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ibility RAW novel - Chapter 15
05. 타생지연
이환에게 있어 사립 고등학교가 좋은 건 딱 한 가지였다. 어떤 문제를 일으켜도 웬만해선 선생들이 눈감고 그러려니 한다는 것. 누구 하나 심각하게 거론하려 들지 않는다.
돈 많다는 부모들이 자식을 사립고로 보내는 것도 같은 이유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가 사고를 치고 주먹질에 쌈질에 조용할 날이 없어도 선생들이 쉬쉬하는 것이지.
사실 뭐, 그 나이 때 철드는 애들이 몇 있나. 기껏 철이 들었다 해 봐야 좋은 대학엘 가겠다고 선생들이 시키는 대로 공부나 하는 것이지. 확실한 건 이환이 철든 쪽 학생은 아니었다는 거다.
“야, 너 또 어디 가는데.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고 안 했어?”
“우리 영감 생일을 나보다 네가 더 잘 안다?”
“네가 지난주에 얼핏 지나가는 말로 얘기했어. 그래서 내가 데이트, 아니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했는데도 깠잖아. 기억도 못 하니? 야, 또 어디 가는데!”
불쌍한 서지영이.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다고, 친구 하자 골백번도 더 쫑알대던 년이 왜 저 싫다는 말은 알아듣질 못해. 하긴 눈치가 있었으면 서글프기만 서글펐지, 알아서 또 좋을 건 뭐겠어. 그녀도 철든 학생이 아닌 건 매한가지인 게 분명했다. 철들어 봤자 좋을 건 또 뭐야.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저나 나나 더 편할지도 모른다.
조금 일찍 학교를 나왔다. 누나가 있는 골목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모텔, 말이 모텔이지 불법 안마 시술소. 안마 시술소는 염병. 시간당 얼마에 섹스를 사고파는 성매매 업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구질구질한 삶 속에 뛰어든 누나. 이유를 모르지 않으니 더 화가 났다. 등신같이 착하기만 해서 얻어맞아도 되돌려 줄 줄을 모른다. 그러니 그녀의 유일한 혈육을 자처하고 나선 그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골목으로 향하는 길도 순탄치 않았다. 꼭 무엇을 피해 도망이라도 간 사람처럼, 누나는 서울의 넓고 번쩍거리는 불빛을 두고 가장 음습한 곳으로 숨어 버린 것이다.
교문을 나오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가을비라 거세진 않은데 금방 그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야, 차이환. 어디 가냐?”
“공부하러.”
“지랄.”
그를 잘 아는 놈들이 깔깔거렸다.
“야, 서한아. 약국이 어디 있지?”
“약국? 야, 약국이 어디 있냐?”
인생 패배자들처럼 교문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던 놈들 중 하나가 뭐라 뭐라 쫑알거리며 연기를 뱉는다. 묻느니 혼자 찾을 걸 그랬다는 짧은 후회가 스쳤다. 쪼다들 같다.
“너희들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왜, 여친 임신했냐? 임신 테스트기라도 사게?”
“어쩐지 요새 계속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시더라. 어디 누군데. 광양고? 서일고?”
“그렇게 맨날 처다니니까 임신을 시키지, 새끼야.”
질 낮은 농담에 대꾸해 줄 가치도 없었지만 낄낄거리며 좋다고 웃어 대는 애새끼들을 보자 하니 또 한심스러운 게 저도 저럴까 싶었다.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이 천박한 새끼들이라니. 하긴 누가 누굴 욕할 처지가 못 된다. 한심스러운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새끼는 꼭 너희들처럼은 안 돼야 할 텐데.”
오, 미친 새끼가, 진짜냐? 임신했어? 온갖 질 낮은 농담들이 불량배처럼 그의 주위를 배회했다. 이환은 떨치듯 그들을 뒤돌아 걸었다.
누나가 며칠 전부터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바보가 직접 약국에 가 약 한 알 사 먹을 리가 없었다.
학교에서 한 블록 떨어진 약국으로 들어갔다. 편두통 약을 찾으니 약사는 약효가 괜찮다는 약 몇 개를 내보여 왔다. 그냥 알아서 달라며 지폐를 꺼내는데 그의 곁으로 여자애 하나가 붙어 섰다. 보이는 건 정수리가 다였지만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저… 소화제 하나 주세요. 저희 아빠가 드실 거예요.”
제법 또박또박 의사 전달을 한 데에 반해 이어지는 뒷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지갑이 어디 갔지. 잠시만요.”
제 덩치만 한 백팩 지퍼를 열고 한참을 뒤적거리던 여자애 얼굴은 금세 먹색이 되고 울상이 됐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다. 분명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 저기, 말을 잇지 못하고 멍청히 입만 뻐끔대는 여자애 눈썹이 축 처졌다.
이환은 약을 받아 들고 대충 거스름돈을 쥐었다. 아니, 쥐다 말고 남은 지폐를 다시 내밀며 멍청하게 선 여자앨 턱짓했다.
“여기, 소화제 줘요.”
두통약 상자를 주머니 안으로 쑤셔 넣고 약국을 나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때문인지 평소보다 날이 쌀쌀했다. 번잡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비를 피해 뛰어가는 건가 했더니 빠르게 바빠지는 발걸음이 자신과 가까워지자 잦아진다.
아까 그 여자애였다. 교복 오른쪽 가슴께에 명찰이 먼저 보였다. 정연. 외자였다. 특별할 것도 없지만 어쩐지 평범하진 않아 보이는 이름이었다.
“저기, 고맙습니다. 지갑을 잃어버린 거 같은데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어서. 번호라도 알려 주시면 꼭 갚을게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여자애를 마주하는데 어디서 본 얼굴인지 생각이 났다. 비를 피하느라 손으로 눈 주위를 가리고 있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때, 지구대에 끌려갔을 때 제 아빠라며 옆에 서서 코코아를 주던 그 여자애였다.
쪼끄만 게 제 아빠 속상하게 한다고 닥치고 코코아나 마시라고 종이컵을 내밀던 그 맹랑했던 여자애. 됐다며 뒤돌아서 걷는데 전화가 왔는지 제 아빠와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땐 몰랐었다. 이 애와 다시 엮이게 될 줄은.
그 아이와 지독하리만치 뜨겁고 깊게 얽히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