을 잠식하는 어둠의 중앙에서 보랏빛 한 쌍의 눈이 전장을 내려 살핀다. 시선이 마주친 자들이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무기를 떨어트리거나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자도 있었다.
두 남색 등급 악마는 그 가공할 악마대공의 존재감에 짓눌려 제대로 거동조차 못했다. 제 목숨줄을 노리는 수호성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머저리처럼 허둥대며 거의 공황상태에 빠진 모습이다.
서로가 소모를 강요하듯 흘러가던 전장은 악마대공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돌변했다.
류한 측 인원들조차 공포에 얼어붙은 그곳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학살자의 경로를 따라 어둠과 피보라가 휘몰아쳤다.
레야는 그 전율스런 장면에서 간신히 눈을 뗐다.
아래의 전장도 중요하지만, 역시 보다 중요한 것은 세현과 검은 로브의 싸움이었다.
@
세현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력화시킨 천둥벼락의 맹세를 아래로 내던지며 도망치는 검은 로브를 쫓는다. 세계가 부서지듯 밀려나는 경관의 끝에, 급속도로 다가오는 적에게 자색빛 일점이 찍힌다.
신이라도 죽일 기세의 찌르기, 자하 제 일식 일함(一莟).
분명히 적중했어야 할 그 공격은 이번에도 빗나갔다.
하지만 심장을 터뜨리지 못했을 뿐 옆구리에서 뿜어진 핏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놈이 비틀대는 사이, 애써 벌린 거리를 순식간에 따라잡은 세현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온갖 마법을 휘감은 스태프와 청월이 충돌하며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잠깐의 힘겨루기가 이뤄지는 건너편으로 한껏 일그러진 표정의 또 다른 자신이 보인다.
얼굴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눈 하나를 앗아간 흉터, 그를 보다 말고 세현은 청월을 힘껏 밀쳐냈다.
태풍에 맞은 조각배처럼 검은 로브가 형편없이 날아갔다. 그렇게 놈이 튕겨나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따라붙은 세현의 손아귀에서 무형검이 튀어나와 일격을 가했다.
놈이 외친 주문은 발생한 충격과 폭음 사이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도 무사히 발동은 했는지, 놈은 이번에도 목숨을 건지면서 세 번째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하나 그것은 이전처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필시 전설급 이상임이 분명한 아이템이 타격에 휩쓸려 허공을 난다. 빛살처럼 날아든 탄지에 의해서였다.
“나와 비슷한 짓을 하는구나.”
성공적으로 상대의 수작을 저지했음에도 세현은 분노를 담아 짓씹듯 말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죽이겠노라 선언했지만 그렇다고 살수를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한데 분명히 베이고 찔렸어야 할 공격에서 몇 번이나 기이하게 살아나가는 검은 로브의 모습에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놈에게는 능히 권능이라 부를 만한 힘이 있다. 그가 상대했던 두 악마처럼, 영변불사(影變不死)의 권능과는 분명 다르겠지만 그와 비견되는 생존력을 보장하는 어떠한 힘이.
아마도 100레벨 스킬의 힘일 것이다. 놈이 약간이나마 깨우친 신성이 더해지며 상호작용을 일으켰음이 분명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둘로 쪼개듯 참격이 그어졌다.
동시에 검은 로브의 몸이 흐릿하게 번지며 가까스로 옆에서 나타났다.
그것을 나타났다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해야 할까, 표현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놈은 실제로 현상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세현의 공격이 돌변했다.
최소한 사지를 자르기 위해 날아들던 검격들이 주변 마법진들을 우선해 부쉈다. 또한 상대를 직접 타격하기보단 공간을 점하는 것에 주력했다.
아차 하는 사이 칼날들에 둘러싸이게 된 검은 로브가 제대로 대응책을 짜내기도 전, 번개처럼 접근한 세현의 손이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세상이 급격히 회전한다.
허공에서 메쳐진 검은 로브는 흡사 운석처럼 대지로 내리꽂혔다.
“칵…!”
폭발과 굉음 속에서, 피를 토하는 그의 앞에 세현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역시 안 죽었군.”
그 말과 함께 세현의 발이 검은 로브의 가슴팍을 밟아 짓눌렀다.
어마어마한 압력이 가해진다. 총돌의 여파로 무수한 균열을 일으킨 대지가 묵직한 비명 같은 소리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처음 머리통을 틀어쥐고 대지에 갈아내던 공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형검으로 턱을 가격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기어검에 어깨가 관통당한 것도 그랬다. 그건 고작 관통상으로 끝날 위력의 공격이 아니다.
한데, 그렇게 무지막지한 내구성을 보이며 광속에 버금가는 검격들까지 이리저리 잘도 피해왔으면서, 이번의 메치기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당했다.
지금도 그렇다.
아무리 힘껏 짓밟고 있다지만 따지자면 이것은 그가 휘두르는 한 번의 칼질보다 못한 힘이다. 날아드는 검을 정면에서 몇 번이고 막아냈으면서 이까짓 발을 치우지 못한단 말인가?
자신을 갖고 놀 생각이냐며 분노하는 척하던 것이 오히려 함정이었던 거다.
차라리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놈을 지치게 만들었을지 몰랐다.
“……이거 참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안 그래도 천천히 죽이고 싶었는데, 빨리 죽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겠군.”
세현은 진득한 살기를 담아 이죽댔다. 검은 로브는 숨을 내쉴 때마다 입가에서 피거품을 끓이며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버르적대고 있었다.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친히 알려주마.”
가슴을 짓누르는 다리에 한층 힘을 더하며 그가 말했다.
“하나, 너는 나를 무림으로 보냈다.”
……그륵!
검은 로브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피거품 끓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세현은 그에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단 먼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넘어가지. 차원이동에 시간의 역설을 끼워 넣어 함정으로 써먹은 건 아주 참신했다. 과연 나다운 발상이었어. 한데, 왜 그 똑똑한 머리로 나를 무림에 보냈을까? 선택지가 그곳밖에 없지는 않았을 텐데?“
만약 무림이 아닌 적당하게 강해지는 세상으로 보냈다면.
지금처럼 세현이 신이 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이를 살리고 싶었겠지. 이렇게 세계를 둘로 쪼개는 짓까지 했는데, 누이가 다시 죽는 상황을 상상도 하기 싫었던 거야. 어차피 통제 불가능한 리스크를 감수한다면 리턴이라도 확실하게 받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그렇게 세현은 무림에 떨어져야 했다.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수백 번이 넘는 생사고비를 넘어, 에레도스 사태 직후인 1레벨 상태에서도 남색 등급 괴물을 도륙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을 얻었다. 몇 년이 지나고선 신의 반열에 올라버릴 정도로.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검은 로브로서는 천장단애(千丈斷崖) 절벽을 눈앞에 둔 것처럼 막막한 심정이었으리라.
“둘, 너는 나를 무림으로 보냈어.”
그것은 첫 번째와 같은 말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뜻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이성적으로 보였던 세현의 얼굴이 천천히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동시에, 분노라는 감정이 눈에 보일 듯 형상화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세현의 머릿속에서 무림의 기억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도, 가장 슬펐던 것도, 가장 분노했던 것도, 가장 비참했던 것도.
모두 무림의 것이다.
두 번은 결코 하지 못할 지옥 같은 세월이었다.
“네가……! 네가…!!”
청월을 옆으로 던져버린 세현이 손을 치켜들었다.
마력이 미친듯이 소용돌이치며 자색 의형기가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빛을 내뿜는다.
“네놈이! 나를! 무림으로 보냈어!!!”
꽈광-!!!
내리꽂힌 주먹이 검은 로브의 안면을 직격했다.
뭉개지는 코뼈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정도의 충격이 머리통을 타고 대지를 강타했다.
일대가 통째로 주저앉으며 거센 충격파에 뒤섞인 파편들이 사방으로 쏘아졌다. 그 어떤 튼튼한 금속이라도 형편없이 뭉개졌을 끔찍한 위력의 주먹질에도, 검은 로브는 죽지 않고 살았다.
그럴 줄 알고 내리쳤다.
세현에게서 자색 안광이 줄기줄기 뿜어졌다.
그는 지구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고 무작정 폭발시켰다.
주먹이 재차 아래로 떨어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쉬지 않고 내리치는 주먹에 천지를 무너뜨릴 듯한 굉음이 연속해서 터져나온다.
그는 악귀 같은 표정으로 악마처럼 분노했다.
아무런 형식 없이 짐승처럼 내려찍어대는 두 주먹에 점차 검은 로브의 얼굴이 형태를 잃어갔다. 대지가 수십 미터 넘게 가라앉으며 광범위한 지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오로지 분노에 의해 몰려든 마력들이 지옥의 비명 같은 소리로 폭풍을 이루었다.
아무리 권능을 가진 검은 로브라도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거력(巨力), 그것이 세현의 두 주먹에 담겨 마지막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쳐졌다.
-!!!!!
세계가 울부짖는 듯한 비명과 세현이 내지르는 분노의 고함이 뒤섞여 구분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검은 로브의 머리 바로 옆을 가격한 두 주먹에 기어코 땅이 무너져 내린다. 가로 방향으로, 수백 미터 길이의 크레이터가 발생하며 난데없는 절벽지형이 만들어졌다.
그 절벽의 중앙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바닥에 검은 로브의 몸이 틀어박혔다. 그를 다시 짓밟으며 나타난 세현은 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미친듯이 손을 휘둘렀다.
“으아아아아아아-!!”
콰콰콰콰쾅!!
분노에 찬 두 손에서 의형기가 파도처럼 뿜어져 온갖 곳을 후려쳤다. 방금 만들어졌던 절벽지형이 재차 붕괴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끝없이 아래로 추락해갔다.
세현은 더없이 격렬하게 분노했다.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를 무림으로 보낸 것이라면, 그놈이 누구든지 간에 지옥 끝까지 쫓아가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노라 수천 수만 번 넘도록 맹세했었다.
번개처럼 뻗어진 손이 시체처럼 추락하는 검은 로브를 붙잡아 위쪽으로 날려버린다. 로켓처럼 쏘아지는 그 신형을 찰나에 따라잡으며, 세현은 두 손을 맞잡아 해머처럼 내리쳤다.
치솟던 기세보다 배는 더 빠르게 검은 로브가 아래로 처박혔다.
무너지는 대지보다 더 빠르게 떨어지는 검은 로브의 신형 코앞에서, 귀신처럼 나타난 세현이 주먹을 뻗는다. 전신의 회전력을 담아 내지르는 직관적인 스트레이트, 공간 자체를 때려부술 기세로 쏘아진 주먹이 이미 뭉개질 대로 뭉개진 검은 로브의 안면을 직격했다.
고리형 충격파가 터지며 사방을 후려쳤다. 안 그래도 연이은 충격에 쉴 새 없이 무너지던 대지가 일순간 거대한 공동을 만들어냈다.
검은 로브는 그 공동의 끝까지 날아가 처박혀선 미동조차 없었다.
“크허억…! 허억!”
그 절제 없는 파괴의 중심에서 세현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체력이 달려서가 아니라 화산처럼 폭발한 감정의 격류 탓이었다.
============================ 작품 후기 ============================
부디 재밌게 읽으셨길 바라며, 추천 한 번 꾸욱!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