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hon RAW novel - Chapter 540
539화. 주어진 복에 감사하다 (1)
임근용은 등불 밑에 앉아 느긋하게 긴 머리를 빗으며 침상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육함을 힐끗 보고 말했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하는 거예요?”
육함이 반쯤 눈을 감고 살짝 웃었다.
“어찌 이리 안면 몰수를 할 수 있소, 이젠 필요 없다고 내쫓는 거요?”
임근용이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고 그에게 다가가 머리를 빗어 주며 가볍게 말했다.
“여기 오래 있다가 당신이 혼날까 봐 그러는 거잖아요? 나야 밤에 발을 녹여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좋지, 뭐.”
육함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뻔뻔하긴! 남들은 아내가 남편의 이부자리를 데워 준다는데, 난 오히려 당신 이부자리를 데워 주는 신세가 됐군.”
임근용이 미소 지으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말했다.
“싫으면 하지 마요, 나한테는 작은 난로도 있고 또 매일 나랑 같이 자고 싶어 하는 의랑이도 있으니까요.”
임근용의 미간에는 살짝 나른함이 감돌았고, 얼굴에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몽롱하면서도 따스한 물기가 어려 있었고 입술을 또 살짝 부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봄날의 달빛 아래 활짝 피어있는 살구꽃 한 송이 같았다.
육함은 잠시 동안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쩌지? 난 아직도 부족한데.”
임근용이 무릎으로 그를 막으며 말했다.
“가요! 뜨거운 물도 다 써서 없어요! 나더러 찬물로 씻으라고 할 생각은 말아요.”
“정말 꼼짝도 하기 싫소.”
육함은 희망이 사라지자 침상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용, 우리 내년에 아들 하나만 더 낳읍시다.”
임근용도 반대하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
“당신이 그럴 능력이 되려나 모르겠네요.”
“두고 보시오.”
육함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꾸물대다가 억지로 옷을 주워 입고 늑장을 부리며 밖으로 나갔다. 임근용은 침상에 편하게 누워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불을 껐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고비는 이제 다 지나갔다. 전생의 육함이 마지막에 그녀를 찾으러 돌아왔었는지 아닌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는 그 일을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고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육함의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근용은 아직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잘살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잘 헤쳐 나가고, 또 앞으로의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나가는 것뿐이었다. 임근용은 이제 다시는 그런 악몽을 꾸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녀는 이미 그 운명을 확실히 이겼고, 또 스스로를 이겼기 때문이었다.
밤새도록 북풍이 세차게 불어댔지만, 그녀는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잤다.
* * *
“하늘 아래 넘지 못할 산이란 없어요.”
임근용이 임옥진의 머리카락을 빗어 주며 조용히 그녀를 위로했다.
“어제 왔던 그 의원은 좀 별로인 것 같아요. 새집에 도착하면 아버님을 위해서 다른 좋은 의원을 찾아볼게요. 침을 놓아 드리든 탕약을 드리든 최선을 다 해 봐야죠.”
임옥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칫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너희가 해야 할 일들을 해. 네 시아버지는 걱정하지 말거라. 의랑이도 내가 너 대신 잘 돌봐 주마.”
생사고락을 함께 겪고 난 후로 임옥진은 임근용을 좋아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육함과 마찬가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임 노태야의 말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복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그 복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임근용은 임옥진의 말뜻을 알아듣고 답례하듯 말했다.
“나중에 좀 안정이 되고 나면, 사람을 보내 아운 아가씨한테 안부를 전하고 시간이 되면 아이랑 같이 어머님 아버님을 뵈러 오라고 말해 볼게요.”
임옥진이 한참을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마 쉽지 않을 거야. 아운이는 그렇게 자유롭지가 못하거든.”
아침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햇빛이 찬란한 이 겨울날 아침에 임옥진은 마음속에 묻어둔 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려 하지 않았던 일을 결국 임근용에게 털어놓았다.
“금씨 가문의 그 늙은 여편네가 얼마나 각박하고 가혹한지 몰라.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옷차림, 생활비 어느 것 하나 그냥 넘어가질 않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대. 가벼울 때는 그냥 꾸짖는 정도에서 끝나지만, 심할 때는 때리기도 한다더구나…….”
육운은 향불을 올리러 가기 위해 외출하는 것조차 극히 어려웠다. 다른 집 여자 식구들과 시회나 꽃구경을 하며 교제하는 것도 못 하고 있는 마당에 까마득하게 먼 친정에 가는 걸 어디 꿈이나 꿀 수 있겠는가.
원래 지는 걸 싫어하고 오만한 성격인 육운은 시집을 간 후 혼신의 힘을 다해 금 부인과 싸워댔다. 한동안은 고부간에 밀치락달치락 하며 승패가 엇갈려서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육운이 임신을 한 뒤로 한층 더 거만해지자 금 부인은 즉시 미모의 통방을 둘이나 들였다. 원래도 적지 않은 수의 통방을 거느리고 있었던 금진우는 별로 대수롭지 않아 하며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육운은 화가 나서 거의 반죽음 상태가 되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일단 화를 눌러 참고 아들부터 낳은 후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첫 아이는 딸이었다. 이에 금 부인은 숨기려고도 하지 않고 금진우의 통방에게 주고 있던 피임약을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 육운이 이걸 어찌 참겠는가? 그녀는 금진우의 희첩을 없애버릴 계획을 세웠고, 금 부인은 그 일로 육운의 약점을 잡아 육운에게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효도와 법도에 대해 다시 배우라고 벌을 내렸다. 육운은 거의 1년 동안 갇혀 있다가 육건신이 금진우의 상사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부인이 돌아올 수 있게 중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한 이후에야 금진우의 부임지로 갈 수 있었다.
임옥진이 참지 못하고 눈물을 닦았다.
“그 마귀할멈은 대체 심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그리 악독하단 말이냐! 정말 후회가 되는구나. 처음부터 아운이를 그렇게 멀리로 시집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아이 혼자 먼 곳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겠니.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겨도 강과 산에 가로막혀 있어 여기서는 한참 후에나 알 수 있지 않느냐.”
어쩐지 임옥진이 계속 숨기더라니, 처음부터 육운을 좋아하지 않았던 임근용은 육운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임옥진을 보고 위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의 마음이 부인에게 향해 있기만 한다면 괜찮을 거예요.”
이 말을 듣고 임옥진은 더욱 슬퍼하며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을 쏟았다.
“육운이랑 사위의 사이가 너랑 둘째처럼만 좋다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니? 너도 알잖아, 아운이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어 했다는 거……. 그런데 또 그 사리 분별도 못하고 효자이기만 한 놈이……. 내 꽃처럼 귀한 딸을 그렇게까지 들볶는구나. 전에도 그렇게 들볶아댔는데, 이젠 네 시아버지마저 저 모양이 되었으니 더 무시하지 않겠니.”
그럼 정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육운이 먼저 금진우를 무시했는데 금진우라고 그녀를 감싸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아무리 대단한 친정을 두고 있어도 시집가고 나서는 알아서 잘 살아야지 누가 대신 살아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임근용이 손수건을 짜서 임옥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제 아이도 낳았으니, 아운 아가씨한테도 마음을 넓게 가지라고 말해 주세요. 다들 그러고 살잖아요. 다른 건 걱정하지 마세요. 시아버지가 아프시긴 하지만 민행도 있잖아요. 이쪽이 좀 안정되고 나면 민행한테 편지를 보내 한 번 물어보라 할게요.”
임옥진이 눈물을 훔치며 당부했다.
“이 얘긴 다른 사람한테는 하면 안 돼.”
임근용은 그녀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이때 갑자기 옆에 있는 육건신의 방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두 고부가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가보니 육건신이 분노에 찬 눈빛으로 씩씩거리고 있었고 옷자락과 이불에는 죽이 엎질러져 엉망진창이었다. 소성과 아유가 수건을 들고 황급히 여기저기 닦고 있었고, 하 이낭은 죽이 묻은 얼굴로 눈물을 참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임옥진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넌 가서 씻고 와. 여긴 아유하고 소성이한테 치우라고 하면 돼.”
하 이낭이 천천히 절을 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연꽃처럼 하늘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임옥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노야, 밥을 안 먹으면 어떻게 몸이 좋아지겠어요? 저 아이들이 시중을 제대로 못 들어서 마음에 안 드는 거면, 내가 당신 대신 저 아이들을 내보낼까요? 어쨌든 저 아이들도 아직 젊고…….”
문 앞까지 갔던 하 이낭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고, 소성과 아유도 손을 느리게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육건신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임옥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뒤 다시 임근용을 노려보았다. 임근용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왜 또 자신을 노려본단 말인가? 그러다 순간 육건신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눈치챘다. 이낭들을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는 육건신은 임근용이 임옥진을 부추겼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저 꼴이 되어서도 방법만 바꿔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다. 임근용은 그런 육건신의 각박하고 탐욕스럽고 지독한 모습을 바라보다가 더는 보고 싶지도 않아 담담하게 시선을 돌렸다.
육건신은 비록 몸은 이렇게 되었지만 정신은 아주 멀쩡했다. 그는 이내 임근용이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으르렁대며 임근용에게 와서 자기 시중을 들라고 눈짓했다. 임근용은 잠시 서 있다가 시중을 들기 위해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임근용은 전부터 육건신이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육건신이 얼마나 똑똑하게 어디까지 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막 걸음을 떼는데 임옥진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네 시아버지께서 얼른 가서 네 할 일을 하라고 하시는구나.”
육건신이 분노하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임근용이 의아해하며 임옥진을 바라보았지만 임옥진은 육건신이 화를 내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온 집안 식구들 식사를 챙기고, 의랑이도 돌봐야 하지 않느냐! 어서 가거라!”
임근용이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말했다.
“고모,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사람을 시켜 준비할게요.”
임옥진이 말했다.
“이 난리통에 어디 좋은 물건이 있겠니? 귀찮게 그럴 필요 없어.”
임근용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모께서 드시고 싶은 게 구할 수 있는 거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찾아볼게요.”
임옥진은 이 호의에 대한 보답을 아주 빨리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속내가 뻔히 들여다보이긴 했지만 오히려 임옥진의 마음은 더욱 편안해졌다. 친아들과 며느리도 때때로 믿을 수 없을 때가 있는데 입양한 아들과 그 며느리는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육건신은 이런 꼴이 되어서도 자기 성질대로 화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두 사람과 같이 살아가야 했고, 육운에게도 육함의 힘이 필요했다. 물론 두 사람 역시 평판 때문에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진심으로 대하는 것과 가식적으로 대하는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임 노태야가 전에도 여러 번 그녀에게 비슷한 말들을 했었지만,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임옥진도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사실, 요 며칠 숨 돌릴 새도 없이 뛰어다녔더니 입맛이 없어서 신선한 과일을 좀 먹고 싶더구나.”
임근용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게 뭐가 어렵겠어요. 제가 바로 가서 준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