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y Train RAW novel - chapter 67
꽃을 사다 건넨 것이 낯간지러워 위르겐은 얼굴을 붉혔다. 민망함에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웃는 얼굴이 예뻐 그 자리에서 굳었다.
“예전에 제가 받은 꽃다발을 뭉갰었잖아요. 기억나요? 창문 밖으로 던지라고… 막…….”
좋은 추억이 아님에도 그녀는 좋은 추억을 말하는 사람처럼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날 정말 무서웠었는데…… 인제 와서 보니 허세가 좀 있으신 것 같아요. 어차피 진짜 죽일 것도 아니었으면서…….”
스볘타는 꽃잎 하나를 뜯어 두꺼운 교본 속에 끼워 넣었다. 놀릴 생각으로 꺼낸 말인데 그는 그다지 동요가 없었다. 항상 느끼지만 위르겐은 놀려 먹기 좋은 상대는 아니었다.
“허세가 아니라 질투였습니다.”
차라리 허세인 편이 덜 섬뜩하게 느껴졌을 텐데.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결혼해 주십시오.”
무릎을 굽힌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조건 같은 게 없나요?”
“그럴 리가.”
스볘타의 손을 붙잡아 반지를 끼워 주는 위르겐의 손길이 제법 다정하고 섬세했다.
“이젠 나와 이혼할 수 없어요.”
“절대로?”
“절대로.”
손가락에 끼워져 반짝이는 반지는 예뻤고, 위르겐의 목소리는 제법 부드러웠다. 그녀는 옅게 웃으며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고 용서할게요. 하지만 위르겐…… 앞으로는…….”
스볘타의 투명한 벽안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맺혔다.
“앞으로의 일들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스볘타는 더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행복한 얼굴의 나탈리야가 자신의 남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 실은 질투가 났다. 그게 오빠고, 오빠의 아내라는 걸 알면서도. 질투하는 스스로가 미웠지만 부러움에 치가 떨렸다.
나탈리야의 환한 웃음을 보는 순간 쌍둥이를 임신해서 배가 불렀을 때가 떠올랐다. 몸이 불편한 것도 괴로웠지만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마음이었다. 그 시절의 서러움이 떠올랐다. 정말 다 잊고 용서해 줄 생각이었는데 잘되지 않았다.
턱에 맺힌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위르겐은 그런 그녀를 와락 감싸 안았다. 괜찮은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고, 굳건한 맹세를 하지도 않았지만, 스볘타는 그가 더는 실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제 그녀는 그를 믿게 되었다.
***
스볘타는 시험을 치르며 내내 머리를 쥐어짰다. 시험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쏠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시험장엔 온통 남자들뿐이었고, 그들은 유일한 여자인 스볘타를 빤히 쳐다보았다.
‘자꾸 보지 마세요!!’
마음 같아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스볘타는 애써 주변의 시선을 무시하며 꿋꿋하게 시험을 치렀다. 막상 시험에 집중하자 시선 같은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잘 봤습니까?”
시험장을 나서자 차에 기대고 서 있던 위르겐이 스볘타를 반겼다. 스볘타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든 뒤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잘 봤죠.”
스볘타가 자신 있게 대답하며 자동차 고치는 시늉을 했다. 이미 몇 년간 현역으로 일했는데 시험을 못 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일자리만 알아보면 되겠어요.”
“아예 정비소를 차려 줄 수도 있는데.”
“됐으니까 자동차 경주 티켓이나 구해 봐요. 먼젓번 걸 놓쳐서 속이 엄청 쓰리거든요.”
스볘타의 요구를 들은 위르겐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지간해선 부탁을 해 오지 않는 스볘타였지만 꼭 경주를 보러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요즘 자동차 경주를 보는 일에 푹 빠져 있었다. 티켓을 구해 보겠다고 밤새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탓에 위르겐은 스볘타와 매표소 앞에서 밤을 새워야만 했다. 사람을 쓸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부러 그러지 않았다.
스볘타와 함께 줄을 서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아. 찾았다. 저게 북극성이네요. 그렇죠? 여기 위도가 53도였던가…….”
줄을 서는 내내 그녀는 조잘조잘 관심사에 대해 떠들었다.
“타세요.”
위르겐이 정중하게 차 문을 열어 주며 읊조렸다.
스볘타는 위르겐의 차에 올라타며 새삼 그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실감했다.
“위르겐, 집으로 바로 갈 건가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음…….”
스볘타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늦봄이 왔기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레나랑 사샤가 기다려요.”
“슈니츠 부인이 잘 보고 있을 겁니다.”
“알아요. 그래도 집에 가요. 오늘은 어쩐지 집에 가고 싶어요.”
위르겐은 저택으로 차를 몰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근사한 저녁 식사와 함께.
“그래도 시험을 끝마친 걸 축하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준비한 것도 아닌데요……. 아!! 경주에만 안 빠졌어도 훨씬 잘 칠 수 있었는데…, 분명 수석을 할 수 있었을 거예요.”
“적당히 하세요. 괜히 몸 버리지 말고.”
“위르겐, 당신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요? 그러다 과로사해요.”
“난 괜찮습니다.”
위르겐은 스볘타를 힐끗 훔쳐보았다. 그녀는 그저 태연한 얼굴로 차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곁에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네?”
스볘타가 눈을 부릅뜨며 낯뜨거운 소리를 하는 위르겐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랑해요.”
위르겐은 그다지 태연하지 않은 얼굴로, 낯 뜨거운 소리를 꺼냈다. 스볘타는 얼이 빠져 머뭇거리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운전이나 조심하세요.”
위르겐은 자신이 누리는 행복이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옆 좌석에 앉은 스볘타는 그에겐 과분한 여자였다.
그렇다 해서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위르겐은 스볘타에게 줄 선물을 꺼내 보았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고, 자동차는 더 좋아했다. 정비하다 보면 튜닝에 대한 욕심이 한도 끝도 없어진다며 직접 엔진을 갈아 치우기까지 했다.
“근데 잘못 건드렸어요. 너무 욕심을 냈더니…….”
엔진을 건드리는 건 전문가에게도 어려운 일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민망하다며 얼굴을 붉히곤, 한동안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누볐다.
위르겐은 그런 스볘타를 위해 준비한 차 키를 주머니에 넣었다. 수도에서도 구하기 힘든 고급 승용차였다.
곧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스볘타는 조금 흐트러진 차림새로 성대하게 차려진 식탁에 앉았다.
“뭐예요?”
스볘타는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생일을 잊은 지 오래였다.
“스볘타.”
위르겐이 탐스러운 꽃다발과 차 키를 스볘타에게 건넸다.
스볘타는 조금 놀란 얼굴로 그가 건넨 차 키를 받았다.
“세상에…. 이 차를 어떻게 구한 거예요, 위르겐? 그런데… 꽃은 왜?”
그녀는 차 키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위르겐에게서 꽃을 넘겨받았다. 품 안 가득 꽃을 안아 든 그녀는 꽃향기를 맡으며 환히 웃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그제야 자신의 생일임을 깨달은 스볘타는 위르겐에게 받아 든 꽃을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화병에 꽂았다. 이름 모를 화사한 꽃에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이젠 그에게서 꽃을 받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엄마, 엄마!! 우리도 선물 준비했어요!”
옐레나가 그녀에게 치대며 어설프게 포장한 상자를 건넸다.
“사샤랑 제가 열심히 만들었어요.”
“정말?”
“네!”
스볘타는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알렉산드르와 옐레나가 준비한 선물을 뜯어보았다.
“세상에…! 너무 예쁜걸.”
무르익은 가을이 담긴 그림과 우유 캐러멜이었다. 노란 은행잎으로 장식한 그림에는 스볘타가 그려져 있었다. 지난가을에 만들어 둔 모양이었다. 어설펐지만 그만큼 사랑스러웠다.
“엄마의 귀여운 천사님들, 너무너무 고마워.”
아이들의 말캉한 뺨에 입을 맞추다 그녀는 너무 기뻐 울먹이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울먹이는 엄마를 놀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은, 스볘타조차 오래도록 잊어 왔던 그녀의 생일이었다. 꽃과 케이크가 식탁을 장식했고, 평소보다 신경 써서 만든 음식이 차려졌다. 촛불이 켜진 식탁은 따뜻했다. 스볘타는 향긋한 향신료가 뿌려진 양고기를 조각조각 썰어 입에 넣었다.
식사가 끝난 뒤 위르겐이 아이들을 침실로 올려보냈다. 스볘타는 위르겐이 선물한 꽃으로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을 맥주 축제에 놀러 갈 때 쓸 화관이었다.
“잘 만들죠?”
그녀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이며 화관을 얽었다.
“어릴 때 많이 만들었거든요. 아직도 감이 남아 있어요.”
스볘타는 순식간에 만들어 낸 화사한 화관을 위르겐의 머리 위에 얹었다. 위르겐과 화관은 썩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스볘타는 웃음을 터트렸다. 위르겐 또한 입매를 느슨하게 올리며 따뜻하게 웃음 지었다.
스볘타는 또 한 번 꽃을 한 움큼 집어 화관을 엮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화관은 그녀가 썼다. 화관을 쓴 그녀는 숲의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다 됐다. 이제 가요, 위르겐.”
위르겐은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스볘타는 늦은 봄에 태어난 여자였다. 흐드러진 연둣빛 녹음 사이를 비집고 걸어가는 그녀는 봄과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바람에는 향기가 섞였고 세상은 다시금 색을 얻었다. 위르겐은 부드럽게 흩날리는 스볘타의 금빛 머리칼을 향해 손끝을 뻗어 보았다.
갈망이 빚어낸 환상이라고 여겼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여린 새싹 같은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끝을 느긋하게 스쳤다.
“오늘 밤새 축제를 한대요. 맥주랑 음식을 나눠 마시는 거라면서요. 여태 한 번도 안 가 봐서 전혀 몰랐어요.”
신이 난 그녀가 느리게 걷는 위르겐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음식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그렇습니까?”
“정신이 없어서 까먹었어요. 이제라도 집에 들러 케이크라도 챙길까요?”
스볘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스볘타의 환한 금발이 노을 볕을 받아 펄럭이며 반짝였다.
물들어 반짝이는 것은 그녀의 머리칼뿐 아니었다. 겨울을 견디고 자라난 새싹과 꽃도, 바닥에 깔린 돌도, 투명한 호수도, 그와 스볘타의 저택도 전부 노을을 머금고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런데도 위르겐은 오직 스볘타만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위르겐은 스볘타를 향해 한 발짝 성큼 걸어갔다. 벅차도록 사랑스러운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단 한 순간도 사랑스럽지 않았던 적 없었던 그의 스베틀라나가.
봄 축제로 향하던 그들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맞췄다.
시간이 흘러 증오가 사그라진 것처럼, 계절이 변하고 시대가 변해 온 것처럼.
흘러가는 것들은 전부 변하고 낡아 갈 테지만 위르겐은 이 순간만큼은 영원할 것을 알았다.
찬란하게 남아 영원토록 따뜻한 봄볕이 되어 줄 것이다.
녹슨 열차 3권
지은이 : 루셴카
발행인 : 모먼트
발행처 : (주) 위벨
블로그 : https://blog.naver.com/wevel
정가 : 3,000원
ISBN 979-11-6553-130-0
copyrightⓒ 루셴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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