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84
084. 지휘자의 꿈 (1)
음악이 들리자,
의문은 잊힌다.
한서호가 연주하는 게 또 브리너의 곡이라는, 그의 선곡에 대해 의아해하던 이들의 입가에 감탄이 내려앉은 건 고작 몇 마디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제목은 88개의 건반에 대한 단상이지만, 단편적이라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치 하농을 연주하듯, 단순한 음의 조합으로 시작된 곡은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갔고,
모든 음을 활용해서 정교한 형상을 쌓아간다.
브리너에 대해 익히 알았던 이들도, 그렇지 못한 이들도 그저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정의.
혹은 헌정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연주였다.
하지만 곡이 끝나고, 또다시 ‘왜 한서호는 브리너의 곡만 연주했는가?’에 대한 의구심들이 고개를 치켜들 무렵.
······기자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빛으로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제 곡인 양 연주를 하고 있—.]여전히 나아가지 못한 글자들.
그리고.
‘설마···.’
반복되는 생각.
기자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관객들의 박수가 멎고, 다음 순서가 오길.
그때가 되면 질문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이 터무니없지만, 자꾸만 커지는 생각에 대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마침내, 스태프들이 테이블과 의자를 들고 들어와 무대 가장 앞쪽에 세팅했다.
한서호는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세팅된 의자에 앉았고, 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유일한 시간.
한서호의 손에 마이크가 들리고 쉴새 없이 번쩍이던 불빛들이 사그라들자, 이번엔 다른 곳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질문을 준비하는 기자들의 눈빛이었다.
쇼케이스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콘서트에서 기자회견의 느낌으로 변모했다.
그 때문인지 한서호가 픽 하고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색하네요.”
한서호가 마이크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앨범을 제작하게 된 배경이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나가기 전부터 예정된 앨범이었고, 사람에서 영감을 받았던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얘기와, 그래서 타이틀 격인 곡이 가족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것까지 소개했다.
그제서야 한서호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질문을 받아보겠습니다.”
모두가 손을 들었다.
속으로 설마를 수백 번 외쳤던 기자도 번쩍 손을 들었지만, 아쉽게도 한서호는 다른 기자를 지목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기자가 묻는다.
“오프닝을 왜 전부 브리너의 곡들로만 채운 건가요?”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다.
물론 넋이 나갈 정도로 훌륭한 연주로 선곡에 대한 의문을 잠시 지웠지만, 결국엔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문제.
이에 대한 한서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건, 오늘 쇼케이스가 제 쇼케이스라서 그렇습니다.”
허······.
여기저기서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얼핏 들으면 자신의 쇼케이스니 원하는 곡을 연주했다는 말로 들리잖나.
하지만 한서호와 브리너의 관계에 의심을 품은 기자에겐 조금 다르게 들렸다.
-그럼, 다음 질문받겠습니다.
더 이상의 대답 없이, 들끓는 반응을 오히려 뜸 들이듯 내버려 두는 한서호.
곧바로 손을 치켜든 기자를 한서호가 가리켰다.
그녀의 손에 마이크가 들렸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한서호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래서. 본인의 곡들로만 꾸미고 싶었던 건가요?”
기자의 질문은 남들이 듣기에 이상한 것이었다. 본인의 곡들로만 꾸미고 싶었다기엔 이미 오프닝 곡을 브리너의 음악으로 꾸몄잖나.
급한 질문이었다. 몇 다리 건너뛴 것 같은. 하지만 한 번의 질문으로 한서호를 떠보기엔 이만한 질문도 없었다.
어리둥절한 사람들 사이에서.
기자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서호의 입가를 보았다. 옅은 웃음이 맺혀있었다.
그게 전신에 소름을 돋구었다.
반복되던 의문의 대답이 되었고, 커다란 희열이 성큼 다가와 몸을 흔들었다.
“맞습니다.”
하하하.
기자는 메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라니.
진짜······.
한서호가, 브리너라니.
그녀 말고도 몇몇 기자들이 비슷한 소릴 냈다. 의심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상황을 어리둥절하며 지켜보던 나머지 기자들과 관객들 또한, 이윽고 저들의 격정적인 표정의 이유를 깨달으며 경악한다.
다음 순간.
한서호가 말을 이었다.
“저는 한서홉니다.”
모두가 아는 이름 위로.
“그리고. 방금 전 곡들을 작곡한, 브리너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
마치 부적이 붙은 강시처럼 얼어있던 기자들 사이로 삽시간에 불이 번졌다.
“그, 그러면 브리너의 전곡을 모두 혼자서 작곡하신 겁니까?!”
“그럼 이번 앨범에 사운드 클라우디에 올라간 곡들이 실리는 건가요!?”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져 나오고, 기자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었다.
그게 인간이 가능한 일이냐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지는 기자도 있었다.
쇼케이스장에서 터져버린 대형 폭탄에, 사회자가 진땀을 빼며 소리쳤다.
-그, 저, 질문은 차근차근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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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한 곳을 응시한다.
다섯 개의 줄과···
그 안의 음표들···
고작 한 마디를, 알버트 어거스트는 30분째 노려보았다.
검붉은 입술을 비집고 나온 건, 서운함 가득한 투정이었다.
“베토벤, 당신은 참 고약한 사람이야.”
악보의 이름은 ‘합창’.
베토벤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남긴 마지막 음악이었다.
이 전설적인 음악을 마주한 알버트는 잔뜩 찌푸린 얼굴을 펼 수 없었다.
클라이맥스. 합창단이 합류하는 그 전율의 순간. 직전의 한 마디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폭포보다 더욱 강렬하게 내리꽂는 큰 낙차를 청중에게 선사하기 위해, 당신은 무엇을 고민했을까.
늘 그렇듯,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수년간 지휘자만의 방법이 있다고 믿었다.
대가의 곡을 규율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발전이라 믿었다.
근데. 수십 년을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이제는 궁금하다.
이게 정말 발전일까?
혹, 퇴보는 아닐까?
작곡가인 당신이, 낡은 나무 지휘봉과 들리지 않는 귀로 연주한 것은.
대체 어떤 형상이었을까······.
“지휘자로서 참담해지는군.”
위대한 곡의 지휘를 맡는 건, 언제나 행복과 고통을 저울질하는 일이었다.
며칠간 눈이 내려서일까.
속도 모르고 맑은 하늘을 보며 알버트가 앓는 소릴 냈다.
그리고 그때, 악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그에게로 누군가 찾아왔다.
“마에스트로.”
그의 비서였다.
“말씀드렸던 30일 인터뷰가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다음 달 스케줄 표입니다.”
프린트된 종이가 책상 위로 얹어졌다.
자연스레 시선을 따라 내렸던 알버트가 끄덕였다.
“확인해보도록 하지.”
“네. 그리고 마에스트로.”
“음?”
“한서호라고 아시죠?”
흥미로운 기색이 등등한 비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버트가 재차 끄덕였다.
모를 리 없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신성.
두 악기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신동.
그리고, 제2의······모차르트.
마지막 대목에서 불편한 기색이 그의 미간을 타고 스친다.
어쨌든. 분명 천재적이라 불리는 것에 모자람이 없었지만, 사실 그에겐 그리 시선에 들어오는 인물은 아니었다.
지휘자에게 흥미를 느끼게 하는 건, 뛰어난 연주자보다 성실한 연주자이니까.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뛰어난 곡이겠지만···.
그런 곡들은 낭만파의 불씨가 꺼지며 더는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그렇기에 미우나 고우나 옛 악보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거다.
“···차이코프스키 곡들로 구성된 앨범을 냈겠군.”
“아닙니다. 자작곡들로만 구성된 앨범을 냈더라고요.”
“자작곡? 장르를 뉴에이지로 선회한 건가?”
“뉴에이지가 아니라 클래식 앨범이랍니다.”
그 말이 알버트를 다시 한번 자극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이 클래식 앨범이라. 요즘 신동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광오한 녀석들뿐이군.”
문득 한 녀석이 떠오른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연주자라 할 수 있는.
자신을 제1의 장 오슬로라 말했던 녀석.
지렁이가 몇 마리 기어가는 것처럼 튀어나온 혈관을 보며 비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그런 경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그 소년의 정체가 누군 줄 아십니까?”
소년의 정체?
무슨 슈퍼히어로 영화도 아니고, 정체씩이나···라고 생각하던 알버트에게 비서가 툭 던졌다.
“브리너랍니다. 얼마 전에 마에스트로께서 언급했던, 그 인터넷 속 작곡가요.”
“······.”
알버트가 멈칫했다.
그는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자신의 비서를 보았다.
“쇼케이스장이 어디지?”
“아, PB 타워라더군요.”
“···가깝군.”
시간을 확인한 알버트가 그 즉시 움직였다.
‘합창’의 악보를 내려놓으며 어느새 코트까지 걸친 그가 집무실을 떠나며 말했다.
“단원들에게 연락해. 오늘 연습은 두 시간 미루겠다고.”
“네, 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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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앨범에 브리너의 곡들이 들어가 있나요?”
“그러면 이번 앨범이 브리너의 신보라 봐도 무방한 겁니까?”
“브리너라는 가명으로 사운드 클라우디에 곡을 올리신 이유가 뭔가요?”
나는 천천히 답했다.
앨범의 수록곡들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곡들이며, 그렇기에 브리너의 신보가 아닌, 한서호의 신보다. 사운드 클라우디를 이용하는 이유는 작곡한 곡들의 차이를 두기 위해서다.
······30여 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기자들의 궁금증을 모두 해소하기엔 부족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자들은 또 다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잠자코 기다렸다.
대체 한서호의 곡은 어떻길래?
그런 의문 섞인 눈빛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이윽고, 질의응답을 위해 세팅되었던 테이블과 의자가 치워지고, 연주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모두들 얼빠진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게, 로얄 클래식 측에는 이 사실을 미리 알렸지만, 저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프로였다. 악기를 들며 금세 집중하는 면모를 보인다. 특히 지휘자인 휘고는 멍청한 표정으로 보면대를 내려다보며 끔뻑이다가도, 지휘봉을 드는 순간 날카로운 눈으로 돌아와 나와 단원들을 확인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잠시 객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고개를 얼마 돌리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점잖게 미소짓는 아버지와 긴장한 듯 두 손을 꼭 쥔 엄마를···.
나는 마이크를 끄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곡의 제목은 ‘가족’입니다. 말 그대로 저희 가족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죠.”
그러면서 부모님을 향해 웃었다.
그들도 마주 웃는다.
어느 때 보다 훌륭히 연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찬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장면.
······그 자체로 악보이니까.
나는 눈을 감았다.
그게 신호였고,
휘고의 은빛 지휘봉이 단단한 현악의 화음을 뽑아낸다.
바이올린이 직조해나가는 선율은 명확했고.
첼로가 만들어가는 선율은 오묘했다.
그 사이로 비올라가 둘을 엮는다.
오케스트라로 치면 가장 작은 체임버 오케스트라.
하지만 소리의 명료함과 경도 만큼은 거대 심포니를 상회했다.
건반 위로 손을 띄운 나는 휘고를 보지 않았다.
대신 그가 건설하는 무대를 그렸다.
그 무대 위로 뛰어들 준비를 했고.
그게 지금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치 폭포가 떨어져 내리듯, 거침없이 열 손가락을 내리쳤다.
──!
이 합류가, 연주자인 나까지도 전율케 한다.
잠시뿐이겠지만,
목젖을 간질이던 갈증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나는 가족에 대해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거봐라.’
‘······.’
‘즐겁지?’
······어디선가,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러나 눈을 떴을 땐, 연주하는 내 양손만 보일 뿐이었다.
나는 보면대에 비친 내 미소를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그러게.’
즐겁다.
이 순간 내가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그리고.
내 음악이 어느 때 보다 빛나고 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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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내려와,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며 쇼케이스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박수 소리가 복도를 통해 밀려든다.
“···환호가 대단하네.”
“그러게요.”
“뭐. 그만큼 굉장했지.”
“마에스트로 덕분이에요.”
내 대답에 휘고가 고갤 저었다. 그리고 불쑥 손을 건넸다.
“영광이었다. 네 곡을 연주하게 되어서.”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마주 잡으며 푸스스 웃었다.
“근데,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브리너라니? 그것 때문에 하마터면 무대에서 실수할까 봐 엄청 집중했다고.”
“아, 그게······.”
입을 떼는데, 복도에서 누군가를 마주했다.
당연히 로얄 클래식의 엠마나 올리비아일 거라 생각했던 나는 의아해졌다.
중후한 백발의 노인이 새하얀 셔츠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가 나를 향해 인사하길래, 일단은 함께 인사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기자인가?
근데, 그렇다기엔······.
휘고의 반응이 이상하다. 옆에 서서 입을 떡 벌리고 있다.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갸웃거리는 사이 내 앞까지 다가온 노인.
그가 내게 물었다.
“앞으로의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네?”
“그 곡··· 언제, 어디서, 또다시 연주할 건가요?”
당황스러운 질문들이었다.
질문을 보니 기자가 맞는 것도 같은데······.
그때 옆에서 휘고의 목소리가 부서질 듯 흘러내렸다.
“지, 진짜 알버트······.”
알버트?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름에 잠시 갸웃거렸지만 이내 또 다른 의문에 잠겼다.
‘이상하다?’
어째서일까.
노인의 가을 하늘처럼 푸른 눈빛이 저렇게 흔들리는 건.
문득 며칠 전 윤 교수와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윤 교수가 본 게 이런 거였을까?
노인의 얼굴에서, 갈증이 보인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것 같은.
“그때는, 그 곡··· 내가 지휘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