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83
083. 쇼케이스
휘고는 한참 동안 악보를 훑었다.
눈앞에 손님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악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보면 볼수록 무늬만 클래식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게 아닌 진짜 클래식에 가깝다.
자신이 지휘해야 하는 ‘가족’이란 곡에 대해, 연이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세로 두 줄. 마침표에 다다른 휘고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느낌표와 물음표들이 떠올랐다.
눈앞에 이 곡을 만든 작곡가가 있다는 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이럴 줄 알고 본인이 직접 온 건가?’
오렌지 주스를 한 손에 들고 신기한 듯 집무실을 둘러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인지 부조화가 걸린 것 같은 느낌에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소년. 한서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소하며 말꼬릴 올렸다.
“다 보셨어요?”
“그, 그래요. 일단은.”
그러자 일순 눈빛이 확 변한다.
“어떠셨나요?”
“솔직히··· 놀랐네요. 이런 곡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래, 못 했지. 어떻게 상상했겠나.
이렇게나 짜임새 있고, 신기한 구석이 많은 곡일 줄은.
당장이라도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쳐든다.
지휘를 오래 하다 보면 악보만으로도 곡의 수준이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이 곡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악기들이 모두 연주를 시작하면 대체 어떤 곡이 튀어나올지, 전혀 짐작되지 않는다.
그게 지휘자로서의 호기심을 마구 건드린다.
“···궁금한 것들이 좀 많네요.”
“뭐든 물어 봐주세요.”
흔쾌한 답변에 휘고의 시선이 다시 악보로 향했다.
“이 1악장의 발전부부터 보면······.”
뭐랄까.
새삼스러운 기분이었다.
휘고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바흐의 곡을 분석할 때에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 없었다. 그땐 바흐가 건너편에 앉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곡은, 지금 작곡가가 눈앞에 있다.
뭘 물어봐도 기꺼이 대답해주겠다는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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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
첫 협주 후 휘고와 그의 단원들이 지어 보인 멍한 표정에 기분 좋았다.
몇몇 단원들은 자신들이 색안경을 꼈었다며 와서 사과하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뒤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는 휘고가 있었다.
연습 기간이 짧은 만큼 연습량은 하루 다섯 시간을 웃돌았다. 고작 한 곡인데도 그 정도가 필요했다. 사실 그것도 부족하다 느껴질 정도다. ‘가족’이라는 곡이 40분에 달하다 보니 7번 연주를 하고, 사이사이 피드백을 나눈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아쉬움은 자리를 털며 같이 털어냈다.
그리고 연습이 끝나자마자 로얄 클래식에서 잡아준 개인 연습실로 향했다. 내가 연주해야 할 곡은 가족 말고도 두 곡이 더 있었으니까.
‘눈 덮인 아트센터’와 ‘88개의 건반에 대한 단상’.
바이올린을 쥐고, 건반 앞에 앉아 연주에 몰두했다.
두 곡의 영감을 덥석 잡아채던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곡을 떠올린 건,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윤 교수에게 피아노를 그만두겠다 말했던 날이었지.
소복이 쌓여가는 눈 사이를 걸어가며 느꼈던, 아쉬움과 기대감. 그리고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날 응원하던 윤석호 교수.
그런 것들이 뭉쳐져 만들어진 이 곡은 그렇기에 눈이라는 소재로 쓰여졌지만 따뜻하다.
반면, 두 번째 곡은 달랐다.
감성보단 이성에 치우친 곡이었다.
백한길 회장의 생일잔치가 끝나고 돌아온 다음 날, 선물로 받은 SJ 문화 재단이 소유하고 있던 스타인웨이 피아노.
연주하는 순간, 그냥 녀석이 지니고 있던 영감이 화석처럼 발견되었고.
나는 지질학자처럼 녀석을 탐구했다.
그렇게 건반 하나하나에 무수히 많은 영감을 얻었고, 그것들을 합쳐낸 결과물이었다.
상당히 다른 두 곡이기에 연주하며 느끼는 것들도 천지 차이였다.
손끝의 감각부터 가슴 속 감정까지 모두 열어놓고 연주하며 연습했다.
느끼는 것들을 차곡차곡 담아 연주를 개선 시켜 나간다.
분명 한계가 명확한 곡들이지만.
나는 지금 연주자로서, 어떻게 그 한계를 한 꺼풀이나마 벗겨낼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렇게 또다시 몇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연습실을 나선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위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안 그래도 쇼케이스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한 번 연락하려고 했는데.
낮게 들려오는 윤 교수의 목소리에 내가 빙그레 웃었다.
“당연히 잘 하고 있죠.”
-뭐 나도 딱히 걱정은 안 됐다만.
“하하, 잘 지내시죠?”
-매번 똑같지. 애들 오면 가르치고, 없을 땐 음악 듣고.
한국에서 바쁠 때도 틈틈이 찾아갔었는데, 지금 미국에 덩그러니 있어서 그런가. 통화만으로 엄청 반가웠다.
윤 교수도 내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질문을 끝도 없이 쏟아낸다. 그 와중에 셀린 교수를 만났다고 하자 크게 놀라는 모습은 의외였다. 장 오슬로 때도 덤덤하던 양반이었으니까.
‘셀린 교수의 열렬한 팬일 줄이야.’
피식 웃으며 통화를 이어나갔다.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날씨가 충분히 춥지 않았는지 바닥에 내리는 족족 녹아 없어진다.
그때와는 다르게.
“근데, 교수님. 예전에 제가 피아노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요.”
-흠? 그래. 그때 왜?
“왜 그렇게 흔쾌히 허락하신 거예요?”
생각난 김에 물어보았다. 그러자 윤 교수가 뜬금없는 질문이라고 하면서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을 주었다.
-갈증이 보였거든. 절대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그 말에 잠시 멈춰섰다.
최근 들어 가지고 있던 고민까지 함께 얹어져 또 다른 질문을 했다.
“근데, 그게······ 아직도 안 채워진 것 같은데요?”
-그러냐. 그것참 다행이구나.
“네?”
-아직도 성장하려나 보다. 네가.
내 스스로 음악에 대해 욕심이 커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내심 불행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브리너로서, 욕심 때문에 좌절하는 음악가들 또한 많이 봤었으니까.
“······그런 걸까요?”
그런데 윤 교수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안해진다.
-그런 거다. 고작 그런 걸 걱정하기엔, 넌 원래 갈증 덩어리였어.
“덩어린 좀······.”
-흐, 농담하는 거 보니 괜찮아졌나 보네. 이제 슬슬 끊어라. 오늘은 오랜만에 ‘클래식은 죽었다’나 읽어야겠다.
“그거 아직 안 버리셨어요?”
-버릴까 하다가, 유머집 정도로 보관하는 중이다. 오늘 같은 날 보려고.
“그 책이 웃겨요?”
-웃기게 될 거다.
단호하게 말한 윤 교수가 덧붙인다.
-네가 세상에 나타나면.
#
며칠 후.
나는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PB 타워로 향했다.
각종 전시가 자주 열리는 건물답게 모던하고 현대적인 건축물이 시내 한복판에 솟아 있었다.
피터라는 로얄 클래식 직원과 함께 내부로 들어가자 내가 연주하게 될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쫙 의자들이 배치될 거예요. 그리고 앞쪽. 이 라인부터 맨 앞까진 테이블도 함께 배치됩니다. 프레스 석이죠. 그리고 이 라인 뒤부터 저기까지. 관객들이 채워질 예정입니다.”
설명을 들으며 쇼케이스장 내부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럼 총 몇 명 정도인 거죠?”
“관객은 300명이고 기자들까지 합치면 350명 정도가 될 겁니다.”
무대 바로 앞까지 다가서서 뒤를 돌아봤다.
넓고 어두컴컴한 이 공간에서.
비록 한 곡뿐이지만 내 ‘앨범’이 소개된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날, 인터넷을 통해 앨범의 모든 곡들이 세상에 공개된다.
이곳으로 들어오면서부터 템포를 올리던 심장 소리가 어느새 거칠게 뛰고 있었다.
아직 무대가 낯설어서일까?
그건 아닐 거다.
무대가 익숙하다 못해, 전생에서 만난 누구보다도 가장 ‘무대’라는 이름이 어울렸던 음악가도 매번 이곳에 서는 걸 설레했으니까. 특히나 초연 땐 더더욱.
어두컴컴한 무대 위에서 나는 그를 떠올렸다.
내가 어느새 그를 이해하고 있다는 게, 감회가 새롭다.
‘평생 너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곡과 연주를 너무 사랑해서, 그래서 매번 극적이게 자신을 포장해야 한다던 니콜로 파가니니.
‘난 물론 너처럼 악마와 계약한 척하진 못하겠다. 그건 요즘 말로 중2병이라 하거든.’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도 모를 친우를 괜스레 놀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 곡들을 위해, 작은 소동 정도는 일으켜보려고.’
웃음기를 가라앉히며 다시 한번 쇼케이스장을 눈에 담았다.
‘바로, 여기서.’
#
“와 저 사람들, 대체 얼마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린 거야?”
“물어보니까 4시간 전부터 줄 서 있던 사람도 있다는데?”
“허, 무슨 한정판 운동화 개시하는 것도 아니고···.”
“300명만 입장할 수 있다니 한정판이긴 하지.”
“이 사람들이 전부 한서호를 보러 왔단 말이지?”
“프레스 석 가서 일단 기사 하나 쓰고 시작해야겠네.”
메신저 백을 어깨에 멘 기자들이 PB 타워를 크게 빙 두른 사람들을 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 사이엔 미국 언론사뿐만 아니라 미국에 지부를 둔 전 세계 클래식 잡지사 기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프닝 공연은 앨범 수록곡으로 준비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곡을 연주하려나?”
프레스 석에서 빠르게 기사 하나 띄운 기자가 담백하게 꾸며진 무대를 보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한 기자가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푸슬푸슬 웃었다.
“당연히 차이코프스키 아니겠어? 사실 상 차이코프스키 스페셜리스트나 마찬가지잖아. 이력이 그것뿐이니.”
그도 그렇다며 동조하는 웃음소리들이 자작하게 깔린다.
그 사이, 관객들은 줄줄이 입장해 빈 의자들을 채워나갔다. 300석 정도면 소규모 중에서도 소규모였기에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곧 시작하겠는데?”
중간에 있는 질의응답 시간을 위해, 준비해온 질문들을 점검하던 기자가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로 사회자의 안내 같은 것도 없이 한서호가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박수.
반면, 질의응답 시간을 제외하고는 촬영이 따로 허락되지 않았기에 기자들은 모두 카메라를 내려놓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경쾌한 타이핑 소리가 쇼케이스장을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마치 빗소리 같은 그 소리를 배경 삼아, 가볍게 인사한 한서호가 바이올린을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현 위에 활이 내렸다.
-!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시작되는 공연.
과르네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에 모두가 넋이 나간 듯 감탄하는 것도 잠시.
“어, 이 곡······.”
기자들 사이에 의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클래식이다, 아니다, 말은 많지만 적어도 클래식계에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브리너의 곡들을.
프레스 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어났고.
“눈 덮인 아트센터였던가. 이 곡을 쇼케이스에서? 이건 너무 의왼데?”
“요즘 연일 화제니까. 거기에 무임승차 한 번 해보려는 것 같은데?”
“쉿. 조용.”
다시 잠잠해졌다. 물론 손가락은 더욱 바빠진다. 키캡이 튕겨 나갈 듯 빠르게 작성되는 기사들. 실시간으로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전 세계에.
한편, 관객석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브리너에 대해 아는 이들은 기자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연주를 감상했다.
연주가 본격적으로 선율을 그리자, 의아함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의문 어렸던 표정은 작은 감탄으로. 작은 감탄은 놀라움으로.
눈덩이가 굴러가듯 커졌다.
마침내 아트센터에 덮인 눈이 녹아내리고, 한서호가 과르네리를 어깨에서 내렸을 때.
관객들은 그의 등장보다 더 큰 박수로 응원했다.
그리고 기자들은 새삼 놀랍다는 얼굴로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휴, 연주 자체는 정말 대단하네요. 소름이 몇 번 돋은 건지.”
“국제 콩쿠르 입상자인데, 당연한 거지. 근데, 과연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네.”
“저도 너무 화제성만 의식한 거 아닌가 싶긴 해요. 가뜩이나 어린 연주자가 겉멋 들어서 작곡한단 소리까지 듣는 통에 고전파 연주곡들로 진득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진 않았을지.”
그때 한서호가 조심스레 과르네리를 피아노 위에 올려져 있던 케이스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다음 곡을 준비한다.
“이번엔 피아노인가 보네요.”
“저건 진짜 신기하네. 클래식 쇼케이스장에서 악기 두 개를 번갈아 가며 다루는 건 진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윽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적막 속에서 건반 위에 얹어진 한서호의 오른손이 한 음을 집요하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또, 브리너의 곡이었다.
“또? 이건 좀 과한데······.”
갸웃거리면서도 본능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자 한 명이 멈칫하며 타이핑을 멈췄다.
[제 곡인양 연주를 하고 있-]“에이, 설마······.”
노트북 화면에 머물렀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좀 전에 바이올린을 켠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건반을 현란하게 두드리는 한서호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