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ver Temptation of the Iceworld RAW novel - Chapter 26
25장. 내기의 전말
“영숙아! 이거, 거기 좀 갖다 놔라.”
“아니, 뭐가 이렇게 많이 나와? 아직도 남았어?”
영숙은 조리실 안쪽에서 나오는 커다란 접시를 받으며 소리쳤다. 도대체 상다리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운데 또다시 이렇게 큰 접시가 나오다니, 상 여섯 개도 모자랄 판이었다.
“처제. 놔둬. 저 사람한테 처남이 보통 동생이야. 아들이나 다름없이 키웠는데 처남이 결혼할 아가씨를 데려온다니 저 사람이 저러는 건 당연한 거야. 뭘 꺼내놔도 부족하다 생각들 걸?”
하긴. 영숙은 형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사촌언니 혜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딸만 주루룩 셋이던 고모와 고모부가 쉰의 나이에 태훈을 낳고 태훈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신 후에는 혜숙이 태훈을 키웠다. 그러니 태훈은 혜숙에게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여느 며느리와는 다른, 태훈의 짝이 인사를 온다고 하니 혜숙은 벌써부터 기대에 차 있었다.
“아이고. 언니. 인제 그만 꺼내. 더 놓을 데도 없어.”
둘째, 미숙이었다. 영숙과 혜숙이 운영하는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금일휴업’이라는 종이까지 써 붙이고 가게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가게 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다. 태훈의 세 누나인 혜숙, 미숙, 태숙에 그들의 남편에 아이들까지….요즘 세상에 대가족도 이런 대가족은 보기 힘들 것이다. 저마다 또 애들은 셋 이상씩 낳아서는 아이들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안 와? 올 때 되지 않았나?”
“전화 한번 해봐.”
누군가 태훈이 너무 늦다며 툴툴거렸고 그 뒤를 이어 전화기를 집어 드는 사람이 있었다.
“놔 둬. 뭐 하러 자꾸 전화해? 운전하는 사람 불안하게.”
혜숙이 조리실에서 나오며 태훈에게 전화를 거는 태숙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아까 인천으로 진입했다 하지 않았나? 그럼 지금쯤 도착해야지.”
“놔두래도. 뭐라도 사올 모양이지. 닦달하지 말고 진득하니 기다려. 그리고 모두들 잠깐 앉아봐.”
혜숙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왕좌왕 시끄럽던 가족들이 모두 자기 자리에 앉았다. 부모님이 안 계신 이 집안의 최고 어른은 혜숙이었고 혜숙의 명령이면 그 아래 동생들에게는 법이었다.
혜숙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가족들을 휘이 둘러보았다.
“내 미리 말해 두지만 나이 어린 올케라고 업신여기거나 막 대하는 사람 있으면 내가 용서 안한다. 내 며느리나 다름없는 올케야. 그리고 난 내 며느리한테 시집살이 시킬 마음 요만큼도 없어. 지들이 좋아서 하는 결혼이고, 난 태훈이 믿으니 반대할 생각도 없다. 게다가 영숙이 말 들어보니 아가씨도 꽤 참한 것 같고. 오늘은 그저 형식적인 자리에 불과해. 부모 없이 자란 우리 태훈이한테 시집 와주는 것만도 난 고마운 사람이야.”
“언니, 그건 아니지. 태훈이가 뭐가 아쉬워서. 태훈이 만한 신랑감이 어딨어? 인물에, 학벌에, 직업에, 일등 신랑감이지.”
아니나 다를까. 큰언니 혜숙이 말씀 하시는데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은 태숙밖에 없었다.
“특히 너! 너 만약 예비 올케한테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 했단 봐. 넌 그 시간부터 우리 집 출입금지야. 알았어?”
혜숙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태숙은 금방 주눅이 들었다.
“알았어. 누가 뭐랬다고…..”
“다시 한 번 말 하지만 난 시누이 많은 집 티내고 싶은 생각 전혀 없다. 태훈이를 내 아들처럼 키웠듯이 올케도 내 딸처럼 위해 줄 거다. 아니, 저희들만 잘 살면 간섭조차도 안 할 생각이야. 그러니 여러분들도 내 뜻을 따라주기를 바래요.”
혜숙은 자신의 동생들과 제부들, 그리고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을 모두 돌아보며 다짐하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경고와도 같은 선언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누나가 셋이라고요?”
“음.”
현수는 놀란 눈으로 운전을 하는 태훈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가족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기가 막히는데 누나만 셋이란다. 갑자기 현수는 덜컥 겁이 났다. 일찍 결혼했던 친구들이나 선배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며느리의 가장 큰 적은 시누이라던데, 시누이가 셋이라니.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했죠?”
“음.”
더 걱정이 되었다. 부모님이 안 계시면 손위 시누이들이 집안의 어른이라는 얘긴데…..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현수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훈은 또 무슨 곤란한 얘기라도 할 듯 망설이고 있었다.
“말해요. 미리 다 알고 마음 단단히 먹고 가게.”
“훗. 마음 단단히 먹을 게 뭐 있어. 너한테 뭐랄 사람 아무도 없으니 걱정 마.”
“금방 하려던 말을 뭐예요?”
“…..누님들이 나이차가 좀 나.”
“누구랑?”
“나.”
현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나?”
“많이.”
“그게 얼만데요?”
“……”
태훈이 정확히 대답을 해주지 않자 현수는 더욱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뭐야? 빨리 말해요.”
“….큰 누님과는 서른 살, 막내누님과는 스물다섯 살.”
“뭐?”
현수는 자신이 잘 못 듣기라도 한 듯 태훈을 향해 되물었다. 서른 살? 누나 나이가 서른 살? 아니지. 태훈 씨 나이가 서른세 살인데, 누나 나이가 서른 살이면 안 되지. 그럼 누나하고 나이 차이가 서른 살?
“아니, 어떻게…..?”
“부모님이 날 낳으셨을 때 쉰이셨어.”
맙소사. 말로만 듣던 늦둥이였다. 그것도 쉰둥이. 저 무뚝뚝하고 잘난 체하는 강태훈 박사가 쉰둥이, 막내였다니! 현수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저렇게 덩치 큰 강태훈이 늦둥이라니!
“푸, 푸후후하하하하하.”
그녀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태훈이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알았지만 현수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이고, 누구더러는 막내가 어쩌니, 저쩌니 하더니 자기는 쉰둥이, 늦둥이에다 막내였으면서. 하하하하하.
“잠깐. 잠깐만요. 십호흡 좀 하고.”
현수는 한국의 전통 기와를 얹은 집의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언젠가 말했더 영숙의 그 설렁탕집이었다. 크다고는 들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다. 대로변에 위치하면 ‘설렁탕’이라는 간판 하나 내건 기와집에서는 말 그대로 위풍당당함이 느껴졌다.
“긴장하지 마. 모두들 반갑게 맞아주실 거야.”
현수는 옆에 서서 싱글거리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옆에 서고 보니 새삼 그가 커보였다.
“긴장돼요. 그렇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누님들이 셋이나 있으면 진작 얘기 좀 해주지.”
툴툴거리는 현수의 말에 태훈은 더 깊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냥 편하게 생각해. 나이 차가 많이 나니 널 더 귀여워 할 걸? 나처럼.”
“내가 귀여워요?”
현수는 그의 귀엽다는 말에 웃음이 났다. 스물아홉 살 다 큰 처녀한테 귀엽다니….
“훗. 귀엽지 그럼. 사랑스럽고. 들어가자.”
그가 그녀를 이끌자 현수는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그가 이렇게 옆에 있으니 든든한 생각이 들었다.
현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한 마디씩 건네는 거인들에게 주눅 들어 인사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기가 막혔다. 마치 그녀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거인나라에 온 것 같았다. 자신이 난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온통 큰 사람들 뿐이었다. 하다못해 몇째 누나의 셋째 아들이라는 남자조차 그녀보다 몇 뺨은 더 컸다. ‘스물네 살이라는데 이렇게 커도 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기 모인 그 어느 누구도 그녀보다 작은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얜 태훈이 셋째 누나의 막내딸. 이 집안의 제일 막내지.”
영숙의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집안의 제일 막내이니 그래도 그녀와 엇비슷은 하겠지 하는 생각에 현수는 그나마 밝은 미소를 띠고 집안의 제일 막내를 돌아보았다.
“헉!”
현수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대학생이라는 막내딸도 그 덩치가 어마어마했다. 큰 키는 물론이고 엄마와 이모들을 닮아서인지 굵직한 골격과 살집이 현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안녕하세요. 외숙모.”
그래도 덩치에 맞지 않게 가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그 막내딸이 제일 만만은 해보였다.
“네.네….반가워요. 하하.”
“이렇게 섰지 말고 다들 앉아요. 현수 씨 목 아프겠네.”
영숙이 현수에게 윙크를 하며 서있는 사람들을 몰자 그 큰 사람들이 모두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자리를 정확히 아는지 순식간에 자리를 잡고 앉는 그들이 보였다.
“가자.”
현수는 멍한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자 태훈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정신 차려. 윤현수.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잖아. 넌 할 수 있어. 아자! 아자!’
“그래. 의사 선생님이라고요?”
“네. 아직 전문의는 아니고 공부 중입니다.”
“어려운 공부하는군요.”
현수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태훈의 큰누님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봐서 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은 저 큰누님으로 보였고 태훈에게도 남다른 누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숙과 마찬가지로 다른 누님들 모두가 여장부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 만큼 기골이 장대하고 목소리가 걸걸했다. 하지만 태훈을 바라보는 자애로운 눈길과 벌써 이만큼 커서 결혼할 여자를 데려왔다는 감흥과 애잔함이 섞여 현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물기마저 비치고 있었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좀 크죠? 그래도 마음 씀씀이는 덩치값을 하니 현수 씨 힘들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려워 말고 그저 편한 가족 대하듯 해요.”
그렇게 말을 맺으며 고개를 떨구는 태훈의 큰누님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다른 두 누님들도 눈물을 글썽이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언니. 또 왜 그러우? 이 좋은 날에. 현수 씨. 우리 언니가 태훈이 아들처럼 키웠어요. 부모님 돌아가시고 우리한테도 큰 언닌 엄마나 다름없었지만 어린 태훈이한테는 정말 엄마였다우. 그러니 이해해요.”
현수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덩치가 산만 한 사람들이 훌쩍이며 콧물, 눈물을 흘리면 도대체 어찌 대해야 하는지 그녀는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만 하세요. 손님 불러놓고.”
태훈이 눈살을 찌푸리며 누나들에게 한마디 툭 내뱉자 셋째누나라는 분이 눈을 홱 치켜들었다.
“냉정한 놈. 누이들이 감상에 좀 젖었기로 그걸 이해 못하냐?”
“됐다. 태훈이 말이 맞아. 현수 씨 곤란하게 우리가 주책이었지. 미안해요. 현수 씨.”
“아.네에. 괜찮습니다.”
현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은 태훈을 툭 건드렸다. 하여튼 인정머리 하고는. 누나들이 누구 때문에 저렇게 감상에 젖었는데. 현수는 저도 모르게 태훈을 지금껏 키워준 태훈의 누나들에게 정이 들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자식도 아니고,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린 동생을 키운 큰누나는 더욱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큰누님의 눈물에 현수도 눈물을 글썽였다.
“제가 잘할게요.”
현수는 맞은편에 앉은 태훈의 큰누님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제 큰누님 대신 제가 태훈 씨 잘 돌보고 잘 챙길게요. 걱정 마세요.”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을 하는 현수의 행동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모두들 놀란 눈치였다. 서울깍쟁이처럼 야들야들한 몸매에 예쁘장한 얼굴을 한 현수가 멀게만 느껴졌는데 저렇듯 진심 어린 말을 건네니, 현수가 다시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현수가 마음에 든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어서 먹어요. 음식 앞에 놓고 서론이 너무 길었네. 많이 먹어요.”
“그래. 현수 씨. 많이 먹어. 혜숙 언니가 오늘 새벽부터 일어나서 차린 상이야. 완전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상이니 맛있게 먹어.”
현수는 영숙의 웃음기 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네. 잘 먹겠습니다.”
더할 수 없이 쾌청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따뜻한 오후였다. 5월의 햇살은 따뜻했고 공기 또한 상쾌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남산의 야외예식장은 아름답게 장식된 화환과 푸른 잔디, 녹음이 빛나는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빛이 나고 있었다.
“아유. 정말 날도 너무 좋네요.”
“그러게요. 하나 있는 딸, 시집보내기 딱 좋은 날씨네.”
아름답고 맑은 날씨에 하객들의 입에서는 절로 감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외예식장으로 통하는 입구에 선 건장하고 잘생긴 신랑을 향한 찬사도 빠지지 않고 있었다.
“거 참. 아니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래? 어찌 저리 잘 생겼누? 이 집 딸이 의산데 신랑도 의산가?”
“아니래요. 무슨 박사라고 하던데. 남극에서 뭘 연구한다던데?”
“남극? 아이고, 그 추운데서?”
“그렇다네. 그 왜 뉴스에도 나오잖아요. 남극 세종기지.”
“아…..그럼 신랑도 대단한 사람이네?”
“그렇지. 인물도 잘 생기고 현수 엄마 딸 시집 잘 보내는구먼.”
“그러게.호호호호.”
“신랑님. 신부 대기실로 가셔서 사진 좀 찍겠습니다.”
태훈은 자신을 부르는 사진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너무 예쁘다. 얘.”
“고마워. 그런데 진영이 못 봤어?”
“응. 아직 안 왔나 본데?”
“그래?”
현수는 신부대기실의 입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홍진영이 자신의 결혼식에 빠질 리가 없었다. 분명 2주 전 전화에서는 꼭 참석한다고 했었는데…..순간 신부대기실의 문이 열리자 현수는 고개를 퍼뜩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던 진영은 아니었지만 이제 곧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신랑이었다.
태훈은 현수의 눈부신 자태에 얼이 빠졌다. 오전에 그녀가 화장을 하는 것을 잠깐 보기는 했었지만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드레스를 고르며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완벽한 모습은 아니었었다. 자연스럽게 틀어 올린 머리 위로 앙증맞은 티아라가 씌워져 있었고 요즘의 트렌드라는 자연스러운 화장이 그녀의 얼굴을 더욱 아름다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자. 친구 분들은 잠시 밖에 나가 주세요.”
사진사의 주문에 친구들이 우르르 나가고 신부대기실에는 그녀와 태훈, 그리고 사진사만이 남았다.
“자. 신랑 분, 너무 넋을 빼고 있지 말고 사진부터 찍읍시다. 처음이라 뭘 모르시는 모양인데 지금 신부한테 너무 빠져있으면 시간이 더 느리게 갑니다. 신부 감상은 오늘 밤에 실컷 하세요.”
사진사의 거침없는 말에 현수도 태훈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사진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며 몇 컷을 찍고 드디어 사진사가 ‘됐습니다.’를 외쳤을 때 태훈이 입을 열었다.
“딱 1분만 둘이 있게 해주십시오.”
“네?아. 예. 그러세요. 내가 문 앞에 지키고 있지요. 하하하.”
사진사는 웃으며 대기실을 나가 문을 닫아 주었다.
“왜요? 둘만 있으면 친구들이 놀려요.”
태훈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재빨리 키스했다.
“못 참겠는데 어떡해? 이렇게라도 해야 오늘밤까지 참겠는데.”
태훈의 사랑스러운 눈길에 현수는 살짝 볼을 붉혔다. 태훈은 그런 그녀의 볼을 감싸 쥐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실과 약속을 담아 속삭였다.
“사랑해. 윤현수. 행복하자.”
“사랑해요.”
태훈은 아쉬운 키스를 하고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자식 왔어?”
현수는 대뜸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는 태훈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구요?”
“그 선배라는 놈.”
응? 선배? 아….
“풋. 명운 선배?”
“그래.”
“몰라. 아직 못 본 것 같은데?”
“알았어.”
현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문을 열고 사라지는 태훈의 뒷모습을 보며 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강태훈 박사님. 어찌나 질투가 심한지. 명운 선배를 향해서는 질투와 고마움을 동시에 가지는 듯 했다. 한 순간이라도 현수를 가질 뻔했던 명운 선배를 남자로서 질투하는 듯 했고 하지만 그녀를 배신함으로써 현수를 그에게 보내준데 대해 고마워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현수는 고마움만 느꼈다. 한순간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었던 그녀를 배신해준 명운 선배가 이 순간 그녀에게는 가장 고마운 사람이었다.
“어서 불어.”
“전 모릅니다.”
승규는 차렷 자세를 한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등으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너. 내가 눈치가 백단인 걸 모르나 본데.”
승규는 다시 으름장을 놓는 장 박사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의 입이 말썽이었다. 조금 전 야외예식장 주변에 있는 인공폭포 앞에서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다 장 박사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여자친구에게 공돈 생겼으니 맛있는 것 사준다며 공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대충 말하다 옆으로 다가온 장 박사를 알아채지 못한 탓이었다.
“저, 전 박사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흠. 이승규. 너 조금 전에 전화기에 대고 내기가 어쩌고, 조작되었는데 어쩌고, 지능적인 강 박사가 어쩌고 했어? 안했어?”
승규는 조가비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다 들었다. 이쯤 되면 무조건 우기는 수밖에 없었다.
“전 그런 말한 적 없습니다.”
“하! 그런 말한 적이 없다?”
“예. 없습니다.”
살 길은 무조건 우기기밖에 없었다.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우기면 살 길이 보일 것이다. 승규는 굳게 다짐했다. 이 일에 그의 미래가 달려있었다.
“이승규.”
“…….”
“자네. 남극대륙 제2세종기지 월동대 신청했더군?”
“헉!”
부드럽게 묻는 장 박사의 질문에 승규는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 첫번째 월동대 대장으로 가는 거 알지?”
이런 제길. 승규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아니, 둘이 짰나? 그가 월동대에 참가할 수 있도록 힘 써줄 사람이 딱 둘 있는데 그 둘이 모두 월동대 참여 건으로 협박을 하고 있었다. 강태훈 박사도 그러더니 이번엔 장영진 박사였다. 승규는 기로에 서 있었다. 태훈의 협박에 넘어가 태훈과 짜고 태훈과 윤 선생의 결혼 내기장부를 만들었었는데 이젠 그 사실을 실토하라고 장 박사가 협박을 하고 있었다. 누구를 선택하느냐. 승규의 갈등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박사님. 저 말 못합니다. 저 말 하면 월동대 참여 못합니다.”
“어허. 이승규. 내가 월동대 대장이야. 말해. 자네가 지금 말 안하면 월동대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마찬가지야. 하지만 말을 한다면 참여할 확률은 더 높아져.”
승규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사실 태훈 선배가 시켜서 한 일이지 자신이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태훈 선배에게 협박을 당해 그랬다면….선배. 미안합니다.
“뭐? 뭐가 어쩌고 어째? 이런 순 사기꾼 같은 놈들!”
장 박사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승규를 노려보았다.
“죄송합니다.”
장 박사는 기가 막혔다. 둘이 짜고 만든 내기장부라니. 둘이 결혼을 했으니 내기장부에 참가했다가 결혼은 아니다에 돈을 걸었던 월동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었다. 그런데 그 내기장부의 주체가 강태훈이었다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완전히 강태훈 그놈한테 모두가 속아 놀아난 꼴이었다. 아이고, 혈압이야.
“그러니까 결혼 내기장부를 만들 때부터 강태훈은 윤 선생과 결혼할 생각이었다?”
장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는 승규를 바라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엉큼한 놈. 자신이 있었던 게지. 윤 선생에 대한 확신도 있었고, 스스로에 대한 마음도 확실했던 것이지. 장 박사는 예식장 입구에 서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고 있는 태훈을 쳐다보았다.
‘저런 능구렁이 같은 놈. 엉큼하고 사기꾼 같은 놈. 하! 나 참.’
장 박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승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놈 강태훈. 너도 당해봐라.
“윤 선생은 모르지?”
“네?”
승규는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윤 선생은 자기를 두고 태훈이 놈이 내기한 거 모르지?”
“그야….네. 모릅니다.”
“됐어.이승규. 자네 월동대에 참가시키도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기쁨에 빛나는 승규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 박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대신,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예?”
승규는 가까이 다가오라는 장 박사의 손짓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갔고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장 박사의 말에 놀란 숨을 들이켰다. 아니. 이 양반들이 진짜. 왜 나만 가지고 그러냐고요들!
“전 못해요!”
승규는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절대 못해요!”
“남극 대륙 첫 번째 월동대원은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남을 거야.”
“그래도 못합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첫 번째 월동대원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을 하나 세울까도 생각중이야.”
“전 할 수 없어요.”
“아마도 남극대륙을 탐사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겠지.”
“박사님.”
“남극대륙에서 보는 오로라가 장관이라더군.”
“……..”
“자네가 연구한 내용이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적인 대 발견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다 둘이 잘못되면 어쩝니까?”
장영진 박사는 씨익 미소 지었다.
“잘못되기는 뭐가 잘못 돼? 강태훈이 좀 괴롭겠지만 결혼까지 했는데 윤 선생이 어쩌겠어. 아마도 신혼여행 가서 하루, 아니 한두 시간 괴롭히다 말거야.”
“그럴까요?”
“그러엄. 자. 내 말 잘 들어.”
승규는 다시 장 박사가 이르는 내용을 새겨들으며 울상을 지었다. 아! 인류를 위해 연구하는 학자의 길이 이렇듯 멀고도 험하구나.
“신랑 강태훈 군은 신부 윤현수 양을 이 세상을 다하는 그날까지 사랑하며 신뢰하며 인생의 동반자로서 소중히 할 것을 맹세 합니까?”
주례를 맡은 장영진 박사의 질문에 태훈은 현수를 지긋이 바라보며 진실을 담아 대답했다.
“네. 맹세합니다.”
“흠. 정말입니까?”
문득 태훈의 대답이 의심스럽다는 듯 다시 묻는 주례선생의 질문에 식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태훈은 현수에게서 눈길을 돌려 장 박사를 쳐다보았다.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장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마치 ‘너 이놈 함번 당해봐라’ 라는 듯한 표정을 가득 띠우고 있는 장 박사의 행동에 태훈은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네.”
태훈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답을 하자 장 박사가 ‘허허’ 웃음을 지었다.
“네. 신랑이 아주 큰 소리로 대답하는군요. 그 대답을 꼭 지키라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물었던 것입니다. 하하하.”
장 박사의 능글맞은 변죽에 하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장 박사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하객들은 이 순간 장 박사의 말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에. 신부 윤현수 양은 신랑 강태훈 군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아. 대답하기 전에 신부는 신랑을 믿는 것에 대해 신중을 기해 대답하시기 바랍니다.”
장 박사의 장난스러움에 태훈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니고 결혼식장이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장 박사가 저러는 이유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장 박사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이는 태훈에게 장 박사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한손으로 마이크를 막고 그에게 대답했다.
‘이 사기꾼 같은 놈.’
‘뭐가요?’
‘나중에 보자. 이놈아.’
다시 고개를 든 장 박사는 현수를 바라보며 다시 주례사를 이어나갔다.
“신부 윤현수 양은 신랑을 믿는 것에 대해 신중에 신중을 기해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신부 윤현수 양은 신랑 강태훈 군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순간 다시 객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주례선생이 갑자기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하객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한 채였다.
‘신랑한테 뭐 문제 있는 거 아냐?’
‘그러게. 주례가 신랑의 스승이자 직장 상사라며? 그런데 저렇게 자꾸 신랑을 믿지 말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이상하네.’
하객들이 앉아있는 여기저기서 속닥이는 소리가 현수의 부모님이 앉아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글쎄. 상견례 때도 아버지 대신으로 참석해서는 강 서방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던 양반이 오늘 왜 저러시나?’
현수의 부모님의 대화는 이러했고, 태훈의 큰누나와 매형의 대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야? 저거. 장 박사님 왜 저러시는 거야?’
‘태훈이, 장 박사님께 뭐 잘못한 거 있나?’
객석이 술렁이고 있는 사이 현수는 장 박사의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 거리다 그녀가 해야 할 대답을 했다. 왠지 장 박사의 질문에 이상하게 숨은 뜻이 보였지만 지금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도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따져 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네. 맹세합니다.”
현수의 대답에 장 박사가 다시 한 번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마치 ‘윤 선생. 태훈이 저놈 믿지 마.’ 라고 하는 듯한 메세지를 보내며…..현수는 눈길을 돌려 태훈을 바라보았지만 태훈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라는 표정이었다.
“자. 이로써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었습니다. 부디 강태훈 군은 윤현수 양의 믿음과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곧은 남편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태훈 군.”
태훈은 저 양반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장 박사를 바라보았다.
“네.”
“결혼 축하하네. 이상. 주례사를 마치겠습니다.”
술렁이던 객석도 장 박사의 명쾌한 마지막 대사에 다시 본연의 축하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리고 결혼행진곡이 연주되고 신랑, 신부는 많은 하객들의 축하 속에서 아름다운 결혼식을 마무리 지었다.
영숙은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웃고 있는 태훈과 현수를 지켜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오랜 시간 전에 자신도 저런 때가 있었다. 저렇게 화려한 드레스도 아니었고 현수처럼 저렇게 빛이 나는 아름다운 신부는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옆에서 행복한 웃음을 짓던 때가 그녀에게도 있었다.
부부가 힘들고 고된 시간을 함께 이겨내고 인생의 뒤안길에 접어들 때 서로를 의지하며 지난 시간을 함께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삶을 살아가며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태훈과 현수가 그렇게 되기를, 살다보면 어긋나고 힘든 순간도 있겠지만 현명하게 이겨내어 먼 훗날 지난 시간 함께 웃으며 추억하게 되기를 영숙은 진심으로 빌었다.
“식권 하나 얻읍시다.”
영숙은 자신의 눈앞으로 불쑥 펼쳐진 손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그 손의 주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정말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그가 눈가에 주름을 지으며 이제 막 부부가 된 신랑, 신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 잘 살 거예요.”
영숙도 그가 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안 해봤습니까?”
영숙은 놀란 눈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수한은 그런 영숙을 마주 바라보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꽃길은 아니지만 조용하고 아늑한 들길을 함께 걸읍시다. 주변의 풀과 나무를 풍경 삼아, 지나왔던 꽃길을 추억하며, 남은 생 의지하며 살아봅시다.”
영숙은 김수한의 조용하게 이어지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어떤 청혼보다 진실 되게 느껴졌다.
“지금 제게 청혼하시는 건가요?”
“그럴 겁니다.”
그리고 그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영숙은 상자를 받아들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들의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전 덩치는 커도 보호받고 싶어 하는 여자예요. 밥 해주고 빨래해줄 여자가 없어서라면 이 반지 못 받아요.”
영숙이 웃으며 말을 하자 수한도 마주 웃었다.
“밥하고 빨래는 제가 하겠습니다. 영숙 씨는 그냥 제가 퇴근할 때 집에만 있어주세요. 외롭지 않게.”
영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애했다. 불 꺼진 싸늘한 집으로 들어가는 그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그래놓고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밥하고 빨래하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그땐 제가 퇴근하더라도 불 꺼 놔 버리십시오. 하하하하.”
영숙의 괜한 시비에 수한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 영숙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둘은 햇빛이 따사로운 오후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 * *
태훈은 옆자리에 앉은 현수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신없이 결혼식을 끝내고 폐백을 할 때만 해도 그를 향해 웃어주던 그녀였다. 그런데 어른들께 인사를 하고 공항으로 출발할 때쯤 그녀가 변했다. 얼굴을 굳어있었고 그를 보고 웃어주지도 않았다. 묻는 말에도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것이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런가 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듯싶었다.
“피곤해?”
“….”
“피곤하면 나한테 기대서 한숨 자.”
“….”
“현수야.”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내버려둬요.”
태훈은 퉁명스럽게 말하는 현수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무슨 일이야?”
현수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여기서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내버려둬요.”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르듯 속삭이는 그녀의 행동에 태훈은 더욱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변한 행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
“정당한 이유?”
“그래. 정당한 이유를 말해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럼 말이지. 양인가? 손가?”
하! 정말 기가 막혔다. 뻔뻔한 강태훈. 그녀를 두고 내기를 한 것을 그녀가 알게 되었는데도 그녀가 화난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아니, 도리어 화가 난 합당한 이유를 대라고 되레 큰소리다. 주례사를 하며 이상한 질문으로 식장을 술렁이게 했던 장 박사님의 심정이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이해가 갔다. 그리고 장 박사님이 느꼈을 저 남자의 뻔뻔함을 이제는 그녀가 직접 느끼고 있었다.
“날 가지고 내기장부까지 만들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요?”
현수는 웃옷을 벗어 던지며 테라스로 나가는 그를 신경질적으로 쫓아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요? 날 가지고 논 거잖아!”
그녀가 빽 소리를 지르자 태훈이 휙 돌아보았다.
“놀긴 누가 놀아?”
현수는 그의 굳어진 표정에 더욱 화난 표정으로 응대했다.
“그럼 뭐에요? 내기장부 만들었다고 인정했잖아요?”
“후. 도대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 아. 물론 이승규 놈이겠지. 물론 그 뒤에는 위대하신 장영진 박사님이 계실 테고. 어쩐지 주례사를 하시며 이상한 행동을 하시더라니. 좋아. 내기장부를 만들었어. 처음엔 대원들끼리 우리 둘을 가지고 연애를 하네, 마네로 내기장부를 만들었다더군. 나중에 난 그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승규에게 우리 둘의 결혼내기장부를 만들라고 시켰어. 그게 뭐? 난 너하고 결혼하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도 있었거든.”
뻔뻔, 뻔뻔해도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지…..현수는 기가 막혔다.
‘아가씨.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신혼 때부터 꽉 잡지 않으면 아가씬 평생 잡혀 살아야해. 내말 명심해.’
불현듯 수진 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래. 언니가 말한 그 주도권이 이런 거야. 오늘 내가 저 뻔뻔함을 그냥 용인해준다면 그의 뻔뻔함은 평생 갈 거야.
“각방!”
“뭐?”
태훈은 현수의 자르는 듯한 짧은 한 마디에 고개를 퍼뜩 돌렸다.
“들었잖아요.”
현수는 턱을 치켜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고 봐. 강태훈. 죽었어.
“각방이라니?”
“말 그대로예요. 당신은 내가 화난 이유가 이해가 안 되고, 난 당신이 나 없는 자리에서 날 두고 사람들과 내기를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돼. 더더군다나 그 모든 것이 아무 잘못도 없다는 당신이 더 이해가 안 돼. 그러니 서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부부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건 난 못해요. 그러니 오늘부터 서로가 이해가 될 때까지 각 방이야.”
말을 마친 그녀가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태훈은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절대 안 돼. 각방?각바앙?”
태훈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기 시작했다. 하여튼 이승규 이놈을 그냥…..괜히 입을 잘못 놀려 장 박사님까지 알게 하고 게다가 저 여자 귀에까지 들어가게 하다니.
현수는 그녀의 뒤로 바싹 다가오는 그를 피해 얼른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그의 발이 더 빨랐다.
“아! 내 발!”
문을 닫는 틈 사이로 그가 발을 먼저 밀어 넣었고 현수는 그의 과장되게 아픈 비명소리에 주춤거렸다. 그 틈을 이용해 그가 문을 힘껏 잡아당기고 그녀를 안아들었다.
“내려놔요. 내려놓으라고요!”
현수는 그의 품에 안겨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가 그녀를 내려놓은 곳은 커다란 침대 위였다. 침대 위에 누운 그녀의 위로 그가 덮치듯 몸을 겹쳐왔다.
“강제로 하기만 해봐. 정말 용서 안 할 거야. 진짜예요.”
그녀의 짐짓 경고성 발언에도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 그녀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는 미소를 지었다.
“잘못했어. 그 벌도 받았잖아.”
“벌? 무슨 벌?”
그의 벌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현수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다가 네가 날 버리고 가는 바람에 내 자신감은 남극 빙하보다 싸늘하게 얼어버렸다고. 그 뿐인지 알아? 내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널 따라 왔으니 벌은 충분히 받은 거지.”
현수는 또다시 그녀의 성급했던 행동을 상기시키는 그가 얄미워 눈을 흘겼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따라 가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현수는 그의 손을 ‘딱’ 소리가 나게 쳐내며 단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직 안 돼요.”
태훈은 눈살을 찌푸렸다. 결혼준비 한답시고 돌아다니느라 피곤하다고 결혼식을 올리기 얼마 전부터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야 그녀를 합법적으로 마음껏 안을 수 있는 때가 왔는데 정작 제대로 안지도 못하고 있었다.
“또 뭐?”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그를 흘겨보며 현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를 요리하는 것이 의외로 쉬웠다. 벌써 사과까지 받아내지 않았는가.
“몇 가지 질문할 게 있어요.”
나 참. 태훈은 기가 막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의 몸은 이미 흥분해 그녀를 만지고 키스하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질문이 한 가지도 아니고 몇 가지라니…..
태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먼저 결혼 첫날밤부터 보내고 나서 질문하면 안 돼?”
“안 돼요. 음…..그럼 좋아요. 질문에 대답 잘하면 원하는 곳에 키스 한 번.”
젠장. 태훈은 그녀의 장난에 응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그녀와의 첫날밤이니 얼마간은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어야 할 듯싶었다. 물론 길게는 안 되고, 아주 짧게. 아주아주 짧게.
“맘대로 해.”
“지금부터 나 윤현수 외에 다른 여자는 여자로 보지 않을 수 있어요?”
“여자를 여자로 보지. 그럼 남자로 보라고? 아니면 눈 감고 살라고?”
그의 웃음기 실린 대답에 현수는 눈을 흘겼다.
“진지하게 대답해요.”
“쿡쿡. 난 남극에서 윤현수라는 여자를 만난 순간부터 너만 보였어.”
그의 대답에 만족한 현수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르켰다. 그러자 희미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사뿐히 내려앉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며 부드러운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그의 혀가 살그머니 들어왔다. 입안으로 들어온 그의 혀를 맞으며 현수는 기꺼이 자신의 혀를 감았다. 깊은 신음과 함께 둘의 키스는 깊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옷 위로 그의 손길이 느껴지고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행동에 현수는 더욱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으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서 멀어져 그녀의 턱 선을 따라 조용히 미끄러지자 현수는 입을 열었다.
“몇 가지 질문이랬잖아요.”
“음.”
그가 그녀의 목으로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있었다. 현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에게 목을 내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는 신음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때문에 남극 연구를 포기하지는 않을 거죠?”
그녀의 쇄골을 핥으며 블라우스를 풀어헤치던 그의 손길이 딱 멈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든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당신이 남극 연구에 얼마나 열정적인지 알아요. 내가 당신 꿈에 방해가 되고 싶지는 않아. 자주는 아니어도 꼭 필요하다는 순간엔 1년 정도 떨어져 있는 거 난 괜찮아요.”
그녀의 조용하게 이어지는 말에 태훈은 그대로 굳어있었다.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예뻤다. 안아주고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니 어쩌면 그녀와 떨어지기 싫은 그 자신 때문이라도 월동은 포기할 수 도 있다 생각했다. 하계연구만으로도 만족하려 했고, 월동연구원들이 보내오는 자료로 연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했었다. 하지만 부족할 것을 알았다. 세종기지는 아니더라도 남극대륙에 생길 제2세종기지에서는 그가 원하고, 그가 보고 싶은 연구 자료들이 엄청날 것이다. 남극대륙에서 월동하고 싶은 열망을 일부러 한 곳으로 밀어놓고 그녀를 가지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마도 십년정도가 흐른 후라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 한 적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언제 했어?”
“당신과 화해하고 키스할 때.”
태훈은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럽게 대답을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런 그녀를 사랑했다.
“사랑한다. 윤현수.”
태훈은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의 볼에도 그녀의 귓불과 가슴에도 키스했다.
“아직 하나 더 있는데….”
태훈은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넌 말해. 난 하던 일 계속 할 테니.”
그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젖히고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곧장 그녀의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아….우리….아기는 몇 명 낳아요?”
“….”
그는 아무 대답도 없었지만 현수는 굳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대답을 들으려고 했었는지도 잊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한입 가득 베어 물고 그의 손이 그녀의 깊은 곳을 쓰다듬자 그녀는 그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신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극의 깨끗함과 오염되지 않은 공기처럼 두 사람의 영원한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디선가 남극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에필로그
“세진아. 세종아. 옷 다 입었어?”
급한 발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뭐야. 세종인 아직 안 입었어? 빨리 해. 이러다 늦겠다. 세잔아. 세종이 옷 입는 거 도와줘. 알았지?”
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또다시 급하게 돌아서는 엄마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머리는 풀어헤쳐져있었고, 티셔츠 하나만 겨우 걸친 채 아래는 잠옷 바지 그대로였다. 우리더러 준비하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엄마가 더 급했다. 그보다 더 우선은 엄마가 좀 진정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눈길을 돌려 제 방은 놔두고 남의 방에 와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고 있는 3분짜리 철없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옷 입으라고 한지가 언젠데 지독히도 말 안 듣는 세종인 여전히 놀고만 있었다.
“세진아!빨리!”
또다시 고개만 쏙 내밀고 나를 닦달하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휴. 난 옷 다 입었다고요.
“야. 너 옷 안 입을 거야?”
“…..”
저 자식은 매를 들거나 화를 내지 않으면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녀석이었다. 아홉 살씩이나 됐으면서도 어떤 땐 너무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같은 아홉 살이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세종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자동차를 휙 뺏어들었다. 놈이 나를 째려본다.
“죽을래?”
흥. 저게 누나한테.
“옷 입어. 너 이렇게 말 안 들으면 아빠한테 다 이를 거야. 얼마 전에 말썽 피워서 엄마 우신 것하고, 또 옆집 동국이 때려서 엄마가 그 집 엄마한테 손이 발이 되도록 빈 것도 다 이를 거야.”
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당연하지.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빠는 용서치 않으니까. 그것이 비록 자식이라 할지라도. 특히 아빠가 집을 비운 때에 엄마를 힘들게 한 것이라면 정말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날 것이 분명했다.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놈이 드디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뭐라고 욕 비슷한 것을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세상을 산지 9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지 않아야 하는지는 아는 나였다. 왜냐하면 나는 똑똑하니까. 쌍둥이 동생 세종이와 난 기본적으로 다르다. 과학자인 아빠와 의사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딸답게 난 똑똑하고 예쁘게 자라고 있지만 세종이는 아니었다. 딸과 아들을 동시에 얻었다며 기뻐했던 엄마, 아빠의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운 놈이 바로 세종이었다. 남극에 있는 세종기지의 이름까지 따 저놈에게 붙였지만 나의 남동생 강세종은 그 기대를 열심히 저버리는 중이었다. 물론 엄마, 아빠는 아직 모른다며 더 크면 좋아질 것이라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부모 된 심정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자기 말 안 듣는 친구들 때리기, 한번 들은 욕은 꼭 자기 것으로 만들기, 나쁜 어른들 행동은 꼭 따라 하기, 그 누구한테든 지고는 못 살기, 누가 알기를 옆집 강아지로 알기, 뻑 하면 엄마 속상하게 하기, 밥 제때 안 먹기, 보지 말라는 폭력성 만화 꼭 보기, 밥 먹으랄 때 과자 먹고 과자 먹으랄 때 밥 달라고 하기, 맘에 안 드는 어른한테는 인사도 안 하기 등등. 엄마, 아빠를 속상하게 하는 세종이의 행동은 나열하기에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런 세종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아빠와 둘째 외삼촌. 아빠는 그렇다 치고 둘째 외삼촌을 존경하는 세종이가 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기 말로는 둘째 외삼촌이 동족이라는데 ‘동족’이라는 말을 알고나 쓰는지도 의심스럽다. 하긴 외할머니 말씀으로는 세종이가 외삼촌 어린 시절과 꼭 닮아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의 외삼촌을 보면 내 동생 세종이도 변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살짝 해본다. 어릴때 세종이와 똑같았다던 둘째 외삼촌은 지금 우리 아빠처럼 외숙모라면 끔뻑 죽는 시늉까지 하는 애처가에다 꽤 이름 있는 종합병원의 정형외과의사이다. 쉬는 날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강이고, 바다고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 다니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는 다시없는 효자였다. 물론 우리에게도 더할 수 없이 잘해주시는 외삼촌이었다. 외숙모를 만나기 전에 잠깐 방황도 했다지만 그래도 지금의 외삼촌은 어디 내놓아도 괜찮은 남자였다.
“다 했니?”
또다시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엄마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나아져있었다. 발간 얼굴로 들떠 있는 모습은 더 심해져있었지만.
“네. 엄마.”
“세종이는? 그래. 다 입었구나. 세종아. 머리 좀 빗어. 얼른 나와라. 정말 늦었어.”
그리고 후다닥 사라지는 엄마를 바라보다 나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열한 시…..아직 오전 열한 시밖에 안 됐는데….아빠가 타신 비행기의 도착시간은 오후 두시다. 공항까지 기껏해야 한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텐데 엄마는 지금 너우 오버하고 있다. 휴, 지금 출발하면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하리라. 읽을 책이라도 하나 가져가야 할 것 같았다.
불퉁한 모습으로 있는 세종이를 이끌고 거실로 나가니 벌써 신발까지 신으시고 현관 거울을 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저렇게 비춰보시는 모습이 상기되어 있었다. 4개월만에 보는 아빠라지만 좀 너무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오늘 연출된 두분의 상봉신이 부담되었다. 또 얼마나 오버를 하며 영화를 찍으실지,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세진아. 어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의견을 물으시는 엄마의 몸을 쭈욱 훑어보았다.
“괜찮아요. 좋아요.”
사실 몇 가지 문제점은 발견되었지만 패스하기로 했다. 저렇듯 기대감에 차 있는데 나의 태클이 엄마를 속상하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넌? 세종아. 넌 어때?”
“뭐가요?”
나는 세종일 째려보았다. 빈말이라도 예쁘다고 하면 간단하게 끝날 일을 가지고 저놈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엄마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어때? 예뻐?”
“몰라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는 신발을 신고 휙 현관을 나가버린다. 나는 얼른 걱정스러운 표정의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 쟤가 뭘 알아요? 걱정 마세요. 너무 예뻐요.”
“그래. 고맙다.”
아! 난 천사다. 훌륭한 딸이고 더할 수 없는 효녀다. 똑똑한 나와 같은 딸을 둔 엄마, 아빠는 무척 행복할 것이다. 저 말썽꾸러기 세종이만 없다면 엄마, 아빠는 완벽하게 행복할 수 있었는데 참 아쉽다.
끼익.
흥분한 엄마의 운전 때문에 책 읽기가 쉽지가 않다. 고모를 태우고 가야한다며 고모네 가게 앞에 차를 세우는 지금도 엄마의 지금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과연 공항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형님.”
“안녕하세요.”
“어. 그래. 세진이, 세종이 오랜만이다.”
운전석 옆자리에 올라타시는 영숙 고모는 공손히 인사를 하는 나를 보며 웃으신다. 나이 드신 어른을 보았으면 공손히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 하지만 세종인 고개만 까닥 하더니 곧이어 게임기에 빠져든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아유. 우리 세진이는 한시도 책을 놓지 않는구나.”
뒷자석을 돌아보시는 고모의 눈에 감탄이 어려 있었다. 아빠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고모라 함께 다니면 할머니라는 소리를 곧잘 듣지만 할머니라고 하기엔 또 젊으신 고모였다. 게다가 똑똑한 나를 인정하시는 혜안은 또 얼마나 밝으신지.
고모의 칭찬에 나는 겸손한 듯 고개를 숙였다. 벼는 익을수로 고개를 숙인다 하지 않던가.
“쳇.”
세종이가 나를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본다. 하지만 난 세종이의 그런 시선은 무시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동물에게 나를 이해해 달라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니겠는가.
“고모부님은요?”
“오늘 연구소에서 회의가 있다나봐. 오늘 저녁 가족 모임에는 늦지 않겠다고 했어.”
오늘 저녁에는 온 가족이 모이는 가족 파티가 있을 예정이었다. 아빠의 환영파티라고 하지만 그건 핑계였고 가족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노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큰고모 때문에 모이는 가족모임이었다.
“4개월 만에 보나?”
“네. 형님.”
고모의 질문에 대답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장 박사가 다시는 세종애비 안 데리고 갈 거라더라.”
“네?”
“3년 전에 월동할 때도 올케 그리워서 생가슴을 앓는 통에 주위사람들이 그 짜증 다 받아줬잖아. 그래서 다시는 월동 참가 안 시킨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하계연구원이라 그러지는 않겠지 싶어서 데려갔더니 또 그랬다던데?”
“…….하하. 어떻게요?”
“어떻게는. 밤마다 올케 사진 보고 술 마시고, 또 많이 보고 싶은 날에는 주위사람들 괴롭히고, 그렇게 하면서 어떻게 연구는 제대로 했나 몰라.”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고모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이번 하계연구에서 굉장한 대 발견을 하셨다고 한다. 빙하 속에 얼어있던, 눈에 보이지도 않은 생물을 발견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과학자들이 놀랄만한 연구 성과를 이루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오늘 아빠의 귀국은 신문에도 났다. 아마도 공항에는 귀국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기자들도 대기하고 있을 거라 했다. 그 구경을 놓칠 수 없다며 고모도 따라나서는 것이고. 우리 가족 모두가 이렇게 차려입고 공항으로 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금의환향하는 아빠를 온 가족이 맞이하러 가야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띠리리.띠리리.
“여보세요……응. 아유, 걱정 말아요. 네. 아직…..지금 가는 중이에요. 공항에서 바로 그리로 갈게요. 네.”
전화를 끊는 고모가 미소 지으며 엄마를 바라보신다.
“혜숙언닌데 공항에서 곧장 가게로 오라네.”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병원은 어쨌어?”
“오빠에게 말했어요. 저 말고도 소아과 의사가 한 명 더 있거든요.”
엄마는 소아과 의사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는 외과의사가 되려고 했다는데 레지….뭐라고 하는 걸 조금 남겨두고 소아과로 바꿨다고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라고는 했지만 엄마는 그 결정을 절대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 아빠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태어났고 엄마는 우리에게 훌딱 빠져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적성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리니 소아과 의사가 된 것은 순전히 나, 아니 우리 때문이다.
소아과 의사가 된 엄마는 큰외삼촌이 공동 경영자로 있는 병원에 취직했다. 산부인과와 소아과가 함께 있는 병원이다. 똑똑한 내가 생각해도 산부인과와 소아과는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산부인과에서 애를 낳아 소아과로 바통 터치가 가능하니까.
“올케도 태훈이 만나려니 긴장 돼?”
“…..그냥.”
부끄러운 듯 대답하는 엄마의 말 뒤로 세종이가 불쑥 나선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쪽팔려요.”
“강….”
“강세종. 그런 말 쓰지 말랬잖아!”
엄마보다 더 빠른 나의 앙칼진 목소리에 고모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신다. 목소리가 좀 컸나? 그래도 어쩌겠는가. 하나 있는 남동생을 가르쳐야 하는 의무를 지닌 누나인것을.
“야! 너! 네가 엄마야?”
세종이가 반항한다. 뭐 매번 하는 반항이라 별루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강세종. 누나한테 너가 뭐야? 그리고 누나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엄마의 근엄한 목소리에 세종이가 아무 말 않고 씩씩거린다. 저도 할 말이 없겠지. 제가 잘 한 것이 있어야 대꾸를 하지.
“역시. 3분 누나라도 누나가 다르긴 다르구나. 세진아. 넌 도대체 누굴 닮아 그러니? 올케. 쟤 누굴 닮은 거야?”
“하하하. 글쎄요. 저희 친정에서는 서로들 자기들을 닮았다고 해서…..”
“그래? 하하하. 우리도 그런데. 우리도 모였다하면 세진이가 자기들 닮았다고 입씨름이야. 하다못해 태숙 언니 딸, 미영이도 세진이가 저를 닮았대. 웃겨서. 하하하.”
그렇다. 모두들 내가 자기들을 닮았다고 믿어주기를 바란다. 잘나고 똑똑하고 예쁜 내가 닮은 사람이라면 그 분의 어린 시절도 빛이 나는 것이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툭하면 내가 당신들을 닮으셨다고 싸우신다. 아. 너무 잘나도 탈이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공항으로 들어선 우리는 아빠가 나오실 입국 게이트에 몰려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카메라를 목에 건 사람, 수첩에, 비디오라도 찍을 모양인지 어깨에 이상한 기계를 짊어진 사람까지, 많은 사람들이 입국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 사람들이 다 우리 태훈이 기다리는 거야?”
세종이의 손을 꼭 잡고 선 고모의 입에서는 놀랍다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것 같네요. 형님. 세종이하고 세진이 좀 봐주세요. 제가 저기 입구에 있다가 그이 데리고 올게요.”
“그래. 그게 낫겠다. 애들까지 데리고 저길 어떻게 들어가니? 우린 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릴 테니 올케는 가봐.”
“네. 세진아. 세종이하고 고모랑 있어. 세종인 말썽 피우면 안 돼. 알았지?”
“네. 엄마. 걱정 마세요.”
“네.”
나의 살가운 대답에 이어 세종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저 많은 사람들 사이를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나 기웃거리며 멀어지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고모가 우리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네 아빠가 아주 유명인이 됐구나. 그런데 네 아빠가 저런 걸 안 좋아할 텐데. 게다가 지금 네 아빠 눈에는 네 엄마밖에 안 보일테니…..이러다 혹시 저번처럼 또 영화 찍는 거 아니라니?”
갑자기 옛 일이 떠오르는 듯 고모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영화를 찍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이제야 생각해낸 고모가 가여웠다. 확실히 나이는 못속이나보다. 그 남부끄러운 장면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난 그때 다섯 살이었는데도 지금 정확히 기억하는데.
“아씨. 난 엄마, 아빠가 또 그러면 모른 척 할거야.”
동감. 세종이의 말에 나는 오늘 처음으로 동감을 외쳤다. 만약 오늘도 두 분이 그런다면 나도 모른 척할 것이다. 더군다나 저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는 더더욱.
고모가 앉아라고 말한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 나와 반대로 세종인 의자 위에 올라가 엄마가 있을 방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양을 보니 나도 문득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똑똑하고 잘난 내가 의자 위에 올라가는 행동을 하기에는 좀…..고모도 계시고, 사람들도 많은데…..하지만 유혹적이다. 의자 위에 올라가면 아빠를 빨리 볼 수 있을 테고, 엄마, 아빠가 어떻게 상봉하시는지도 구경할 수 있다. 나는 갈등했다. 그리고 고모를 바라보았다. 의자 위에 올라간 세종일 보셔도 아무 말씀 않으신다. 그래서 결정했다. 나도 올라가기로.
쭈뼛거리며 들고 있던 책을 놓아두고 의자 위로 조용히 오르는 내 모습에 고모가 이상한 눈으로 보셨지만 모른척했다. 한번쯤의 탈선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잘난 척하더니.”
물론 세종이의 비꼬는 말도 무시했다. 쟤는 원래 무시해도 되는 아이다.
얼마 후 입국 게이트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세종이도 긴장했다. 기자아저씨들도 긴장하며 카메라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네, 다섯 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지나가고 곧 기다리던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면도를 미처 못 하셨는지 턱과 코밑이 거무스름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우리 아빠가 분명했다.
“아빠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빠를 보니 너무 반가웠다. 그때였다. 우르르 몰려드는 기자들을 바라보던 아빠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을 굳히셨다. 그러다 기자들 틈으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아빠가 찾는 대상은 우리, 아니 엄마일 것이다.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용케 엄마를 발견했는지 아빠의 표정이 급하게 변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기자 아저씨들을 물리치고 밀고 있던 짐수레까지 팽개치고 달려가는 폼이 분명 엄마를 발견한 것이 분명했다.
덩치 큰 아빠 덕에 아빠가 움직이는 방향을 보는 것은 쉬웠다. 아직도 엄마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빠가 움직이는 방향에 엄마가 있을 것이다.
드디어! 영화의 한 장면이 시작되었다.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에 성공한 아빠는 엄마를 번쩍 들어 올려 안았고 그런 엄마 또한 아빠의 목을 얼싸 안으신다. 누구의 것인지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곧이어 폭죽처럼 연달아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아빠의 입가에 마이크를 가져다대며 뭐라고 했지만 아빠는 그마저도 물리치셨다. 그리고 안고 있던 엄마를 내려놓고는 지그시 바라보신다. 마치 한 10년 만에 다시 만나는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겨우 4개월 만에 보시는 거다. 그것도 거의 매일 밤 컴퓨터 채팅을 하시면서 서로 대화는 나누셨다. 두 분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신다. 그렇지 않고서야 결혼 10년차에 저렇듯 애틋할 수는 없었다.
“아씨. 안 돼.”
세종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데서 그러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빠는…….했다.
그 큰 손으로 엄마의 얼굴을 부여잡고 입술에 살짝 키스하더니 곧이어 진한 두 사람만의 키스가 시작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사람들이 의식되었는지 버둥거리며 아빠의 입술을 피하려했지만 엄마를 놓아줄 아빠가 아니었다.
“아씨. 쪽 팔려.”
나도. 이번만큼은 세종의 상스러운 말을 지적할 수가 없었다. 세종이의 말처럼 정말 쪽팔렸다.
“어머. 어머, 웬일이니. 세상에. 얘들아. 너희들은 눈감아.”
세종이와 나는 우리의 눈앞을 턱 가로막는 커다란 손에 어이가 없어졌다. 겨우 키스 하나가 가지고 고모는 너무 오버하신다. 고모. 요즘 키스는 유치원생도 하거든요?
“세진이, 세종이 잘 있었어?”
“네. 아빠.”
집요하게 아빠를 뒤쫓는 기자 아저씨들을 따돌리고 공항을 벗어난 지금에서야 아빠가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하신다. 이제야 자식들에게 아는 체를 하시는 아빠가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사정이 사정인지라 용서하기로 했다.
“세종이 너 그동안 엄마 말씀 잘 들었지?”
“네.”
무뚝뚝하게,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하는 세종일 나는 쳐다보았다. 아빠가 안 계시는 동안 무던히도 엄마를 속상하게 하던 놈이 대답은 넙죽 잘 한다. 분명 저놈 양심에는 털이 났을 것이다.
“세진이는 더 예뻐졌네. 과학경시대회에서 장원 됐다는 소식은 들었다. 축하한다.”
“뭘요. 저 아니면 될 사람이 없었어요.”
나는 당연한 대답을 했다. 아빠의 표정이 순간 조심스럽게 굳었지만 뭐 크게 신경 쓸 만큼은 아니었다. 운전을 하는 엄마와 무언가 눈짓도 주고받으시지만 그것도 크게 신경 쓸 만큼은 아니었다.
“재수 없어.”
세종이의 말에 아빠의 눈빛이 변했다.
“강세종. 누나한테. 당장 사과해.”
“왜요? 세진인 진짜 재수 없어요. 잘난 척 하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말 하는 것 아니야. 그리고 누나한테 세진이가 뭐야?”
아빠의 근엄한 야단에 세종이가 입을 삐죽거렸다.
“3분차인데 맨날…..”
“3분이라도 누나는 누나다. 알았어?”
“….”
저것 봐. 저것 봐. 끝까지 대답 안하는 것 봐. 잰 비오는 날에 먼지 나게 맞아봐야 해.
“별일 없었지?”
“나야 뭐. 당신이 힘들었죠.”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로 우리에게 아는 체를 하시던 아빠가 이제는 마음 놓고 엄마만 바라보신다. 아마도 오늘 세종이와 나는 집에 못 들어갈 것이다. 아빠와 엄마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큰고모 댁에 맡겨질 예정이었다. 가족여행도 곧잘 가기는 했지만 가끔은 두 분만의 여행을 가시기도 하신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큰고모 댁과 외가댁에 번갈아가며 맡겨졌다. 큰고모 말씀으로는 우리 엄마, 아빠는 유난하단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 엄마, 아빠는 유난하시다. 내 친구 중 누구의 엄마, 아빠도 우리 엄마, 아빠만큼 닭살은 없다.
지금도 엄마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레이저광선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사랑이 가득하고 행복이 가득한 아빠의 눈빛과 표정에서 나는 알 수 있다. 아빠는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것을. 큰고모 말씀으로는 아빠는 평생 사랑에 빠져 사실 분이라고 한다. 그런 사랑을 받는 엄마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또 평생 사랑할 여자를 만난 아빠도 정말 운이 좋은 남자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영재였다는 아빠를 넘어,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천재다. 사람들이 놀랄 만한 나이에 말을 했고, 사람들이 깜짝 놀란 만한 나이에 나는 글을 썼다. 지금도 각종 과학경시대회를 석권하고 초등교육을 넘어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있다. 선생님들은 모두 내가 몇 년만 더 있으면 사상 최연소로 대학을 갈 수 있을 거라 하신다. 비록 엄마, 아빠는 그 사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지만 내가 천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는 특별하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다른의미에서 특별하다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똑똑하고 예뻐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생 사랑에 빠져 살아갈 운 좋은 아빠와, 그런 사랑을 받아 행복한 엄마의 딸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아마도 먼훗날 나 또한 엄마, 아빠처럼 특별한 사랑을 할 것을 예상하기에 그래서 나는 특별하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완벽하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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