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86
086. 평생, 그리고 하루
“한국에서도 앨범에 대한 특별 공연을 할 예정이라고요?”
휴식 시간, 알버트의 집무실.
내 얘기를 전해 들은 그가 되물었다.
그렇다고 끄덕이자 다시 묻는다.
“지휘자는 정해졌습니까?”
“아뇨, 사실 이번 쇼케이스가 이례적인 상황이었어요. 녹음 때조차도 원래는 지휘자 없이 진행했었거든요.”
그다지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실제로 소규모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경우엔 지휘자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지휘자를 구하는 게 워낙 어려울뿐더러 실력 있는 지휘자는 더더욱 하늘의 별 따기니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경우가 생길 수밖에.
물론······.
“그럼 내가 지휘를 청해도 되는 겁니까?”
이 양반은 하늘에서 별이 아니라 태양을 끄집어내리는 정도 될 거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십수 년을 역임한 마에스트로니까.
그런 그에게서 의욕이 농익은 흑점처럼 튀어 오른다. 열기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백선화 부사장이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다만···.’
알버트가 지휘를 하게 되면, 뉴욕필이 움직이는 건가?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긴 한데···.
그 사람들 모두 세계에서 알아주는 연주자들일 텐데···.
복잡한 심경이 든다.
내 곡이 이 거장에게 그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는 게,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가도.
그가 정말 지휘를 하는 상황이 오면 고민거리들이 많아질 것 같다.
한참 동안 혼자 씨름하다가 그런 날 보며 기다리고 있는 알버트에게 입을 뗐다.
“그런데, 마에스트로께선 뉴욕필의 지휘자시잖아요?”
“그렇죠.”
“뉴욕필은 지휘자님만 있는 게 아니라 수많은 연주자분들도 함께 계시고요.”
“맞습니다만.”
“근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전 녹음을 함께했던 멤버들과 연주를 하고 싶거든요.”
“아······하하······.”
알버트가 베이스 같은 낮은 저음으로 웃었다.
그게 비웃음이나 난감함의 표현은 결코 아니었고.
그게 걱정이었던 거라나—같은 묘한 웃음이었다.
역시나. 웃음 끝에 그는 이내 문제 될 게 없다며 웃었다.
“뉴욕필의 음악 감독이라고 이곳의 지휘만 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프리랜서에 가깝죠. 물론 방금 서호 군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난 뉴욕필의 이사회를 설득해서라도 단원들을 데려갔을 겁니다. 그들에게도 분명 좋은 경험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으니. 그런데, 뉴욕필의 연주를 마다할 줄은 몰랐네요.”
“정말 천상의 오케스트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들이지만···.”
그렇기에 개개인으로서건 단체로서건 압도적이란 표현조차도 민망할 정도의 실력 차이지만.
그래도.
“제가 고른 사람들이거든요.”
과거 녹음 기억까지 쥐어 짜내어 내 곡을 부탁한 연주자들 말이다.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간절한지 무게를 달아볼 수 있다면.
그것만큼은 결코 이곳의 단원들과 차이 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내 앨범이 완성될 수 있도록 도와준 그들과 함께 연주하고 싶다.
“···한서호 필하모닉이 있었군요.”
하하하.
작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라고 던진 농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겐 그 말이 과분하다 싶으면서도 마음에 와닿았다.
지금이야 어원과 관계없이 심포니와 혼용되어 쓰이고 있지만, 필하모닉의 본래 어원은 phil (사랑)+ harmonia(음악).
즉,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궁금하네요, 어떤 사람들일지.”
턱 끝을 슥슥 만지며 말한 알버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이미 훌륭한 연주자들이라는 건, 앨범으로 확인했지만요.”
“들어보셨어요?”
그가 씨익 웃는다.
“안 들을 수가 없었죠.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다음날이 연습인데! 이런 적은 학생 때, 베토벤의 곡들을 들으며 그랬던 게 전부인데! 그래서 오늘 출근길에 음반 가게에 들려 하나 사 왔답니다.”
그가 턱하고 내 앨범을 책상 위에 올린다.
물끄러미 내 사진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번엔 장작처럼 보이진 않으셨나요?”
사운드 클라우디를 평가했던 인터뷰를 떠올려 익살스럽게 묻자 알버트가 잠시 당황하며 낮은 웃음을 흘린다.
“그것도 읽어보면 곡이 좋다는 얘기였답니다.”
“하하, 알고 있습니다. 장난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장작이 된 것 같군요. 나에게 장작이 되었어요.”
무슨 소린가 하고 그를 보았다.
그 푸른 눈이 불꽃처럼 일렁이는 건 착각일까.
“앨범을 들어보니 왜 그렇게 인터넷에 주먹구구식으로 올렸는지 알겠더군요. ······습작이었던 거죠?”
“올린 계기는 비슷했습니다.”
“하하, 내가 물어봐 놓고서도 믿기지 않는군. 그게 습작이라니. 그리고, 그래서 더욱 서호 군의 곡을 지휘하고 싶네요. 어제와는 또 다릅니다. ‘가족’이란 곡 하나만 내 마음을 뒤흔든 게 아녜요. 이 안의 모든 곡이 날 뜨겁게 합니다. 이 음악에 평생을 바친 노인을···!”
나는 넋을 놓고 그의 성토를 지켜보았다.
말을 꺼내면 혀끝이 데일 것만 같았다.
“오늘 협주를 보았죠? 난 평생 베토벤을 이해하려 모든 걸 바쳤어요. 그런데도 어렵더군요. 오죽하면 그의 기분을 느껴보려 귀를 막고 생활한 적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경험이 쌓이면 싸일수록, 그의 곡을 지휘하면 지휘할수록. 난 미궁에 빠졌어요. 그곳에서 헤매는 사이 머리가 차게 식었죠. 그런데 그때 브리너의 곡들을 듣게 되었고, 가능성을 봤습니다.”
들끓던 목소리가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이번에 앨범을 들으며, 다시 깨달았죠. 이 작곡가는 이미, 가능하구나. 변하지 않는 클래식에 이미 속해 있는 음악가구나.”
열변이 끝났다.
몇 초간,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사했다.
“그···어···감사합니다.”
이런 환호가 어딨을까.
이런 앙코르가 어딨을까.
이런, 격렬한 찬사가 어딨을까.
하지만 감사 인사를 전한 뒤에, 나는 고민했다.
혀가 쓰다.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러던 중 머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고,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거 아세요? 베토벤도 합창을 연주할 때 몰랐어요.”
“무얼······.”
“자신이 제대로 지휘하고 있는 건지.”
······지금의 당신처럼 말이다.
귀가 들리지 않았으니까.
소리를 잃으면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잃게 되니까.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몰랐을 거다.
그저 기억 속에 기대어 지휘봉을 휘둘렀겠지.
이 순간이 내 평생의 업적을 조롱거리로 만들진 않을까.
내 손으로 내 곡을 죽이는 건 아닐까.
불안에 떨며.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하지만 마침내 곡이 끝나고 돌아보는 순간, 그는.
“관객들의 박수를 보고 나서야 안도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죠.”
내가 잘 버텼더라면 그 감동적인 순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잠시 안타까워하며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알버트를 보았다.
“전 전율했어요.”
당신의 연주에. 여지없이.
그건 내가 고작 루드비히 선생 함께한 시간이 짧아서, 그의 지휘를 보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순간, 내가 전율한 건 진실이니까.
그리고.
루드비히 선생도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평생을 베토벤에 대해 생각하며 살았는데. 서호 군은 나보다도 더 베토벤을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알버트의 말은 ‘허무’보단 ‘깨달음’에 가까울 거란 걸, 나는 그의 목소리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를 곱씹는 사이.
······나는 루드비히 선생과 밤새도록 이야길 나눴던 밤을 추억한다.
달이 참 아름다웠던, 브로이닝 가문의 사교모임.
‘저는 청중에게 평가받고 싶을 뿐입니다.’
‘모든 건, 청중이 판단할 테니까요.’
‘저는 그것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그날 깨달았다.
누군가를 알아가기에.
때론, 하루가 평생보다 충분할 수 있음을.
#
······한 시간의 휴식이 끝났다.
손님이 왔기 때문에 평소보다 두 배나 늘린 시간이건만, 연주자들의 표정엔 피곤함이 덕지덕지.
단상 위에 올라선 알버트는 형형한 눈빛으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컥 짜증부터 올라왔겠지만, 이상하게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성질을 낼 타이밍을 놓쳤을뿐더러, 단원들의 이상한 눈빛들까지 쏟아진다.
“다들, 힘내서 연주 시작하죠.”
지금 이 순간, 부드러운 말도 누가 하냐에 따라 공포스러울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왜 웃으시지?’에서 ‘우리가 뭘 잘못했지?’로 급변하는 표정들.
그들 눈엔 지휘봉이 흉기로 보일 정도가 되었을 때 즈음.
무뚝뚝한 목재 지휘봉이 케펜 홀을 가른다.
평소보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으며.
괜히 다르게 휘두르지도 않는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2백 명이 훌쩍 넘는 이들 시선 끝에서.
그냥, 여전히 불안한 기분을 안고서.
늘, 해왔던 대로.
자신이 평생을 만들어온 베토벤의 형상, 그대로.
······알버트가 지휘를 이어갔다.
누군가를 알아가기에.
때론, 하루가 평생보다 충분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이 녹아든 저 위대한 지휘를 보며 그 누가 모자라다 할 수 있을까.
#
알버트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여전히 발바닥에 밟히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도착한 곳은 러프 트레이드(ROUGH TRADE NYC).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의 성지라 불리는 이곳에 내가 슬그머니 들어섰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서.
어제 엠마가 말한 얘기가 왠지 머릿속에 맴돌아서였다. 괜스레 문제가 생길까 이러고 들어왔는데, 어째 내가 가장 수상해 보인다.
연예인은 못 돼도, 감기 환자쯤은 너끈히 돼 보이네.
하지만 불과 몇 발자국을 걸어 들어간 순간, 나는 어쩌면 이게 정말 잘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에 가득한 낙서들.
건물을 짓다 만 것 같은 콘크리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포스터들과 러프하게 늘어서 있는 가판대.
록 공연을 하거나, 그런 앨범들만 가득해야 할 것 같은 이곳 가장 앞줄에.
내 앨범들이 있었다.
그것도 특별 코너라는 이름으로 한 가판대를 가득 채워서.
게다가 이곳의 어느 가판대보다 그 코너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풍경은······.
내게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영화 음악이 회자 될 수 있다.
영화가 성공하면 더더욱 서로에게 시너지를 주어 인기가 있을 수 있지.
콩쿠르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자국민이 1등이라면 그게 평소에 알지 못하던 종목이라도 보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게다가 음악가들의 올림픽이라 여겨지는 국제 콩쿠르에서.
하지만, 이건 느낌이 다르다.
미국이라서인가? 여긴 원래 그런가?
모르겠다. 엠마와 올리비아의 말은 달랐는데. 미국도 클래식이 시들어가는 건 마찬가지라며 임진규에게 보았던 쓴웃음이 그들에게도 비쳤는데.
이 수많은 사람들이 클래식 코너가 모자라 특별히 설치된 음반대로 몰리는 장면은.
내게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중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감정이 서 있었다.
그냥 음악이 하고 싶었는데.
음악만 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데.
‘나로 인해 뭔가가 바뀔 수 있다면······.’
과분하다. 과거의 나에겐.
그런데, 지금의 나에겐······?
하하. 어제 벌컥벌컥 들이킨 음악의 양이 적었나 보다.
고작 하루 만에. 갈증이 돋아난다.
가뭄이 찾아온 것처럼 목젖이 텁텁하다.
하지만 이제 내가 이런 반복 되는 욕심으로 인해 불행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음악에 애증을 갖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지 않는다.
내가 이 갈증을 다시 채우는 날.
‘꽤 많은 것들이 바뀔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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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빠트린 거 없이 싸야 해······.”
엄마의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내 쪽으로 날아오다 잘못 접은 종이비행기처럼 힘없이 떨어졌다.
이미 캐리어를 펼쳐 말끔하게 정리를 끝내뒀기 때문이다. 내일 일어나서 잠옷만 슥슥 넣고 출발하면 끝.
엄마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내가 이 얘길 너한테 하는 게 아닌데. 네 아빠한테 했어야 해.”
회사 일로 이미 떠난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속옷과 잡다한 티셔츠를 챙기며 엄마가 웃는다.
나도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시 어디 다녀올게요.”
“또 어디 가려고?”
걱정스러운 눈빛이 달려든다. 이 타지에서 자식이 동네 마실 나가듯 어딜 다녀오겠다고 하면 어떤 부모든 그러리라.
그리고 난 저 적당한 걱정이 좋다. 결국 허락해 주시는 그 안에 믿음이 보여서.
“백선화 부사장님이 부탁하신 게 있는데, 그것 좀 조사하려고요.”
“금방 올 거지?”
“어제처럼은 안 늦을 것 같아요.”
알버트 만나랴, 앨범 가게 들리랴 좀 늦었었지. 그래도 오늘은 한군데만 가볼 예정이니까.
“네가 말도 잘 통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항상 조심해야 해.”
“그럼요.”
싱긋 웃으며 겉옷을 걸쳤다.
곧장 호텔을 빠져나와 위치를 찍고 대로변으로 걷는다.
목적지는 닐 하우저, 그 미술계의 신성이 전시하는 곳.
원래는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려고 했지만, 그거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물을 봐야겠어. 고작 선곡에? 라는 의문을 가지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영감의 일부라는 걸 이번에 느꼈다.
아무리 좋은 곡도 각각의 곡이 연계되지 않은 채로 쌓여있으면 멀리서 보기엔 그저 장작더미로 보일 뿐이지.
마침 닐 하우저가 전시회를 하고 있다 하니 이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 수많은 것들을 영감으로 받아들였었지만, 아직까지 미술 분야에 악상으로 떠올릴 만큼, 손을 뻗어 잡아채고 싶을 만큼 강렬한 영감이 떠오른 적은 없었다.
미술에는 아예 문외한인 나잖아.
그런데. 큰 생각 없던 나에게 나타난 기대감이 전시회 앞 배너처럼 잔잔하게 나부낀다. 발걸음이 조금 설레기까지 하다.
궁금했다.
미술은, 내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