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41
540화. 주어진 복에 감사하다 (2)
임근용이 인사를 하고 물러가자 임옥진은 깨끗하게 씻고 온 하 이낭이 건네주는 탕약을 들고 침상 귀퉁이에 앉아 육건신에게 약을 먹였다. 육건신은 모든 사람이 그의 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화가 나 탕약을 한 입 머금고 방금 했던 짓을 되풀이하려 했다. 이에 임옥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게 다 무슨 고생이에요? 약을 안 먹으면 병이 낫지 않아요.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주어진 복에 감사하며 살 줄 알아야지 그렇게 함부로 낭비하면 되겠어요.”
육건신은 더욱 화가 나 고개를 돌리고 하 이낭을 바라보며 하 이낭에게 먹여 달라 눈짓했다. 임옥진도 그런 그가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또 약간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가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너희가 대노야를 잘 모셔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너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하 이낭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대부인, 걱정 마세요. 비첩이 대노야를 잘 모실게요.”
그녀는 임옥진이 밖으로 나가자 약사발을 들고 소성과 아유에게 지시했다.
“너희는 먼저 가서 밥을 먹고 나중에 와서 나랑 교대해.”
소성과 아유가 조용히 물러갔다.
“대노야, 비첩이 문이랑 창문을 닫고 와서 탕약을 식혀 드릴게요.”
하 이낭이 조심스럽게 문과 창문을 닫고 약사발을 든 채 육건신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약 드시겠어요?”
육건신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 눈짓하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모금만 더 드시겠어요? 드셔야 해요. 대노야께서 약을 안 드시면 대부인께서 절 가만두지 않으실 거예요. 대부인께서 방금 주어진 복에 감사해야지 함부로 낭비하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이렇게 약과 음식을 낭비하면 안 돼요.”
그녀는 이렇게 말한 뒤 육건신의 코를 움켜쥐었다. 육건신이 참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 하 이낭이 이를 틈타 잽싸게 탕약을 들이부었다.
육건신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 이낭이 손수건으로 부드럽게 그의 입을 닦아 주고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천천히, 몸도 편찮으신데 괜히 위세 부리려 하지 마세요.”
그녀가 또 육건신의 귀에 대고 말했다.
“어제 온 의원이 그러는데 이제 더는 나아질 가망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 고의로 이불에 오줌을 싸면 그 이불을 얼굴에 덮어드릴 거예요. 아시겠죠?”
육건신의 눈이 갑자기 확 커졌다.
하 이낭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주어진 복에 감사할 줄 알아야죠.”
* * *
보름 후 편지를 받은 도봉당이 직접 임신지와 함께 와서 사람들과 탄식하며 인사를 나눈 뒤 혼자 임근용을 만나러 왔다. 그는 임근용을 보자마자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임근용이 웃음을 머금고 한쪽으로 몸을 피하며 말했다.
“큰 사촌 오라버니, 뭐 하는 짓이에요? 몇 년 만에 봤다고 갑자기 이렇게 깍듯하게 예의를 다 차리고, 누굴 놀래 죽일 셈이에요?”
도봉당은 짧게 콧수염까지 길러 전보다 더 침착하고 위엄있어 보였지만 지금 은 그저 그녀에게 농담을 던지는 사촌 오라버니일 뿐이었다.
“말만 잘 하는구나!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래, 헛소리 하지 마.”
임근용이 그에게 직접 뜨거운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외숙부하고 언니, 봉거랑 두 조카들은 잘 있죠? 우리 가족들이 이번에 오라버니네 집에 신세를 좀 져야 해서 오라버니한테 폐를 꽤 많이 끼칠 것 같아요.”
“쓸데없이 그런 예의는 뭐 하러 차려?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고서야 고향 땅을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도봉당이 한숨을 내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가족들은 다 잘 지내. 네 말대로 집을 떠나 다른 일에 신경을 쓰시게 했더니 아버지 병도 정말 많이 호전되셨어.”
그는 이렇게 말한 뒤 또 참지 못하고 임근용을 향해 절을 했다.
“넷째야, 이게 다 네 덕이야. 너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발만 동동 구르며 원통해 하고 있었을 거야. 평주랑 청주가 아수라장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몰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처음에 나한테 강남에 가서 장사를 해 보라고 권한 것도 너더라. 그 덕에 지금 여기다 이렇게 가업을 일굴 수 있게 됐어. 너 아니었으면 우리도 지금쯤 우왕좌왕하고 있었을 거야. 아버지께서 네가 정말 선견지명이 있는 아이라며 감탄하셨어. 말해 봐, 너 그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임근용이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말했다.
“선견지명은 무슨! 난 그냥 외숙부하고 언니가 조금이라도 더 잘됐으면 해서 그런 거예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죠!”
그녀가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사실 그때 내가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잖아요. 외숙부하고 사촌 오라버니한테 신세를 너무 많이 져서 어떻게 하면 두 사람한테 돈을 좀 벌게 해 줄 수 있을까 하고 궁리했던 것뿐이에요.”
육함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런 얘긴 그만 해요! 어쨌든 이렇게 만났으니 서로 기쁨을 나누기만 하면 되는 거잖소.”
육함이 말을 끊자 도봉당도 그 질문은 잊고 기뻐하며 그에게 말했다.
“노태야께서 무엇보다 사촌 형제들의 학업을 이어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근방에 따로 집이랑 땅을 사시겠다고 하셨어. 근데 우리 아버지께서는 쓸데없이 돈 낭비할 필요 뭐 있냐면서 일단 우리가 안 쓰는 집을 한 채 빌려드리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육함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외할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르신께서 빈틈없는 성격이시라 이런 일로 남한테 신세 지는 걸 싫어하시거든요. 괜히 기분 상하시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도봉당이 말했다.
“그건 그러네. 근데 너희 정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육함이 말했다.
“우리는 신주로 갈 거예요. 일전에 아용이 세전 형님한테 부탁해서 거기에 가게를 차리고 집이랑 땅도 사 뒀어요. 세전 형님이 벌써 우리를 마중하러 출발했다고 하니까 아마 이틀 안에는 도착할 거예요. 우리는 그쪽으로 가는 게 더 나을 거예요.”
도봉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더 권하진 않을게.”
그가 참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넷째 네가 어떻게 이런 생각들을 다 할 수 있었던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네가 이렇게까지 주도면밀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육함이 잠시 침묵했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복이 많나 봐요.”
이어서 육선과 임신지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네 사람은 이내 이사 방법과 향후 계획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도봉당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쫓아다니며 소위 ‘선견지명’이라는 것에 대해 물어댈 수 없었다. 이에 임근용은 한숨을 돌리고 조용히 빠져나와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이틀 후, 도봉당과 임신지가 임씨 가문 일가족과 함께 임근용 일행에게 아쉽게 작별 인사를 한 뒤 마차를 타고 떠났다. 이어서 임세전도 여지의 남편 묘중과 함께 임근용 일행을 신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 임근용은 호쾌하게 삼남가를 신주로 초대했다. 여씨가 끊임없이 감사 인사를 해댔지만 임옥진은 웬일인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귀찮아하거나 경멸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평주의 비적의 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임세전은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려워졌다. 사람들이 수웅과 그 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임세전은 자기도 모르게 임근용을 유심히 보았다. 처음부터 다른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었던 임근용은 육함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임세전도 도봉당처럼 그녀에게 그 일에 대해 추궁을 할까 봐 다른 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끊었다. 임세전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아 도봉당에게 한 것처럼 얼버무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임세전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 그녀에게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임세전은 이틀 정도 짐을 꾸릴 시간을 주었고, 육함은 좋은 날을 골라 임대한 집을 반환한 뒤 육선과 함께 일가족을 데리고 신주로 출발했다. 여행길에서의 고생스러움은 있었지만, 섣달 초에 온 가족은 마침내 무사히 신주에 도착했다.
신주는 강남의 수향(*水乡: 못이나 하천이 아름다운 지역)으로 강과 호수가 교차하는 곳이었다. 물 위에 작은 다리가 놓여 있었고, 흰 벽과 푸른 기와가 아름다운 여인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가랑눈이 내려도 아름답고 보슬비가 내려도 아름다워 어딜 둘러보아도 한 폭의 그림 같고 우아한 시 같았다.
임근용은 새 집의 잘 정돈된 정원 앞에 서서 마중 나온 여지를 껴안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육씨 가문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못했다. 제일 먼저 나선 건 육함이었다. 그는 일단 육선에게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웃는 얼굴로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육함은 여긴 임근용이 혼수로 힘들게 일궈 둔 가업이니 앞으로는 누구도 놀고먹을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또 육선도 조만간 가정을 이뤄야 하니 이참에 육선에게 가주로서 집안일을 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말했다.
잠시 옆에서 지켜보던 임세전은 더는 걱정할 것이 없다 생각하며 임근용에게 작별을 고했다.
“한동안 류아 혼자 집에 있어서, 혹시 그 녀석이 집에 불이라도 지른 건 아닐지 가서 확인해야해. 그 참에 너희 환영회도 준비해둘 테니 좀 이따 와.”
임근용이 그를 대문까지 배웅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라버니, 고마워요.”
임세전이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누가 누구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으니까.”
임근용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따가 너희를 마중할 사람이 올 거야.”
임세전이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멋지게 뒤돌아 떠났다.
임근용은 맥없이 그에게 손을 흔들고 뒤돌아 육함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절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도봉당도 의아해하고 임세전도 마찬가지였는데 육함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있었다. 그가 정말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냥 묻고 싶지 않은 걸까? 하지만 임근용은 이 문제에 대해 육함에게 물을 용기 따위는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이번 생에서 이 답을 알긴 힘들 것이다.
* * *
임세전의 집에서 돌아온 후 임근용은 한참 전부터 졸려 하던 의랑을 재우고 기지개를 켜며 등불 밑에 앉아 두아와 함께 육함의 봄옷을 바느질했다. 육함이 천천히 걸어 들어오더니 의아해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그리 서두르는 거요?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외투는 그냥 밖에서 파는 걸로 두어 벌 사면된다고 하지 않았소.”
“이소야도 참, 이소부인께서 밖에서 파는 외투는 질이 별로라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거 아시잖아요?”
두아가 입을 오므리고 웃으며 두 부부가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육함은 두아가 가는 걸 보고 간이 커져서 임근용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가 임근용의 손에 들려 있던 바느질거리를 빼앗아 한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바느질 같은 건 낮에 한가할 때나 하시오. 내가 당장 필요하다는 것도 아닌데, 눈이라도 상하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는 거요.”
“어쩌긴요? 기껏해야 셋째 숙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사람을 흘겨보는 거밖에 더 하겠어요.”
임근용이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전에는 은근슬쩍 필요한 것처럼 굴면서도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제대로 말도 안 하고 소매까지 자르게 만들더니, 이제는 또 마음 아프다고 만들지 말라니, 쯧쯧, 사람이 매번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달라져서야…….”
육함이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옛날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잖소.”
임근용도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안 할게요. 그런 얘긴 그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