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a Mercenary Unit from Bankruptcy RAW novel - Chapter 28
후일담 3. 어떤 전직 용병
발데마르는 현대 지구에 적응하느라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당장 큰 노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저쪽 세상에서 지현에게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미리 알고 있던 것도 많았다. 몸으로 체감하며 놀란 일도 많았지만 라주라는 예방 접종을 했던 터라 뭘 봐도 “아, 참 놀랍구나. 이런 것도 다 있군.”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필요한 건 현지 정부에서 제공했고 발데마르는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됐다. 딱 하나 발데마르의 노력이 필요한 건 현지 상식 공부 정도였다. 특히나 법률 관련.
발데마르가 전직 용병대장에 추정 13~14세기 사람이란 걸 알자 공무원들은 제일 먼저 폭력에 관련된 법률과 판례를 서너 뭉치씩 들고 와서 가르쳤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무력행사를 불용한다는 걸 먼저 납득시켜야 했다.
‘먼저 공격 받았을 때 반격도 제대로 못 한다니,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잘도 법을 지키고 사는군.’
발데마르가 지니고 있던 검과 단검 등은 모두 압수당했다. 그나마 관련 법률이 없는 도끼 한 자루만 손에 남았다. 공무원들은 이것도 사람한테 쓰지 말 것을 몇 번이나 당부했다.
발데마르에게서 필요로 한 정보를 모두 획득했다고 판단한 정보부는 발데마르를 사회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마침 지현이라는 안내자가 있는 덕에 기초 상식을 가르치는 수고는 덜했다.
“잉게마르손 씨. 선생님의 핸드폰을 개통했습니다. 번호는 – 입니다.”
“호오, 이젠 내 것도 생겼군.”
발데마르가 공무원에게서 스마트폰을 받았다. 6.3인치의 대형 스마트폰도 발데마르가 잡자 아담한 소형 플립폰처럼 손안에 쏙 들어갔다.
“우리 쪽에서 연락할 경우 저장된 연락관의 번호로만 전화합니다. 다른 번호로 우리의 소속이나 이름을 댈 경우 사칭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그 이외에 요청하고 싶으신 게 있으십니까?”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구려. 아, 그 시내버스라는 공용 마차는 수를 좀 늘릴 수 없소? 늘 사람이 많아 탈 수 없구려.”
“그건 우리 선에서 어떻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출퇴근 시간을 피하면 대체로 자리가 나긴 합니다.”
“말을 탈 수 없으니 참 불편하더구려.”
“말을 못 타게 막는 법은 없지만 말을 구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바우그만 있었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대신 운전면허 시험은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차량도 제공할 순 없지만 대여는 가능합니다.”
“운전면허라는 건 한 번 배워 보겠소. 차는, 내가 직접 몰지는 배워 봐야 알겠소.”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전해 두겠습니다.”
“내가 해야 하거나 알아야 할 건 없소? 너무 받는 것만 많은데.”
“당장은 없습니다. 전직 용병대장이신 분께 맡길 일은 우리 정부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거 아쉽구려. 하긴 이 세계의 무장 상태를 보면 감히 내가 나설 일 따윈 없어 보이기도 하고.”
발데마르은 이쪽 세계의 무기와 전쟁을 배웠다. 직접 보진 못하고 전쟁 영화와 다큐멘터리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추 알 수는 있었다. 모든 병사가 미드파를 한참 개량한 무기로 무장했고 무쇠 솥은 차원이 다른 공포를 전장에 가져온다.
이런 전쟁터에서 발데마르처럼 이전 시대의 패러다임만 보유한 장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거의 없는 것도 아니고 아예, 전혀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외계인인 그가 군문에서 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 것이오?”
“그렇습니다. 아, 피트니스에 인스트럭터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고맙소.”
공무원들이 철수했다. 발데마르는 룸서비스로 제공된 점심 식사를 하고 간편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호텔 지하에 위치한 피트니스로 가니 발데마르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셋 다 가슴이 떡 벌어지고 어깨가 해안처럼 넓은 사람들이었다. 각각 보디빌딩, 파워리프팅, 종합 격투기의 전문가였다.
셋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로서 발데마르의 등장에 크게 고무됐다. 인간이란 종의 한계를 넘어설 것 같다는 그 기대감, 그걸 눈앞에서 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장비를 세팅하는 사이 발데마르는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파워리프터의 지시에 따라 자세를 바로 잡으며 고중량 운동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보디빌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발데마르는 보디빌딩만큼은 사양했기에 아쉬웠다.
이유가 너무 단순했는데, 식단 제한 때문이었다. 처음에 ‘아름다운 육체를 만드는 운동’이란 말을 들었을 때는 혹했는데 몸 안팎을 재건축하는 수준으로 관리해야 하는 걸 듣고 포기했다.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만큼은 못 버리는 발데마르였다.
체지방을 쫙 빼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은퇴했다지만 태생이 전사인 발데마르에게 자신의 신체를 평가하는 기준은 전쟁터에서 얼마나 생존성이 뛰어나냐는 거였다. 지방이 없는 몸은 방어력과 생존성이 부족했다.
보디빌더가 준비한 대회 출전자의 몸을 보고 발데마르의 첫 마디가 그거였다. 뭐든 맞았을 때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보디빌더는 안타까워했지만 격투기 코치는 두 엄지를 척 올리며 환호했다.
발데마르의 말마따나 격투기 선수들은 지방을 완전히 빼는 것보다 근육 위에 적당한 지방을 덮어 방어력을 높이는 식으로 신체를 만들었다. 발데마르가 가장 관심을 표한 종목이 격투기란 것도 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외계인인 발데마르가 공식 경기에 출전할 수는 없었다. 대신 국내 격투기 선수와 팬층에게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어 보였다.
발데마르는 아무런 보조 장비나 고장력 슈트도 없이 순수한 맨몸으로 300킬로그램의 바벨을 등에 짊어지고 스쿼트를 했다. 그걸 본 보디빌더가 탄식했다.
“저 몸이 내추럴이라고요. 하, 저기서 지방만 쪽 빼고 데피만 좀 다듬으면 크으.”
“닭 가슴살만 먹고는 못 살겠다고 하잖아요.”
“대회까진 안 바라니까 영상이랑 화보 딱 하나만 찍자고 해도 싫다 하니 원.”
“자자, 싫은 걸 어쩌겠어요. 그보다 조금만 더 각 잡고 노력하면 세계 기록도 깰 거 같은데 이쪽에 아주 집중하면 좋을 텐데.”
“세계 기록 공식에도 못 올리잖아요.”
“공식에는 못 올리지만 내추럴로도 여기까지 갈 수 있다! 라는 목표가 생기잖아요. 그리고 그거 위튜브에 올리면 국내 리프팅 팬도 쭉쭉 늘어날 텐데.”
“선생님 위튜브 구독자가 쭉쭉 늘어나는 게 아니라요?”
“오또케 아라찌!”
“푸하하하하하.”
“웨이트도 좋지만 너무 근육 찢지 말고 기술 훈련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속도가 오죽 빨라서 조만간 우리 애들이랑 스파링 해도 좋겠던데.”
“이 선수, 아니 이 관장님. 서로 합의했잖아요.”
“아니까 기다리는 거잖습니까. 으허허허허.”
“후욱!”
마침 발데마르가 한 세트를 마치고 바벨을 랙에 걸었다. 발데마르는 가볍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자세를 바꾸니 한결 편하게 더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었소.”
“발데마르 씨가 원래 했던 훈련은 아무래도 운동 역학 같은 과학 이론이 없다 보니 최적화가 덜 되어 있었어요. 물론 전쟁터에선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보다 다른 운동 능력이 더 중요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씀하신 그대로요.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으면 무기를 휘두르거나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데 이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더 무거운 걸 들면 좋다는 건 아닌지라 그쪽 훈련은 어느 정도만 했지.”
“발데마르 씨 1RM은 이미 내추럴, 무장비로는 세계 기록을 넘었어요. 다음 목표는 무장비로 국제 파워리프팅 협회 공식 세계 기록을 깨는 겁니다.”
“크하하. ‘세계’ 기록이라. 그건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구려.”
“당장은 어렵지만 꾸준히 훈련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너무 근육 찢어 놓으면 기술 훈련 못 해요.”
“알겠소. 내 적당히 하리다. 전에 본 그 ‘복싱’이라는 기술이 참 재밌던데 그걸 중점적으로 배워 보고 싶소.”
“타격기의 기본이지요. 그거 말고도 주짓수, 유도, 킥복싱, 배워야 할 건 많으니 기대하세요.”
“고맙소.”
“기술 기초를 갖추고 나면 실제 사람이랑 스파링도 해 볼 거예요. 제가 전에 드린 영상 보셨죠?”
“아, 그거. 격렬하게도 싸우더구려. 맨손으로 그렇게 치고받고 싸우다니. 그 선수들 몸은 괜찮은 것이오?”
“나름 안전을 위한 규정을 많이 둡니다. 그래도 후유증이 남거나 사상자가 나오긴 하지만, 그냥 아주 싸우는 것과는 다르죠.”
“그렇구려. 스포츠, 스포츠라. 우리 세계에도 스포츠가 있었소. 마상창 시합이라고, 처음엔 진짜 창으로 찔렀지만 시합을 하는 족족 선수가 죽다 보니 이런 저런 규정을 두게 되더구려. 크하하.”
“하, 하하…….”
운동 후 씻고 나면 온건히 발데마르의 시간이 남았다. 그렇다곤 해도 이미 저녁 식사 직전이라 남은 하루가 그리 많진 않았다.
이 시간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시내로 나가 사람 구경을 하며 보냈다. 하지만 오늘은 지현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발데마르는 호텔에서 제공한 면도기로 턱수염의 잔털도 말끔히 정리하며 지현을 기다렸다.
‘으음, 이 면도기란 것 정말 편하군.’
면도칼 주제에 날 길이만 20센티미터가 넘던 발데마르의 면도용 단검은 정부에서 압수해 갔기에 처음 며칠 동안은 면도를 못해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랐다. 한참 뒤에 공무원이 면도기와 사용법을 가르쳐 준 덕에 제대로 면도를 할 수 있게 됐다.
‘맛집 지도도 얻었고. 모든 게 만족스럽군. 아니 이건 만족스럽다기보다는, 사치스럽군. 제국서도 이리 융숭하게 대접받은 적은 없거늘.’
외계인 특별법에 의거해 의식주가 제공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주 융숭하게 대접한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지금은 호텔에 머물고 있지만 준비도 거의 끝났으니 거처도 조만간 정부 소유의 공용 숙사로 옮겨갈 것이었다.
그럼에도 발데마르가 융숭하다 느끼는 건 현대인에게 공기처럼 자연스런 문물들이 그에겐 마냥 대단했던 덕이었다. 특히 수도꼭지와 전등이야 말로 그가 느끼는 가장 놀라운 문명이었다.
손가락 하나로 따뜻한 물과 밝은 빛을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얻을 수 있다니. 지현을 먼저 경험하지 않았으면 놀라는 정도로는 안 끝났을 거다. 신의 장난이나 시련이라고 여겼겠지.
‘하긴, 지현이 없었으면 애초에 여기에 올 일도 없었을 테니 그럴 일도 없었겠지만.’
다 씻은 발데마르는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잡아 당겼다. 머리가 많이 길어졌다. 슬슬 한 번 다듬을 때가 된 모양이었다.
이 기회에 긴 뒷머리도 그냥 잘라 버리는 게 어떨까 고민했다. 뒷머리를 일일이 땋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지현에게 물어봐야겠군.’
발데마르는 머리를 정리하고 시계를 봤다. 오후 6시 40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옷장에서 편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입고 호텔 로비로 나가서 잠시 기다리니 곧 지현이 찾아왔다.
이 순간이야말로 하루 중 발데마르가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었다. 발데마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지현에게 다가갔다.
“나도 이제 휴대전화가 생겼소.”
“번호가 어떻게 돼요?”
“아, 앗. 적어 놓은 종이가 방에 있는데.”
“괜찮아요. 이리 줘 보세요.”
지현은 발데마르의 폰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즉시 지현의 스마트폰에 발데마르의 전화번호가 표시됐다.
“이 번호는 제 거예요. 제대로 저장해 두세요.”
“확실히 외우겠소.”
“그럼 오늘은 어딜 갈까요?”
“이 관장이 좋은 라운지를 소개해 줬는데 거긴 어떻소?”
“저야 좋지요. 그럼 가 볼까요?”
두 사람이 호텔을 나섰다. 발데마르의 하루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