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Blasted Reincarnated Life RAW novel - Chapter 624
〈 빌어먹을 환생 625화 〉 후일
“저희 제벨라 건설사에 시공을 맡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안전모를 쓰고서 정장을 입은 누아르의 뒤에 수십 명의 마족들이 도열해 있다.
족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모습은 아닌바, 그들의 모습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는데, 그중에는 누아르와 같은 서큐버스와 마족 중에서 가장 흔한 데몬, 덩치가 산만 한 거인족에 여러 개의 팔을 가진 마족도 있었다.
제벨라 건설의 간부들이다. 그들은 모두가 누아르처럼 작업모를 쓰고, 정장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제벨라 건설’. 안전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자아.”
간부들의 앞에 선 누아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준공식에 참가한 모두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지금 누아르와 간부들의 등 뒤에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누아르는 장막에 꽂히는 시선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방긋 웃었다.
“라이언하트의 새로운 저택을 공개합니다!”
촤라락! 장막이 걷히면서 사라지며 거대한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빰빠바밤, 빰빠바밤, 빰빰빰빰.
펑, 펑, 펑, 펑!
요란한 음악 속에서 폭죽이 하늘로 치솟았다. 푸르고 맑은 하늘에서 알록달록한 폭죽이 꽃을 피웠다. 유진을 비롯한 본가 사람들은 이미 몇 번이나 공사를 시찰하며 저택을 보았지만, 준공식에 참석한 모두가 저택을 미리 봤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름다우며 웅장한 저택의 위용에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 * *
기존 라이언하트 저택도 대륙 어느 귀족가의 저택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이 새로운 라이언하트의 저택은 단어 그대로 격이 달랐다. 몇 개나 되는 성을 거느린 키옐의 황제조차도 입을 벌릴 정도였다.
물론 저택은 황궁이나 성처럼 높고 커다랗지는 않다. 본가에서 지내는 가족이라고 해봐야 10명도 되지 않고, 집사나 시종 같은 사용인을 모두 포함해도 수십 명 안팎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완공된 저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저택에 장식된 조형물들은 모두가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예술품들이다.
“자아, 어디서부터 소개를 해드려야 할까요? 제 애장품들의 예술적 가치와 기원을 설명하자면 과장 섞지 않고 일주일은 걸릴 텐데. 아니면 실용적인 부분이 궁금하시나요?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라는 세르니아 섬의 바다를 그대로 재현한 야외 수영장이나, 루하르의 명소인 리바르 온천에서 영감을 얻은 노천탕, 그리고…….”
누아르의 길고 긴 설명이 시작되었다. 준공식에 초대된 수십 명의 귀빈은 누아르의 설명을 들으면서 저택 부지를 관찰했다.
이곳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택의 모습만이 아니다. 감각적으로 배치된 숲. 저택을 뒤에서부터 수호하듯 우뚝 선 세계수의 묘목들과, 똑같은 무게의 미스릴보다 몇 배나 되는 값을 가진 요정목들. 귀빈들은 저택과 숲이란 경관의 완벽한 조화를 느꼈다.
“제가 엄청 고생했어요.”
우두커니 선 베르무트의 곁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백색마탑주, 멜키스 엘하이어. 그녀가 다가온 순간에 베르무트는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몇 걸음 물러서서 멜키스와 거리를 두었다.
멜키스에 대한 ‘인상’은 처음부터 깊이 남아 있었다. 전장을 떠나던 때, 깍깍거리는 비명을 내지르며 쫓아오던 정령사. 세냐가 아무런 망설임과 손속의 자비 없이 마법을 펼쳐서 손수 추락시킨 장본인. 그 당시에는 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본가에서 돌아와 지내는 동안, 베르무트는 ‘멜키스 엘하이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카르멘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더욱 광기에 절어 있다.
“후우…….”
멜키스가 입술을 모았다. 달콤한 숨결은 베르무트에게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멀었지만, 그녀의 의지에 따라 나타난 바람의 정령이 숨결을 옮겨주었다.
후우우…… 한층 더 짙어진 숨결이 베르무트의 귓가를 핥았다. 4명의 정령왕과 계약하며 하위 정령들을 지배하는 멜키스에게 있어서 숨결과 속삭임을 전하는 것에 거리는 의미가 없었다.
“오빠.”
끈적거리는 목소리와 미소. 귓가를 핥는 숨결과 속삭임에 베르무트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포를 보는 것만 같은 눈으로 멜키스를 힐긋였다.
“저 많이 노력했어요. 오빠를 위해. 가족을 위해.”
가족? 어떤 가족? 베르무트는 저 단어의 앞에 명확한 주어가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오빠는 느낄 수 있죠? 오빠는 저 이전에 가장 위대한 정령사니까. 이 저택과 숲에는 어마어마한 정령술의 설계가 들어가 있어요.”
멜키스의 말은 사실이다. 저택과 숲, 아니, 도시가 성공적으로 준공할 수 있던 것에는 아롯 대마법사들의 다양한 협력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적색마탑과 백색마탑이 크게 활약했다. 로베리안을 필두로 한 적색마탑의 소환사들은 노동력을 제공했고, 백색마탑의 정령사들은 대지의 정령을 사용해 도로공사를 벌였다.
그리고 멜키스는 숲의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완벽하게 학습을 마친 대지의 정령들은 숲이 전소하지 않는 한 저 땅을 비옥하게 만들 것이고, 저 땅에서 새로이 자라나는 모든 것을 기존의 경관을 해치지 않게끔 배치할 것이다.
“그러니까, 오빠.”
멜키스의 목소리와 눈빛이 더욱 끈적해졌다. 그녀가 한걸음 다가왔고, 베르무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저를 칭찬해 주세요…….”
애절함까지 섞인 속삭임. 계속해서 귓가를 핥는 숨결. 현기증마저 느껴지는 아찔한 공포에서 베르무트를 구원한 것은, 단호하게 끼어든 카르멘이었다.
“아버지에게 다가오지 마라.”
카르멘은 혐오를 그득 담은 눈을 찡그리며 멜키스를 노려보았다.
“왜 오빠가 당신의 아버지라는 거야?”
“그러는 당신은 왜 아버지를 오빠라 부르는가?”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가는 대화에 베르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르멘과 멜키스는 사나운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왜 카르멘 라이언하트가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르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그리고 왜 멜키스 엘하이어는 위대한 베르무트를 ‘오빠’라고 부르는가?
준공식의 귀빈들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였지만, 그 누구도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묻기에는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하였고, 위대한 베르무트의 모습은 너무나도 우울했기 때문이다.
“외관만큼이나 예술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저택의 내부도 순회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저곳은 본가의 생활공간이라서요. 프라이버시의 문제도 있으니, 저택의 관람은 라이언하트 본가에 따로 문의해 주세요.”
길고 긴 설명의 끝에서 누아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저택을 중심으로 하여 건설한 라이언하트 신도시를 순회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존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저택 부지에도 워프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걸어서 밖으로 나가기에는 저택부지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유진은 안전모를 쓰고서 앞장선 누아르의 뒤를 따라가며 입을 열었다.
“준비는?”
“완벽하지.”
곁에 찰싹 붙어서 걷던 세냐가 대답했다. 이른 아침부터 숲을 통째로 이동시키느라 철야를 했지만, 세냐의 얼굴에는 조금의 피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 세냐 님을 뭐로 보는 거야?”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걱정하지 마. ‘그걸’ 기대하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니까.”
세냐는 그렇게 대답하고서 모론과 아니스에게도 눈길을 주었다. 아니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론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표정은 감추었지만, 그의 두 주먹은 흥분과 기대로 불끈 쥐어져 있었다.
“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크리스티나가 대답했다.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고, 유진도 강요는 하지 않았다.
“하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보다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껴도 돼.”
유진은 활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도 베르무트는 카르멘과 멜키스의 사이에서 광기의 고문을 받고 있었다.
저택의 워프게이트를 통해 도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로 이동했다. 오오오. 도착한 장소에서 귀빈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곳은!”
저택과 달리 이곳은 장막은 있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도 누아르는 입구에서부터 양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상징! 대륙 역사에 유일한! 미래로 이어지는 배움의 장!”
신도시에서 라이언하트 본가만큼이나 넓은 부지를 사용하는 곳. 왕궁처럼 웅장한 건물들이 세워진 곳.
누아르는 유진에게 열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귀빈들도 유진이 나서는 것을 기대했다. 그렇게 조성된 분위기에서 유진이 머뭇거리자, 세냐가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등을 떠밀었다.
“뭐 해? 나가서 설명해야지.”
떠밀려서 몇 걸음 앞으로 나와버린 유진은 세냐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냈지만, 기대에 부푼 많은 시선에 치미는 욕설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유진은 헛기침을 하면서 뒤를 힐긋 보았다. 연결된 건물들로 통하는 이 교정에는 여섯 개의 조각상이 있다.
유진과, 세냐와, 모론과, 아니스와, 크리스티나와, 베르무트의 조각상. 본가에 머무르던 드워프 장인들이 오늘을 위해 직접 만든 조각상들이다.
“……다이너스 아카데미입니다.”
아카데미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생각 없이 ‘라이언하트 아카데미’로 하려고 했는데, 그 의견에는 길레이드가 반대했다. 라이언하트는 아카데미를 소유할 생각이 없고, 그 이름 자체가 아카데미의 취지와 상징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이다.
라이언하트 아카데미가 기각되었으니, 기왕 다른 이름을 붙인다면 뭔가 그럴싸하고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유진이 말한 이름들은 여러 사람들을 거치며 모두 기각되었다.
그 뒤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다이너스 아카데미’다. 하멜의 성을 따온 이름. 별생각 없이 말한 것이지만, 의외로 다들 좋다고 받아들였다.
베르무트는 라이언하트 가문을 남겼다. 모론은 루하르 왕국을 세웠다. 세냐는 서클마법식을 창안하며 모든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아니스는 성인으로서 유라스의 교전에 남아 있다. 유라스의 모든 신관은 교전으로 전해지는 아니스의 삶과 글귀로 신앙을 가꾼다.
하지만 하멜은 후대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제노스의 가문에 이어진 ‘하멜식’이 있겠지만, 그것은 하멜 본인이 아닌 베르무트가 남긴 것이다.
그렇게 이곳의 이름은 ‘다이너스 아카데미’로 결정되었다.
“이곳에서는…… 어…….”
미리 준비해 둔 말은 여럿 있었지만, 막상 말하려니 낯이 간지러웠다. 결국 이번에도 유진은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말을 이어갔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검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무기들…… 다양한 종류의 마법과 정령술. 그리고 신학…… 아, 신학의 경우에는 꼭 ‘빛’의 교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한다면, 예, 전쟁이나 승리의 신학에 입문해서…… 신관이나 성기사로…… 전직? 취업? 예, 그럴 수 있게 할 생각이고요…… 기사가 되고 싶다면 바라는 무기의 과목과 기사도 과목을 선택하면 되는 거고요.”
즉석에서 이어가는 말이지만 모두가 유진의 말을 경청했다. 유진은 그 진지한 침묵이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아롯의 마탑 등과도 결연하여 유학을 가거나, 각 과목의 전문가들을 적극적으로 초빙하여 심화적인 배움을 실현할 생각입니다…… 일단…… 제가 목표로 하는 다이너스 아카데미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게끔 나아가게 해주는 곳입니다. 물론 그건 학생이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지만, 저는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학장으로서 학생들이 귀중한 젊음을 낭비하지 않게끔, 바라는 미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줄 것입니다.”
“박수!”
유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아르가 외쳤다.
빰빠바밤, 펑, 펑, 펑! 아까도 들었던 음악이 흐르고 하늘에서 폭죽이 수를 놓았다. 짝짝짝…… 귀빈들의 박수에 유진은 민망함을 느끼며 냉큼 동료들 곁으로 돌아왔다.
“왜 또 우시는 겁니까?”
유진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는 제하드에게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제하드는 눈물을 멈추지 않고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 이런 큰 뜻을 가졌을 줄이야.”
“큰 뜻은 무슨…….”
“세상을 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잖느냐.”
“그런 말은 안 했는데…….”
“뛰어난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좋아지는 법이다.”
주변을 보니 제하드의 반응이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길레이드도 크게 감동했다는 듯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기사도 과목을 정식으로 개설하신다면, 제가 특별교수로 강의를 나가도 되는 겁니까?”
“백룡 기사단에서 연수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신다면요.”
“하하, 사상이 온전하고 실력이 확실하다면, 연수에 그치지 않고 정식 단원으로 등용할 용의도 있습니다.”
알체스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리우가 입학한다고 해서 편의는 봐주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제 아들이라고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리우가 드라고닉 가문의 후광을 이용하려고 든다면, 즉시 퇴학시켜주십시오.”
그런 대화를 나누며 귀빈들과 함께 교정을 지나 본관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의 건물이 워낙 크고 넓은지라 모든 곳을 둘러보고 설명하는 시간상 불가능했기에, 본관에 들어오고서부터는 각자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어디서 할래?”
“아까 지났던 교정이면 되겠죠.”
“교실 안에서도 괜찮을 것 같은데.”
“개방감이 없잖아, 개방감이.”
세냐의 대답에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개방감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결국에는 아니스의 의견대로 장소는 교정으로 확정됐다.
“그럼 다음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30분 동안 아카데미를 둘러본 뒤에 다시 이동했다. 누아르는 능숙한 가이드처럼 행동하며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지금 향하는 곳은 드워프 공업지대입니다. 이곳은 본래 라이언하트 본가에서 지내던 드워프 장인들과 남쪽 섬에서 살던 드워프들이 독립한 곳이죠. 그곳에서 드워프들은 이전과 달리 자유로운 창작과 의뢰를 받으며 신도시의 경제에 힘을 보태줄 겁니다.”
드워프에 관한 이야기에 시무인 국왕의 얼굴이 구겨졌다.
본래 드워프들은 사실상 시무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시무인의 섬에서 살던 모든 드워프들이 내륙으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시무인의 국왕은 이 건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말할 수가 없었다…….
공업지대부터 본격적인 순회가 시작되었다.
도시민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시청과 길드 단지, 도서관, 공원, 번화가 등. 신도시는 대륙 모든 도시 중에서 가장 많은 워프게이트가 존재하고, 하늘에는 기상을 통제하며 경관을 즐기는 부유역과 공중마차, 지하에는 제벨라 시티와 마찬가지로 지하철까지 있다. 덕분에 많은 랜드마크를 돌아보았는데도 아직 밤이 되지 않았다.
“신도시는 밤이 더욱 아름답죠.”
누아르는 슬슬 해가 저물 것 같은 하늘을 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야경은 화려한 축제로 완성되는 법. 자아, 이제…… 성문으로 가볼까요?”
현재 성문에는 신도시를 구경하고자 찾아온 수십만 군중이 모여 있다. 성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도시의 모든 조명이 켜지고 축제가 시작될 것이다.
아직 입주한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문제는 없었다. 제벨라 시티의 붕괴와 함께 직장을 잃은 누아르의 권속들이 오늘만 한하여 도시에 들어와 있다.
“이상한 짓 하면 죽는다.”
“전 이미 죽었어요.”
“한 번 더 죽을 줄 알아.”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더 구미가 당기는데?”
유진은 샐쭉 웃는 누아르를 쏘아보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환상도 꿈도 보여주지 않는다니까요? 정기도 안 뺏을게요. 애초에 난 이제 정기를 받아봤자 쓸모가 없는걸.”
누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성벽을 가리켰다.
“그럼, 가볼까요?”
아직 준공식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ㅡ와아아아…….
굳게 닫힌 성문 앞.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성문 위에 나타난 사람들을 보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거 꼭 해야 되냐?”
유진은 표정을 잔뜩 구기고서 누아르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해야죠! 준공식은 사실 이걸 위해서 하는 거라고요.”
여전히 안전모를 벗지 않은 누아르는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자, 빨리 일렬로 서세요.”
“나는 하기 싫은데…….”
“새로운 영지의 개장을 의미하는 일이다.”
유진의 중얼거림과는 달리 길레이드는 굉장한 의욕을 보였다. 그는 떨떠름한 얼굴의 애니실라와 함께 앞으로 나왔다.
가주가 앞장서 버리니 어쩔 수 없었다. 기온이 길레이드의 옆에 서서 눈길을 주자, 시안은 아일라의 손을 이끌며 옆에 섰고, 시엘도 애니실라의 곁에 섰다.
“아버지.”
“…….”
베르무트도 카르멘에게 끌려 나왔다. 다음은 제하드였다. 그는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품에 넣고서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나가버리니 유진도 한숨을 푹 내쉬며 제하드의 옆에 섰다.
“세냐 메르데인.”
“나, 나는 왜?”
“라이언하트의 일원이 안 될 건가 보죠? 그런 것이라면 나올 필요가 없어요.”
누아르가 이죽댔다. 은근슬쩍 뒤로 빠져 있으려던 세냐는 저 이죽거림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냐는 냉큼 유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시스터.”
크리스티나도 아니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인형의 몸에 들어오고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크리스티나. 일단 당신의 몸으로 들어가서…… 아니, 아니지, 그냥 당신 혼자 서 있으면 제가 함께 있는 줄 알 겁…….”
“안 됩니다.”
크리스티나는 아니스가 도망치거나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아니스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군중들이 자신을 비웃지 않을까 내심 염려했으나, 이미 흥분한 군중들은 죽어서 천사가 된 아니스가 왜 멀쩡히 살아서 크리스티나와 함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너희도 서야지, 뭐 해?”
“유진 님이 불러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에요.”
“은자여, 본녀를 부른다는 것은, 앞으로도 본녀는 은자와 살 수 있는 것인가?”
“그럼 나가서 살래? 빨리 끝내게 얼른 와.”
메르와 라이미르아는 후다닥 다가와 유진의 앞에 섰다. 다른 사람들처럼 옆에 서기에는 둘의 키가 너무 작았다.
“자, 그럼…….”
일렬로 선 본가 사람들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보던 누아르가 짝 박수를 쳤다. 그러자 본가 사람들 앞에 알록달록한 리본이 나타났다. 누아르는 모두에게 백금색의 가위를 나눠주고서 활짝 웃었다.
“제 신호에 맞춰서 리본을 잘라주세요.”
가위를 전달한 뒤에 누아르는 냉큼 뒤편으로 이동했다.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올려다보는 수십만 앞에서, 중앙에 선 유진은 꿀꺽 침을 삼켰다.
“웃으세요.”
뒤에서 들리는 속삭임에 모두가 각가의 웃음을 띄웠다.
“지금부터, 라이언하트 신도시의 개장을 알리는 테이프를 커팅하겠습니다! 자, 하나, 둘, 셋!”
유진은 억지로 쥐어짠 미소를 지으며 테이프를 가위로 잘랐다.
ㅡ와아아아아아!
최고점에 달한 흥분, 커다란 함성, 하늘을 수놓는 불꽃! 수십 조각으로 잘린 테이프가 꽃잎이 되어 아름답게 휘날렸다.
ㅡ쿠구구궁!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누아르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앞 사람이나 옆 사람을 밀치지 말고! 천천히 입장해 주세요! 도시에서 날뛰지 마세요! 질서를 지키면서 신도시를 관광하고 축제를 즐겨주세요!”
환상의 마안이 발동되었다.
누아르가 살아온 기나긴 시간에서 지금만큼 인도적으로 환상의 마안이 사용된 적은 없었다. 수십만의 정신에 작용한 강력한 최면은, 방금까지의 흥분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군중을 질서정연하게 도시의 안으로 인도했다.
“우리도 가자.”
유진은 몸에 붙은 꽃잎을 털어대며 말했다.
“베르무트 님.”
아니스가 다가오자 베르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어느새 카르멘과 멜키스에게 붙들려 있던 팔을 빼내며 급히 대답했다.
“아니스.”
“저희는 따로 축제를 즐기도록 하죠.”
“아아……! 그, 그래야지. 카르멘 님, 멜키스 님. 저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르무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따로? 설마 도망치는 것은 아니지?”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기에, 시엘은 눈을 흘기며 물어보았다.
“아냐.”
유진은 옆에 온 베르무트의 어깨에 팔을 얹으며 웃었다.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교정.
“왜 이곳에 온 거지?”
“다른 곳은 사람들이 많아질 거잖냐. 하지만 여기는 닫혀 있으니 못 들어와.”
신도시는 개장했지만 아카데미의 교문은 닫혀 있다. 베르무트는 유진의 대답에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
여섯 개의 조각상 앞. 베르무트는 자신의 조각상을 올려다보았다. 실력 좋은 드워프 장인이 만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정교한 조각상. 베르무트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의 조각상에 잠시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각상, 초상화. 그런 것들은 300년 전에 많이 보았지. 대부분이 진짜 나를 세워놓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드워프 장인의 요구대로, 베르무트는 직접 그의 앞에 서서 모델을 해주었다. 300년 전과는 달리 거절할 이유도, 그런 기분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조각상이나 그림을 좋아했던 적이 없다. 깊게 바라본 적도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후후, 신기한 기분이군.”
베르무트는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은 기분이 아니야. 가슴이…… 따뜻해지는구나.”
“그러냐.”
유진과 동료들을 베르무트의 뒤에 섰다.
“설마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런…… 날이 오게 될 줄도 몰랐었으니 당연한 일인가.”
베르무트는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신도시의 입주가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아카데미의 학생과 교수진을 모집받을 것이고, 내년부터 입학이 시작될 것이다. 베르무트는 이곳에서 무언가를 배울 많은 학생들을 떠올리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다이너스 아카데미. 이곳을 상징하는 데에 그 이상의 이름은 없을 거다.”
“왜?”
“그야 하멜, 너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할 수 없던 것들을, 너는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네가 하멜로 살았던 삶이 있었기 때문이지.”
세냐도, 모론도, 아니스도, 아가로트의 동료는 아니다. 그들은 하멜의 동료다. 베르무트도 그렇다. 그는 아가로트를 모른다. 베르무트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바로 하멜 다이너스다.
“네가 구한 세상이 미래로 이어지고, 그 미래를 가꾸는 것은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되겠지. 후후…… 네 이름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불멸성을 얻었구나.”
베르무트는 큭큭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유진과 세냐, 모론, 아니스가 일렬로 서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리스티나는 조금 떨어져 있었다. 베르무트는 동료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고 서 있나?”
“베르무트.”
유진이 방긋 웃었다. 모론과 세냐, 아니스도 똑같이 웃었다.
동료들의 웃음에 베르무트도 함께 웃었다.
그 미소를 보며 유진은 망토를 들췄다. 펄럭! 망토에서 나온 것은 짚을 꼬아 만든 깔개였다. 베르무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뭐지? 돗자리인가?”
“비슷해.”
유진은 둘둘 말린 깔개를 바닥에 활짝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이건 내 고향 튜라스에서 쓰던 것인데, 이름은 ‘멍석’이라고 한다.”
“그렇군.”
“내 고향은 튜라스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이라서 말이야. 도시 사람들은 모르는 관습이 있었지.”
“관습?”
베르무트는 하멜이 왜 갑자기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고향의 관습이라고 하니 순수한 호기심이 들어 되물었다.
“어떤 관습이었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빠른 것이 있지.”
멍석을 평평히 펼친 뒤에, 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누워봐.”
“?”
“누워봐 빨리.”
여전히 베르무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동료들 모두가 웃고 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멍석의 위로 올라갔다.
“누우라고……?”
올라가 본 멍석은 꽤 거칠었다. 돗자리처럼 앉아서 술이나 마시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누우라니?
베르무트는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멍석에 누워보았다.
“침상으로 쓸 만한 것은 아닌…….”
촤라락! 베르무트가 누운 순간에 세냐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일어난 멍석의 끝이 베르무트를 덮고서 둘둘 말렸다.
“무, 무슨?!”
베르무트는 기겁하며 멍석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300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베르무트가 세냐의 마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멍석에 말린 베르무트가 할 수 있는 것은 굼벵이처럼 멍석과 함께 몸을 꿈틀거리는 것뿐이었다.
유진은 즉시 망토에서 거무튀튀한 몽둥이들을 꺼내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줘패!”
“아아아아아!”
모론이 고함을 지르며 몽둥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죽여!”
세냐도 양손으로 몽둥이를 단단히 쥐고서 베르무트에게 달려들었다.
“재는 재로!”
아니스도 추모의 기도와 함께 몽둥이를 내리쳤다.
“신이시여……!”
몽둥이를 잡지 않은 크리스티나는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뻐억!
퍽!
빠각!
[이 개새끼!] [아악!] [오오오!] [크윽……!] [가슴!] [크아악!] [뒈지십시오!] [커헉…….]즐거운 기분으로 와인을 마시던 길레이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모두가 볼 수 있는 하늘에서, 라이언하트 가문의 시조인 위대한 베르무트가 멍석에 말려서 동료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길레이드의 입에서 와인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저게 무슨…….”
모두가 똑같은 경악을 느끼며 하늘의 영상을 보았다.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교정, 여섯 영웅의 조각상 앞에서 벌어지는 구타. 위대한 베르무트는 내리꽂히는 몽둥이들에 저항하지 못하고 신음과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 영상은 라이언하트 신도시에서만 중계되는 것이 아니다. 세냐의 마법에는 한 치의 실수도 없었다. 과거 유진의 결투가 중계되었듯, 베르무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세례는 대륙 전역에 중계되고 있다.
[그만…… 그만……!] [뭘 그만이야, 새끼야!] [아직 멀었다!]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걱정 마.] [저런, 뼈가 많이 부러지셨군요.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뼈가 으스러져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빛에 뒤덮인 베르무트의 몸은 바로 치료가 되었고, 다시 몽둥이질이 시작됐다.
“끄아악…….”
아프다!
정신적인 고통은 익숙하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도 익숙하다. 어지간한 고통에서 베르무트는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고통은 참을 수가 없었다. 방어도 할 수가 없다. 양팔이 멍석말이에 단단히 고정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몽둥이질이라면 베르무트의 뼈는커녕 피부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겠지만, 지금 베르무트를 두들기는 4명의 힘은 모두가 베르무트의 뼈 정도는 우습게 부술 만큼 강했으며, 둘둘 말린 멍석을 거쳐서 전해지는 묵직한 통증은 뼛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대체 어떻게 만든 것인지 몽둥이는 저만한 힘이 실리는데도 부러지지 않았고, 멍석도 찢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폭력은 기절하는 것으로 도망칠 수가 없다. 기절할 것 같으면 즉시 아니스의 기적이 정신을 깨웠고, 뼈가 부러져도 즉시 치료가 되었다.
“그만, 제발 그만……! 내가 잘못했다, 내가, 전부…….”
“누가 너 잘못한 거 몰라?”
“사과하지 마라!”
“그래, 그냥 처맞기나 해!”
“베르무트 님, 당신의 죄는 이미 사해졌습니다.”
퍼억, 퍽! 빠각! 콰직! 베르무트의 애걸에도 몽둥이질은 계속됐다. 자비롭게도 몽둥이질은 오직 멍석에 말린 몸뚱이에만 선사될 뿐, 머리는 누구도 노리지 않았다.
“크아아악…….”
결국 베르무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몽둥이질에 맞춰 신음과 비명만을 지르며, 이 끔찍한 시간이 어서 끝나도록 마음속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퍽, 퍽, 퍼억…… 크리스티나는 두 눈을 감고 몽둥이 꽂히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계속했다. 그녀는 차마 저 위대한 영웅을 멍석말이하는 것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폭력을 중재하려 들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가 생각하기에도 베르무트는 맞을 만했다.
“허억…… 헉…… 허억…….”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하늘에 붉은 노을이 졌다. 유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이만큼 지칠 정도로 몽둥이질을 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그니션을 발동하고서 패버리고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진짜로 베르무트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크륵…… 크르륵…….”
멍석에 말린 베르무트는 반송장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말끔하던 머리카락은 난발이 되었고, 하얀 피부는 흙투성이에 입에는 피거품이 끓는다. 반쯤 뒤집힌 눈은 마치 멸망의 마왕을 봉인하고 있을 적처럼 금빛이 탁하다.
“아하…… 아하하…….”
그 모습에 세냐는 오래전에 베르무트에게 정말로 가슴이 뚫렸을 때와는 다른, 속이 뻥 뚫리는 상쾌함을 느꼈다.
“하하하!”
모론도 몽둥이를 내려놓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100년이 넘도록 누르를 처죽이면서 한 번도 웃었던 적이 없다. 모론은 자신에게 기약 없는 삶을 살게 한 베르무트를 원망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원망과는 별개로 베르무트를 두들겨 패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기에, 지금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아하하핫!”
아니스는 품에서 꺼낸 술병을 흔들며 웃었다.
사실 그녀는 베르무트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당한 적은 없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베르무트가 죽음을 위장했을 때, 장례를 주관한 것뿐이다. 하지만 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해서 베르무트를 패고 싶었던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없이 모든 것을 진행했던 베르무트 덕분에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이것으로 우리는 아무 감정 없는 거다.”
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는 베르무트를 향해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베르무트는 말을 뱉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니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베르무트를 치료해 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손수건을 들고서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땀에 흠뻑 절은 유진의 얼굴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군요.”
“끝…….”
유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끝.
크리스티나의 말대로다.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
유폐의 마왕은 죽었다.
멸망의 마왕도 죽었다.
마족은 남아 있지만, 그들은 옛날처럼 포악하게 날뛸 수 없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마족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과 마찬가지로 살게 될 것이다. 아직 헬무드에서는 선거가 끝나지 않았지만, 누군지 확정되지 않은 당선인은 다른 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낼 수밖에 없으리라.
다이너스 아카데미를 완성했다. 유진은, 하멜일 적에 가졌던 꿈을 이루었다.
모론은 이미 나라를 세웠다. 그는 이미 후손들이 다스리는 루하르의 왕실에 돌아가는 대신, 라이언하트 대저택의 숲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세냐는 아직 호숫가의 저택을 짓지 못했지만- 호수는 없어도 숲과 저택은 생겼다. 그녀는 유진과 함께 저택에서 살면서, 아카데미와 아롯의 교단을 오가며 젊은 마법사들을 교육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새로운 마법의 개발과 마도서를 집필하기로 했다. 물론, 그녀가 가장 먼저 집필하는 것은 마도서가 아닌 ‘전설의 발자크’라는 이름의 동화책일 것이다.
아니스는 유라스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가졌던 꿈. 여관을 겸한 술집. 건물은 세웠지만, 아직 내부는 꾸미지 못했다. 아니스는 한때의 꿈일 뿐이라며, 정말로 가게를 열 생각은 없다고 했지만…… 애니실라를 통해 여러 상인들을 만나보는 것을 보면 아주 생각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스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티나도 유라스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 또한 라이언하트에 남는다. 아카데미의 교단에 서는 것에는 조금 주저하는 듯했지만, 아니스를 은근히 부추기던 것을 보면 ‘함께’라는 조건이면 교단에 설 생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이뤄간다. 미래로 이어지는, 끝이라고 할 수는 없는 끝에 도착했다. 300년 전에 바랐던 대로 행복해졌다.
정말 그런가?
이렇게 정말 끝인가?
행복해졌나?
“…….”
유진은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뺨을 닦아주는 손수건, 그를 거쳐 전해지는 손의 온기. 빤히 보는 시선에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유진 님? 무슨 일이십니까?”
“…….”
이 정도였나? 가까운 곳에서 미소 짓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참 예쁘다고 생각됐다.
유진은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술을 마시는 아니스가 보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술병을 입술에서 뗀 아니스가 미소 지었다. 방금 흘린 땀으로 흐트러진 모습.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땀. 짙은 눈웃음.
이 정도였나? 아니스가 저렇게 예뻤던가? 크리스티나와 비슷한데 크리스티나와는 다르다.
유진은 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세냐가 모자를 벗고 있었다.
“뭘 봐?”
세냐의 뺨은 흥분으로 인해서인지 조금 붉었다. 아니, 어쩌면 노을에 물든 것일지도 모른다. 시원스러운 미소가 유진의 가슴을 흔들었다. 유진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여섯 개의 조각상과, 다이너스 아카데미의 건물과, 그 뒤에 펼쳐진 붉은 노을이 보였다.
유진은 자신의 조각상을 보았다. 유진 라이언하트의 조각상.
아가로트의 바람은 모든 마왕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멜의 바람은 마왕을 죽이고 돌아가서 아카데미를 세우는 것이었다.
유진은 이루지 못한 과거의 미련을 바람으로 삼았다. 마왕을 죽이는 것은 이뤘다. 아카데미도 세웠다.
아카로트도, 하멜의 것도 아닌.
모든 것을 이루고 지금에 도달한 유진의 바람은.
“결혼하자.”
베르무트를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준공된 아카데미가 꽤 멋있었다.
노을이 아름다웠다.
두 번의 삶을 거쳐 도달한 현재.
유진은 커다란 만족감에서 이 이상 없을 평온함을 느꼈다.
세냐가, 아니스가, 크리스티나가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유진은 홀린 듯이 말해버렸다. 결혼하자. 넉넉히 1년을 잡고서 전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유진이 처한 모든 상황과 그로 인한 감정이 본심을 말하게 만들었다.
“…….”
갑작스러운 프러포즈. 세냐는 아니스를 쳐다보았다. 아니스는 크리스티나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티나는 세냐를 쳐다보았다. 지금 셋이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건가?”
모론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모론은 지금 유진을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고민했지만, 모론이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유진이 먼저 대답해 버렸다.
“세냐, 아니스, 크리스티나.”
“…….”
“나와 결혼해 줘.”
모론은 두 눈을 감았다.
아아……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는 여전히 도시와 대륙에 중계되고 있다. 수많은 탄식과 수많은 탄성을 공존했다.
“…….”
세냐는 어깨를 바르르 떨며 유진을 보았다. 지금 그녀의 얼굴은 빨갰다. 노을 때문도, 부끄러움 때문도, 기쁨 때문도 아니었다.
“그걸 왜 지금 말하는 거야?”
세냐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하멜, 미쳤습니까?”
휘어진 눈웃음 사이에서 아니스의 눈동자가 뱀처럼 번득였다.
“유진 님의…… 방금 그 말은, 굉장히 기쁩니다만…….”
크리스티나는 비틀비틀 물러서며 탄식했다.
“이런 자리에서 듣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거야!”
“동의합니다.”
세냐가 꽥 외쳤고, 아니스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전히 상황과 감정에 취해있던 유진은 셋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왜냐니! 몰라서 물어?!”
“결혼이란 중대사를 누가 이딴 자리에서, 몽둥이를 들고 말하는 겁니까?”
“반지는 없습니까?”
크리스티나는 참을성을 유지하며 물었지만 유진은 망토를 뒤지기 시작하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하멜.”
스르륵…… 멍석이 풀리고서 베르무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피범벅의 입술을 문질러 닦지도 않고, 충혈된 눈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누워라.”
“……왜?”
“다들 네가 눕기를 바랄 거다.”
유진은 세냐와 아니스, 크리스티나를 보았다.
이미 몽둥이를 들고 있던 세냐와 아니스는 양손으로 몽둥이를 쥐었다. 몇 걸음 물러섰던 크리스티나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유진이 들고 있던 몽둥이를 뺏었다.
“나는 모른다.”
모론은 들고 있던 몽둥이를 베르무트에게 건네주었다.
“…….”
유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서 모두와 멍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 해?”
세냐가 말했다.
“누우십시오.”
아니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진 님.”
크리스티나가 말했다.
“누워라.”
베르무트가 말했다.
“음.”
도망칠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도망치면 앞으로 이곳에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진을 취하게 했던 기분은 이미 차갑게 식었기에, 그는 냉정하게 자신의 과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살살하자.”
유진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며 멍석의 끝에 누웠다. 그러고는 직접 몸을 움직여 멍석을 말았다.
“죽어!”
꽥 내지르는 세냐의 외침과 함께 몽둥이들이 떨어졌다.
完
작가 후기
※후기에 작중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목마입니다.
2020년 8월 17일에 연재를 시작한 ‘빌어먹을 환생’이 드디어 완결이 났습니다. 햇수는 3년에 625편 완결. 제가 연재한 소설 중에서는 디자이어 다음의 분량이네요…
쓰면서 저 자신에게 아쉬운 점도 많았고 후회할 점도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하고 싶은 건’ 다했다, 라고 만족합니다. 물론 많은 독자님들은 하고 싶은 것 좀 덜하지 그랬냐, 고 생각하실 분도 많겠지만요.
아무튼, 625편의 긴 여정을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벌써 8번째 완결인데 이것 참, 완결 후기를 쓸 때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고민되네요.
그냥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소설에서 적지 않은 것들을 몇 가지 얘기해 볼게요.
빌환을 쓰면서 느낀 것은, ‘해피엔딩’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우리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라는 것을 제가 이뤄주고 싶었습니다. 세상 구하겠다고 고생 많이 했으면 당연히 행복해져야죠.
해피엔딩으로 가자, 고 결정하고서. 기존에 구상하던 비극 노선들은 대거 폐기했습니다. 본래는 크리스티나와 아니스 관련해서 조금 더 비극적이고 처참한 장면들을 구상했었는데, 죄다 날렸습니다. 성불시킬 생각이었던 아니스도 세상에 남겼습니다. 그리고 누아르도 남겼죠. 죽이는 편이 그림이 이쁘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그에 관한 결정은 세냐의 의견으로 기울어버렸어요.
그리고 주인공 주변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죠. 이만큼 길게 썼으면 주조연 중에서 누구 몇 명은 죽이는 게 제 취향이긴 한데, 이번에는 진짜 아무도 안 죽은 수준이네요.
시엘에 관해서는… 크흠, 제 설계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엘은 갓 성인이 된, 모두에게 사랑만 받던 철부지 아가씨였습니다. 그런 아가씨가 첫사랑에서 실연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조금 더 잘 살릴 수 있었나?? 제 능력 부족이겠죠. 아마 다시 돌아가서 그 장면을 쓴다면, 조금 더 잘 울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인공인 하멜과 유진을 쓸 때는, 어쩔 수 없는 과거의 망령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현재나 미래를 말하지만 그 모든 것이 과거의 실패, 미련에 의한… 그렇게 캐릭터를 잡다 보니 전생의 전생까지 나왔네요. 625편 동안 유진을 통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나 장면은 다 한 것 같아서 후련하면서도 아쉽네요. 더 하고 싶은 건 없는데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아서요.
저는 완벽에 가까운 작가가 아닌지라, 소설 하나를 완결 낼 때마다 항상 저 자신에게 아쉬운 것들이 많이 남습니다. 그래도 뭐, 처음 완결을 냈을 때보다는 아쉬운 것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대로 쭉 완결을 내다보면, 언젠가는 아쉬운 것이 하나도 안 남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까지 연재를 한 저 자신에 대한 수고는 저 혼자 술 마실 때 할게요.
함께 따라와 주신 독자님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삽화로 글 대신 캐리를 해준 개그림.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매일 커뮤니티에 빌환 좋았다며 후기를 써준 독자님들, 매일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팬아트를 그려주신 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차기작은 빙의물을 쓸 생각입니다. 회귀도 써봤고, 환생도 써봤는데, 빙의는 안 써봤으니까요. 아마 게임 빙의가 될 것 같고… 가능하다면 무공도 좀 넣고 싶네요. 겸사겸사 천마도 넣고요.
차기작을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성격상 오래 쉴 수가 없어서… 아무리 늦어도 2월이 가기 전에는 시작할 것 같습니다.
마침 오늘이 설날이네요.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도 새해 복 많이 받겠습니다.
그리고 차기작도 꼭 봐주세요. 이번엔 더 잘할게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