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jong - Chapter 20
20권
* 고부리성 함락
자정을 훌쩍 넘긴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전선 사령부 한쪽에 마련된 회의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연락을 받고 급히 모여든 장수들은 다시 한 번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듣고는 다들 하나같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별동대 병력이 얼마나 남은 건가?”
남두병 사령관의 물음에 소식을 전하러 왔던 군관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필사적으로 혈로를 뚫었습니다만 탈출에 성공한 병력은 채 삼천이 되지 않습니다.”
순간 넓은 회의실 안은 깊은 탄식과 당혹스러움으로 가득 찼다.
“허어.”
“이럴 수가.”
“정예 기병 삼만이 나가 일 할밖에 남지 않다니.”
전선 사령관인 남두병 장군이 곤혹스러운 속내를 드러낼 만큼 별동대의 패배는 조선군에 큰 충격이었다.
강한 돌파력과 기동력을 지낸 기병을 삼만이나 잃은 것도 뼈아픈 일이었지만, 조선군 지휘부를 힘들게 만드는 건 고립된 고부리성을 측면 지원하고 청군을 괴롭힐 중요한 패가 너무나도 빨리 없어졌다는 점이었다.
거기다가 조선군 제일의 맹장인 흑치영이 적에게 패했다는 것만으로도 아군의 사기를 크게 꺾어 놓는 일이었다.
회의실이 어수선한 가운데 홀로 평정심을 유지하던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탕.
“이미 일이 벌어졌으니 지금부터 대책을 세우는 데 집중해야 될 것이오, 전선 사령관?”
“예.”
지목을 받은 남두병 사령관은 상체를 살짝 숙이면서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군이 이제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잠시 고심을 한 남두병 사령관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후방을 괴롭히고 수시로 야습까지 가해 공성전을 방해하던 별동대가 사라졌으니 더욱 공세를 강화할 것이옵니다.”
별동대가 괴멸된 시점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에 다들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청 황제가 직접 나선 데다 이번에 홍이포를 다수 보충했다고 하니 이미 외성 벽이 무너진 고부리성으로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이옵니다.”
고부리성 함락을 거론하자 도현의 눈썹이 찡그러졌다.
“새로 별동대를 구성하는 건 어떤가?”
“애초에 여유 전력을 다 빼내 병력을 편성한 거라 남아 있는 기병이 거의 없는데다가 이번처럼 청군이 함정을 파고 아군을 사냥한다면 오히려 각개격파를 당하는 꼴이 될 것이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대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귀중한 기병 전력을 적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주는 꼴밖에 안 된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고부리성이 함락되는 걸 지켜보기만 하자는 건가!”
짜증이 난 도현의 호통에 남두병 사령관은 머리를 숙이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관 장군과 병사들이 최대한 버텨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사옵니다.”
“젠장!”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도현이 황제로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으나 상황이 이런 만큼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회의실에 모여 있는 장수들도 차마 겉으로 내놓지는 못해도 참담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부들부들 떨던 도현은 이내 침중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입을 뗐다.
“총참모부에 준비하고 있는 계획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지으라 이르라. 때가 되면 청군에 맞서 싸우며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병사들의 복수를 짐이 직접 해 줄 것이다. 모두 알겠는가!”
“충!”
결연한 얼굴을 한 장수들은 군례를 취하면서 크게 외쳤다.
그걸 보며 황좌에 앉은 도현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힐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오늘 일을 뼈에 새겼다.
충격에 휩싸인 영원성과 달리 청군 지휘부는 전쟁을 시작한 이후 처음 올린 승전보에 크게 고무됐다.
“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들은 통쾌한 소식이로군.”
지휘 천막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린 도르곤은 앞에 서 있는 야골타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장군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짐이 어주를 내리겠노라.”
“황공하옵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야골타는 오른편에 서 있는 용골대를 득의만만한 얼굴로 힐끔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도르곤한테 다가갔다.
그러자 옆에 시립해 있던 내관이 어느새 준비한 황금으로 만들어진 술병과 잔을 가져왔다.
“자, 받게.”
술을 따라 주며 도르곤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목소리로 치하를 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하게.”
“폐하의 충실한 검이 되겠사옵니다.”
“그래.”
노골적인 아부에 용골대를 비롯해 평소 야골타와 감정이 좋지 않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도르곤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흡족해했다.
“장군이 있어서 아주 든든하군. 공을 세웠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내려야지. 원하는 것이 있나?”
눈을 반짝인 야골타는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저한테 공성전 지휘권을 맡겨 주십시오.”
“흐음?”
도르곤은 의외라는 듯 야골타를 쳐다보았다.
이미 한 번 실패한 고부리성 공략을 자진해서 다시 맡겠다고 하다니, 설마 포상으로 이런 걸 원할 줄은 몰랐기에 주위의 장수들도 약간 술렁거렸다.
“이번에야말로 성을 함락시켜 지난번의 치욕을 설욕하겠습니다.”
바닥에 무릎까지 꿇으면서 청원하는 모양새에 도르곤은 잠시 고심을 하다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자네 말대로 이번엔 꼭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길 바라네.”
“감사하옵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고 설욕의 기회를 얻은 것에 야골타는 잔뜩 고무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 ☆ ☆
성루에 서자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보였다.
저 지평선 너머에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고 청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병사들을 생각하니 도현은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뒷짐을 진 채 한참 말없이 서 있을 때 친위대 백부장인 김덕술이 가까이 다가와 군례를 취했다.
“폐하, 총참모부에서 답신이 왔사옵니다.”
“어서 가져와.”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도현이 말하자 김덕술은 비단 두루마리를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었다.
밀봉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간 도현은 낮게 침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칠현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는 것이옵니까?”
“거란 출신 기병들 일만을 급히 모아 보내 준다는군.”
“좋은 소식이지 않사옵니까.”
의아한 듯 칠현이 되묻자 그는 두루마리를 접어 다시 김덕술에게 주며 이야기를 이었다.
“거기까지라면 그렇겠지.”
“……?”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명이 앞뒤에서 협공을 하자는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청군 증원 병력 십만이 새롭게 합류할 것이라는군.”
뜻밖의 악재에 칠현은 눈을 크게 떴다.
“시, 십만이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래.”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많은 병력이 어디서…….”
지금도 병력에서 밀리는데 십만이 더 보태진다면 자칫 팽팽한 균형추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악재였다.
“주작단이 파악한 것에 따르면 죽은 왕영 휘하에 있다가 잡힌 포로와 수감 중이던 죄수 들을 모은 거라는군.”
“허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칠현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패를 준비하고 있었다니 역시 도르곤은 만만치 않은 상대야.”
설마 상대가 죄수 부대를 등장시킬 줄은 도현도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다.
주작단을 청나라 곳곳에 침입시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치밀하게 전략을 세웠던 것이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될 위기였다.
잘 훈련된 정예가 아닌 어중이떠중이를 모아 놓은 오합지졸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화살받이로 쓰더라도 십만이라는 머릿수를 절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계획을 바꿔야겠어.”
머리를 든 도현은 아직 남아 있던 김덕술을 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전령을 보내 용병대를 불러오도록 하고 총참모부에는 진虎 호 계획을 발동하라 이르라!”
“알겠사옵니다.”
청과의 전쟁을 앞두고 조선은 여러 가지 전쟁 계획을 세운 뒤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이름을 붙여 구분했는데, 진호 계획도 그중 하나였다.
최측근인 만큼 진호 계획이 뭔지 잘 알고 있던 칠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봤다.
“괜찮겠사옵니까?”
그러자 도현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기세 싸움이야. 아무리 날카로운 비수를 숨겨 두고 있더라도 힘 대결에서 밀려 승기를 넘겨준다면 다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지. 여기서 우리가 가진 걸 모두 쏟아부어 소진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물러서서는 안 돼!”
이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결연한 그의 의지를 잃은 칠현은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도현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모든 것이 폐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몸을 바로 해 드넓은 벌판을 바라보면서 도현은 진한 피비린내를 느꼈다.
“야골타의 군기입니다!”
갑옷을 정비할 시간도 없어 피딱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채로 성루에 오른 이관은 부관의 말에 멀리 적진 앞에 휘날리는 군기를 보며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공성전 초반부터 집요하게 아군을 괴롭히며 수많은 병사들을 비명에 죽도록 만든 깃발이었기에 그로서는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다시 지휘권을 잡은 모양입니다.”
이관은 어금니를 물며 말했다.
“어떤 자가 지휘를 하던 우린 성벽만 잘 지켜 내면 되니 상관할 필요 없어.”
“……예.”
자신이 쓸데없는 호들갑을 떨었다는 걸 깨달은 부관은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짧게 혀를 찬 이관은 시선을 돌려 좌우 성벽을 살폈다.
다행히 병사들은 야골타가 다시 나타난 것에 크게 동요를 보이지 않고 담담히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적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관이 든든해하는 순간 천지가 진동하는 커다란 폭음이 울리면서 청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꽝! 꽝! 꽝!
씨이이잉~ 콰꽈꽝!
청군이 쏜 포탄은 성벽뿐만 아니라 외성과 내성 사이에 위치한 민가들에도 떨어졌다.
나무로 지어진 목조 가옥들은 폭발에 휘말려 날아갔고 순식간에 내성은 화염과 희뿌연 먼지로 뒤덮였다.
성가퀴 뒤로 숨은 조선군 병사들은 이제 포격쯤은 아무렇지도 않는지 담담한 얼굴로 각자 무기를 꽉 움켜쥔 채 앉아 있었다.
후두두둑.
“포격이 멈추면 곧바로 적이 쳐들어올 거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
폭발에 치솟아 오른 돌가루와 먼지가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가운데 상체를 숙인 군관이 성벽 위를 오가면서 병사들을 다독였다.
성벽 밑에 웅크린 채로 간간이 고개를 들어 적진을 살피던 이관 성주는, 오랜 전투에 힘들고 지쳤을 텐데도 불구하고 전의를 잃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했다.
“지휘권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만큼 처음부터 세게 몰아칠 거다. 그 전에 적군의 기세를 꺾어 버릴 수 있게 조란탄鳥卵彈을 준비해라!”
“옛.”
짧게 대답한 부관은 즉시 전령을 보내 포병대에 명령을 전달했다.
다시 성벽 위로 머리를 내밀어 적진을 뚫어질 듯 노려본 이관 성주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간격을 두고 길게 늘어선 청군 홍이포들은 쉬지 않고 불을 뿜어 댔고 그때마다 내성 주위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조선군 포대도 온힘을 다해 맞대응하고 있었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쿠쿵! 쿵! 쿵!
그렇게 한 시진 넘게 이어지는 청군의 포격이 갑자기 뚝 멈췄다.
폭풍 전의 고요와도 같은 무거운 정적이 전장을 뒤덮었다.
그것도 잠시.
곧 이어질 상황이 뭔지 잘 알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재촉을 하기 전에 알아서 몸을 일으키고는 각자 전투 위치를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흙먼지 사이로 청군이 천천히 전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적이 온다!”
“퉤. 오늘도 저 자식들 대갈빡을 다 박살 내 버리자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 비비며 호기롭게 소리치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도 덩달아 살기등등한 기세를 띠었다.
“그래. 오늘 한번 살풀이 제대로 해 보자.”
“시벌, 너 죽고 나 살자, 이 자식들아!”
비록 몸에 걸친 옷은 헤지고 낡았으며 흙먼지 때문에 더러워진 얼굴엔 땟국물이 줄줄 흘러 거지꼴이 따로 없었으나 눈에서 타오르는 열기만큼은 진짜였다.
조선군이 쏴 대는 포격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청군은 대형을 넓게 산개시킨 채 앞으로 달려들었다.
“공격!”
“우와아아!”
거센 파도가 밀어 닥치듯 청군이 쉰 보 안까지 들어오자 거리를 재던 포병대 지휘관이 벌떡 일어나 검을 위로 들어 올리고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지금이다. 방포하라!”
퍼퍼펑! 퍼펑! 펑!
포신에 조란탄을 넣고 대기 중이던 조선군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발사된 조란탄은 공중에서 폭발하며 이백 개에 달하는 작은 쇠구슬과 차돌을 부챗살처럼 뿌렸다.
“으악!”
“끅.”
자탄을 피하지 못한 적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엎어졌다.
포수들이 재장전을 하는 사이 바로 이어서 소총이 발사됐다.
타타탕! 탕! 탕!
촘촘한 화망을 구성한 채 날아든 탄환에 청군 대열 선두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섞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피 안개가 뿌려지고 팔이나 다리가 잘린 채 꿈틀거리면서 살려 달라 절규하는 부상병들의 모습은 마치 지옥을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은 단단히 각오를 했는지,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내성을 향해 전진해 갔다.
“역시 조선군의 대응이 만만치 않습니다.”
말에 앉아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야골타는 심복 장수인 네루탄이 감탄 어린 어투로 이야기를 하자 한쪽 볼을 실룩였다.
“흥. 그래 봤자. 놈들이 설치는 것도 오늘까지야.”
“맞습니다.”
“부관.”
“예, 장군.”
“화차를 내보내!”
“알겠습니다.”
잠시 뒤 깃발 신호가 올라가자 청군 진영에서 충차衝車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여러 개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을 두꺼운 통나무로 감싸고 좌우에 바퀴가 달린 것까지는 같았지만 일반적인 충차와 달리 층을 높이 쌓지 않았다.
기껏 해 봐야 이 층이 채 되지 않아 이걸로 고부리성의 높다란 성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화차를 보며 야골타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성벽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조선군과 청군의 싸움은 한층 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악착같이 전진해 온 청군은 공성용 사다리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던지며 성벽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타탕!
“끄악.”
“어서 올라가!”
“이익.”
그런 청군에 성벽 위의 조선군 병사들은 총과 화살을 쏘거나 비격진천뢰를 집어 던졌다.
“이거나 먹어라!”
꽈아앙!
“꾸엑.”
“컥.”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을 이루는 가운데 서로 악다구니를 내뱉으며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관 성주도 사다리를 타고 문루 위로 올라오려는 적병의 머리를 검으로 베어 내면서 목이 터져라 전투를 독려했다.
“절대 적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기에 조선군 병사들은 온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적을 상대했다.
“성주님, 저길 보십시오!”
또 다른 적병에게 검을 박아 넣었다가 뺀 이관 성주는 부관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그러자 한눈에 봐도 수상하게 생긴 화차들이 방패병들한테 둘러싸인 채 꾸물꾸물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뭐야?”
“그, 글쎄요. 충차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작고…….”
미간을 좁히며 화차를 노려보던 이관 성주는 찝찝한 마음을 떨쳐 내지 못하고 급히 지시를 내렸다.
“화포를 써서 저걸 박살 내 버려!”
이관 성주의 말에 부관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렇게 움직이는 걸 정확하게 맞추기는 어렵습니다.”
스스로도 부관의 말이 맞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꾸 뒷골이 당기며 왠지 모를 불안감이 든 이관 성주는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저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으란 말이야!”
“아, 알겠습니다.”
평소와 확연히 다른 이관 성주의 반응에 부관은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잠시 뒤 적군에 조란탄을 퍼붓던 화포 몇 문이 고각을 올려 화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쏴!”
꽝! 꽝! 꽝!
슈우우웅.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은 느리지만 계속해서 움직이는 화차들을 한 번에 맞추지 못하고 들판에 떨어져 뿌연 흙기둥을 만들었다.
“고각을 조금 더 낮춰!”
포술장의 말을 들으며 재빨리 화포를 재장전하던 포수들은 적이 쏜 포탄이 주위로 낙하하자 허겁지겁 성가퀴 뒤로 몸을 엎드렸다.
“포탄이 날아온다!”
“어서 피해.”
꽈꽝! 쿵!
포탄이 떨어지며 조선군 포대가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걸 본 야골타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조선 놈들이 화차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계속 포격을 퍼부어!”
“옛, 장군.”
부관의 대답을 들으면서 야골타는 다시 천리경을 한쪽 눈에 가져다 대고는 성벽을 천천히 살폈다.
그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내성은 양측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도 성벽을 두고 서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청군은 압도적인 숫자를 가지고도 좀처럼 성을 넘지 못했다.
조선군이 밀어내자 공성용 사다리에 매달린 병사들이 허우적거리면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야골타는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버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촤악!
“더 힘껏 밀어라! 그래 가지고 언제 성벽에 도착할 수 있겠어.”
고함을 치면서 군관이 채찍을 휘둘러 대자 청군 병사들은 몸을 움찔하며 온 힘을 다해 화차를 밀었다.
“으차! 으차!”
커다란 화차 안에는 한 줄당 열 명씩 모두 서른 명의 청군 병사들이 양쪽에 있는 바퀴를 굴려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개자식, 빨리 가고 싶으면 같이 밀면 될 거 아냐.”
젊은 병사가 투덜거리자 옆에 있던 남자가 군관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이봐, 군관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흥. 내 말이 틀렸어요.”
“쯧쯧. 몸은 좀 고달프지만 창 하나만 달랑 들고 뛰어가 화살받이가 되는 것보다 백번 낮잖아.”
“그건 그렇지만…….”
“괜히 찍혀서 내일부터 총탄 세례를 받으며 성벽을 기어 올라가기 싫으면 그냥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해.”
“쳇.”
여전히 불만인 표정을 지으면서도 위험한 공격 부대로 빠지기는 싫은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더니 포탄이 지근거리에 떨어졌는지 큰 폭음과 함께 충격파에 화차가 흔들거렸다.
쉬우우웅!
꽈아앙!
“어어어.”
“히익.”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겁먹은 청군 병사들이 바닥에 엎드려 몸을 떨자 군관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리고는 고성을 내질렀다.
“이대로 뒈지기 싫으면 어서 일어나서 화차를 밀어!”
사방이 굵은 통나무로 꽉 막혀 바깥 상황을 볼 수 없었던 청군 병사들은 호통에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다시 화차를 움직였다.
문루에 있던 이관 성주는 포탄이 아슬아슬하게 화차를 빗나가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옆으로 떨어졌으면 맞힐 수 있었는데.”
청군 포병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아군 화포들이 불을 뿜었지만 아직까지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그사이 화차들은 부서진 외성 벽을 지나 쉰 보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있어서 성벽 아래에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피어오르는 흙기둥 사이를 지나 거북이처럼 꾸물꾸물 접근해 오는 화차들을 노려보던 이관 성주는 안 되겠는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불화살로 저걸 태워 버려!”
“예.”
한눈에 봐도 두꺼운 통나무로 만들어진 화차 외벽을 탄환으로는 뚫기 힘들어 보였기에 불화살로 태워 버리려는 거였다.
얼마 안 있어 궁수들이 불화살을 쏴 댔다.
슈슈슉!
바람을 가르면서 날아간 불화살들을 이내 화차 지붕에 떨어져 깊숙이 박혔다.
두두둑. 두둑.
수십 발의 불화살이 화차에 명중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원하는 대로 불길이 솟아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옆에 있던 부관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물에 젖은 가죽으로 지붕을 덮어 놓은 것 같습니다.”
“젠장!”
부관의 짐작대로 화공을 예상한 야골타는 화차 지붕과 벽을 물에 흠뻑 젖힌 소가죽으로 덮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불화살을 쏴도 화재를 일으키지 못하고 모두 연기를 피워 올리며 허무하게 꺼지고 말았다.
하지만 성과가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는데 끈질기게 포탄을 쏴 대던 조선군 화포에 왼쪽 성벽으로 접근하던 화차 한 대가 명중됐다.
꽈꽝!
“맞았다!”
“그렇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내지르던 포수들은 이내 바로 이어진 엄청난 폭발에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쿠쿠쿵!
시뻘건 불기둥이 솟아오르는 것과 동시에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주위에 있던 적병들이 모두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고 폭발이 얼마나 컸는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성벽이 흔들렸다.
이관 성주는 하늘 높이 치솟은 버섯구름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 이건!”
“안에 화약이 가득 실려 있는 모양입니다!”
순간 이관 성주는 상대가 뭘 노리는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속셈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
다급한 이관 성주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조선군 병사들을 이제 성벽 바로 밑까지 접근한 화차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포탄에 맞아 터지거나 불이 붙어 폭발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세 대는 끝까지 살아남아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다.
쿵.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화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앞쪽에 나 있는 작은 견시창을 열어 위치를 확인한 군관은 한쪽 팔을 내저으면서 소리쳤다.
“다 왔다! 어서 빠져나가.”
이 층이 화약으로 잔뜩 채워진 걸 알고 있던 적병들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밀대에서 손을 놓고 허둥지둥 쪽문을 열고 화차 밖으로 뛰쳐나갔다.
“빨리 가!”
서로 구르듯이 마구 뒤엉키며 마지막 남은 병사가 문턱을 넘는 순간, 군관의 손에 들린 부싯돌에서 불꽃이 팍 튀겼다.
심지가 빠르게 타들어 감과 동시에 임무를 마친 군관 역시 부하들의 뒤를 따라 서둘러 화차를 벗어났다.
길게 이어진 심지를 따라 맹렬하게 타들어 간 불꽃이 화약통에 닿는 것과 동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일며 화차 내부에 가득 채워져 있던 화약이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콰꽈꽝!
돌 조각과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시뻘건 불기둥이 성벽보다 높이 치솟았다.
폭음이 터지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감한 이관 성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뿌옇게 피어 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자 청군 진영에서 주위가 떠나갈 듯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
“자, 장군, 성벽이!”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부관의 외침에 고개를 든 이관 성주는 성벽 한쪽이 허물어져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끄으응.”
절망감에 휩싸인 조선군과 달리 드디어 성을 함락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청군은 기세를 올렸다.
특히 말 위에 앉아 전투 상황을 지켜보던 야골타는 성벽이 무너진 걸 확인하자마자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주위에 있는 휘하 장수들을 돌아보며 크게 명령을 내렸다.
“공격! 포로는 필요 없다. 눈에 띄는 건 가축까지 모조리 다 죽여 버려라!”
섬뜩한 지시에 대기 중이던 청군 병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와아!”
수만에 달하는 적병이 몰려오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해일이 밀어닥치는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있는 조선군 병사들은 지금까지 잘 버텨 왔지만 그걸 보고 크게 술렁였고 군관들마저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관 성주 또한 엄청나게 몰려오는 적군과 허물어진 성벽을 보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이관 성주는 피 묻은 검을 치켜들며 주춤거리는 병사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각자 위치를 지켜라! 비록 성벽이 일부 무너졌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보다 더한 것도 이겨 냈으니 이번에도 성을 지켜 낼 수 있다!”
금방이라도 전투 대열이 무너질 것처럼 두려워하던 조선군 병사들은 이관 성주의 외침에 각자 가지고 있는 무기를 꽉 움켜쥐면서 마지막 용기를 냈다.
“씨발, 어차피 이판사판이여!”
“그래, 도망친다고 해도 갈 곳도 없잖아.”
“맞아!”
“죽을 때 죽더라도 청나라 놈을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가자고!”
이관 성주는 물론이고 병사들도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맞이했다.
☆ ☆ ☆
도르곤은 청군 진영 중앙에 수십 명이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천막을 쳐 놓고 그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머리 위로는 두꺼운 가리개가 햇빛을 차단해 주고 있었으나, 전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두 다리를 벌리고 당당하게 어깨를 쭉 편 채 팔을 꼰 자세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청군과 조선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상황을 살피던 그는 마침내 성벽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달려들자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냈다.
“이번엔 꽤 자신 있어 하더니, 결국 야골타 장군이 앙갚음을 제대로 해 주는군.”
줄곧 한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매가 위로 휙 올라가 호선을 그렸다.
모처럼 좋아 보이는 기분에 이때를 놓칠세라 옆에 시립해 있던 내관이 재빨리 첨언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흠.”
별다른 대꾸 없이 도르곤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곧바로 그의 황금 잔에 넘치도록 술이 따라지고, 한입 꿀꺽 삼킨 도르곤이 시선을 용골대에게 돌리면서 말했다.
“장군이 보기엔 어떤가?”
용골대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속으로 숨을 삼켰다.
비록 사이가 나쁜 야골타가 공을 세우게 된 것이 탐탁지 않긴 했지만 그걸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어쨌든 공적은 그의 것이고 아군에 큰 도움이 될 것도 사실이니 여기선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
“화차를 이용한 공격이 제대로 먹힌 것 같사옵니다.”
“맞아. 그 생각을 왜 지금껏 못했는지 통탄할 노릇이야. 그렇지 않은가!”
도르곤은 무릎까지 치며 야골타를 칭찬했다.
“큰 공적을 세웠으니 나중에 돌아오면 상을 내려야 되겠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용골대를 비롯한 다른 장수들이 입을 모아 맞장구를 쳤다.
도르곤은 다시 한 번 잔에 술잔을 가득 따르라 명하며 저 멀리서 불타고 있는 성벽을 바라보았다.
마치 노을이 지고 있는 것처럼 진홍빛을 띤 하늘 아래 일렁이는 불꽃과 검은 연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동안 발목을 잡고 있던 고부리성을 함락시켰으니 이대로 한양까지 거침없이 진격해 들어가면 되겠군.”
이제 청군의 기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르곤은 크게 광소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청군을 맞아 이관 성주와 조선군 병사들이 분전奮戰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양군이 서로 뒤엉킨 데다 조선군은 화포를 재장전할 여유조차 없었기에 더 이상 포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수들은 화포를 쏘는 대신 밀대를 비롯해 손에 잡히는 건 아무거나 집어 들고 성벽 위로 올라온 적군과 몸싸움을 벌였다.
“죽어!”
퍼억!
“커헉.”
총을 쏘던 병사들은 착검을 할 틈도 없이 달려드는 적과 어울려 난전을 벌여야 했고 성벽 위는 비명과 시뻘건 피로 가득 찼다.
서걱.
“꾸엑!”
검을 휘둘러 또 한 명의 적을 쓰러뜨린 이관 성주는 문루 기둥에 기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좌우를 둘러봤다.
주위를 지키던 아군이 하나둘 목숨을 잃고 이제 남아 있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적군은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해서 몰려왔다.
무너진 성벽을 통해 적들이 들어와 내성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고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관 성주는 막 문루로 올라오려는 청병의 가슴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고 뽑고 있는 부관을 불렀다.
“부관.”
“예.”
“아무래도 이제 틀린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싸움을 끝낼 때가 됐다는 말일세.”
“성주님!”
안타까운 시선으로 부관이 바라보는 가운데 이관 성주는 이야기를 이었다.
“자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비록 성을 내주더라도 내성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군량과 군수품을 적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나.”
“하면?”
“적들이 손을 쓰기 전에 자네가 병사들을 이끌고 가서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하게.”
“그러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퇴로를 뚫어 성을 빠져나가시지요.”
부관의 말에 이관 성주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됐네. 성주인 내가 성을 버리고 어딜 간단 말인가.”
“하지만…….”
“대조선 제국의 장수로서 부끄럽지 않은 최후를 맞고 싶네.”
이미 이곳에서 죽기를 각오한 걸 깨달은 부관은 감정이 벅차올랐다.
“성주님…….”
“마지막까지 자네한테 어려운 일을 맡기는 것 같아, 미안하이.”
“아닙니다.”
이관 성주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부관은 결연한 얼굴로 마지막 군례를 올렸다.
“임무를 완수하고 하늘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세.”
부관이 십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루를 내려가자 이관 성주는 몸을 돌려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고부리성은 예전의 위용이 넘치는 단단한 모습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성벽은 부서지고 갈라진 채 흉한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도주병도 없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도 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성벽 위는 적들로 가득했고 간혹 조선군 병사들이 힘겹게 저항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그리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군.”
허탈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수십만에 달하는 청군을 상대로 고부리성을 지켜 내는 건 어려운 임무였다.
그렇다고 장수된 자가 비겁하게 상황이 불리하다고 대충 시늉만 하고 물러서거나 적에게 항복할 수는 없었다.
죽기를 각오로 적과 싸웠고 실제로 한 달이 넘도록 적을 막아 내면서 그 옛날 당나라에 좌절감을 안겨 줬던 안시성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외성이 무너지더니 결국 오늘은 내성까지 청군의 침입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공성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라고 해도 이관 성주는 너무나도 분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제대로 지휘를 하지 못해 부하들을 죽게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그런 상념도 잠시.
겨우 버티던 병사들 사이를 뚫고 적이 하나둘 문루 위로 올라오자 크게 숨을 내뱉은 이관 성주는 형형한 안광을 번득이며 크게 소리쳤다.
“내가 고부리성의 성주 이관이다. 다 덤벼라!”
그러고는 마지막 힘까지 모두 짜내 적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최후의 순간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고 갑옷을 피로 물들인 채 적과 싸우는 이관 성주의 모습은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한편 문루를 내려와 내성 창고로 달려가던 부관은 등 뒤에서 들리는 이관 성주의 외침에 울컥 눈물이 흘러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뒤에 남은 동료들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고 있었기에 침울한 얼굴을 했다.
그걸 본 부관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딱딱하게 굳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성주님과 전우들의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말자!”
“옛.”
부관과 병사들은 곧장 내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고로 뛰어갔다.
그동안 공성전을 치르면서 많이 소모했지만 애초에 일 년 이상 버틸 수 있도록 물자를 비축해 놨었기에 창고에는 아직 대부분 보급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청군의 함성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자 부관은 다급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흩어져서 최대한 많은 곳에 불을 질러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은 창고 문을 활짝 열고는 쌓여 있는 군량과 보급품에 불을 놨다.
부관도 횃불을 들고 화약을 놔둔 곳으로 갔다.
끼이익.
어두운 창고 안에 나무로 만든 화약통과 포탄 상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걸 본 부관은 망설임 없이 횃불을 던졌다.
화르르륵.
불은 순식간에 크게 타올랐고 부관은 검을 빼 든 채 행여나 누군가 들어와 불을 끄지 못하도록 입구를 단단히 지켰다.
힐끗 고개를 돌린 부관은 적들이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문루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보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장군 모시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이제 곧 뒤따라 갈테니 기다리십시오.”
그 순간 엄청난 폭음이 울리면서 창고 밖으로 터져 나온 시뻘건 화염이 부관의 몸을 뒤덮었다.
꽈아아앙!
검을 크게 휘둘러 적들과 거리를 벌인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이관 성주는 귀를 울리는 폭음과 함께 창고가 있는 곳에서 불기둥이 치솟자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어느새 문루 안까지 적이 들어오고 주위를 지키던 병사들 상당수가 차가운 시신이 되어 바닥에 누워 있었지만 마무리를 확실히 지은 것에 그는 안도했다.
이제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힘이 빠진 것일까 강렬한 고통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푹.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적병 하나가 검을 그의 목에 박아 넣고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신호라도 됐는지 적군의 무기가 연이어 몸을 파고들었고 최후의 순간까지 검을 손에 놓지 않고 싸우던 이관 성주는 무릎을 땅에 대며 최후를 맞이했다.
털썩.
쓰러진 이관 성주의 넋을 위로하듯 보급품 창고에서 시작된 불은 사방으로 옮겨붙으면서 고부리성 전체를 태워 버릴 듯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정확히 사십이 일간 계속된 고부리성 전투는 이관 성주 이하 수비대 전원이 전멸하는 걸로 끝이 났다.
비록 성을 함락시키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 발목이 잡혀 있은 데다가 수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마지막 순간 조선군이 비축해 놓은 보급품을 모두 불태워 버려 전리품까지 제대로 얻지 못한 청군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무엇보다 청군 진영을 무겁게 짓누르는 건 고부리성이 끝이 아니라 이제 첫 걸음을 뗐다는 것이었다.
☆ ☆ ☆
“폐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회의실 탁자에 지도를 펼쳐 놓고 장수들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던 도현은 김덕술의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고부리성이 청군에 함락됐다고 하옵니다.”
“……!”
큰 충격에 순간 회의실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어려운 싸움이라는 걸 알았지만 지금까지 이관 성주가 잘 버텨 줬기에 조선군이 반격에 나설 때까지 성을 지켜 낼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이내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도현이 굳은 얼굴로 김덕술을 보며 말했다.
“그게 사실인가?”
“예. 방금 인근 성에서 보낸 전령이 도착해 소식을 알려 왔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흘린 도현은 말을 이었다.
“이관 성주는 어찌 됐나?”
“끝까지 싸우시다가 병사들과 운명을 같이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군.”
우직하면서도 책임감이 남다른 이관 성주였기에 충분히 그랬을 거라 짐작됐다.
마지막까지 성을 지킨 것이 대견하면서도 뛰어난 장수를 잃은 것에 그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관 성주는 물론이고 고부리성에서 운명을 달리한 병사들 중에 어느 하나 하찮은 목숨이 있으랴.
착잡하고 미안한 감정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으나 황제인 도현은 언제까지 그런 감정에 싸여 있을 수는 없었다.
“알았으니 물러가도록 해.”
“예.”
허리를 숙인 김덕술이 뒷걸음질로 회의실을 나가자 도현은 좌중을 둘러보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황은 들어서 알 테니 이제 청군이 어떻게 움직일 것 같소?”
그러자 오른편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먼저 대답했다.
“고부리성이 무너졌으니 이제 요동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지만, 영원성을 그냥 두면 측면을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 먼저 여길 치려고 들 것이옵니다.”
“맞습니다.”
다른 장수들도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동의를 하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 영원성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겠지. 거기다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먹잇감도 있으니 더욱 그럴 거야.”
그 먹잇감이 바로 도현 자신이라는 건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다들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대소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양을 떠나 영원성까지 친정을 나선 건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도 있었다.
황제인 도현이 최전선에 있음으로써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뿐만 아니라 조선군 주력이 격파되지 않는 이상 전쟁이 요하 서쪽으로 한정돼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청군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산재해 있는 여러 성들을 하나하나 치고 진격할지 아니면 견제 병력을 놔두고 그대로 진격해 올 것인지 하는 건데…….”
탁자에 펼쳐져 있는 지도에 시선을 주면서 도현이 중얼거리자 근위 군단장인 박영식이 의견을 말했다.
“고부리성에 비해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숫자도 네 개에 공격하기 쉬운 평지에 있는 성이니 다 정리를 하면서 진격해 오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남두병 사령관이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병력을 나눠 일부로 공성전을 벌이게 하고 주력은 바로 영원성으로 진격해 가능성이 크옵니다.”
“우회를 하지 않고 사십 일 넘게 고부리성을 공격했었는데 적이 후방을 취약하게 만들려고 하겠소?”
“상황이 다르니 청군도 다르게 움직인다는 겁니다.”
“뭐가 다르다는 거요?”
박영식 장군이 똑바로 쳐다보면서 묻자 남두병 사령관은 차분한 태도로 이유를 설명했다.
“고부리성은 지리적으로 산해관을 마주 보고 있어서 진격로를 바로 막고 있지만, 다른 성들은 충분히 우회를 할 수 있는 데다 그리 많지 않은 병력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할 수 있으니 굳이 힘을 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말을 끊고 도현과 참석자들을 둘러본 남두병 사령관은 손가락으로 지도 한쪽에 놓여 있는 청군 깃발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었다.
“이번에 새로 합류할 걸로 파악된 죄수 부대만 가지고도 충분히 네 개 성을 포위할 수 있을 겁니다.”
“하긴 죄수 부대 병력이 십만이라니 그럴 수도 있겠군.”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도현이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동의하자 장수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록 고부리성이 함락됐지만 중간에 성이 네 개나 있었기에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청군이 곧장 이리로 올 것이라고 하니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다 끝났겠지?”
도현의 시선을 받은 남두병 사령관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청군을 상대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사옵니다.”
“좋아. 그대로 놓친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다시 한 번 꼼꼼히 점검하도록 하게.”
“예.”
“그리고 총참모부에서 보낸 병력은 언제쯤 도착할 것 같나?”
총참모부 소속 군관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심양성에 거의 집결이 끝났다는 전갈이 왔으니 늦어도 내달 초에는 당도할 것이옵니다.”
“내달 초라…… 그럼 일주일 정도 남았군.”
“그렇사옵니다.”
지휘봉 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잠시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시선을 들며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증원 병력이 도착하면 즉시 진虎호 작전을 개시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다들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옛, 폐하.”
장수들이 우렁찬 대답과 함께 허리를 깊숙이 숙인 가운데 도현은 지도 한쪽에 놓여 있는 청군 깃발을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
한편 고부리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영원성을 거쳐 한양에 위치한 주작단 본 단에도 알려졌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각이라 본단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완 단장의 집무실엔 호롱불 빛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방도 주인을 닮는다더니 실내는 딱 필요한 만큼의 가구만 놓여 있어 자질구레한 물건이라곤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흑단으로 만들어 검고 윤이 나는 목제 책상 앞에 앉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단원들이 보내온 보고서를 읽고 있던 이완 단장은 종이를 넘기던 손을 멈추고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문 쪽을 응시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방 바깥에서 누군가가 고해 왔다.
“단장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방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내 안으로 심복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며 묻는 눈빛에 그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입을 떼었다.
“……고부리성이 함락되었습니다.”
“……!”
담담한 이완 단장의 얼굴에 순간 경악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크게 동요한 것도 잠시, 그는 언제 놀랐냐는 듯 다시 얼굴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그럼 청군이 곧 영원성을 치려고 하겠군.”
“예. 그리고…….”
부하는 참담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이관 성주님께서도 전사하셨다 합니다.”
“그렇군.”
이것이 과연 혈육의 죽음을 전해 들은 사람의 반응인가 싶을 정도로 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성이 함락되었으니 성주인 녀석이 무사히 있을 리가 없지.”
그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에 부고 소식을 전한 부하가 오히려 당황하여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한 나라의 장수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당하고 장렬하게 전사했으니 오히려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하오나…….”
“공과 사는 철저히 구별하는 게 우리 주작단의 원칙이다. 그걸 잊지 말게.”
주작단에 입단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듣던 소리니 잊어버릴 턱이 없다.
하지만 정녕 이럴 때조차도 흐트러짐 없는 이완 단장의 모습은 실로 존경스럽기도 했고 약간 냉정하게 보이기도 했다.
만약 자신이 가족의 죽음을 앞에 둔다면 똑같이 행동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진 부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우리에겐 해야만 하는 일이 있지 않나.”
이완 단장은 부하를 향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이제부턴 청군의 공세가 더욱 더 거세질 테지. 그것에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야.”
“예.”
“그럼 더 할 말 없으면 물러가게.”
부하가 나간 뒤 혼자 남은 이완 단장은 입에서 길게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쉬었다.
동생의 전사 소식을 듣는 순간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숨을 멈추고 있었던 것이다.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내려다보니 종이가 걸레짝처럼 우그러져 있었고 식은땀이 배어 나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보고서를 읽던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진 몸 또한 마치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관아, 관아…….”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헤어질 때 술이라도 함께할 걸 그랬구나. 너와 함께라면 하룻밤을 꼬박 새어도 아깝지 않았을 텐데…….’
하다못해 동생의 가는 길이 고통스럽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이완 단장은 찢어지는 가슴을 움켜쥐고 그대로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남두병 사령관의 예상대로 고부리성을 함락시킨 도르곤은 하루를 쉬며 병력을 재편성한 뒤 곧장 영원성을 향해 진격했다.
중간에 흩어져 있는 성에는 각각 삼만씩 병력을 보내 조선군이 함부로 나와 후방을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십이만을 빼고도 영원성으로 진격하는 청군 본대의 규모는 사십만이 넘었다.
그에 비해 영원성을 지키는 조선군 병력은 십만이 겨우 넘어 무려 네 배나 차이가 났다.
모든 것들이 불리한 가운데 그나마 조선군이 믿을 수 있는 건 높고 튼튼한 성벽과 팔십 문에 달하는 각종 화포들이었다.
특히 새로 개발한 충무포에 거는 기대가 컸다.
갑옷을 모두 갖춰 입고 머리에 투구까지 쓴 도현은 아침부터 성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방어 태세를 직접 점검했다.
지금은 해자垓子를 넓히는 작업을 둘러보고 있었다.
“깊이가 얼마나 되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장수가 도현의 물음에 재깍 대답했다.
“현재 열 자(3미터)가 조금 넘사옵고 앞으로 열석 자까지 팔 계획이옵니다.”
“흐음. 부족한 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바닥에 죽창을 촘촘히 박아 넣고 폭도 더 넓히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중요한 군사 요충지인 만큼 기존에 만들어 놓은 해자가 존재했지만 조선군이 성을 함락시킬 때 많이 손상되고 무너져 제 역할을 못 할 정도였다.
그동안은 성벽을 복구하느라 미처 신경을 못 썼는데 청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부랴부랴 다시 복구했다.
하지만 도현의 마음에 차지 않아 다시 병사들을 투입해 해자를 보강하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하고 있었다.
“공성전이 벌어지면 해자가 적을 막는 일 차 저지선이 될 테니 각별히 신경을 써야 될 것이야.”
“염려 마시옵소서.”
걸음을 옮겨 문루 위로 올라온 도현은 멀리 북동쪽 벌판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청군이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칠현이 얼른 대답했다.
“어제 조양에 진을 쳤다고 하옵니다.”
“그럼 조만간 도착하겠군.”
“예.”
철저히 준비를 했고 한양을 나설 때부터 각오를 단단히 다졌지만 막상 청나라 대군과 일전을 앞두고 있으니 좀처럼 긴장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 지평선 한쪽에서 뿌연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걸 본 도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뭐지?”
“글쎄요.”
망루에 배치된 견시병도 먼지 구름을 목격했는지 비상을 알리는 징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해자를 파고 있던 병사들이 작업을 멈추고 급히 한쪽에 놔둔 병장기를 챙겨 들었고 막사에서 대기 병력이 뛰어나와 성벽 위로 올라왔다.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추는 병사들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짓던 도현은 이내 긴장한 눈빛으로 지평선을 바라봤다.
“적이 도착하라면 아직 멀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옵니다.”
“일단 작업 중인 병력을 모두 성 안으로 들이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라!”
“옛.”
지시를 받은 위사가 문루를 내려가고 얼마 있지 않아서 해자 작업을 하던 병력이 질서 정연하게 성안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남두병 사령관을 비롯한 장수들이 급보를 받고 급히 문루로 달려왔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먼지 구름의 정체를 살피러 갔던 척후병이 말을 타고 돌아왔다.
척후병이 문루로 올라오자 도현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이냐, 아군이야?”
한쪽 무릎을 바닥이 꿇은 채로 고개를 숙인 척후병은 숨을 가볍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아군이옵니다.”
“그게 정말이냐?”
“예. 신인석 장군께서 지휘하시는 증원 병력이옵니다.”
“오. 그래.”
그제야 도현의 표정이 밝아졌고 주위에 있던 장수들도 긴장을 풀었다.
잠시 뒤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기병 일만 명은 해자 근처에서 멈춰 섰고 십여 명의 인영이 행렬에서 빠져나와 성안으로 들어왔다.
“충. 신 신인석,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전장이었기에 예를 다 갖추지 않고 신인석 장군이 절도 있는 자세로 군례를 올리자 도현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게. 예정보다 반나절이나 더 빨리 도착했군.”
“전황이 안 좋다는 소식에 조금 서둘렀사옵니다.”
“잘했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우선 병사들을 쉬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신인석 장군과 휘하 군관들의 갑옷에 묻어 있는 뿌연 먼지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급하게 움직였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아군임이 확인되자 만약을 위해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고 기병들은 천천히 열을 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도현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을 때 남두병 사령관이 다가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병 전력이 부족해 걱정이었는데 딱 때를 맞춰서 도착했사옵니다.”
“그러게 말이야.”
별동대가 적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괴멸당하는 바람에 조선군의 기병 전력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해 있었다.
당장 방어전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됐지만 차후 대대적인 반격에 나설 때 빠른 기동력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돌파 부대 역할을 수행할 기병의 부재는 상당한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심이 많던 차에 충분하지는 않아도 때맞춰서 일만이나 되는 기병이 도착하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다시 병사들이 나가 해자를 파는 작업을 계속했고 성벽 위도 이런저런 보강 공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청나라 대군이 뿌연 먼지와 수많은 깃발을 휘날리면서 영원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상륙
드넓은 벌판을 온통 새까맣게 채우며 나타난 청군은 성벽에서 삼천 보쯤 떨어진 곳에 멈춰서는 진채를 세웠다.
문루에 서서 도현이 천리경으로 그런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박영식 장군이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다가왔으면 충무포로 혼쭐을 내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사옵니다.”
새로 개발된 충무포의 최대 사정거리가 이천 보에 달하니 조금 무리를 한다면 박영식의 말대로 적에게 상당한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청군이 우리 화포 전력을 두려워한다는 뜻이겠지.”
중얼거리듯 말한 도현은 천리경을 칠현에게 건네주고는 박영식과 나란히 서 있는 남두병 사령관을 봤다.
“병력 배치는 다 끝났나?”
“예. 사만 명을 성벽에 배치했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면서 언제든 투입할 수 있도록 대기시켰사옵니다.”
“잘했네. 진채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섣불리 공격을 해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야지.”
“맞사옵니다.”
“화포들은?”
“명령만 하시면 언제든지 포격을 실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끝내 놓고 있사옵니다.”
격렬하게 전개될 포격전에 대비해서 조선군 포병대는 망루 형태의 포탑 안에 모든 화포들이 들어가 있었다.
“다시 한 번 방어 태세를 점검하고 계속 청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도록 해.”
“옛.”
휘하 장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려 청군 진영을 바라봤다.
한편 청군 진영에서도 도르곤이 장수들을 잔뜩 거느린 채 말 위에 앉아 영원성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그동안 조선 놈들이 성을 아주 단단히 보강한 것 같군.”
“그래 봤자, 고부리성처럼 황제 폐하의 군대가 내딛는 발아래 짓밟힐 운명이옵니다.”
야골타가 입안의 혀처럼 굴면서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자 도르곤은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야지. 이번에도 장군이 큰 활약을 할 거라 기대하겠네.”
“하명만 하시면 분골쇄신,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수십만 대군을 가지고도 고부리성 하나를 넘지 못해 한 달이 넘게 붙잡혀 있었던 걸 벌써 잊고 상대를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자 용골대가 신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영원성은 고부리성보다 훨씬 크고 조선 국왕까지 직접 친정을 나와 있다고 하니 그렇게 만만히 볼 곳이 아니옵니다.”
찬물을 끼얹는 말에 도르곤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총병관은 짐이 조선국왕보다 못하다 이건가!”
“그런 것이 아니옵고 강한 상대인 만큼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뜻이었사옵니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용골대가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이 상한 도르곤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됐네.”
도르곤은 차가운 시선으로 용골대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상대를 보고 겁부터 내면 어떻게 싸워서 이길 수 있겠나!”
“…….”
충심忠心을 몰라주고 겁쟁이 취급을 하자 용골대는 얼굴을 붉혔다.
그걸 보고서도 도르곤은 모르는 척하며 휘하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진채를 다 구축하고 내일 날이 밝는 것과 함께 성을 공격한다. 길게 끌 것 없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공세를 퍼붓도록 하라!”
“옛!”
도르곤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영원성 문루에 세워져 펄럭이는 황금 봉황 깃발을 매섭게 노려봤다.
☆ ☆ ☆
무거운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하루가 가고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명령 내린 대로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지어 먹은 청군은 동이 트는 것과 함께 진영 앞 벌판에 대형을 갖춰 늘어섰다.
조선군도 청군의 움직임이 수상한 걸 감지하고는 병사들을 모두 성벽 위로 올려 보내 방어태세를 갖췄다.
병사들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비교적 차분한 모습으로 각자 자기 위치에서 전투에 대비했는데 문루에 서 있던 도현은 그걸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군.”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말을 받았다.
“잘 훈련된 정예병들인 데다 무엇보다 폐하께서 함께하시니 사기가 높을 수밖에요.”
“마지막까지 지금 모습을 그대로였으면 좋겠군.”
“그럴 것이옵니다.”
그때 함께 있던 장수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폐하, 이제 청군이 집결을 거의 다 끝마친 것 같은데 이쯤에서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흐음.”
고개를 돌려 거리를 가늠해 본 도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포병대에 지시해 적진에 불벼락을 안겨 주라고 하라.”
“옛.”
뒤에 있는 청군 진영을 힘들어도 앞으로 나와 전투대형을 만들고 있는 병사들은 사정거리가 가장 긴 충무포로 타격이 가능해 보였다.
여전히 이천 보가 넘어서 최대 사정거리 밖이었으나 조선군의 화포들이 높다란 성벽 위에 놓여 있다는 이점을 감안하면 한번 시도해 볼 만했다.
설사 포탄이 닿지 않는다고 해도 조선군 화포의 위력을 보여 상대를 위축되게 만들 수 있으니 절대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발사!”
군관의 우렁찬 구령에 장전을 끝내 놓고 대기하던 충무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사전에 연습 사격을 통해 사격 재원을 정확하게 알아 둔 데다 때마침 바람까지 잠잠해 포탄은 원하는 곳으로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슈우우웅~!
“어어…….”
“헉!”
“포, 포격이다!”
갑작스러운 파공음에 고개를 든 적병들은 하늘을 가르며 포탄이 날아오는 걸 보고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설마 하며 쳐다보는 사이 포탄은 전투대형 한가운데 떨어져 폭발했다.
꽈아앙!
“으아악.”
“커헉.”
대형 곳곳에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고 주위에 있던 적들이 사방으로 부려진 날카로운 파편에 맞아 비명을 내질렀다.
포탄이 여기까지 날아올 거라고 전혀 상상조차 못 하고 있던 청군은 삽시간에 큰 혼란에 빠졌다.
“피, 피해!”
“살려 줘.”
우왕좌왕하는 적군의 머리 위로 또다시 포탄 세례가 날아들어 피해를 더욱 키웠다.
천리경으로 적진을 살피던 도현은 뿌옇게 피어오르는 연기들을 보며 만족한 듯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깜짝 놀랐을 거야.”
“아군 화포의 사정거리가 이렇게 길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그럴 겁니다.”
남두병 사령관도 포병대의 활약에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이럴 때 기병대를 내보내 공격을 가했더라면 더 큰 효과를 얻었을 텐데 조금 아쉽사옵니다.”
박영식 장군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도현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충격을 주기는 했으나 아직 적이 건재하고 팔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있는데 무리하게 승부를 걸 필요는 없지. 기병대는 지금 쓸 것이 아니라 나중을 위해 아껴 둬야 할 것이야.”
“예.”
도현이 뭘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박영식 장군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수긍했다.
“그것보다 청군의 사기를 꺾어 놓을 수 있도록 포탄을 아끼지 말고 더욱 두들기라고 해.”
“바로 명령을 전달하겠사옵니다.”
충무포들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적진을 향해 불을 뿜어 댔다.
쿠쿵! 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던 도르곤은 예상치 못한 일격에 경악했다.
이히힝.
귀를 때리는 폭음과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파에 놀라 날뛰는 말을 겨우 진정시킨 그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대형을 보고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런!”
포탄 한 발이 터질 때마다 청군 대형을 뒤흔들어 놨고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형편없이 찢겨 나갔다.
그걸 본 도르곤은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우리 대포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대응 사격을 하라.”
그러자 장수 한 명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뭘 머뭇거리는 거야!”
“포탄이 닿지 않는 거리라 쏠 수가 없사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죄송하옵니다.”
“에잉.”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개량한 홍이포라면 조선군이 가진 화포와 충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도르곤이었기에 지금 상황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선군 화포들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더 길게 날아오는 것 같사옵니다.”
눈치를 보던 만월개가 애써 달랬지만 그는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조선군의 포격에 청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보다 못한 용골대가 도르곤을 보며 말했다.
“폐하, 지금으로서는 공격을 시작하기 어려우니 일단 병사들을 화포 사정거리 밖으로 후퇴시키시지요.”
“끄으응.”
후퇴를 권유하는 말에 도르곤은 미간을 좁혔다.
공성전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일격을 받고 물러서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이대로 계속 포화를 뒤집어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도르곤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후퇴 명령을 내려야 했다.
“뒤로 물러서라고 해!”
짜증스럽게 내뱉는 말에 용골대는 서둘러 대기 중인 군관에게 손짓을 했다.
잠시 뒤 후퇴를 알리는 북이 울리며 깃발이 휘날렸다.
쏟아지는 포격에 전투대형이 흐트러진 건 물론이고 우왕좌왕하며 뒹굴던 청군 병사들은 후퇴 신호에 앞을 다퉈 진채로 물러섰다.
서로 밀치면서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도르곤의 화를 돋웠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피해를 입히기 위해 조선군이 끈덕지게 포격을 해 댔으나 최대 사정거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던 상태라 청군이 뒤로 물러서자 적을 살상하는 대신 애꿎은 흙먼지만 피워 올렸다.
그러자 조선군은 포격을 바로 중단했다.
포성이 잦아들고 시야를 가리고 있던 희뿌연 포연이 흩어지자 참혹하게 변한 전장이 드러났다.
방금 전까지 청군이 잔뜩 모여 있던 벌판은 시커멓게 그을리거나 땅이 뒤집혀 있었고 넉넉잡아 천 명은 넘는 듯한 사상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성벽 위에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그걸 보고 병장기를 머리 위로 치켜들며 주위가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꼴좋다.”
“다 박살 내 줄 테니 어디 또 덤벼 봐.”
“하하하하.”
포병대의 활약으로 서전을 멋지게 승리로 장식하고 아군의 사기를 높인 도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을 한 채 뒤로 몸을 돌려 문루에 있는 장수들을 봤다.
“일단 기선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존심이 크게 상한 도르곤이 곧 총공세를 펼칠 테니 대비를 단단히 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이어서 몇 가지 더 지시를 내린 도현은 성 밖에 있는 청군 진영을 한 번 바라본 뒤 문루를 내려갔다.
한편 병력을 뒤로 물리고 상황을 수습 중 청군 진영에서는 도르곤의 지휘 막사에서 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꽝!
“성벽 근처에도 못 가 보고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주먹으로 앉아 있는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고 목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에 장수들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이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던 적도 있었으나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그것도 도현한테 패했다는 사실에 그는 더욱 분노했다.
지휘 천막 안 분위기가 살벌하게 내려앉은 가운데 도르곤의 노호성이 계속 이어졌다.
“백번 양보해서 화포 성능이 떨어져 맞대응을 못했다고 해도 오늘 보여 준 병사들의 추태는 뭐냔 말이야. 포격에 우왕좌왕하다가 바로 대형을 무너뜨리다니 이래 가지고 짐의 군대라고 할 수 있겠나.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봐!”
“면목이 없사옵니다.”
쏟아지는 질책에 장수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도르곤의 눈치만 봤다.
그런 가운데 도총관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의 사정거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소신들의 실책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눈치를 보던 다른 장수들도 용골대의 말에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도르곤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화를 약간 가라앉혔다.
“서양 선교사들이 개량한 홍이포라면 조선군 화포와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다고 하더니……. 에잉!”
짜증 섞인 도르곤의 말에 용골대가 차분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고부리성에서는 조선군 화포에 밀리지 않았으니 거짓은 아니라 생각하옵니다. 다만…….”
“다만 뭔가?”
“우리가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홍이포를 개량하는 동안 조선도 새로운 화포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걸 간과한 것이 오늘의 패인이옵니다.”
“으음.”
뼈아픈 지적에 도르곤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건데 그걸 놓치고 방심했으니 이런 꼴을 당하는 건 당연했다.
“결국 조선군의 화포를 이길 수 없다는 건가?”
약간 처진 목소리로 도르곤이 중얼거리자 용골대가 말을 받았다.
“높은 성벽 위에서 포를 쏴 사정거리가 늘어난 걸 감안하면 전체적으로 조선군의 새로운 화포와 홍이포의 성능 차이는 크지 않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하지만 당장 성을 공략해야 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크나큰 약점이 될 것이옵니다. 아군 화포들이 나설 조짐이 보이면 바로 조선군의 먹잇감이 될 테니 병사들이 맨몸으로 포화를 이겨 내고 성벽까지 달려가야 될 상황이옵니다.”
용골대의 말에 도르곤은 물론이고 장수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청군 포병대가 영원성에 타격을 가하려면 이천 보 안으로 접근해야 되는데 사정거리의 차이를 확인한 상태에서 그러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보나 마나 제대로 방열을 끝내지도 못하고 조선군의 포화를 뒤집어쓰고 지리멸렬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포격 지원 없이 병사들을 성으로 돌격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여러 번 경험을 했듯이 포화 세례와 성벽에서 가해질 총격과 화살 비를 뚫고 돌격을 감행하는 건 엄청난 피해를 각오해야만 됐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막상 성벽에 도달한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예봉이 꺾여 성을 제대로 공략하기 힘들었다.
점점 꼬여 가는 상황에 도르곤은 얼굴을 구겼다.
“미치겠군.”
“아까 보니 진채 근처까지 포탄을 날릴 수 있는 화포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사옵니다. 그러니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포격전을 벌이면 승산이 있지 않겠사옵니까.”
야골타의 말에 용골대가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그걸 지금 의견이라고 내놓는 건가.”
“지금 뭐라고 했소!”
“운이 좋아 새로운 화포를 다 제거한다고 쳐도 그 뒤에 남아 있는 조선군 포대는 뭐로 상대를 하겠다는 건가!”
“그건…….”
발끈하던 야골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용골대가 지적하자 크게 당황하며 머뭇거렸다.
“설마 조선군이 영원성에 화포를 겨우 이 정도만 배치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크흠.”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찾지 못한 야골타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며 도르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나?”
그러자 몸을 앞으로 해 도르곤과 시선을 맞추면서 용골대가 진지한 어투로 의견을 말했다.
“송구스러운 말이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정면 대결은 어렵사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도르곤도 수많은 전쟁을 경험하고 승리로 이끈 뛰어난 지휘관인 만큼 현실을 빨리 인정했다.
“화포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성을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은 야간 전투라고 생각되옵니다.”
“밤에 성을 치자는 건가?”
“예. 어두운 밤이라면 조선군도 제대로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아 아군을 공격하는데 어려움이 클 테니 어느 정도 약점을 메울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야간 전투라…….”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을 하던 도르곤은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럴듯한 것 같군. 총병관.”
“하교하시옵소서, 폐하.”
살짝 고개를 숙인 장수들을 쓸어 보며 도르곤이 지시를 내렸다.
“전열을 재정비한 뒤 해가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공격을 재개하고 포병대는 전투가 시작되면 조선군이 가진 새 화포를 최대한 많이 제압하도록 하라!”
“옛.”
☆ ☆ ☆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자 앞으로 벌어질 치열한 전투를 미리 예언이라도 하듯 노을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면서 서서히 졌다.
어둠이 깔리자 영원성 성벽 위에는 하나둘 화톳불이 밝혀졌다.
서전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뒀지만 조선군은 방심하지 않고 경계병을 충분히 세워 청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오늘따라 달도 안 나오는구먼.”
총검이 꽂힌 소총을 어깨에 둘러맨 남자의 말에 함께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게.”
“오늘은 더 이상 전투가 없겠지?”
“아까 군관 어른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청나라 놈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고 했잖아.”
“에이, 그거야 한눈팔지 말고 근무를 제대로 서라고 그러는 거고. 아침에 그렇게 혼쭐이 났는데 또 덤비려고.”
“하긴 그것도 그래.”
무료함을 달랠 겸 병사들이 소곤소곤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망루 쪽에서 갑옷을 입은 군관 한 명이 나타났다.
“근무 중에 웬 잡담이냐!”
나지막한 군관의 호통에 병사들은 찔끔한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헉.”
“경계를 제대로 서지 않으면 네놈들 목숨만 잃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전우들까지 다 위험하게 만드는 걸 모른단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허튼짓하지 말고 똑바로 근무를 서도록 해.”
“옛.”
혼쭐이 난 병사들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서서 전방을 주시했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고 있다가 군관이 막 돌아서 순찰을 계속하려고 할 때 병사 중 한 명이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몸을 돌린 군관의 물음에 병사는 한쪽 팔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기 좀 보십시오.”
“뭘 보라는 거야?”
어두운 정면을 바라보며 군관이 미간을 찌푸리자 병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해자 너머에 뭐가 꾸물꾸물 움직이지 않습니까?”
눈에 힘을 주며 한참을 쳐다보자 정말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
얼굴을 굳힌 군관은 병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황급히 망루로 뛰어갔다.
“정말이군. 잘 발견했어.”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포대에서 신기전 하나가 발사됐다.
쉬이이익.
길게 꼬리를 끌면서 하늘 높이 솟구친 신기전은 공중에서 폭발하면서 환한 빛을 뿜어냈다.
퍼엉!
병기창에서 만들어 낸 여러 가지 물품 중에서 광신기전光神機箭이라 불리는 거였는데 일종의 조명탄이었다.
폭발과 함께 비단으로 만든 낙하산이 펼쳐진 상태에서 붉은 화광을 만들어 내 주위를 밝게 만들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광경이 모두 드러났는데 은밀히 성으로 접근하던 청군도 발각됐다.
습격 부대를 이끌던 청군 장수 토차구는 갑자기 생전 처음 보는 광신기전의 모습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들이 들킨 걸 깨닫고는 와락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젠장! 돌격하라.”
“와아아!”
얼굴과 병장기를 온통 숯으로 까맣게 칠한 청군 병사들은 돌격 지시에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뛰어갔다.
어둠 속에 숨어서 어느새 백 보 안까지 접근해 있던 청군은 거센 파도처럼 영원성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조선군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청군의 공격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성벽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소총과 화살을 쏴 대응했고 이내 화포들도 불을 뿜었다.
“적이다!”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
타탕! 탕탕! 탕!
퍼퍼퍼펑!
언제든지 화포를 쏠 수 있도록 미리 장전되어 있었기에 포수들은 고각만 조정한 뒤 바로 포탄을 날렸다.
돌격해 들어오는 청군 대열에 포탄이 떨어져 시뻘건 불기둥을 만들었고 포수들이 재빨리 이탄을 장전하려할 때 상대의 대응 사격이 시작됐다.
슈우우웅.
“적탄이 날아온다.”
“모두 엎드려.”
콰꽝!
단단한 바위로 벽을 쌓고 거기다 완충재로 황토를 두껍게 발라 만든 포대임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터지는 충격에 바닥이 흔들리고 머리 위에서 돌 조각이 떨어졌다.
“이거 포대를 제대로 맞힌 모양인데요.”
포수 한 명이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군관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우리 쏘는 포구 화염을 보고 방향을 잡는 모양이군.”
군관의 짐작이 정확했다.
처음부터 조선군 화포를 제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청군 홍이포들은 가만히 기회를 엿보다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포구 화염을 보고 그걸 목표로 사격을 퍼부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포수들이 있다고 해도 시야가 제한되는 밤에 이처럼 정확한 사격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두꺼운 벽이 막아 주고 있어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계속해서 이렇게 두들겨 댄다면 포대가 견뎌 낼 수 있다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몸을 일으킨 군관은 바닥에 엎드려 있는 포수들을 보며 일갈했다.
“포대 벽이 막아 주고 있는 한 괜찮으니까. 어서들 일어나!”
그러고는 포구 구멍으로 바깥을 내다보면서 힘차게 말했다.
“우리가 당하기 전에 적들을 먼저 박살 내 버리는 거야!”
머리를 끄덕이며 용기를 낸 포수들은 언제 겁을 냈냐는 듯이 화포에 달라붙어서 각자 맡은 일을 수행했다.
“까짓것, 누가 먼저 뒈지는지 한번 해 보자고.”
“그래.”
목표를 바꾼 조선군 포대는 상대와 똑같이 포구 화염을 노리고 포탄을 쐈다.
“거리 육백 보. 그래 조금 더 고각을 올려. 좋아. 발사!”
꽝!
다시 육중한 포성이 포대 내부를 울렸고 포수들은 흙먼지가 떨어지고 바닥이 흔들려도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렇게 양군 포병들은 서로를 침묵시키기 위해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성벽을 두고 보병들끼리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시작되며 전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거처에서 지도를 펴 놓고 청군을 상대할 방법을 고심하던 도현은 밖에서 들리는 포성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간 도현은 난간 쪽에 몸을 기대고 포성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아래 재와 연기를 내뿜으며 화마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혀를 날름거리듯 불꽃이 일렁거리는 가운데 산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크고 작은 포성이 이어졌다.
아침에 당해 놓고 불과 하루도 안 돼 다시 쳐들어오다니.
설마 이리 급하게 들이닥칠 줄은 몰랐기에 도현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런…….”
혀를 차며 돌아서려는 찰나, 칠현이 마당을 가로질러 뛰어왔다.
“폐하!”
“어서 말을 준비해. 문루로 갈 것이다!”
“예, 예!”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바로 지시를 내리는 도현에게 칠현이 얼른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다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도현은 구름이 짙게 낀 가운데 붉게 물든 하늘을 곁눈으로 흘겨보고선 곧장 갑옷을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갑옷의 매듭을 묶는 도현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너무 방심했군.”
이빨 자국이 나도록 입술을 잘근 깨물곤 세워 둔 검을 거칠게 낚아챘다.
밖에선 이미 칠현이 도현의 애마를 끌고 와 대기하고 있었으며, 친위대 위사들 또한 완전 무장한 상태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휙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가볍게 안장에 올라탄 도현은 칠현에게서 말고삐를 넘겨받은 뒤 짧게 내뱉었다.
“가자.”
“예!”
두두두두.
급한 마음을 보여 주듯 도현과 친위대 위사들이 탄 말은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어두운 거리를 질주했다.
문루에 도착하니 먼저 와 있던 남두병 사령관과 장수들이 내려와 도현을 맞이했다.
“오셨사옵니까.”
군례를 취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에게 도현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찌 된 상황인가?”
“적들이 충무포를 피해 야습을 가해 왔습니다.”
“으음.”
도현은 말없이 작게 혀를 차고 성가퀴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든 병사들이 도현을 호위하듯 정면을 감쌌고, 그 틈바구니 사이로 팔을 슬쩍 밀어 주변을 둘러본 그는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인상을 썼다.
개미 떼처럼 성벽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청군의 모습에 도현은 몸을 가려 주고 있는 방패 모서리를 꽉 움켜쥐며 말했다.
“적이 총공세로 나서기 전에 기세를 꺾어 놔야 된다. 어서 병력을 더 투입해 방어를 단단히 굳혀라!”
“옛.”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뒤에 있던 군관 한 명이 급히 문루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다시 고개를 돌린 도현은 굳은 얼굴로 전황을 살폈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생각지 못한 기습을 당했으나 다행히 빨리 알아차린 데다 해자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덕분에 청군이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어 방어선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날카로운 병장기를 번뜩이면서 밧줄과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을 기어 올라오는 청군의 기세가 상당히 사나웠다.
황급히 사다리를 밀어내고 밧줄을 끊으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조선군의 지원 병력이 도착했다.
사전에 지정받은 방어 구역으로 뛰어간 병사들은 허둥거리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고는 군관의 구령에 맞춰 사격 자세를 취했다.
“조준. 쏴!”
타타타탕! 타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성가퀴 사이로 내밀어진 총구에서 화염이 번쩍였다.
집중사격을 받은 청군은 피를 뿌리면서 그대로 성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아악!”
“컥.”
재차 이어진 총격에 또다시 많은 숫자의 적들이 쓰러지자 남은 청군들이 주춤거렸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까 봐 겁을 먹은 거였다.
적들도 소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선군의 총탄 세례에 제대로 응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엄폐물을 찾아 몸을 숨기기 급급했다.
가뜩이나 해자 때문에 전력을 다 투입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봉이 꺾이자 청군의 공격은 더욱 무뎌졌다.
한편 양군 포병대의 대결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초반 포구 화염을 이용한 표적 사격에 조선군이 주춤했지만 곧장 반격에 나서 똑같은 방법으로 청군을 공격했다.
그러자 두꺼운 벽에 둘러싸여 보호받는 조선군과 달리 사방이 트인 개활지에서 맨몸으로 포화를 견뎌 내야 되는 청군 포병대가 절대적으로 불리해졌다.
아무리 포구 화염을 보고 사격을 한다지만 어둠 속이라 포격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조선군은 그걸 집중사격으로 극복했는데 목표 하나에 무려 다섯 문의 화포가 포탄을 퍼부었다.
다섯 발의 포탄이 넓게 퍼져 터지자 명중탄이 나오지 않아도 포수들이 파편에 찢겨 나가면서 포대가 제압당했다.
운이 좋아 포수들이 살아남아도 옆에 쌓아 둔 화약통과 포탄에 불꽃이 튀어 유폭을 일으켜 포대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는 경우까지 있었다.
결국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청군 포병대가 먼저 손을 들었다.
청군의 포격이 중단되자 조선군 포대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이번에는 적 보병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조란탄 준비!”
포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적진을 살피는 군관의 외침에 포수들은 재빨리 작열탄 대신 인마 살상용 조란탄으로 포탄을 바꿔 장전했다.
“장전 끝!”
“쏴!”
꽈꽝! 꽝! 꽝!
군관의 명령에 포수가 격발기와 연결된 줄을 힘껏 잡아당기자 포대에 설치되어 있던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러고는 거의 동시에 성벽을 오르려던 청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끄아악!”
“꾸엑.”
조란탄이 연이어서 발사되고 거기에 화살과 탄환 세례까지 쏟아지자 야습을 시도했던 청군은 만신창이가 된 채 허겁지겁 다시 해자를 건너 후퇴했다.
그런 적을 보며 문루에서 전투를 지휘한 도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이어 또다시 청군을 보기 좋게 격퇴했지만 경계병들이 제때 야습을 알아차리지 않았더라면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됐을 거였다.
성벽 아래 버려진 수많은 시신들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몸을 뒤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남 사령관.”
“예, 폐하.”
“부상자들을 뒤로 빼 치료해 주고 청군이 또다시 공격을 감행할지 모르니 예비 병력과 교체해 계속 갑호 경계 상태를 유지토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이런저런 지시를 더 내린 도현은 남두병 사령관에게 지휘를 맡기고는 호위병만 거느리고 직접 성벽을 둘러봤다.
휴식을 취하다가 갑자기 달려 나와 전투를 치러야 했던 병사들은 조금 피곤한 기색이었으나 그래도 승리를 거뒀기에 다들 표정이 밝았다.
초반에 청군 포병대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포대들도 다행히 외벽에 바른 황토 흙만 조금 벗겨졌을 뿐 모두 건재했다.
지쳐 있던 병사들은 황제인 도현이 와서 잘 싸웠다고 다독여 주며 다친 이들을 챙겨 주자 크게 감격했다.
연이은 승리로 기세를 올린 조선군과 달리 또다시 패배를 당한 청군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한 시진이 채 안 되는 짧은 전투에 무려 사천 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발생한 것도 큰 타격이었지만 무엇보다 홍이포를 열일곱 문이나 망실한 것이 뼈아팠다.
당연히 도르곤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청군 지휘막사에서는 밤새 고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비록 실패했지만 긴 사정거리를 가진 충무포를 피하기 위해서는 야간 전투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청군은 그 뒤로도 계속해 밤마다 공격을 해 왔다.
물론 전술의 변화도 있었다.
아무리 힘들게 성 가까이 접근해도 앞을 가로막고 있는 해자 때문에 전력을 집중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청군은 병사들을 돌격시키며 각자 흙을 담은 주머니를 한 개씩 들고 가게 해서 해자를 메우기 시작했다.
상당히 위험한 작업이었으나 성벽을 제대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꼭 선행해야 되는 일이었다.
청군 지휘부는 정예인 팔기군과 향용병을 뒤로 빼고 대신 새로 충원된 죄수 부대를 이 일에 앞장 세워 해자를 메우는 것과 동시에 조선군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아군의 힘을 빼려는 속셈인 걸 도현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쳐들어오는 걸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병력을 세 개로 나눠 최대한 휴식을 취하게 해 주면서 적을 상대했다.
그러는 사이 성벽과 해자 주변은 적군의 시신으로 가득 찼고 어느새 공성전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어갔다.
영원성에서 양군이 서로 밀고 밀리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바다 건너 산동 반도 끝에 위치한 대련에서 이번 전쟁의 흐름을 일거에 바꿀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련 앞바다에 위치한 정박지에는 한 달 전부터 모여든 조선군 군함과 수송선들이 해역海域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단연 함대 중앙에 떠있는 여섯 척의 치우 급 전함들이었다.
무려 백여 문에 육박하는 화포를 탑재하고 바다 위의 성채라 불리는 거대한 전함이 여섯 척이나 나란히 정박해 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성을 내뱉게 만들었다.
기함 함교에 서서 세계 최강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함대를 둘러보는 수군통제사 손억기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통제사 어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손억기가 몸을 돌리자 수전에 맞게 약식 갑옷을 입은 부관이 서 있었다.
“뭔가?”
“장수들이 다 모였습니다.”
“알겠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손억기는 함교를 내려가 갑판 아래에 위치한 기함 회의실로 향했다.
수십 척의 대함대를 지휘하는 곳답게 회의실은 덩치 큰 장수들이 이십여 명 넘게 들어가 앉아 있어도 여유가 있을 만큼 넓었다.
하지만 황제인 도현이 직접 하사한 커다란 군기가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장식품 없이 수수했다.
회의실 한가운데 놓인 기다란 탁자 양옆으로 종사품 만호 이상 수군 지휘관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덜컹.
문을 열고 손억기가 들어서자 지휘관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갖췄다.
“어서 오십시오, 장군.”
“이거 내가 좀 늦었군.”
“아닙니다.”
“다들 앉게.”
“예.”
평소에는 절도사급만 모여 회의를 했지만 오늘은 중대한 일을 앞두고 있었기에 특별히 참석자 수를 늘렸다.
잠시 가볍게 참석자들과 담소를 나누며 분위기를 푼 손억기는 이내 약간 굳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출전 준비는 다 끝났나?”
그러자 근위 전용함인 봉황함 함장에서 경기 수사로 승차한 이충민이 상석에 앉은 손억기를 보며 대답했다.
“예. 물자 보충도 다 끝냈고 군선들도 모두 집결해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출전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육전대는 어떤가?”
손억기의 시선을 받은 육전대 지휘관 김진석 장군 역시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했다.
“우리 역시 승선 명령만 내려지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손억기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참아 왔던 분노를 마음껏 내보일 때가 왔네.”
그 말을 들은 주변 지휘관들의 눈동자에 일순 생기가 감돌았다.
“그럼……?”
“황제폐의 출전 명령이 떨어졌네!”
“드디어……!”
누군가의 탄성어린 외침과 더불어 기대감에 들뜬 분위기로 좌중이 술렁거렸다.
한쪽 팔을 들어 흥분한 지휘관들을 진정시킨 손억기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내일 날이 밝는 것과 함께 출전한다. 목표는 청군의 보급 집결지인 당산唐山이다!”
대부분 공격 목표가 어디인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대신 동아시아의 패권이 달린 전쟁에서 드디어 수군의 힘을 보여 줄 때가 됐다는 것에 잔뜩 고무된 표정이었다.
“당산을 점령해 전장으로 가는 보급선을 끊어 청 황제의 목줄을 조이는 것이 이번 작전의 목표다. 이번 상륙 작전의 성공 여부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으니 다들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될 것이야!”
“충!”
묵직한 군호로 대답을 대신하자 듬직하다는 눈빛으로 지휘관들을 바라본 손억기는 부관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관이 회의실 한쪽에 서서 대기하던 군관들과 함께 단단히 밀봉된 봉투를 지휘관들한테 나눠 줬다.
“각자 맡은 임무가 소상히 적힌 작전 계획서일세. 확실히 숙지한 다음 외부로 유출되지 않게 잘 간수해야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부관.”
“예.”
“전체적인 작전을 설명해 주도록 해.”
의자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대면서 손억기가 말하자 부관은 뒤편 벽에 걸려 있는 천을 걷어 냈다.
천이 치워지자 발해만을 가운데 두고 주변 지역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게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환기시킨 부관은 기다란 지시봉을 들어 지도를 가리키면서 작전 개요를 설명했다.
“본 함대는 통제사께서 말씀하신대로 내일 아침 여명과 함께 정박지를 출발해 이틀 뒤 이곳 낙정樂亭에 상륙해 교두보를 만들고 곧장 당산을 공략할 것입니다. 주작단의 정탐 보고에 의하면 발해만 인근에 이렇다 할 청국 수군이 없지만 만약을 대비해 쾌속선들이 본대에 앞서 길을 열며 주위를 정리할 겁니다.”
적진에 상륙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상대가 대응할 여유를 주지 않는 거였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육전대가 낙정에 교두보를 확보하면 수송 함대가 대련에서 대기 중인 부대들을 추가로 실어 날라 당산과 인근 지역을 쳐서 점령지를 넓혀 나갈 것입니다.”
“그럼 상륙군을 수송하는 걸로 우리 함대의 임무는 끝인 건가?”
경상수사인 배동만이 수군의 역할이 제한적인 것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자 손억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부관 대신 말을 받았다.
“그건 내가 이야기를 하지. 육전대를 내려 주고 해상 수송로가 완전하게 확보되면 치우 급 전함들을 포함한 본대는 곧장 북진을 해서 산해관에 있는 청군한테 조선 수군의 무서움을 보여 줄 것일세.”
기마 민족인 청나라의 특성상 제대로 된 함대가 없어 전공을 세우기가 어려웠던 지휘관들은 손억기의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을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수군의 힘으로 무너뜨리는 것이지.”
“산해관이라……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습니다.”
잔뜩 들뜬 지휘관들의 모습에 손억기는 수장답게 묵직한 음성으로 중심을 잡았다.
“우선은 당산을 함락해 청군의 보급을 차단하는 것이 우선이니 그것에 집중해야 될 걸세.”
“물론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잠시 뒤로 빠져 있던 부관이 다시 나서며 설명을 이어 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낙정에는 향용병 천 명을 제외하고는 위협이 될 만한 군세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군의 상륙이 알려지면 당산에 있는 수비대 이만과 주변 군현에서 지원 병력이 몰려올 수 있으니 그 전에 최대한 빨리 교두보를 확보해야 될 것입니다.”
“김 장군, 가능하겠나?”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두 쏠린 가운데 김진석은 어깨를 펴며 자신 있게 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여차하면 다른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당산을 점령해 보이겠습니다.”
“든든하군. 하나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아도 적을 만만하게 보고 방심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야.”
“예.”
“그럼 혹시 빠뜨린 것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내일부터 힘든 전투에 나서야 되니 병사들을 일찍 재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참석자들의 얼굴에서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건 도현이 등극한 이후 단 한 번도 해전에서 패하지 않으며 왜국을 정벌하고 멀리 남중국해까지 영역을 넓힌 조선 수군의 자신감이었다.
다음 날 조선 함대는 붉게 떠오르는 새벽, 여명과 함께 천천히 정박지를 나와 넓은 바다로 나왔다.
팔십여 척에 달하는 대소 군선들이 거대한 함대를 이뤄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 ☆ ☆
이틀 뒤 조선 함대는 계획대로 낙정 앞바다에 도착했다.
중간에 고기잡이를 나온 배들과 조우할 때마다 한 척도 놓치지 않고 모두 나포해 정보가 새어 나가는 걸 철저히 차단했기에 함대가 육지 근처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조선군의 움직임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기가 낙정이군.”
통제사 손억기는 기함 함교에서 천리경을 가지고 멀리 보이는 해안을 천천히 살펴봤다.
야트막한 언덕들을 뒤로 두고 넓게 펼쳐진 해안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지 아무런 인적이 없었다.
“통제사 어른, 상륙 준비가 다 끝났다고 합니다.”
부관의 말에 천리경을 눈에서 뗀 손억기는 신형 판옥선들과 함께 함대 선두로 나와 있는 수송선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명령을 내렸다.
“언제 청군이 소식을 듣고 잔뜩 몰려올지 모르니 꾸물거릴 여유가 없지. 상륙 지시를 내리게.”
“옛.”
부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기함 돛대에 신호 깃발이 오르자 대기 중이던 배들이 천천히 함대를 빠져나와 해안으로 향했다.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라 해안 깊숙이 접근할 수 있는 신형 판옥선 다섯 척이 먼저 병력을 잔뜩 태우고 돌입했다.
끼이익.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뱃머리가 모래톱 위에 올라서자 곧장 선체 측면에 잔교와 밧줄이 내려지며 병사들이 해안에 발을 디뎠다.
첨벙.
“빨리 움직여!”
함께 상륙한 군관의 독촉에 육전대 병사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해 사각 방패를 앞에 세우고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헤치고 대형을 갖춰 앞으로 뛰어갔다.
밀려오는 파도에 갑옷이 흠뻑 젖고 발이 모래에 푹푹 빠졌지만 극도의 긴장감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다행히 판옥선에서 내린 선발대가 해안에 임시 교두보를 확보할 때까지 청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 함대는 수송선을 해안 가까이 대고는 본격적인 상륙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일단의 병력이 교두보를 떠나 현청과 향용병 주둔지가 있는 현성으로 빠르게 진격했다.
☆ ☆ ☆
만 단위가 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답게 현성은 제법 높다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아직도 조선군이 상륙한 사실을 모르는지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육전대 지휘관 중 한 명인 장재균은 언덕 뒤에 숨어 그걸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이거 생각보다 쉽게 일을 끝낼 수도 있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성문을 열어 놓고 경비도 달랑 두 명만 세워 놓은 걸 보면 아직 우리가 온 걸 까맣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바로 공격한다.”
“예.”
언덕 밑에서 대기 중이던 부하들과 합류한 장재균은 말 위에 올라 허리에 찬 장검을 뽑아 들었다.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고 현성을 장악한다.”
“와아!”
말 옆구리를 군홧발로 가볍게 차며 장재균이 힘껏 소리를 질렀다.
“돌격!”
두두두두!
땅을 박차며 장재균이 탄 군마가 달려 나가자 육전대 소속 기병 육백여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뒤를 따랐다.
여느 때처럼 지겨운 얼굴로 성문을 지키고 있던 청나라 병사 둘은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희뿌연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자 의아한 표정으로 두 눈을 껌뻑였다.
“뭐, 뭐지?”
“글쎄.”
설마하니 조선군이 산해관 후방에 위치한 이곳까지 왔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빠르게 다가오는 기마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푸른색 바탕에 삼족오가 수놓인 커다란 깃발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대경실색했다.
“저건!”
“왜 그래?”
“조, 조선군이야.”
“그럴 리가…… 헉!”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화들짝 놀란 적병들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허둥지둥 등을 보이며 성안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온 편전에 몇 발 떼지도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엎어졌다.
쉬이익.
퍽!
등자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서서 말을 달려가는 채로 편전을 쏜 장재균은 각궁을 안장 옆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다시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하아!”
말을 탄 패 그대로 성문을 통과한 기병들은 사전에 주작단을 통해 입수한 지도대로 두 갈래로 나뉘어서는 현청과 향용병 주둔지로 달려갔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적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조선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죽어라!”
“하압!”
서걱.
기병들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를 뿌리면서 적들이 쓰러졌다.
양 떼 사이에 뛰어든 굶주린 늑대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마구 휘둘러 대는 조선군에 상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몇몇 청군 군관들이 나와 부하들을 독려해 맞서 싸우려고 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온몸을 난자당했다.
그러자 청군 병사들은 무기도 다 내버리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투가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상대를 쓸어버린 조선군은 성안으로 들어온 지 일각도 채 되지 않아 현성을 완전히 장악했다.
다른 지역도 이와 비슷했는데 조선군이 얼마나 신속하고 거침없이 진격하는지 해안에 인접한 세 개 현이 점령당할 때까지 당산에 있는 청군이 이런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사이 대련에서 대기 중이던 후속 병력과 장비들을 모두 수송해 온 조선군은 본격적으로 진격을 시작해 청군의 보급 집결지인 당산 코앞까지 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당산을 지키던 청군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조선군이 어디까지 도착했다고?”
당산성주인 화춘의 말에 장수 한 명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성 밖 오십 리 지점까지 왔다고 합니다.”
“적이 거기까지 오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니 자네들은 도대체 뭣들 하고 있었단 말인가!”
방심하고 있다가 일격을 당한 건 화춘 성주도 마찬가지였지만 가뜩이나 분위기도 안 좋은 상태에서 화난 데 기름을 뿌릴 필요는 없었기에 모여 있는 장수들은 그저 죄인처럼 고개만 숙였다.
“상대가 허를 제대로 찌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조선군이 바다를 건너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측근 장수인 언태영의 말에 화춘은 얼굴을 구긴 채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응.”
짜증이 났지만 여기서 더 화를 내 봤자 결국 해안을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는 걸 아는 것이다.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우선 지금은 눈앞에 닥친 조선군을 막아 내는 것이 먼저이지 않겠습니까?”
수긍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화춘 성주는 아까보다 수그러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진격해 오는 조선군 병력이 얼마라고 했나?”
“정확하게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최소 이만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만이라…….”
상당히 애매한 숫자였다.
병력 차이가 많이 난다면 다른 방법을 고려해 볼 수 있었으나 이 정도는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설사 상대가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왔더라도 친정군을 지원하는 보급품이 전부 모여 있는 당산성을 잃는다면 분노한 도르곤이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기에 무조건 여길 지켜 내야 됐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화춘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수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언 장군.”
“예.”
“당장 북경과 주변 성에 전령을 보내 현재 상황을 알리고 속히 지원 병력을 보내 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다른 장수들은 즉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적과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도록 해!”
“네.”
대답은 했지만 과연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성을 지켜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에 다들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당산성 주둔 병력은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급품을 관리하고 옮기는 것이 주 임무였기에 향용병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고 체력이 떨어지는 이선 급 병사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런데 아무리 기습을 받았다고 해도 세 개 현을 삽시간에 휩쓸어 버린 조선군을 막아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더군다나 산해관과 달리 후방에 위치한데다가 도르곤이 조선을 치기 위한 보급 거점으로 정하기 전까지 흔한 지방의 작은 성에 불과했던 당산은 성벽이 그리 높지 않았다.
부랴부랴 목책을 세우며 성벽을 보강했지만 이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구구, 나 죽네!”
작업하는데 필요한 목재를 수레에 담아 옮기던 청군 병사 하나가 앓는 소리를 내며 돌 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뭔가 했더니 엄살 부리기는…….”
“어허, 누가 엄살이래. 이것 봐 봐. 손바닥이 다 부르터서 아파 죽겠다고!”
원래부터 계집처럼 보드라운 손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험한 일을 하다 보니 굳은 살 위로 새로 생채기가 생겨 엉망진창이었다.
“제기랄. 내가 무슨 덕을 보자고 이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투덜거리는 병사의 말에 곁에 있던 동료가 입조심하라며 손가락을 세웠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입이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솔직히 이깟 목책 따위를 가지고 조선군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는 소리.”
파죽지세로 치고 들어오는 조선군의 기세는 이미 전 군영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태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놈들이라면 지금이야말로 공을 세울 기회라느니, 나라를 위해 충정을 바쳐야 한다며 잡소리를 지껄이면서 부나방처럼 달려들겠지만 두 사람 다 그럴 시기는 오래전에 지난 나이였기에 회의감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생각해 봐. 전세가 불리해지면 윗대가리들부터 제일 먼저 도망칠 거고, 남은 우리들은 그냥 시간 벌이용으로 쓰이다가 그대로 버려지겠지. 그렇게 싸우다가 꼴깍 뒈져 버리면 누가 시신이라도 추슬러 줄 것 같아? 흥, 턱도 없는 소리.”
병사는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로 장광설을 쏟아 내다가 불쑥, 목소리를 낮춰 속닥였다.
“이봐. 어제 밤부터 얼굴이 안 보이는 녀석이 몇 명 있지 않아?”
“그, 그러고 보니…….”
동료가 홀린 듯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그 말을 들으니 짚이는 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코 옆에 크게 점이 있는 녀석.
한 살 아래에 동향이라 꽤 친하게 지낸 데다 하루에도 몇 번씩은 얼굴을 마주치곤 했는데 어쩐지 오늘은 머리털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어디 안 보이는 데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나, 아니면 벌써 식사 시간인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병사를 바라보니 그가 삐뚜름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도망친 거야.”
“어디로?”
“그거야 나도 모르지. 제 고향으로 돌아갔든가, 아니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든가.”
“하지만, 설마…….”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탈주병한테 내려지는 처벌은 매우 엄중했다.
잡히면 그 즉시 사형을 당하거나 이마에 낙인이 찍힌 채 평생 노역형을 살아야 됐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설마 아무 말 없이 내뺐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럼 왜 작업하는 데 얼굴 한 번 들이밀질 않아? 뭐, 단체로 고뿔이라도 걸렸나?”
입을 꾹 다문 동료를 향해 병사가 비웃음을 날렸다.
“지금쯤이면 다른 녀석들도 그놈들이 도망친 걸 슬슬 눈치챘을 걸. 저 봐, 벌써 몇몇이 모여서 쑥덕대고 있잖아.”
그제야 마치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겉으로만 보면 다들 열심히 성벽 보강 작업을 하거나 보초를 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은근슬쩍 서로를 훔쳐본다든가 눈치를 살피고, 친한 몇몇끼리 은밀하게 정보를 나누는 분위기가 암암리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군관들이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즈음엔 벌써 꽤 많은 숫자가 탈주를 감행한 뒤였다.
“젠장 할.”
칼 밥을 먹고 산 지 벌써 수년째인 병사는 본능적으로 이번 싸움은 어렵겠다는 걸 느끼고는 자신도 개죽음을 당하기 전에 살길을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심했다.
☆ ☆ ☆
“대체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당산성 내부에 있는 회의실에서 분노로 가득 찬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단가!”
화춘 성주는 눈앞에 서 있는 언태영을 노려보며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연신 책상을 내리쳤다.
“하룻밤 사이에 탈영한 놈들이 무려 오백이야, 오백!”
아무리 정예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나라에서 녹봉을 받는 병사들인데 적이 쳐들어온다는 말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수백 명씩 야밤을 틈타 줄행랑을 쳐 버린 거였다.
“오늘부터 야간 경계를 두 배로 늘려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탈영을 하려다 잡히는 놈이 있으면 모조리 다 군영 앞마당에 효수를 해 버리도록 해!”
“예.”
단단히 화가 난 화춘 성주가 수염을 부르르 떨며 다시 뭐라고 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군관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성주님!”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던 화춘 성주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무례하게 이게 무슨 행동이야!”
“크, 큰일 났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된 군관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조선군이 나타났습니다.”
“뭐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화춘 성주는 허겁지겁 문루로 뛰어갔다.
그러자 정말로 이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지금쯤 우리가 상륙했다는 소식이 북경에 알려졌겠지.”
육전대 지휘관인 김진석의 말에 함께 있던 장재균 장군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럼 곧 지원 병력이 잔뜩 몰려오겠군.”
시선을 돌려 무심히 전방을 쳐다보던 김진석은 이내 약간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사들 상태는 어때?”
무슨 의도로 묻는 말인지 바로 알아차린 장재균은 살짝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방금 도착했지만 행군해 온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 체력은 충분합니다.”
“그럼 다른 날파리들이 몰려오기 전에 빨리 성을 함락시키도록 하지. 가지고 온 화포로 성벽을 무너뜨린 뒤 병력을 일거에 투입해 적을 제압한다. 알겠나?”
“옛.”
“좋아. 다른 장수들도 각자 부대로 가서 명령을 수행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크게 복명을 한 장수들이 각자 지휘를 맡은 부대로 흩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급히 방열을 끝낸 화포 열문이 불을 뿜었다.
퍼퍼펑!
굉음을 울리며 날아간 포탄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 서른세 자 높이의 정확히 성벽을 두들겼다.
꽈꽝! 꽝!
우지끈.
“으악!”
“컥.”
포탄이 터지면서 성벽 위에 어설프게 세워 둔 목책이 힘없이 날아갔고 병사들도 파편에 맞아 쓰러지거나 비명을 질러댔다.
이쯤 되면 청군도 반격에 나서야 됐지만 도르곤이 화포를 모조리 다 싹싹 긁어 가져가 버렸기에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었다.
그저 조선군이 화포를 쏘는 대로 두들겨 맞아야 되는 청군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악몽 그 자체였다.
그렇게 반 시진쯤 지났을 때 성벽 한쪽이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무너져 내렸다.
와르륵.
한곳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해 대더니 결국 성벽이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장군, 성벽이 뚫렸습니다.”
부관의 외침에 김진석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소리쳤다.
“포격 중지! 전군 돌격 앞으로. 저항하는 자는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우와아아!”
순간 우렁찬 함성이 전장을 가득 울렸고 전열을 유지한 채 대기하던 육전대가 일제히 성난 황소처럼 뛰쳐나갔다.
성벽 위에 있던 청군 병사들은 무시무시한 기세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히익.”
이미 포격이 시작됐을 때부터 전의를 상실한 청군 병사들에게 육전대의 돌격은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 여파는 바로 이어진 전투에서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무너진 성벽을 통해 밀어닥친 육전대는 적군을 닥치는 대로 다 베어 넘겼다.
채챙! 챙!
슈각.
“크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며 일발적인 살육이 벌어졌다.
살벌하게 몰아치는 육전대의 공격에 청군 병사들은 이내 전투를 포기하고 여기저기에서 두 손을 들고 투항했다.
애초에 잘 훈련된 정예인 육전대와 향용병 중에서도 나이가 많고 체력이 떨어지는 자들을 모아 놓은 당산성 주둔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세가 기울자 측근들과 함께 성을 탈출하려던 화춘 성주는 뒤쫓아 온 육전대 기병에게 잡혀 목이 잘렸다.
* 퇴각
“열어라!”
“옛.”
뒤에 있던 군관이 김진석의 말에 앞으로 나와 커다란 도끼로 손잡이에 걸려 있는 자물쇠를 내려쳐 부쉈다.
덜컹.
굳게 닫혀 있던 나무 문을 병사들이 힘들게 잡아당겼다.
육중한 소리와 함께 양옆으로 문을 열어젖히자 바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창고 내부를 희미하게 비췄다.
끼이익.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니 나풀거리는 흰 먼지들 사이로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들어차 있는 쌀가마들이 보였다.
김진석은 한쪽 손을 들어 코를 틀어막고 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그러고는 좌우에 가득 쌓여 있는 쌀가마니를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대단하군.”
“수십만 명을 먹일 군량이니 이 정도는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 말고도 군량 창고가 백 개나 더 있다고 합니다.”
“하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엄청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써 끌어 모은 군량을 몽땅 다 우리한테 빼앗겼으니 청 황제가 속이 좀 쓰리겠군,”
“아주 분해서 잠이 안 올 겁니다.”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 김진석은 잔뜩 고무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아군이 쓸 것이니 하나도 빼놓지 말고 남아 있는 보급품들을 전부 다 파악해 보고토록 하게.”
“예.”
부관의 대답을 들으면서 김진석은 흡족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찬찬히 창고 안을 둘러봤다.
청군의 보급 집결지인 만큼 수십만 석의 군량과 화약을 비롯한 각종 병장기 그리고 피복류까지 엄청난 수량의 물자가 노획됐다.
이렇게 확보된 노획품들은 고스란히 조선군의 손에 들어가 다시 청나라를 공격하는 데 쓰이게 됐다.
조선군이 기습 상륙을 해 당산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영원성에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도르곤의 귀에도 들어갔다.
☆ ☆ ☆
“지금 뭐라고 했나!”
도르곤이 경악에 찬 얼굴로 되묻자 보고를 하러 온 군관은 연신 그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 당산성이 조선군에 함락 당했다고 하옵니다.”
“산해관 너머에 있는 당산성이 어떻게 조선 놈들한테 넘어갔다는 거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도르곤이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면서 다그치자 군관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조선군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와 상륙을…….”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르곤이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는 천막이 떠나가라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도대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북경에 있는 것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송구하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그저 안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군관이 불호령을 몽땅 다 뒤집어쓰는 가운데 옆에 있던 용골대가 굳은 얼굴로 다급히 물었다.
“당산에 모아 둔 보급 물자들은 어찌 됐다던가?”
“모두 조선군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전부 다 말인가!”
“……예.”
지휘 천막 안이 크게 술렁이며 모여 있던 장수들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경에서는 그걸 그냥 보고만 있단 말이냐!”
“그것까지는 아직 소식이 들어오지 않아 잘 모르겠사옵니다.”
“에잉!”
도르곤이 얼굴을 구기자 용골대가 한쪽 팔을 내저으며 군관에게 말했다.
“알았으니 더 보고할 것이 없으면 그만 나가 보게.”
“네.”
좌불안석이던 군관은 용골대의 말에 반색을 하고는 얼른 예를 갖추며 지휘 천막 밖으로 물러났다.
무거운 침묵이 흐리는 가운데 장수들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도르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도르곤이 약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진영에 보급품이 얼마나 남아 있지?”
보급을 맡은 장수는 도르고의 시선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보급품이 있습니다만…….”
“답답해 죽겠군. 어서 속 시원하게 말을 하지 못하겠나!”
“아, 예.”
호통을 들은 장수는 더욱 긴장해 어깨를 살짝 움츠린 채 이야기를 이었다.
“문제는 홍이포에 쓸 화약과 포탄이 부족하다는 것이옵니다.”
“뭐라?”
“그동안 계속된 격렬한 포격전에 소모량이 예상보다 커서 현재처럼 쓴다면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럼 미리 보충했었어야지!”
손바닥으로 앉아 있는 황좌 팔걸이를 내려치며 도르곤이 언성을 높이자 장수는 진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놨다.
“본국에 급히 화약과 포탄을 보내라고 재촉을 했사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거야!”
“새로 보내 주기로 한 물자들이 당산성을 출발하기 전에 함락이 되는 바람에…….”
차마 뒷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장수가 끝을 흐리자 도르곤은 앓는 소리를 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끄으응.”
많은 희생을 치르고 해자를 메우는 데 성공했으나 여전히 조선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고전 중인 상황에서 그나마 맞대응할 수 있는 수단인 홍이포를 못 쓴다면 아예 공성전을 포기해야 될지도 몰랐다.
다른 장수들도 그걸 아는지 당산성이 함락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북경에 연락해서 급히 물자를 보내라고 하면 되지 않나?”
반대편에 서 있던 야골타가 끼어들며 말하자 장수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화약과 포탄은 필요하다고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당장 그만한 물량을 구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하면 각 군영에 보관 중인 것들이라도 우선 가져와 쓰면 될 것이 아닌가!”
“당산성에 있던 것들이 그렇게 모은 겁니다.”
“이런…….”
마지막 말에 여기저기서 한탄이 쏟아졌다.
조선을 치기 위해 청나라도 많은 준비를 했지만 고부리성에 이어 영원성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저항에 부딪치면서 처음 세웠던 계획이 크게 어긋났다.
화약과 포탄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오히려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소모량이 빠르게 늘어나 보급에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이대로 손을 놓고 있겠다는 거야!”
화가 치밀어 오른 도르곤이 사나운 어투로 소리를 치자 장수들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고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던 용골대가 도르곤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폐하, 일단 지금부터 화약과 포탄 사용을 가능한 한 줄이며 병기창에서 물량이 생산될 때까지 후방에 남아 있는 것들을 최대한 가져와 부족한 양을 메워야 될 것 같사옵니다.”
“그러면 공성전이 어려워지지 않겠나.”
도르곤의 지적에 용골대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이것 말고는 달리 마땅한 방법이 없사옵니다.”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은 도르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실행하라.”
“예.”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했으나 도르곤은 크나큰 분노가 얼굴에 일렁이는 걸 다 감추지 못했다.
☆ ☆ ☆
모든 일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청군 진영과 달리 영원성의 조선군 본진은 당산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에 사기가 크게 올랐다.
“노획한 물자가 그렇게 많단 말이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도현의 물음에 남두병 사령관이 잔뜩 고무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상륙군이 다 쓰고도 남을 정도라 예정되어 있던 보급품 수송을 전부 취소했다고 하옵니다.”
“하하하! 그래.”
전쟁만큼 엄청난 재화가 소모되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면 전쟁에 이겨 놓고도 막대한 전비戰費에 나라가 휘정거리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어왔다.
특히나 화약 무기가 주력 병기로 등장하면서 이런 전쟁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해상 무역과 국력 신장으로 그동안 많은 부를 쌓은 조선이었지만 청과의 전쟁에 들어가는 자금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산성에서 엄청난 물량의 노획물을 확보해 그런 부담을 상당 부분 덜게 됐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손 통제사께서 수군 함대를 북상시켜 직접 산해관을 치려 한다는 말도 전해 왔사옵니다.”
“산해관을?”
“그렇사옵니다.”
상체를 살짝 앞으로 숙이며 도현이 관심을 보이자 함께 있던 박영식 장군이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했다.
“전쟁 전에 총참모부에서 그런 비슷한 의견이 있었지 않사옵니까?”
“그래 생각이 나는 것 같구먼.”
기억을 더듬어 본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수군이 당산성에 이어서 산해관까지 공략한다면 설사 함락을 시키지 못하더라도 장성 밖에 나와 있는 청군을 상당히 흔들게 될 것이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박영식 장군도 동의하면서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후방이 흔들리고 보급에 차질이 생긴다면 뒤가 불안해진 도르곤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흐음.”
한쪽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도현은 잠시 고심을 했다.
산해관을 공격하는 건 도르곤이 있는 청군 본진을 고립시킨 뒤 일거에 격파해 버리려는 원래 계획과 정확히 들어맞는 일이었다.
고개를 든 도현은 눈을 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
“하면 허락하시는 것이옵니까?”
“도르곤을 압박할 좋은 기회인데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 않겠어.”
“맞사옵니다.”
“대신 손 통제사한테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전하게.”
“예.”
상체를 바로 한 도현은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도총관이 이끄는 병력이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요하를 건너 내일이면 부신현阜新縣에 도착한다고 했사옵니다.”
“이제 지척까지 다 왔군.”
“그렇사옵니다.”
조금 무리를 해서 행군할 경우 늦어도 사나흘이면 영원성까지 올 수 있는 거리였다.
“일이 아주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는군. 아주 좋아!”
오랜만에 도현은 회의실이 떠나가라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고 장수들도 표정이 밝았다.
한편 요서에 있는 청군 본영 못지않게 북경도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당산성과 주변 지역이 함락됐다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십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추가로 상륙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전해지자 청국 조정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여기에 인근 촌락과 성읍의 주민들이 전란을 피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줄을 지어 북경으로 몰려들면서 불안감에 기름을 부었다.
조선군이 순식간에 당산성과 주변을 점령했고 청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소문을 마구 퍼뜨려 혼란이 더욱 커졌다.
특히나 조선군이 반항하는 자는 절대 용서를 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며 약탈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물론 상당히 과장된 측면이 많았다.
육전대에 이어 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추가로 상륙한 건 맞지만 절반 가까이가 조선군이 아닌 왜국 용병들이었다.
부족한 병력을 매우기 위해 왜국 용병들을 고용한 거였는데 약탈과 살인 같은 일도 군기가 엄정한 조선군이 아닌 이들이 저지른 행동이었다.
조선군이 봐도 심하다 싶은 경우가 많았으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승기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상대가 감히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공포를 주는 거였기에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여기에 주작단의 공작이 더해졌다.
이렇게 되자 붙어 보기도 전에 지례 겁을 먹은 청국 조정은 반격을 가해 당산성을 비롯한 점령지를 탈환할 생각을 접고 성문을 굳게 잠그고는 북경성 안에 틀어박혀 꼼짝달싹하지 않았다.
덕분에 가장 취약한 상륙 초기를 무사히 넘기고 교두보를 확실히 다진 조선군은 서쪽으로 천천히 진격하며 북경을 압박했다.
원래대로 한다면 팔기군을 포함해 청군 주력이 모여 있어야 되는 것이 북경이었으나 조선을 치기 위해 도르곤이 정예병들을 싹싹 긁어 가 버려서 남아 있는 건 장비와 훈련이 빈약한 향용병뿐이었다.
그러니 강병인 조선군은 물론이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병력이었지만 혼란스러운 왜국 사정 때문에 싸움에는 이골이 난 용병들의 상대도 되지 않았다.
다급해진 청국 조정은 다른 지역 병사들이라도 급히 데려오려고 했으나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지방도 주력 병력 대다수가 친정군에 포함되어 장성 밖으로 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화북 지역 전체가 오합지졸만 잔뜩 남은 빈집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의문을 가질 만도 했으나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청나라가 대국이라도 수년간 계속 전쟁을 치르고 또다시 수십만에 달하는 정예병을 꾸려 조선을 치는 건 불가능했다.
말 그대로 도르곤이 청나라의 국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다 쥐어짜서 조선과 무리한 전쟁을 벌였다는 거였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병력은 남쪽 국경에서 명나라와 대치 중인 군대였는데, 그들을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자칫 위아래로 적을 상대해야 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질 수도 있어 망설여졌다.
거기다 군대를 불러들인다고 해도 거리가 너무 멀어 북경까지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이 결렸다.
하지만 조선군은 일주일이면 북경성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북경의 청국 조정은 더욱 위축됐고 그사이 조선군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주변 지역을 정리하면서 교두보 안정에 주력했다.
그러고는 청국의 예상을 깨고 북경이 아닌 산해관 공략에 나섰다.
☆ ☆ ☆
흔히 천하제일관이라 불리는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관문이었다.
예전부터 북방 이민족을 막는 군사 요충지였으나 명나라 영락제 이후 북경이 제국의 중심이 되면서 황도를 지키는 첫 번째 방벽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바로 그 산해관이 갑자기 나타난 조선 함대로 인해 큰 혼란에 빠졌다.
조선군이 상륙해 당산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은 전령을 통해 전해 들었지만 설마하니 여기에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황궁이 위치한 북경으로 진격할거라 생각한 거였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산해관 성주 여인송은 앞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는 조선 함대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저놈들은 뭐야!”
“조선 함대입니다.”
부관의 눈치 없는 대답에 여인송은 얼굴을 와락 구기며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저것들이 왜 여기에 있냐고?”
“그, 그건…….”
괜히 나섰다가 불벼락을 맞은 부관이 어깨를 움츠리며 머뭇거리자 여인송은 주먹으로 앞에 있는 성가퀴를 내려쳤다.
“빌어먹을!”
당산과 달리 군사 요충지인 산해관에는 비록 향용병이지만 잘 훈련된 정병 삼 만이 주둔하고 있어 조선군한테 함락을 당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잠시 뒤 태산처럼 거대한 군선들이 측면을 드러내고 정렬하면서 현실이 됐다.
“조선군에 저렇게 큰 군선이 있다니.”
놀란 여인송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청난 굉음이 울리면서 치우 급 전함들의 함포 사격이 시작됐다.
“사격!”
기함 돛대에 신호 깃발이 올라가자 정렬해 있던 치우 급 전함 여섯 척이 일제히 함포를 발사했고 순식간에 주변 바다가 하얀 포연에 휩싸였다.
퍼퍼퍼펑!
단 여섯 척이었으나 불을 뿜는 함포는 삼백 문에 달했다.
족히 천오백 보가 넘는 거리를 날아간 포탄들이 떨어지면서 산해관 제일 끝 해안에 세워진 성곽인 노룡두는 화염과 먼지 구름으로 뒤덮였다.
쿠쿵! 쿵! 쿵!
“아아악.”
“크흑.”
귀를 때리는 폭음이 연이어 울려 퍼졌고 커다란 바위를 쌓아 만든 성벽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후폭풍과 파편에 청군 병사들이 걸레처럼 찢겨 나가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인송도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졌다.
“윽.”
쉴 새 없이 터지는 포탄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성가퀴에 등을 기댄 여인송은 아수라장이 된 주변 모습에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반격을 해!”
포대 전체가 튼튼한 벽에 둘러싸인 영원성과 달리 노룡두에 배치된 청군 화포들은 아무런 엄폐물 없이 그대로 성벽 위에 놓여 있어 지금처럼 격렬한 포격을 받는 상태에서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벌써 포탄에 맞아 박살 나거나 쏟아진 파편에 포수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
겨우 살아남은 화포 몇 문이 응사에 나섰지만 포탄은 치우함에 한참 못 미친 지점에 떨어져 애꿎은 물기둥만 만들어 냈다.
그나마도 조선군이 발사 화염을 보고 집중사격을 가하자 금방 침묵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는 조선 함대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는데 피격 위협이 사라지자 뒤에서 대기하던 신형 판옥선들까지 합류해 마음껏 성벽을 두들겼다.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이 어느새 조선 함대의 과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제대로 하고 있군.”
함교에 서서 전투를 지켜보던 통제사 손억기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있던 부관이 말을 받았다.
“저 상태라면 지금이라도 육전대를 상륙시켜도 되겠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난공불락의 요새인데 이 정도로 무너질 리가 없지. 조금씩 탄착 지점을 안쪽으로 전진시켜 방어 시설을 완전히 무력화시켜야 될 것이야.”
“예.”
부관의 대답에 손억기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함교 난간을 짚고 섰다.
“후후후. 아무튼 우리 수군이 산해관을 박살 내는 걸 보고 있으니 가슴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보급선을 통해 화약과 포탄을 공급받으면서 포격은 꼬박 하루 동안 계속 이어졌다.
산해관 성벽은 당당하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으로 부서졌는데, 특히 높이 우뚝 솟아 표적이 된 노룡두는 완전히 무너져 내려 포격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보여 줬다.
한참 동안 적진을 살핀 통제사 손억기는 눈에 대고 있던 천리경을 내리고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상륙을 개시하라고 해.”
“옛.”
잠시 뒤 육전대 병사들을 가득 태운 쪽배들이 함대를 빠져나와 해안으로 향했다.
그런 쪽배들 뒤로 조선군 군선들은 해안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지점을 향해 포격을 퍼부으며 육전대를 지원했다.
슈우우웅.
머리 위로 포탄이 날아가는 파공음을 들으면서 쪽배에 탄 육전대 병사들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노를 저었다.
“하나, 둘. 하나, 둘.”
“다들 아까 먹은 밥은 다 어디로 처먹은 거야. 더 힘차게 저어!”
촤아악.
날카롭게 날이 선 군도를 빼 들고 뱃머리에 앉은 군관이 연신 독려를 해 대는 가운데 쪽배는 파도를 헤치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쪽배가 모래톱 위에 올라서자 육전대 병사들은 군관이 소리를 치지 않아도 알아서 총검을 장착한 소총을 들고 해안에 발을 내디뎠다.
신고 있는 가죽신이 물에 젖고 진흙이 묻었지만 실수 한 번에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었기에 아무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상륙을 할 때가 가장 취약한 순간이었으나 다행히 아군 함대가 밤새 쏟아부은 포격이 효과가 있었는지 청군의 쏜 화살이나 총탄이 날아오지 않았다.
여기저기 움푹 파여 있는 포탄 구멍과 사지가 잘린 채 널브러져 있는 시신들을 보고 과연 남은 청군이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육전대 병사들은 긴장을 풀지 않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때 지휘관의 외침이 들리며 육전대 병사들은 모래사장을 지나 얼마 전까지 성벽이었을 돌무더기들이 있는 곳으로 전진했다.
“무기를 버리지 않고 저항하는 놈들은 가차 없이 다 죽여 버려라!”
“옛.”
“육전대 앞으로!”
산해관 내부로 밀고 들어가는 병사들 뒤로 속속 더 많은 육전대 병력이 상륙하면서 해안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애초에 북쪽에서 넘어오려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곽이었기에 뒤로 치고 들어오는 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치우 급 전함을 포함한 수십 척의 군선들이 쏟아 내는 포격에 만신창이가 되어 더욱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송과 청군 병사들이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함포 지원을 받으면서 거세게 몰아치는 육전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산해관은 허무하게도 육전대가 상륙한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아 조선군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 ☆ ☆
와장창.
탁자 위에 있던 잔이 바닥에 던져져 산산조각 났다.
“산해관이 어떻게 됐다고!”
하마터면 잔에 머리를 맞을 뻔한 군관은 바짝 얼어서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조, 조선군에 함락당했다고 하옵니다.”
가뜩이나 보급이 줄어드는 바람에 제대로 공성전을 치르지 못해 짜증이 가득 쌓여 있던 도르곤은 연이은 나쁜 소식에 화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당산에 이어 산해관마저 잃다니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천막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이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용골대가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옵니다. 자칫하면 보급이 완전히 끊기는 건 물론이고 앞뒤에서 협공을 당할 수도 있지 않겠사옵니까.”
“젠장!”
암담한 상황에 도르곤은 뒷목이 뻐근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 이 소식이 진중에 퍼지면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더 이상 공성전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릴 것이 분명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 된단 말인가!”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이쯤에서 물러나셔야 될 것 같사옵니다.”
“뭐라!”
금방이라도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무섭게 치켜뜨며 도르곤이 쳐다봤지만 용골대는 흔들림 없는 얼굴로 담담하게 말했다.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사사건건 그가 하는 말에 대립각을 세우고 호전적인 야골타마저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채 퇴각에 반대하지 않았다.
다른 장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모두 적진 한복판에서 보급이 끊긴 채 고립될 수도 있다는 것에 큰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수년간 절치부심 끝에 칼을 빼 들고 출전했던 도르곤은 쉽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안 돼!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리 허무하게 물러날 수는 없어.”
“폐하.”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도르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본 용골대가 재차 설득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군관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폐하!”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언짢던 도르곤은 예의를 차리지 않고 허둥거리며 들어오는 군관을 보고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일인데 이 호들갑이냐!”
“조, 조선군이 나타났사옵니다.”
뜬금없는 말에 도르곤은 미간을 찌푸리자 용골대가 군관을 보면서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자세히 설명을 해 보라!”
그러자 군관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까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군 진영 동편에 새로운 조선군 병력이 나타났다고 하온데, 숫자가 무려 이십만이 넘는다 합니다.”
순간 지휘 천막 안은 경악성으로 가득 찼다.
“뭐라! 지금 얼마라고 했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도르곤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다그치듯 묻자 군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대답했다.
“이십만이옵니다.”
“이런, 미친!”
도르곤의 입에서는 바로 욕설이 튀어 나왔고 용골대는 허탈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산해관 함락에 이어서 이십만에 달하는 새로운 병력의 등장까지 지휘 천막 안에 있던 장수들은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 ☆ ☆
조선군 진영에도 도총관 엄황이 이끄는 병력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휘부뿐만 아니라 그동안 힘든 방어전을 펼쳐야 했던 병사들까지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다.
공성전을 벌이는 내내 뒤로 물러나 있지 않고 문루에서 황금 봉황기를 펄럭이면서 직접 병사들과 함께 싸웠던 도현 역시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도총관이 때를 제대로 맞춰 도착했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체통 때문에 일반 병사들처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지만 남두병 사령관 역시 상당히 들뜬 모습이었다.
“지금 도르곤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구먼.”
도현의 말에 장수들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맞장구를 쳤다.
“아주 우거지상이 되어 있을 겁니다.”
“하하하. 뒷목을 잡고 넘어가지 않았으면 다행이지요.”
그렇게 농담을 던지면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후, 조금씩 잦아들었을 때쯤 도현이 입을 열었다.
“남 사령관.”
“하교하시옵소서, 폐하.”
고개를 숙이는 남병두 사령관을 보며 도현은 정색을 한 채 말했다.
“도총관이 지휘하는 병력이 도착하면 바로 공세에 나설 수 있게 미리 준비를 해 놓도록 하시오.”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드디어 좁은 영원성을 나가 그동안 쌓인 울분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모여 있던 다른 장수들도 눈을 번뜩이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한편 용골대와 장수들이 간언을 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조선군과 승부를 볼 거라며 고집을 부리던 도르곤은 도총관 엄황이 이끄는 이십만 대군이 오십 리 밖에 도착하자 결국 후퇴를 결심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데 도르곤이 함구를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산해관이 함락되고 조선군 대병력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병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이대로 있으면 대규모 탈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인 데다 도르곤으로서도 보급과 퇴로가 막힌 채 양쪽에서 조선군을 맞이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밤새 고심을 한 끝에 어렵게 결단을 내렸지만 퇴각도 쉽지가 않았다.
당장 조선군이 반격을 해 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데다 퇴로가 막혀 화북으로 돌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산해관을 다시 탈환하거나 멀리 산악 지역으로 우회해야 했다.
그리고 계속된 전투로 숫자가 많이 줄었다지만 아직 사십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유지하고 있어 이동이 느린 데다 무거운 홍이포와 보급품들까지 챙겨 가야 됐다.
그렇다고 짐을 다 버리고 갈 수도 없었기에 청군의 퇴각 행렬은 자연스럽게 길게 늘어져 버렸다.
청군이 퇴각한다는 보고에 급히 문루로 달려온 도현은 천리경을 눈에 대고 적진을 천천히 살폈다.
과연 청군은 수레마다 보급품을 가득 실고는 개미 떼처럼 길게 줄을 지어 뒤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도현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도르곤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요.”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그는 한쪽 팔로 성가퀴를 짚고 서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후후후. 발버둥을 쳐 봤자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어.”
“맞습니다.”
“나중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바로 청군을 치는 건 어떻사옵니까?”
장수 중 한 명이 조바심을 내며 말하자 도현은 잠시 후퇴하고 있는 청군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뭐라 더 반박하려는 장수의 말을 중간에 끊고 도현이 얘기했다.
“성급하게 덤벼들었다간 오히려 역습을 당할 수도 있네. 도르곤이 뒤에 일부 병력을 남겨 두고 우리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는 걸 보면 모르겠나.”
그 말에 장수가 놀라 앞으로 몸을 기울여 살펴보니 과연 적진에 청군 병사 이삼만 명 정도가 남아 잔뜩 경계를 하며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냥을 할 때 성급함은 곧 독이라지. 토끼몰이를 하듯 천천히 함정으로 몰아넣은 다음에 반격할 틈도 없이 단번에 목덜미를 낚아채 버리는 거야.”
도현은 목표물을 노리는 맹수처럼 진득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신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장수의 사과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도현은 남두병 사령관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진虎 호 계획 이 단계를 발동한다. 각 부대는 언제든 출전할 수 있도록 준비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예!”
도현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을 등 뒤로 돌려 뒷짐을 진 상태로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퇴각하고 있는 청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도르곤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 철수 행렬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수만 필의 말과 그와 비슷한 숫자의 수레들하고 뒤섞여 진채를 빠져나오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당당함은 보이지 않고 초라하고 사기가 축 처진 딱 패잔병의 모습이었다.
퇴각을 하면서도 조선군이 공격해 올까 봐 잔뜩 긴장하고 겁먹은 얼굴로 발을 빨리 놀렸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도르곤은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굴을 구긴 채 얼마쯤 있었을 때 용골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이제 그만 길을 떠나시지요?”
“새로 나타난 조선군이 어디까지 왔다고 했지?”
“척후 보고에 따르면 이십 리 지점까지 접근했다고 하옵니다.”
“이십 리라…….”
그 정도면 당장 조선군이 눈앞에 들이닥쳐도 전혀 이상이 없을 만큼 바로 지척까지 온 거였다.
“홍이포는 모두 철수시켰나?”
“예. 제일 먼저 빼내 중군과 함께 이동 중이옵니다.”
“잘했어. 조선군과 일전을 벌이거나 산해관을 탈환할 때 꼭 필요한 무기이니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져가야 할 것이야.”
“알고 있사옵니다.”
“후속 부대는 누가 맡기로 했지?”
“단지귀 장군이옵니다.”
흐음, 하고 콧소리를 흘리며 도르곤이 말했다.
“어떻게든 조선군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고 늘어지라고 해.”
“예.”
후속 부대는 조선군의 추격을 지연시키기 위한 용도였다.
그래서 일부 독전대督戰隊를 제외하고는 전부 감옥에 갇혀 있다가 끌려온 죄수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몽땅 다 전멸을 당해도 청군 입장에서는 전혀 아까울 것이 없는 병력이라는 뜻이었다.
미련이 남는 얼굴로 힐끗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영원성을 쳐다본 도르곤은 이내 쓸쓸히 말 머리를 돌려 언덕을 내려갔다.
워낙 숫자가 많다 보니 그 뒤로도 반나절이 더 지나서야 퇴각 행렬이 완전히 사라졌다.
커다란 청군 진영에는 후속 부대 삼만 명만이 남아 썰렁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단지 분위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화살받이로 남겨졌다는 생각에 죄수병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었다.
만약 독전대가 등 뒤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병장기를 겨누고 있지 않았다면 반란이 일어났어도 몇 번이 터졌을 거였다.
“저희들은 먼저 다 도망가 버리고 우리보고 뒤에 남아서 칼 받이를 하라 이거지.”
“나쁜 놈들.”
“퉤. 더러워서.”
통나무를 잘라서 만든 방책 뒤에 서서 영원성을 바라보고 있던 죄수 부대원들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자 손에 검을 든 군관이 다가와 눈을 부라렸다.
“조용히 하지 못해!”
“말도 못하오.”
제대로 깍지 않아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병사가 똑바로 쳐다보며 대들자 군관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놈, 죽고 싶은 거냐!”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군관이 노려보자 병사도 지지 않고 턱을 치켜들며 강짜를 부렸다.
“씨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다 똑같으니 마음대로 하시오!”
“이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으나 가뜩이나 죄수병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자칫 반란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기에 군관은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소란에 죄수병들이 수군거리며 시선을 집중시키고 뒤에 있던 독전대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긴장이 흐를 때 한쪽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저, 적이다! 조선군이 몰려온다.”
“뭐야!”
“이런.”
허둥지둥 방책으로 가서 앞을 본 군관과 죄수병들은 활짝 열린 성문을 통해 조선군 기병대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기겁했다.
그와 동시에 포성이 울리면서 조선군 포대가 불을 뿜어 댔다.
슈우우웅.
“포격이다.”
“으아악.”
꽈아앙! 쿠쿵! 쿵!
포신이 망가지는 걸 각오하고 화약을 최대한 집어넣어 쏘아올린 포탄들은 정확히 청군 진영에 떨어져 방책을 날려 버렸다.
살상 범위 안에 있던 죄수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사지가 찢겨 나갔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희뿌연 포연 사이로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조선군 기병대가 들이닥쳤다.
두두두두.
“이랴!”
“하!”
“마, 막아!”
부서진 방책을 넘어 들어온 조선군 기병대는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엉거주춤 서 있는 청군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거나 긴 창을 찔러 넣었다.
서걱.
“커, 컥.”
“꾸엑.”
“다 쓸어버려라!”
지휘관인 신인석이 창을 들고 옆에 서 있던 적병의 목을 치며 외치자 기병들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상대를 몰아쳤다.
돌격해 온 기병은 일만이 조금 넘어 병력의 수는 청군이 더 많았으나 역량 자체에서 차이가 났고 무엇보다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달랐다.
용맹하게 달려들어 병장기를 휘두르는 기병과 달리 상대는 방책을 돌파당하는 순간 도망칠 방법을 찾기에 급급했다.
이히히힝.
채챙.
“악!”
이미 상당수의 적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뒹굴었고 몇몇은 싸워 보지도 않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버린 채 등을 돌려 달아났다.
“히익.”
“도망쳐.”
“어딜 가느냐!”
“다시 돌아서 조선군과 싸워라!”
그러자 뒤에 있던 독전대가 검 끝을 겨누며 위협해 다시 싸우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어느새 적진을 가로질러 후미까지 치고 들어온 신인석과 기병들이 독전대를 덮쳐 버렸다.
죄수병들을 위협하며 전투를 독려하던 독전대였지만 전혀 기세가 줄어들지 않은 채 거침없이 달려드는 기병의 칼날 앞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독전대가 박살 나자 홍수에 둑이 무너지듯 주춤하던 죄수병들이 너도나도 앞을 다퉈 도망치기 시작하면서 청군 전열은 빠르게 와해됐다.
결국 도르곤이 남겨 둔 잔존 병력은 채 한 시진을 버티지 못하고 기병대의 공격만으로 완전히 전멸하고 말았다.
도망친 자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지휘 체계도 없이 그저 살기 위해서 달아난 패잔병에 불과했다.
물론 그냥 내버려 두면 나중에 마적이 되어 문젯거리가 될 수도 있었으나 퇴각한 청군 본진을 상대해야 됐기에 지금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도현은 휘하 장수들과 함께 문루에 서서 전투가 모두 끝난 청군 진영을 바라봤다.
전투 중간에 천막과 방책에 불이 붙어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지만 전반적인 모습을 살피는 데 지장이 없었다.
“신 장군이 그동안 쌓인 화를 아주 제대로 풀었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아군 피해는 얼마나 되나?”
전투를 끝내고 막 다시 문루에 올라와 있던 신인석 장군이 도현의 물음에 살짝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상자가 오백 명가량 나왔사오나 부상자 대부분이 간단히 치료를 받으면 바로 복귀할 수 있는 경상이옵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기병대 전력에 손실이 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지켜보는 짐이 다 통쾌할 정도로 잘 싸웠어.”
“황공하옵니다.”
그동안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면 성에서 방어만 하다가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 적을 무찌르자 도현은 가슴에 묵혀 둔 체증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간 기분이었다.
신익선 장군을 치하한 도현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말했다.
“도총관이 지휘하는 병력은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겠지?”
“예. 곧장 결전 장소로 간다는 전령이 왔사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한 채 온몸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야말로 도르곤을 죽이고 청을 완전히 몰락시켜 조선이 만대에 걸쳐 찬란한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초석을 단단히 닦을 것이다. 즉시 전장을 수습하고 적을 추격할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옛.”
명을 받은 장수들은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얼마 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전장 정리를 모두 끝낸 조선군은 이만 명의 수비병을 남겨 둔 채 영원성을 나섰다.
☆ ☆ ☆
한편 산해관 방향으로 퇴각했던 청군 본진은 멀리 가지 못하고 영원성에서 오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발이 묶여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저놈들을 쓸어버려.”
말에 탄 채 고함을 고래고래 질러 대는 도르곤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흑치영이 이끄는 조선군 기병대가 나타난 건 영원성을 떠나 반나절쯤 지났을 때였다.
이리로 올 것을 알고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면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기병대는 당황한 경계 병력을 뚫고 들어와 기습 공격을 가했다.
급히 팔기군을 동원해 요격에 나섰지만 조선군 기병대가 타격을 가한 뒤 신속하게 빠져나가 버린 뒤였다.
흑치영이 지휘하는 기병대는 강력한 상대인 팔기군과의 정면 대결을 철저히 피하면서 홍이포를 비롯한 보급 물자들을 망실亡失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런 습격이 계속해서 이뤄지자 청군 지휘부는 팔기군에 보급 물자를 지키도록 했지만 상대는 그걸 또 귀신같이 파악하고 이번에는 후미에 처져서 따라오는 보병대를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채챙! 챙! 챙!
“커헉.”
“끅.”
푹!
청군 대열 사이로 뛰어든 조선군 기병들은 좌충우돌하며 근처에 있는 적들을 마구 베어 넘겼다.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권총과 화살을 쏘며 빠르게 돌격해 들어오는 기병을 보병이 막아 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청군 대열이 흐트러지며 큰 혼란에 빠졌고 그 틈을 이용해 조선군 기병들은 상대의 피해를 더욱 키웠다.
두두두두.
그때 말발굽 소리를 울리면서 행렬 가운데 있던 팔기군이 급히 달려왔다.
“조금만 버텨라! 그럼 지원군이 온다……. 어억.”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적장을 기다란 창으로 꿰어 죽여 버린 흑치영은 힐끗 고개를 돌려 팔기군을 봤다.
“쳇.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더니 빨리도 왔군.”
“어떻게 할까요?”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검을 든 홍종수 장군이 옆으로 다가와 묻자 흑치영은 미련 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조만간 원 없이 싸우게 될 텐데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철수시켜.”
“옛.”
예전 같았으면 걸어오는 싸움을 절대 피하지 않았을 테지만 얼마 전 야골타가 판 함정에 걸려 부하들을 잃은 이후부터 상당히 신중해지고 절제할 줄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결코 소심해졌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전투가 벌어지면 항상 선두에 서서 적에게 창을 찔러 넣었고 상황에 따라 과감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뿌우웅! 뿌우웅!
흑치영의 지시에 따라 신호수가 뿔 나팔을 길게 두 번 불자 청군 대열을 휘젓고 다니던 조선군 기병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팔기군이 허겁지겁 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무수히 많은 청군 사상자만 남겨 둔 채 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후퇴해 버린 뒤였다.
또다시 뒷북을 치게 된 야골타는 멀리 사라지는 조선군 기병대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 죽일 놈들!”
“추격할까요?”
부관의 물음에 야골타는 화풀이를 하듯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랬다가 저번처럼 빈 곳을 치고 들어오면 자네가 책임 질 건가!”
“전 그냥…….”
괜히 입을 열었다가 날벼락을 뒤집어쓴 부관은 어깨를 움츠렸다.
두 번째로 습격해 왔을 때 야골타가 이끄는 팔기군이 달아나는 조선군 기병대를 추격해 갔다가 양동작전을 펴서 숨겨 두고 있던 병력이 곧바로 무방비 상태인 보급 부대를 쳐서 큰 피해를 입힌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때 귀한 홍이포를 다섯 문이나 잃고 화약을 가득 실은 짐마차 세 대가 박살 나 버리자 야골타는 도르곤한테 불려 가 엄청난 질책을 들어야 했다.
그 뒤부터는 조선군이 똑같은 방법으로 뒤를 치는 걸 염려해서 달아나는 상대를 보고도 추격을 하지 않고 그냥 멍청히 지켜만 봐야 했다.
“됐어. 어서 대열을 정비하고 주변에 척후 병력이나 더 내보내.”
“알겠습니다.”
소규모로 내보내는 척후는 조선군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나마 습격 빈도를 줄이려면 이렇게라도 해야 됐다.
팔기군으로 행렬을 둘러싸며 경계를 한층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질 때까지 청군은 한 차례 더 습격을 받아야 했다.
그 때문에 숙영지 한가운데 세워진 지휘 천막에서는 도르곤의 호통 소리가 시끄럽게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야!”
도르곤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치자 지휘 천막에 모인 장수들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특히 팔기군을 이끌고 하루 종일 조선군의 꽁무니만 쫓아다닌 야골타는 연신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지금까지 입은 피해가 얼마야?”
약간 초췌한 얼굴을 한 왕태봉이 장수들 사이에서 한 발짝 나와 대답했다.
“이천 명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다수의 보급품이 망실됐사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왕태봉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병력 손실도 크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홍이포 다섯 문이 망가지고 보유하고 있던 화약을 절반 가까이 못 쓰게 됐다는 겁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눈썹을 치켜 올리며 도르곤이 쳐다보자 왕태봉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적이 화약통이 실린 수레에 뭔가를 집어 던진 걸 수상히 여겨 살펴봤더니 화유火油였사옵니다.”
화유는 석유를 가리키는 옛날 말 중 하나였다.
“이럴 수가…….”
“그럼 적이 처음부터 화약을 못 쓰게 만들려고 노렸다는 뜻이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좌중이 다시 한 번 크게 술렁였다.
이게 사실이라면 습격이 단순하게 퇴각을 늦추고 피해를 강요하기 위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였다는 뜻이었기에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도르곤이 얕은 신음성을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리는데 지금껏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용골대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폐하,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내일부터는 행군 속도를 더 올려야겠사옵니다.”
그의 의견에 도열해 있던 장수들 중 한 명이 즉각 반발했다.
“아니 됩니다. 지금도 무리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더 속도를 높였다간 문제가 생길 게 뻔하지 않습니까.”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병사들 사정을 하나하나 봐줄 만큼 상황이 녹록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러다 적군과 교전하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팽팽히 맞서는 말다툼이 이어지자 나머지 사람들 역시 두 편으로 나뉘어 웅성거렸다.
그 모양새를 보고 있던 도르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만!”
분노와 짜증이 뒤섞인 목소리로 도르곤이 외쳤다.
사나운 눈빛에 찔끔한 장수들이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힘들더라도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위험지역을 하루 빨리 벗어나는 것이야.”
이미 결정을 내린 그는 용골대를 향해 명령했다.
“총병관 생각대로 내일부터 행군 속도를 높이도록 하게.”
“예.”
자기 뜻대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답하는 용골대의 표정은 어두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부딪쳐 내린 결단이긴 하지만 원래라면 이런 무모한 짓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게 그의 본심이었다.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움직이기엔 너무나 위험요소가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의자에 앉은 도르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더 이상 이동 중에 홍이포와 화약을 망실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를 철저히 하라! 그리고 야골타 장군.”
“말씀하십시오.”
“내일은 절대 조선군에 습격을 허용해선 아니 될 것이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야골타의 머리가 바닥을 향해 숙여지고, 그 모습을 잠시 일별한 도르곤이 이내 장수들을 향해 크게 손을 내저으면서 귀찮은 듯 말했다.
“다들 나가 봐.”
장수들이 하나둘씩 천막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그는 바람에 얕게 흔들리는 촛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과연 이 위기를 무사히 잘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자신감을 가지려 해도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거리며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불안에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다음 날 청군은 조금이라도 빨리 조선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위험지역을 벗어나기 위해서 새벽 일찍부터 숙영지를 정리하고 행군을 시작했다.
하지만 청군의 희망은 얼마 가지 않아서 바로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언제 도착했는지 최소 수십만은 넘을 것 같은 조선군이 행군로 앞을 떡하니 막고 있었다.
조선군 깃발이 수도 없이 바람에 펄럭였고 띄엄띄엄 통나무 끝을 뾰족하게 잘라 만든 대기병 방어진까지 있었다.
소식을 듣고 황급히 행렬 선두로 달려온 도르곤은 그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폐하, 저길 보십시오. 적진 가운데 황금 봉황기가 있사옵니다.”
“……!”
왕태봉이 다급히 소리치며 한쪽 팔을 들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정말 꿈에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황금 봉황기가 당당히 세워져 있었다.
“설마 조선 국왕이 여기에 와 있다는 건가?”
미간을 찌푸린 도르곤의 말에 왕태봉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금 봉황기는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젠장.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군!”
흑치영이 지휘하는 기병대가 위험을 감수하고 수시로 습격을 가해 왔던 이유가 바로 자신들을 지치게 만드는 사이 흩어진 전력을 모아서 일전을 벌이려는 거였다는 걸 도르곤은 뒤늦게 깨달았다.
아랫입술을 질근 씹으며 정면을 노려보던 도르곤은 손에 뒨 말고삐를 꽉 틀어쥐고는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잘됐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옆에 있던 용골대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도르곤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 같아 내내 찝찝했었는데, 너른 벌판에서 제대로 한판 붙어 누가 진정한 대륙의 패자인지 결정을 짓는 거야!”
“하오나, 폐하.”
용골대가 놀란 얼굴로 다급히 입을 열려고 하자 도르곤이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니까 그만해.”
“적이 원하는 전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건 첫수부터 지고 들어가는 것이옵니다. 재고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도르곤이 역정을 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짐이 싸움을 피한다고 해서 조선군이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나. 오히려 더 기세를 올려 아군의 뒷덜미를 물어뜯으려고 할 거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면 대결을 펼쳐 승부를 보는 것이 나아. 보급이 막혀서 그렇지 팔기군이 건재하고 뒤를 받칠 향용병도 머릿수로는 적에게 꿀리지 않잖나. 지금이라면 충분히 조선군을 깨부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어!”
피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에 말문이 막힌 용골대는 일자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도르곤은 휘하 장수들을 둘러보면서 단호한 어투로 지시를 내렸다.
“오늘 이곳에서 조선 국왕의 목을 베고 저들에게 청군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 주겠다. 전군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옛.”
몸을 바로 해 조선군 진영을 쳐다보는 도르곤의 눈에는 광폭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한편 밤새 도총관 엄황의 병력과 합류해서 미리 적이 지나갈 길목을 막고 선 도현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던 청군이 이내 빠르게 전투대형을 갖추는 걸 보고 한쪽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역시 예상대로 움직이는군.”
“적들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옵니다.”
“후후후. 그렇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며 옆에 선 엄황의 이야기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여기서 지긋지긋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다. 적을 상대하는데 절대 자비도 베풀지 말라고 하라!”
“알겠사옵니다.”
이번 회전 한번으로 전쟁의 승패는 물론이고 나라의 존망까지 걸려 있다는 걸 알기에 엄황을 비롯한 장수들의 표정에는 긴장과 결연함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군은 이천 보 정도 거리를 두고 각자 전투대형을 갖춘 채 길게 도열했다.
수십만이 한곳에 모여 있었으나 전장이 쥐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무겁고 끈적끈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요서회전
훗날 요서회전이라 불리면 후대까지 기억될 조선과 청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는 도르곤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대륙 최강의 기병으로 불리는 팔기군이 무려 팔만 명이나 청군 진영 앞에 나와 살기를 피워 올리며 도열하자 압박감에 조선군 병사들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걸 본 도현은 살짝 미간을 모았다.
몇 번이나 싸워서 이긴 경험이 있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 최정예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팔기군이 가지는 위명에 스스로 위축되는 것에 속으로 혀를 찼다.
처음부터 기세에 눌려서는 제대로 싸움을 벌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뒤로 돌아 전투대형을 갖춘 채 늘어 서 있는 아군 병사들을 천천히 쓸어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장졸들은 들어라!”
우렁찬 그의 말에 수십만 병사들의 이목이 모두 집중됐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 전투를 기억하며 그대들의 용맹과 희생을 찬양할 것이고 여기서 흘리는 피 한 방울까지 모두다 영광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가 원한 전쟁은 아니지만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워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저들이 요하를 넘어 우리의 소중한 가족과 재산을 짓밟고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금 점점 높아지는 도현의 음성에 병사들 역시 조금씩 눈에 힘이 들어가며 가지고 있는 병장기를 꽉 움켜쥐었다.
“사랑하는 이들이 적에게 농락당하고 비참하게 죽어 가는 걸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청군이 화북으로 퇴각하고 있는 상태였기에 다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였지만 병사들은 거칠어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적과 싸우는 데 머뭇거리지 마라! 청군의 피로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심장에 검을 박아 넣는 것이다. 그것이 내 가족과 친인을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오늘 흘리는 너희들의 피와 땀은 후대가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 만 백 년 당당하게 살아갈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 고난의 길에 짐도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우와아아!”
투쟁심을 자극하는 도현의 말에 병사들은 어느새 두려움과 긴장을 모두 털어 버리고는 흥분한 모습으로 병장기를 들어 올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바로 그때 청군 진영에서 긴 나팔 소리가 울리면서 팔기군이 앞으로 돌격해 왔다.
뿌우웅! 뿌우웅!
그러자 도현은 손에 쥔 지휘봉 끝으로 팔기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곳을 청군의 무덤으로 만들어라. 기병대 출진하라!”
명령이 떨이지자 이 순간을 기다리며 복수의 칼날을 갈던 흑치영이 양발로 말 옆구리를 차면서 땅을 박차고 나갔다.
“비명에 죽은 전우들의 복수를 해 줄 날이 왔다. 돌격!”
“이랴!”
“하!”
두두두!
거센 파도처럼 달려 나가는 기병대 뒤로 방열해 있던 화포들이 불을 뿜었다.
“발사!”
꽝! 꽝! 꽝!
제일 강력한 위력을 지닌 충무포는 무게 때문에 가져오지 못했으나 대신 무려 팔십 문에 달하는 화포들이 일제히 포탄을 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쉬이이잉.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포탄들은 정확히 돌격해 오는 팔기군 머리 위에 떨어져 흙먼지와 연기 기둥을 피워 올렸다.
쿠쿵! 쿵! 쿵!
포탄이 터지면서 쏟아진 수많은 파편이 팔기군 병사와 군마들을 덮쳤다.
날카로운 파편이 박힌 적병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고 군마들도 달리던 속도 그대로 주저앉고는 울음소리를 냈다.
“끄아악!”
이히히힝.
순식간에 돌격 대형 곳곳에 구멍이 뚫리면서 팔기군 병사들이 죽어 나가자 지켜보던 도르곤은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어서 대응 사격을 하라!”
“옛.”
복명을 한 장수가 신호수에게 손짓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청군 홍이포들도 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오십 문에 달하는 홍이포가 남아 있었기에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사거리나 화력에서 홍이포가 약간 앞서는 모습을 보이며 흑치영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기병들을 날려 버렸다.
“으악!”
“컥.”
바로 옆에서 포탄이 터지며 두세 명의 기병이 말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졌는지 기병들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고 그걸 본 흑치영은 입술을 꽉 깨물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거리를 좁히면 화포 공격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흑치영은 말 옆구리를 차며 달리는 속력을 더욱 올렸다.
사방에서 흙기둥이 치솟으며 전우들이 죽어 나갔지만 조선군 병사들은 겁을 먹거나 머뭇거리는 것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말을 달렸다.
포탄 세례를 헤치며 돌격하는 모습이 사뭇 비장하기까지 했다.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포격을 지나 양군은 삼백 보 거리까지 도달했다.
그러자 기병대 선두에 서 있던 흑치영이 창 대신 안장 옆에 달려 있던 각궁을 꺼내 들면서 외쳤다.
“활을 쏴라!”
어느새 각궁을 손에 들고 편전을 재고 있던 기병들은 흑치영의 명령에 팽팽하게 당긴 시위를 놨다.
슈슈슈슉! 슈슉! 슉!
오만 개에 이르는 편전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편전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야골타와 팔기군 지휘관은 황급히 소리쳤다.
“화살이 날아온다.”
“모두 방패로 몸을 가려라!”
여기저기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면서 팔기군은 방패를 꺼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편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두두둑. 두둑!
둔탁한 소음과 함께 날카로운 편전은 팔기군 병사들의 손에 들린 방패와 갑옷을 그대로 뚫고 들어갔다.
너무나도 허무한 결과에 팔기군 병사들은 경악했고 펀전에 꿰뚫린 이들은 피를 흘리면서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크악.”
“으윽!”
부상을 입은 채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던 이들은 뒤따라오던 동료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목숨을 잃어야 했다.
“머, 멈춰!”
으적. 퍽.
“꾸에엑.”
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튀며 처참한 광경이 만들어졌지만 팔기군은 말을 멈출 수 없었다.
그사이 또 한 차례의 편전 세례가 날아와 팔기군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리고 적병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팔기군 역시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마 민족답게 조선군처럼 고삐를 놓고 두 다리를 등자에 넣어 단단히 버티고 서서는 시위를 당겨 화살을 쐈다.
“발사!”
공기를 가르고는 섬뜩한 소리를 내면서 조선군보다 훨씬 더 많은 화살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조선군이 쏜 편전과 교차해서는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편전과 달리 파괴력이 떨어지는 팔기군의 화살은 얇지만 철판을 입혀 단단한 방패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박히거나 튕겨 나갔다.
반대로 팔기군은 또다시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상체를 숙여 앞에서 날아오는 편전을 겨우 피한 야골타는 이를 악물었다.
제대로 부딪치기도 전에 벌써 수천 명의 부하들이 낙마해 바닥을 뒹굴고 있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직 머릿수는 팔기군이 더 많았으나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계속 우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당장 포격에 이은 편전 세례에 함께 말을 달리던 동료들이 허무하게 죽어 나가자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기다 조금씩 공포심까지 퍼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검도 휘둘러 보지 못하고 대열이 흐트러질 위험마저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을 타계할 다른 방법이 없었던 야골타는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내지르면서 부하들을 다그쳤다.
“돌격! 더 빨리 말을 몰아라. 조선군과 가까워지면 화살과 포격 세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자 팔기군 병사들은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쉴 새 없이 말 엉덩이에 채찍질을 가했다.
그때 정면에서 달려오는 조선군 기병 대열에서 요란한 총성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탕! 타탕! 탕! 탕!
어느새 각궁을 집어넣은 조선군이 권총을 빼내 쏜 것이다.
좌우로 흔들리는 말 위라서 제대로 조준을 하기 어려웠고 소총에 비해 위력도 약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 데나 그냥 쏴도 다 맞을 만큼 적이 널려 있고 한꺼번에 수만 발이 발사돼 상대편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겨 줬다.
피 안개가 피어오르며 선두열에 서 있던 적들이 섞은 짚단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으악!”
“큭.”
연속된 원거리 공격에 무수히 많은 팔기군이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였지만 아직도 조선군보다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이대로 정면충돌한다면 조선군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 ☆ ☆
“이 정도면 대열이 와해됐을 텐데 아직도 버티는 걸 보면 역시 청나라가 자랑하는 팔기군답군.”
말 위에 앉아 천리경으로 전장을 살피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린 도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도총관 엄황을 봤다.
“도총관.”
“말씀하시옵소서.”
“첫 번째 명적鳴鏑을 쏘게.”
“옛.”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 엄황이 손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군관이 등에 맨 전통箭筒에서 명적을 꺼내 시위에 걸고는 이내 하늘 위로 쏘아 올렸다.
퉁.
삐이이익!
명적 소리를 듣고 힐끗 고개를 뒤로 돌린 흑치영은 한 손에 든 언월도를 치켜들며 크게 소리쳤다.
“산개散開!”
그러자 팔기군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던 조선군 기병들이 마치 커다란 학이 날개를 활짝 펼치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야골타는 크게 당황했다.
이제 한바탕 격렬하게 맞부딪칠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상대가 옆으로 빠져 버리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이미 기마들이 탄력을 받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상태였기에 재빨리 대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에 흡사 조선군이 펼친 학익진 안으로 날카로운 송곳이 된 팔기군이 뛰어드는 모양새가 됐다.
무슨 꼼수를 부리려고 하는지 몰라도 중앙이 얇아지면 돌파하기 더 좋았기에 야골타는 검을 치켜들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이대로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간다!”
찝찝함이 머리 한구석을 떠나지 않았지만 야골타는 애써 무시했다.
팔기군이 속력을 줄이지 않고 계속해서 돌격해 들어오자 도현은 입가에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꼬리에 불이 붙은 멧돼지처럼 달려드는군.”
도현의 말에 남두병 사령관이 머리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근위 군단의 배치는 다 끝났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적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라고 해.”
“옛.”
잠시 뒤 조선군 지휘부가 있는 곳에서 붉은색 삼각 깃발이 흔들렸다.
“장군, 신호기가 올라왔습니다.”
근위 군단을 이끌고 조선군 진영 중앙에 위치해 있던 박영식은 부관의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봤네.”
박영식은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 뒤에 폐하께서 계신다. 절대 물러서지 말고 목숨을 걸고 위치를 사수해야 될 것이야!”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더 주지시키도록 해.”
“네.”
조선 최강인 자신의 근위 군단이 저깟(?) 팔기군을 상대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만에 하나 대열이 무너진다면 박영식은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도현의 안위를 지킬 각오였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하 군관의 말에 천억근은 속이 바짝 타들어 갔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고는 사격 대형으로 도열해 있는 부하들을 보며 외쳤다.
“모두 긴장을 풀고 명령이 있을 때까지 함부로 발포를 하지 마라!”
수만이나 되는 기마가 한 덩어리가 되어 돌격해 오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기병을 바로 마주 보며 싸워야 되는 입장이 된다면 마냥 감탄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뿌옇게 피어오른 모래먼지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런 병사들의 기색을 눈치챈 천억근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 훈련 받은 대로만 한다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 알겠나!”
“예, 옛.”
뭐라고 더 부하들을 다독이고 싶었지만 이제 팔기군이 백 보 안까지 들어왔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함께 뒹굴고 땀을 흘린 부하들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얼굴까지 보이는 거리였기에 병사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더욱 커졌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적 선두 화력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니, 조금 더 기다려라!”
사선 밖으로 비켜선 천억근은 검을 든 손에 땀이 찼지만 조급해하지 않았다.
“팔십 보!”
충분히 적을 끌어 들였다고 판단한 천억근은 검을 위로 번쩍 치켜 올렸다가 내리며 발포 명령을 내렸다.
“쏴라!”
적을 겨냥하고 있던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탕!
한참 기세를 올리면서 말을 달리던 야골타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조선군 대열이 자신들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조선군 대열에서 수많은 화염이 번쩍였다.
“이런!”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함정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너무 늦고 말았다.
수천 발의 탄환이 정면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히히힝.
“크억.”
“으윽!”
총탄에 맞은 팔기군 병사들은 타고 있던 말과 같이 앞으로 고꾸라졌고 비명이 사방에서 끝없이 터져 나왔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라!”
팔기군 선두가 우수수 쓰러지는 걸 보며 천억근은 손에 든 검을 흔들며 목이 터져라 사격을 독려했다.
병사들도 사격을 멈추면 상처 입은 맹수가 된 팔기군이 당장 달려들어 말발굽으로 자신들을 짓이기려고 할 것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소총을 쏴 댔다.
탕! 탕! 탕!
근위 군단 병사들은 삼단 사격 대형을 취한 채 거의 연속으로 장전과 사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기존에 쓰던 남일식 소총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지만 후장식 소총인 남삼식이었기에 가능했다.
얼마 전부터 생산을 시작해 근위 군단에서도 겨우 두 개 연대밖에 배치를 못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선보였다.
끝없이 쏟아지는 탄환 사례에 팔기군 병사들의 시신이 산을 이뤘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강을 만들었다.
따로 조준을 할 필요도 없었다.
워낙 팔기군의 숫자가 많았기에 그냥 대충 보고 쏴도 다 맞았고 어떤 적병은 한꺼번에 두세 발씩 총탄이 박히기도 했다.
가지고 있던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기도 했으나, 총탄은 손쉽게 그 방패를 뚫어 버리고 적병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럼 말 머리를 돌려 옆으로 피해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어려웠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팔기군은 죽을 걸 알면서도 총구 화염이 쉬지 않고 번쩍이는 조선군 대형 앞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만 명이 집단 대형을 이루고 있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버린다면 어떻게 총탄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서로 뒤엉켜 더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몇몇 적병이 공포심을 이겨 내지 못하고 무단으로 달아나려고 하다가 같은 편과 충돌해 큰 부상을 입고 낙마하는 경우가 있었다.
혼자 다치거나 죽으면 몰라도 그렇게 나뒹군 적병들은 장애물로 변해 뒤따라오던 동료들까지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다.
연속된 총탄 세례에 이미 쓰러진 팔기군이 못해도 일만 명가량은 됐다.
짧은 순간에 고작 팔십 보도 안 되는 거리에서 희생된 거라고 하기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어 내고 어느새 근위 군단 사격 대형 바로 코앞까지 접근했다.
이대로 팔기군이 근위 군단을 덮친다면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될 수도 있었다.
바로 그때 조선군 대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벌어졌다.
“옆으로 빠져!”
천억근의 외침에 근위 군단 병사들은 장전된 총탄을 끝까지 적에게 쏘고는 신속하게 양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대형 뒤에 숨어 있던 황자총통 서른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사!”
지휘 군관의 외침에 포수들이 격발 장치에 연결된 줄을 힘껏 잡아당기자 포구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졌다.
꽝! 꽝! 꽝!
악귀처럼 소총을 쏴 대던 조선군이 허둥지둥 흩어지는 모습에 야골타는 눈에 힘을 가득 줬다.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상대편 대열 앞까지 온 것이다.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당한 걸 열 배 백 배 되갚아 주는 일만 남았다.
“놈들이 도망친다. 다 죽여 버려라!”
호기롭게 소리치며 말을 달려가던 야골타는 조선군이 사라진 정면에 떡하니 나타난 화포들을 보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눈앞이 번쩍이더니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화약 연기가 진동했다.
멍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팔기군 병사들이 말과 함께 넘어져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아프게 들어왔다.
수백 개의 자탄으로 이루어진 조란탄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지옥 그 자체였다.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병사들의 비명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주인을 잃은 군마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서성거렸다.
총탄에 맞으면 그래도 시신은 멀쩡했지만 사지가 찢겨 나갔다.
실제로 쓰러진 적병 대다수가 머리가 깨지고 팔이나 다리 하나가 끓어져 없었다.
일제 포격 한 번에 팔기군 선봉이 완전히 박살 나 버린 거였다.
“내 다리!”
“아악.”
“으윽.”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긴 채 낙마해 쓰러졌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야골타는 처참한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 또다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도망친 줄 알았던 조선군이 재빨리 총탄을 장전하고는 화포 양옆에 서서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조란탄 공격에 겨우 살아남은 팔기군 병사들은 이어진 총탄 세례에 피를 뿌려야했다.
순식간에 시체 무더기가 계속해서 쌓였고 뒤따라오던 적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과 사람들을 피하느라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조선군의 좋은 표적이 되어 목숨을 잃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군도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복수심에 불타는 팔기군이 말을 탄 채 덮쳐 와 검을 내려칠 것이었기에 필사적으로 장전과 사격을 반복해야 됐다.
“어서 장전을 끝내!”
바로 앞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와 비명에 긴장한 포수 한 명이 그만 화약통을 떨어뜨리자 와락 얼굴을 구긴 군관이 뛰어왔다.
“정신 못 차려!”
화약통을 대신 집어 든 군관은 급히 포신에 화약을 넣었다.
겨우 장전을 끝낸 화포가 다시 불을 뿜자 달려오던 팔기군 십 수 명이 허공에 피를 뿌리면서 엎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몸을 돌린 군관은 바짝 얼어 있는 포수에게 화약통을 넘겨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실수를 하거나 겁을 먹고 주저한다면 너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료 포수들 전체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다!”
“예, 옛.”
“알겠으면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어서 맡은 일을 하지 않고 뭘 해!”
군관의 호통에 포수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아까와 달리 다부진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보병들도 극심한 압박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앞까지 와서 검을 치켜드는 적을 향해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뒈져 버려!”
타아앙.
“컥!”
피가 튀기며 달려오던 상대가 앞으로 고꾸라졌지만 병사는 적이 죽었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주머니에서 탄약포를 꺼내 이빨로 찢고는 총을 장전했다.
그런 뒤 바로 다른 표적을 찾아 총을 쐈다.
탄약 주머니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자신이 몇 명이나 죽였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아직도 눈앞에는 그의 목을 베려고 달려드는 팔기군이 차고 넘쳤다.
“젠장. 더럽게 많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엄청난 피해를 내면서도 악착같이 돌격해 오던 팔기군이 마침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말 머리를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퇴각, 퇴각하라!”
청군 장수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전의를 상실한 팔기군 병사들은 돌격을 멈추고 어수선하게 뒤로 달아났다.
역시 한계치까지 와 있던 천억근과 병사들은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는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 등을 보인 적에게 소총을 마구 쏴 댔다.
타탕! 탕! 탕!
팔기군의 대형은 완전히 와해됐고 소총 사격에 한 무더기씩 바닥에 떨어져 나동그라졌다.
☆ ☆ ☆
기세 좋게 달려 나갔던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가고, 허겁지겁 도망쳐 들어오는 팔기군의 모습은 참으로 처참했다.
청나라가 자랑하는 정예 병력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형편없는 몰골에 도르곤의 눈썹이 하늘로 솟구쳤다.
“저, 저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며 핏대를 세우고 주먹을 꽉 쥐는 그의 곁에서 총병관 용골대가 비통하게 외쳤다.
“폐하, 놈들이 처음부터 저걸 노렸던 것 같사옵니다!”
“쥐새끼 같은 것들!”
고삐를 쥔 손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 있는 가운데 뒤에 선 장수들은 충격과 놀라움에 크게 술렁였다.
“이럴 수가. 팔기군이 저렇게 허망하게 당하다니…….”
“우리 청군의 자랑거리가…….”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청군이 가진 가장 강력한 패인 팔기군을 꺼내 승부수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리도 간단하게 패배하여 도주하는 꼬락서니를 눈앞에서 바로 목격한 그 충격은 쉽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 이대로 전투를 포기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조선군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 팔기군이 당했지만 아직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팔기군도 비록 예봉이 꺾인 채 처참한 몰골로 퇴각해 오고 있었으나 완전히 전멸된 건 아니었다.
이를 갈아붙인 도르곤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총병관.”
“예.”
“지금 즉시 보병대를 돌격시켜 조선군 대열을 흔들고 퇴각해 오는 팔기군을 수습해 전열을 재정비토록 하라!”
용골대는 전투 양상을 소모전으로 끌고 가려는 도르곤의 생각을 단번에 눈치채고는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도총관 엄황의 합류로 병력이 크게 늘어났지만 삼십만 대 사십만으로 여전히 청군이 숫자가 더 많았다.
시체로 산을 쌓으며 엄청난 살육전이 벌어지겠으나 소모전으로 간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이 도르곤의 판단이었다.
실제로 거리를 두고 벌이는 전투는 화력이 앞서는 조선군이 유리해도 서로 뒤섞여 난전에 들어간다면 숫자가 많은 청군이 보다 유리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도르곤은 앞에 보이는 조선군 진영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무슨 수를 써서든지 꼭 이기고야 말겠다며 이를 갈고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리는 그의 패기에 주변인들이 흠칫할 정도였으나, 이미 분노로 눈이 먼 도르곤에겐 그런 것쯤이야 안중에도 없었다.
☆ ☆ ☆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전장을 바라보던 도현은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팔기군이 꼬리를 내린 채 허겁지겁 물러서는 걸 보고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
“새로 개발한 남삼식 소총의 위력이 대단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저런 식으로 연발로 총을 쏴 댄다면 팔기군이 아니라 팔기군 할아비라도 그대로 녹아내려 버릴 것이옵니다.”
“맞아.”
“신형 소총의 성능도 뛰어 났지만 팔기군을 막아선 근위 군단 병사들의 목숨을 건 분투奮鬪가 없었더라면 승리를 거두기 어려웠을 겁니다.”
도총관 엄황의 말에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나도 같은 생각일세. 그 꺾이지 않는 의지와 용기가 우리를 승리로 이끈 거야.”
지축을 울리며 무섭게 달려오는 기병을 앞에 두고 병사들이 느꼈을 압박감과 공포는 가히 지옥문을 눈앞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을 텐데 그걸 이 악물고 버텨 냈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겪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길 보십시오.”
남두병 사령관이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청군 진영에서 보병들이 물밀 듯 앞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적이 난전을 유도하려는 것 같사옵니다.”
이를 살펴보던 도총관 엄황이 그리 말하자 도현이 삐뚜름하게 입매를 기울였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는 거지.”
비단 수술이 달린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내려치던 그는 탁 소리를 내며 주먹을 거머쥐었다.
“그럼 똑같이 응수해 줘야지. 도총관!”
“예.”
“용병대를 출전시키게.”
“알겠사옵니다.”
도총관 엄황이 손짓으로 신호를 하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군관이 두 번째 명적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삐이이익.
왜국인들로 구성된 용병대 지휘관인 전적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허공을 가르는 명적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이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두 앞으로!”
공기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러자 뒤에 도열해있던 용병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작은 철판을 가죽으로 연결해 붉은색 칠을 한 간편한 갑옷과 투구까지 챙겨 온 자들도 있었으나, 나머지 대부분은 가슴과 국부에만 보호구를 걸쳤고 그마저도 없는 자들 역시 상당수였으니, 제 몸을 보호하기보다는 공격에 치중하겠다는 뜻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처럼 행색도 제각각인 데다 진흙탕을 구르며 밑바닥 생활을 하는 인간 특유의 거친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는 용병들의 단 하나 공통점이라면, 바로 손에 들고 있는 예리한 검이었다.
용병들에게 있어 검이란 곧 밥벌이 수단이었기에 방어구를 갖출 여유는 없어도 무기를 관리하는 일은 빼먹지 않은 듯 날이 푸르스름하게 서 있어 서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왜국 특유의 길쭉하고 도신이 얇은 검을 쥐고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던 그들은 마치 사냥감을 앞두고 몸을 푸는 늑대 무리처럼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나섰다.
용병대라고 하지만 숫자가 무려 일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다들 어수선한 왜국 정세 속에 말 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전투 경험이 풍부한 데다 손 속 또한 잔인했고 무엇보다 돈이라는 목적의식까지 확실했다.
잔뜩 살기를 피워 올리며 나아가는 용병대 뒤로 총검으로 무장한 조선군 병사들이 전투대형을 갖춘 채 따라갔다.
“돌격!”
처음부터 체력을 빼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용병대는 재차 이어진 전적의 명령에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우와아아아!”
“죄다 죽여 버려!”
“두건 하나당 은화 다섯 냥이다!”
“와!”
확실한 동기 부여를 위해 도현은 용병들에게 적병 한 명을 죽일 때마다 은화 한 냥을 주겠다며 포상금을 걸었다.
그 전공戰功은 청군 병사들이 적아를 구별하기 위해 목에 두르고 있는 푸른색 두건으로 구분하기로 했다.
돈에 눈이 돌아간 용병들은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처럼 덤벼들었다.
청군도 지지 않고 달려 나왔고 양군은 전장 한복판에서 만나 거친 파열음을 내면서 충돌했다.
콰콰꽝!
“아악!”
“컥.”
채챙! 챙!
“죽어!”
푹.
“꾸엑.”
살벌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서로 한데 뒤엉킨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병장기를 상대의 심장에 꽂아 넣거나 베며 혈투를 벌였다.
비명성과 피가 난무했고 양쪽 병사들은 악에 받친 채 오직 상대를 죽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지휘관인 전적도 말에 탄 채 연신 전투를 독려하면서 가까이 있는 적병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적을 단번에 밀어 붙여라!”
츄앙.
푸푹.
자신을 노리고 적이 내지른 기다란 창을 비켜 쳐 낸 전적은 상대의 얼굴을 검으로 찔러 버렸다.
“아아악!”
적은 억눌린 비명을 내지르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적병의 목을 베어 내 마무리까지 확실히 한 전적은 또 다른 적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날카로운 송곳이 촘촘하게 박힌 철 신발을 들어 상대의 어깨를 힘껏 찍어 버렸다.
퍽!
부상을 입고 비틀거리는 적병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촤아악.
상대의 목이 잘리면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그의 얼굴로 갑옷을 더럽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낸 전적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적을 찾아 말을 몰았다.
시간이 갈수록 난전은 더욱 치열해졌고 양군 병사들은 서로를 죽고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한편 보병들만큼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 있었는데 바로 화포를 쏘는 포수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양군 포병대는 서로를 향해 포구를 고정시킨 채 마치 결투라도 벌이듯 포탄을 주고받았다.
거리가 있다 보니 상대를 명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한 발만 제대로 맞아도 화포와 포수들이 화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바로 지척에서 빗나간 포탄이 터지며 흙먼지가 피어오르는데도 포수들은 바닥에 엎드리거나 몸을 움츠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했다.
“화약을 더 가져와!”
“빨리!”
아까 전 바로 옆에서 터진 포탄에 이마가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군관은 상처 부위를 붕대로 감을 여유도 없이 어서 포를 쏘도록 연신 포수들을 다그쳤다.
“장전 끝!”
“좋아. 발사!”
포수 한 명이 격발 장치와 연결된 줄을 있는 힘껏 당기자 육중한 포성이 울리면서 화포가 발사됐다.
꽈아앙!
희뿌연 화약 연기 때문에 포탄이 날아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군관은 파공음을 들으며 어쩐지 이번에는 좋은 느낌이 들었다.
“제발 맞아라!”
주먹을 꽉 움켜쥔 군관은 화포 옆에 서서 간절한 시선으로 적진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그의 기도가 통했는지 잠시 뒤 목표로 잡았던 적 포대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쳤다.
쿠쿵!
쌓여 있던 포탄과 화약이 유폭을 일으켰는지 연이서 화염이 터져 나오며 포대가 통째로 박살 났다.
“우와!”
“명중이다.”
적 포대가 있던 곳에 시커멓게 피어난 버섯구름을 보며 포수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군관도 입가에 얇은 미소를 짓다가 이내 정색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좋아하는 건 나중에 하고 어서 다시 포탄을 장전해라!”
“옛.”
힘차게 대답한 포수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새로 포구에 화약과 포탄을 밀어 넣고 막 장전을 다 끝냈을 때 한쪽에 있던 포수가 다급히 고함을 쳤다.
“포, 포탄이다!”
“……!”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뜬 군관은 시커먼 철환 하나가 이쪽으로 날아오는 걸 보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 안 돼!”
그게 군관이 이 세상에서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음과 함께 이들이 있던 곳에 화염이 솟구쳤다.
희부연 먼지가 주위를 뒤덮었다
눈앞이 온통 하얗게 변한 군관과 포수들은 파편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흙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으악!”
“커헉.”
그렇게 떨어진 이들은 약간 몸을 꿈틀거리다가 숨이 끊어 졌는지 이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서 아군 포대가 박살이 났지만 조선군 포수들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는 듯이 적을 향해 포탄을 날려 보냈다.
이렇게 양군의 포격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하고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런 가운데 보병들 간의 전투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채챙! 챙! 챙!
슈각.
“아악!”
갈색 대지는 양군 병사들이 흘린 피로 검붉게 변해 있었고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격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좀 더 많은 병력을 내보낸 청군이 유리한 것 같았지만 단병접전短兵接戰에 능한 왜국 용병들이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이면서 전세가 조금씩 역전됐다.
거기다가 후속해 오던 조선군 병사들이 소총을 쏘며 난전에 가세하자 청군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타타타탕! 탕! 탕!
“돌격 준비!”
지휘관의 외침에 처음부터 총검을 장착하고 있던 병사들은 힘차게 기합을 내뱉으며 자세를 취했다.
“청국 놈들을 끝장내 버리는 거다. 앞으로!”
“우와아아!”
마치 피를 갈구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벼려진 총검은 뜨거운 햇살 아래 섬뜩한 빛을 내며 번득였다.
앞으로 돌격해 들어간 조선군 병사들은 총검을 찔러 넣거나 단단한 개머리판으로 적병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야압!”
푹.
“끄아악.”
빠각.
“캑.”
기다란 총검은 단번에 등까지 뚫고 나왔고 개머리판에 맞은 상대는 피를 튀기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죽어!”
“끄르륵.”
조선군 병사가 내지른 총검에 찔린 적병은 피가 목구멍으로 차올라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난전에 뛰어든 조선군 병사들은 왜국 용병 못지않게 아주 잘 싸웠다.
아니, 몸을 사리지 않고 적과 싸우는 투지鬪志는 돈에 의해 전장에 나선 왜국 용병들보다 훨씬 나았다.
총검만 쓰는 것이 아니라 조선군 병사들은 달려드는 적을 향해 장전해 둔 총탄을 쏘며 상대를 제압했다.
탕! 탕!
“으윽!”
산발적인 총성이 여기저기에서 계속 이어졌고 매캐한 화약연기가 피비린내와 섞여 코를 찔렀다.
총성이 터질 때마다 청군 병사들이 피를 뿌렸다.
총탄에 맞아 쓰러진 적병의 머리에 개머리판을 내리쳐 끝장을 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개머리판에는 상대편의 머리가 깨지면서 엉겨 붙은 뇌수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조선군 병사는 상관하지 않고 손에 검을 들고 달려드는 또 다른 적병의 가슴에 총검을 쑤셔 박았다.
이렇게 조선군이 승기를 잡아가자 후방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도르곤은 짜증과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멍청한 것들!”
이미 팔기군이 깨지며 초전부터 계획이 어긋났는데 보병들마저 밀리고 있으니 도르곤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벌써 사상자 숫자만 사만이 훌쩍 넘었다.
물론 여전히 본진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기세를 빼앗긴다면 나중에는 역전하기가 더 어려웠다.
조선군을 꺾고 전투에서 이기려면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답답한 심정으로 한참을 더 전장을 바라보던 도르곤은 마침내 아껴 둔 패를 꺼내 들었다.
“총병감!”
“네.”
“진충군을 준비시키도록 해.”
뜻밖의 지시에 용골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충군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러네.”
진충군은 도르곤의 근위 부대나 마찬가지로 청군에서도 신형 소총을 가장 먼저 보급받았고 조선군을 따라 해 신식 훈련을 시킨 병력들이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고부리성과 영원성을 거쳐 오면서 수십 일간 피 튀기는 공성전을 치르면서도 진충군을 소모품을 쓸 수 없다며 한 번도 전투에 투입시키기 않았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보기만 좋은 황제의 장난감은 절대 아니었다.
수십 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는데 입고 있는 푸른색 갑주를 따서 상대한 적들이 푸른 악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아무튼 팔기군과 함께 청 황제인 도르곤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군대인 진충군을 상황이 어렵기는 해도 벌써부터 투입한다는 것에 용골대를 비롯한 장수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중원中原을 적에게 내준다면 아군이 더 위축될 수밖에 없어. 그 전에 상황을 반전시켜야만 돼!”
단호한 도르곤의 말에 다른 장수들은 비장의 패를 너무 일찍 꺼내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용골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황제 앞이라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으나 우세할거라 예상한 난전에서 오히려 청군이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내심 크게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병력 손실도 컸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패하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수십만의 대군이 맞붙어 회전을 벌일 때에는 누가 먼저 승기를 잡아 공세를 펼치는가 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알겠사옵니다.”
“전열이 무너지기 전에 어서 서둘러!”
“옛.”
얼마 안 있어 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청군 진영에서 푸른색 군복을 입은 진충군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 삼만 명가량이었는데 정예답게 군기가 바짝 섰고 동작 또한 절도가 있었다.
그런 청군의 움직임을 조선군 지휘부도 놓치지 않았다.
“깃발을 보니 아무래도 진충군인 것 같사옵니다.”
남두병 사령관의 말에 도현은 천리경을 내리며 입가를 실룩였다.
“이대로 중원을 빼앗기면 승기가 완전히 기운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군.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야.”
“그러게 말이옵니다.”
그가 중얼거린 말에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워하던 도현은 이내 총병관 엄황을 보며 물었다.
“진충군을 상대하려면 병력을 얼마나 더 투입해야 될 것 같나?”
“글쎄요.”
잠시 고심을 하던 엄황은 신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군이 상대에 뒤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사오나 확실하게 우세를 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수同數 이상을 내보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하면 만인대 네 개를 출전시켜야 되겠군.”
“예.”
그러자 남병두 사령관이 굳은 얼굴로 우려를 표시했다.
“지금도 전장이 복잡한데 그러면 자칫 통제가 어려워질 수도 있사옵니다.”
“난전이 확대되면 아군의 피해가 예상보다 늘어날 것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소. 그러나 상대가 저리 나오는데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소이까.”
“차라리 혼란스러운 중원에 병력을 밀어 넣지 말고 우회를 시켜 상대의 측면을 노리는 건 어떻습니까?”
장수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자 엄황과 설전을 벌이던 남두병 사령관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핀잔을 줬다.
“한차례 당했지만 여전히 수만에 달하는 팔기군이 건재한데 청 황제가 그걸 그냥 보고만 있겠나.”
“그건…….”
괜한 말을 꺼내 눈칫밥만 얻어먹은 장수가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민망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 후로도 한동안 갑론을박하며 논쟁이 이어지자 그걸 잠자코 바라보던 도현이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만.”
크지는 않았으나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에 뚝, 하고 말소리가 끊겼다.
“도르곤이 비장의 한 수를 꺼내 들었으니 짐도 그에 상응하는 패를 보여 줘야지.”
“어찌하시려고 그러시옵니까?”
엄황이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현은 스윽 고개를 돌려 적진을 바라본 뒷이야기를 이었다.
“최 장군.”
뒤쪽에 있던 포병대 지휘관 최진석은 도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예, 폐하.”
“신기전은 언제든지 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겠지?”
“물론이옵니다.”
도현이 뭘하려는지 깨달은 장수들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신기전을 쓰시려는 것이옵니까?”
“놈들이 자랑하는 진충군을 몽땅 다 불에 태워 버려서 전의를 확실히 꺾어 버리는 거야.”
잠깐 망설이던 남두병 사령관이 신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신기전 재고가 부족해 많아 봤자 두 차례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옵니다.”
“짐도 알고 있네.”
“그러시면 좀 더 신중히 생각을 해 보시는 것이…….”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도 도현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제때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야. 지금이 바로 신기전을 쓸 때일세.”
“후우. 알겠사옵니다.”
“지금 바로 지시를 내리도록 해.”
“예.”
짧게 대답한 남두병 사령관이 몸을 돌려 가만히 서 있던 최진석에게 눈짓을 하자 바로 신기전 포대로 전령이 달려갔다.
허리를 꼿꼿이 편 도현은 멀리 청군 진영 한복판에 세워진 황룡기를 보면서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곧 지옥을 맛보게 해 주지.”
* 요서회전 2
신기전을 발사하는 화차火車는 바퀴가 두 개 달린 수레 위에 둥근 구멍이 뚫린 나무 상자를 올려놓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다.
구멍 개수에 따라 한 번에 날려 보낼 수 있는 신기전 숫자가 결정됐는데 현재는 백 발이 일반적이었다.
단순히 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무작위로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각도를 조절해 정확히 목표를 타격할 수 있었다.
조선군 대형 뒤편에 이런 화차 스무 대나 약간 거리를 두고 언제든지 신기전을 쏠 수 있게 일렬로 방열되어 있었다.
신기전 부대 지휘관인 이혁권은 말에 앉아 천리경으로 전투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후방에 있는 데다 포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당장 그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는 보병들 간의 전투도 장관이었지만 그의 시선을 끄는 건 양군의 포격전이었다.
아군이 쏜 포탄이 적을 박살 낼 때마다 주먹을 불끈 치켜들며 환호하다가 조선군 포대가 시뻘건 화염에 휘말리면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었다.
같은 포병대였기에 동변상련의 마음을 느끼며 더욱 마음이 아팠다.
“계속 이렇게 지켜만 보고 있어야 됩니까?”
눈에서 천리경을 뗀 이혁권은 고개를 돌려 부관을 봤다.
“무슨 말인가?”
“동료들이 저리 허무하게 죽어 나가는데 두 손을 놓고 멍하니 있어야 되는 것이 너무 화가 나서 그럽니다.”
울분에 가득 찬 부관의 모습에 그는 짐짓 엄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직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니니 그런 것이야.”
“하오나…….”
“허어. 군관이 돼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어쩌겠다는 게야. 폐하와 여러 장군들께서 자네만큼 생각이 없는 줄 아나!”
따가운 질책에 부관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곧 우리가 나설 때가 있을 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기다리도록 해.”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혁권도 아군 포수들이 피를 흘리는 걸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편치는 않았다.
그때 등에 깃발을 단 전령 한 명이 말을 타고 급히 달려왔다.
“워워.”
이히히힝.
전령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자 이혁권이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적진 앞으로 나온 진충군을 신기전으로 격멸하라는 폐하의 지시입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명령에 이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며 전령을 봤다.
“알았네.”
“그럼.”
군례를 취한 전령이 말머리를 돌려 지휘부가 위치한 곳으로 되돌아가자 이혁권은 잔뜩 흥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관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때가 왔다. 발사 준비를 하도록 해.”
“옛!”
힘차게 대답한 부관은 화차 옆에서 대기 중인 포수들한테 가서 명령을 전달했다.
“포격 준비!”
그사이 재빨리 천리경으로 목표를 확인한 이혁권은 사격 제원을 계산한 뒤 크게 소리쳤다.
“전방 천이백 보 고각은 십오에 맞춰라!”
노련한 포수들이 외치는 대로 고각을 조정하자 이내 조준을 끝난 순서대로 붉은색 삼각 깃발을 들어 올렸다.
“하나 포, 조준 끝!”
“둘 포, 완료!”
순식간에 스무 대의 화차가 모두 사격 준비를 끝냈다.
“전 포대 준비가 끝났습니다.”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혁권은 마지막으로 목표를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섬뜩한 바람 소리를 내며 장전된 신기전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쉬쉬쉬쉭! 쉬쉭! 쉬쉬쉬쉭!
신기전이 솟구치며 뿜어내는 화약 연기가 주변을 삽시간에 뒤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화차 하나당 백 발씩 무려 이천 발에 달하는 신기전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다 발사된 것이다.
희뿌연 연기들 사이로 포수들이 이 차 사격을 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신기전들은 정확히 진충군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퍼퍼펑! 펑! 펑!
허공에서 신기전이 폭발하자 둥근 나무통 안에 들어 있던 수많은 자탄이 비처럼 떨어져 내려 진충군 병사들의 몸을 찢어 발겼다.
후두두둑.
“꾸엑!”
“아악.”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적들은 피 칠갑을 한 채 살려 달라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공중에서 터지지 않고 땅에 박힌 신기전은 자탄 대신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치지지직.
“콜록콜록.”
“이건 또 뭐야!”
연신 기침을 해 대며 불발탄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어디선가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부, 불이야!”
“으헉.”
바닥에 박혀 있던 신기전이 터지면서 사방에 불꽃이 튀었다.
큰 폭발이 아니고 파편도 많이 튀지 않았지만 문제는 불꽃이었다.
적병들의 몸에 붙은 불꽃은 하얀 연기를 맹렬하게 내뿜으면서 금방 갑옷을 태워 버리고 안에 있는 피부를 녹였다.
“살려 줘!”
끔찍한 고통에 적병들은 바닥을 뒹굴며 불을 끄려고 했지만 어찌 된 건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견디다 못한 적병들은 갑옷을 벗어 던지기까지 했다.
적들을 불태우면서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것의 정체는 바로 백린白燐이었다.
백린은 물을 부어도 절대 꺼지지 않고 하얀 섬광과 연기를 피워 올리면서 주위에 있는 모든 걸 삽시간에 다 태워 버리는 무시무시한 물질이었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동료가 산 채로 불에 붙어 태워 졌지만 청군은 자신한테 불꽃이 옮겨 붙을까 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지옥 중에 가장 끔찍하다는 염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군이 날려 보낸 두 번째 신기전들이 혼란에 빠진 진충군을 다시 덮쳤다.
콰콰꽝!
희뿌연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채 진충군이 있던 곳이 온통 쑥대밭이 된 걸 보며 도현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제대로 타격을 가했군.”
“사격이 아주 정확했사옵니다.”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이 기세를 몰아서 적을 계속 압박해야지. 도총관.”
“예.”
“세 번째 명적을 쏘아 올리게.”
“알겠사옵니다.”
☆ ☆ ☆
삐이이익.
“장군, 보십시오. 세 번째 명적입니다.”
신익석의 말에 흑치영이 고개를 들자 정말 명적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제대로 복수를 해 줄 시간이 왔군.”
흑치영은 눈을 반짝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팔기군을 함정으로 끌어들인 조선군 기병대는 전장을 크게 우회해서 청군 진영 후방에 집결해 있었다.
조란탄 포격에 이은 근위 군단의 집중사격으로 팔기군에 큰 타격을 안겼지만 기병대가 통쾌하게 복수를 해 준 것이 아니었기에 쌓인 분노를 전혀 해소하지 못했다.
그런데 드디어 모든 걸 시원하게 풀어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지금 바로 움직이실 겁니까?”
“당연하지.”
단호하게 말한 흑치영은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내가 선봉에 설 것이야.”
“장군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자칫 부상이라도 입으시면 큰일이니 제가 대신 선봉을 맡겠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막기 위해 신인석이 만류했지만 흑치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난번 팔기군의 말발굽 아래 죽어 간 부하들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아. 오늘 그들의 복수를 내 손으로 직접 해 주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 속에 살 것 같네.”
“장군…….”
“그러니 아무 말 하지 말게.”
이미 결심을 단단히 굳힌 흑치영의 모습에 신인석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고 내 뒤나 잘 따라오게.”
뒤를 돌아보자 날카로운 예기를 은은히 피워 올리며 늘어서 있는 기병들이 흑치영의 눈에 들어왔다.
든든한 시선으로 기병을 천천히 훑어 본 흑치영은 손에 든 언월도를 치켜들면서 외쳤다.
“팔기군에 누가 진정한 강자인지 보여 주자!”
“우와아아!”
“적진을 가로지를 때까지 절대 말을 멈추지 마라. 전군 돌격!”
돌격 명령을 내린 흑치영은 발로 타고 있던 말 옆구리를 세게 찼다.
그러자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한 군마는 힘차게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고 말이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격렬한 흔들림이 그를 더욱 흥분되게 만들었다.
그런 흑치영 뒤로 수만에 달하는 기병들이 먼지 구름을 뿌옇게 피워 올리면서 빠르게 들판을 질주했다.
☆ ☆ ☆
진충군이 허무하게 박살 나자 손에 든 지휘봉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분통을 터트리던 도르곤은 갑자기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건 또 뭐야!”
“글쎄요?”
몸을 돌려 후방을 살피던 도르곤과 청군 장수들은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한 무리의 기마대가 새까맣게 몰려오는 걸 보고 경악했다.
“저, 저건!”
“조선군 기병대입니다.”
장수들이 크게 술렁이는 가운데 말에 올라앉은 도르곤은 거침없이 밀려드는 기병대의 모습을 보고 고삐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익!”
청군 병사들도 후방에 갑자기 나타난 기마가 조선군인 걸 알고 동요했다.
“이랴!”
“하! 하!”
널찍한 언월도 날로 연신 타고 있는 군마 엉덩이를 때리며 속도를 높이던 흑치영은 적진이 눈앞에 들어오자 목이 터져라 외쳤다.
“궁격 준비!”
그러자 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속에서도 용케 그의 지시를 알아들은 기병들은 안장에 꽂아 두고 있던 각궁을 꺼내 들었다.
화약 무기가 빠르게 도입되면서 중요성이 많이 퇴색됐지만 여전히 각궁은 조선군 기병대의 중요 장비 중 하나였다.
최대 속도로 달리는 중이라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으나 기병들은 두 다리로 단단히 중심을 잡고는 등 뒤에 매고 있던 전통에서 편전을 하나씩 뽑아 시위에 걸었다.
그러고는 팽팽하게 시위를 당기고는 차분히 목표를 겨냥했다.
이 모든 것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것만 봐도 기병대가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들인지 알 수 있었다.
어느새 거리가 오백 보까지 좁혀지고 청군 진영에서 겨우 병력을 추스른 팔기군이 허겁지겁 요격에 나서는 걸 본 흑치영은 치켜 올린 언월도를 아래로 내리며 소리쳤다.
“발사!”
기병들이 명령에 따라 시위를 놓자 편전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팅. 팅.
슈슈슉! 슈슉! 슈슉!
수만 개의 편전이 일제히 날아오르자 하늘은 순간 밤이 된 것처럼 어두워졌다.
정점을 찍은 편전은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늘을 가득 메운 편전에 적들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다.
“화살이다!”
“방패로 막아라.”
“히익.”
다급한 외침이 청군 진영에서 터져 나왔고 적병들은 커다란 사각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편전은 나무로 된 방패를 여지없이 꿰뚫어 버렸고 적병들은 피를 뿌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재차 편전들이 날아들며 청군 진영을 혼란에 빠뜨렸다.
근위 군단이 쏴 댄 총탄에 전사한 야골타 대신 팔기군 지휘를 맡은 달소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청군 병사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모두 비켜라! 팔기군은 나를 따르라.”
두두두두.
그의 명령에 팔기군 잔존 병력 사만이 바짝 날이 선 모습으로 달려 나갔다.
성난 황소처럼 마주 보고 내달리는 양군은 어느새 백 보 안까지 거리가 줄어들며 이제 상대편 얼굴까지 보일 정도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조선군 기병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탕! 탕! 탕!
가지고 있던 권총을 꺼내 쏜 것이다.
이제 한바탕 뒤섞여 칼부림을 할 생각으로 잔뜩 기세를 피워 올리던 팔기군은 뜻밖의 총격에, 선두 열에 있던 이들이 와르르 낙마했다.
제법 거리가 있는 데다 권총의 위력이 약해 큰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지만 이백여 명이 넘는 적들이 피를 흘리면서 낙마하거나 말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크악.”
이히히힝.
“끅.”
그러자 자연스럽게 돌격하는 팔기군의 기세가 한풀 꺾여 버렸다.
가뜩이나 조선군보다 뒤늦게 말을 달려 가속도가 제대로 붙지 못한 상태에서 대형까지 살짝 흐트러진 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조선군 기병대는 그걸 놓치지 않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가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죄다 죽여 버려라!”
“우와!”
쿠쿠쿵!
고함을 내지른 흑치영이 커다란 언월도를 내려쳐 적병을 반쪽 내 버리는 걸 신호로 양군이 서로 충돌해 뒤엉켰다.
버벅.
“크악!”
“하압.”
힘과 힘이 서로 부딪치자 묵직한 파열음이 이곳저곳에서 울리며 병사들이 피 안개를 뿌리며 뒤러 나가떨어졌다.
이히히힝.
어느 편이든 힘에서 밀린 쪽이 모든 걸 잃는 거였다.
조선말로 내지르는 비명도 적지 않았지만 낙마하는 이들 상당수가 팔기군이었다.
예봉이 꺾이면서 상대에 틈을 보인 것이 이런 식으로 크게 돌아왔다.
조선군 병사들은 병장기를 마구 휘두르면서 팔기군 대열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특히 흑치영은 그동안 쌓인 분노를 이번에 모두 다 쏟아 내기라도 하듯 적병의 숨통을 끊어 놨다.
“이야야압!”
슈각.
“끄헉.”
우렁차게 기합을 내지른 흑치영은 마주 보면서 덤벼드는 적병을 향해 시퍼렇게 날이 선 언월도를 휘둘렀다.
웬만한 사내는 들고 있기조차 무거웠지만 타고난 장사인 흑치영은 한 손으로 언월도를 쥐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언월도에 베인 적병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 상태에서 아직 살아 꿈틀거리는 상대를 흑치영이 탄 군마가 말발굽으로 밟아 무참하게 짓이겼다.
꽈직.
또 다른 적병이 검을 치켜든 채 달려들었다.
“죽어라!”
다리를 살짝 쳐서 군마를 움직인 흑치영은 상대의 검을 가볍게 흘리고는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언월도를 앞으로 쭉 뻗었다.
츠릉. 챙!
“아, 안 돼!”
눈앞에 날아오는 언월도 날을 보고 적병이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흑치영의 동작이 더 빨랐다.
푹!
“커, 컥.”
마치 짚단을 자르듯 적병의 목이 힘없이 날아갔다.
뼈가 잘려 나가는 것이 창대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지자 흑치영은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다 덤벼라!”
갑옷에 피를 잔뜩 묻힌 채 흑치영이 소리치자 근처에 있던 적들은 겁에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런 흑치영 주위로 피가 튀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치열한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달소는 좌충우돌하며 팔기군 병사들을 마구 베어 넘기는 흑치영의 모습에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짧은 시간 동안 그가 휘두른 언월도에 죽어 나간 숫자만 대략 십 수 명이 넘었다.
병사들의 희생도 컸지만 무엇보다 불교 설화에 나오는 금강야차金剛夜叉처럼 날뛰는 흑치영의 기세에 팔기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놈을 처리해야 한다.
서늘한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달소는 흑치영에게 다가갔다.
버둥거리며 달아나려는 적병의 등을 길게 베어 버린 흑치영은 옆에서 느껴지는 강한 살기에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몸을 빙글 돌리며 언월도를 치켜 올렸다.
채챙.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리며 달소의 철퇴가 언월도에 막혔다.
“제법이구나.”
“흥. 그대로 되돌려 주지.”
흑치영이 콧방귀를 뀌며 철퇴를 가볍게 밀쳐 내자 달소는 입술을 실룩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까불지 못하도록. 그 주둥이를 아작 내 주마.”
“어디 한번 해보시지.”
손에 불끈 힘을 주며 달소가 철퇴를 휘두르자 흑치영은 창대로 쳐 내고는 언월도를 앞으로 쭉 내려 그으며 상대의 어깨를 노렸다.
틈을 노린 재빠른 반격이었지만 달소도 장군 자리에 그냥 앉아 있는 건 아닌지 상체를 틀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냈다.
그러고는 서로 바짝 붙어 내리 이십여 합을 주고받았다.
채챙. 챙!
한 수 한 수가 맞으면 그대로 숨통이 끊어질 만큼 위력적이었다.
막상막하의 대결이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흑치영이 승기를 잡아 갔다.
특히 언월도를 내려치는 흑치영의 완력은 병장기를 맞부딪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달소가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했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달소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때 언월도를 크게 휘두른다고 흑치영의 허리가 빈 것을 발견한 달소는 눈을 번뜩이며 철퇴를 비스듬히 내려쳤다.
“뒈져라!”
일격에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서 달소는 기합과 함께 온힘을 철퇴에 실었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흑치영은 그걸 보고도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그런 상대의 얼굴에 달소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사실 이건 달소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서 흑치영이 의도적으로 빈틈을 보인 것이었다.
함정인 줄도 모르고 달소가 덤벼들자 흑치영은 몸을 틀면서 전광석화 같은 동작으로 언월도를 휘둘렀다.
슈각!
섬뜩한 절단음과 함께 철퇴를 든 달소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 나갔다.
“……!”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 두 눈을 껌뻑이던 달소는 잘려 나간 손목에서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자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피로 물든 손목을 붙잡고 울부짖는 달소를 차가운 시선을 쳐다보며 흑치영은 아래로 늘어뜨린 언월도를 들어 올리며 마지막 마무리를 지었다.
“끝이다.”
“아, 안 돼!”
머리 위로 떨어지는 언월도에 하얗게 질린 달소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막아 보려 했으나 날카로운 날은 기어코 그의 목과 몸통을 한꺼번에 베어 갈랐다.
“크어억!”
붉은 피 분수가 허공에 솟구치고, 단말마를 지른 달소의 육중한 체구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흑치영은 얼굴에 더러운 흙을 묻히고 나뒹구는 달소의 모습을 아무런 감흥 없이 쳐다보고는 곧바로 또 다른 적을 찾아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치열한 접전 상황에서 지휘관의 전사는 큰 충격과 혼란을 안겨 줬다.
“적장이 죽었다!”
“흑치영 장군께서 적장의 목을 베셨다!”
당장 초반에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팔기군이라는 명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팽팽하게 싸우던 적이 조금씩 삐꺼덕거리더니 이내 급격하게 무너졌다.
반대로 조선군 기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면서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마구 들이댔다.
다른 군대 같았으면 벌써 항복했거나 전열이 붕괴되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을 터였다.
하지만 달소가 죽고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팔기군은 끝까지 전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팔기군이 정예라는 뜻임과 동시에 악착같이 싸워야 될 정도로 현재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거였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함이 팔기군 병사들의 투쟁심을 고취시켰다.
그렇게 되자 먼저 기선을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기병대는 일방적인 전투를 벌이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났다.
서로 상대를 죽이려는 악다구니가 전장에 가득 울렸고 바닥에는 으깨지고 잘려 나간 신체 조각과 선혈이 낭자했다.
나름 선전을 펼쳤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강력했던 저항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이 빠지면서 전세는 조선군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처음부터 이렇게 싸웠더라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겠으나 그건 헛된 희망에 불과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팔기군 병사들이 하나둘 조선군이 휘두른 병장기에 피를 흘리며 말에서 떨어졌다.
팔기군을 괴멸시킨 흑치영과 조선군 기병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곧장 청군 진영 후방을 들이쳤다.
“다 쓸어버려라!”
“우오!”
수만에 달하는 기병대가 검을 뽑아 든 채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모습에 도르곤이 평정심을 잃고 잔뜩 흥분해서 소리쳤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방어진을 만들어서 적을 막아!”
급히 소총은 든 적병들이 뒤로 나와 사격 대형을 갖췄지만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다들 겁을 잔뜩 집어 먹고는 평소보다 동작이 굼뜨면서 자리를 제대로 못 찾는 등 허둥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조선군 기병대가 오십 보 안까지 육박해 들어오자 당황한 청군 장수는 아직 대형을 다 만들지 못했음에도 사격 명령을 내렸다.
“쏴라!”
타타타탕! 타앙! 타탕!
총성과 함께 발사된 탄환들이 조선군 기병을 향해 날아갔다.
씨융. 피슝.
말을 달리는 흑치영의 귓가로 탄환이 공기를 찢으며 지나가는 파공음이 들렸다.
좌우에서 따라오던 기병 서넛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무리 강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할 수밖에 없었지만 흑치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직 정면만 노려봤다.
그러고는 언월도를 치켜들며 마치 맹수가 포효를 하듯 크게 기합성을 내질렀다.
“이야아아압!”
그 모습에 청군은 더욱 위축됐고 반대로 조선군 기병대는 전투 의지를 끌어 올리면서 말을 몰았다.
“어서 쏴! 쏘라고.”
청군 장수가 재차 사격을 독려했지만 어느새 살기가 가득한 상대편 얼굴까지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한 기병대에 적병들은 몸이 굳어 버렸다.
“으으.”
“우린 다 죽을 거야.”
손이 떨려 탄환을 제대로 장전하지 못했고 일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등을 보이면서 대형을 무단이탈했다.
“도, 도망쳐.”
“히익.”
그때 육박해 들어온 흑치영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적병의 머리를 언월도로 베어 버렸다.
“하압.”
깔끔하게 잘려 나간 적병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다른 기병들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청군 대열을 파고들면서 검을 휘둘렀다.
“우웩.”
“커헉.”
조선군 기병들은 검을 쓰는데 거침이 없었고 적들은 대항해 싸우기보다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알아서 적들이 무너지자 흑치영과 조선군 기병들은 마음 놓고 상대를 유린했다.
팔기군에 이어 황급히 방어에 나선 보병대까지 조선군 기병대에 짓밟히자 지금까지 잘 버텨오던 청군 진영이 크게 흔들렸다.
“기병대가 적 후방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사옵니다.”
“역시 흑치영 장군이야.”
지난번 패배의 아픔을 딛고 조선 최고의 돌격장으로서 훌륭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자 도현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흑치영이 팔기군을 박살 내고 청군 후방을 흔들어 주면서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중원도 아군이 승기를 잡아 가고 있었다.
천천히 전장을 넓게 살펴본 도현은 이제 마지막 쇄기를 박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도총관.”
“하교하시옵소서.”
“총공격을 펼쳐 도르곤의 숨통을 끊어 놓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엄황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도현은 얼굴을 바로 해 병사들의 아우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한 전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토록 염원하던 순간이 왔건만 어쩐 일인지 그는 오히려 마음이 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각 제대 앞으로!”
지휘부에서 붉은색 독전기督戰旗가 휘날리자 대기 중이던 조선군 보병대가 일제히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척척척. 척척척.
삼만 명씩 모두 다섯 개의 보병 제대가 움직였다.
각 제대는 부챗살 모양으로 넓게 퍼져 마치 청군을 반원 모양으로 포위하듯 둘러쌌다.
“앞에 총!”
촤라라락.
지휘관의 외침에 조선군 병사들은 절도 있는 자세로 소총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날을 바짝 세운 총검이 햇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고 병사들은 긴장하거나 흥분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지시대로 행동했다.
우왕좌왕하는 청군과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속보로!”
“하압!”
탁탁탁. 탁탁탁.
재차 이어진 명령에 조선군 병사들은 구령의 맞춰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르게 다리를 놀렸다.
그런 상태에서 병사들은 상체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대형까지 딱 맞췄다.
“흐익!”
“적이 몰려온다!”
조선군이 다가오는 걸 보고 당황한 청군 일부가 명령도 없이 가지고 있는 소총을 쐈다.
탕! 탕!
하지만 아직 거리가 먼 데다 조준도 제대로 안 했기에 탄환은 괜히 바닥을 맞히거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러자 신기전이 만들어 낸 무시무시한 불지옥 속에서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청군 장수 홍다구가 급히 진충군 잔존 병력과 소총을 보유한 부대를 끌어모아 방어 대형을 만들었다.
“어서 대형을 갖춰라!”
급한 마음과 달리 꾸물거리는 병사들을 다그치던 홍다구는 고개를 돌려 조선군을 보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어느새 조선군은 삼백 보 앞까지 육박해 오고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어 닥치는 기분이었다.
엄청난 위압감에 홍다구는 애써 태연하려고 했지만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병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는데 뒤를 돌아보자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고 주춤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확실하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서는 좀 더 상대를 끌어들여야 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들이 먼저 무너지겠다는 생각에 홍다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쏴라!”
타타탕!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총구에서 나온 희뿌연 화약 연기가 주변을 온통 뒤덮으며 시야를 가렸다.
피슝. 슈슝. 시이이잉.
탄환이 빗발치듯 조선군 대형으로 날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기세가 눌린 청군이 제대로 조준을 하지 않고 막 쏴 대는 바람에 발사된 탄환 숫자에 비해서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선두열에 서 있던 병사 이삼십 명이 피를 흘리며 엎어졌다.
“으윽.”
“컥!”
바로 앞에서 탄환이 마구 날아오는 위험천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군 병사들은 약간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런 경우를 대비해 혹독한 훈련을 받아 왔기에 다들 정면만 주시한 채 의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탄환에 맞아 빈자리는 다른 병사들이 신속하게 채워 대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 얼마쯤 더 갔을까 함께 움직이던 지휘관이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정지!”
처척.
“사격 준비!”
발걸음을 멈춘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선두열이 무릎쏴 자세를 취하며 정면에 위치한 청군의 겨냥했다.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육중한 총성이 대지를 마구 흔들면서 청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사격이 이루어졌다.
“삼 열 앞으로!”
제일 뒤에 서 있던 삼 열 병사들이 간격을 넓히고 선 동료들 사이를 지나 선두로 나서며 곧장 무릎쏴 자세를 취했다.
그사이 방금 사격을 끝낸 일 열 병사들은 따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도 능숙한 동작으로 허리에 찬 가방에서 탄약포를 꺼내 총을 장전했다.
“쏴!”
타타타탕! 타탕!
“꾸엑.”
“으윽!”
빗발치는 탄환에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우수수 바닥에 쓰러졌다.
삼 열이 소총을 내리자 다시 이 열이 앞으로 나서 사격 자세를 잡았고, 제일 처음 총을 쐈던 일 열이 장전을 다 끝낸 소총을 가지고 가만히 대기했다.
이런 식으로 조선군 보병대는 쉬지 않고 대열을 계속 바꿔 가며 소총을 쏘면서 야금야금 전진해갔다.
몸을 숨길 엄폐물조차 마땅치 않았던 적병들은 틈을 주지 않고 이어지는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치열한 총성이 귓가를 시끄럽게 울렸고 매캐한 화약 연기는 드넓은 전장을 온통 뿌옇게 가득 메웠다.
“피하지 말고 어서 응사해라!”
홍다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지만 청군은 총탄 세례에 겁을 먹고 부들부들 몸을 떨 뿐 제대로 반격에 나서지 못했다.
몇몇은 머리를 흙바닥에 박고 엎드리기까지 했다.
그걸 보고 홍다구가 얼굴을 구겼지만 당장 그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은 말 뒤에 숨어 있었기에 병사들을 탓할 입장이 아니었다.
“제기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여기 벗어나고 싶었으나 조선군 기병대가 뒤를 막고 있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아악!”
바로 옆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갑옷을 입은 군관 한 명이 탄환에 맞아 가슴을 부여잡고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청군 병사들이 공포에 찬 얼굴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어딜 가는 거냐! 명령 없이 도망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斬하겠다.”
동요하는 청군 병사들을 향해 홍다구가 고함을 쳤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열이 그대로 와해될 판이었다.
실제로 군관들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검으로 내려쳐 즉결 처분을 하며 겨우겨우 대열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는데 어느새 오십 보 안까지 접근한 조선군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해 왔다.
“돌격!”
뿌옇게 화약 연기를 피워 올리며 마지막 사격을 끝낸 조선군 병사들은 지휘관의 외침에 총검이 부착된 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
“몽땅 다 쓸어버려라!”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함성에 상대는 크게 위축됐고 조선군은 용기백배해서 적진으로 뛰어갔다.
“마, 막아!”
타탕! 탕! 탕!
산발적으로 쏘는 총에 조선군 병사들이 몇 명 쓰러졌지만 그걸로 돌격을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전의를 불태우면서 거센 파도가 되어 적에게 밀어닥쳤다.
전장 전체에 자욱하게 깔린 화약 연기를 뚫고 달려간 조선군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청군 대열을 파고들었다.
탄환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부하들 앞에 서서 돌격한 천억근은,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창을 들어 올리는 적병을 향해 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헉!”
“죽어라!”
피가 분수처럼 뿌려지며 가슴을 움켜쥔 적병이 옆으로 쓰러져 버둥거렸다.
일격에 상대를 무력화시킨 천억근은 지체 없이 다른 적을 찾아 검을 찔러 넣었다.
푹.
복부를 파고든 검은 등 뒤로 삐죽 튀어 나왔다.
“끄르륵.”
가래 끓는 소릴 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적병의 가슴을 한쪽 발로 밀쳐내며 검을 뽑아 낸 천억근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이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한 가운데 돌격해 들어간 조선군 병사들은 총검을 써서 상대를 찌르거나 베어 넘기고 있었다.
양군의 숫자가 비슷했지만 전의를 상실한 청군은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자리를 지켜라!”
진충군 지휘관인 홍다구가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하려고 고군분투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이놈들!”
입고 있는 갑옷을 온통 피로 물들인 채 혼자서 벌써 조선군을 다섯이나 죽였다.
그러나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조선군이 계속 몰려들었고 어느새 주위에는 살아 있는 청군이 몇 명되지 않았다.
또다시 조선군 한 명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자 홍다구는 인상을 쓰면서 검을 휘둘렀다.
챙.
우연인지 아니면 그가 방심을 했는지 맑은 쇳소리가 울리며 홍다구의 검이 막혔다.
“제기랄!”
순간 당황한 홍다구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회수해 다시 내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조선군 병사의 총검이 홍다구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허억.”
뭔가 뜨거운 것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며 그는 한쪽 팔로 조선군 병사의 소총을 붙잡았다.
“으으.”
믿기지 않는 얼굴로 가슴에 박힌 총검을 내려다본 홍다구는 입을 열어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에 가득 찬 피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죽어!”
그 상태에서 조선군 병사가 힘을 줘서 총검을 더 밀어 넣자 홍다구는 몸을 축 늘어뜨리면서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총검을 빼 낸 조선군 병사는 다른 적을 찾아 앞으로 뛰어갔고 그렇게 도르곤의 측근이자 청군 고위 장수인 홍다구는 요서 벌판에서 쓸쓸히 최후를 맞이했다.
다급해진 청군 지휘부가 예비 병력을 모두 다 투입해 조선군의 공격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앞뒤 전투 대열이 빠르게 무너졌고 청군 병사들은 싸움을 포기한 채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도 아니면 병장기를 내던지고 양팔을 든 채 조선군에 투항했다.
말 그대로 전면적인 붕괴 상황이었다.
☆ ☆ ☆
이제 대형도 뭐도 없이 이리저리 몰리며 조선군에 유린당하는 청군 병사들의 모습에 도르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수가…….”
비록 어쩔 수 없이 영원성을 공략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입장이었지만 회전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조선군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승기를 잡았다고 섣불리 성을 놔두고 사방이 탁 트인 벌판으로 나온 도현을 멍청이라며 내심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자 그의 생각과 달리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최강이라 자신했던 팔기군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졌으며 조선군 병사들의 용맹과 전투력은 청군을 훨씬 뛰어넘었다.
초반에 잠깐 팔기군이 상대편 진영 코앞까지 돌격해 들어갔던 걸 제외하고는 시종일관 열세를 면치 못했다.
팔기군의 돌격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상대가 일부러 깊숙이 끌어들였던 것이니 단 한 번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는 게 맞았다.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조선군의 공격에 청군은 전열이 모두 붕괴된 채 무질서하게 뒤로 밀려났다.
전투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청군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 보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전장은 청군 병사들의 고통에 찬 비명성과 흘린 피가 흙바닥에 가득 고였다.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는 참담한 모습에 악다문 도르곤의 입에서는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공을 들여 조련시킨 군대가 허망할 정도로 힘없이 무너지고 조선군에 투항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도르곤의 눈은 암울하기만 했다.
“폐하, 전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기울었습니다. 속히 후퇴를 하시지요.”
착 가라앉은 용골대의 말에 도르곤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 올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여기서 끝장을 볼 것이야. 당장 본진에 있는 병력을 다 투입해 적과 싸우도록 해!”
“폐하.”
“짐의 말이 안 들리는가!”
극심한 패배감과 분노에 휩싸인 도르곤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그런 도르곤을 안타깝게 쳐다보며 용골대가 일부러 힘을 줘서 말했다.
“더 이상 투입할 병력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와락 인상을 쓰며 주위를 둘러보던 도르곤은 정말 백여 명가량의 친위대를 제외하고 남아 있는 병력이 거의 없자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이게…….”
“팔기군은 이미 와해됐고 본진에 있던 예비 병력도 이미 다 써 버린 지 오래됐습니다. 분하지만 우리가 패했습니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폐하…….”
수많은 청군 병사들의 시신과 본진을 향해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군을 번갈아 보며 바라보던 도르곤은 얼굴을 새빨갛게 상기시킨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다 순간 단발마를 내뱉으며 몸을 휘청거렸다.
“크윽.”
“폐, 폐하!”
급히 도르곤의 몸을 받쳐 든 용골대는 눈이 뒤집히고 숨을 가쁘게 쉬는 걸 보고 다급히 소리쳤다.
“이런! 폐하를 모시고 여길 빠져나간다. 어서 서둘러라.”
“옛.”
숨을 편안히 쉴 수 있게 갑옷 매듭을 느슨하게 푼 용골대는 도르곤을 직접 들쳐 업고는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았다.
“가자.”
두두두두.
남아 있는 청군 장수들과 친위대가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고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급히 빠져나갔다.
얼마나 급했는지 아직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잔존 병력들한테 퇴각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그들은 사력을 다해 포위망을 헤치고 나아갔다.
“여기만 벗어나면 희망이 있다! 더 빨리 달려라.”
용골대의 독려 속에 청군 지휘부는 기적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양쪽 병사들이 서로 뒤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곳을 지나 탁 트인 벌판이 보이자 희망에 찬 표정을 짓던 청군 지휘부는 언제 나타났는지 앞을 가로 막고 선 조선군 보병대에 눈을 크게 부릅떴다.
“이런.”
언제 조선군 기병대가 쫓아올지 모르는 데다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용골대는 그냥 돌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이랴!”
“하! 하!”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빠르게 다가오는 청군의 모습은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사격 대형을 취하고는 상대를 향해 소총을 들어 올렸다.
“거총!”
처척.
“조준. 발사!”
군관의 명령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수백 개의 총구에서 불을 뿜어져 나왔고 주위가 하얀 화약 연기에 휩싸였다.
타타타탕! 타탕! 탕!
☆ ☆ ☆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까지 함락시키면서 한때 청나라의 전성시대를 이끌던 도르곤은 무리한 조선 원정을 감행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황제인 도르곤과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자 얼마 뒤 남은 청군 병사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든 전장은 조선군 병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다들 지치고 힘들었지만 승리가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 다 씻겨 내려갔다.
“대조선제국 만세!”
“만세! 만세!”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 오후 늦게까지 계속된 이날 전투로 청군은 무려 십칠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십만에 달하는 포로가 잡혔다.
조선군도 팔만의 사상자가 생겨났지만 청군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바로 주력 병력과 함께 청 황제인 도르곤이 전투 중에 전사했다는 거였는데 이로써 청국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됐다.
대승을 거둔 도현은 사흘간 그 자리에 머물면서 전장을 정리하고 전력을 재정비한 뒤 다시 서쪽으로 진군했다.
도르곤과 원정군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청국 조정은 어느 날 갑자기 북경성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엄청난 숫자의 대병력과 황금 봉황 깃발에 발칵 뒤집혔다.
뒤늦게 그때서야 만리장성을 넘어 출병했던 원정군이 전멸되고 도르곤까지 전사했다는 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직 북경성이 건재했지만 당산 지역에 상륙한 군대가 주변을 장악하면서 외부와 접촉을 어렵게 만든 데다 도현이 지휘하는 조선군 본대의 진군이 워낙 빨라 이런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청국 조정도 도르곤이 양자로 받아들여 차기 황제로 유력한 예친왕 도르보와 남아 있는 황실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나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었다.
하지만 상륙군의 존재 때문에 쉽게 성문을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완전히 발이 묶이고 말았다.
북경성을 완전히 포위한 도현은 사자使者를 보내 항복할 것을 종용했다.
죽은 도르곤이 정예를 몽땅 다 조선 원정에 데려가 버리면서 북경에 남아 있는 병력이라고는 전투력이 떨어지는 향용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만이 채 안 돼서 수십 리에 달하는 성벽을 지키는 것도 벅찰 정도였다.
항복을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서로 멱살잡이를 할 만큼 치열한 다툼 끝에 아직 우세를 점하고 있던 강경파가 뜻을 관철시켰다.
비록 포위를 당하고 병력마저 부족했지만 이중으로 쌓은 높고 단단한 성벽이 있고 지방 병력을 급히 불러올리면 충분히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강경파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생각은 산산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제시한 시간이 하루가 지나도 북경 성벽에 백기가 내걸리지 않자 도현은 즉시 미리 방열시켜 둔 화포들을 동원해 포격을 개시했다.
본대와 상륙군이 가진 화포를 모두 다 합쳐 무려 삼백 문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포병대가 강철 비를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육중한 포성이 사방을 뒤흔들고 북경성은 자욱한 포연으로 뒤덮였다.
바로 북경성에 있는 청군 포대가 반격에 나섰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조선군의 집중 포화에 모두 침묵하고 말았다.
그 뒤로는 조선군 포병대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무시무시한 포탄 세례에 북경성은 하루가 다르게 엉망이 되어갔다.
하루에 쏟아지는 포탄 숫자가 평균 천 발에 육박했는데, 발해만을 통해 수군이 원활하게 보급을 해 주고 있기에 가능했다.
북경성을 폐허로 만들어 버릴 기세로 포격을 퍼부으면서도 도현은 단 한 번도 보병을 투입해 성벽을 공략하지 않았다.
계속된 전투로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가능하면 최소한의 피해로 북경을 함락시키려는 그의 의도 때문이었지만, 그걸 모르는 청군은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외성 벽이 허물어지고 시가지가 쑥대밭이 되어 갔지만 청국 조정은 지방 병력이 도착하면 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희망에 수성을 계속 고집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며칠 뒤 석가장에서 전해진 급보에 모두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북경성을 지원하기 위해 급히 집결하던 산동성 향용군이 석가장 근처에서 조선군 기병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패퇴했다는 것이었다.
오매불망 지원군이 도착해 포위를 풀어 주기를 기다리던 청국 조정에는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아직 남쪽 국경에 있는 군대가 남아 있었지만 병력을 집결시켜 북경까지 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 이상은 기다려야 했다.
당장 하루에도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하고 포격에 약해진 성벽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동안 조정을 주도하던 강경파의 목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대신 온건파의 주장이 힘을 받았다.
하지만 청나라의 명운이 달린 일이었기에 쉽게 항복을 결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시간을 끌고 있을 때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신기전이 북경성 포격에 투입된 것이다.
요서 회전에서 신기전 재고를 모두 소진해 그동안 뒤로 빠져 있었던 화차들은 새롭게 생산한 물량이 대거 도착하자 바로 공격에 투입됐다.
공기를 찢는 특유의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오른 수천 발의 신기전들은 일순간 북경성 안을 그야말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병사들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들까지 모두 뛰어 나와 소화 작업에 나섰지만 백린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을 뿌려 댈수록 더 거세게 타오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하루 만에 겨우 불길을 잡았을 때에는 이미 북경 시가지 절반이 잿더미로 변한 뒤였다.
거기다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성벽 일부가 무너지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조선군 보병까지 본격적으로 공성전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자 청국 조정은 버틸 힘을 잃고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리고 행여나 조선군이 공격을 개시할까 봐 바로 성문 지붕에 백기를 내걸고 도현에게 항복을 하겠다는 사신을 보냈다.
☆ ☆ ☆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처럼 무거운 침묵 속이었다.
도현은 간이로 세운 단상 위 옥좌에서 북경 성문을 바라보며 바람이 머리 위에 걸린 차양을 펄럭이는 소리를 들었다.
단 아래에는 여태껏 함께해 온 장수들이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기다리듯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도현의 얼굴은 무표정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랬던 그가,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눈썹을 꿈틀거렸다.
도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장수들은 활짝 열어젖혀진 북경 성문 저 너머에서 한 무리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고 낮게 숨을 들이쉬었다.
본래라면 황금빛 곤룡포를 입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칭송받으며 황태자의 자리에 앉아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아야 할 이가 마치 평민처럼 소박한 옷을 걸치고 직접 제 발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홑겹 의복에 평소 머리에 쓰고 있던 조관마저 없으니 반쯤 벌거벗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기분을 느낀 도르보는 찌르는 듯한 시선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것은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조선의 황제였다.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에 도르보는 불현듯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뒤를 따르는 이도 몇 없이 흙바닥에 서 있는 그와는 달리, 도현은 믿음직스러운 그의 군사들에 둘러싸여 옥좌에 앉아 있으니 새삼 처지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양부인 도르곤이 살아 있었다면 감히 조선국 국왕 따위가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있냐며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막상 그가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린 지금,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는 너무나 극명했다.
도르보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조선군 장수들이 양옆으로 길게 도열해 있는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바늘처럼 등을 쑤시는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지만, 그는 입술을 잘근 씹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도르곤의 피를 이은 친조카이며 나아가 그의 양자로 입적된 도르보에게 누가 감히 이런 식으로 무례함을 저지른단 말인가.
눈을 마주치기는커녕, 엎드려 얼굴조차 들지 못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거늘 뒤늦게 겪는 생소한 치욕에 그는 몸을 잘게 떨었다.
“황제 폐하께 예를 올리시오.”
어느새 단상 앞에 다다르자, 칠현이 도르보를 멈춰 세우고 말했다.
그는 일순 주춤하는 듯싶더니 천천히 몸을 굽히고 땅에 무릎을 대었다.
도르보의 머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공기가 파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삼배구 고두례.
황제에게 올리는 신하의 예였다.
즉 청나라가 조선을 상국으로 인정하며, 스스로가 신하인 것을 승복하는 것이기에 이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도르보가 바닥에 머리를 찧을 때마다 쿵, 하는 작은 소리가 울렸다.
고르지 않은 흙과 자갈 때문에 이마에 상처가 났으나 주위에 서 있는 누구 하나 그를 걱정하며 만류하지 않았다.
싸늘할 정도로 냉엄한 분위기 속에서 도르보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박는 동안,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면서 통쾌함과 벅찬 감동을 느꼈다.
조선 왕조에서 가장 큰 치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게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었으니 그걸 그대로 되돌려 줬다는 사실에 전율과도 같은 짜릿한 감정이 전신을 휘감았다.
“신 예친왕 도르보가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마침내 삼배를 다 끝낸 도르보가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도현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돌조각이 박힌 이마에는 붉게 부어오른 생채기 자국이 선연했고, 더러운 땅바닥에 몇 번이나 얼굴을 갖다 댄 덕에 뺨과 코끝엔 흙먼지가 가득했다.
도르보와 함께 따라온 환관이 금으로 세공한 함을 건네주었다.
뚜껑을 열자 빛을 받아 찬란하게 번쩍이는 옥쇄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천자, 즉 황제를 나타내는 옥쇄를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던가.
그런데 그런 물건이 고스란히 도현에게 바쳐지니 이는 실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사건임이 틀림없었다.
도르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옥쇄를 받쳐 들고 도현을 향해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도르보라……. 도르곤의 양아들이라지?”
도현의 물음에 도르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렇사옵니다.”
“하면 예친왕이란 호칭은 틀린 것 아닌가. 도르곤이 죽었으니 이제 그대가 그 뒤를 이어야 할 텐데…….”
원래대로라면 도르보는 도르곤이 후계자로 삼고자 들인 양자였으니 다음 대 황제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도현의 앞에서 황제라 자청할 수 있을까.
어찌 대꾸할 바를 모르고 도르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일어서서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청은 제후국으로서 아국을 대대손손 섬기고, 충성을 다 바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도르보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감격을 이기지 못한 도총관 엄황이 손을 들어 외쳤다.
“대조선제국 만세!”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우와아!”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환호성이 물밀 듯이 터져 나오듯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귀가 어릿할 정도로 크고 격정적인 함성에 주위의 공기마저 찌르르 진동하는 듯 했다.
병사들이 정신없이 승리를 자축하는 가운데 도현은 단상에서 내려와 애마에 휙 올라탄 뒤, 망토를 휘날리고 고삐를 잡아 쥐었다.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려라!”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빛 아래 봉황기가 눈부시게 펄럭였다.
하늘조차 이날을 축복하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운데, 도현은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장수들과 개선행진을 이끌고 북경에 입성했다.
숱한 전투 끝에 조선이 청을 완벽하게 무릎 꿇린,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환호를 받으며 북경성에 발을 디디는 순간 누구보다 도현의 가슴이 크게 벅차올랐다.
* 종장
도르곤이 대군을 일으켜 산해관을 나오면서 시작된 전쟁은 북경성 함락과 후계자인 도르보의 항복으로 모두 종결됐다.
이번 전쟁으로 청나라는 무려 사십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그 절반에 해당하는 병력이 포로가 됐다.
숫자로만 봐도 청군 전체 병력에서 삼분의 이가 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단순히 인원수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 박살 난 군대가 팔기군을 포함해 대부분 정예 병력들이었기에 실질적으로 입은 청군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실상 청나라의 군사력이 거의 무력화됐다고 해도 지나친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요서 회전에서 황제인 도르곤을 비롯해 군을 이끌어 가던 뛰어난 장수 대부분이 전사하면서 몰락의 화룡정점畵龍點睛을 찍었다.
물론 조선군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사상자 총합계가 십칠만 명에 달했다.
왜국 용병 칠천 명이 포함된 거였지만 그걸 빼더라도 상당한 피해였다.
그리고 부상자 가운데 상당수가 사망하고 말았는데 도현이 최선을 대해 치료하라고 황명까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충분하지 못한 의료 체계로 인해서 안타깝게도 열에 여섯 명 꼴로 숨을 거뒀다.
이런 사실을 보고 받고 크게 충격을 받은 도현은 즉시 혜민서惠民署 아래 의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는 기관을 새로 만들고 의료 체계를 정비해 다시는 아까운 생명을 잃는 일이 없도록 했다.
한편 청나라의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조선은 북경을 포함해 산동과 화북, 산서까지 모두 세 개 성省을 할양받고 조선 금화로 일억 냥을 보상금으로 지금받기로 했다.
땅도 땅이었지만 일억 냥은 청나라로서도 부담되는 액수였으나 전쟁에서 패하고 황도까지 함락당한 패전국이었기에 아무런 반발도 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나마 황실 보고와 북경성에 있는 국고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면 힘겨워도 어느 정도 액수를 채워 넣을 수 있었으나, 도현이 그건 전쟁을 통해 조선이 정당하게 획득한 노획물이라고 하며 다 가져가 버렸기에 더욱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청국 조정은 할양이 확정된 지역 외의 영토에서 정말 빡빡 긁다시피 재물을 모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랜 전쟁으로 청나라 경제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죽은 도르곤이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재물을 징발한 뒤였기에 보상금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결국 청국 조정은 마련하지 못한 보상금을 삼 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는 대신 이자 명목으로 천만 냥을 더 지급하는 걸로 조선과 다시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마련한 오천만 냥과 할양하기로 한 영토를 모두 넘겨주고 나서야 도르보와 청국 대신들은 겨우 이제 조선 땅이 된 북경을 떠날 수 있었다.
북경을 잃은 청국 조정은 조선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안휘성安徽省에 위치한 회남淮南을 수도로 정하고 그리로 옮겨 갔다.
내쫓기다시피 회남으로 가게 된 도르보와 청국 조정은 제대로 된 궁宮도 없어 성청省廳을 급히 수리해 거처로 삼아야 할 정도로 초라한 처지가 됐다.
거기다 제국이 아닌 제후국으로 강등돼 황제라는 명칭조차 쓸 수가 없었다.
경제와 군사력이 무너지고 영토마저 쪼그라든 청나라는 이제 약해진 틈을 노리고 남명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되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바닥까지 추락한 청나라와 달리 조선은 이번 전쟁으로 유일무이한 패권국으로 우뚝 서는 것과 동시에 광활한 영토를 확보해 발전의 초석을 확실히 닦았다.
조선 영토 서쪽에 위치한 큰 도시라는 뜻으로 북경을 서경이라고 이름을 고친 도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반년 가까이 머물면서 점령지를 확실하게 흡수할 수 있도록 안정화 작업을 펼쳤다.
한족들은 이민족의 지배에 익숙해져 있는 데다 오랜 전쟁과 수탈로 청나라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져 있었기에 조선으로 편입되는 데 큰 반발은 없었다.
거기다 만주와 요동 지역을 흡수하며 충분히 경험을 쌓고 더욱 체계화된 동화同化정책을 써서 빠르게 점령지에 거주하는 한족들을 조선인으로 바꿔 나갔다.
도현은 점령지를 완전히 조선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동화정책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고 무엇보다 우선해 실시하고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런 정책적인 노력과 작업을 통해 지금까지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통일한 수많은 이종족들이 거대한 인구수를 가진 한족에 휩쓸려 어느새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하고 달리 조선은 반대로 모든 걸 조선화시켜 버렸다.
물론 문화와 정신을 바꾸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우수한 문화를 가진 조선이었기에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뿐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점령지를 어느 정도 안정시킨 도현은 당분간 각 성省별로 모두 세 개 구역을 나눠 행정 체계가 완전히 갖춰질 때까지 군정軍政을 실시토록 하고는 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개선했다.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청나라한테서 항복을 받아 내고 그 옛날 광개토 대왕보다 더 위대한 제국을 만들어 낸 도현의 개선에 배가 도착한 제물포 항구부터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환호성을 보냈다.
이미 한번 승전식을 치르고 논공행상까지 다 끝냈지만 도현은 이틀에 걸쳐 휴일을 선포하고는 내탕금을 풀어 전국의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나눠 주며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새로 확보한 영토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 높이가 스물세 자(7미터)에 달하는 전승비戰勝碑를 세워 전쟁 승리와 도현의 업적을 상세하게 기록해서 후대에 남기도록 했다.
☆ ☆ ☆
이번 전쟁은 조선과 청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장 그동안 애써 무시해 왔던 조선의 무서운 성장세에 남명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국력이 위축된 청을 쳐서 지난날 복수를 하고 조금이나마 영토를 회복하자는 주장이 크게 대두됐다.
안 그래도 거침없는 도현의 행보에 자극을 받은 남명 황제 주율건은 무려 삼십만에 이르는 대군을 일으켜 양자강을 건넜다.
조선에 패해 회남으로 쫓겨 내려온 지 일 년 만에 청나라는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국경은 넘자마자 남명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며 금방이라도 회남을 함락시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조선에 쥐어 터지고 영토까지 크게 줄어든 청나라였지만 얼마 전까지 패권국으로 군림하던 저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예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힘들게 새로 재건한 팔기군과 친왕군이 회남 부근 평야에서 사흘에 걸친 대접전을 벌인 끝에 남명군을 대파했다.
그러고는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해 남명군을 양자강 너머로 쫓아내 버렸다.
십 수 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고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쁜 남명군이었기에 그대로 양자강을 건너가 영토를 넓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록 승리를 거뒀어도 청나라의 사정 또한 그리 좋지 않았기에 아쉬워도 국경선을 다시 회복한 데 만족해야 했다.
남경으로 회군한 주율건은 청이 양자강에서 진격을 멈추자 겨우 한숨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청과의 전쟁은 거기서 일단락이 됐지만 그 후폭풍이 남명 전체에 너무나도 거세게 불어닥쳤다.
이번까지 합쳐 무려 두 차례나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가 한 치의 땅도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큰 피해만 입은 주율건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한 거였다.
특히 주율건이 황위에 오르면서 소외받고 있던 화북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고, 거기에 일부 토착 세력까지 합세하며 세력이 크게 불어났다.
급기야 전쟁이 끝난 지 일 년이 채 안 돼서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분노한 주율건이 당장 군대를 광동성广东省에 파견했지만 오히려 대패를 당해 버렸다.
한껏 기세를 올린 반란군은 해안을 따라 복건성福建省으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남명은 길고 긴 내전에 빠져들었다.
남경에서 급히 군대가 추가로 내려오면서 주춤해지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광동성을 휩쓸고 복건성까지 진출한 반란군의 기세에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이런 반란군의 행보에는 뒤에 주작단의 공작이 숨어 있었다.
청나라가 위축된 틈을 타고 남명이 다시 힘을 키워 새로운 경쟁자로 떠오르는 걸 경계한 도현의 지시를 받은 주작단이 불만 세력을 은밀히 부추겨서 내전을 벌이도록 만든 것이다.
도현이 원하는 건 대륙이 조선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세 개로 작게 쪼개져 서로 아옹다옹하며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이걸 위해 이완 단장이 이끄는 주작단은 청과 남명 그리고 새롭게 한자리를 차지한 반란 세력에 대해 은밀히 공작을 계속 벌였다.
☆ ☆ ☆
왜국은 상황은 대륙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동안 주둔하던 조선군이 철수하면서 지방 번주들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킨 것이었다.
수년 동안 전력을 회복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예전만큼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던 막부는 반란에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왜국은 각 번주들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서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마치 히데요시 이전의 전국시대와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걸 통제해야 될 막부도 세력이 급격히 줄어들어 겨우 간토 평야 인근만 장악한 대영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던 와중에 왜국 정세를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빠뜨리는 일이 터졌다.
바로 천왕을 포함한 왕실 가족들의 몰살이었다.
반기를 든 번주들이 명분을 쌓기 위해 천왕을 끌어들이려고 하자 위기감을 느낀 이에미쓰가 교토에 있는 왕실을 막부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육로는 이동 중에 다른 번주들에게 습격을 받게 될 위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바다를 이용해 도쿄까지 가기로 했다.
이세만伊勢灣까지는 별다른 일없이 순탄하게 잘 왔는데 항해를 시작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재앙이 다가왔다.
갑자기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더니 폭풍우가 치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쏟아지고 집채만 한 파도가 넘실거리자 천왕과 왕실 가족들을 태운 배는 힘없이 출렁거렸다.
파도를 맞으며 선원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배는 거친 폭풍우를 이기지 못하고 전복되고 말았다.
다음 날 근처 해안가로 많은 부유물과 선박 잔해 그리고 사람들의 시신이 밀려 왔는데 거기에 왕실 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왜국 천왕의 가계家系가 완전히 끊겨 버리고 말았고 막부는 전통성에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때부터 왜국은 세력 다툼을 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상 천왕 아래 하나의 국가라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큰 세력을 이룬 번주들 사이에서 스스로 왕이라 칭하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했는데, 이건 지금까지 왜국 역사에서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이걸로 막부 체계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됐고 왜국은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번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틈을 이용해 도현은 최근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왜구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구주九州를 공략해 점령했다.
그러자 이에미쓰가 사신을 보내 당장 항의를 해 왔지만 도현과 조선 정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왜구를 막지 못해 피해를 입었다면서 막부 측에 보상을 요구했다.
이에미쓰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으나 당장 싸울 힘이 없는 데다 다른 번주들이 반기를 들고 있는 상태에서 조선과 관계가 틀어진다면 큰일이었기에 구주 점령을 인정하는 걸로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도현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구형 화포 오십 문을 넘겨줘 막부를 달랬다.
그렇게 주변국들이 혼란에 휩싸여 있는 사이에 조선은 점령지를 안정화시키면서 빠르게 통합을 이루어 나갔다.
다시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조선은 이제 명실상부한 패권국으로서 아시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동안 예전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조선을 인정하지 않던 남명도 결국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대륙을 평정한 도현은 바다로 눈을 돌려 적극적으로 해상 진출을 했다.
수군 함대와 상선단을 곳곳에 파견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는데 첫 목표는 서태평양의 중요 거점인 과한(Guahan)이었다.
오늘날 괌이라 불리는 곳으로 1521년 마젤란이 발견한 이후 에스파냐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원주민인 차모로족을 몇백명 되지 않는 에스파냐 인들이 지배하며 온갖 착취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수군 육전대를 상륙시킨 조선은 에스파냐 인들을 모두 몰아내고 금방 섬을 장악해버렸다.
태평양 항로의 중요 기항지를 잃은 에스파냐는 당연히 격렬히 항의를 했지만 도현은 무시해버렸다.
자존심에 상처가 났을 뿐만 아니라 이대로 힘없이 식민지를 내줄 수 없었던 에스파냐는 왕실 함대를 남중국해로 보냈다.
이제 조선 영토로 확실히 편입된 대만을 공격하고 더 나아가 제주도를 거쳐 수도인 한양까지 치려는 거였다.
과한 섬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패자가 된 조선을 꺾어 태평양과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언 에스파냐의 계획은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아직 수에즈 운하가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였기에 왕실함대는 멀리 아프리카 대륙 끝까지 내려가서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거치는 기나긴 항해를 해야만 남중국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장 육개월에 걸친 항해에 병사들은 지쳐 버렸고 중간에 전염병까지 돌아 수백 명이 죽어나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항해나 다름없었는데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겨우 남중국해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길목을 지키고 있던 조선 함대의 공격을 받았다.
가뜩이나 지치고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치우급 전함보다 더 커지고 개량을 한 태황급 전함 다섯척이 포함된 조섬 함대의 포위 공격에 에스파냐 함대는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무려 오십여 척에 달하는 군함을 한번에 몽땅 다 잃어버린 에스파냐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에스파냐는 과한 섬뿐만 아니라 필리핀까지 조선에 넘겨주고 말았다.
에스파냐와의 전쟁으로 영국과 스페인 네덜란드를 비롯한 많은 서양 국가들이 조선을 크게 경계하며 호시탐탐 꺼꾸러뜨릴 기회를 노렸다.
그걸 잘 알고 있던 도현은 확장 정책을 펴는 것과 동시에 적절한 외교도 같이 사용해 적을 최대한 줄였다.
그와 동시에 서양 국가들과 달리 새로 편입된 지역의 원주민들을 차별하지 않고 넓게 포용하며 진정으로 조선의 백성이 되도록 만들었다.
한편 유럽에서 연거푸 영국에 패하면서 제해권을 상실한 네덜란드는 세력이 크게 위축됐다.
이런 상태에서 해군을 확충한 영국이 인도와 아시아 그리고 신대륙으로 빠르게 영향력을 넓혀 나가자 네덜란드는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패전으로 인한 막대한 지출과 추락한 경제로 인해 또 다시 영국과 전쟁을 벌이거나 식민지 경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던 네덜란드는 차선책으로 조선과 협력하는 걸 선택했다.
네덜란드 령 인도차이나(인도네시아)에서 상당한 이권을 조선에 양보하는 대신 영국의 위협을 막아주기로 한 것이었다.
조선에 먼저 무릎을 꿇고 보호를 요청한 굴욕적인 일이라며 서양 각국들이 비난을 퍼부었지만 당장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와 이권을 몽땅 잃을 처지에 놓인 네덜란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선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우선 봉황상단을 비롯한 여러 조선 상단들이 인도차이나에 진출해 목재와 고무, 마닐라 삼같은 상품들을 싼 가격에 들여올 수 있게 되어 경제적인 이득을 얻었다.
아울러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제국주의 침략에 나선 영국이 아시아에 발을 들여 놓기 전에 미리 차단해 버리는 것도 있었다.
당연히 영국은 조선과 네덜란드의 동맹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앞서 에스파냐 함대가 대패를 당한 일도 있고 무엇보다 막강한 조선의 해군 전력을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굳이 아시아가 아니더라도 식민지로 만들 땅이 다른 곳에도 많다는 것도 이유가 됐다.
덕분에 원역사와 달리 영국은 인도를 경계선으로 더 이상 아시아로 진출하지 않았고 대신 아프리카와 신대륙에 집중했다.
물론 세월이 더 흘러 영국이 충분한 힘을 가지게 되고 식민지로 만들 땅이 부족해진다면 상황은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면서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던 조선에 새로운 적수가 나타났는데 바로 동진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 제국이었다.
야금야금 시베리아를 집어 삼키면서 동진해 오던 러시아와 동양의 패자로 우뚝 선 조선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성 장군.”
“예, 전하.”
말없이 안장 위에 앉아 천리경으로 전방을 바라보던 이연 황태자의 부름에 경장 갑옷을 입은 장수가 옆에 있다가 얼른 대답했다.
“노서아露西亞(러시아) 기병대가 돌격을 해 오면 일제사격으로 모두 제압하도록.”
“알겠사옵니다.”
“그 뒤에는 아군 기병대가 바로 반격에 나설 것이네.”
“네.”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장군은 이연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그러는가?”
“꼭 돌격에 참가하셔야 되겠사옵니까?”
이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났을 텐데.”
“솔선수범하시려는 것은 좋사오나 적진 한복판으로 직접 돌격해 가신다는 건 너무 위험하옵니다.”
“전장에 나온 이상 위험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겠나. 그리고 황태자인 내가 몸을 사리면서 어떻게 병사들보고 앞으로 나가 적과 싸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는가!”
“하오나…….”
“됐네. 내 결심은 변하지 않으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게.”
이연이 딱 잘라 말하자 장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때 근처에 있던 군관이 한쪽 팔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적이 돌격해 옵니다!”
고개를 들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털모자를 머리에 쓴 노서아 기병대가 무리를 이뤄 밀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얼추 오백 명 정도 되겠군.”
위압감을 느낄만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차분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방포를 준비하게.”
“옛.”
장군이 대기하고 있는 신호수를 보며 손짓을 하자 붉은색 깃발이 올라갔다.
그걸 본 보병대 지휘관이 손에 든 검을 위로 치켜들며 소리쳤다.
“대대. 거총!”
“거총.”
처처척.
진형 앞에 서서 사격 대형을 갖추고 있던 보병들은 미리 장전해 둔 소총을 들어 달려오는 노서아 기병대를 조준했다.
지난 십 년간 조선군은 많은 변화를 거쳤는데 편제와 계급을 효율적으로 고치고 병사들의 복장도 크게 바뀌었다.
당장 보이는 보병만 해도 예전에 입던 쾌자快子 대신 바지와 상의가 분리된 진녹색의 신형 군복으로 교체됐다.
그리고 신발도 미투리라고 불리는 망혜芒姪 대신 가죽으로 만든 군화와 각반이 지급됐다.
모자도 전립 대신에 챙이 있는 걸로 바뀌었고 허리에는 작은 가방이 달린 탄띠를 차서 총알을 보관했다.
“일제사격 후 각자 자유 사격으로 적을 괴멸한다!”
지휘관이 명령을 재차 주지시키는 동안 노서아 기병대는 어느새 이백 보 거리까지 바짝 접근했다.
충분히 사거리 안에 들어왔지만 조금 더 기다린 지휘관은 이내 검을 아래로 힘차게 내리며 외쳤다.
“발사!”
타타타탕! 타타탕! 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면서 수백 발의 탄환이 발사됐다.
시야를 가리는 연기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조선군 보병들은 총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재빨리 탄약을 재장전하고는 시커먼 인영을 향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커억!”
“으윽.”
이히히힝.
자욱한 화약 연기 너머로 귀신처럼 흰 얼굴에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른 노서아 기병들이 무더기로 낙마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고 구슬픈 말울음 소리도 들렸다.
러시아 기병대 지휘관인 로스토프 대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호기롭게 돌격을 하다가 전방에서 들리는 격렬한 총성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악명 높은 조선군 보병의 일제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달리던 부하들 상당수가 황량한 벌판에 피를 뿌리며 낙마해 나뒹굴고 있었다.
“이, 이런!”
경악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와중에서도 총탄이 계속해서 날아왔고 로스토프도 총격을 피할 수 없었다.
“큭!”
뜨겁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왼쪽 어깨를 파고드는 고통에 로스토프는 자신도 모르게 답답한 신음을 내뱉었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기도 전에 또 다른 총탄이 그의 가슴에 명중했고 타고 있던 말도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주저앉았다.
조선군 기병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 이연 황태자는 일제사격에 적군의 돌격이 막히자 지체 없이 허리에 찬 검을 빼 들며 명령을 내렸다.
스르르릉.
“노서아 놈들이 다시는 국경 근처에 알짱거리지 못하도록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
“우와!”
“대대, 돌격 앞으로!”
“돌격!”
뿌우우웅!
돌격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자 조선군 기병들이 거칠게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전장에 있는 노서아군의 당황하는 모습이 이연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달리던 이연은 안장 옆에 꽂아 둔 각궁을 꺼내 들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화약 무기가 더욱 개량되고 많이 보급돼 이제 총을 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으나 여전히 활은 조선군 기병이 필수적으로 다뤄야 될 무기 중 하나였다.
뒤따르던 기병들도 이연을 따라 각궁을 집어 들었다.
이연은 각궁에 편전을 걸고 힘껏 시위를 당기고는 계속 말을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어 이백 보 안으로 들어가자 파란 눈에 허연 피부색을 가진 노서아군 병사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쏴라!”
목이 터져라 크게 외치며 활시위를 놓자 수백 개의 화살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슈슈슉! 슈슈!
섬뜩한 파공음을 내며 날아오른 화살들은 포물선을 그리면서 노서아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결과를 보지 않고 연속해서 편전을 두 차례 더 쏜 이연은 각궁을 집어넣은 채 도현이 직접 하사한 검을 뽑아 들었다.
“적에게 조선군의 무서움을 보여 주자!”
“와아아!”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이연의 검 면에는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라는 문구가 음각되어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며 편전에 맞은 동료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걸 본 노서아 병사들은 경악했다.
“헉!”
“이게 뭐야!”
소리만 들릴 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와 몸을 꿰뚫어 버리는 편전에 순간 모두 공포감에 휩싸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을 수습할 여유도 없이 조선군 기병대가 혼란에 빠진 노서아 병사들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마, 막아라!”
“어서 총을 쏴!”
타탕! 탕! 탕!
피슝. 슝.
상대가 쏜 탄환이 귓전을 스치고 바로 옆에서 총에 맞은 기병이 비명을 내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렇지만 이연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검을 앞으로 쭉 내밀며 돌격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바로 코앞까지 육박해 들어가자 허둥지둥 총알을 재던 노서아 병사들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 살려 줘.”
“히익.”
이연은 잔뜩 겁에 질린 채 총을 들어 올리는 노서아 병사의 머리를 검을 힘껏 내려쳤다.
슈각.
“꾸엑.”
검에 맞은 적병은 피를 뿌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기병들도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고 노서아 군 진영은 비명과 피로 가득 찼다.
조선군 기병대의 돌격에 노서아 군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고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대형이 완전히 붕괴됐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던 적들은 기병의 검에 도륙을 당하거나 두 팔을 들어 올린 채 투항했다.
이번 전투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가 좌절됐고, 외흥안령(스타노보이 산맥)까지 조선의 영역이 확대됐다.
@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된 도현은 경회루慶會樓 난간 앞에 서서 연못 안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잉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년간 계속된 대역사 끝에 드디어 경복궁이 완성되자 도현은 그동안 머물던 창덕궁을 떠나 새롭게 거처를 옮겼다.
그렇게 국정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상선인 칠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촐랑거리고 항상 사고만 칠 것 같더니, 자기도 이젠 나이를 먹었다고 발걸음이며 몸가짐에 제법 진중한 기운이 묻어났다.
그래 봤자 가끔씩 둘만 있는 자리에선 여전히 방정맞게 굴긴 했지만.
그래서 밑에 있는 어린것들이 호랑이 상선이라 부르며 어려워한단 얘기를 듣고는 한껏 콧방귀를 뀌어 줬더랬다.
“폐하.”
“무슨 일인가?”
“북방에서 장계가 도착했다 하옵니다.”
북방이라는 말에 도현은 살짝 얼굴을 굳혔다.
“노서아와의 분쟁에 관련된 것인가?”
“그렇사옵니다.”
“흐음. 말해 보게.”
“외흥 산맥 일대에서 벌어진 다섯 번의 전투를 아군이 모두 승리했다고 하옵니다.”
“오, 그래.”
아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에 도현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크게 기뻐했다.
“적을 무찌르는 데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고 하옵니다.”
“장군들의 발목을 잡지 않고 제 역할을 잘 수행했다니 다행이군.”
전장에 나간 자식이 무사할 뿐만 아니라 큰 공을 세웠다고 하니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없었다.
그러나 도현은 애써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심양 사절 시절부터 그를 최측근에서 모셔 온 칠현이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내심 도현이 얼마나 좋아하고 흡족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혼을 내줬으니 한동안 북방이 조용하겠군.”
“노서아군의 사상자가 칠백이 넘고 포로를 천 명이나 붙잡았다고 하니 감히 국경을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래야지.”
청나라를 무너뜨린 이후 가장 신경을 쓰며 견제하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동진이었기에 도현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총참모부에서 외흥 안령 너머에 요새를 만든다고 했지.”
“예. 이번에 잡힌 노서아 포로들을 동원해서 요새 다섯 곳을 건설한다고 하였사옵니다.”
“호시탐탐 북방 영토를 노리는 놈들이니 충분한 대비가 필요할 거야.”
도현은 뒷짐을 진 자세로 먼 북방에서 고생할 장병들을 떠올리며 측은하게 여겼다.
그렇게 잠시 서 있을 때, 상궁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오던 아이들이 도현을 발견하고 꺄 하고 환성을 질렀다.
“할바마마!”
“야, 최 상궁이 뛰지 말랬잖아!”
“그냥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돼?”
자기네들끼리 재잘대면서 단숨에 달려오는 아이들을 도현이 웃는 얼굴로 맞아들였다.
“저런,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지만 할바마마, 누나가 자꾸 나한테만 뭐라고 해요.”
밤톨같이 둥그런 머리통에 장난기가 가득 담긴 눈동자를 지닌 사내아이가 제 누이를 손가락질하며 일렀다.
“네가 자꾸 체신 머리 없이 행동하니까 나까지 같이 혼나잖아.”
허리에 손을 턱 올리고 야무지게 대꾸하는 것은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먹어 보이는 어린 소녀다.
“누나, 혀엉, 싸우지 마.”
앞선 두 사람보다 훨씬 어려 토실토실한 젖살을 자랑하는 남자애가 둘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하. 어쩜 저리 제 아비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았을꼬.”
제일 어린 막내 손자를 번쩍 들어 안으면서 도현이 중얼거리는 말에 사내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아바마마요?”
“그래. 연이도 어렸을 적엔 너처럼 누이들하고 많이 싸웠더랬지.”
“헤에, 그렇구나.”
“그래도 아바마마랑 너는 완전 달라. 아바마마께선 칠 세 때부터 사서삼경을 다 떼시고 학자들이랑 경연을 하셨다고 하던걸. 게다가 무술 실력도 뛰어나셔서 화살로 과녁 정중앙을 수도 없이 맞히셨대.”
“나, 나도 일곱 살이 되면 그 정도는 다 할 수 있어!”
“절대 못할걸.”
제 누이가 놀리는 말에 한껏 약이 오른 소년이 씩씩거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도현의 앞이라 차마 덤벼들진 못하고 고작해야 나중에 두고 보자며 한껏 째려보니, 소녀는 그래 봤자 네가 여자를 때릴 수 있겠냐는 표정으로 흥 맞받아쳤다.
한편 도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눌러 참으며 소녀에게 물었다.
“네 아비가 어렸을 적에 그랬다고 누가 그러든?”
“아바마마께서요.”
“흠.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공부하기 싫다고 도망 다니다가 만날 중전한테 잡혀서 울음을 터트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놈이 암만 그래도 제 자식들한테까지 거짓부렁을 쳐?’
“상선,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부전자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떠오릅니다만.”
“흐음?”
눈썹을 치켜뜨는 도현에게 칠현이 그동안 했던 발언을 떠올려 보라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난 적어도 없는 사실을 꾸며 내진 않았다만.”
잘난 척을 좀 하긴 했어도.
“예에. 그렇다고 해 두죠.”
대꾸하기도 귀찮은 듯 말하는 모습을 보고 도현은 오늘 밤 간만에 저 자식을 쥐 잡듯이 잡아 볼까, 하고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다.
“할바마마.”
“아, 그래. 내 잠시 너희들을 잊고 있었구나.”
도현은 양옆에 손자들을 끼고 정자 그늘 아래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할바마마, 옛날이야기 해 주세요.”
“아바마마랑 고모님들이 다 같이 궁에서 살 때는 어땠는데요?”
“난 전쟁 이야기가 더 재밌는데!”
고사리 같은 손바닥이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끼며 도현은 감회에 찬 눈빛으로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무슨 이야기부터 할까…….”
왕위에 올랐을 때부터? 아니면 심양에서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아니, 진짜 이야기를 처음부터 하려면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은 고서를 펼쳤을 때부터 시작해야 되리라.
중전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제 부인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무척이나 기뻤었지.
눈을 떴을 때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칠현이었던 것도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리고 든든한 한쪽 팔이 되어 준 사람들.
근위 군단장인 박영식과 상단 서기에서 총관까지 출세한 장태범, 전쟁터에서 뒤를 맡길 수 잇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장수인 흑치영, 임경업까지.
그동안 겪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치며 주마등처럼 흘러 지나갔다.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처음엔 그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현은 강해지려 노력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하며 상상만 하던 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도현은 주저 없이 그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그 결실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어느새 잠드셨군요.”
“뛰어노느라 피곤했나 보지.”
도현은 제 품안에 안겨 쌕쌕 코골이를 하고 있는 세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폐하.”
“됐네. 잠시 내가 안고 있지.”
아이를 받아 들려는 상궁을 만류한 도현은 옷 너머로 전해져 오는 작은 온기에 미소를 지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보다 모처럼 이니 가서 황후를 불러 오게나. 아이들이 깨면 저녁이라도 함께 들자고 하게.”
“알겠사옵니다.”
상궁이 물러나고, 다시 처음처럼 둘만 남자 도현은 멀리 잔잔하게 흔들리는 연못 표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선.”
“예, 폐하.”
“나는 좋은 황제였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요.”
칠현은 괜한 것을 묻는 다는 듯 흔들림 없는 태도로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제가 본 중에 가장 어질고 현명하시며, 그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설마 칠현이 이렇게 까지 대놓고 칭찬을 해 줄 줄 몰랐기에 오히려 잠시 할 말을 잃은 것은 도현 쪽이었다.
“……고맙다.”
다른 사람보다 칠현에게서 들은 말이 제일 기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스며드는 듯한 기분에 도현은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더없이 충만한 기분에 휩싸여 가만히 눈을 감으니, 머리 위에서 칠현이 조용히 물었다.
“주무시렵니까?”
“중전이 올 때까지만…….”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곱디고운 내 사람.
쏴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청아한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커다란 잉어가 퐁, 하고 펄떡 튀어나와 물보라를 튕기며 잔잔했던 연못 표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참으로 좋은 날이로다.”
도현은 그렇게 말하며 진실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면서……
드디어 효종을 끝내게 됐습니다.
부족하고 서투른 것이 많은데 끝까지 사랑해 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효종이 나올 수 있도록 같이 머리를 맞대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성용이가 많이 그립군요.
녀석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번 글이 나오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도 편집을 도와주신 승미씨와 이지훈 실장님 마지막으로 기현이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많았습니다.
대체 역사 소설에 많은 애정과 관심이 있지만 글을 쓰는 내내 다시 한번 실력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습니다.
다음에는 좀 더 발전하고 부끄럽지 않을 글로 다시 여러분들과 만났으면 합니다.
다시 한번 지금까지 글을 잃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