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85
085. 지휘자의 꿈 (2)
“알버트 어거스트를 만났다고요? 그 뉴욕필의 음악 감독?”
올리비아의 반응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이라는 직책은 과거 모든 음악가들의 꿈의 직업이었던 궁정 음악 감독 정도의 위치였으니까. 요제프 하이든이 그중 한 명이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버트와 하이든을 단순히 동일 선상에 놓기엔 그 무게감이 현저히 다르겠지만.
흥분해서 찰랑거리는 올리비아와는 달리 엠마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침착한 모습을 유지했다.
“본 무대 직전에 본부장님한테서 연락이 왔더군요. 알버트가 쇼케이스를 보고 싶다고 하니 들여보내 주라고. 아마도 서호 군이 브리너라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나 봐요.”
“알버트가 브리너에게 관심이 많았나 보네요. 하긴, 최근에 인터뷰에서 극찬까지 했었잖아요?”
주억거리던 올리비아가 패드를 휙휙 넘기다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화면을 돌렸다.
“이거 봐요. 기사 제목 마음에 드는데요?”
뭔가 범죄 사실을 밝히는 것 같은데? 동일범의 소행 뭐 그런 거.
피식 웃으며 눈썹을 긁적였다.
올리비아가 다시 패드를 슥슥 넘기며 말을 이어간다.
“대중들 반응도 장난 아녜요. 아예 브리너를 몰랐던 사람들이나 클래식에 관심 없었던 사람들까지도 이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검색하고 있나 봐요. 과거에 함께 일했던 동료한테 물어봤더니 지금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난리라네요.”
“앨범이 나오면 더 관심이 집중되겠죠.”
흐뭇한 목소리에 엠마가 한 마디를 얹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CD 앨범을 만지작거렸다.
흑백의 내 얼굴 위로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사진. 그 위에 노란 글씨로 앨범의 타이틀이 새겨져 있었다.
오묘한 기분이 든다. 이게 내 앨범이라는 것도, 그리고 곧 있으면 세상에 완전히 공개될 거란 것도.
“잘 나온 것 같아요.”
“내일이면 모든 음반 샵에 진열되어 있을 거예요.”
“마침 내일 나갈 일이 있는데, 한 번 들려봐야겠네요.”
그러자 엠마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모자랑 마스크는 꼭 챙겨가고요.”
이에 여전히 패드를 들여다보며 정말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고 동조하던 올리비아가 불쑥 사무실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 이거 타코 냄샌데?”
덩달아 시선을 따라 고갤 돌렸다.
로얄 클래식의 휴게실로 사용되는 3층 중앙 홀.
앨범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뒤풀이하라고 로얄 클래식 측에서 통째로 빌려주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위해 힘써준 직원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리고 내 부모님이 그곳에서 음식을 세팅하며 작은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허기가 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엠마가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우리도 나가서 좀 즐기죠. 앨범 발표될 때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와······.”
“어, 음···.”
“조, 존경합니다!”
로얄 클래식 3층이 팬 사인회장이라도 된 것 같다.
셀린 교수 때문이었다.
쇼케이스를 보고 나서 시험 기간이라며 다시 학교에 들렀다 온 그녀의 등장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그녀의 곁으로 몰려들어 눈을 빛낸다. 이미 사인을 받을 생각으로 자신의 바이올린을 챙겨온 단원도 있을 정도.
“서호 군. 오늘 공연 정말 최고였어요.”
“감사합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아직 유효하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협주곡. 만들게 되면 꼭 연락 줘요.”
빙그레 웃는 셀린 교수.
건너편에 있던 휘고가 날 바라보며 혀를 내두른다.
“마에스트로 알버트에 이어서 셀린 교수님이라니. 너는 대체······.”
“교수님이 제가 브리너란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채셨어요.”
‘역시 셀린 교수!’라고 외치는 듯한 눈빛들이 그녀에게로 모였다.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담당자인 올리비아가 건네는 음식을 받아들며 내게 물어왔다.
“그나저나, 기자회견에서 왜 그 얘긴 안 했죠?”
“어떤 거요?”
“브리너로 올렸던 곡들, 사실 전부 습작이었다는 거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왁자지껄하던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벙벙해졌다.
홱. 셀린 교수에게로 박혀있던 시선들이 나에게로 모여든다.
저게 지금 무슨 말이냐고 추궁하는 것 같은 표정들이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어요.”
“왜죠?”
“들어보면 차이가 날 테니까요.”
픽 하고 웃은 셀린 교수가 주억거렸다.
“엄청난 자신감이지만. 한편으론 반박할 여지 없이 맞는 소리네요. 어차피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알아서 차이를 느낄 테니.”
여전히 황당한 표정들이 주변에 떠다닌다.
그것도 잠시. 본격적인 식사가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대화들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더 이상 음식이 안 들어갈 정도로 배가 차서 관망하는 동안에도.
음악 얘기는 끊이지 않았다.
나는 정신 없이 이야기를 나눴고, 좀처럼 식지 않을 것 같은 열기 위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찬물처럼 끼얹어졌다.
“앨범 공개됐어요!”
“어디 어디, 오! 리뷰가 줄줄이 달리는데요? 첫 곡, 첫 마디 들었는데 이미 너무 좋다고 그러고, 이 사람은 목욕하면서 듣겠다 그러고. 이거 좋은데? 나도 오늘 그렇게 해봐야겠다.”
“평론가들은 아직인가?”
“한 곡에 40분짜리도 있는데 어떻게 벌써 감상하고 평론을 달겠어요.”
“오, 역시 전직 평론가.”
“아니, 이건 상식 아닌가?”
로얄 클래식 팀원들이 정신없이 좋은 얘기를 쏟아내자, 엠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제 클래식 차트를 기다려야겠네요.”
정작 나는 큰 기대가 없었다.
클래식 차트는 결국 인기투표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인지도 싸움이니까. 내가 화제라고는 하지만 기존에 상위권에 있는 음악가들을 이기기엔 무리라고 생각한다. 괜히 클래식 차트가 좀처럼 바뀌지 않는 콘크리트라는 얘길 듣는 게 아니지.
그렇기에 사실 음악적으로도 오히려 평론가들의 평가를 앨범이 좋고 나쁘고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사업을 하는 로얄 클래식 입장에선 스트리밍과 앨범 판매량이 평론가들의 평가만큼이나 더욱 중요하겠지만······.
그냥, 너무 실망스러운 순위는 아니었으면 좋겠네. 내 앨범을 위해 힘써준 팀원들과 SJ 일가를 위해서라도.
어쨌든 차트라는 게 눈에 보이는 성패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지 불과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앨범 발매를 기다리던 몇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서호 앨범, 순위 나왔어요!”
누구의 외침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게 귀에 안 들어올 정도로 정신없었다.
곧이어 양쪽에서 터져 나오는 반응들에 어안이 벙벙해 하는데, 올리비아가 이거 확인한다고 가져온 노트북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그니까, 이게.
방금 재정렬된 클래식 차트 순위란 말이지?
클래식 차트 가장 높은 곳부터 주르륵.
······내 곡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
날이 밝자마자 호텔 라운지로 올라갔다.
종업원을 만나 예약된 이름을 확인하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그곳엔 백한길 회장과 백선화 부회장이 앉아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나도 나름 20분이나 일찍 왔는데 말이지.
“늙으면 아침잠이 없거든.”
“하아아아암—.”
백한길 회장의 말에 옆에서 백선화 부사장이 별안간 입을 쩍 벌린다. 굉장히 인위적인 하품이었다. 늙음을 피하기 위한.
“그래, 나만 늙은이다.”
내가 웃었다. 백한길 회장를 만난 뒤로 그를 만나면 안색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는데, 오늘은 유난히 좋다.
“미국 가장 큰 사이트에서 클래식 분야 1등을 했다더구나.”
그러자 백선화 부사장이 덧붙였다.
“지금도 여전히 1위예요. 나머지 곡들도 10위 안에 전부 들어가 있고요. 밤새 서호에 대한 기사가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쏟아졌는데, 그 중엔 우리 SJ 엔터까지 덩달아 문화 예술 기업이라며 칭찬하는 것도 있더라고요.”
“그러냐. 역시 투자하길 잘했구나.”
“기대에 보답해드려서 다행이에요.”
진심이었다.
사실, 내가 브리너인 걸 밝힌 이유에 이들의 역할도 컸지.
내 가치를 교환해서 얻은 기회긴 하지만 어쨌든, 가족의 어두운 미래를 걷어내 주었으니. 나도 내 방식대로 SJ 그룹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일개 개인의 도움이 거대 그룹의 입장에선 미약하겠지만 그래도.
내 대답에 흐뭇하게 웃는 두 사람.
그러다 백선화 부사장이 뭔가 떠오른 듯 말꼬릴 올렸다.
“그나저나, 네가 브리너라는 익명의 작곡가였다면서?”
“아, 그게. 네. 어쩌다 보니. 하하.”
백한길 회장이 가늘게 뜬 눈으로 날 훑었다.
“결국, 너는 그때 투자해달라고 찾아왔을 때도 네 모든 패를 까진 않았던 거구나.”
“그땐 그냥 취미였어요. 이렇게까지 화제가 될 줄도 몰랐고요.”
백한길 회장이 고개를 내저으며 백선화 부사장에게 말했다.
“내가 말했지? 자기 패를 감추고 있는 놈들보다 무서운 게 지가 얼마나 많은 패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놈이라고.”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따라 나도 입꼬릴 올렸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백선화 부사장의 도움을 받아 수프를 홀짝이던 백한길 회장이 다시 얘길 꺼냈다.
“선화, 너 서호한테 부탁할 게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 맞아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낸 백선화 부사장 날 본다.
“이번에 우리 회사가 뉴욕의 미술 에이전시와 연계를 맺고 전시회를 열 생각이거든.”
그러고 보니, 백선화 부사장이 뉴욕에 함께 오는 이유가 일 때문이라는 얘길 아버지께 들었었다. 이것 때문이었겠구나.
내가 재벌가의 생리는 알 턱이 없으니 함부로 판단하긴 힘들지만, 한 회사의 부사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건 좀 의외인 동시에 좋아 보이기도 했다. 앞으로 이 사람에 의해 한국 문화 예술 업계가 정말로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계약을 잘 한 것 같네.’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끄덕이는데, 백선화 부사장이 본론을 이어간다.
“특별전 형식으로 한국에서 보기 힘들었던 현대 미술품들을 가져오려 하는데, 전시 때 틀 음악들 선곡을 좀 맡기고 싶어서. 별거 아닌 작업 같겠지만, 우리한텐 그게 굉장히 중요해졌어. 콧대 높은 미국 에이전시들 흥미를 잡으려면 돈도 돈이지만 이런 것들이 중요하거든. 무게 추를 맞추는 거.”
“그 무게 추를 제가 맞출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지금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누가 맞출 수 있겠니?”
빙긋이 웃는 백선화 부사장을 보며 되물었다.
“누구의 미술품이 오는데요?”
“닐 하우저라고 현대 미술계의 한서호랄까?”
“네? 저요?”
그녀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트린다.
“미술계의 떠오르는 신성이야. 물론 나이는 너보다 많지만. 젊고, 실력 있는 미술가지.”
미술계의 신성이라.
그쪽 분야엔 전생에서조차 관심이 없었던 터라 꽤 생소하다. 내가 할 수 있으려나? 물론 플레이리스트 하나 만드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그 곡들이 모두 미술 작품과 어우러져야 할 거 아냐.
“우선, 그 미술가 작품들을 쭉 훑어봐야겠네요. 그리고 저도 물어볼 게 있었는데.”
“응? 뭔데?”
“혹시 제가 한국 들어가면 앨범 관련 일정이 어떻게 되나요?”
“잠시만.”
짧게 답한 그녀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본부장님. 서호 다음 달 일정 지금 바로 보내주세요. 네. 부탁드려요.”
단숨에 전화를 끊은 백선화 부사장이 날 보며 물어왔다.
“근데 일정은 왜?”
#
뉴욕, 링컨센터.
세 개의 건축물은 모두 각기 다른 모양의 기둥들로 솟아 있었다.
나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있는 건물, 데이비드 게펜 홀로 들어섰다.
이 전체가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위해 지어진 건물.
마치 음악의 성지처럼 보이는 이곳의 모습에 흥분이 차올랐다.
심지어 이곳에 방문한 이유 또한 단순히 관광이 아니었다.
무려 알버트 어거스트의 초대(-첫 만남에 못 알아보긴 했지만···).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꼭 방문해달라는 그의 말대로 이곳에 온 거다.
공연이 있는 날도 아니었기에 당연히 콘서트홀로 가는 길은 막혀있었다. 그런데도 그쪽을 기웃거리자 그 모습이 퍽 수상해 보였는지 저 멀리서 관리자로 보이는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늘은 공연이 없습니다. 그쪽으로 가실 수 없······.”
손을 휘적거리던 남자가 나를 보더니 멈칫 거렸다. 다행히 얼굴을 알아본 것 같지.
“엇, 죄송합니다. 워낙 이쪽으로 들어가려 하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마에스트로님의 손님이시죠?”
“네, 맞아요.”
“이쪽으로 오시죠.”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복도를 가로지르는데, 귓가를 간질이는 소리가 커져간다.
“혹시, 지금 연습 중이신가요?”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제가 들어가도 되나요?”
“그것도 마에스트로님의 뜻이었는 걸요. 만약 일찍 도착하시면 이쪽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문 앞에 멈춰 서자 그가 들어가라며 끄덕인다. 안내해줘서 감사하단 인사를 하며 금속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먹먹하게 들려오던 소리가 확 커지며, 적갈색의 공간이 보인다.
천장에는 원통 모양의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조물들이 달려 있고. 그곳에서부터 떨어지는 조명 아래엔 수많은 연주자들이 연주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어 있었다.
······백여 명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리가 전신을 덮쳐온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케스트라에 비해서도 전혀 숫자가 적지 않은 합창단.
이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곡들 중 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루드비히 선생의 마지막 역작, 합창!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객석 끄트머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그리고 꼴깍 침을 삼키며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것 같은 음압(音壓)과 귓가에 장렬히 파고드는 황홀한 울림.
그 한가운데에서 모든 소리를 조율하는,
알버트 어거스트.
──!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거목(巨木)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