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jong - Chapter 19
19권
다시 몰려오는 먹구름
조선이 함대를 남방으로 내려보내 힘을 과시하며 서양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한 지 육 년의 세월이 흘렀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날 아침.
아직 조금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궐 한쪽에 위치한 연무장에서는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챙! 챙!
단단한 박석이 촘촘하게 깔린 넓은 연무장 위에는 아직 앳된 모습이 남아 있는 청년과 이제 중후한 품격이 느껴지는 도현이 진검을 들고 대련을 펼치고 있었다.
“하압!”
적당히 기른 수염에 조금은 낡아 보이는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도현은 여전히 젊었지만, 혈기 가득했던 예전과 달리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겼다.
“허리가 비었지 않느냐!”
따끔한 지적과 함께 도현은 칼등으로 청년의 옆구리를 세게 내려쳤다.
퍽.
“큭.”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꽤 강한 힘이 실린 공격에 숨이 턱 막힌 청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두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상태에서도 손에 든 검 끝을 단단히 세우고 있는 것이 아직 승부를 포기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그걸 보고 도현은 흡족한 마음이 들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더 하겠느냐?”
“물론입니다, 아바마마.”
“좋아, 덤벼라.”
도현과 똑같이 왕실을 상징하는 황금 봉황 자수가 화려하게 새겨진 흑색 무복을 입은 청년은 바로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장차 왕좌를 이어받아 조선을 다스릴 왕세자 이연이었다.
선물로 받은 조랑말을 타고 좋아하며 천진난만하게 웃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자라 아버지인 도현과 진검을 들고 대련을 할 정도가 됐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바로 한 연은 힘차게 기합성을 터트리며 앞으로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이얍!”
이연 왕세자가 찔러 오는 검격은 제법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직 수련이 깊지 않고 실전 경험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마치 약속 대련을 하는 것처럼 교과서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당연한 결론이었지만 무수한 실전을 거쳤고 왕좌에 있으면서도 수련을 쉬지 않은 도현은 그런 이연 왕세자의 공세를 아주 쉽게 막고 흘리며 잘못된 점을 따끔히 지적했다.
“멧돼지처럼 무조건 덤벼든다고 해서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딱.
“현란한 허초에 속지 말고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해야지!”
아직은 어린 아들이었기에 조금은 봐줄 수도 있었지만, 지금 흘리는 땀방울 하나가 훗날 실제 전장에 나가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도현은 가슴이 아파도 더욱 엄하고 강하게 가르쳤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이연 왕세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실력을 내보였다.
그렇게 한동안 더 검격을 나눈 뒤 두 사람 다 무복이 땀에 젖고 숨이 거칠어지자 도현은 이연 왕세자의 검을 쳐 내고는 대련을 멈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후우, 후우. 예, 아바마마.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납검納劍을 한 이연 왕세자가 숨을 고르며 머리를 숙이자 그제야 도현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줬다.
“검로가 너무 정직한 것이 흠이지만, 제법 매서운 게 많이 늘었구나.”
“아직 멀었습니다.”
“그래, 장차 넌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될 왕세자이니 그런 마음가짐으로 더욱 정진하도록 해라.”
“옛.”
두 사람이 나란히 연무장 밖으로 나오자 한쪽에서 시립하고 있던 궁녀들이 얼른 땀을 닦아 낼 수 있게 깨끗한 무명천을 가져다줬다.
“아바마마, 서연書筵(학사들이 왕세자에게 유교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 시간이 다 돼서 소자는 이만 먼저 가 보도록 하겠사옵니다.”
상선인 칠현한테 검을 맡기고 준비된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던 도현은 이연 왕세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를 익히는 만큼 학문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지. 어서 가 보아라.”
“그럼…….”
나무랄 데 없는 자세로 예를 취한 이연 왕세자는 수행원들과 함께 연무장을 떠나 거처인 동궁으로 향했다.
“정말 늠름하게 자라나셨사옵니다.”
친위대장 신철이 옆으로 다가와 하는 말에 도현은 마음과 달리 짐짓 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
“전하의 눈에는 안 차실지 모르겠사옵니다만,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재목이라며 대궐 안팎으로 칭송이 자자하옵니다.”
“흐음.”
자고로 자식 칭찬을 하는데 싫어할 부모는 아무도 없기에,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면서도 한쪽 입꼬리가 살짝 위로 말려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저 정도면 훌륭하시지요. 제가 듣기로 벌써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떼고 시강원侍講院 학사들과도 자유롭게 토론을 벌일 정도로 학문도 뛰어나시다더군요.”
“뭐, 그렇긴 하지. 아무튼 주위에서 너무 띄워 주면 괜히 헛바람이 들어갈 수 있으니 세자 앞에서는 그런 말들을 하지 않게 주의를 주게.”
“염려 마시옵소서.”
“그러면 땀이 더 식기 전에 신 장군과 한번 겨뤄 볼까.”
“하하하, 좋사옵니다.”
도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신철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 연무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더 연무장에서 몸을 단련시킨 도현은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대전으로 나갔다.
“주상 전하 납시오!”
상선인 칠현이 목에 잔뜩 힘을 주며 소리치자 대전 좌우에 관복을 입고 시립해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화려한 용포를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대신들 사이를 지나간 도현은 높게 단을 쌓아 만든 왕좌에 앉았다.
위엄이 가득한 시선으로 대신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현은 크지는 않지만 힘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를 들라.”
그러자 허리를 굽히고 있던 대신들은 자세를 바로 하면서도 시선은 감히 국왕인 도현을 보지 못하고 바닥을 향했다.
“조회를 시작하시오.”
은퇴한 박황을 대신해 작년부터 총리대신직을 맡은 임경업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받았다.
“먼저 경복궁 중건 현황부터 아뢰겠나이다.”
“그러시오.”
임경업이 살짝 시선을 옆으로 돌려 쳐다보자 영건도감의 도제조 신정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신 영건도감 도제조, 보고를 드리겠나이다.”
주변 정세가 안정되고 나라의 기틀이 잡히자 도현은 그동안 미루어 왔던 경복궁 중건에 나섰는데, 이 일을 맡아서 처리하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관청이 바로 영건도감이었다.
“지난달까지 궁궐터의 정리를 모두 끝내고 며칠 전부터 각지에서 골라 뽑아 온 장인 이천여 명이 본격적인 중건 작업에 들어갔사옵니다.”
“대궐을 지으려면 목재가 많이 필요할 텐데 수급에는 문제가 없나?”
“예. 다행히 북해도(현재의 연해주) 지역에 대궐 기둥으로 쓰기에 충분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많아 목재를 구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사옵니다. 거기다 전하의 지시대로 새로운 공법을 적용해 목재 사용량이 예전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었사옵니다.”
목재가 주재료라서 화재에 취약한 조선 건축물들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도현은 이번 경복궁 중건 때는 석재 사용 비율을 늘리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임진왜란 이전에 있던 원래 모습과는 약간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다시는 화재나 여타의 사유로 경복궁이 소실되지 않고 오래도록 보존되길 바라는 그의 바람이 들어간 것이었다.
자칫 아름답고 위엄이 있어야 될 대궐이 이상하게 지어질 수도 있다는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조선의 장인들은 다루기 어려운 석재를 가지고도 누가 봐도 감탄성을 터트릴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물론 이건 나중 일이었고, 아직은 주춧돌을 이제 막 세우는 등 바닥 기초를 다지고 있어 갈 길이 멀었다.
“공역이 본격화됐으면 그만큼 들어가는 자금이 커졌을 텐데 예산은 부족하지 않나?”
“전하께서 내려 주신 내탕금 금화 십만 냥이 아직 절반가량 남아 있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영광스러운 일에 미력하나마 정성을 보태려는 이들의 참여가 많아 자금 운용에 여유가 있사옵니다.”
“그것 참 갸륵한 일이군.”
조선 왕실의 정궁인 경복궁을 중건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양반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까지 자발적으로 많은 돈과 물건을 바쳤다.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 그가 가진 돈으로도 공사 비용을 충당하고 남았기에 도현이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때만큼은 어명도 통하지 않았다.
재물을 받지 않으면 공사판에 나와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백성들의 간청에 결국 도현은 손을 들고 말았다.
대신 공역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탠 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새로 짓는 경복궁 정문 벽에다가 이름을 새겨 후대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이처럼 누가 강제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왕실 공역에 동참할 정도로 도현은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왜국 막부에서도 왜은 오만 냥을 보내왔사옵니다.”
외무대신 박노의 말에 도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막부가?”
“그렇사옵니다.”
“능구렁이 같은 이에미쓰가 그냥 은을 갖다 바칠 리는 없고, 무슨 꿍꿍이지?”
“몇 달 뒤에 있을 자신의 생일날 사절단을 보내 주길 원하는 것 같사옵니다.”
“사절단을?”
“예, 지방 번주들한테 아국과의 관계를 과시하려는 목적인 것 같사옵니다.”
“아직도 막부가 제대로 주도권을 못 잡고 혼란스러운 모양이지?”
어느새 대화는 경복궁 중건에서 왜국 정세로 넘어갔다.
“여러 가지로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한번 무너진 위신을 다시 세우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옵니다. 최근에는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 중 하나인 참근교대마저 대부분의 번주들이 거부해 유명무실해졌다 합니다.”
“그 말뜻은 지방에 대한 영향력을 막부가 거의 상실했다는 거군.”
“그렇사옵니다. 조슈번[長州藩] 같은 경우에는 공공연하게 막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세력을 키우는 상황입니다.”
“예전부터 조슈번이 반골 기질이 강하기는 했지만, 막부와 대놓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세력이 컸나?”
그러자 정보를 담당하는 주작단 이완 단장이 슬쩍 끼어들며 이야기를 했다.
“수많은 지방 번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들어가는 경제력을 지닌 데다가 휘하에 보유한 무사들의 숫자만 일만 명이 넘어 예전부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옵니다. 거기다 지난 몇 년간 막부가 휘청거리는 사이에 본주 서부 지역 번주들의 구심점으로 떠올라 이에미쓰가 크게 경계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무사만 일만이라면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더 많다는 거잖아?”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조슈번 자체적으로 최소 삼만에서 오만 명의 병력을 일으킬 능력이 되고, 추종하는 세력까지 다 합치면 십만은 너끈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고 있사옵니다.”
도현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십만이라, 막부가 신경이 예민해질 만하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일개 지방 영주가 그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옵니다.”
“어차피 저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든 말든 왜국이 분열되면 아국에 좋은 것이지 않겠습니까?”
상공대신 유형원의 말에 다른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하지만 왕좌에 앉아 있는 도현은 생각이 다른지 표정이 조금 굳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계속 분열과 다툼에 빠져 혼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말아야지, 누군가 주도권을 장악하고 왜국을 일통한다면 오히려 더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어. 그 상대가 조슈번처럼 호전적인 가문이라면 더욱 위험하겠지.”
왜국이 내부를 일통했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임진왜란을 통해 뼈저리게 겪었던 대신들은 그의 이야기에 표정이 무거워졌다.
“잔꾀를 쓰기는 했지만 어찌 됐던 은도 상납했고, 조슈번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이번에는 막부에 힘을 실어 주도록 하지. 외무대신.”
“하교하시옵소서.”
“경이 적당히 인선을 해서 축하 사절을 보내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남명 상황은 어떤가? 신양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다면서.”
아무래도 왜국보다 더 관심이 크고 조선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보니 대신들의 시선이 이완 단장에게 몰렸다.
“청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에 성을 함락당한 남명군 패잔병들은 뿔뿔이 흩어져 양자강 이북 지역의 거점을 모두 잃고 우한武漢으로 퇴각 중입니다.”
그의 말에 좌우 대신들의 입에서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때는 금방이라도 북경을 수복할 것처럼 기세를 올리더니, 이리 허무하게 무너질 줄이야.”
“그러게 말이오.”
“쯧쯧.”
웅성거리는 소리에 대전이 시끄러워지자 도현이 의자 팔걸이를 탁 내리쳤다.
잠시 후 조용해진 틈을 타 그가 물었다.
“주율건은 어떻게 됐나?”
“이번 패배로 화북 지역의 수복을 완전히 포기했는지, 군사를 양자강 이남으로 물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총사령관인 정성공한테 모든 일을 맡기고 황궁이 있는 남경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오 년 전 숭정제가 북경을 잃은 화병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병사하자 유약한 황태자 주자량 대신 당왕 주율건이 젊은 장수와 대신 들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하긴, 이미 국력이 바닥이니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을 테지.”
이해한다는 듯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북 지역에 더 이상 청나라를 위협할 세력이 없는 것 아니옵니까?”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로 임경업이 끼어들었다.
“그렇지.”
직례 총독이었던 왕영을 중심으로 모여 새롭게 나라를 세우며 독자 생존을 모색했던 태후파 잔존 세력은 제일 먼저 도르곤의 손에 무너졌다.
산서성山西省으로 들어간 오삼계도 청군을 상대로 몇 번 크게 승리를 거두며 선전했지만 결국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왕영처럼 모든 것을 잃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은 면했어도 척박한 사천 땅으로 밀려나 겨우 명맥만 유지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남명군마저 신양 전투의 패배 이후로 세력이 급격히 쪼그라들어 양자강 이남으로 퇴각하면서, 이제 화북 지역은 청나라가 완전히 장악하게 됐다.
“내부 정리를 끝낸 청나라가 다시 창끝을 아국으로 향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옵니다.”
재무대신 김육이 우려하는 얼굴로 말을 하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청 황제인 도르곤이 제위에 오른 이후 지금까지 틈만 있으면 이제 조선 땅이 된 만주의 수복을 외치고 다녔기에, 여유가 있으면 군대를 일으키리라는 것을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오랜 전란이 끝나 가는데 또다시 대규모 전쟁을 벌일 여력이 있겠소이까?”
“맞소이다.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되겠지만 근시일 안에는 청군이 산해관을 나오기는 힘들 겁니다.”
큰 승리를 여러 차례 거뒀지만 그래도 여전히 껄끄러운 상대인 청나라와의 전쟁을 가급적이면 피했으면 하는 마음에 대신들은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국방대신 이시영이 약간 굳은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청국이 지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호전적인 청 황제의 성정으로 볼 때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오. 당장 산해관 일대에서 아국의 서천도(요서 지역)를 호시탐탐 노리는 청군 병력만 십만이 넘소이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전란을 거치며 단련된 팔기군이 가세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절대 방심하지 말고 철저히 방비를 해야 될 것이오.”
“흐음.”
“그것참.”
청나라의 장차 행보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가운데,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총리대신이자 조선이 자랑하는 명장인 임경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총리대신.”
“예, 전하.”
“경은 도르곤이 어찌 움직일 것 같소?”
질문을 받은 임경업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고심을 하더니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개구리가 튀는 방향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람 마음인데 제가 어찌 그걸 정확히 알 수 있겠사옵니까. 하오나 지금까지 청 황제가 해 온 행적으로 볼 때 분명 아국과의 전쟁을 오래 미루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 말뜻은 조만간 도발을 해 올 것이라는 건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도현이 묻자 임경업은 그의 시선을 마주 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그 시기가 당장 내일일지 아니면 내후년일지 장담할 수 없사오나, 어느 한쪽이 꺾여 부러지지 않는 이상 청과 아국은 함께 양립하기 불가능한 사이일 것이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조선은 이제 힘없는 변방의 소국이 아니야. 그렇게 혼이 나고도 도르곤이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전쟁을 걸어온다면 그때는 짐이 용맹한 군사들을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자금성 지붕 위에 봉황 깃발을 친히 꽂을 것이야!”
광오한 말이었지만 예전하고 달리 대전에 있던 대소 신료들은 우려보다는 자신감과 전의를 가득 피워 올렸다.
“모든 것이 전하의 뜻대로 되실 것이옵니다.”
“국방대신은 즉시 서천도 지역을 방어하는 군대의 경계를 강화하고 적이 쳐들어오면 즉시 격퇴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옛.”
“다른 대신들도 무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청과의 충돌에 대비한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전하.”
그 뒤로도 도현은 여러 가지 국내외 현안들을 가지고 대신들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대전을 나온 도현은 자연스레 중전의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신들 앞에서는 의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결코 쉽지 않은 상대인 청나라와 또다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될지 모른다는 중압감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대로 희정당으로 돌아가면 또 산더미 같은 서류들과 씨름을 해야 했으니, 잠시나마 아리따운 부인의 얼굴을 보고 기운을 차릴 생각이었다.
미리 기별도 없이 온 것이라 도현을 알아본 궁녀들이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차렸다.
“소란 피울 것 없다. 중전은 안에 있느냐?”
“예, 전하.”
“마침 잘되었군.”
후원에 산책이라도 나갔으면 길이 엇갈려 헛걸음을 할 뻔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드는데, 방에는 중전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공주 아니냐?”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얼기설기 얽힌 곰보 자국이 있는 얼굴을 당당하게 들어 올리며 숙안이 방긋 웃었다.
오 년 전 총리대신 임경업의 막내아들과 혼인하여 궁을 나간 숙안 공주는 이제 어엿한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결혼 생활이 만족스러운 듯 약간 살이 오른 얼굴이 복스러워 보였고, 행동거지는 예전보다 훨씬 더 느긋해졌으며 대갓집 마나님다운 기품이 흘러넘쳤다.
워낙 어렸을 적부터 야무진 아이라 어떻게든 잘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더욱 흐뭇하기만 했다.
처음으로 품에서 떠나보내는 자식이라 그런지 결혼 준비를 할 때 중전과 도현 두 사람 다 허둥지둥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는 미소 띤 표정으로 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오랜만이로구나. 요즘 몸은 편안하느냐?”
“그럼요, 아바마마. 작년에도 고뿔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보냈답니다.”
“하하.”
“게다가 어마마마께서 철마다 보약을 몇 첩씩 보내 주시니 건강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도현은 중전을 돌아보았다.
“그랬소?”
“보약까진 아니고, 그저 가끔씩 먹는 탕약이 저 혼자 먹기엔 너무 많아 숙안에게도 좀 나눠 준 것뿐입니다.”
얘는 별걸 다 말한다는 눈빛으로 중전이 헛기침을 했다.
“뭘 그리 부끄러워하오, 어미가 자식을 챙기는 건 허물이 아니거늘.”
“다 자란 자식을 싸고돈다 여기실까 봐 그런 거지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위인처럼 보이오? 결혼 생활이 몇 년 차인데 중전은 아직도 나란 사람을 잘 모르는군.”
도현이 장난스레 농을 하며 얼굴을 들이밀자 중전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분께선 금슬이 여전하시네요.”
자기 부모지만 눈앞에서 닭 털을 날려 대는 광경이 과히 보기 좋진 않은지라 숙안이 슬쩍 끼어들어 이쪽도 좀 봐 달라며 말했다.
“손녀인 율이도 모른 척하시고, 너무하십니다.”
숙안이 흑흑 우는 시늉을 하자 엄마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율이도 그 모양을 보고 따라 했다.
“어마, 어마!”
아마 엄마라고 하고 싶은 듯 혀 짧은 발음으로 말하는 품새가 참으로 깜찍해, 보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저절로 헤실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제 발로 걷기도 힘든 어린 아이였으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제 어미인 숙안을 쏙 빼닮았고, 대대로 많은 무장들을 배출한 명문가의 여식답게 눈동자도 제법 또랑또랑했다.
“뉘 집 딸인데 이리도 귀여울까. 나중에 크면 제법 여러 공자들을 홀리고 다니겠구나.”
“전하!”
“아니, 그냥 칭찬한 건데…….”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적이는 도현에게 중전이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어린애한테 무슨 말씀입니까.”
“어마마마, 참으셔요. 아바마마께서 가끔 험한 말투를 쓰시긴 하지만 본심은 그게 아닌 것을 다 알고 있잖습니까.”
“그래, 숙안아! 역시 내 편은 너밖에 없구나.”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딸이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도현에게 숙안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밖에서는 유능한 군주이고 안으로는 자상한 가장이었으니 어느 모로 보나 최고의 아버지이긴 하나, 때때로 보이는 예측불허의 행동엔 도통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 그보다 아바마마, 우리 율이가 이젠 제법 말도 한답니다.”
“호오, 그러냐?”
“네.”
숙안이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좋아, 그럼 무슨 말을 시켜 볼까…….”
잠시 행복한 고민에 빠진 도현의 모습에 두 여인은 서로 시선을 맞추며 피식 눈웃음을 흘렸다.
한편 남명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청군 본진은 드넓은 양자강을 앞에 두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휘하 장수들과 독한 마유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청 황제 도르곤은 최측근이자 심복인 야골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겼다.
“오, 야골타,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그러자 야골타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탁자 위에 턱 하니 올려놓으며 말했다.
“명군 우군장 반개의 수급首級입니다.”
야골타가 가져온 것은 바로 명군 장수의 머리였는데, 상투가 풀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칼 아래 자리 잡은 얼굴에는 죽음에 임박하여 느낀 공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섬뜩한 모습이었지만 도르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수급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반개라면 명군에서도 제법 이름이 있는 자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폐하. 명 황제인 주율건이 각별히 아끼는 자라고 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왕태봉의 설명에 도르곤은 더욱 기쁜 얼굴로 말했다.
“하하하! 이 소식을 들으면 주율건이 충격이 크겠군. 지금까지 야골타 장군이 벤 적장의 수급이 열이 넘었지?”
“이것까지 합치면 열다섯입니다.”
어깨를 펴며 야골타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도르곤은 장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청군 제일의 선봉장답군. 자! 공을 세웠으니 내 술을 한 잔 받게.”
“감사합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잔에 도르곤이 마유주를 가득 부어 주자 두 손으로 받은 야골타는 단번에 쭉 다 들이켰다.
“반개군이 무너졌으니 이제 양자강 이북은 완전히 평정이 됐사옵니다.”
또 한 명의 청군 명장인 용골대의 말에 다른 장수들도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한마디씩 했다.
“이걸로 예전 성세를 모두 회복했습니다.”
“모두가 다 황제 폐하의 용맹과 지도력이 만들어 낸 결과이옵니다.”
좌우에서 쏟아지는 찬사에 도르곤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중간에 잠시 휴식기도 있었지만 무려 육 년을 넘게 끌어온 긴 전쟁을 청군의 승리로 끝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군들도 고생이 많았네.”
“아니옵니다.”
그때 책사인 왕태봉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옵니까, 폐하?”
“뭘 말인가?”
“여기서 전쟁을 끝내실 건지, 아니면 양자강을 넘어가 계속 명군을 밀어붙일 생각이신지 궁금하옵니다.”
향후 청군의 행보를 결정할 중요한 선택이었기에 천막 안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으며 다들 상석에 있는 도르곤의 입을 주목했다.
그러자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도르곤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강을 건너가 껍데기만 남은 명나라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리고 싶지만, 그러려면 우리가 익숙지 않은 수전을 치러야 되고 자칫 전쟁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아쉽지만 이번에는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야.”
야골타를 비롯한 몇몇 강경파들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지만 대부분의 장수들은 안도한 얼굴을 했다.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바다처럼 넓고 깊은 양자강 줄기가 굽이굽이 뻗어 있는 강남은 화북 지역과 완전히 다른 싸움터였기 때문이었다.
기병이 주력이라 물 위에서 싸우는 것이 익숙지 않은 청군이었기에 자칫 유명한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처럼 큰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공격을 하더라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는데, 다행히 도르곤이 승리감에 취해 성급하게 덤비지 않고 전쟁을 이쯤에서 끝내겠다니 용골대를 비롯한 온건파 장수들은 크게 티는 내지 않아도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이야기에 이런 분위기는 급반전됐다.
“이제 승냥이 떼를 다 몰아냈으니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러 가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조선을 쳐서 그동안 당한 치욕을 되갚고 심양과 만주 벌판을 수복해 태조 폐하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야!”
폭탄선언에 좌중은 크게 술렁였다.
특히 이제 전쟁을 끝내고 나라를 추스를 시간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던 온건파 장수들은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었다.
반면 야골타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눈을 빛내며 도르곤의 말에 적극 동조했다.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조선을 그냥 둬서는 안 되지요.”
“심양은 물론이고 한양까지 군대를 몰아가 예전에 태조 폐하께서 하신 것처럼 조선 왕의 무릎을 꿇려야 될 것입니다.”
금방이라도 한양을 함락시킬 수 있는 것처럼 왁자지껄 떠들어 대는 강경파들의 모습에 용골대가 어두운 얼굴로 도르곤을 봤다.
“폐하, 조상들의 땅을 회복해야 된다는 말씀에는 십분 공감을 합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때가 아니다?”
도르곤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자 식은땀이 절로 났지만 용골대는 애써 몸을 곧추세우며 이야기를 이었다.
“예,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조선군은 지금껏 상대한 적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에, 지난번 심양 전투와 같은 패배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야골타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그렇게 겁이 나면 용골대 장군께서는 여기 계시오. 폐하, 소장을 선봉으로 삼아 주신다면 단숨에 한양까지 밀고 들어가 청국에 덤빈 대가가 무엇인지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겠습니다.”
조선군을 상대로 큰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도 그걸 잊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야골타의 모습에 용골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세. 자네도 조선군과 싸워 몇 번이나 낭패를 보지 않았나.”
“뭐요!”
“왜, 내가 없는 말을 했나?”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요!”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크고 작은 감정이 쌓여 있는 둘은 기회를 만난 듯 설전을 벌이며 다퉜다.
용골대를 따르는 온건파는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노장들인 반면 야골타가 중심인 강경파는 혈기 넘치는 젊은 장수들이 주축이었다.
대승을 거두며 명군을 양자강 이남으로 쫓아낸 이후라서 그런지 분위기는 강경파 쪽이 좀 더 우세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도르곤은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세게 내려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탕!
“모두 조용!”
묵직한 호통에 시끄럽게 떠들던 장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천막 안에 있는 장수들을 천천히 쓸어 본 도르곤은 크지는 않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수년을 허비했다. 더 이상 심양과 만주를 조선 놈들의 손에 둘 수가 없으니 대군을 일으켜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것이다!”
“훌륭한 결단이시옵니다.”
“폐, 폐하!”
반색을 하며 환영하는 강경파들과 달리 용골대를 비롯한 온건파 장수들은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다급히 뭐라고 말을 하려던 용골대를 한쪽 팔을 들어 막은 도르곤은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하나 오랜 전쟁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으니 일단은 북경에 돌아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에 대군을 몰아 산해관을 나설 것이다. 제장들은 그렇게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옛!”
무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도르곤의 지시에 장수들은 더 이상의 논란을 벌이지 않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용골대는 당장 조선과 싸움을 벌이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하게 돼서 안도했지만, 그래도 이제 겨우 전쟁이 끝났는데 또다시 만만치 않은 적수와 맞붙을 준비를 해야 된다는 것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며칠 뒤 얼마 남지 않은 명군 패잔병들마저 전부 정리한 도르곤은 양자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한 다음 군대를 물려 북경으로 돌아갔다.
행여나 청군이 기세를 몰아 양자강을 건너 강남 지역을 노리지나 않을지 안절부절못하던 명나라는 도르곤이 군대를 물리자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 소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에 있는 도현의 귀에도 들어갔다.
“도르곤이 북경으로 군대를 물렸다고?”
도현의 말에 이완 단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국경을 지킬 병력 일부만을 잔류시키고 주력 대부분이 회군 중이라고 하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해도 청이 양자강을 건너 명과 계속 전쟁을 벌이길 기대했었는데 조금 아쉽군.”
동석한 국방대신 이시영도 입맛을 다시며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혹시라도 다른 움직임은 없었소?”
박황이 신중한 어투로 묻자 뭘 염려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이완 단장은 고개를 살짝 좌우로 흔들며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아국을 노리려는 낌새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습니다. 한데…….”
“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
“아뢰옵기 송구스러우나, 도르곤의 측근 중 하나인 야골타가 두만강을 피로 물들이고 한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며 수하들한테 떠들고 다닌다 하옵니다.”
이완 단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희정당 안에 모여 있던 대신들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분노했다.
“이런 죽일 놈 같으니라고!”
“감히 그딴 소리를 하다니.”
도현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국왕답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은 채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자야 심양 관저 시절부터 안하무인으로 유명했으니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도르곤의 막사에서 측근 장수들이 모여 모종의 회의를 한 바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마음에 걸립니다.”
“흐음.”
“그리고 한 가지 더 미심쩍은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팔기군은 물론이고 향용병까지 해산시키지 않고 계속 유지할 것 같다는 겁니다.”
“짐이 알고 있기로 향용병만 해도 사십만이 넘는데 그걸 그대로 유지한다고?”
“예.”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재화를 잡아먹는 군대를 정리하지 않고 계속 가져간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신이 보기에도 확실히 수상한 행동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도 그 많은 병력을 계속 안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잠시 고심을 하던 도현은 작게 침음성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결국 전쟁인가.”
“청 황제가 아국을 노리는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외무대신 박노가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얼굴로 시선을 줬다.
“그게 아니라면 나라 곳간을 축내 가며 병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지 않겠나.”
“하오나 앞서 이완 단장이 말하길 분명 침략의 낌새는 없다고 하지 않았사옵니까.”
그러자 대신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완 단장에게 모였다.
조금 당황스러울 만도 했지만 주작단을 이끌며 능구렁이가 다 된 이완 단장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와 청군의 움직임으로 봤을 때 당장 산해관을 넘어 아국을 공격해 오는 일은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수가 끝난 가을이나 내년에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은……?”
“청군의 침략이 있을 것 같냐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분명히 머지않은 때에 청 황제가 군대를 일으킬 것이라는 겁니다.”
“허어.”
확신에 찬 이완 단장의 대답에 박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을 피하고 싶은 외무대신의 마음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상대가 몽둥이를 들고 쳐들어오려는데 그걸 외면하고만 있다면 결국 피를 보는 건 내 가족들이 아니겠소이까. 그럴 바에는 힘이 들더라도 언제든 맞서 싸울 수 있게 대비를 하는 것이 진정 평화를 위한 길일 게요.”
총리대신인 임경업이 타이르듯 이야기를 하자 박노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대신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임경업을 흡족한 시선으로 쳐다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도르곤이 언제쯤 칼을 뽑아 들 것 같나?”
아주 민감한 문제였기에 대신들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국방대신인 이시영이 먼저 이야기를 했다.
“전쟁이라는 것이 병력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이런저런 준비를 갖추려면 아무리 빨라도 내년은 지나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회군 중인 병력을 재정비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재무대신 김육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이시영의 의견에 동의했다.
“총리대신의 생각은 어떻소?”
도현의 시선을 받은 임경업은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소신도 청군이 올해는 대군을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하지만 빠른 기동력을 가진 팔기군의 존재를 고려할 때 언제든 기습을 가해 아국의 허를 찌를 수 있으니 방심은 금물일 것이옵니다.”
“맞는 말이야.”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져 빠르게 기동하는 팔기군 때문에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제대로 방어도 못 해 보고 한양까지 무너진 뼈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때와 지금은 조선군의 체질 자체가 달라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국방대신.”
“예.”
“서천도의 방비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자세를 바로 한 이시영은 자신 있는 어투로 대답했다.
“영원성을 비롯한 서천도 주둔 병력 전체에 을호乙號 경계령이 내려지고 전쟁 물자 비축에 들어갔사옵니다.”
조선군은 갑을병정의 네 단계로 경계 체계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었는데, 을호는 두 번째로 높은 경계 수준으로 평상시보다 정찰과 주둔지 경비를 강화하고 물자를 비축하며 언제든 전쟁에 투입될 수 있도록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병력은 충분한가?”
“기존 방어군에 추가로 기병 일 개 사단을 보충했고 다음 달까지 신형 화포 육십 문이 보강될 예정이옵니다.”
넓은 평원을 질주하며 기동전을 펼칠 기병대도 중요했지만 방어전에서는 무엇보다 막강한 화력으로 상대의 예봉을 일거에 꺾어 버릴 화포야말로 꼭 필요한 무기였다.
“그 정도면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는 있겠군. 물자 비축은 얼마나 되어 있나?”
“지난번 심양 전투의 교훈을 살려 일 년 동안 외부의 지원 없이 병사와 주민 들이 버틸 수 있는 물량을 비축해 두고 있사옵니다.”
너무 적으면 막상 전쟁이 터졌을 때 효과가 없고 그렇다고 과도하게 물자를 비축하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부담과 낭비가 될 수 있었기에 딱 이 정도가 적당한 수준이었다.
“전하, 이참에 북해도 병력 일부를 서천도로 이동시켜 놓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일 군단을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러면 방어 병력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니 청군도 함부로 도발을 해 오지 못할 것이옵니다.”
국방대신의 말에 임경업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전하, 그건 신중히 결정해야 될 문제 같사옵니다.”
“왜 그렇지?”
“일 군단을 이동시키면 서천도의 방비는 더 튼튼해지겠사오나 괜히 청나라를 자극할 우려가 있사옵니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인데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러자 짧게 혀를 찬 임경업은 이시영을 보며 질책하듯 말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닐세. 아군도 준비가 덜 된 상태인데 쓸데없이 긴장감을 높여 전쟁을 앞당길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도현이 나서서 중간에 정리를 했다.
“흠, 짐이 생각해도 일 군단을 이동시키는 건 조금 빠른 것 같군. 일단 보류를 하는 대신 언제든 서천도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춰 놓게.”
약간 아쉬웠지만 국왕인 도현이 결정을 내리자 이시영은 별다른 반발 없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알겠사옵니다.”
“각부 대신들은 전쟁 준비를 완벽히 할 수 있게 국방대신을 돕고 주작단은 청군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철저히 감시토록 하라.”
“옛, 전하.”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대신들을 쳐다보는 도현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서렸다.
이처럼 청나라와의 전쟁 위험이 높아지자 도현은 많은 재물과 인력이 소모되는 경복궁 중건을 잠시 중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공역으로 백성들을 결집시켜야 한다며 대신들이 크게 반대하는 바람에 중건 공사를 계속 진행했다.
뚝딱. 뚝딱.
넓은 공사장은 이른 아침부터 망치질 소리로 시끄러웠다.
커다란 주춧돌을 깔고 아름드리나무로 만들어진 대궐 기둥을 세우는 작업은 참으로 고되고 어려웠지만 누구 하나 불평 없이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일했다.
“국왕 전하께서 머무실 곳이니까 약간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감독관의 독려가 아니더라도 장인들은 일생일대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여 작업에 임했다.
그런 장인들 사이로 총리대신 임경업이 영건도감 도제조 신정의 안내를 받으며 공역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 얼추 기본 틀이 갖춰져 가는 것 같구먼.”
“예, 주춧돌은 다 깔렸고 본격적으로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올리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입니다.”
“전하의 지시로 석재를 써서 건물을 짓는 건 어려움이 없었나?”
사실 이 부분에서 도현과 대신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화재와 기타 자연재해로 인한 소실을 막기 위해 석조 건물을 많이 지으려는 그와 달리 대신들은 기존 건축양식과 다른 것에 거부감을 느꼈고, 다른 건물도 아닌 대궐을 짓는 데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을지 큰 우려를 했다.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비롯한 주요 건물은 전통양식대로 짓고 도현과 왕실 가족들이 머무는 공간은 새로운 양식을 도입해 석조 건물로 짓기로 했다.
“처음에는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지금은 큰 문제 없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처음 석조 건물을 짓기로 했을 때 투박한 모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지만, 장인들이 뛰어난 손재주를 발휘해 목조건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답고 유려한 조선의 선이 살아 있는 건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가 돌아보는 와중에도 석공들이 정과 망치만 들고 자신보다 큰 바윗돌을 섬세한 손놀림으로 깨며 조각을 새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을 하는 만큼 부족함 없이 장인들을 챙기도록 하게.”
“물론입니다.”
“그리고 행여나 화재가 나면 지금껏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니 조심을 하고.”
“순라군을 배치해 밤낮으로 공역장 주변을 지키고 곳곳에 방화수를 충분히 준비해 뒀으니 염려 마십시오.”
“잘했네.”
실제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려고 했을 때 여러 번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해 곤혹을 치른 기록이 있을 정도로 목조건물을 지을 때는 불만큼 치명적인 것이 없었다.
이렇게 임경업뿐만 아니라 대신들이 돌아가면서 수시로 경복궁 중건 공역장을 찾아와 작업 상황을 점검하고 애로점을 해결해 줬다.
임진왜란 이후 바닥까지 떨어졌던 조선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상징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집중됐고, 경복궁이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하루빨리 완성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높았다.
지난 육 년 동안 가장 크게 변화하며 발전한 분야가 바로 경제였다.
봉황상단을 통해 주도한 상공업 육성 정책은 큰 성과를 거둬 이제 조선은 농업국을 완전히 벗어나 곳곳에서 대규모 공장이 돌아가고 각지의 재화가 유통되고 있었다.
경제 발전의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한양 도성 중심가에 위치한 종로 시장이었다.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다고 해서 운종가雲從街라고도 불렸는데 예전부터 육의전이 있었으며 한양의 중심 상업 구역 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도현에 의해 금난전권이 없어지고 상업이 활성화되면서 규모가 커져 안국동에서 광교 일대까지 시장이 확장됐다.
단순히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유기와 곡물, 포목은 물론이고 멀리 서양과 남방 지역에서 가져온 상품까지 유입되어 사고팔면서, 종로에 가면 세상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상점들도 기존에 지어진 목조 기와집이 아니라 화재의 피해를 막기 위해 이 층 석조 건물로 바꾸고, 바닥에는 자갈을 깔고 배수로를 만들어 비가 아무리 와도 침수가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대로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길게 뻗은 상점들은 저마다 취급하는 품목에 따라 천을 늘어뜨리거나 등을 달거나 하며 다른 가게보다 더 눈에 띄려고 애를 썼는데, 그 덕분인지 낮에도 밤처럼 화려한 느낌이 났다.
“한 번만 딱 뿌려도 거짓말처럼 맛이 좋아지는 향신료 있습니다!”
“아가씨, 명나라산 비단은 어떠십니까? 자르르 윤기가 도는 게 이걸로 옷을 지어 입으면 선녀가 날개옷을 입은 것 같을 겁니다!”
“한정 판매! 이제 스무 개밖에 안 남았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쳐 대는 상인들의 호객 행위에 길거리를 꽉 메운 행인들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부산하게 움직여 댔다.
그 와중에 서너 살 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등에는 머리통에 뽀송한 솜털이 자란 갓난쟁이를 업은 여인네가 종종걸음을 치며 걷다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는지 좌판 앞에 서서 재빨리 물건을 훑어보았다.
“캬, 아주머니 눈썰미가 있으시네. 오늘 막 남방에서 들어온 귀한 식재료인데, 여간해선 하루 만에 다 팔려 버리니 물건 있을 때 가져가시죠.”
“으음, 가격이…….”
“어허, 사람이 다 먹고살자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딴건 몰라도 먹는 것에 돈을 아껴선 안 되죠.”
“한번 맛볼 수 있어요?”
“예, 그럼요.”
상인이 향신료를 조금 덜어 놓은 그릇을 들이밀자 여인네는 약지로 콕 찍어서 입에 갖다 대더니 코를 찌르는 강한 냄새와 맛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하, 처음엔 다들 이게 뭐냐고 하지만 일단 한번 요리할 때 쓰고 나면 향신료를 넣지 않은 건 음식 같지도 않게 느껴질 겁니다.”
“그래요?”
안 그래도 요즘 부인들 사이에서 향신료를 쓴 요리가 입소문을 타고 있는 중이라, 여인네도 이참에 한번 시도해 볼까 하며 마음이 동하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네가 아예 가게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건 어떻게 쓰는 거냐, 밥에도 넣어 먹는 거냐 하면서 이것저것 질문 공세를 펼쳐 대자 손을 잡고 있던 아이가 지루했는지 칭얼거렸다.
“엄마아.”
“아유, 가만히 좀 있어!”
“나 엿 사 줘어!”
아이가 손가락으로 엿장수를 가리키며 엄마를 졸랐다.
가위를 쩔그렁거리며 엿과 떡을 팔러 다니는 사내의 뒤를 이미 몇몇 동네 아이들이 흉내를 내면서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고, 아이는 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달콤한 냄새에 허기가 지는지 제 엄지손가락을 빨아 댔다.
“지지야, 지지!”
더럽게 빨지 말라며 아이의 팔을 붙잡은 엄마는 엉덩이를 찰싹 때리면서 얌전히 있으라고 혼쭐을 내었다.
결국 주인이 추천해 주는 걸로 한 주먹을 산 여인이 값을 치르고 나가자, 곧이어 또 다른 손님이 흥미를 보이며 그 자리를 채웠다.
“어서 오십시오~! 이 물건이 무엇이냐 하면, 남만에서 가져온 귀한 향신료인데…….”
아침부터 계속 이어지는 손님들의 발걸음에 주머니가 묵직해진 주인은 밝은 표정으로 버릇처럼 입에 찰싹 달라붙은 접객용 말을 끊임없이 주절거렸다.
그렇게 물건과 사람이 가득 넘치는 종로 시장은 도현의 치세하에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조선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이제 희끗희끗 흰머리가 난 봉황상단 총관 장태범은 상단 행수들과 함께 마포 나루에 위치한 창고를 둘러보고 있었다.
비단옷을 입어도 될 만큼 지위와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사꾼이 좋은 것을 탐하기 시작하면 끝이라는 평소 지론대로 그는 수수한 무명옷에 갓을 쓰고 있었다.
유일한 사치라면 몇 해 전에 도현이 친히 하사해 준 수정으로 만든 안경이었다.
“이 물건들은 언제 들어온 건데 아직 여기에 있는 겐가?”
“내일 화물선이 도착하면 전부 제주 상관으로 실어 갈 겁니다.”
“시간이 곧 돈이라는 것을 모르나! 지체 없이 거래를 끝내야지, 물건을 보름이나 창고에 썩혀 두면 어쩌자는 거야!”
오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젊은이보다 더 나을 정도로 팔팔한 모습으로 따끔하게 질책을 하자 담당 행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맸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는데 못 알아듣고 실수를 반복하면 그때는 행수 자리를 내놔야 될 거야.”
“옛.”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제대로 일을 못 하면 가차 없이 쳐 낸다는 것을 잘 아는 행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지시한 일은 어찌 되고 있나?”
그러자 수염을 짧게 기른 중년 행수가 얼른 대답했다.
“코자에몬 상단과 거래를 해서 유황 만 관(37.5톤)을 다음 달까지 가져오기로 했습니다.”
“대금은?”
“당초 은화로 지불하려고 했습니다만 상대편에서 연필과 포목으로 받기를 원해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가격은 열 관당 은화 넉 냥입니다.”
“나쁘지 않군.”
“시간이 있었다면 더 괜찮은 가격에 거래를 끝낼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가격보다 화약을 만들어 낼 재료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니 어쩔 수 없지. 아무튼 수고했네.”
“예.”
“가능하면 추가로 이번 물량만큼 유황을 더 확보하도록 하게.”
“또 말씀입니까?”
“그래. 어렵겠나?”
장 총관의 시선에 중년 행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바로 선을 넣어 알아보겠습니다.”
“급하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이럴 때일수록 꼼꼼히 처리를 해야 실수가 없을 게야.”
“명심하겠습니다.”
“봉황도에 있는 철광산들도 채굴량을 늘렸겠지?”
이어지는 물음에 다른 행수가 나서며 대답했다.
“네, 광부들을 추가로 투입해서 주야간 쉬지 않고 광석을 캐고 있습니다.”
“다음 달부터 제물포 제철소에 설치된 네 번째 용광로가 가동을 시작하니까 원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장 총관은 창고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상단 업무를 챙겼다.
유황부터 철광석까지 하나같이 전쟁에 관련된 물자들이었기에 지시를 받는 행수들의 표정에서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내수사 노비 출신으로 여러 전투를 거쳐 승진을 거듭한 돌쇠는 이름을 천억근으로 개명하고 어엿한 고위 무관인 사직이 되어 복무하고 있었다.
“하나 둘! 하나 둘!”
척척척. 척척척.
“줄 똑바로 못 맞춰! 그딴 식으로 해서 어떻게 적과 싸우겠나.”
단상 위에 선 천억근은 열을 맞춰 제식훈련을 하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동작이 틀릴 때마다 연병장이 떠나가라 호통을 내질렀다.
벌써 한 시진 넘게 이어진 훈련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이 무거웠지만 상관인 천억근이 눈을 부릅뜬 채 쳐다보고 있었기에 병사들은 요령을 피우지 못하고 몸을 계속 움직였다.
“좋아, 바로 그거야. 이제 좀 군인 같군.”
그렇게 병사들을 독려하며 직접 훈련을 시키고 있는 천억근에게 군관 한 명이 다가왔다.
“사직 어른.”
“왜 그러나?”
“병기창에서 신형 소총이 도착했습니다.”
한창 훈련 중인데 방해를 받아서 그런지 심드렁한 얼굴로 쳐다보던 천억근이 군관의 말에 반색을 했다.
“오, 그래! 지금 어디에 있나?”
“군영 병기고 앞에 내려 뒀습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아무렴 그래야지. 오 군관.”
“옛.”
“금방 다녀올 테니 자네가 대신 훈련을 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영 안쪽에 위치한 병기고로 가자 길쭉한 나무 상자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을 감독하고 있던 군관이 천억근을 발견하고는 얼른 군례를 취했다.
“충. 대대장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신형 소총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하하하, 그러시군요.”
“이게 새로 만들어진 남-삼식인가?”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되겠나?”
“당연하지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상자 뚜껑을 연 군관은 미끈하게 잘 빠진 소총을 한 정 꺼내 천억근한테 넘겨줬다.
“여기 있습니다.”
“어디 볼까.”
소총을 받아 든 천억근은 마치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펴봤다.
전체적으로 현재 주력인 남-일식과 비슷한 모양새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우선 부싯돌을 이용한 격발 방식은 똑같았다.
하지만 화승총과 같이 총구에 화약을 쏟아 넣어 다지고 그 위에 탄환을 넣은 다음 불을 붙여 화약을 터트려서 쏘는 전장식이 아니라, 격발장치가 있는 뒷부분에 탄환과 화약이 일체화가 된 총알을 장전한 다음 공이쇠로 강하게 화약을 쳐서 발사하는 후장식이었다.
큰 차이가 아닌 것 같았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의 효과를 발휘했다.
전장식에 비해 빠르게 쏠 수 있고 재장전이 쉬울 뿐만 아니라 일반 병사들도 정확한 조준 사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사정거리 또한 늘어나서 남-일식보다 오십 보 이상 긴 유효사거리를 가졌다.
이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는데, 적보다 먼 거리에서 많은 총탄을 쏟아붓는다면 훨씬 유리한 상태에서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
직접 사격 자세를 취해 본 천억근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한 건 직접 쏴 봐야겠지만 잘 만들어진 것 같군.”
“남-일식을 한 발 쏠 때 이건 네 발 이상을 발사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소총을 바꾸는 것만으로 부대의 화력이 네 배 이상 상승하는 거니까 더 바랄 게 없겠지.”
“전 무엇보다 탄환 주머니와 화약포를 주렁주렁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거추장스럽기는 했지. 아무튼 새 소총에 익숙해지려면 사격 훈련을 많이 해 봐야 되는데 총알은 충분한가?”
“오늘 오천 발이 들어왔고 보름 뒤에 다시 그만큼을 가져올 예정입니다.”
“도합 만 발이라……. 넉넉한 편은 아니군.”
“아직 생산 초반이라 총알 제작이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 그리고 사격 뒤에 나오는 탄피는 재사용을 해야 되니 가능하면 회수를 하라는 지시입니다.”
“알겠네.”
화약을 넣고 귀한 동으로 동그랗게 감싼 총알은 한눈에 봐도 만들기가 쉽지 않았기에 천억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처럼 강력한 위력을 가진 남-삼식 소총이었지만 탄약을 대량생산하는 체계를 아직 갖추지 못했기에 근위군단 일부에만 소량으로 배치됐다.
이것 말고도 병기창에서는 사거리가 이천 보가 넘고 천자총통보다 위력이 두 배나 강력한 충무포라는 것도 개발해 생산했다.
이들 신무기를 얼마나 빠르고 많이 실전 배치하고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벌어질 청과의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될 공산이 컸다.
전쟁 준비로 바쁜 와중에 도현한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전하, 그동안 강녕하셨사옵니까?”
백발에 길게 수염을 기른 우암 송시열이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자 도현은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덕분에 잘 지냈소. 우암도 정정한 모습을 보니 좋구려.”
“다 전하의 은덕 덕분이옵니다.”
“조정을 떠난 이후로 대궐에 일절 발걸음을 하지 않아서 짐이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를 거요. 앞으로는 자주 찾아와 국정에 대한 조언을 해 주시오.”
“지금도 무척 잘하고 계신데 소신이 무슨 도움이 되겠사옵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경처럼 경륜이 많은 노신들이 옆에서 도와준다면 짐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지지 않겠소.”
빈말이라도 도현이 자신을 조정의 원로로 대우해 주자 송시열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말씀만이라도 황공하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대전 상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가지고 와 두 사람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화란 상인이 진상한 용정차龍井茶요. 인삼차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향이 깊고 맛이 괜찮으니 한번 드셔 보시오.”
“예.”
높은 학문만큼 차에도 일가견이 있는 송시열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맑은 녹색에 은은한 향이 나는 것이 상등품의 절강성 용정이군요.”
“그렇소. 입맛에 맞는 것 같으니 갈 때 한 꾸러미 챙겨 가시오.”
“아니옵니다.”
“짐의 마음이니 사양하지 마시오. 상선.”
“예, 전하.”
“우암이 갈 때 용정차를 잘 포장해서 주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칠현한테 차를 챙겨 주라고 지시를 해 버리니 송시열은 더 사양을 하지 못했다.
“이것 참…… 감사하옵니다.”
“그건 그렇고, 들리는 소문에 전국의 명승고적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겼다고 하던데 그것참 부럽소이다.”
“관직을 내려놓고 무료한 생활을 달래기 위해 이곳저곳 가 보다 보니 그런 소문이 났나 봅니다.”
“그래, 어디가 제일 좋더이까?”
그의 물음에 송시열은 약간의 고민도 없이 입을 열었다.
“풍광이 좋고 수려한 곳들이 많다고 하지만 신이 느끼기에는 백두산 천지가 그중 으뜸이었사옵니다.”
“호오, 그렇소?”
“뾰족한 산봉우리들 사이에 넓은 천지 호수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는 광경은 지금도 잊지 못할 일생일대의 장관이었사옵니다.”
마치 천지를 눈앞에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송시열의 설명에 도현은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경의 이야기를 들으니 짐도 꼭 한번 가 보고 싶구려.”
“기회가 되신다면 들러 보십시오. 그럼 왜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리다.”
회귀 전에도 백두산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기에 도현은 언젠가는 천지에 올라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럼 계속 유람만 다닌 것이오?”
“작년부터는 사저에서 그동안 신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수집한 자료들을 엮어 미력하나마 글을 쓰고 있사옵니다.”
도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상대를 봤다.
“경처럼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면 가진 바 지식을 글로 남겨 후대에 전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 그래, 어떤 내용이오?”
“고조선의 통치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부터 삼국시대까지 한민족의 전통적인 철학과 사상에 관한 것이옵니다.”
주자학의 대가였기에 당연히 유교에 관한 책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던 도현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의외구려.”
그러자 송시열이 씁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신이 주자학과 관련된 글을 쓸 것이라 생각하셨사옵니까?”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 하겠소.”
“예전의 소신이라면 그랬을지 모르겠사오나 전하를 만나고 한민족의 역사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를 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반만년을 이어 온 찬란한 역사와 어디에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뛰어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저 한족들이 만든 학문이 최고다 생각하고 거기에 매몰돼 다른 건 돌아보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말이옵니다.”
일반 유학자도 아니고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이 지금껏 자신이 쌓아 온 학문을 모두 부정하는 말을 하자 도현은 크게 놀랐다.
“역사서를 저술하면서 많이 변한 건 알았지만 이거 참 놀랍구려.”
“좀 더 빨리 진실에 눈을 뜨고 잘못된 것을 깨우치지 못해 한스러울 뿐이옵니다.”
진심이 가득 느껴지는 송시열의 모습에 그는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는 송시열 같은 대학자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그동안 많이 청산했다고 하지만 아직 곳곳에 남아 있는 사대주의를 깨끗이 털어 버리는 데 큰 힘이 될 게 분명했다.
“어려운 결단을 내렸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뭔지 말씀해 보시오.”
자세를 바로 한 송시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도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한민족의 역사를 가르치고 아국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양반들 사이에서 명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여기고 섬기는 잘못된 풍조가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옵니다.”
“흐음, 그렇지.”
지금까지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조선 건국 이후 유교의 전파와 함께 뿌리 깊게 박힌 사대주의를 없애는 것이 쉽지 않아 도현의 근심거리 중에 하나였다.
“신이 글을 쓰며 느낀 것은 조선이 진정한 동방의 강자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이런 낡아 빠진 사대주의부터 버리고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아야 된다는 거였사옵니다.”
“맞는 말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의 저처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양반들의 벽을 단숨에 깨어 버릴 계기가 필요하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그가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이는 가운데 잠시 뜸을 들이던 송시열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제국을 선포하고 황위皇位에 오르시는 것이옵니다.”
“……!”
설마하니 황제가 되라고 말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현은 너무 놀라 입이 안 다물어졌다.
“진심이시오?”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그가 되묻자 송시열은 바닥에 엎드리며 이야기를 했다.
“그 옛날 고구려 때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황제와 동격인 태왕이라는 호칭을 썼다고 알고 있사옵니다. 이미 오래전에 명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북으로는 드넓은 만주 벌판을 차지하고 남으로 멀리 대만 섬에까지 아국 영토를 넓혀 조선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영광스러운 시절을 만들어 가고 계시지 않사옵니까. 이만하면 제국을 선포하시고 황제가 되셔도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이것 참…….”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도현이 곤혹스러운 얼굴을 하자 송시열은 재차 진심을 다해 황위에 오를 것을 주장했다.
“새 시대를 열어 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황제가 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호칭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형식적이나마 유지하고 있던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 정립해야 되는 건 물론이고 나라 안팎으로 큰 변화가 불가피했다.
하나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조선이 진정한 동북아의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 번은 꼭 거쳐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경의 말뜻은 알겠으나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소.”
“왜 그렇게 생각하시옵니까?”
“경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곧 청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되는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자칫 큰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을 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지 않겠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루빨리 제국을 선포하셔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큰 국난을 앞두고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다면 백성들을 하나로 일치단결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사옵니까.”
단단히 마음을 먹고 왔는지 송시열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치자 도현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했사옵니다. 승천의 기세로 국력을 키워 나가는 이때에 전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그 기운이 더욱 배가되어 조선의 영향력이 사방으로 뻗어 나갈 것이옵니다.”
단순한 개인적인 영광을 넘어 조선이 제국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상상하자 도현은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만주 벌판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던 만주족도 황제라 칭하는데 도현이라고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늘어난 영토와 국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아직까지 제국을 선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나라의 근본을 바꾸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도현은 성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경의 뜻은 잘 알겠소. 심사숙고를 해서 결정을 내리겠소.”
“부디 현명하신 판단을 하시길 바라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계속 이어 갔지만 도현의 머릿속에는 황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다른 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국 선포
송시열이 돌아간 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도현은 예정된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희정당에 혼자 틀어박혀 고심을 거듭했다.
상선인 칠현이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 둘 사이에 오간 이야기가 밖으로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아,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대소 신료들은 갑작스러운 도현의 칩거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새운 그는 복잡한 머리를 잠시 식히기 위해 희정당을 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최대한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자연스러운 미를 간직한 후원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정자에 오른 도현은 잔잔한 호수 위에 둥실 떠 있는 연꽃잎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이곳에 오니 좋구나. 식물이 많아서 그런지 공기가 참 맑아.”
뒤따르는 수행원들을 모두 저만치 물린 상태라 주변은 참으로 고즈넉했다.
느긋하면서도 평온하게 흐르는 시간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하면서 도현이 모처럼 풀어진 표정을 하고 있으니, 칠현이 슬그머니 물었다.
“여러 가지로 피로가 쌓이셨나 봅니다.”
“으음.”
도현의 입에서 작게 긍정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를 준비하라고 이를까요?”
아무리 상쾌한 공기가 좋다 해도 찬 기운 옆에 있으면 몸이라도 상할까 염려되었다.
“그러게.”
잠시 뒤 상궁이 향긋한 향이 풍기는 녹차를 쟁반에 받쳐 들고 왔다.
비단 방석 위에 앉아 차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하던 도현은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러고 있으니 모든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군.”
벌써 이 시대로 온 지도 수년이 흘렀다.
처음 눈을 떠서 봉림대군이라 불렸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땐 정말로 꿈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게다가 조선도 아니고 청나라 한복판에 뚝 떨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도현이 역사학 전공이 아니었더라면 혼자서 살아남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었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하고 봐야 해.”
각종 사료와 문헌으로 다져진 지식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역시 가족이 그립긴 하지.”
도현은 쓴 미소를 베어 삼켰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심양에 있던 시절엔 때때로 먼 미래에 놔두고 온 가족을 떠올리며 홀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땐 중전이 지금처럼 마음을 열기 전이라 각방을 쓸 때가 많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았다.
만약 중전이 그런 모습을 보았다간 대경실색하여 무슨 일이냐고 캐물었을 테니, 분명 대답할 말이 궁해져 거짓말로 그 자리를 모면해야만 했을 테니까.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이젠 그런 그리운 기억도 점점 추억으로 희미해져 갔다.
지금도 가끔씩은 가슴이 멍든 것처럼 아리지만, 중전의 햇살 같은 미소나 자식들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면 이제 자신은 조선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라고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쩐지 후련해진 기분으로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녹차를 크게 한 모금 삼켰다.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이지, 내 가족이 있는 곳이고.”
도현은 따뜻한 바람이 소매를 흔들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그동안 고민을 거듭하던 문제도 명확하게 풀렸다.
“억울하게 죽은 형님을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으며 처음 결심한 것이 바로 조선과 한민족을 만대에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거늘.”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건원칭제를 해 오랫동안 이어지던 제후국의 족쇄를 끊고 오롯한 자주국이 되어 제국으로 거듭나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조선은 제국이 될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도현은 더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내렸다.
“그래, 언제까지 변두리에 있으라는 법은 없지. 이제부터 아국과 한민족이 역사의 주역이 되는 거야.”
제국을 선포하기로 결심을 굳힌 도현은 곧장 최측근인 총리대신 임경업과 상공대신 유형원 그리고 이완 단장을 희정당으로 불러들였다.
“전하, 총리대신과 두 분 대감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온 세 사람은 금색 비단 보료 위에 앉아 있는 도현에게 예를 갖췄다.
“찾으셨사옵니까, 전하.”
“어서들 오시오. 경들을 오라고 한 것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본능적으로 지난 하루 동안 갑자기 그가 칩거를 한 것과 관련된 일임을 눈치챈 임경업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도현을 봤다.
“하교하시옵소서.”
앞에 있는 세 사람을 찬찬히 쓸어 본 그는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고구려의 정기를 이어받아 건원칭제建元稱帝를 할 생각이오.”
“……!”
순간 방 안은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큰 충격에 빠졌다.
뭔가 큰일이 있다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이런 이야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세 사람은 너무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연륜이 깊은 임경업이 그나마 제일 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국을 선포하시겠다는 말씀이옵니까?”
“그렇소. 명나라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연호를 쓰고 짐은 황제 위에 오를 것이오.”
확고한 도현의 모습에 세 사람은 이미 그가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의 충격과 당혹감이 사라지자 세 사람은 우려보다는 적극적으로 그의 결단을 지지했다.
“잘 생각하셨사옵니다.”
“진즉에 해야 될 일이었사옵니다.”
“다들 찬성하는 건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사실 전하께서 이룩하신 업적과 아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벌써 황제 위에 오르셨어야 하옵니다.”
약간 들뜬 얼굴로 임경업이 힘을 줘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유형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맞사옵니다. 신들이 먼저 주청을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할 따름이옵니다.”
“신도 같은 생각이옵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걱정하던 도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지지를 보내는 측근들의 모습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경들이 그렇게 말을 해 주니 마음이 든든하오.”
“당연한 일이옵니다.”
“다른 이들도 이렇게만 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걱정이오.”
그러자 임경업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말했다.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는 데 어느 누가 반대를 하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것이옵니다.”
측근들의 반응에 미소를 지으면서도 도현은 냉철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신하와 양반 들이 많다는 것을 경들도 알지 않나.”
“그거야…….”
인정하기 싫지만 엄연한 현실이었기에 임경업은 눈가를 살짝 찌푸린 채 말을 얼버무렸고, 이완 단장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하의 말씀처럼 상당한 논란이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아국이 고토를 회복하고 천하에 힘을 떨치고 일어난 것이 언제인데 아직까지 다 망해 찌그러진 명나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다니. 쯧.”
“그러게 말입니다.”
대표적인 실학자로 도현을 만나 오래전에 사대주의에서 벗어난 유형원은 혀를 차는 임경업의 말을 거들며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또한 우리가 극복해야 될 일이 아니겠나.”
“그렇사옵니다.”
“여유가 있다면 천천히 설득을 해 나가겠으나 청과의 전쟁을 앞두고 국론이 분열되면 자칫 큰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게야. 그래서 경들이 날 좀 도와줬으면 하네.”
“뭐든지 하교만 하시옵소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세 사람을 보며 도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정에서 이 일을 공론화시키기 전에 밑바닥부터 분위기를 조성해, 명나라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대세를 따르도록 만드는 걸세.”
설명을 들은 임경업은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것 참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아무리 명을 상국으로 여기는 마음이 남아 있다고 해도 건원칭제에 대한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난다면 감히 드러내 놓고 반대를 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바로 그거요.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임경업과 다른 두 사람이 눈을 빛내면서 한목소리가 되어 대답했다.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도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경들만 믿겠소.”
어떤 방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인지 좀 더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세 사람은 한참이 지나서야 희정당을 나왔다.
며칠 뒤 젊은 유생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이제 명나라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조선이 제국으로 우뚝 서야 한다는 주장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다.
탕.
“이만한 힘을 가졌는데 아직 제후국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말이 돼. 주상 전하가 누르하치나 명 태조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어!”
막걸리를 한입에 털어 넣은 유생이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맞아, 자네 말이 옳네!”
옆에 있던 친구가 크게 맞장구를 치자 흥이 오른 유생이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약간 고지식하게 생긴 사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예전부터 상국으로 모셔 왔고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은혜가 있는데, 상황이 안 좋아졌다고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유생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흥, 그놈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지겹지도 않나?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하도 여러 번 우려먹어서 이제 사골도 안 남았을 것 같구먼.”
“이 친구가…….”
“솔직히 왜란 때 원군을 보낸 것이 우리 조선을 위해선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도와 달라고 애원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조선을 점령하고 명까지 치겠다는 왜놈들의 기세에 겁을 먹고는 허겁지겁 나선 것이 아니냔 말일세. 그리고 명군 놈들이 이 땅에 와서 한 일이 뭐가 있나. 식량만 축내고 패악질이나 부렸지, 실제로 왜놈들과 싸워 쫓아낸 건 충무공과 의병들이 아니냐고.”
“흠흠.”
왜란 당시 명군의 무능과 행패는 유명한 이야기였기에 사내는 딱히 반박을 하지 못하고 괜히 헛기침만 했다.
“백번 양보해서 도움을 받아 나라를 구했다고 해도, 그건 이미 명나라가 후금과 싸우는 데 군대를 보내고 그 때문에 병자호란을 겪고 선왕께서 남한산성에서 치욕을 당한 일로 이자까지 쳐서 다 갈음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틀렸나!”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삼전도의 치욕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에 사내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명나라와 맺어 온 관계가 있는데…….”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왜 모르나! 그리고 자꾸 상국이라고 하는데, 그거야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관계를 유지했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세. 이제 아국이 그 누구도 무시 못 할 강국이 됐는데 구태여 그런 족쇄를 차고 있을 이유가 없지.”
논리적으로 딱딱 따지고 드는 유생의 말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또 다른 평상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거 젊은 사람이 말 한번 시원하게 하는군!”
“하하! 맞아. 우리 나라님 같은 분이 황제가 되어야지, 그 외에 누가 자격이 있겠나!”
“암, 그럼!”
주막에 모여 앉아 있던 중인들 사이에서 왁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졸지에 몰리는 형국이 되어 놓고 보니, 이 사내도 더 이상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을 지었다.
“끄으응.”
그런 사내와 달리 유생은 그것 보라며 우쭐해 어깨를 들썩였다.
이처럼 건원칭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곳마다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 대부분 도현이 황위에 올라야 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조성한 주작단에서도 깜작 놀랄 정도였는데, 그동안 꾸준히 진행시킨 자주 의식 고취가 일반 백성들과 젊은 유생들 사이에 폭넓게 퍼지고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반응의 밑바탕에는 영광스러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는 도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심이 있었다.
딱히 분위기를 크게 만들어 갈 필요도 없이 불씨만 살짝 당기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도현을 황제로 추대하자는 주장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급기야 젊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건원칭제를 해야 된다는 상소문이 궁내부에 산더미처럼 쏟아졌다.
이완 단장과 상공대신 유형원을 육조거리에 있는 총리 집무실로 불러들인 임경업은 상소문 이야기를 듣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이 아주 잘 풀리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찬성 여론이 많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뜨거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평양과 평안도 지역의 젊은 유생들이 주도하여 만인소萬人疏(만 명이 연대 서명을 해서 뜻을 전하는 것)를 작성하고 있다 합니다.”
“허어, 만인소라.”
“대단하구려.”
역사적으로 1792년(정조 16년) 영남 유생들이 사도세자를 복권시켜 달라고 만인소를 써서 올린 것이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이니, 만약 이완 단장의 말대로 진행이 된다면 무려 백 년이나 빨리 만인소가 생겨나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슬슬 조정에서 공론화를 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유형원의 말에 임경업이 시선을 옆으로 돌려 이완 단장을 봤다.
“이 단장의 생각은 어떻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습니다. 대신 이왕이면 만인소가 접수되고 난 직후에 말을 꺼낸다면 더 효과적이겠지요.”
상대가 감히 어찌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의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이완 단장의 의도를 눈치챈 임경업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위로 말아 올렸다.
“후후후, 나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럼 왕당파에 속한 대신들한테 슬쩍 귀띔을 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임경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일을 벌이기 전에 말이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도록 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진행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유형원이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하자 임경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서면 괜히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자네가 수고를 해 주게.”
“맡겨만 주십시오.”
“이 단장도 마지막까지 분위기를 우리 쪽에 유리하게 조성해 주길 바라네.”
시선을 받은 이완 단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같아서는 굳이 제가 나설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상대편에서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조선과 주상 전하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다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주게.”
“예.”
대답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 의욕이 넘쳐흘렀다.
며칠 뒤 대전에서는 어김없이 대소 신료들이 모인 가운데 도현에게 국정 현안을 보고하고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영남 지방에 나흘간 큰 비가 내렸지만 다행히 치수공사를 잘해 둔 덕분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사옵니다.”
“그거 다행이군. 하면 가을에 벼를 수확하는 것에는 이상이 없겠군.”
왕좌에 앉은 도현의 물음에 농산대신 진대석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예, 좀 더 기다려 봐야겠지만 벼마다 이삭이 가득 들어차서 올해도 대풍이 될 것 같사옵니다.”
“풍년이 든다면 그것만큼 좋은 소식이 없지. 이번 일을 거울삼아 치수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얼추 현안 보고가 다 끝나자 도현은 몸을 등받이에 살짝 기대며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없으면 오늘 대전 회의는 여기서 끝내지.”
그러자 오른편에 서 있던 상공대신 유형원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전하, 신 유형원,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해 보게.”
자세를 바로 한 유형원은 슬쩍 좌중을 둘러보고는 사뭇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건원칭제에 관한 일이옵니다.”
“……!”
유형원의 폭탄 발언에 순간 넓은 대전 안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가 이내 웅성거리며 시끄러워졌다.
놀라고 당혹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올 게 왔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신들도 귀가 있기에 건원칭제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이 문제가 공론화될 거라는 예상을 했었다.
대신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유형원은 어깨를 펴며 말을 이어 갔다.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건원칭제를 주청하는 상소가 전국에서 산더미처럼 쏟아지고, 어제는 북방 지역의 젊은 유생 만여 명이 연대 서명을 한 상소까지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열망이 뜨거우니 당연히 조정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자 원로원에 속한 노신 한 명이 약간 불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청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소이다.”
은근슬쩍 뒤로 미루려고 하자 처음 이야기를 꺼낸 유형원이 바로 반박을 했다.
“이런 때일수록 더 이번 일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국을 선포한다면 백성들을 하나로 응집시키고 군대의 사기가 크게 올라갈 겁니다.”
왕당파와 젊은 신하들이 유형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오?”
젊은 사대부들과 달리 아직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노신이 떨떠름한 태도를 보이자 유형원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모든 상황이 다 무르익었는데 망설일 이유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설마 경은 주상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실 자격이 없다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자칫 불경죄로 몰릴 수도 있는 이야기에 노신은 크게 당황해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도현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절대 아니옵니다. 소신이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마음을 품을 수 있겠사옵니까.”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믿소.”
단지 조용히 말했을 뿐인데 그 속에 어린 냉엄한 기운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노신은 어느새 배어난 식은땀을 소매로 훔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무, 물론이옵니다.”
뛰어난 지도력으로 그 어느 왕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도현이었기에 지그시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신하들은 바짝 긴장하며 오금이 저려 왔다.
거기다가 이번 일은 반대할 명분마저 마땅치 않았고 까딱 잘못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리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신하들이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청과 싸워 만주와 요서 지역을 연달아 점령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이 살아나 상국인 명나라에 대한 사대 의식이 예전에 비해 희박해져 있었기에 반발이 적었다.
신중론을 펼치던 노신이 어깨를 움츠리며 물러서자 왕좌 바로 아래에 서 있던 총리대신 임경업이 특유의 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고토를 회복해 그 어느 때보다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고 주변 어떤 나라도 함부로 보지 못할 국력을 가졌으니, 건원칭제를 하셔도 절대 모자람이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만주의 유목민이었던 청나라도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데 전하께서 그보다 못할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명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천하에 당당히 한민족의 힘을 보여 줄 때가 됐사옵니다.”
“황제 위에 오르십시오!”
미리 입을 맞춰 놓은 대신들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신하들이 합세해 바닥에 엎드려 도현의 황제 등극을 주청했다.
명과의 관계 때문에 건원칭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몇몇 신하들은 우려스러워하면서도 감히 나서서 반대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당혹스러운 얼굴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깨닫고 체념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그러자 왕좌에 앉아 신하들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도현이 근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경들과 만백성의 뜻이 그렇다면 제국을 선포해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이고 그 옛날 대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오!”
도현의 선언에 대전 가득 모여 있던 대소 신료들은 하나같이 격동에 찬 얼굴로 양팔을 들어 올렸다.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질 급한 젊은 신하들은 황제라는 칭호를 입에 담았고, 제후국이라 대놓고 쓰지 못했던 만세라는 구호도 속 시원히 외쳤다.
개국 이후 큰 변곡점이 되는 순간이었는데, 이로써 그동안 형식적으로나마 계속 이어지던 명나라와의 군신관계가 완전히 청산되며 당당한 제국으로 조선이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게 됐다.
결정이 내려지자 총리대신인 임경업을 중심으로 후속 조치가 신속하게 진행됐다.
제일 먼저 길지를 택해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낼 원구단圜丘壇을 조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원구단은 둥근 형태로 된 제천단祭天壇을 말하는 것이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예부터 하늘에 제를 지내는 것은 둥글게, 그리고 땅을 모시는 것은 네모나게 만드는 게 원칙이었다.
조선 이전부터 국왕이 하늘을 향해 제를 지내는 건 종종 있어 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성리학이 중심 이념으로 양반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사대 의식이 강해지면서 천자가 아닌 제후국의 왕이 천제天祭를 지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의견들이 많아 제천단을 없애게 됐다.
그런 제천단을 다시 대대적으로 조성한다는 건 잘못된 악습을 끊어 내고 조선이 명백한 자주국이 되어 천하에 우뚝 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 원구단의 위치로 낙점된 곳은 오늘날 중구 소공동 지역이었다.
“흐음, 여기가 길지란 말이지?”
원구단 건설을 맡은 궁내부 대신 장선징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동행한 관리가 얼른 대답했다.
“예, 하늘의 기운이 가득 모이는 명당 중에서도 명당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래?”
설명을 듣자 아직 아무것도 없는 공터가 어쩐지 신령스러운 곳처럼 느껴졌다.
“공사는 언제부터 시작인가?”
“이틀 뒤에 제를 지내고 바로 터 닦이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열릴 곳이니 각별히 정성을 들여서 건물을 지어야 될 걸세.”
“물론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장선징은 다시 한 번 터를 꼼꼼히 살펴보며 미흡한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틀 뒤, 예정된 대로 원구단 공사가 시작됐는데 첫 삽을 뜨기에 앞서 작업에 참여하는 모든 장인과 인부 들이 몸을 정갈하게 한 다음 제를 올리며 제천단을 만드는 것을 하늘에 고했다.
여기에 국왕인 도현도 친히 참석해 직접 제를 주관하며 공사를 할 장인과 인부 들을 격려했다.
국가적인 행사를 치러야 되는 곳인 만큼 수백 명이 한꺼번에 들어와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대지에 화강암으로 삼 층 단을 쌓고 그 중앙에 황금빛 원추형의 커다란 지붕을 씌웠다.
제단 북쪽에는 역시 화강암 기단 위에 삼 층의 황궁우皇穹宇라는 팔각 정자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선대왕들의 신위 판이 봉안될 예정이었다.
조선이 이제 황제국이 됨을 만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건물이었기에 궁내부에서 직접 공사를 관리 감독하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재물과 인력을 아끼지 않고 투입한 덕분에 원구단 공사는 하루가 다르게 진척돼,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수확의 계절인 가을이 되자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원구단을 짓는 사이 도현은 제국에 걸맞게 제도와 법령을 정비했는데 형식적으로나마 남아 있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 행위가 모두 철폐됐다.
이 과정에서 아직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한 일부 양반들이 이치에 어긋난 일이라며 반발할 조짐을 보였지만 송시열을 비롯한 대학자들이 건원칭제를 적극 찬성하고 나오면서 흐지부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도현이 황제 위에 오른다는 소식에 대다수의 백성들이 크게 환영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대망의 대관식 날 아침이 밝았다.
가을 추수로 한창 바쁜 시기였지만 도현이 황제에 즉위하고 제국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들로 한양 거리는 며칠 전부터 북적였다.
그러자 만약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비해 근위군단 병력이 도성 안팎을 물샐틈없이 경비했고, 근접 경호를 맡은 친위대는 비상 태세에 돌입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포도청도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서 치안을 유지했다.
도현의 황제 즉위를 하늘도 축하해 주는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구름처럼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가운데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입구가 굳게 닫혀 있다가 커다란 북소리와 함께 좌우로 열렸다.
둥둥둥! 둥둥둥!
끼이이익.
황금색 비단에 봉황과 용이 수놓인 깃발을 든 기수대를 앞세우며 취타대가 악기를 연주하면서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뒤를 이어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는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도현이 눈처럼 하얀 말을 탄 채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임금이 대궐 밖을 나설 때는 긴 들채 한가운데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과 차양을 설치한 어가御駕를 타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도현은 직접 말을 몰고 가는 것을 선택했다.
어마御馬가 나타나자 대로 양쪽에 빽빽이 늘어서 있던 백성들은 그 자리에 엎드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조선 역사상 영토를 가장 크게 넓힌 정복 군주라는 것을 알려 주듯 치렁치렁한 곤룡포 대신, 약식이지만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금 갑옷에 등 뒤로 진홍색 망토를 두른 도현의 모습은 마치 전설 속의 군신이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그가 허리를 똑바로 편 채 안장에 앉아 오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자 그 강렬한 눈빛과 존재감에 백성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더욱 극경의 예를 올렸다.
“흑흑, 조선이 제국을 선포하는 영광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시골에서 올라온 초로의 선비 한 명은 감격에 겨운 나머지 눈물을 주르륵 흘렸고, 혈기 넘치는 젊은 유생들은 들뜬 얼굴로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이런 뜨거운 반응은 긴 어마 행렬이 원구단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광선문光宣門 앞에 행렬을 멈춘 도현은 백마에서 내려 제례복을 입은 총리대신 임경업의 안내를 받으며 원구단 안으로 들어갔다.
제단 앞 공터에는 문무백관과 종친 그리고 황후를 비롯한 황실 식구들이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칠현이 목청을 돋워 크게 소리를 치는 것과 함께 도현이 제단까지 쭉 뻗은 어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박석을 촘촘하게 깐 어도를 가운데 두고 동편에는 문관이 그리고 서편에는 무관들이 예복을 갖춰 입은 채 늘어서 있었다.
종친과 황실 식구들은 제단 바로 아래 위치했다.
절대왕권을 만들어 낸 지도자답게 어깨를 활짝 핀 도현은 당당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자세로 걸음을 뗐다.
그런 모습에 좌우에 늘어선 문무백관들은 마치 해일처럼 알아서 허리를 숙이며 극경의 예를 취했다.
그 사이를 가르며 느릿하게 걸을 때마다 몸에 걸친 갑옷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내었고, 장엄하고도 엄숙한 분위기에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떼지 않았다.
다들 눈을 아래에 두고 있는 가운데, 도현의 시선이 그를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황후에게로 가 닿았다.
설화 속의 단군왕검이 저랬을까,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처럼 고결해 보이는 그가 자신의 남편이고 지아비라니…….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벅차오르는 설렘에 황후는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 한쪽을 꾹 눌러 진정시키려 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황후의 얼굴을 보자 돌연 장난기가 동한 도현이 불현듯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순간 당황하여 짧게 숨을 들이켠 황후는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방금 전 도현의 표정을 본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소맷자락을 들어 올려 입가를 가리고선 살짝 붉어진 눈매로 너무한다는 듯 도현을 흘겨보았다.
‘이제 정신 좀 차렸나?’
‘어떻게 이럴 때조차 장난을 치실 수 있으세요?’
눈짓으로 부부끼리만 통하는 대화를 주고받은 도현은 사뭇 유쾌해진 기분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단을 응시했다.
천천히 돌계단을 올라 제단 앞에 선 도현이 등 뒤로 늘어뜨린 망토를 펄럭이면서 뒤로 돌았다.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시야 아래, 문무백관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은 도현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지배욕을 끓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찍이 진나라의 시황제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세상을 모두 제 발아래 둔 것 같으니 사내로서 이보다 더 한 기쁨은 없으리라.
그 순간 불현듯 우연한 계기에 과거로 회귀해서 수많은 일을 겪은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지만 기울어져 가던 조선을 바로 세우고 오늘날 이 영광을 자신의 두 손으로 일궈 냈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이제 제국으로서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쓰는 첫걸음을 앞두고 있었다.
“폐하.”
제사장을 맡은 임경업이 옆으로 다가와 나지막하게 말하자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난 도현은 다시 몸을 돌려 제단을 향해 두세 걸음 다가가 섰다.
악단이 장엄한 음악을 연주한 뒤 임경업이 축문을 꺼내 들고는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나라의 큰일을 앞둔 이때에 상제께 고토를 회복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만년 태평성대를 이루기를 기원하옵니다. 상제의 허락을 받아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고 스스로 주장하는 권리를 행할지니, 황제의 칭호를 추존코자 하매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 위에 올라 국호를 대조선이라 부르며 이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고 하늘과 땅에 이 사실을 고하옵나이다.”
낭랑하게 축문을 읽어 내려가는 소리가 넓은 원구단 전체로 퍼져 나갔다.
축문을 읽는 것을 마친 임경업은 조심스럽게 제단 위에 축문을 바치고는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성인 남자가 두 팔을 다 벌려도 한참이 남을 정도로 커다란 청동 향로가 놓여 있는 제단을 앞에 두고 선 도현이 천천히 구배를 올렸다.
새로 탄생한 대조선 제국을 하늘에 고하고 영광을 기원하는 자리였기에 도현은 성심을 다해 예를 갖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엄숙한지 모두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홉 번의 절을 끝내자 제사장인 임경업이 황금색 비단 보자기에 싸인 옥쇄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가져와 그에게 건넸다.
옥쇄는 이번 즉위식을 위해 새롭게 만든 것으로, 순수 황금에 한 쌍의 봉황과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되었고 용의 입에는 귀한 붉은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도현은 몸을 돌려 제단 끝으로 걸어가서는 손에 든 옥쇄를 번쩍 치켜들며 외쳤다.
“천제의 뜻을 받아 대조선 제국의 성립을 선포하노라! 짐과 조선 제국이 가는 길에 무한한 영광이 있을 것이다!”
가슴을 절로 뜨겁게 만드는 그의 선언에 제단 아래 늘어서 있던 문무백관들이 일제히 두 팔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리며 만세를 소리쳤다.
“황제 폐하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만세!”
함성 소리는 원구단 돌담을 넘어 밖에까지 울렸고, 그러자 운집해 있던 백성들도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여 기쁨에 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제국 선포와 함께 옥쇄를 받고 황제로 즉위한 도현은 그 길로 종묘로 가서 선대왕들께 오늘 일을 고해 알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대궐에서 문부백관과 종친들을 모아 성대한 연회를 개최했는데, 막부를 비롯해 화란과 영길리의 대표 등 주변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참석시킴으로써 강대해진 조선의 힘을 과시했다.
일반 백성들도 황실에서 베푼 술과 고기를 마음껏 즐기며 사흘간 흥겨운 축제를 벌였다.
대조선 제국의 선포는 주변국에 엄청나게 큰 파장을 던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바로 북경을 잃고 강남으로 쫓겨났으면서도 아직 옛 영광을 잊지 못하고 있던 명나라였다.
꽝!
“감히 조선이 건원칭제를 하다니 이게 사실인가!”
분노에 찬 명 황제 주율건의 외침이 넓은 남경 황궁 대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러자 소식을 가져온 예부대신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입에 담기조차 송구스러우나 분명 그런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내왔사옵니다.”
“제후국 주제에 건방지게 스스로 황제 위에 오른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사신을 보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 오다니, 이런 괘씸한!”
주율건이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자, 대학사로 예전부터 조선에 대해 감정이 별로 좋지 않던 황보태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건 명백히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이자 도발이옵니다.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아니 되옵니다.”
“당연한 말이오.”
그러자 공부시랑 시평국이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신도 조선의 행동에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지만 섣불리 행동하실 일이 아닌 것 같사옵니다.”
“뭐야!”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말에 주율건은 눈을 부릅뜨며 시평국을 노려봤고 황보태 역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공부시랑은 조선의 행동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게요!”
“그게 아닙니다.”
“그럼 방금 한 말은 뭐요!”
강남 지역의 호족 출신으로 평소 북경 귀족 출신인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황보태가 다그치듯 몰아붙이자 시평국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화북을 상실한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조선을 징치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적인 청나라와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중인데 유일하게 후방을 위협해 줄 수 있는 조선과 사이가 틀어진다면 도르곤만 이득을 볼 뿐입니다.”
정확한 지적이었지만 주율건과 대다수의 신하들은 조선이 명나라를 능가할 정도로 강국이 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닥치시오!”
버럭 호통을 친 주율건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평국을 질책했다.
“대명 제국의 신하로서 그딴 약한 소리를 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폐, 폐하.”
“아무리 청나라로 인해 아국이 조금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고 하지만, 제후국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건원칭제를 하다니 이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따끔히 혼을 내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야 될 것이옵니다.”
명나라가 처한 현실은 알지 못하고 옛 영화에 빠져 시끄럽게 조잘대며 황제의 판단을 흐리는 황보태와 대신들의 모습에 시평국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칙사를 보내 잘못을 크게 꾸짖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린 뒤 조선 국왕은 황궁에 입조해 석고대죄를 하도록 하라!”
“예.”
이미 제국을 선포한 조선이 명나라의 말을 들으려고 할지 시평국은 회의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해 봤자 괜히 황제의 노여움을 살 뿐이었기에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눈을 감았다.
며칠 뒤 주율건의 지시를 받은 칙사가 남경을 떠나 배를 타고 한양으로 향했다.
이 소식은 명나라에서 암약하는 주작단 단원들을 통해 지체 없이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알려졌다.
“날보고 남경 황궁으로 들어와 죄를 빌라고?”
작게 콧방귀를 뀌며 도현이 되묻자 이완 단장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송구스럽게도 명 황제 주율건이 칙사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하옵니다.”
“허어, 그것참, 주제 파악을 못 하는 게 누군지 모르겠군.”
“감히 폐하를 오라 가라 하다니 이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맞사옵니다. 이건 삼전도에서의 굴욕과 같은 무례한 행동이옵니다.”
방 안 좌우에 모여 앉아 있던 대신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명나라의 오만한 행동을 규탄했다.
하다못해 명나라에 우호적인 대신들까지 도현을 남경 황궁에 입조해 석고대죄토록 했다는 이야기에 큰 불쾌감을 나타냈다.
아무리 상국이라지만 조선을 우습게 보고 깔아뭉개는 명 황제의 태도에 마음속 자존심이 크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한쪽 팔을 들어 시끄러운 좌중을 조용히 시킨 그는 시선을 돌려 왼편에 앉아 있는 이완 단장을 보며 물었다.
“칙사가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지?”
“해로를 이용하니 늦어도 사흘 뒤, 빠르면 이틀 안에 제물포에 당도할 것이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외무대신.”
“예, 폐하.”
“그래도 지금까지 맺어 온 인연이 있으니 정중하게 맞이하도록 하게.”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그였기에 당연히 크게 화를 내며 명나라 칙사를 그 자리에서 쫓아 보낼 줄 알았던 대신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 명나라 칙사를 이대로 받아들이실 것이옵니까?”
임경업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현은 보료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대며 태연히 말했다.
“안 만날 이유가 없지 않나.”
“하오나…….”
보나 마나 불편한 일이 생길 게 분명했기에 임경업이 우려스러운 얼굴을 하자 도현은 미소를 지은 채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네. 아직도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아국을 제후국으로 생각하는 저들의 착각을 산산이 깨 줄 필요가 있어.”
“그런 것이라면 굳이 폐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 신들이 알아서 하겠나이다.”
“아니, 그동안 조선에 와서 온갖 거드름과 유세를 떨며 패악질을 벌이던 저들이 된통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러네.”
마지막 이야기를 하며 얼굴 가득 사악한 미소를 짓는 도현의 모습에, 임경업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명나라 칙사들이 혼비백산할 것을 떠올리면서 은근히 기대를 했다.
그건 다른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미 국력이 크게 신장한 조선은 지는 석양이 되어 쪼그라진 명나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청나라의 움직임은 어떤가?”
도현이 화제를 바꾸자 이완 단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군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특이할 만한 정보가 하나 포착됐사옵니다.”
“그게 뭔가?”
아무래도 가장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에 도현뿐만 아니라 방 안에 있는 모든 대신들의 시선이 이완 단장을 향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전국의 지방 관청에 쌀 이백만 섬을 공출하라는 도르곤의 지시가 내려졌다고 하옵니다.”
“……!”
엄청난 양의 곡식에 일순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지금 이백만 섬이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아니, 청 황제는 그 많은 곡식을 끌어모아서 도대체 어디에 쓰려는 거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농산대신 진대석이 묻자 아까부터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던 국방대신 이시영이 낮은 침음성을 내뱉으면서 이완 단장 대신 입을 열었다.
“끄응, 보나 마나 아국을 침략할 때 쓸 군량미가 아니겠소이까.”
“그런…….”
“산해관과 가까운 당산唐山 지역에 성곽을 쌓고 대규모 창고를 짓고 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국방대신의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이놈들이 결국…….”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일으키려고 군량미를 이렇게나 준비하는 건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외무대신 박노가 중얼거리자 이시영이 약간 가라앉은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명나라와 싸웠던 병력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니 적어도 삼사십만은 넘는다고 봐야 될 게요.”
그만한 병력과 싸워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숫자가 주는 압박감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두 번이나 아국에 대패를 당하고 그리 오래 전쟁을 치렀는데 아직도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니,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병사들을 가래떡처럼 찍어 내는 것도 아니고.”
“더 큰 문제는 그 많은 병력이 그냥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실전을 충분히 겪은 정예들이라는 겁니다.”
이시영의 지적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도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 단장.”
“예.”
“군량미를 모은다는 건 침략이 임박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 말고는 아직 다른 조짐이 없사오나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도현은 상체를 바로 하며 다시 말했다.
“그럼 청군이 군대를 일으킨다면 언제쯤이 될 것 같나?”
“추수가 끝난 직후에 바로 움직이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준비가 부족하니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북방의 혹독한 추위에 전쟁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고 이미 한 차례 고생을 한 적이 있으니 이 또한 피하려고 하겠지요.”
“그렇다면 봄이 되겠군.”
“날이 풀리는 것과 함께 청군이 움직일 가능성이 크옵니다.”
그러자 좌우에 앉아 있던 대신들 사이에서 탄식과 우려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이제 겨우 제국이 안정을 찾아가는데 이런 난국이 닥치다니.”
“후우, 어찌해야 될지 정말 걱정입니다.”
국운을 걸고 강적과 맞서 싸워야 하는 풍전등화의 위기가 닥쳤으니 대신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감은 어느새 다 사라져 버리고 청군에 대한 두려움부터 내비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도현은 한쪽 뺨을 실룩였다.
그러고는 손바닥으로 보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버럭 호통을 쳤다.
“굶주린 승냥이 떼가 담을 넘어오면 모조리 몽둥이로 때려잡아 버리면 될 것이지 왜들 겁을 내는 거야!”
“하, 하오나…….”
“이미 싸워서 이겨 본 상대인데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어!”
벼락과도 같은 노호성에 대신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부끄러워하며 머뭇거리는 대신들 틈에서 총리대신 임경업이 도현을 거들고 나섰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제아무리 많은 대군을 이끌고 온다 해도 아국군의 철벽과도 같은 방어에 막혀 큰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옵니다.”
“청군이 쳐들어온다면 지옥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옵니다.”
국방대신 이시영도 청나라와의 싸움에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러자 대신들의 태도도 변해, 전쟁에 대한 우려는 어느새 사라지고 당당히 청나라와 싸워 승리를 쟁취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다시는 덤벼들지 못하도록 철저히 짓밟아 주는 겁니다.”
“맞습니다. 이제 조선이 예전의 힘없는 약소국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기회에 똑똑히 보여 줘야 합니다.”
달라진 신하들의 태도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국을 공격하려는 청나라의 의도가 명백한 만큼 거기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될 것이오. 국방대신.”
“예.”
“서천도의 방어 태세는 어떻소?”
“올 초부터 시작한 방어선 보강이 겨울까지 모두 마무리되고 병력도 십사만으로 대폭 증강됐사옵니다.”
“흐음.”
오른손을 들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잠시 고심을 한 도현은 고개를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넓은 서천도를 다 방어하기에는 십사만으로도 부족할 테니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각각 일 개 사단을 더 차출해 병력을 보강토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새로운 조선군의 편제를 보면 완편된 일 개 사단의 병력이 약 이만 명이니, 모두 십팔만 명으로 서천도 방어군이 늘어나는 셈이었다.
여기다 성안에서 방어전을 펼친다는 이점과 막강한 화력까지 더해진다면 청나라의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이었다.
본토에 대한 방어가 다소 취약해지겠지만, 어차피 두 지역은 위협이 거의 없는 최후방에 속해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천천히 좌중을 둘러본 도현은 힘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총리 이하 모든 대소 신료들은 군부에 적극 협조해 청과의 전쟁에 대비토록 하시오!”
“옛.”
대신들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며 크게 대답했다.
시원한 바람이 늦여름의 무더위를 밀어내며 사람들의 땀을 식혀 주는 어느 날, 명나라 깃발을 단 관선 한 척이 제물포 포구에 도착했다.
“여기가 조선인가.”
뱃머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던 중년인의 말에 관복을 입은 젊은 사내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대인.”
“만주와 요서를 차지하며 조선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더니 그게 사실인 것 같군.”
중년인의 눈은 크고 작은 배들이 가득 찬 가운데 화물을 싣고 내리는 사람들로 바쁘게 움직이는 선착장에 고정되어 있었다.
확실히 오랜 전쟁의 여파로 피폐해진 명나라와 달리 조선의 첫인상은 뜨겁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래 봤자 변방의 소국일 뿐이지요. 어디 대명 제국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조선의 성장을 인정하기 싫은지 젊은 사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중년인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그때 경장 갑옷을 입은 무관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대인,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알겠네.”
중년인은 바로 명나라 황제인 주율건의 지시를 받고 칙사로 조선을 찾은 예부좌랑 천태정이었다.
제물포에 도착한 칙사 일행은 외무차관 이척의 마중을 받으며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뒤 곧장 한양으로 향했다.
제물포에서 한양까지 넓고 잘 포장된 가도가 깔려 있어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데 큰 불편이 없었지만, 외무대신이 아닌 차관이 나온 것에 대해 칙사 일행은 시종일관 불만을 가득 표시했다.
예전 같았으면 칙사 일행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 조선 관리들이 노심초사하며 눈치를 봤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제국을 선포함으로써 동등한 관계가 됐고 먼저 기선을 제압하려는 생각에 이척을 비롯한 조선 관리들은 칙사 일행이 화가 났든 말든 일부러 더 신경 쓰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무시에 가까운 조선 측의 태도에 당연히 칙사 일행은 크게 반발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아니꼬우면 돌아가라는 반응에 칙사 일행은 분통이 터졌으나, 그렇다고 그냥 귀국을 했다가는 황제의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기에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따라갔다.
한양에 있는 객관에 도착해서도 예전과 다른 대우가 계속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열렸던 연회는 단 한 번도 개최되지 않았고 칙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던 대신들의 모습 또한 싹 사라졌다.
그나마 한양에 도착한 첫날 외무대신 박노가 이척과 함께 얼굴을 내민 이후로는 누구 하나 찾는 사람 없이 그냥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바깥출입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었는데, 근위군단 소속 백인대가 객관을 둘러싼 채 외출을 막았다.
칙사 일행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누가 봐도 이건 감금을 하는 것이었다.
부글부글 속을 끓이며 예정된 접견 날짜를 기다리던 천태정은 한양에 도착한지 이레가 지나서야 대궐로 들어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명나라 사신 일행이 도착했사옵니다.”
“들라 하라.”
대전 문이 열리자 명나라 관복을 차려입은 천태정이 수행원 두 명과 함께 잔뜩 굳은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좌우로 늘어선 대신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자 순간 위축될 만도 했지만, 오히려 그는 더욱 콧대를 높인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도현이 앉아 있는 단을 두세 걸음 앞두고 멈춰 서서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상당히 무례한 행동에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황좌 바로 밑에 있던 총리대신 임경업이 나무라듯 말했다.
“명국 사신은 폐하께 예를 갖추시오!”
함께 온 역관이 귓속말로 통역을 하자 천태정은 임경업을 마주 노려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폐하라니! 감히 제후국인 조선이 황상을 상징하는 존칭을 쓰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작정을 했는지 상대가 처음부터 강하게 도발을 해 오자 임경업도 지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무어라! 이런 무례한 작자가 있나. 아국이 건원칭제를 하고 제국을 선포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형편이 조금 안 좋아졌다고 신의를 저버리고 황제 폐하를 능멸하는 행동을 하다니, 그동안 명이 돌봐 준 은혜도 모르고 어찌 이럴 수가 있소이까!”
대전에 모여 있던 대신들은 모욕적인 언사에 얼굴을 붉히며 천태정을 노려봤다.
“저, 저자가!”
“무엄하오!”
쏟아지는 질타에도 불구하고 천태정은 턱을 치켜든 채 앞에 있는 도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당장 건원칭제를 취소하고, 조선 왕께서는 황제 폐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될 것입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참다못한 임경업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치고는 도현을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
“폐하, 더 들을 것도 없사옵니다. 저 무례한 작자들을 대전에서 쫓아내시옵소서.”
“그러시옵소서.”
분위기가 좋지 않을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대놓고 조선을 깔아뭉개는 칙사의 언행에 대신들은 크게 흥분했다.
그런데 가장 화를 많이 내야 할 도현은 어찌 된 일인지 너무나도 담담하게 천태정이 하는 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다 했나?”
“…….”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였냐고?”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천태정은 이내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천태정이 발끈해서 말을 내뱉자 도현은 손바닥으로 앉아 있던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며 호통을 내질렀다.
탕!
“말이 지나치다? 그럼 한 나라의 지존인 짐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라고 떠들어 대는 사신의 언행은 예법에 맞는 건가!”
“그건…….”
“아까부터 아국이 못 할 일을 한 것처럼 자꾸 매도하는데, 고토를 회복하고 나라의 힘을 키워 제국을 선포한 게 뭐가 그리 문제인가! 정작 자신들의 안방인 북경성을 빼앗은 청나라한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면서도 아국에는 이리도 패악질을 부리니 이거야말로 비겁한 행동이 아니겠나.”
신랄한 비판에 칙사 일행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고 좌우에 있던 대신들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제후국이라 아국을 격하시키는데, 조선은 엄연한 자주국이자 수천 년 전에 이미 만주 벌판을 질타하고 태왕을 모신 제국의 후예들이다. 그런 대고구려를 이어받은 우리 조선이 어찌하여 제국을 선포할 자격이 없다 하는가! 명나라야말로 북경과 화북 지역을 모두 잃고 강남으로 밀려나 곤궁한 처지가 되었으니 이제 황제국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닌가.”
조선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상대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건드리자 천태정은 발끈했다.
“지금 황제 폐하와 우리 명나라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도현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천태정을 쳐다보면서 싸늘히 말했다.
“모욕은 그쪽이 먼저 했을 텐데. 이왕 이렇게 됐으니 여기서 짐의 뜻을 확실히 밝히도록 하지. 아국을 동등한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달라진 주변 환경을 받아들인다면 오랜 동맹 관계가 계속 유지되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방금처럼 패악질을 부리고 억지를 부릴 때는 그 뒷감당은 모두 명나라가 해야 될 것이다.”
“지금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천태정이 정색을 하자 도현은 살기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협박이 아니라 경고다.”
“이익.”
치욕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천태정은 어깨를 짓누르는 도현의 강한 기운에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는 명나라 황제 앞에서도 지금처럼 함부로 말을 하는가.”
천태정의 눈이 부릅떠지며 번뜩였다.
반발심이 가득한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도현이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은 봐주지만 또다시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그 땐 용서치 않을 게야.”
도현이라면 천태정의 뒤에 있는 명나라의 위신이나 외교적 파장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담담히 사형 명령을 내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대신들이 기겁하는 와중에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혼자 고고하게 내뱉을 풍경이 절로 머릿속에 연상됐다.
천태정은 드높은 자존심을 사정없이 꺾어 버리는 도현에게 뭐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고 싶었으나, 그의 눈길을 마주하면 마치 맹수 앞에 선 짐승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도현은 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황좌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천태정을 아래로 내려다봤다.
“이만하면 서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군.”
그러곤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려 친위대장인 신철에게 명령했다.
“친위대장.”
“하명하십시오, 폐하.”
“사신들을 객관으로 데려가게.”
“옛.”
머리를 숙여 대답한 친위대장이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에게 눈짓했다.
그 즉시 허리에 검을 찬 친위대원들이 칙사 일행을 감싸듯이 옆으로 다가서자, 천태정은 깊은 모멸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실 겁니다.”
사뭇 위협적인 말투에도 불구하고 도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그를 일별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친위대원들의 재촉하는 몸짓에 어쩔 수 없이 수행원과 함께 몸을 돌린 천태정이 대전을 떠나자, 그 뒤로 대신들의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저런…….”
“제대로 예법도 배우지 못한 자를 칙사라고 보내다니, 명나라도 이제 다된 것 같군.”
“나중에 명나라한테 정식으로 항의서를 보내야 되지 않겠소이까?”
그렇게 칙사 일행을 비난하는 소리로 대전이 시끄러운 가운데, 외무대신 박노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도현을 봤다.
“무례한 명나라 사신을 따끔히 혼내 줘서 속은 시원합니다만 이대로 보내도 정말 괜찮겠사옵니까?”
박노의 말에 도현 대신 맞은편에 서 있던 국방대신 이시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화를 내 봤자 멀리 강남으로 밀려난 자들이 뭘 할 수 있겠소.”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지 않소이까. 언제 청나라와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우방인 명나라하고 관계가 악화된다면 어부지리를 얻을 곳이 어디겠소?”
답답하다는 듯이 박노가 말을 쏟아 내자 이시영뿐만 아니라 대전에 모여 있던 다른 대신들도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히며 술렁였다.
“으음.”
“그것참…….”
“허락을 하신다면 신이 나중에 객관을 찾아가 서로 오해를 풀고 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잘 설득해 보겠사옵니다.”
나름 고심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도현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이 뭘 우려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나, 그럴 필요 없네.”
“하오나 폐하…….”
“명나라가 바뀐 정세를 인정하고 서로 동등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될 일이야.”
“그렇지만 시기가 나쁘지 않사옵니까?”
어떻게든 좋게 풀어 보려고 박노가 그를 설득하려 해도 도현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눈치를 본다면 어떻게 제국으로 만천하에 당당히 우뚝 설 수 있겠나!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면 건원칭제는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영원히 명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진지한 얼굴로 질책하듯 하는 이야기에 대신들은 숙연해졌다.
그러면서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명나라의 눈치를 본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신들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지만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쇠약해진 명나라이기에 아무런 보복을 가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건원칭제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둘러본 도현은 이내 외무대신 박노에게 시선을 주며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외무대신은 사신들에게 조선이 예전의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실히 알게 해 주고, 관계가 틀어지면 명나라한테도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지시에 따라 외무대신 박노는 칙사 일행을 강경한 태도로 대했다.
당연히 칙사 일행은 크게 반발하며 항의와 협박을 계속했지만 들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괜히 혼자 발악을 하는 꼴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성과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객관에 머무는 칙사 일행에게 뜻밖의 연락이 왔다.
“조선군 열병식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이 왔다고?”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어 신경이 날카로워진 천태정이 눈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묻자 수행원인 백중국이 얼른 대답했다.
“예, 얼마 전에 조선 관리가 와서 건네주고 갔습니다.”
그러면서 초대장이 들어 있는 비단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놨다.
힐끗 쳐다본 천태정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보나 마나 군사들을 보여 주고 은근슬쩍 날 압박하려는 꼼수인 모양인데 그냥 거절해.”
“대인, 꼭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번 기회에 청과 싸워 두 차례나 승리를 거둔 조선군의 전력을 살펴보고, 조선 국왕도 열병식에 참석한다고 하니 지난번에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음.”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던 천태정은 시선을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중국을 봤다.
“조선 국왕이 오는 게 확실해?”
“초대장을 준 조선 관리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좋아.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객관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한번 가 보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반색을 하는 백중국을 보며, 천태정은 이번에 도현을 만나면 조선이 건원칭제를 한 것에 대해 제대로 담판을 짓고 말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며칠 뒤 열병식이 거행되는 날이 됐다.
소문을 듣고 한양은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제물포와 수원에서도 백성들이 구경을 하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어 행사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마포나루 옆 백사장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은 상인들이, 구경 온 사람들이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먹으며 구경할 수 있도록 재빨리 좌판을 깔았다.
“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없어져도 모를 만큼 맛있는 찹쌀떡이오!”
“엿이오! 달달한 호박엿이 왔어요.”
그렇게 북적이는 인파 사이로 칙사 일행이 탄 마차가 감시 겸 호위로 붙여진 조선군 기병들에 둘러싸인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마차 창문에 달린 천을 살짝 젖히고 바깥을 내다보던 천태정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살짝 눈가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아주 잔치를 벌였군.”
“이야기를 들으니 왜국과 유구왕국琉球王國의 사신들도 참석한다고 합니다.”
“그놈들은 뭐 얻어먹을 것이 있다고 아직 귀국하지 않고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박쥐처럼 양다리를 걸치는 두 나라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천태정의 눈치를 보며 백중국이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게…… 조선 국왕에게 책봉서를 받아 가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책봉서라니! 이자들이 정녕 우리 명나라를 어찌 보고!”
“진정하십시오, 대인.”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나! 책봉서는 황상만이 제후국에 내릴 수 있는 칙서勅書가 아닌가!”
책봉서를 하사받는다는 건 아무리 자주권을 가진다고 해도 공식적으로 해당 국가에 예속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기에 천태정은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을 둘러싼 주변 국가인 왜와 유구왕국이 책봉서를 받고 조공을 하게 된다면 제국으로서 위상이 확고해지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명나라는 화북 지역을 잃은 것에 이어서 기존 패권국의 지위마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무너지는 것이었다.
“저들의 행태가 괘씸하지만 일단 지금 중요한 건 조선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조선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머지는 그 뒤에 손봐 줘도 늦지 않을 겁니다.”
“자네 말이 맞네.”
애써 화를 가라앉힌 천태정은 본국으로 돌아가면, 명나라를 배신하고 약삭빠르게 조선에 붙은 왜와 유구왕국을 징치해 오늘 일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과연 천태정의 생각대로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말 투레질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이히히힝.
“대인, 도착했습니다.”
마차 문을 열고 땅에 내린 천태정의 눈에 제일 먼저 주위가 잘 보이도록 목재로 높이 세운 귀빈석이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관복을 입은 새파랗게 젊은 조선 관리가 다가와 까딱 고개를 숙이며 칙사 일행을 맞이했다.
자신이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외무차관도 아니고 아무리 봐도 당하관堂下官(조의 때 당상의 교의에 앉을 수 없는 하급 관리)으로밖에 안 보이는 이를 마중 내보낸 것에 천태정은 얼굴을 살짝 구겼다.
“행사 시간이 다 됐으니 어서 절 따라오시지요.”
자기 말만 하고 조선 관리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천태정은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참고 발걸음을 뗐다.
귀빈석으로 올라가자 조정 대신들이 벌써 도착해 자리에 앉아 있는 가운데 왜국과 유구왕국에서 온 사신들의 모습이 보였다.
화기애애하게 조정 대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양국 사신들은 칙사 일행이 나타나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흠흠.”
“어험.”
그걸 보고 콧방귀를 뀐 천태정은 대놓고 불쾌한 표시를 내며 수행원들과 비어 있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흥.”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한쪽에서 대기하던 병사들이 뿔 나팔을 입에 대고 길게 불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러자 말을 탄 도현이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폐하시다!”
도현의 등장에 주위를 빽빽이 채우고 있던 백성들은 흙바닥에 몸을 엎드리면서 예를 갖췄다.
병사들이 인파를 막아서서 만들어 놓은 길을 천천히 가로지른 도현이 말에서 내려 귀빈석으로 올라오자, 먼저 와 있던 조정 대신들이 허리를 깊숙이 숙여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옵소서, 폐하.”
신하들과 가볍게 눈을 마주치며 걸어가던 도현은 귀빈석 한쪽에 있던 칙사 일행을 봤으면서도 별다른 말을 걸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명백한 무시에 천태정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도현을 노려봤다.
그러러나 말거나 가운데 놓여 있는 황좌 앞에 선 도현은 신하들과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인파를 스윽 둘러보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병식을 거행하라!”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행사장 가득 울려 퍼지자 백사장 왼쪽 편에서 수십 개의 깃발을 든 기수단이 열을 맞춰 나타났다.
그 뒤로 기병대와 남-일식 소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줄을 지어 지나갔다.
열을 칼같이 맞추고 수천 명이 마치 한 몸처럼 절도 있게 걸어가는 모습에, 누가 봐도 혹독한 훈련을 거친 정예 병력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열병식을 위해 근위군단 소속 병력 일만 명이 동원됐다.
척척척.
가죽으로 만든 군화 소리를 내며 발을 맞추고 걸어가던 병사들은 귀빈석에 있는 도현을 향해 크게 군호를 외쳤다.
“충!”
우렁찬 목소리가 넓은 백사장에 쩌렁쩌렁 울리자 구경을 하던 백성들은 조선군의 늠름한 모습에 감격해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짝짝짝.
“멋있다!”
“우와아아!”
자리에서 일어나 행진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도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대소 신료들 역시 자부심 어린 표정이었다.
함께 관람을 하던 왜와 유구왕국 사신들은 감탄과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으로 조선군을 쳐다봤고, 칙사 일행도 놀랍도록 잘 훈련되고 절도 있는 모습에 표정이 굳었다.
“으음.”
천태정이 낮게 침음성을 흘리자 옆에 있던 백중국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대단하군요.”
“흥, 보나 마나 며칠 전부터 줄을 맞춰 걷는 연습만 밤낮으로 시켰겠지.”
“그, 그렇겠지요.”
애써 조선군의 흠집을 찾아내려는 천태정의 눈치를 보면서 백중국은 어색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조선군의 핵심 전력인 포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종 구경의 화포 수십 문과 광역 타격 수단인 신기전이 포가에 실려 지나가는 광경은 앞서 본 병사들하고는 또 다른 위압감을 줬다.
특히 이미 한 번 조선군의 무시무시한 화력에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는 왜국 사신들은 눈을 반짝 빛내며 큰 관심을 보였다.
천태정도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장비와 훈련이 부족한 명군과 비교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조선군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청나라 팔기군을 두 번이나 패퇴시켰다고 하더니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어.’
군에 대해 지식이 많지 않은 천태정이었지만 조선군이 보통 강군이 아니라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어쩌면 조선의 건원칭제를 막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귀빈석에 있는 천태정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 가는 가운데서도 사열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고, 병사들은 도현의 앞을 지나갈 때마다 상체를 돌려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대며 군례를 취했다.
절도와 박력이 넘치는 모습에 천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이빨 사이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끄으응.”
한참 동안 이어진 행진이 끝나고 조선군 병사들이 넓은 백사장을 빽빽하게 메운 채 귀빈석 앞에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섰다.
그러자 갑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근위군단장 박영식이 말을 타고 앞으로 나왔다.
“부대 차렷!”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소리치는 박영식의 구령에 일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마치 한 몸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처척.
고삐를 당겨 말 머리를 귀빈석 쪽으로 향하게 한 박영식은 앞에 서 있는 도현을 바라보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황제 폐하께 군례!”
“추-웅!”
수많은 병사들이 일제히 군례를 취하는 모습은 엄청난 장관이었다.
도현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한 벅찬 감동을 느꼈다.
“바로.”
병사들이 자세를 바로 하며 서자 옆에 있던 임경업이 도현에게 나직이 이야기를 했다.
“병사들에게 치하의 말씀을 해 주시지요.”
그러자 도현은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스윽 둘러보고는 근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있어 짐의 마음이 든든하도다. 그 어떤 군대라도 용맹한 조선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대조선의 앞길에 영광이 있으라!”
짧지만 강렬한 치하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구경하던 백성들까지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황제 폐하 만세!”
“대조선 제국 만세!”
“황제 폐하께 영광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뜨거운 환호성에 도현은 절로 어깨가 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반면 귀빈석 한쪽에 자리한 칙사 일행은 자신들이 있는데도 대놓고 황제국만이 쓸 수 있는 만세를 외치는 모습에 표정이 경직됐다.
서서히 환호성이 가라앉자 계속해서 다음 행사가 진행됐다.
귀빈석 앞 백사장이 신속하게 비워지더니 이천 명의 기병대가 나와 동군과 서군으로 나눠 가상 전투를 벌였다.
두두두두.
“이랴!”
“합합!”
뿌연 먼지를 피워 올리며 백사장을 질주한 기병들이 서로 교차했다가 반전을 반복하면서 뛰어난 기마술을 선보이자 여기저기서 감탄성이 쏟아졌다.
“와아!”
“저거 봐. 고삐를 놓고 말을 타고 있어.”
“대단한데.”
말을 빠르게 달리면서도 진영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은 최강의 기병이라는 청나라 팔기군 못지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병 하나하나가 혼연일체가 되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건 팔기군보다 더 뛰어난 것 같았다.
화약 무기가 발달하면서 존재감이 많이 흐려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전장에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것이 기병이었기에 참석자들은 관심 어린 시선으로 행사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역동적이었던 기병대의 시범이 끝나자 남-일식 소총을 소지한 보병 오백여 명이 대열을 맞춰 백사장 가운데로 나왔다.
“부대 전투대형으로!”
처처척.
검을 손에 든 군관의 명령에 병사들이 재빨리 방진을 구축했다.
조금도 허둥대거나 흐트러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평소 얼마나 반복 훈련을 받아 숙달이 잘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장전!”
바로 이어진 지시에 병사들은 총알과 화약을 소총에 장전했다.
전장식 소총이라 기름종이로 만든 탄약포를 이빨로 찢어 화약과 총알을 총구에 넣은 뒤 기다란 꽂을대로 끝까지 밀어 넣어야 됐지만 병사들은 신속하게 모든 것을 끝냈다.
“조준!”
소총 개머리판을 어깨에 갖다 붙인 병사들은 한쪽 눈을 감고 가늠자로 백오십 보 정도 거리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를 겨냥했다.
“쏴!”
병사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총구에서 시뻘건 불이 뿜어져 나왔다.
타타타탕! 타탕! 탕!
요란한 총성이 울리며 희뿌연 화약 연기가 병사들을 뒤덮었고, 이내 군관의 외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재장전!”
일어선 자세 그대로 탄약포와 꽂을대를 꺼낸 병사들은 신속하게 재장전을 끝냈다.
그러고는 금방 재차 사격을 가했고, 그렇게 네 번을 반복한 뒤 허리에 차고 있던 총검을 꺼내 장착하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돌격!”
“우와아아!”
선두에 선 군관을 따라 용감하게 돌격한 병사들은 날이 서늘하게 서 있는 총검으로 적이라 가정해 만들어 놓은 허수하비를 마구 난도질했다.
“이야압!”
“하압!”
기합을 내뱉으며 총검을 찌르고 베는 병사들의 모습은 가히 실전을 방불케 했다.
삽시간에 허수아비들을 다 쓰러뜨린 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소총을 머리 위로 흔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걸 본 도현은 만족한 얼굴로 박수를 쳤다.
짝짝짝.
“저렇게 용맹한 병사들이 돌격해 들어가면 그 어떤 적이라도 혼비백산해 도망치겠군.”
그러자 주위에 있던 대신들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사옵니다.”
“신들이 보기에도 정말 대단하옵니다.”
“그동안 병사들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받았는지 알겠어. 수고들 했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도현의 치하에 이시영 이하 군부 장수들은 감격한 얼굴로 상체를 숙였다.
“망극하옵니다.”
“시범이 끝났는데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저리 칼날처럼 날카로운 군기를 보이며 모여 서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든든하오.”
도현의 말대로 소총 사격에 이어 백병전 시범까지 끝낸 병사들은 어느새 오와 열을 맞춰 서서 귀빈석을 향해 군례를 취하고는 한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취타대의 연주를 듣는 동안 백사장에 널브러져 있던 허수아비들이 모두 깨끗이 치워지고, 대신 포병대가 화포와 신기전을 끌고 나와 방열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멋진 모습을 보여 줄지 다들 잔뜩 기대하는 가운데 포병대 지휘관이 귀빈석 앞으로 나왔다.
“지금부터 포병대의 화력 시범을 보이겠나이다.”
“시작하라.”
“옛.”
도현을 향해 군례를 취한 지휘관은 몸을 뒤로 돌려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각 포대 방포 준비!”
“방포 준비!”
화포와 신기전 옆에 서서 대기하던 포수들은 크게 복창을 하며 일사불란하게 화약과 포탄을 장전했다.
포수들이 장전한 포탄은 그저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구식탄이 아니라 시한신관을 부착하고 내부에 작약을 가득 채운 신형탄이었다.
사격 준비가 모두 끝나자 지휘관은 머리 위로 치켜 올린 검을 밑으로 내리며 목청껏 소리쳤다.
“발사!”
그러자 제일 구경이 작은 가자총통부터 순서대로 화포들이 굉음을 울리면서 포탄을 발사했다.
꽝! 꽝! 꽝!
공기를 찢으며 넓은 한강을 가로질러 날아간 포탄은 건너편에 만들어 둔 과녁에 정확히 명중했다.
슈우우우웅! 꽈아앙!
쿠쿵!
시뻘건 불기둥이 솟구치면서 나무로 만든 커다란 과녁이 산산조각 나는 광경에 백성들은 탄성을 터트렸다.
“우와!”
“저렇게 멀리까지 날아가다니! 족히 이백 보는 넘어 보이지?”
“위력은 어떻고? 단단한 성벽도 한 방에 무너뜨려 버릴 것 같구먼.”
“그러게.”
화포의 위력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진짜 충격적인 장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몸을 풀듯 가볍게 한 발씩 사격을 한 포대들은 금방 재장전을 끝내고는 신호수가 흔드는 수기에 따라 일제사격을 개시했다.
퍼퍼펑! 펑! 퍼펑!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폭음을 울리며 쏘아진 포탄들이 날아가 떨어지면서 건너편 백사장에는 불기둥과 흙먼지가 수없이 일어났다.
백사장을 통째로 뒤집어엎어 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위력에 백성들은 물론이고 귀빈석에 있던 대소 신료들과 외국 사신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감탄사에 흠칫 몸을 떨며, 사람들은 방금 자신의 눈으로 봤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할 광경에 전율했다.
“만약 저기에 병사들이 있었다면…….”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잔혹한 풍경을 연출했을 모습을 상상하자 팔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지만 아직 포병대의 화력 시범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화려하면서도 치명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신기전 다섯 대가 장전을 모두 끝내고 발사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포들이 위력을 과시하며 백성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을 보고 몸이 근질근질해진 병사들은 이내 기다리던 신호가 떨어지자 지체 없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쏴!”
잠시 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백여 발이 넘는 신기전이 불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솟구쳐 날아갔다.
쉬이이익. 쉭! 쉭!
순식간에 포물선을 그리며 강을 넘어간 신기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리 만들어 둔 과녁에 쏟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천신이 분노해 하늘에서 불벼락을 마구 내려치는 것처럼 보였다.
불벼락이 아니라 불 폭풍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터였는데, 과녁을 포함해 반경 이백 보에 달하는 넓은 공간이 완전히 초토화됐다.
콰콰콰쾅~~! 쿠쿵!
엄청난 폭음이 울리며 신기전이 떨어진 곳은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후끈한 열기가 강 건너에서 구경하고 있던 백성들한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너무 충격적이고 놀라운 장면에 대소 신료와 귀빈석에 있던 외국 사신들은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눈을 크게 부릅뜨고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애써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천태정과 수행원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신기전이라는 무기인가 봅니다.”
“으음.”
저 자리에 명나라 병사들이 서 있는 것을 떠올려 본 천태정은 이내 얼굴을 구기며 침음성을 흘렸다.
그 어떤 군대라도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천리경으로 사격 모습을 빼놓지 않고 살펴본 도현은 힐끗 시선을 돌려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는 천태정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사실 위력은 최고지만 화약 소모량이 너무 크기 때문에 신기전의 실사격은 평소 훈련에서 거의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두 대로만 사격을 했는데, 이번에는 칙사 일행과 열병식에 참석하는 외국 사신들한테 조선군의 힘을 보여 주라는 도현의 특별 지시에 다섯 대나 동원된 것이었다.
노림수는 정확히 들어맞아 모두들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잠시 뒤 뿌옇게 시야를 가리던 화약 연기와 흙먼지가 가라앉자 목표가 됐던 건너편 백사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기전이 터지면서 쏟아 낸 불길에 시커멓게 탄 백사장은 그렇지 않은 곳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고, 마치 거인이 주먹으로 내려친 것처럼 군데군데 커다란 구덩이가 파였다.
그리고 아직까지 다 꺼지지 않은 불길이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위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백성들은 그제야 하나둘 정신을 차리고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최고다!”
“우와아아아!”
“조선군 만세!”
“만세! 만세!”
조금씩 터져 나오던 외침은 이내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바뀌어 행사장을 가득 울렸다.
조선군에 대한 자부심과 환호로 주위가 시끄러운 가운데, 천태정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신기전에 의해 초토화된 건너편 백사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선군의 위용을 확실히 보여 준 것에 크게 만족한 도현은 참석한 병사들한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내려 치하하는 걸로 열병식을 마무리 지었다.
개전
열병식 이후 진상(?)을 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던 천태정은 며칠 뒤 외무대신 박노와 만나 조선의 건원칭제를 인정하지는 못하지만 양국 관계를 형제 국가로 바꾸는 것에 합의를 하고는 쓸쓸히 남경으로 돌아갔다.
명 황제인 주율건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에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조선으로 기울어진 상태였기에 혼자 분통을 터트릴 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명나라와 달리 사신들을 통해 조선의 강함을 전해 들은 막부와 유구왕국은 서둘러 조공을 바치고 책봉서를 하사받으며 조선이 황제국임을 인정하고 받들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남쪽에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봄이 됐다.
광활한 중국 대륙만큼 거대함을 자랑하는 자금성에서도 가장 크고 화려한 건물은 바로 황제가 집무를 보는 공간인 태화전이었다.
태화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황제의 권위를 상징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삼단의 기단 위에 길이 육십사 미터, 폭 삼십칠 미터, 높이 이십칠 미터의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들게 만드는 태화전 안에서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대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금박을 써서 화려하게 장식된 일곱 폭짜리 병풍을 뒤로하고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은 도르곤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대신들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군량 확보는 다 끝났나?”
그러자 병부상서 마충석이 상체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추수와 함께 지방 군현에서 모두 삼백오십만 섬의 군량미를 징발해 당산성 창고에다가 보관 중이옵니다.”
“화약과 기타 물자들은?”
“모두 목표한 물량만큼 비축해 뒀사옵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르곤은 이번에는 총병관인 용골대를 보며 말했다.
“병사들의 준비 상태는 어떤가?”
“지난겨울 동안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언제든 싸울 준비를 갖췄고 진충군도 병력을 대폭 증강시켰습니다.”
“좋아.”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도르곤은 이내 정색을 하며 대신들을 봤다.
“이제 복수의 칼을 뽑아 들 때가 된 것 같군.”
“하면…….”
긴장한 얼굴로 용골대가 쳐다보자 도르곤은 날카롭게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출병이다! 산해관을 나가 요서와 만주를 되찾고 한양까지 단번에 진격해 들어가는 거야.”
앉아 있던 옥좌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도르곤은 치켜 든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강하게 소리쳤다.
“짐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조선 왕의 목을 벨 것이다!”
친정 선언에 대신들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모든 것이 폐하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이미 작년부터 날이 풀리면 조선으로 출병할 것임을 도르곤이 천명했었기에 대신들은 아무런 반대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조선과의 전쟁에 회의적이던 용골대마저 자신이 만류한다고 해서 멈출 도르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우려하는 마음을 한구석에 품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청군의 움직임은 북경에서 암약하는 주작단 단원들을 통해 곧바로 도현한테 전달됐다.
급히 소집된 주요 대신들이 도현을 상석에 두고 좌우로 앉아 있는 가운데, 얼굴을 굳힌 이완 단장이 북경에서 들어온 소식을 보고했다.
“청 황제인 도르곤이 아국을 치기 위해 출병 명령을 내렸다고 하옵니다.”
순간 여기저기서 대신들의 탄식과 한숨이 쏟아졌다.
“결국…….”
“허어.”
“으음.”
살짝 미간을 꿈틀거리기는 했지만 도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완 단장을 봤다.
“병력이 얼마나 동원될 것 같나?”
“현재까지 파악한 바에 따르면 팔기군 팔만과 한인 향용병 삼십칠만이 공격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도합 사십오만이라…….”
“거기에 보급품을 옮길 치중대 육만 명이 더 추가되옵니다.”
“그럼 병력만 오십만이 넘는다는 이야기요?”
외무대신 박노가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이완 단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런!”
예상보다 많은 숫자에 대신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는데, 현재 조선군이 서천도에 모아 둔 방어 병력이 십팔만가량이니 단순히 계산을 해도 가뿐히 두 배가 넘었다.
도현도 앞에 있는 서탁 위에 올린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그리고 청 황제가 직접 친정에 나선다고 하옵니다.”
“끄응, 도르곤이 아주 단단히 작정을 한 모양이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총리대신 임경업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청군이 이렇게 나온다면 아국도 서둘러 서천도 방어 전력을 더 보강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국방대신 이시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천도로 보낼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있나?”
잠시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이시영은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도의 동원령을 내리지 않고 기존 병력을 움직인다면 사 개 사단 팔만 명을 더 파견할 수 있사옵니다.”
충분치 않다고 느껴지는지 도현은 살짝 미간을 모으며 말했다.
“좀 더 많이는 안 되나?”
“동원령을 내려 강제징집을 실시한다면 병력을 더 확충할 수 있겠사오나,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지원군을 보내려면 기존 군영에서 차출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사옵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다른 지역의 방비가 약해져서 그 이상은 무리이옵니다.”
“하면 동원령을 내린다면 얼마까지 가능하겠나?”
“훈련을 시키고 보급품을 지급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겠사오나 육 개월 안에 삼십만 명까지는 병력을 확충시킬 수 있사옵니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이 놀란 표정으로 도현을 보며 우려를 나타냈다.
“설마 동원령을 내리시려는 것이옵니까?”
“아무리 비상 상황이라도 그건 너무 피해가 크옵니다.”
“신중하게 판단하셔야 하옵니다.”
마치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대신들은 하나같이 반대 의견을 쏟아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징집이 실시된다면 조선 사회 전반에 큰 파급력이 미치기 때문이었다.
당장 모든 재화와 인력이 전쟁에 집중돼서 일반 백성들은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전황이 불리해진다면 총동원령을 내려서라도 청군을 막아 내야겠지만, 자칫 승리를 거두고도 국력을 너무 소모해 하늘 높이 비상하려는 조선의 날개가 꺾여 버릴 수도 있었기에 대신들이 우려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좌중이 시끄러워지자 도현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짐도 아직은 동원령을 내릴 생각이 없으니 그만 진정들 하시오.”
대신들이 안도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도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전쟁이 격화되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경들은 언제든 모든 역량을 동원해 군부를 지원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될 것이오.”
“예.”
국가가 존재해야 백성들도 있는 것이기에 전황이 악화되면 총력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대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굳은 얼굴로 대신들이 머리를 숙이자 도현은 다시 국방대신인 이시영을 보며 말했다.
“일단 급한 대로 여유 병력을 모두 서천도로 보내 방비를 강화시키도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청군이 움직이면 짐이 직접 근위군단을 이끌고 영원성으로 갈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친정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총리대신 임경업이 화들짝 놀라 쳐다보자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르곤이 직접 온다는데 짐도 똑같이 나가 맞이해 줘야 되지 않겠소.”
“너무 위험하옵니다.”
“이번에는 장수들에게 전쟁을 맡기시옵소서.”
위험한 전장에 나서는 것을 대신들이 자꾸만 반대를 하자 도현은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청군의 침략을 짐이 직접 막아 낸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소.”
“…….”
“짐이 친정을 한다면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동원할 지방군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정예부대인 근위군단을 전장으로 보낼 수 있지 않소.”
도현이 진의를 밝히자 그제야 대신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번 전쟁으로 오랫동안 끌어온 청과의 악연을 완전히 마무리 지을 것이오.”
도현은 결연한 태도로 대신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경들도 각오를 단단히 해 두시오.”
대신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하는 말에 모두가 일제히 고개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도현은 크게 하나 되어 대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대신들의 대답을 들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한 전쟁이었기에 조선의 대응은 차분한 가운데 아주 신속하게 진행됐다.
제일 먼저, 도현이 지시한 대로 지방 군영에서 새롭게 사 개 사단 약 팔만 명의 지원군이 차출돼 서천도로 보내졌다.
이로써 청군을 막아 낼 서천도에는 방어 병력이 이십육만 명으로 대폭 늘어났다.
아울러 화약과 여러 보급품 생산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고 군량미 비축 또한 늘어났다.
그렇게 모인 보급품과 군량은 서천도에 위치한 각 방어 거점을 포함해 후방 보급기지 역할을 맡은 심양성에 보내졌다.
동시에 청과의 전쟁을 진두지휘할 전선 사령부가 만들어졌는데, 사령관으로는 지난 요서 공략전에서 큰 공을 세운 남두병 장군이 임명됐다.
그리고 도현이 친정을 하느라 한양을 비우는 동안 총리대신인 임경업과 국방대신 이시영이 함께 총참모부를 이끌어 후방 지원을 책임지도록 했다.
지휘부 인선이 모두 끝나자마자 남두병 사령관은 참모들을 이끌고 서천도로 달려가 휘하 병력을 장악하고 주변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와 함께 조정에서는 전쟁이 벌어지면 전장으로 변할 터라 서천도 주민들한테 작물 파종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가을에 많은 수확물을 거둬들일 생각을 하며 봄철 파종 준비에 여념이 없던 주민들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심어 봤자 전쟁으로 제대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데다가 청군이 약탈해 갈 위험성이 컸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조선군이 발 빠르게 대처를 하는 사이에 청군도 태화전 앞마당에서 대대적인 출병식을 거행하고는 도르곤이 직접 대군을 지휘해서 북경성을 나와 산해관으로 향했다.
영원성에는 며칠 전부터 조정의 소개 명령에 거주하던 마을을 떠나 성안으로 들어오는 주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조금이라도 살림살이를 더 많이 가져가려고 바리바리 챙긴 주민들은 조정에서 내준 우마차에 짐을 한가득 싣고 왔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주민들은 등에 지게를 짊어지고 머리마다 보따리를 올린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전 부임해 온 남두병 사령관은 높다란 성문 망루 위에서 그런 모습을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봤다.
“사령관님, 여기 계셨군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자 부관인 윤대흠이 가까이 다가왔다.
“자네군.”
“뭘 보고 계셨습니까?”
다시 시선을 성문 아래로 돌린 남두병 사령관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난민들을 보고 있었네.”
“아, 예.”
“후우, 우리들이 못나서 백성들을 이리 힘들게 하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야.”
자책 어린 남두병 사령관의 이야기에 부관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며 그를 위로했다.
“청나라 대군을 맞아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고육지책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백성들에게 큰 피해와 고통을 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
남두병 사령관의 말대로 조정에서 아무리 나중에 피해를 보상해 주고 전쟁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고 해도, 어찌 됐건 타지살이가 편하지는 않을 테니 힘들게 한 건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날 찾았나?”
용건을 떠올린 윤대흠은 얼굴을 굳히며 이야기를 했다.
“방금 주작단에서 정보를 보내왔는데 청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은 낮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올 것이 왔군. 바로 산해관으로 향했다던가?”
“아닙니다. 보급 거점인 당산을 거쳐 나머지 병력과 합류해 움직일 것 같다고 합니다.”
한쪽 손으로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고심을 한 남두병 사령관은 진지한 어투로 읊조렸다.
“하면 늦어도 다음 달 초쯤에는 산해관에 도착해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하겠군.”
“그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군.”
“사령관님이 계시니 청군을 틀림없이 막아 낼 수 있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군.”
막중한 책임감에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한 채 남두병 사령관이 말을 이었다.
“이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면 폐하께서도 곧 친정에 나서시겠군.”
“이미 근위군단 본대는 한양을 출발했다고 합니다.”
“그래?”
처음 듣는 소식에 남두병 사령관이 조금 놀란 듯이 되묻자 윤대흠이 자세히 설명을 해 줬다.
“폐하와 함께 움직이면 이동하는 데 너무 시간이 지체되니까 먼저 배치를 해 두려는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는 나중에 기병 연대를 이끌고 오신다고 합니다.”
“하긴 군단 병력이 이동하려면 일이 보통 많은 게 아니지. 거기다가 포병대와 보급품까지 같이 옮겨야 되니 한양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못해도 보름은 걸릴 게야.”
“맞습니다.”
“아무튼 전쟁을 앞두고 정예인 근위군단이 합류한다니 다행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는데, 대군에 맞서 서천도를 지켜 내야 되는 남두병 사령관은 단 한 명이라도 많은 병사와 대포가 너무나도 간절했다.
“청군이 움직였으니 우리도 서둘러 방어 준비를 마무리 지어야겠지. 즉시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윤대흠이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서둘러 망루를 내려가자, 남두병 사령관은 여전히 길게 줄을 서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피난 행렬과 멀리 산해관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손에 든 검을 꽉 움켜쥐었다.
한편 대궐에도 청군의 출병 소식이 전해졌고 도현은 지체 없이 친정을 선언하고는 전장으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갑옷을 갖고 오너라.”
“예!”
명령을 내린 도현은 문을 등지고 서서 칠현이 얼른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내 뒤에서 문이 스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인기척이 느껴지자, 도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 서서 얼른 갈아입히라는 듯 양팔을 넓게 벌렸다.
“뭐 하고 섰느냐? 하여튼 꾸물거리기는.”
여느 때처럼 타박을 주며 툴툴거리는데 코끝에 언뜻 꽃향기가 스쳤다.
설마하니 칠현이 놈이 여자들처럼 향낭 같은 것을 몸에 가지고 다닐 리도 없고, 창문이 열려 있지도 않은데 웬일인가 싶어 그제야 뒤를 돌아보니, 황후가 살포시 웃고 있는 게 보였다.
“황후?”
깜짝 놀란 도현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쩐…….”
“어쩐 일로 왔냐고 묻지 마시어요. 지아비께서 먼 길을 떠나시는데 당연히 제가 찾아뵈어야지요.”
그러면서 황후는 손을 뻗어 도현의 옷을 풀려고 했다.
“황후가 직접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칠현이야 제 수족처럼 부리는 녀석이니 옷을 갈아입히게 시키든 먹을 것을 가져오라 이르든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하지만 그 뽀얀 손에 물 한 번 묻히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곱디고운 황후에게 제 수발을 들게 하려니 절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는 여인이라 낭군님을 위해 칼을 갈지도 못하고 함께 따라갈 수도 없으니, 하다못해 옷 정도는 제가 갈아입혀 드리게 해 주시어요.”
“그래도…….”
“그것마저 못 하게 하신다면 제가 아무것도 해 드릴 게 없지 않습니까.”
사뭇 처연해 보이는 황후의 표정에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뭐든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어디 도현 혼자만의 것일까.
황후 역시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럼 부탁하겠소.”
미안함을 담아 도현이 다정스레 말하니 그제야 황후가 기쁜 얼굴로 답했다.
“맡겨만 주시어요.”
허리띠를 풀고 붉은색 용포를 벗기는 손길이 참으로 세심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칠현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세세한 부분까지 각을 잡고 매무새를 마무리한 다음에야 아쉬운 듯 손을 떼는 황후를 향해 도현이 말했다.
“다음은 칠현이를 부르도록 하지. 황후에게는 너무 무거울 것이오.”
칼과 화살을 막아 내는 갑옷이다.
가녀린 여인의 힘으로는 들기도 버거울 것인데, 혼자서 그걸 다른 사람에게 입힌다는 건 아무리 요령이 있어도 힘든 일일 터였다.
“그렇게 하시어요.”
황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군소리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고맙소.”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도현의 입술이 황후의 볼에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황후의 양 볼이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달아오르더니, 갑자기 까치발을 하곤 도현의 목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무탈히 다녀오셔요.”
수줍은 듯 속삭이는 목소리.
그리고 입술에 나비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스쳤다.
황후가 먼저 입맞춤을 해 준 것은 처음이라, 도현이 멍하니 있으려니 어느새 황후가 손을 풀고 떨어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칠현을 불렀다.
“폐하를 잘 부탁하오.”
“예, 마마.”
갑옷을 품에 안은 채 칠현이 깊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얼른 갈아입고 나오시라며 방을 나가는 황후의 뒷모습을 도현이 눈으로 좇는데, 칠현이 앞에서 손가락을 휘휘 내저었다.
“폐하? 왜 넋을 놓고 계십니까, 폐하?”
“에이, 시끄럽다!”
도현은 칠현의 손가락을 탁 내치고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사람이 모처럼 깊은 감동에 젖어 있는데 말이야, 하여간 배려심이라곤 코딱지만큼도 없는 녀석 같으니.”
“감동은 무슨 감동입니까. 낙엽 떨어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정 그렇게 감동할 게 없으면 저를 보세요! 폐하 때문에 이런저런 일 다 겪었어도 끝까지 붙어 있는 게 참으로 갸륵하지 않습니까?”
“…….”
도현이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
“…….”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그러곤 두 사람은 묵묵히 갑옷을 갈아입는 데 집중했다.
희정당을 나서자 친위대장인 신철이 갑옷을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다가 주먹을 쥔 손을 왼쪽 가슴에 대며 군례를 취했다.
“나오셨사옵니까.”
“병사들은 모두 모여 있나?”
“그러하옵니다. 친위대와 근위군단 기병대 오천 명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문득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봤다.
어젯밤까지 비가 내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하늘은 물감을 뿌려 놓은 것처럼 푸르고 하얀 구름 사이로 태양이 따뜻하게 내리쬐었다.
“하늘도 우리의 출정을 도와주는 것 같군.”
“그렇사옵니다.”
“가지.”
“예.”
상념을 지운 도현은 신철 친위대장을 뒤에 두고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대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밖으로 나가자 넓은 공터에 갑옷을 입고 방패를 손에 든 병사 오천여 명이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으면서 도열해 있었다.
도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일제히 군례를 취했다.
“충!”
병사들이 내지른 소리는 주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간 도현은 병사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배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이제부터 우린 전장으로 간다. 지금 함께 서 있는 전우 중 누군가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린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 적과 맞서 싸울 것이다. 사악한 승냥이 떼 같은 청군이 다시는 아국을 넘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조선군의 기백과 용맹함을 보여 주자!”
“와아아!”
“대조선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지르자 돈화문 앞 공터가 떠나갈 듯했다.
병사들의 눈에는 승리를 거두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주먹을 불끈 쥔 팔을 들어 올리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운 도현은 함성이 서서히 잦아들자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전군 출정하라!”
출정 명령을 내린 도현은 역시 갑옷을 갖춰 입은 칠현이 가져온 말에 올라탔다.
그 옆에 친위대장 신철과 여러 장수들이 섰고 병사들도 각자 군마에 올라 줄을 지어 전장으로 출발했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돈화문 망루 위에 선 나팔수가 뿔 나팔을 길게 부는 가운데 아침부터 거리를 가득 메운 채 기다리던 백성들이 함성과 격려로 출정하는 병사들에게 힘을 줬다.
“청나라 놈들을 다 쓸어버려!”
“무사히 돌아와!”
“까짓것 북경까지 점령해 버려!”
백성들은 전쟁터로 가는 자식이나 오빠 같은 병사들한테 미리 준비한 음식을 입에 넣어 주거나 꽃가루를 뿌리고 어깨를 두드려 주며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그렇게 백성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한양 도성을 나선 병사들은 어느새 전쟁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다 잊어버리고 적과 싸워 물리치겠다는 전의에 불타올랐다.
이런 가운데 당산에 도착한 청 황제 도르곤은 며칠간 휴식을 취하며 산해관을 넘기 전에 마지막으로 군대를 재정비했다.
화려한 용포 대신 갑옷을 입은 도르곤은 주요 지휘관들을 소집해 보고를 받고 있었다.
“향용군은 다 집결했나?”
용상에 앉은 도르곤의 물음에 총병관인 용골대가 머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예, 모두 도착해 편제를 끝마쳤습니다.”
“조선군의 동향은 어떤가?”
“아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급히 병력을 증강시키고 있다 합니다.”
“놈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우리가 간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겠지.”
“전력을 보강하는 건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전부 성안으로 소개시키는 것을 보면 조선군도 단단히 마음을 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우려를 나타내는 용골대와 달리 도르곤은 콧방귀를 뀌며 승리를 자신했다.
“흥! 그래 봤자 조선 놈들이 우릴 막을 수는 없을 거야.”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꼬리를 말고 허둥지둥 성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면 아군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대표적인 강경파인 야골타가 나서며 호기롭게 외치자 방 안에 모여 있던 다른 장수들도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하!”
“맞습니다.”
“그깟 조선 놈들쯤은 우리의 상대가 안 되지요.”
불과 몇 년 전에 심양성을 공격하다가 큰 낭패를 보고 요서 지역을 힘없이 빼앗긴 것을 잊고 조선군을 만만하게 보는 장수들의 모습에 용골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첩보에 의하면 요서 지역의 성들이 하나하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만들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도르곤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봤자 성에 불과할 뿐이지.”
“하오나…….”
용골대가 절대 방심할 상대가 아님을 다시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도르곤이 귀찮은 듯 한쪽 손을 들어 막았다.
“그만! 총병관이 돼서 아군의 사기를 꺾는 말이나 늘어놓으면 어쩌자는 건가?”
“…….”
“조선군이 방비를 철저히 해 놨다고 하지만 우리도 예전에 심양성에서 치욕을 맞본 그 군대가 아니야. 화약 무기를 개량했고 공성전에 쓸 대포도 충분히 준비했어. 그리고 무엇보다 수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단련된 병사들이 수십만이나 있는데 뭐가 두렵단 말인가!”
마지막에 가서는 질책을 하듯 옥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쏘아보자 용골대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용골대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본 도르곤은 강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틀 뒤 산해관으로 간다!”
“옛.”
“야골타 장군.”
“하교하십시오.”
이름이 불린 야골타가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자 도르곤이 말을 이었다.
“선봉에 서서 진격로를 열 수 있겠나?”
눈을 번뜩인 야골타는 지체 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도르곤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 야골타한테 내밀었다.
“이 보검으로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모조리 다 베어 버리도록 하라.”
두 손으로 보검을 건네받은 야골타는 턱을 치켜들며 의욕에 불타는 얼굴로 말했다.
“날카로운 창이 되어 길을 열겠나이다.”
“그 말을 절대 잊지 말게.”
“옛.”
일어서서 군례를 취한 야골타는 한쪽에 있는 용골대를 힐끗 돌아보고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용골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속으로 분을 삭였다.
“이번에야말로 조선군을 격파하고 대륙의 맹주가 누구인지를 만천하에 알려 줄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
“청 제국 만세! 만세!”
도르곤의 선언에 좌우로 늘어서 있던 장수들이 양팔을 번쩍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의를 다졌다.
이틀 뒤 도르곤이 명령한 대로 당산에 집결한 청군은 산해관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한 청군은 육만이나 되는 치중대를 포함해 모두 오십일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엄청난 병력이 전쟁에 참가하는 만큼 행군 대열의 길이가 무려 백여 리에 걸쳐 이어졌고, 각종 보급 물자와 화포를 실은 마차 수천 대가 동원됐다.
가히 청나라의 모든 역량을 이번 전쟁에 다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진 행군 대열만으로도 상대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친위대 일부와 근위기병 연대를 이끌고 한양을 떠나 쾌속 행군한 도현은 벌써 심양을 지나 푸른 요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숙영지를 만들고 하룻밤 머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의 영토 안이었지만 지존인 도현이 있었기에 숙영지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숙영지 한가운데 세워진 커다란 천막 안에서는 도현이 휘하 지휘관들과 앉아 차를 마시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원성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찻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이 묻자 왼편에 앉아 있던 친위대장 신철이 얼른 대답했다.
“지금 속도로 이동을 계속한다면 나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나흘이라…… 이제 거의 다 왔군.”
“그렇사옵니다.”
도보로 움직였다면 아직 압록강도 넘지 못했을 테지만 전원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덕분에 하루에 수십 리씩 이동할 수 있었다.
그때 바깥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휘장이 열리며 약간 굳은 얼굴의 군관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뭔가?”
군관의 표정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도현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방금 전선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사온데 청군 본대가 산해관에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소식에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산에서 좀 더 머물 거라 생각했는데 빨리 움직였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신철 대장의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남두병 사령관은 어떻게 대처를 하고 있다더냐?”
그러자 군관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며 말했다.
“상황을 보고 받는 즉시 방어군 전체에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전투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고 하옵니다.”
“잘했군.”
재빠른 상황 대처에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폐하, 청군이 서천도 권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일부터 행군 속도를 올려 서둘러 영원성에 도착해야 될 것 같사옵니다.”
“그래야겠군.”
그의 말에 동의한 도현은 곧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
“상황이 급하게 됐으니 오늘 저녁은 병사들을 일찍 재우고 내일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도록 하지.”
“예!”
지휘관들이 모두 고개 숙여 답했다.
도현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 날 새벽 일찍 일어난 도현은 아직 지지 않고 어두운 하늘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머리 위에 두고 강을 건너 영원성이 위치한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청나라의 공격에 대비해 조선은 요서 지역을 점령한 초기부터 산해관과 마주한 지점에 성채를 쌓았다.
대군이 쳐들어와도 오랫동안 방어를 할 수 있도록 모두 세 개의 성벽으로 둘러쌌는데, 그 모습이 마치 고동이 나사 형태로 빙빙 말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고부리성[巻貝城]이라 불렸다.
전쟁이 터지면 제일 먼저 적과 맞닥뜨리는 곳으로 이 개 사단 사만 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
갑호 비상령이 내려지고 청군 본대가 산해관에 도착했다는 소식에 긴장감이 극도로 높아진 가운데,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야골타가 이끄는 선봉대 십만 명이 고부리성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 밖은 이미 소개 명령에 따라 깨끗이 비워지고 불에 태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청군 선봉대가 맞닥뜨린 것은 그런 을씨년스러운 폐허였다.
최대한 빨리 진격로를 열며 요서 지역의 주도인 영원성을 함락시켜야 하는 야골타 입장에서 한눈에 봐도 공략이 쉽지 않아 보이는 고부리성을 치는 건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산해관과 가깝고 영원성으로 가는 진격로 한가운데를 떡하니 막고 있었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만약 고부리성을 이대로 놔둔다면 언제 주둔군이 튀어나와 보급로를 교란시킬지 몰랐기에 원정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함락을 시켜야 했다.
조선군도 이런 고부리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벽을 높고 두껍게 쌓고 화망을 촘촘하게 배치해 청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청군이 삼천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진영을 세우고 있는 것을 성주인 이관이 성문 망루 위에 올라와 굳은 얼굴로 지켜봤다.
주작단 단장인 이완의 친동생으로 지금까지 조선이 벌인 모든 전쟁에 빠지지 않고 참전해 크고 작은 공을 무수히 세운 이관은 종이품 부총관이 되어 고부리성 성주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
벌써 몇 시진째 적진을 살피던 이관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눈에 대고 있던 천리경을 내렸다.
“화포 숫자가 상당히 많군.”
그러자 옆에 있던 부관이 굳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청군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것 같습니다.”
“그래.”
진채를 세우면서 청군은 아주 보란 듯이 성문 앞에 포대를 방열시켰다.
단단한 성벽을 깨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청군이 보유한 화포의 숫자였다.
대충 헤아려 봐도 오십여 문은 넘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진 고부리성이라고 해도 견뎌 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기존 청나라 화포와 모양이 상당히 다른 것이 아무래도 전부 홍이포紅夷砲인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네.”
예상이 맞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홍이포는 기존에 명과 청이 사용하던 호준포虎蹲砲에 비해 사거리와 위력이 월등히 차이가 나는 화포로, 조선군의 주력인 개량형 천자총통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다가 최근 주작단을 통해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무거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통상탄뿐만 아니라 내부에 작약을 넣어 폭발시켜 파편을 만들어 내는 유산탄을 함께 사용하는 걸로 알려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방어를 해야 되는 조선군 입장에서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적이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나타났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힘없이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청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떠올린 이관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입을 열었다.
“진채를 다 세우면 바로 파상공세를 가해 올 테니 다들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이르게. 우리 모두가 이곳에서 뼈를 묻더라도 성을 지켜 내야만 해.”
그러자 부관도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이관이 예상한 대로 청군은 해가 뜨자마자 홍이포를 쏘며 성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동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지을 역사적인 전쟁의 막이 올랐다.
청군이 고부리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은 파발을 통해 바로 영원성에 전해졌다.
남두병 사령관은 보고를 받는 즉시 비상 회의를 소집했고 때마침 하루에 여덟 시진씩 강행군을 해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도현도 여기에 참석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착석하자 남두병 사령관이 참모 중 한 명에게 눈짓을 했다.
“고부리성에서 알려 온 청군 선봉대의 규모를 보고드리겠습니다. 병력은 십만가량에, 지휘관은 맹장으로 이름이 높은 야골타라고 합니다.”
“야골타라…….”
심양 관저 시절부터 도르곤 못지않게 악연을 맺어 온 이의 이름이 나오자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찡그렸다.
“그 포악한 자가 또다시 나선 모양이옵니다.”
“비록 적장이기는 해도 멧돼지처럼 앞으로 돌진하는 추진력 하나만큼은 인정할 만하니 선봉장에 제격이지. 아마 그래서 도르곤이 그자를 내세웠을 게야”
청나라가 자랑하는 용장으로 조선군 장수들도 익히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다들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단단히 구축해 놓은 아군 방어선을 뚫어내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박영식 근위군단장의 이야기에 전선 사령관인 남두병 장군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자신할 상황이 아닌 것 같소이다.”
“무슨 말인가?”
도현이 쳐다보자 남두병은 고부리성에서 보내온 보고 중 일부를 이야기했다.
“청군이 무려 오십여 문이 넘는 홍이포를 가져왔다고 하옵니다.”
“지금 홍이포라고 했나?”
“그렇사옵니다.”
“이런.”
대번에 도현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방 안에 있던 지휘관들도 크게 술렁였다.
공성전에서 화포의 존재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부리성이 청군의 공세를 견뎌 낼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가 주작단의 첩보에 의하면 청군이 이번 전쟁에 동원한 홍이포의 수가 최소 백오십여 문이라고 합니다.”
“허어…….”
“이거 청나라가 아주 작정을 하고 덤벼드는 것 같군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지휘관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리 성벽을 세 겹이나 두르고 단단히 쌓았다고 해도 그 많은 화포들이 집중 포격을 해 댄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미간을 모은 채 잠시 뭔가를 고심하던 도현은 남두병 사령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곧 도르곤이 이끄는 본대도 고부리성에 당도하겠지.”
“그럴 것이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
순간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남두병 사령관은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관 성주가 쉽게 손을 들지는 않겠사오나 청군의 전력을 고려한다면 그리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확실히 홍이포 백오십 문은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찼기에 도현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우리도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그래서 별동대를 바로 출격시킬까 하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근위군단장 박영식이 우려스러운 얼굴로 남두병 사령관을 쳐다봤다.
“이제 전쟁 초기인데 벌써부터 별동대를 투입하는 건 너무 성급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패를 까 보이면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쓸 수단이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산해관이 바로 뒤에 있어 청군의 보급선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별동대를 운용한다고 효과가 있겠습니까?”
병참 책임자인 윤찬의 장군의 말에 상당수 지휘관이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승마에 능한 거란 출신 기병들로 별동대를 꾸린 애초 목적이 치고 빠지는 방법으로 병참선을 흔들어 청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부리성은 산해관에서 반나절 거리밖에 안 되는 바로 지척에 위치했기에 윤찬의 장군 말대로 별동대가 병참선을 공격해 봤자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청군의 반격에 노출될 위험이 더 컸다.
이런 것을 남두병 사령관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지만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부리성을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소.”
“으음.”
“끄으응.”
저마다 탄식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 와중에 몸을 살짝 앞으로 돌린 남두병 사령관이 도현을 향해 말했다.
“당초 계획과는 조금 어긋나겠지만, 지금 별동대를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칫 더 큰 패착으로 이어질지도 모르옵니다.”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지휘관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초반부터 기세를 빼앗긴다면 다시 주도권을 쥐기가 어려울 테니 어쩔 수 없지. 별동대를 내보내도록 하게.”
“옛.”
“고부리성에 가해지는 압력을 조금은 줄일 수 있겠지만 청군 본대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그것도 힘들 텐데, 거기에 대한 대책은 있나?”
진지하게 도현이 묻자 남두병 사령관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송구하오나 워낙 병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황이라 성 밖에서 적과 회전을 벌일 수 없으니, 지금으로써는 이관 성주와 병사들이 끝까지 버텨 주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사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고토를 회복하고 제국까지 선포했는데, 또다시 나라에 힘이 부족해 병사들의 피와 희생을 요구해야 된다는 것에 도현은 참담함을 느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지휘관들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분위기가 아주 무겁게 가라앉았다.
도현이 병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었기에 남두병 사령관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간 침묵이 이어진 끝에 도현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아무런 희생 없는 승리는 없겠지.”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하던 도현은 이내 눈을 매섭게 번득이면서 말했다.
“고부리성 병사들이 흘린 피를 적에게 백 배 천 배로 되갚아 줘야 될 것이야. 모두 알겠는가!”
“옛, 폐하.”
한편 고부리성에서는 청군과 조선군 간의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씨이이잉. 콰콰꽝!
“크악!”
포탄에 명중된 성벽 한쪽이 터져 나가면서 병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며 이관이 소리쳤다.
“엎드려! 성가퀴 뒤로 최대한 몸을 밀착시키란 말이다.”
“옛.”
그사이에도 청군이 날려 보낸 포탄이 쉬지 않고 성벽 주위에 떨어져 폭발했다.
가만히 버티고 있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친 조선군 병사들은 소총을 움켜잡은 채 침착한 얼굴로 성가퀴 뒤에 기대어 적진을 노려봤다.
그걸 본 이관은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부하들이 참으로 장하고 자랑스러웠다.
“힘들지만 다들 이를 악물고 버텨라!”
이런 가운데 조선군 포대들도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하며 청군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맞대응했다.
“쏴!”
꽈아앙!
반동에 육중한 화포가 들썩이며 매캐한 화약 연기를 내뱉자 좌우에 서 있던 포수들이 재빨리 달라붙어 포가 바퀴를 뒤로 밀었다.
“영차!”
“더 힘을 써!”
사력을 다해 화포를 포문에서 뺀 포수들은 지체 없이 나무통에 든 화약을 포구에 쏟아붓고는 밀대로 꾹꾹 눌러 다진 뒤 포탄을 들고 와 장전했다.
그러고는 다시 원래대로 화포를 다시 포문에 밀어 넣고 목표를 조준했다.
“조준 끝.”
“발사!”
군관의 외침에 포술장이 화포와 연결된 줄을 있는 힘껏 당기자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굉음을 울리며 포가 발사됐다.
사방이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포대 안에서 포수들은 일련의 동작을 반복하며 화포를 계속 쏴 댔다.
이틀째 이어진 격렬한 포격전에 청군 대포들도 상당수 파괴됐지만 조선군도 성벽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포대 몇 곳이 박살 나는 피해를 입었다.
“이제 병사들을 돌격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심복 장수인 달소의 말에 자욱한 포연에 휩싸여 있는 고부리성을 바라보던 야골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조선군 대포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지만, 곧 황제 폐하께서 오실 텐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공격을 하도록 하지. 부관.”
“예, 장군.”
“일각(15분) 뒤에 공격을 개시할 테니까 보병들을 준비시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군례를 취하며 대답한 부관은 대기하고 있던 전령을 불러 예하 부대로 명령을 전달하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쉬지 않고 계속되던 청군의 포격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포수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쯤, 뒤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군관이 크게 소리쳤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목청이 떨어져 나가라 외쳐 대는 목소리에 포수들은 각자 손을 멈추고 귓속에 말아 넣었던 솜뭉치를 빼냈다.
“왜 멈추라는 거야?”
“저놈들, 대체 무슨 꿍꿍인지 원…….”
귓속에 남아 있는 솜뭉치 가닥 때문에 간질거리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적진을 바라보았지만, 거리가 꽤 멀어서 육안으로는 별다른 변화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음.”
군관은 옆에 서 있던 선임 포술장과 함께 잠깐 쑥덕거리더니 곧 지시를 내렸다.
“어쨌든 이 틈에 화약과 포탄을 보충해 놓는 게 좋겠군. 언제 적들의 포격이 재개될지 모르니 빨리 움직여!”
한숨을 돌리는 것도 잠시, 군관의 호령에 화포 좌우에 서 있던 포수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에 있는 창고를 열심히 오가며 화약통과 포탄을 가져오는 동안, 다른 몇 명은 길쭉한 솔로 포구 안에 거무스름하게 눌어붙은 찌꺼기들을 치웠다.
“콜록! 이봐, 조심해! 가루 날리잖아.”
“어허, 누구야? 방금 내 발 밟은 게.”
“자칫 잘못하면 다 골로 가는 거니까 조심들 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어 양옆으로 여유 공간이 별로 없는 탓에 이런저런 군소리가 새어 나오긴 했지만, 걸걸한 입버릇과는 다르게 포신을 정비하는 손길만은 누구보다도 노련하고 세심했다.
“딴짓하지 말고!”
“예이.”
“알겠습니다, 나리.”
알아 모시겠다는 듯 웃음 섞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런 병사들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보낸 군관은 포문 사이로 고개를 들고 굳은 눈빛으로 청군의 동태를 관찰했다.
격렬하게 이어지던 포격이 별다른 이유 없이 갑자기 중단될 때는 적군의 직접 공격이 임박한 경우밖에 없었기에, 적진을 살피는 군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성벽 위에 있는 병사들도 술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성가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가운데 전투 경험이 많은 고참병이 표정을 잔뜩 구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왜 그러십니까?”
“곧 청군이 쳐들어올 거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참병을 봤다.
“예?”
“그게 무슨…….”
“적들이 포격을 왜 멈췄겠어? 이제부터 병력을 투입해 성벽을 넘겠다는 거야.”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은 정색을 하며 허둥지둥 가지고 있던 소총을 성가퀴에 거치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청군 보병대가 진채 앞에 전투대형을 갖추고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성주님, 청군이 공격을 해 올 모양입니다.”
부관이 다급히 말하자 성문 망루에 서서 적진을 바라보고 있던 이관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나도 보고 있네.”
그러고는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목청껏 소리쳤다.
“전투준비! 모두 적군의 돌격에 대비해라.”
이관의 외침에 군관들이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했다.
“소총을 거치하고 명령이 있을 때까지 쏘지 마라!”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일어나!”
원래부터 훈련이 잘되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누군가 찢어지는 듯한 고함을 내질렀다.
“처, 청군이 공격해 온다!”
병사들이 성가퀴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어 쳐다보자 정말 진채 앞에 늘어서 있던 청군 보병들이 대형을 갖춰 고부리성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
성주 이관은 성가퀴 한 모퉁이를 손으로 꽉 움켜쥐고는 좌우를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모두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해라!”
자세를 잡고 소총을 장전하고 있을 때 잠시 멈췄던 포격이 다시 재개됐다.
쉬우우우웅!
꽈아아앙!
“아악!”
“큭.”
“씨팔! 또 포탄이 날아온다.”
“몸을 숙여!”
청군의 돌입에 대비하던 병사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황급히 성가퀴 뒤로 몸을 숨겼다.
후두두둑.
조선군 병사들이 파편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 청군은 천천히 성을 향해 진격해 오고 있었다.
“앞으로!”
척척척. 척척척.
살기를 잔뜩 피워 올리며 다가오는 청군 보병대의 모습은 성에 있는 조선군에 상당한 압박이 됐다.
포탄이 날아오는 와중에도 피하지 않고 꼿꼿하게 망루에 서서 전방을 주시하던 이관은 예전과 확실히 달라진 청군을 보고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수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 단련돼서 그런지 전술 운용에 노련미가 넘쳐났고 병사들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이 강할수록 아군이 흘려야 되는 피가 더 많아지기에 이관 성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다고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이관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부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포를 쏴서 청군의 대열을 흐트러뜨리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부관은 얼른 전령을 불러 포병 지휘관에게 명령을 전달토록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조선군 측 화포들이 적을 향해 다시 불을 뿜어 댔다.
퍼퍼퍼펑!
상대편 대포가 아닌 보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신관을 적절히 조절한 포탄은 하늘 위에서 폭발해 수많은 파편을 넓은 지역에 뿌렸다.
꽈앙!
“컥.”
“꾸엑!”
비처럼 쏟아지는 파편 세례에 청군 대형 곳곳에 구멍이 생기고 비명과 함께 사상자가 속출했다.
“내 다리!”
“피가 멈추지 않아.”
“살려 줘.”
병사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지만 야골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공격을 독려했다.
“병사들을 돌격시켜라! 단숨에 성벽을 넘는다.”
둥둥둥!
돌격을 지시하는 북소리가 울리자 어느새 오백 보 거리까지 접근한 청군은 함성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갔다.
“공격!”
“우와아아아!”
아직 성까지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포격을 뒤집어쓰는 것보다 나았기에 적병들은 숨을 헐떡이며 뛰었다.
그와 동시에 오폭을 우려한 청군 대포의 사격이 다시 중단됐다.
“적이 돌격해 오고 있습니다!”
부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이관은 적군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 적이 소총 유효사거리 안에 완전히 들어오자 손에 든 지휘봉을 위로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사격 개시!”
성벽 위로 머리를 내민 채 적을 조준하고 있던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망설임 없이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자 달려오던 적병들이 피를 뿌리며 우수수 쓰러졌다.
“끄악!”
“으윽.”
“적이 성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속 쏴라!”
군관의 독려를 들으면서 병사들은 기계적으로 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다.
날카로운 총성이 계속해서 울렸고 삽시간에 성벽 위는 소총을 쏘며 나온 화약 연기로 하얗게 뒤덮였다.
격렬한 사격에 적병들은 허둥거리며 바닥에 엎드리거나 돌격을 멈추고 주춤거렸다.
그걸 본 야골타는 혀를 차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쯧, 멍청한 것들!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공격하라고 해!”
“옛.”
둥둥둥! 둥둥둥!
전투를 독려하는 북소리에 하급 군관들이 주춤거리는 병사들을 다그쳤다.
“뛰어가!”
“빨리 성벽에 붙어라.”
당황해서 허둥대던 병사들은 검을 흔들며 고함을 질러 대는 군관을 돌아보고는 다시 성을 향해 달려갔다.
독전대가 살기 띤 얼굴로 노려보고 있어 어차피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기에 이대로 개죽음을 당하기보다 앞으로 돌격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멈추지 말고 정확히 조준해서 적을 쏴라!”
망루 위에 선 이관은 적이 쏜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상체를 다 드러낸 채 고함을 내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거기에 힘을 얻은 조선군 병사들은 적이 바로 코앞까지 육박해 오는데도 겁을 먹거나 주춤거리지 않고 소총을 쐈다.
“이거나 먹어라!”
타아앙! 탕!
“크허억.”
성벽을 향해 뛰어오던 적병 한 명이 크게 휘청거리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지자 총을 쏜 병사는 상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소총을 바로 세우고는 서둘러 재장전을 했다.
개미 떼처럼 적이 몰려오고 있어 다른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사격과 재장전을 반복했다.
처음 돌격에 나선 보병대의 절반이 죽거나 다치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으면서도 청군은 악착같이 덤벼들었고, 마침내 성벽 바로 아래까지 도착했다.
“올라가!”
“으차!”
생지옥을 겪으며 악에 받친 청군들은 힘들게 가져온 공성용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거나 갈고리가 달린 밧줄을 위로 집어 던졌다.
“막아라!”
“성벽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된다!”
병사들이 성가퀴 밖으로 몸을 내밀며 성벽을 타고 올라오려는 적을 쏴서 떨어뜨렸지만 청군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세졌다.
아주 끝장을 보려는지, 기선을 잡았다고 판단한 야골타는 병력을 계속해서 추가로 밀어 넣으며 파상공세를 펼쳤다.
타탕! 탕! 탕!
피슝!
“이크.”
성벽에 바짝 붙은 적들이 총을 쏘고 화살을 날릴 때마다 조선군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는 성가퀴 뒤에서 사격을 가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적들이 성벽을 올라와 아군과 백병전을 벌일지 몰랐다.
“빌어먹을!”
성가퀴를 주먹으로 내려치며 이관이 얼굴을 구기자 부관이 다급히 말했다.
“성주님,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성벽이 위험합니다.”
“으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고심하던 이관은 이내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황자총통을 쏴서 적을 쓸어버려라!”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부관은 얼마나 다급한지 뒤에 있는 병사를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수기手旗를 집어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산탄을 장전한 채 대기하고 있던 포수들이 포가 위에 올린 화포를 있는 힘껏 앞으로 밀었다.
“으차!”
“밀어.”
성벽 끝까지 화포를 끌고 간 포수들은 미리 준비해 둔 버팀목을 뒤에 받쳐 포신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더 낮게 조준해!”
“이런 망할! 힘 안 쓰고 뭘 하는 거야.”
아무리 조선군이 보유한 화포 중에 두 번째로 작은 소구경이라고 해도 통짜 황동으로 만들어져서 무게가 만만하지 않았기에, 좌우로 선 포수들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포신을 들어 올렸다.
덜컹.
버팀목을 단단히 고정시키고 포신을 위가 아닌 성벽 아래를 보게 만든 포수들은 군관의 구령에 맞춰 격발기와 연결된 줄을 잡아당겼다.
“쏴!”
퍼퍼펑! 꽈꽝! 꽝!
마치 폭죽이 터지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작고 동그란 쇳덩이 수십 개가 부챗살처럼 앞으로 퍼지며 쏟아졌다.
후두두둑.
그렇게 뿌려진 산탄은 공성용 사다리와 밧줄을 붙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오던 적들을 덮치고 밑에 있는 이들까지 모두 쓸어버렸다.
뿌옇게 주위를 뒤덮은 화약 연기가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드러난 모습은 끔찍한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그나마 시신을 온전히 보존한 이들은 운이 좋은 축에 들었고, 대부분이 네댓 개씩 쇠구슬에 몸이 뚫려 너덜너덜해지거나 팔다리가 하나씩 날아가고 없었다.
어떤 적병은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가 누군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기도 했다.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이었는데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서 좁은 지역에 많은 인원이 가득 몰려 있다 보니 피해가 더 컸다.
단 한 번의 산탄 사격에 무려 천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며, 거세게 밀어붙이던 청군의 기세가 꺾여 버렸다.
“저, 저……!”
말을 탄 채 전투를 지켜보던 야골타와 청군 지휘부는 뜻밖의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조금만 더 두들기면 성이 함락될 거라 낙관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었다.
무시무시한 산탄이 휩쓸고 지나간 청군 선두 대열은 그대로 피떡이 되어 박살 났고, 뒤따르던 청군 병사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자리에 멈춰 서거나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걸 본 야골타는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고는 잔뜩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후퇴시켜.”
그러자 달소를 비롯해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며 이의를 제기했다.
“후퇴라니요. 너무 성급하신 결정 아닙니까?”
“맞습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큰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아직 승기는 아군한테 있습니다. 이럴 때 더 밀어붙여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장수들이 주위로 다가와 시끄럽게 떠들어 대자 야골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버럭 호통을 쳤다.
“모두 조용!”
“…….”
“성을 함락시키고 싶은 마음은 그 누구보다 내가 더 간절할 걸세. 하나 이미 기세가 꺾여 버렸는데 공격을 계속해 봤자 피해만 늘어날 뿐이야.”
“이렇게 포기하기에는 기회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장수 중 한 명이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자 야골타는 힐끗 성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성벽 위에서 산탄을 쏴 대는 저 소포들을 제거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거야.”
맹장猛將으로 불리는 야골타였지만 나이가 먹고 연륜이 쌓이면서 멈춰야 할 때를 알게 됐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단호한 태도에 장수도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당장 퇴각 신호를 보내고 포병대에 일러 저 소포들을 모조리 다 박살 내 버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잠시 뒤 퇴각을 지시하는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깃발이 적진에서 휘날렸다.
“퇴각 신호다!”
그사이 조선군의 산탄 공격이 두세 차례 이어지면서 또다시 무더기로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봐야 했던 청군 병사들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이제 살았어.”
그러고는 포성과 함께 쏟아지는 산탄 공격을 피해 너도나도 뒤로 몸을 돌려 후퇴하기 시작했다.
개미 떼가 흩어지듯 사방으로 퍼지며 물러나는 그 모습이 장관이었으나, 앞부분에 있던 병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오자 급격한 혼란이 빚어졌다.
“악!”
“젠장, 저리 비켜!”
“미, 밀지 마.”
일순간 발이 꼬여 한 병사가 주저앉는 순간, 욕설과 함께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이 그 등을 짓밟았다.
다들 제 목숨을 보전하느라 바쁜 와중에 다른 사람이 어떤지 챙길 여유 따윈 없었다.
그건 마치 무리에서 떨어진 약한 짐승을 배척하는 것과도 같았는데,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거칠게 치고 나갔다.
그런 적병들의 등 뒤로 황자총통과 조선군의 소총이 불을 뿜어 댔다.
꽈앙! 타타탕! 탕! 탕!
“적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부관의 들뜬 목소리에 이관은 무수히 많은 시신을 남겨 둔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청군을 보며 작게 숨을 내뱉었다.
“그렇군.”
성을 지켜 낸 건 다행이었지만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기에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우려했던 것과 달리 거셌던 적군의 공세를 흔들리지 않고 잘 막아 낸 부하들이 실로 자랑스럽고 든든했다.
주위를 둘러본 이관은 초번부터 격렬했던 전투에 지친 기색이 완연한 병사들의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전투가 없을 것 같으니 부상병들을 치료소로 보내고 포격에 부서진 곳을 보강하도록 해.”
“예.”
“그리고 전투를 치르느라 허기가 졌을 테니까 밥도 든든히 먹이고 잠시 쉴 수 있도록 해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지시를 내리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린 이관은 멀리 있는 적진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쉽지는 않겠지만 내 목을 걸고 여길 끝까지 사수할 것이다.”
고부리성
밤낮으로 전투가 계속 이어졌지만 고부리성은 함락되지 않고 망루 위에 조선군 깃발을 꿋꿋하게 휘날렸다.
“잘 버텨 주고 있군.”
그러자 남두병 사령관이 상석에 앉아 있는 도현을 보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파상공세를 막아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정말 잘해 주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이대로 고립된 채 싸우다 보면 결국 한계에 부딪치게 되겠지.”
정색을 한 도현은 회의실에 모인 지휘관들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별동대는 언제 움직인다 하던가?”
“오늘내일 안에 습격을 가할 것이라는 연락을 받았사옵니다.”
“목표는 물론 적이 보유한 대포들이겠지.”
“그렇습니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대포를 부숴야 하는데 잘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도현의 우려에 남두병 사령관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흑치영 장군이 직접 갔으니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알려 올 겁니다.”
“하긴 흑치영 장군이라면 믿을 수 있지.”
뛰어난 맹장이자 측근인 흑치영에 대해 신뢰를 보인 도현은 상체를 들어 의자 등받이에 몸을 살짝 기대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청군 본대의 동태는 어떤가?”
“주작단의 정보에 의하면 조만간 산해관을 나올 것 같다 하옵니다.”
“도르곤이 직접 움직이는 건가?”
표정을 굳힌 남두병 사령관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그 성격에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 더 이상했지.”
실제로 도르곤은 선봉대가 고부리성에 막혀 진격을 하지 못하자 몇 번이나 자신이 직접 나서려고 했지만 휘하 장수들의 만류에 애써 화를 참아 왔다.
“청군 본대가 합류하면 고부리성에 대한 압박이 더 커지겠지.”
도현의 말에 남두병 사령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고부리성을 함락시켜야지만 진격로가 열릴 테니,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옵니다.”
“후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곤경에 처한 아군을 돕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정말 답답하군.”
“신도 같은 심정이옵니다만 그렇다고 고부리성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을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사옵니까.”
“짐도 알고 있네. 그저 홀로 대군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고부리성 병사들이 안타까워 한 말이야.”
도현뿐만 아니라 회의실에 모여 있는 지휘관들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기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 나라의 지존답게 다시 평정심을 되찾은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별동대에 일러 최대한 고부리성을 지원하라 하고 청군이 우회를 해서 다른 성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토록 하게.”
“옛.”
“그리고 반격 준비는 어찌 진행되고 있나?”
반격 이야기가 나오자 침울해 있던 지휘관들의 눈이 번뜩이면서 매섭게 빛났다.
“대련 지역 중산에 공격군이 집결을 모두 끝마치고 폐하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대답을 하는 남두병 사령관의 목소리에도 힘이 넘쳤다.
“청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보안을 철저히 하고 있겠지?”
“집결지 주위를 높은 목책으로 완전히 둘러싸고 인근 오십 리 안에 있는 모든 주민들의 이동을 막아 통제하고 있사옵니다.”
“잘했어.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킬 희심의 패이니 절대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야.”
“염려 마시옵소서.”
대답을 들으며 도현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서 청군 본대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
한편 흑치영이 이끄는 별동대 삼만 명은 영원성을 떠나 한창 치열한 공성전이 계속되고 있는 고부리성 근처에 와 있었다.
별동대는 신속한 기동을 위해 대부분이 거란 출신인 기병으로 이루어졌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 걸릴 때쯤 고부리성에서 육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해 행군을 멈춘 별동대는 휴식을 취하며 전장 상황을 살폈다.
“청군 선봉대가 사방을 완전히 둘러싼 채 성을 공략 중이었습니다. 수효는 대략 팔구만 정도로 보였습니다.”
“주작단의 첩보에 의하면, 야골타군의 병력이 십만이 아니었나?”
갑옷을 입은 흑치영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쳐다보며 묻자 보고를 하던 장수가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전투 중에 죽거나 심하게 다친 숫자가 그만큼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이해가 된다는 듯이 흑치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울러 이레도 안 돼서 무려 만여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전투가 치열하다는 뜻이었기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에 있는 아군 상황은 어떤 것 같나?”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습니다만 청군의 포격에 피해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청군 포대가 어디에 배치되어 있지?”
그러자 장수는 탁자 위에 펼쳐 놓은 지도에서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깁니다.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만 고부리성 서문 앞에 제일 많은 서른 문의 홍이포가 위치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진채 안으로 옮기지 않고 밤에도 계속해서 여기에 놔두는 건가?”
“예. 잘 아시겠지만 무거워서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고, 철수했다가 다시 방열하는 게 보통 손이 많이 가는 일이 아니기에 그냥 고정한 채 쓰고 있었습니다.”
“경비 병력은 얼마나 되지?”
“포대 주위에 한 개 천인대가 경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백 보 뒤에 진채가 있어서 공격을 받으면 금방 지원 병력이 나와 합류할 것이기에 일이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들은 흑치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해내야만 되는 일이야.”
잠시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던 흑치영은 고개를 들어 천막에 모여 있는 휘하 장수들을 둘러보며 명령을 내렸다.
“성에 있는 아군이 하루하루 피를 흘리며 악전고투하고 있는데 공격이 쉽지 않다고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오늘 밤 자정에 계획대로 적진을 습격할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해 두도록 해.”
흑치영의 말에 장수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옛.”
“알겠습니다, 장군.”
새로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세밀한 습격 계획을 세운 흑치영과 장수들은 아직 해가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대비해 천막을 치고 병사들을 재웠다.
그리고 밤이 되자 미리 준비해 놓은 주먹밥과 건량으로 배를 채웠는데, 긴장을 풀고 전투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소주를 한 잔씩 마시게 했다.
“크으.”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화끈한 열기에 소주를 마신 병사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으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이 맛이야. 한 잔 더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자 가죽 주머니를 들고 부하들한테 소주를 나눠 주던 군관이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취하라고 주는 게 아니야.”
“괜히 감질만 나니까 그렇지요. 제 주량 아시지 않습니까.”
병사가 어떻게든 한 잔 더 얻어 마셔 보려고 야양을 떨었지만 군관은 단호하게 잘랐다.
“안 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 잔씩밖에 안 돌렸는데 네놈이 뭐라고 특혜를 주나? 게다가 이제부터 싸우러 나갈 건데 취하면 어찌할 거야. 적군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발이 풀려서 혼자 고꾸라져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참아 봐.”
서슬 퍼런 핀잔에 괜히 나섰다가 본전도 못 찾아 먹은 병사가 뒷목을 긁적였다.
“쩝, 알겠습니다.”
아쉬워서 입맛만 다시는데 그 모양이 심히 처량해 보였는지 군관이 눈가를 살짝 누그러뜨렸다.
“대신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돌아가면 내가 과붓집에서 거나하게 한잔 사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약속하신 겁니다!”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본 적 있나?”
그러자 곁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다른 병사들이 헤헤거리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당연히 저희들도 사 주시는 거겠죠?”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시면 안 됩니다! 요 두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나중에 발뺌하실 생각일랑 하지도 마십시오.”
덩치 큰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애교를 피우는 모습에 군관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알았다, 알았어! 나 참, 무서워서 말도 함부로 못 꺼내겠군.”
군관의 입에서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겉으로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는 한편으로 봉급을 탈탈 털어서 술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부하들이 한 명도 죽거나 다치는 일 없이 모두 무사히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야습 준비를 모두 마친 별동대는 모두가 곤히 잠에 빠진 자정이 되자 숙영지를 출발해 고부리성으로 향했다.
마침 달이 가장 어두운 그믐이라 야습에 나선 별동대의 움직임을 가려 줬다.
말발굽 소리도 줄이기 위해 모든 말에 털로 만든 덧신을 신겼고 얼굴은 물론이고 가지고 있는 병장기를 검은 숯으로 칠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적진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물론 중간에 청군 순찰대를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상대가 경보를 발령하기 전에 신속하게 처리해 버렸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별들만 보석처럼 반짝이는 가운데, 병사들처럼 얼굴을 숯으로 검게 칠한 흑치영이 눈을 번뜩이며 전방에 위치한 적진을 노려봤다.
“저기군.”
“아직 우리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말을 타고 옆에 선 부관의 이야기에 흑치영은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후후후, 설마하니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야습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우리한테는 잘된 것 아닙니까?”
“맞아.”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은 슬쩍 시선을 뒤로 돌려 공격대형을 갖춘 채 조용히 늘어서 있는 기병들을 보고는 말했다.
“방심한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자고.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해.”
“옛.”
잠시 뒤 신호가 울리자 삼만 명의 별동대는 일제히 땅을 박차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삐이이익.
“돌격!”
“이랴!”
두두두두두.
아무리 덧신을 신겼지만 삼만 기의 기병이 돌격해 들어가며 내는 말발굽 소리를 지울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어설프게 만들어 둔 목책 뒤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청군 병사는 갑자기 땅이 울리는 소리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글쎄.”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쥔 창을 꽉 움켜쥘 때, 어둠을 뚫고 엄청난 숫자의 기병이 몰려오는 것을 본 병사들은 기겁을 했다.
“헉!”
“저, 저건…….”
“조선군이야!”
비명 같은 청군 병사의 외침과 함께 비상을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땡땡땡땡!
그리고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별동대가 쏜 불화살이 어두운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높이 날아올랐다.
화약 무기에 밀려 이제는 많이 퇴색된 활이었지만 그래도 파괴력과 치명성은 여전했기에 조선군 기병대의 필수 무장 중 하나로 운용됐다.
마치 하늘에서 수많은 유성우가 내리는 것처럼 아름답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온 불화살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청군 병사들에게 치명적인 이빨을 드러냈다.
슈슈슉. 슉.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내며 떨어진 불화살 비는 적들의 몸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크억!”
“으윽.”
“어서 피해!”
뒤늦게 적들이 허둥거렸지만 광범위하게 쏟아지는 불화살을 다 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운 좋게 목숨을 건진 자들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더 무시무시한 사신과 맞닥뜨려야 했다.
“단번에 다 쓸어버린다. 가자!”
선두에 서서 외치는 흑치영의 말에 기병들은 더욱 박차를 가하며 군마를 몰아갔다.
“히익.”
“기병이 온다!”
“도망쳐!”
목책이 있었지만 애초에 대충 건성으로 만들어 허술한 데다가 높이마저 낮았기에 별동대는 말을 탄 채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렇게 포대 안으로 난입한 별동대는 내부를 마구 휘젓고 다니며 적병을 주살했다.
탕! 탕!
“커헉.”
“끄윽.”
창을 내밀며 저항하려던 적들은 기병들이 쏜 권총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겁에 질려 도망치는 적을 뒤쫓아 간 기병들은 가차 없이 검을 내려쳤다.
서걱.
“아악!”
사방에서 검 빛이 난무했고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기선을 제압당하고 숫자마저 적은 경비 병력은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렸다.
들리는 건 청군 병사들이 살려 달라고 외치는 고함과 비명뿐이었다.
“하압!”
츄악.
언월도를 휘둘러 제법 지위가 있어 보이는 청군 군관을 양단해 버린 흑치영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처럼 신나게 상대를 몰아붙이는 부하들을 둘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화포부터 박살 내라!”
야습을 벌이기 전에 미리 지시를 받은 것이 있던 기병들은 적을 공격하는 한편 일부가 대열을 빠져나와 약간씩 거리를 두고 방열되어 있는 홍이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으차!”
기병들은 화약을 잔뜩 넣은 가죽 주머니를 포신에 꾸역꾸역 집어넣고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지지직.
도화선은 순식간에 타들어 갔고 이내 커다란 폭음이 울리며 포신이 깨졌다.
꽈앙!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포신이 두 동강 나 버린 홍이포는 완전히 녹여 새로 주조를 하지 않는 이상 다시 사용할 수가 없었다.
“대, 대포가……!”
“조선군을 막아!”
대포를 부수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적들이 별동대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기병들이 휘둘러 대는 검에 목숨을 잃거나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별동대가 신나게 홍이포를 부수고 있을 때 청군 본진의 진채 문이 열리며 황급히 지원 병력이 몰려 나왔다.
“장군, 저길 보십시오!”
꽤 험한 싸움을 벌였는지 입고 있는 갑옷 여기저기에 피를 묻힌 부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청군 지원 병력을 본 흑치영은 미련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대포는 다 부쉈나?”
“예.”
“그럼 더 있을 이유가 없지. 다들 물러나라고 해!”
삐이익. 삐이익.
호각 소리가 울리자 청군을 주살하며 전과를 올리고 있던 별동대 기병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 머리를 돌렸다.
“퇴각! 퇴각하라.”
짧은 시간 동안 포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별동대는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순식간에 전장에서 이탈했다.
그러자 지원 병력을 이끌고 나온 청군 장수 달소는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놈들을 잡아라!”
달소가 지휘하는 청군 기병대가 말을 달려 달아나는 별동대를 추격했고 보병 오천 명도 뒤를 따랐다.
전투를 치러 추격해 오는 청군보다 지쳐 있었지만, 거란족이 대부분인 별동대는 초원에서 나고 자란 유목민족답게 뒤쫓아 오는 청군 기병대를 여유 있게 따돌리며 후퇴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청군 기병대를 따돌릴 수 있었지만, 별동대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를 적진에서 멀리 끌어냈다.
잡힐 듯하면서도 계속 달아나는 별동대를 보며 조바심이 났지만 적장인 달소를 더 화나게 만드는 건 바로, 상대가 말을 탄 채 몸을 뒤로 돌려 화살을 쏴 대는 것이었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별동대 병사들이 수시로 날려 대는 화살에 벌써 백이 넘어가는 부하가 비명을 내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정예 팔기군이 아니라 한인 향용인 기병들은 조선군만큼 기마술이 뛰어나지 못했기에 달려가며 화살을 쏘는 재주가 없었다.
짧은 파공음과 함께 또다시 기병 대여섯 명이 쓰러지는 것을 본 달소는 이를 악물며 부하들을 다그쳤다.
“속도를 더 높여! 놈들을 어서 따라잡으란 말이다.”
“이랴!”
달소의 독려에 청군 기병들은 연신 채찍질을 가하며 말을 달렸지만 별동대와 거리는 좀처럼 좁아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추격에 나선 청군 기병대와 보병 간에 간격이 더 벌어졌다.
“헉헉.”
“빨리 뛰어라!”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뛰어가던 청군 보병들은 지휘관의 말에 숨을 헐떡이며 불평을 늘어놨다.
“젠장, 말을 탄 놈들을 우리보고 어떻게 쫓아가라는 거야.”
“그러게.”
이미 조선군은 물론이고 청군 기병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지만 멈추라는 명령이 없었기에 보병들은 어두운 밤길을 무턱대고 달려가야 했다.
그런 보병들은 조용히 숨어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왔습니다.”
거란 출신 조선군 장수인 홍종수는 부하의 말에 눈을 반짝이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매복지로 들어오는 청군을 쳐다봤다.
“좋아. 적들이 완전히 들어오면 그때 친다.”
“예.”
홍종수의 지시에 길게 자란 풀숲에 은신해 있던 별동대 병사들은 활을 재고 전방을 주시했다.
허리에 권총도 차고 있었지만 활이 더 정확한데다가 사정거리도 길었기에 타격 무기로 선택했다.
달빛이 거의 없어 시야가 그리 좋지 않은 가운데 어둠을 헤치고 달려오는 청군 보병대의 모습이 보였다.
거친 숨소리가 매복해 있는 곳까지 들리는 것이 앞서 간 기병대를 따라가느라 많이 지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상대가 매복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자 홍종수는 검을 치켜들며 거침없이 명령을 내렸다.
“쏴라!”
그러자 좌우에 있던 별동대 병사들이 일제히 몸을 드러내며 화살을 날렸다.
슈슈슉! 슉! 슉!
별동대가 쏜 화살은 조선의 비밀 병기라 불리는 편전片箭이었다.
일반 화살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훨씬 더 치명적인 편전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지로 들어온 적에게 끔찍한 지옥을 선사했다.
첫 화살을 날린 별동대 병사들이 재빨리 두 번째 화살을 전통에서 꺼내 재는 사이에 적들의 비명성이 울렸다.
“크악!”
“커컥.”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적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며 큰 혼란에 빠졌다.
“매복이다!”
허둥지둥 가지고 있던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으려고 했지만 관통력이 뛰어난 편전은 그대로 뚫고 들어가 적병의 목숨을 빼앗았다.
투욱.
“억.”
가뜩이나 크기가 작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편전인데 달빛까지 거의 없는 밤이라 적들은 더욱 대처를 하기 어려웠다.
거기다가 살상력은 또 얼마나 좋은지, 갑옷과 방패로 튕겨 내거나 막기도 어렵고 살짝 비껴 맞아도 모조리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순식간에 반수 가까이가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고, 또다시 섬뜩한 파공음을 울리며 편전 세례가 청군 보병들을 덮쳤다.
후두두둑.
이렇게 청군 보병대가 매복에 당해 전멸 위기에 몰려 있을 때 앞서 달려간 기병대도 별동대의 반격에 직면했다.
적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지자 흑치영은 부하들을 줄지어 세우고는 말 머리를 돌려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적이 따라붙었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에 희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달려오는 적을 쳐다봤다.
흑치영은 언월도를 안장 옆에 걸고 활을 꺼내 편전을 재며 소리쳤다.
“준비!”
드드득.
근육이 불끈 튀어나올 정도로 시위를 팽팽하게 당긴 흑치영은 제일 앞에 서서 달려오는 적장을 겨냥한 뒤 편전을 쐈다.
“쏴!”
명령과 동시에 길게 늘어서 있던 별동대 병사들이 편전을 날렸다.
슈슈슉. 슈슉! 슉!
야습을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해 오던 청군 기병대는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날아오는 편전 세례에 대형이 그대로 무너졌다.
화살 비에 기병들은 우수수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지휘관인 달소마저 어깨에 편전이 날아와 박혔다.
“큭.”
다행히 급소를 피해 낙마를 하지는 않았지만 달소는 힘없이 말 머리 위로 고꾸라졌고, 옆에서 따라오던 부관이 화들짝 놀라 고삐를 잡고 말을 세웠다.
“장군!”
“으으…….”
“괜찮으십니까?”
부축을 받아 겨우 상체를 바로 한 달소는 깊숙이 박힌 편전을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빌어먹을.”
“부상이 심하십니다.”
“상관없어.”
거칠게 말을 내뱉은 달소는 직접 깃털이 달린 부분을 부러뜨린 뒤 편전을 뽑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일반 화살보다 훨씬 길이가 짧은 데다 화살촉이 더 날카로운 편전은 어깨 깊숙이 박혀 좀처럼 빼낼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화살촉이 근육과 살을 헤집으면서 부상 부위가 더 벌어졌다.
그사이 연속된 편전 세례에 청군 기병대의 전열이 크게 흐트러지자 흑치영은 활을 집어넣은 뒤 언월도를 빼 들며 소리쳤다.
“돌격! 적을 싹 다 쓸어버려라.”
“우와아아!”
함성을 내지르며 흑치영을 따라 별동대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땅을 박차면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양측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편전 세례에 주춤하며 멈춰 서 있던 청군 기병대는 무섭게 덮쳐 오는 별동대를 보고는 기겁했다.
“이, 이런.”
두두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돌격해 들어간 별동대는 날카롭게 청군 기병대 사이를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하압!”
서걱.
“끄억.”
이히히힝.
채챙! 챙! 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적들이 내뱉는 비명과 피가 전장 가득 뿌려졌다.
“이놈들! 내 언월도 맛을 봐라!”
부우웅.
흑치영이 무거운 언월도를 크게 휘두르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청군 기병의 목이 잘려 날아갔다.
“끄륵.”
깨끗이 잘려진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고 숨이 끊어진 청군 기병은 차가운 흙바닥에 쓰러졌다.
벌써 여섯 명째 적병을 죽인 흑치영은 아직 부족한지 언월도를 치켜들며 다음 상대를 찾아 말을 몰았다.
“다 죽여 주마!”
이렇게 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난전에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졌는데, 대부분이 청군 기병들이었다.
청군 지휘관인 달소는 부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구긴 채 침음성을 흘렸다.
“이럴 수가.”
청군 기병들도 나름 분전을 펼쳤지만 별동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벌써 반수 가까이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나머지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니, 그 전에 전열의 붕괴가 더 빨랐는데, 전의를 상실한 청군은 아무런 명령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말 머리를 돌려 도주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우리가 완전히 당했습니다.”
“크윽…….”
상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다는 치욕감에 달소가 몸을 부들부들 떠는 가운데 부관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시지요.”
어느새 바로 근처까지 육박해 들어온 조선군의 모습에 달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네.”
“본진으로 돌아간다. 장군님을 보호해라!”
“옛.”
어깨 부상을 당한 달소는 부관과 함께 기병 스무 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황급히 전장을 이탈했다.
병사들을 지휘해야 될 장수마저 도망치면서 청군 기병대의 와해는 더욱 가속화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시신만 남겨 둔 채 대부분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결론적으로 야습은 대성공이었는데, 서른 문 이상의 홍이포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추격에 나선 청군을 매복에 빠뜨려 수천 명의 사상자를 만들어 냈다.
뒤늦게 야골타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을 때는 이미 별동대가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난 후였다.
날이 밝고 드러난 청군 포대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엉망으로 난도질당한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가운데 포신이 박살 난 홍이포들이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렸다.
막판에 직접 추격에 나섰지만 별동대를 잡는 데 실패한 야골타는 잔뜩 굳은 얼굴로 지휘 천막에 앉아 있었다.
“피해 상황을 보고해 봐.”
야골타의 말에 장수 한 명이 주춤주춤 눈치를 보며 일어나 입을 열었다.
“옛. 전사 육천팔백에 중상 오백육십 명 그리고 경상이 천 명가량입니다. 그중 삼천 명이 기병들이고 홍이포도 서른한 문이 파괴돼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야골타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단 한 번의 야습에 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었단 말이야! 거기다가 홍이포까지 서른한 문이 박살 나다니,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한 건가!”
“면목이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야습과 매복에 걸려 사상자가 발생한 건 그렇다고 쳐도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홍이포가 서른한 문이나 파괴된 건 청군 입장에서 너무나도 뼈아픈 일이었다.
당장 공격 병력을 지원할 화력이 부족해져 성을 공략하기가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야습 피해를 수습하는 것도 있었지만 오늘 계획되어 있던 공격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계속된 전투로 지쳐 있던 고부리성의 주둔군은 전열을 재정비할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됐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삭이고 있을 때 천막 휘장이 젖혀지며 추격대를 지휘했던 달소가 들어왔다.
초췌한 얼굴에 부상을 당한 한쪽 어깨에는 피가 살짝 배어난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온 달소는 털썩 야골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죽여 주십시오.”
고개를 숙인 채 벌을 청하는 달소의 모습에 야골타는 눈가를 찡그렸다.
마음 같아서는 큰 벌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최측근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게.”
“장군…….”
“부상은 좀 어떤가?”
“괜찮습니다.”
“그래도 무리를 하면 자칫 상처가 덧날 수도 있으니 당분간 좀 쉬도록 하게.”
야골타의 말에 달소는 고개를 들며 약간 출혈된 눈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성을 공략하는 데 제가 선봉에 서서 어젯밤 당한 치욕을 되갚도록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 몸 상태로는 병사들을 지휘할 수 없으니 다른 장수들한테 복수를 맡기고 지켜보게.”
“하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달소가 다시 부탁을 하려 하는 것을 야골타가 중간에 끊었다.
“그냥 내 말대로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달소가 어쩔 수 없이 수긍을 하자 야골타는 좌우에 늘어서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했다.
“최대한 빨리 피해를 수습하고 다시 공성전을 재개할 수 있도록 해. 알겠나!”
“옛.”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기는 했지만, 포병대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과연 제대로 공성전을 벌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에 장수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부터 청군이 공격을 재개했으나 화력지원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돌격을 감행했다가 큰 피해를 입고 다시 물러나야 했다.
거기다가 진채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틈만 보이면 습격을 해 대는 별동대 때문에 전력을 온전히 집중할 수가 없어 공성전이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전투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을 때 마침내 참다못한 도르곤이 본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나왔다.
수십만에 달하는 청군 본대가 도착하자 고부리성 주변 들판이 온통 병사들로 새까맣게 뒤덮인 것 같았다.
성벽 위에 있던 조선군은 그걸 보고 바짝 긴장했는데, 군관들이 단속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크게 술렁였다.
“정말 엄청나게 많네. 한 이십만은 넘는 것 같지?”
병사 한 명이 질린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동료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이십만이 뭐야, 내가 보기에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제기랄, 지금도 힘든데 저만큼이나 적이 늘어나면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한탄 섞인 병사의 말에 동료들이 어두운 얼굴로 줄을 지어 도착하는 청군 본대를 쳐다봤다.
“과연 우리가 성을 지켜 낼 수 있을까?”
“하아.”
“…….”
아무리 잘 훈련된 정예들이라고 해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서 오는 두려움을 다 이겨 내기는 어려웠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한쪽에 있던 선임병이 보다 못해 나섰다.
“뭐가 겁난다고 그래! 지금까지도 잘 버텨 왔잖아. 제아무리 청나라 놈들이 떼로 몰려와도 고부리성의 단단한 성벽을 넘지는 못할 거야.”
“맞아, 다 덤비라고 해!”
선임병의 말에 다른 병사들도 동조를 하면서 다시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 내지는 못했다.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 같습니다.”
천리경으로 적진을 살피던 이관은 부관의 말에 시선을 돌려 성벽 위를 쳐다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입안이 바짝 마를 정도인데 오죽하겠나.”
“성주님…….”
“그래도 겁을 먹고 물러서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자칫 사기가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관 성주가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었기에 얼굴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군관들한테 일러 병사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잘 다독이라고 하게.”
“……예.”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미지수였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부관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 부관을 힐끗 쳐다본 이관은 담담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적들도 본대를 맞이한다고 공격을 해 오지 않을 것 같으니 병사들을 교대로 쉬도록 조치하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진채를 새로 세우고 공격 준비를 갖추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겠나.”
“그렇군요.”
“그리고 전투가 재개되면 분명 제일 먼저 홍이포로 아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려고 들 테니까 포병 지휘관에게 맞상대할 채비를 단단히 갖추라 이르게.”
이관의 지시에 부관은 결연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한편 본대가 합류하며 다시 활기차게 움직이는 청군 진영과 달리 지휘 천막 안은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갑옷을 입은 채 화려하게 장식된 용상에 앉아 있던 도르곤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좌우로 늘어선 장수들을 쳐다보다가 야골타한테서 시선을 멈췄다.
“야골타.”
“옛, 폐하.”
“공성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째인데 아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니, 실망이야.”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싸늘한 말투에 야골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주시면…….”
탕!
용상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친 도르곤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기회를 줬지 않나!”
“…….”
“그런데 그 결과가 뭐야! 삼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홍이포까지 서른 문 넘게 말아먹고도 아무런 성과가 없잖아.”
가슴을 마구 후벼 파는 질책에 야골타는 벌게진 얼굴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지금까지 세운 전공을 생각해 이쯤에서 끝내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조용히 물러나 있어!”
노기가 가득한 도르곤의 호통에 야골타는 어깨를 움츠렸다.
“총병관.”
“예.”
담담한 얼굴로 서 있던 용골대가 몸을 돌리며 대답하자 도르곤이 약간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일 날이 밝자마자 총공세를 펼쳐 성을 함락시키고 영원성으로 진격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성급하게 공격을 하려는 도르곤의 행동이 조금 우려스럽기는 해도, 용골대 역시 월등히 전력이 앞서는 상황이라 결과를 낙관적으로 봤다.
“옛.”
다른 장수들 역시 승리를 의심치 않았는데, 그만큼 고부리성에 있는 조선군과 비교해 청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도르곤이 명령한 대로 다음 날 동이 트자마자 청군은 고부리성을 완전히 둘러싼 채 홍이포를 쏘며 공격에 나섰다.
이백여 문이 넘는 홍이포가 일제히 불을 뿜어 대자 고부리성은 순식간에 섬광과 희뿌연 포연에 휩싸였다.
조선군도 즉시 대응 사격을 하며 반격에 나섰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크게 밀렸다.
쏟아붓듯 쏴 대는 포탄 세례에 단단하게 지어진 포대 일부가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버틸 수 없을 정도였다.
성주인 이관이 서 있는 문루 주위도 쉬지 않고 포탄이 날아와 터졌다.
꽈아앙! 꽝!
“성주님, 위험합니다! 엎드리십시오!”
부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갑옷 끝을 붙잡았지만 이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적진을 노려봤다.
“성주인 내가 겁을 먹은 모습을 보이면 어떻게 하겠나. 괜찮으니 이거 놓게.”
“성주님…….”
또다시 문루 바로 앞에 포탄이 떨어져 터지는데도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선 이관의 모습에 부관은 호들갑을 떤 자신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몸을 바로 세우며 뒤에 있는 병사들을 보며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방패로 성주님의 몸을 가려라.”
“예, 옛.”
그러자 웅크리고 있던 병사들이 황급히 커다란 사각 방패를 들고 와 이관의 몸을 가렸다.
사각 방패 사이로 고개를 내밀어 적진을 살피던 이관은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아군 포병대가 밀리는군.”
“아무래도 수적으로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고부리성에 있는 화포를 다 합쳐 봐야 팔십 문이 채 안 됐기에 처음부터 정면 대결은 어려운 일이었다.
“젠장!”
작게 욕설을 내뱉은 이관은 쉬지 않고 포탄을 쏴 대는 청군 포대를 보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렇게 맹렬히 이어진 청군의 포격은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이백 문이 넘는 홍이포의 일제사격은 가히 무시무시했는데, 고부리성에 떨어진 포탄 숫자만 무려 이천여 발이 훌쩍 넘었다.
만약 연사 속도가 조금 더 빠르고, 계속된 사격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포신을 식히느라 중간쯤부터 돌아가면서 포격을 가하지 않았다면, 이것보다 훨씬 많은 포탄이 고부리성을 강타했을 것이었다.
과녁이 된 성 주위는 희뿌연 먼지구름으로 뒤덮였다.
포연이 조금씩 가라앉고 드러난 고부리성은 성벽 여기저기가 포격에 부서지고 무너져 내려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보급 마차에 실어 온 포탄 상당수를 소모한 도르곤은 말 위에 앉아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고부리성을 쳐다봤다.
“쯧, 포탄을 그렇게 많이 쐈는데도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못하다니.”
혀를 차며 불만을 드러내자 뒤에 있던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돌과 흙으로 단단히 쌓았고 성벽 폭이 열 자가 넘는다고 하니 포격으로 부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결국 병사들을 투입해 성벽을 넘어가야 된다는 거군.”
“그렇사옵니다.”
머리를 끄덕인 도르곤은 잠시 더 고부리성을 바라보다가 명령을 내렸다.
“영아대 장군.”
커다란 덩치에 장비처럼 수염을 기른 장수 한 명이 호명을 받자마자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장군이 지휘를 맡아 성벽을 넘도록 하게.”
“영광이옵니다.”
공격 임무를 맡은 영아대는 군례를 취하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시선을 다시 용골대에게 돌린 도르곤은 지시를 계속 내렸다.
“아군이 성을 공략하기 쉽게 신호를 할 때까지 포격을 계속하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전령들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고, 도르곤은 고개를 들어 멀리 위치한 고부리성을 보며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눈을 번뜩였다.
격렬했던 포격이 멈추자 성가퀴 위로 머리를 슬쩍 내민 조선군 병사들은 진채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적병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쳐들어올 모양이야.”
“포격 때문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는데 차라리 잘됐어.”
근처에 있던 동료들도 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성가퀴 뒤에 숨어 무기력하게 포탄이 제발 다른 곳에 떨어지기를 빌고 있는 것보다 적과 얼굴을 마주 보고 싸우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모두 적군의 돌격에 대비해라!”
소곤거리며 잡담을 하던 병사들은 군관의 외침에 입을 다물고는 무기를 챙겨 들고 각자 위치로 가서 섰다.
그때 잠시 그쳤던 포격이 재개됐다.
슈우우웅~~꽈앙! 쿠쿵!
“씨팔!”
“또 쏘잖아.”
포격이 끝난 줄 알고 방어 태세를 갖추려던 조선군 병사들은 허겁지겁 다시 성가퀴 뒤로 몸을 엎드렸다.
고부리성이 희뿌연 포연에 뒤덮인 가운데 청군은 본격적으로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
“부대 앞으로!”
말에 올라탄 영아대 장군의 외침에 각종 무기로 무장한 향용병 오만이 성을 향해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걷듯이 움직이던 청군은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오백 보 정도를 남겨 두고는 거의 뛰다시피 달려갔다.
“돌격!”
“우와아아!”
오만에 달하는 청군은 조선군이 포격을 가해 올 것을 대비해서 좌우로 넓게 퍼져 돌격해 들어갔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았다.
성벽 뒤에 엄폐해 있던 조선군은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단 한 명의 이탈자 없이 모두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오폭을 염려해 청군의 포격이 뚝 그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켜 성벽 앞에 바짝 붙어 섰다.
“각자 위치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 사격을 하지 마라!”
군관들이 뒤를 왔다 갔다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의 피해가 얼마나 되나?”
이관 성주가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채로 묻자 옆에 있던 부관이 약간 긴장한 어투로 대답했다.
“전투 중이라 정확한 숫자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포격에 삼백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좌측에 있는 포대가 부서져 제 역할을 못 하게 됐다는 겁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이관 성주는 포격에 직격을 당해 반쯤 무너진 포대를 보고는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우측 포대가 남아 있지만 그것으로는 화력지원을 충분히 해 주기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지. 부서진 포대 안에 있던 화포들은 어찌 되었나?”
“다행히 크게 망가지지 않아서 일단 포대 밖으로 모두 끌어내고 있는 중입니다.”
“잘했네.”
포대가 부서진 건 타격이었지만 그래도 화포들이 멀쩡하다는 이야기에 이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화포 전력이 부족한데 포대와 함께 망실했다면 조선군 입장에서 너무나도 뼈아팠을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부서지거나 사용 불량이 된 화포가 열 문이 넘습니다.”
“기세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적이 쏘는 만큼 우리도 반격을 해야만 되니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전력이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그 정도 피해로 버텼다는 것이 대단한 거야.”
“그렇기는 합니다만…….”
부관도 포병대가 선방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방이 포위된 상황에서 가용 화력이 계속 줄어드는 것이 불안했다.
그런 부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이관 성주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지금 돌격해 들어오는 청군을 막지 못하면 우리에게 내일이 없네. 그러니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만 전력을 다하도록 하세.”
“……예.”
부관은 내일이 없다는 이관 성주의 말이 가슴에 무겁게 다가왔다.
그사이 돌격해 들어온 청군이 희뿌연 포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자 재빨리 거리를 가늠해 본 이관 성주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 들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사격 개시!”
“쏴라!”
성가퀴 위로 소총을 내밀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이 지체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탕! 탕!
콩 볶는 듯한 총성이 줄지어 울리며 돌격해 오던 청군 선두가 썩은 짚단처럼 힘없이 우수수 쓰러졌다.
“으악!”
“꾸엑.”
바로 이어서 성벽에 거치해 놓은 황자총통들이 불을 뿜으며 산탄을 발사했다.
꽝! 꽝! 꽝!
후두두둑.
쏟아진 산탄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용감하게 달려들던 청군 병사들을 순식간에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선두가 너덜너덜해졌지만 청군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성벽에 올라라!”
“멈추지 말고 계속 공격해!”
“와아아!”
조선군도 물러서지 않고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양군은 성벽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였다.
“청군을 막아라!”
“죽어!”
“끄아악.”
성주인 이관도 직접 공성용 사다리를 걸치고 문루에 오르는 적병을 검으로 내려치며 전투를 독려했다.
“하압!”
푹.
“커헉.”
“끝까지 자리를 지켜라!”
새빨간 피 보라가 일고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고부리성에는 한 폭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병사들이 대지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치열한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고향 땅에서는 전장에 나간 자식과 남편을 위해 하늘에 기원을 올리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산사의 새벽.
차가운 새벽 공기에 손을 호호 불며 마당을 쓸러 나온 동자승은 오늘도 어김없이 불당에 가득 들어차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 해가 제대로 뜨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 먼 산길을 걸어왔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자승의 머리 위에 커다란 손바닥이 턱 얹혔다.
“주지 스님.”
“허허.”
산신령처럼 눈썹이 허옇게 센 주지 스님은 인자한 미소로 불당 아래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신발들을 가리켰다.
얼기설기 엮은 낡은 짚신이 있는가 하면, 젊은 아가씨나 신을 법한 예쁜 꽃신도 있고, 앞코가 닳아 버린 가죽신도 마구 섞여 있어 가지각색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축축한 흙이 묻어 있다는 점이다.
이슬이 내린 흙길을 열심히 걸어온 흔적이 가득한 신발들을 바라보던 동자승이 주지 스님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다들 누군가를 걱정해서 불공을 드리러 온 거겠죠?”
“그렇단다. 소중한 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는 게지.”
주지 스님은 허허 웃으며 동자승의 등을 밀었다.
“자, 꾸물거리면 날이 밝겠구나. 얼른 마당 쓸고 아침 공양을 준비하여라.”
“예.”
동자승이 불당을 뒤로하고 돌아서자, 주지 스님이 두드리는 맑은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마당을 한차례 쓸고 물을 뜨러 우물을 오가는 사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 산사를 찾았고, 또 산을 내려갔다.
산 아래 마을에서 사찰까지 올라오는 오솔길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어느새 그 앞에 하나둘씩 돌무더기가 쌓이기 시작했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처음엔 불공을 드리러 매일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거기에 모양 좋고 납작한 돌을 표식 삼아 놔둔 게 계기였으나, 사찰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점점 그 수가 늘어나 지금은 거의 커다란 돌탑만큼 높게 세워졌다는 말이 있었다.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돌이 그 위에 쌓이는데도 용케 탑이 무너지질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고 동자승이 말하니, 주지 스님은 사람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기원하는 힘이라는 게 그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답했다.
“한낱 이름 없는 작은 암자에도 이렇게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니, 아랫마을은 더하겠구나.”
주지 스님이 온화하게 중얼거린 말처럼 마을의 상황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가족의 안위를 비는 부적이 문지방마다 붙어 있는 것은 물론, 나이 지긋한 노부모는 밤낮 가리지 않고 거칠하게 일어선 손바닥을 비비며 하늘을 향해 기도했고, 젊은 아낙은 물가에서 빨래를 하다가도 돌탑이나 성황당이 보이면 눈을 지그시 감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는 모습을 마음속에 그렸다.
하다못해 개구쟁이 아이들조차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따라 할 정도였으니, 조선의 모든 백성이 병사들의 무사 안위를 걱정하고 기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들 건강하게 잘 돌아오겠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라니까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동자승의 천진난만한 말에 주지 스님은 길게 기른 흰 눈썹사이로 가늘게 눈을 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아무렴. 하늘은 결코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단다.”
“부처님도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지 스님은 손안에 쥔 염주를 하나씩 넘겼다.
어느새 공성전은 보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제부터 직접 지휘를 하기 시작한 도르곤은 끝장을 보려고 작정했는지 병력을 넷으로 나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며 성을 공격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거세게 몰아치는 공격에 고부리성의 조선군은 고군분투를 하면서도 점점 지쳐 갔다.
교대로 쳐들어오는 청군과 달리 여유 병력이 부족한 조선군 병사들은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아침 해를 맞이해야 했다.
해가 떠오르며 주변을 밝히자 밤새 치러진 격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다.
성문 앞은 물론이고 옹벽 안쪽까지 수천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고, 성벽은 마치 붉은색으로 칠을 한 듯 양군 병사들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지만 잔뜩 지친 얼굴의 조선군 병사들은 무덤덤한 얼굴로 성가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봐, 아까 창에 찔린 건 괜찮아?”
“그냥 팔뚝에 살짝 스친 거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지만 임시로 묶어 둔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와 있는 것이 제법 상처가 깊어 보였다.
다른 때 같으면 진즉에 치료소로 옮겨졌을 부상이었으나 지금은 성벽을 지킬 인원이 부족한 상황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말을 건 털보 사내만 해도 허벅지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어도 그냥 참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기가 빠지면 남은 동료들이 그만큼 힘겹게 버텨 내야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다들 웬만큼 크게 다치지 않고서는 성벽을 내려가지 않았다.
이런 끈끈한 전우애 덕분에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고부리성이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병사 서너 명이 주먹밥과 뜨거운 국물이 든 나무통을 들고 와서 동료들한테 나눠 줬다.
“배들 고프지. 어서 먹어.”
“안 그래도 뱃가죽이 등에 붙으려고 했는데 잘 가져왔어.”
“먹는 게 남는 거야.”
“맞아, 잘 먹어야 청나라 놈들하고도 계속 싸우지.”
소금 간만 한 주먹밥에 된장국이 전부였지만 밤새 싸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던 병사들한테는 더없이 훌륭한 한 끼가 되어 주었다.
그나마 언제 청군이 교대를 끝내고 다시 쳐들어올지 몰랐기에 이렇게라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포격에 지붕이 날아가 버린 문루에 서 있는 이관한테도 부관이 음식을 가져왔다.
“성주님, 송구스럽지만 이걸로 요기를 좀 하십시오.”
고개를 돌려 부관이 내민 주먹밥과 된장국이 든 나무 그릇을 본 이관은 싫은 기색을 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전장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주먹밥을 크게 한입 베어 문 이관은 부관을 보며 말했다.
“자네도 먹어야지.”
“전 나중에 해도 괜찮습니다.”
“언제 짬이 날 줄 알고. 그러지 말고 여유가 있을 때 챙겨 먹게. 안 그러면 힘이 없어서 싸우지도 못해.”
이관의 이야기에 부관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쪽에서 배식을 하고 있는 병사한테 가서 주먹밥과 된장국을 챙겨 왔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관은 시선을 앞으로 하고 적진을 살폈다.
지난 이틀 동안 그렇게 많은 적을 죽였는데도 청군은 어찌나 병력이 많은지 표시도 나지 않았다.
여전히 성 주위를 뒤덮어 버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천막이 쳐져 있었고, 맞서 싸워야 될 적이 넘쳐났다.
그에 비해 고부리성을 지키는 아군은 여전히 전의가 높았으나 갈수록 전력이 줄어들고 있었다.
깨끗하게 비운 나무 그릇을 성가퀴 위에 내려놓으며 이관이 입을 열었다.
“이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남았나?”
그러자 부관은 침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상을 입었지만 무기를 들 수 있는 인원까지 다 포함해도 삼만이 채 안 됩니다.”
“삼 할 넘게 잃었군.”
물리쳐야 할 적은 아직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는데 부하들은 자꾸만 줄어들어 가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 큰 문제는 화포입니다.”
“…….”
“포탄과 화약 재고는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만, 청군과 포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보유한 화포의 절반이 못 쓰게 됐습니다.”
청군을 상대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화포 숫자가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에 이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나 많이 망실됐단 말인가?”
“예. 어젯밤 있었던 포격전이 특히나 격렬했던 데다가 적이 아군 포대를 노리고 사격을 가해 피해가 더 컸습니다. 포대 세 곳이 직격탄을 맞아 포좌와 함께 파괴됐고, 일곱 문이 넘는 화포가 무너진 성벽과 포대 밑에 깔려 버렸습니다.”
“이런!”
“급히 예비 병력을 동원해 허물어진 포대를 파내고 있습니다만 화포를 얼마나 건질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럼 화포가 몇 문이나 남은 건가?”
그의 물음에 부관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산탄을 쏘는 황자총통을 제외하면 이제 마흔세 문밖에 없습니다.”
“끄으응.”
한 번에 수백 발씩 포탄을 날려 대는 청군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부족한 숫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면목이 없습니다.”
마치 화포를 망실한 것이 자기 책임인 양 부관이 머리를 숙이자 이관 성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적이 포격을 하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 지금까지 포병대가 제 역할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성을 지켜 내기 어려웠을 거야.”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화포 전력이 줄어든 만큼 방어전이 더 힘겨워질 수밖에 없어 이관 성주는 쓰린 속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문루 한쪽에 있던 군관이 한쪽 팔을 들어 앞을 가리키면서 크게 소리를 쳤다.
“성주님, 적이 다시 공격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정말 일단의 청군이 진채를 나와 질서정연하게 도열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신음을 내뱉듯 중얼거린 이관 성주는 이내 허리를 펴고는 목에 힘을 준 채 우렁찬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전군 전투준비!”
청군이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병사들은 재빨리 전투 위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쉴 틈을 안 주는구먼.”
“그래도 밥은 다 먹었으니 다행이지.”
“아직 소화도 안 됐어.”
“소화야 저 자식들하고 싸우면서 하면 되지.”
“제기랄.”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청군 진영에서 포성이 울리며 포탄이 날아왔다.
꽝! 꽝! 꽝!
쉬이이익! 쿠쿵!
수백 발의 포탄이 곳곳에 떨어져 폭발하자 성 주변은 순식간에 희뿌연 포연에 휩싸였고 비명과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내 다리!”
“방포!”
꽈꽝!
조선군 포병대도 즉각 반격에 나섰지만 화포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청군의 공격에 묻혀 버렸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성가퀴 뒤에 엄폐해 있던 병사들이 서너 명씩 피투성이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청군의 포격은 지난 전투보다 더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성벽은 물론이고 안쪽 건물들까지 가리지 않고 타격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흔들리더니 굉음과 함께 지금까지 든든하게 버텨 주던 성벽 한쪽이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힘없이 허물어졌다.
와르르륵.
“저, 저런!”
내구력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한꺼번에 서너 발의 포탄이 떨어지자 결국 견뎌 내지 못한 것이었다.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위용을 자랑하던 높다란 성벽은 사라져 버리고 돌무더기만 잔뜩 남아 있었다.
절망과 충격에 휩싸인 조선군과 달리 청군은 드디어 성벽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에 전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아랫입술을 꽉 깨문 이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부관을 보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뭘 하고 있나! 어서 예비 병력을 투입해 무너진 곳을 틀어막아.”
“아, 옛.”
호통을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 부관은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허겁지겁 문루를 뛰어 내려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적진을 쳐다본 이관은 공성전을 시작한 이후 가장 위태로운 순간이 됐음을 직감하며 손에 든 검을 꽉 움켜쥐었다.
아니나 다를까, 청군 진형에서 고부리성을 살피던 도르곤은 성벽이 무너져 폭이 무려 서른 자가 넘는 공간이 생기자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끝낼 때가 됐군. 총병관.”
“옛, 폐하.”
“즉시 총공격을 펼쳐 성을 함락시키도록 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용골대는 도르곤의 명령에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잠시 뒤 청군 진영에서 신호 깃발이 휘날리며 진군을 알리는 북소리가 크게 울렸다.
둥둥둥! 둥둥둥!
“전군 돌격!”
“우와아아!”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청군 병력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거센 파도가 되어 위태위태하게 서 있는 고부리성을 덮쳐 갔다.
허탈한 얼굴로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청군이 몰려오자 겁을 먹고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는 각자 들고 있는 무기를 움켜쥐며 맞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씨팔,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고!”
“얼른 위치로 가!”
그리고 군관의 구령에 따라 적군을 향해 소총 사격을 가했다.
“쏴!”
타타탕! 탕! 탕! 탕!
탄환이 빗발치듯 날아가자 성을 향해 달려들던 청군이 피 칠갑을 하며 무더기로 흙바닥에 널브러졌다.
“계속 달려라!”
말을 탄 영아대의 호령에 청군 병사들은 전과 달리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뛰어갔다.
또다시 총성이 울리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어느새 거리를 좁혀 온 청군도 견제사격을 해 왔다.
피슝.
“크억!”
적이 쏜 총탄이 바람 소리를 내며 옆을 스쳐 지나가자 움찔한 조선군 병사는 바로 옆에 있다가 비명을 내지르면서 쓰러진 동료를 황급히 부축했다.
“이봐! 괜찮아?”
몸을 흔들던 병사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동료가 즉사해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누라가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하더니만…….”
죽은 동료의 눈을 감겨 주며 눈물을 흘리던 병사는 이내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소총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개자식들! 다 죽여 버리겠어!”
성가퀴 앞으로 간 병사는 닥치는 대로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조선군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덤벼드는 청군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진천뢰를 던져!”
“하압!”
“이거나 먹어라.”
청군이 성벽 주위를 새까맣게 둘러싸자 조선군 병사들은 비격진천뢰의 심지에 불을 붙여 냅다 던졌다.
꽈아아앙!
고막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터지고, 폭발이 일어난 곳 반경 삼십 보 안에 있던 적들이 모두 사지가 잘려 나가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으으…….”
“살려 줘.”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빈 공간은 금세 다른 청군 병사들로 채워지며 성을 공략했다.
“어서 방포해!”
다급한 군관의 외침에 성벽을 따라 길게 배치해 놓은 황자총통들이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수많은 산탄이 흩뿌려지면서 성벽 밑에서 우글거리는 청군을 덮쳤다.
작고 동그랗게 만들어진 산탄을 뒤집어쓴 적들은 온몸이 찢겨 나갔다.
“멈추지 말고 계속 쏴! 적들이 성벽에 달라붙지 못하도록 더 아래로 조준을 해서 쏘란 말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포수들을 독려하던 군관은 청군이 쏜 총탄에 가슴을 맞고는 그대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크윽.”
“구, 군관 어른!”
화들짝 놀라 앞으로 달려 나간 포수들은 청군이 쏴 대는 총탄과 화살 세례에 허겁지겁 몸을 숙여야 했다.
청군의 공격에 고개조차 제대로 못 들 정도였고 곳곳에 피를 흘리며 죽은 조선군 병사들의 시신이 성벽 위에 늘어졌다.
공성용 사다리를 걸친 청군은 엄호사격을 받으며 높다란 성벽을 기어 올라갔고, 조선군은 소총을 쏘거나 기다란 창으로 찔러 그걸 방해했다.
타아앙! 탕!
“어딜 기어 올라와!”
푹.
“끄아악!”
창에 찔리면서 그만 사다리를 놓친 적병은 버둥거리며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털썩.
스무 자가 넘는 높이에서 떨어진 적병은 사지를 몇 번 부르르 떨고는 머리가 깨진 채 그대로 절명했다.
이렇게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청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성을 공략했고 성벽은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는 적병들로 가득했다.
조선군 병사들은 백병전까지 불사하며 끝없이 밀려드는 적을 필사적으로 막아 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굳이 힘들게 성벽을 올라가지 않아도 성내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포격에 성벽이 무너져 내린 곳이었는데 여긴 사다리도 필요 없이 돌무더기를 넘어가기만 하면 됐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청군은 이곳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조선군도 예비로 빼놓은 병력을 총동원해서 구멍을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타타탕! 탕! 탕!
재차 이루어진 조선군의 일제사격에 무기를 들고 무섭게 덤벼들던 적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매캐한 화약 연기가 눈앞을 새하얗게 가리자 총을 쏜 병사들이 재빨리 다음 열에 자리를 비켜 주고는 뒤로 빠져 재장전을 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아악!”
“커컥.”
또다시 적들이 마치 춤을 추듯 몸을 흔들며 넘어졌다.
벌써 이러길 수십 차례, 무너진 성벽 주위가 적군의 시신으로 가득 찼지만, 상대는 좀처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양쪽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상태로 있다가는 조만간 적이 코앞까지 들이닥칠 지경이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간 조선군 장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더 빨리 움직여라!”
병사들도 상황이 다급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소총이 그냥 장전되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근위군단부터 배치가 되기 시작한 남-삼식처럼 후장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병사들이 가진 소총은 총구를 세워 일일이 화약포를 입으로 찢어 붓고 총알을 넣은 다음 꽂을대로 쑤셔 줘야 했기에 아무리 재촉을 해도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조선군 병사들은 평소 혹독한 훈련을 거듭해서 일 분에 두 발씩 소총을 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신경이 곤두세운 채 전장 한복판에서 장전과 사격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당연히 장전 속도가 떨어졌고 그만큼 상대가 거리를 좁혀 왔다.
그러자 마음이 다급해진 조선군 병사들이 실수를 하면서 장전 시간이 길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당장 몸을 돌려 달아나고 싶었지만 그러면 방어선이 무너져 성벽 위에서 고군분투 중인 동료들이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이를 악물며 악착같이 버텼다.
그렇게 얼마쯤 더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적군의 돌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주위를 뒤덮은 희뿌연 화약 연기 사이로 청군 병사들이 나타나 앞으로 육박해 들어왔다.
“허억! 쏴!”
병사들은 황급히 방아쇠를 당겼고 총탄에 맞은 적들이 피를 뿌리며 엎어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는데, 바로 뒤따라오던 청병들이 쓰러진 이들을 뛰어넘으며 시퍼렇게 날이 선 칼날을 들이밀었다.
“이런 썅!”
“막아!”
총탄을 재장전할 여유가 없게 된 조선군 병사들은 가지고 있는 소총을 창처럼 써서 적과 맞섰다.
조준을 하기 어렵지만 지금 같은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총검을 장착해 두었기에 그나마 밀리지 않고 바로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다.
어차피 죽여야 될 청군이 발에 차일 만큼 무수히 많았기에 딱히 조준 사격을 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쿠당탕!
커다란 충돌음이 터지고 양군은 서로 뒤엉켜 상대를 죽이기 위해 눈을 부라리면서 병장기를 휘둘렀다.
채챙! 챙! 챙!
사방에서 쇳소리가 울리며 그만큼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서걱.
“크헉!”
“죽어!”
“흥, 네놈이나 뒈져라.”
좁은 곳에서 총검을 찌르고 검을 내려치며 거친 욕설과 기합을 내질렀다.
피가 흘러 바닥에 웅덩이가 되어 고였고 고성과 온갖 아우성이 난무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던 조선군 병사들은 결국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뒤로 밀렸다.
츄악!
“으윽.”
시뻘건 피가 튀며 군관이 휘두른 검에 옆구리를 길게 베인 적병은 주춤거리며 뒤로 쓰러졌다.
벌써 몇 명째 덤벼드는 적을 죽였는지 몰랐다.
거칠어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적이 코앞에 나타났다.
덩치가 산만 한 거구였는데 생긴 대로 커다란 도끼를 들어 올리더니 그를 향해 내려쳤다.
군관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검을 위로 들어 올리며 방어를 했다.
츄앙!
쨍.
“큭.”
무언가 깨지는 쇳소리가 울렸다.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무거운 도끼날에 검이 깨져 두 동강이 난 것이었다.
“제길!”
욕설을 내뱉은 군관은 적이 재차 도끼를 내려치려고 하자 황급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꺼내 쐈다.
탕!
“케헥.”
총성이 터지며 가슴에 탄환을 얻어맞은 상대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을 돌려서 피한 군관은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적을 향해 권총을 연속해 발사했다.
하지만 여섯 발이 장전된 총탄은 금방 떨어졌고 권총을 집어 던지고는 동강 난 검을 휘두르며 끝까지 싸우던 군관은 어디선가 찔러 온 칼에 치명상을 입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크으…….”
이미 그때는 무너진 성벽을 지키던 조선군 병사 대부분이 죽거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방어선이 뚫리자 청군은 물밀듯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빌어먹을!”
문루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이관 성주는 적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보고 신음성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아직 다른 곳은 겨우겨우 버티고 있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방어선이 붕괴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당장 성벽 위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막아라! 물러서지 말고 적과 맞서 싸워라!”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크게 소리를 친 이관은 직접 성가퀴 앞에 서서는 사다리를 걸치고 문루를 기어 올라오는 적병의 머리를 발로 차고 검을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그렇지만 이미 기울기 시작한 전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새까맣게 달라붙어 공격을 퍼붓는 적들이 하나둘 성벽 위로 올라오면서 조선군 병사들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망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필사적으로 사투를 벌였으나 빠르게 줄어드는 조선군과 달리 상대는 갈수록 숫자가 늘어나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커컥.”
“아악!”
“이런 씨부랄 놈들! 같이 죽자!”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보고 흥분한 조선군 병사 한 명이 핏발이 선 눈으로 성벽 위로 올라온 적들한테 총검을 마구 휘둘러 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잔뜩 몰려온 적들이 창과 검을 사방에서 찔러 오자 병사는 온몸을 난자당한 채 피를 토해 내며 숨이 끊어졌다.
곳곳에서 구멍이 뚫리며 성벽을 넘어오는 적병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다다랐다.
성주인 이관이 있는 문루도 적병들이 밀고 들어와 난전이 벌어졌다.
채챙! 챙! 챙!
타탕! 탕!
이관도 적이 흘린 피로 갑옷을 더럽힌 채 문루를 손에 넣으려는 적과 싸웠다.
문루 안은 양측 장졸들이 서로 뒤엉켜 병장기를 휘두르고 총을 쏴 대는 통에 그야말로 난장판이 됐다.
소총을 쏘고 재장전을 하려던 아군 병사가 적이 내지른 창에 찔려 비명을 토해 냈다.
옆에서 그걸 본 이관 성주는 야차 같은 얼굴을 하며 달려와 검을 내리그었다.
츄아악.
일격에 목이 날아간 적병은 피를 뿌리며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에 튄 피를 닦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본 이관은 표정을 굳혔다.
성벽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조선군 병사들이 청군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매몰되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얼마 안 가서 전멸을 당할 상황이었다.
침통한 얼굴을 하고 서 있을 때, 역시 적과 싸우느라 여기저기 피가 튄 부관이 옆으로 다가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성주님,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일단 여길 포기하고 내성으로 가시지요.”
“됐네. 난 병사들과 함께할 것이야.”
죽음을 각오한 듯한 이관 성주의 말에 부관이 다시 그를 설득했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외성은 무너졌지만 우리한테는 두 겹이나 되는 성벽이 더 남아 있으니, 분하더라도 뒤로 물러서 적을 막아 내야 합니다.”
부관의 간절한 이야기에 이관은 그제야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냉철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든든하게 서 있던 성벽은 어느새 부서지고 금이 가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적들로 가득 들어차 조선군 병사들은 여기저기 흩어진 채 힘겹게 저항을 이어 가고 있었지만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뒤로 시선을 돌리자 시가지 너머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내성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대로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이관 성주는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말했다.
“내성으로 간다.”
“옛.”
얼른 머리를 숙인 부관은 뒤로 돌아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여길 포기하고 내성으로 이동한다. 성주님을 모셔라!”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은 지긋지긋하게 덤벼드는 적을 떨쳐 내고는 서둘러 퇴로를 열었다.
“후퇴! 내성으로 가라.”
“뒤로 물러서.”
퇴각 명령에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외성을 포기하면서도 그냥 무질서하게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군은 군관들의 통제 속에 질서정연하게 후퇴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포대에 있던 포수들도 기다란 꽂을대와 검을 들고 적과 백병전을 벌이다가 얼른 후퇴 대열에 합류했다.
그냥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무거워 어쩔 수 없이 남겨 두고 가야 되는 화포를 적이 노획해서 쓰지 못하도록 재빨리 격발기를 제거한 뒤 포구에 구멍을 내 버렸다.
“뭐 하십니까?”
포술장의 물음에 중년 군관은 한쪽에서 나뒹굴던 나무통을 들어 바닥에 화약을 이리저리 뿌리며 말했다.
“자네들 먼저 가! 난 해야 될 일 있어.”
한시가 급한 상황에 도대체 왜 이러나 하며 쳐다보던 포술장은 이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군관 어른, 설마!”
그러자 텅 빈 화약통을 한쪽에 던지며 상체를 바로 한 군관이 초연한 얼굴로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순순히 가기에는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도 이건 아니지요. 내성으로 가서 놈들과 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포대 무기고에 잔뜩 쌓여 있는 포탄과 화약을 터트려 자폭하려는 것을 눈치챈 포술장이 다급히 만류했지만 군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화포를 다 잃었는데 내가 가서 할 일이 없지 않나. 하지만 여기서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준다면 아군이 빠져나가서 전열을 재정비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거야.”
“…….”
이미 결심을 굳힌 듯한 군관의 말에 포술장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더니 이내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남겠습니다.”
“자네도?”
“예, 혼자보다는 둘이 안 외롭고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한쪽에 있는 새 화약통을 집어 들려고 하자 군관이 정색을 하며 막았다.
“안 돼!”
“군관 어른은 되고 전 왜 안 된다는 겁니까?”
포술장이 발끈하며 따지자 군관은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둘 다 없어져 버리면 포대원들은 누가 챙기겠어!”
“그건…….”
말끝을 흐리며 머뭇거리자 군관이 타이르듯 말했다.
“앞으로 더 힘든 전투가 계속 이어질 거야. 염치없는 말이지만 자네가 내 몫까지 해 주게.”
“크흑, 군관 어른.”
적군의 함성 소리가 더욱 가까이에서 들리자 군관은 힐끗 포문 쪽을 쳐다보고는 급히 말을 이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네. 놈들이 여기까지 오기 전에 어서 내성으로 가게.”
재촉에 잠시 망설이던 포술장은 벅차오르는 슬픔을 애써 눌러 참으며 마지막으로 군관한테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그럼, 저도 곧 뒤따라갈 테니 먼저 저승에 가 계십시오.”
“알겠네.”
포술장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계단을 내려가자 군관은 곧장 나무 문을 닫았다.
청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빗장을 단단히 건 군관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안 됐는지 무거운 나무 상자를 끌고 와 문을 막았다.
“끄응차.”
쿵.
그러고는 불만 당기면 무기고에 있는 화약과 포탄이 일시에 폭발할 수 있도록 서둘러 작업을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땀을 뻘뻘 흘리며 화약통의 뚜껑을 뜯고 있을 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적들이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탕탕!
“문이 잠겨 있잖아.”
“그냥 부숴 버려.”
잠시 뒤 도끼로 문을 찍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쿵. 쿵.
도끼날에 금방 문 한쪽이 부서져 나가며 사나운 기세를 내뿜는 적군의 모습이 보였지만, 마지막 화약통을 개봉한 군관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군.”
청군이 문을 부수는 것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군관은 품속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했다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살짝 머뭇거리던 군관은,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손을 움직여 부싯돌을 부딪쳤다.
딱.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부싯돌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엄청난 폭음이 일어나며 군관의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
콰콰꽝!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폭음이 터지면서 단단하게 돌을 쌓아서 만든 포대가 마치 거대한 화산이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대폭발을 일으켰다.
시커먼 버섯구름이 하늘 높이 치솟는 가운데 돌 조각과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폭발이 얼마나 컸는지 멀찌감치 떨어진 청군 진영에서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포대와 주변 성벽에 몰려 있던 수많은 청군들이 폭발에 휘말려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파편에 맞았다.
무시무시한 화염에 삼켜진 청군들은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승리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도르곤을 비롯한 청군 장수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히히힝.
폭발에 놀라 마구 날뛰는 말을 겨우 진정시킨 도르곤은 엄청난 크기의 버섯구름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친놈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는데, 첫 폭발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 세워진 포대 역시 대폭발을 일으키며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관 성주가 자폭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그쪽 포대 지휘관 역시 청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똑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두 번에 걸친 대폭발은 한껏 기세를 올리면서 성안으로 몰려 들어가던 청군의 발을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바로 눈앞에서 수많은 동료들이 폭발과 넘실거리는 화염에 휩쓸려 사라졌으니 동요를 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었다.
덕분에 뒤처져서 퇴각하던 조선군 병사들이 추격을 뿌리치고 모두 무사히 내성으로 물러설 수 있었다.
그리고 한발 앞서 후퇴해 자리를 잡은 이관 성주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면서도 휘하 장졸들이 죽음으로써 만들어 낸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포를 쏴라!”
그의 외침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성에 세워진 포대에서 화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꽈꽝! 꽝! 꽝! 꽝!
처음에 비해 화포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하려는 듯 포격이 매서웠다.
포수들은 팔이 떨어질 것처럼 힘들었어도 이를 악문 채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장전과 사격을 반복했다.
“어서 포탄을 장전해!”
“개자식들, 다 죽여 버리자고.”
특히 상관이 자폭하는 것을 그냥 남겨 두고 와야 했던 포술장과 부하들은 악에 받친 얼굴로 동료를 다그치면서 미친 듯이 화포를 쏴 댔다.
아직 대폭발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머뭇대고 있던 청군은 조선군의 포격에 큰 타격을 입었다.
쿠쿵! 쿵!
“끄아악!”
“크흑.”
돌격을 독려하던 청군 장수인 영아대가 바로 옆에서 터진 포탄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으면서 혼란은 더욱 커졌다.
쏟아진 포탄 세례는 외성 주위에 몰려 있던 청군 대열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병력이 훨씬 더 많았지만 기세가 꺾여 버린 청군은 우왕좌왕하며 그 자리에 엎드리거나 명령이 없었는데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이대로 밀어붙여 성을 함락시키려고 했던 도르곤은 갑작스러운 반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 우리도 대응사격을 하지 않고 뭘 하는 거야!”
화가 단단히 난 도르곤이 언성을 높이자 뒤에 있던 용골대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지금 포를 쏘면 공격에 나선 아군 병력도 피해를 입게 되옵니다.”
실제로 청군과 조선군이 너무 근접해서 붙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오폭의 위험이 컸다.
“젠장할!”
얼굴을 구긴 도르곤의 눈치를 살피며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그래도 외성을 무너뜨렸으니 큰 성과이지 않사옵니까. 오늘만 날이 아니니 일단 여기서 병력을 물렸다가 전열을 재정비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으음…….”
승리를 눈앞에 두고 물러서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쓰라렸지만 그가 보기에도 더 이상 공세를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망설이던 도르곤은 결국 퉁명스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후퇴시켜.”
“옛.”
후퇴 신호가 울리자 청군은 썰물이 빠져나가듯 뒤로 물러났고, 그렇게 조선군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던 외성이 무너지고 화포 전력마저 급감한 상태에서 이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일격을 당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던 별동대는 척후를 통해 고부리성의 상황을 바로바로 파악하고 있었다.
“외성이 무너졌다고!”
너무 놀라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흑치영의 물음에 보고를 하러 온 군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행히 내성을 끝까지 지켜 완전히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이런.”
어떤 상황일지 대략 알 수 있었던 흑치영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짧은 탄식과 함께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좌우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우려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거 큰일입니다.”
“아직 두 겹의 성벽이 남아 있다지만 청군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것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지 않습니까.”
휘하 장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하던 흑치영은 이내 정색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부관.”
“예.”
“본대에서 가져온 신기전이 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부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세 대가 있습니다.”
“그걸 써야 될 것 같으니 준비해 놓게.”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거란 출신으로 이제 당당한 조선군 장수가 된 홍종수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흑치영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굳은 어투로 입을 열었다.
“청군을 공격해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의 숨통을 잠시나마 틔워 줄 생각이네.”
“장군, 적은 수십만이 넘습니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장군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자칫 우리까지 당할 수가 있습니다.”
“성급하게 움직일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장수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흑치영은 뜻을 꺾지 않았다.
“무리한 일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네. 하나 적이 강하다고 우리가 몸을 사린다면, 고군분투하고 있는 고부리성의 아군은 더욱 곤경에 처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 것이야.”
“…….”
“난 위기에 처한 아군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네. 그리고 여기에 우린 유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싸우러 나선 게 아닌가!”
흑치영의 말이 가슴을 파고든 장수들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지요.”
홍종수가 움켜쥔 주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하자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습격에 동의했다.
“까짓것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지난번처럼 아주 혼쭐을 내 주는 겁니다.”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휘하 장수들이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자 흑치영은 고무된 얼굴로 힘차게 명령을 내렸다.
“오늘 밤 결행할 테니 다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병사들을 준비시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결정이 내려지자 장수들은 신속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이미 한차례 야습을 해서 청군에 큰 피해를 안겨 준 경험이 있었기에 준비를 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고, 별동대 병사들의 사기 또한 높았다.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말한테 재갈을 물리고 어둠 속에 녹아들어 가기 위해 숯으로 전신을 검게 칠했다.
당연히 달빛을 받아 번쩍일 수 있는 병장기에도 숯을 발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 야습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신기전을 꼼꼼히 점검한 뒤 불만 붙이면 바로 쏠 수 있도록 장전까지 다 해 놨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자 밤새 치르게 될 전투에 대비해서 흑치영은 저녁을 일찍 지어 병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드디어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별동대는 조용히 숙영지를 떠나 청군 본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려 삼만에 달하는 기병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었지만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조용히 이동했다.
낮에 격렬하게 치른 전투 때문에 지친 청군은 별동대의 접근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하며 다가간 별동대는 청군이 진채에 환하게 밝혀 놓은 불빛이 보이는 곳에 일단 멈춰 섰다.
“이 정도면 되겠나?”
흑치영의 물음에 빠르게 청군 진지와의 거리를 가늠해 본 포술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충분합니다.”
“좋아. 그럼 어서 방열을 하도록 해.”
“옛.”
포술장의 지휘 아래 포수들이 세 대의 신기전 수레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우고는 재빨리 사격 각도와 방향을 맞췄다.
그사이 별동대 병사들은 길게 늘어서며 공격대형을 갖췄다.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군마에 올라 가만히 적진을 노려보고 있던 흑치영은 부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짧지만 힘이 가득 들어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작해.”
“예.”
흑치영의 명령이 내려지고 얼마 있지 않아 적진을 겨냥하고 있던 신기전이 시뻘건 불꽃을 피워 올리며 하늘로 솟구쳤다.
쉬쉬쉭!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른 신기전은 크게 포물선을 그리면서 삼백 보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청군 진영 상공에서 터졌다.
퍼펑! 펑! 펑!
신기전에 매달린 나무통이 터지면서 수백 개의 철환이 마치 우박처럼 떨어져 내리며 천막과 청군 병사들을 강타했다.
후두두둑.
“뭐, 뭐야?”
“어서 피해!”
“살려 줘.”
아무것도 모른 채 천막 안에서 자던 적병들은 쏟아진 철환에 그대로 피떡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요행히 살아난 이들은 처참한 몰골로 죽은 동료들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허둥지둥 천막 밖으로 뛰어나갔다.
바깥은 더 난리였는데, 여기저기 사상자가 속출하고 신기전이 터지면서 떨어진 불씨가 천막에 옮겨 붙어 시뻘건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런 상태에서 또다시 신기전들이 날아와 터졌는데 이번에는 철환 대신 더 무서운 백린白燐을 뿌렸다.
“으아아악!”
불벼락을 뒤집어쓴 적병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몸에 붙은 백린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맹렬하게 타오르며 피부를 태웠다.
치치치칙.
다급한 마음에 동료들이 물을 가져와 끼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이 안 꺼져!”
“이게 뭐야?”
“차라리 죽여 줘!”
엄청난 괴로움에 백린을 뒤집어쓴 적병들은 온몸을 뒤틀었고, 몇몇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고는 스스로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이렇게 한 대당 삼십 발씩 무려 구십 발이나 쏘아진 신기전은 거대한 청군 진영 한쪽 귀퉁이를 순식간에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적진에서 시뻘건 불길이 넘실거리고 청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흑치영은 이빨을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더 좋군.”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군.”
매섭게 눈을 번뜩인 흑치영은 애병인 언월도를 치켜들며 크게 소리쳤다.
“돌격!”
“와아아아~~!”
선두에 서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흑치영을 따라 별동대 기병들이 함성을 내뱉으며 일제히 앞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두두두두.
신기전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청군은 어둠 속에서 울리는 말발굽 소리에 머리털이 바짝 곤두섰다.
“저, 적이다!”
“조선군 기병이 몰려온다.”
기겁을 한 청군 병사들은 다급히 무기를 챙겨 들었다.
하지만 미처 방어대형을 갖추기도 전에 육박해 온 기병들은 심지에 불을 붙인 둥근 철환 모양의 폭탄을 목책에다가 던졌다.
“받아라!”
꽈아앙!
우지끈.
화약을 잔뜩 집어넣은 폭탄이 터지자 주위의 적들과 함께 진채를 둘러싸고 있던 높은 목책이 힘없이 부서졌다.
그 사이로 흑치영과 기병들이 벌 떼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다 쓸어버려라!”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내지른 흑치영은 언월도를 내리그어 엉거주춤 앞에 서 있던 적병의 몸을 양단해 버렸다.
뒤를 따르던 기병들도 물 만난 고기 떼처럼 병장기를 휘둘러 댔다.
“꾸엑.”
“컥.”
사방에서 검 빛이 난무하고 고통에 찬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제대로 일격을 당한 청군은 거칠게 몰아붙이는 별동대를 막아 내지 못하고 힘없이 휩쓸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신나게 별동대가 적진을 마구 유린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급히 달려온 청군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군, 적 지원군이 나타났습니다.”
도망치는 적병의 등을 송곳이 박혀 있는 철 신발로 찍어 버린 흑치영은 부관의 말에 시선을 들었다.
만만한 향용병이 아닌 정예인 팔기군의 등장에 흑치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쳇, 조금 더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군.”
“퇴로가 막히기 전에 어서 빠져나가시지요.”
“알겠네.”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말 머리를 돌리자 부관의 눈짓을 받은 신호수가 가지고 있던 뿔 나팔을 길게 불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러자 성난 맹수처럼 날뛰던 기병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진채를 벗어났다.
“이랴!”
“하!”
썰물 빠지듯이 신속하게 퇴각을 하면서도 별동대 기병들은 왔다 간다는 흔적을 남겨 두는 것처럼 무거운 뭔가를 떨어뜨리고 갔다.
상당히 수상한 행동이었지만 밤이라 어두운 데다가 달아나는 별동대를 쫓아가는 데 정신이 팔린 청군은 그걸 놓치고 말았다.
“놈들이 도망친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고부리성을 함락시키지 못해 입지가 많이 줄어든 야골타는 그 분풀이라도 하듯 부하들을 재촉하며 타고 있는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유목민족 출신들답게 금방 가속도를 붙이면서 팔기군이 별동대를 따라붙으려는 순간, 갑자기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꽈꽝! 꽝! 꽝!
시뻘건 불기둥이 곳곳에서 치솟아 오르며 주위에 있던 팔기군을 휩쓸어 버렸다.
굉음에 말들이 놀라 마구 날뛰었고 팔기군 병사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청군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서 조선군이 놔두고 간 비격진천뢰가 폭발한 것이었다.
“크윽…….”
“장군, 괜찮으십니까?”
폭발 충격에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가 부관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몸을 일으킨 야골타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주변 모습에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자랑스러운 팔기군은 어디로 다 사라져 버리고 사방을 가득 메운 비명 소리와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진 병사들과 군마만이 눈에 들어왔다.
또다시 조선군한테 농락을 당한 야골타는 발로 땅을 마구 걷어차면서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아아악! 이 죽일 놈들.”
분을 참지 못한 야골타가 발광을 하든 말든 적진을 빠져나온 별동대는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부리성 함락을 목전에 두고 실패한 데 이어서 야습까지 당한 청군은 아침부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몇 명이나 죽었다고?”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도르곤의 물음에 총병관 용골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사온데 이 중 육백이 죽고 이백은 다시 전투에 복귀하기 어려울 정도로 중상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르곤은 앉아 있던 황좌 팔걸이를 세게 내려치면서 호통을 쳤다.
탕!
“도대체 경계를 어떻게 서는 거야! 이래 가지고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겠나!”
“면목이 없사옵니다.”
“어젯밤 진채 경비 책임을 맡은 장수가 누구야!”
그러자 왼쪽 끝에 서 있던 장수 한 명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앞으로 나왔다.
“죽여 주시옵소서.”
“그래, 네놈 소원대로 해 주지. 여봐라!”
“옛.”
호위병들의 우렁찬 대답에 도르곤은 더욱 분기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저놈을 끌고 가 당장 목을 베어 버려라!”
벌을 받을 거라 각오는 이미 했던 터지만, 설마 목을 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장수는 호위병들이 좌우에서 팔을 잡아끌려고 하자 바로 털썩 바닥에 엎드려 애원했다.
“제,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듣기 싫다! 어서 저놈을 치우지 않고 뭣들 하는 거야!”
도르곤의 명령에 호위병들은 몸부림을 치는 장수를 억지로 붙들고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짐짝같이 질질 땅에 끌려 나가는 그 모습에 안에 남은 나머지 장수들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살얼음 같은 침묵이 좌중을 감쌌다.
장수 한 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숨을 거칠게 내쉬며 도르곤이 한쪽에 서 있는 야골타를 봤다.
“야골타.”
“네.”
다행히 낙마를 하며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비격진천뢰의 파편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 야골타의 뺨에는 길게 피딱지가 앉은 상처가 나 있었다.
“어제 야습을 해 온 적이 지난번에 포대를 박살 낸 것들하고 같은 놈들이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두 차례나 별동대에 물을 먹은 야골타는 쌓인 것이 많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도르곤이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을 그냥 놔둬서는 안 되겠군. 팔기군 삼만과 향용 기병 일만을 맡길 테니 이것들을 찾아내 쓸어버리도록 해.”
그렇지 않아도 흑치영이 이끄는 별동대에 이를 갈고 있던 야골타는 도르곤의 명령에 눈을 번뜩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저 작은 성 하나를 떨어뜨리지 못해 여기에 주저앉아 있을 텐가! 병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성을 함락시키도록 해! 알겠나.”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전투가 지지부진한 것에 자존심이 상해 있던 청군 장수들은 도르곤의 노성에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옛.”
그날 오후부터 청군은 다시 공성전을 재개했고 야골타가 지휘하는 기병 사만은 별동대를 잡기 위해 본진을 나섰다.
지금까지 당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광활한 평원 어딘가에 숨어 있는 별동대를 단시간 안에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척후병을 통해 야골타가 자신들을 잡기 위해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는 별동대가 더욱 행동에 조심을 하면서 청군은 흔적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흑치영을 고민스럽게 하는 정보 하나가 별동대에 날아들었다.
“청군이 새로 제작한 홍이포 오십 문을 가져오고 있다고?”
흑치영의 물음에 보고를 하러 온 군관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홍이포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포탄과 화약을 이번 보급대가 수송해 온다고 합니다.”
“으음.”
이야기를 들은 흑치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홍이포 오십 문이라면 지난번 자신들이 청군 포대를 습격해서 어렵사리 파괴한 것과 비슷한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가뜩이나 외성이 무너져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이만큼의 홍이포가 더 보충된다면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일이었다.
다들 그걸 아는지 지휘 천막 안에 모여 있던 장수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 봐.”
“옛.”
군례를 취한 군관이 천막을 나가자 홍종수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청군이 우리를 잡기 위해 병력을 내보낸 이때에 홍이포를 수송하는 보급대가 움직인다니, 어딘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함정이라는 건가?”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러자 같은 거란 부족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여러 전공을 세워 군호 벼슬을 하사받은 야수난이 반대 의견을 냈다.
“너무 과민한 반응 아닐까요. 단순히 그동안 고부리성을 공략한다고 탄약을 많이 소모했으니 그걸 보충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 쉽게 생각했다가 진짜로 적이 파 놓은 함정이라면 어찌할 텐가!”
아직 젊어서 그런지 의욕이 앞서는 야수난의 말에 홍종수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럼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을 힘들게 만들 것을 뻔히 알고도 홍이포와 탄약을 옮겨 가도록 그냥 가만히 두고만 보자는 겁니까?”
“그건…….”
곤혹스러운 문제였기에 홍종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꺼림칙했지만 이대로 보급대가 청군 본진에 도착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눈에 선했다.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흑치영은 상체를 바로 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걸로 결정이 됐군.”
“장군!”
“나도 썩 내키는 건 아니야.”
“그런데 왜……?”
정색을 한 흑치영은 특유의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함정일지 모르더라도 청군 본진을 괴롭히고 보급을 힘들게 만들어 고부리성에 있는 아군을 돕는 것이 폐하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이지 않나.”
“…….”
단호한 흑치영의 말에 좌중에 모인 장수들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
흑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수들을 보며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이동할 테니 다들 준비하도록.”
장수들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스치고, 짧고 굵은 대답이 터져 나왔다.
“옛!”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도 아직 까맣게 들러붙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흑치영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흔들어 한 가닥 남은 찝찝함을 떨쳐 버렸다.
물자를 지킬 약간의 인원만 남겨 둔 채 얼마 뒤 별동대 병사들은 말에 올라 숙영지를 떠났다.
척후를 통해 보급대의 이동 경로를 알고 있던 흑치영은 공격하기 좋게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지역에 부하들을 매복시켰다.
병력 배치를 모두 끝마친 별동대는 청군 보급대를 기다리며 잠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흑치영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쉬지 못하고 주변 지형이 그려진 지도를 가운데 펼쳐 두고 작전을 상의하고 있었다.
“주변은 확인했나?”
“예, 척후병들을 보내 근방 이십여 리를 샅샅이 뒤졌습니다만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흑치영은 시선을 돌려 왼편에 있는 홍종수를 보며 말했다.
“야골타의 위치는?”
“그게…… 어제까지만 해도 고부리성 남동쪽에 있었습니다만 그 이후로 행적이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야골타의 위치를 놓쳤다는 이야기에 흑치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거늘 놓치면 어쩌자는 거야?”
“죄송합니다.”
불안감이 더 커졌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공격을 취소할 수는 없었기에 흑치영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최대한 빨리 보급대를 공격하고 여길 빠져나가는 수밖에. 다들 실수가 없게 다시 한 번 준비 상태를 점검하도록 해.”
“옛.”
지시를 내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흑치영은 직접 매복지를 돌아봤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해가 중턱에 걸렸을 때쯤 멀리 북쪽에서 희뿌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옵니다.”
“규모는 확인됐나?”
“가죽 천으로 덮인 짐수레 백여 개에 홍이포 오십여 문을 말들이 끌고 오고 있습니다. 호위 병력은 삼천 명가량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던 정보와 거의 다르지 않은 보고에 흑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 계획대로 움직인다. 매복지 안으로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적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지시를 내린 흑치영은 긴장된 얼굴로 뿌연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다가오는 청군 보급대를 바라봤다.
그렇게 별동대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청군 보급대는 느릿느릿한 속도로 매복지로 다가왔다.
기병 이십여 명으로 이루어진 전초를 앞세우고 있었지만 꼼꼼하게 주위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이었기에 매복을 발견해 내지 못했다.
바위 위로 눈만 살짝 내밀어서 청군 보급대를 확인한 흑치영은 행렬 중간, 포가에 올린 홍이포 오십여 문을 짐말들이 끌고 가는 것을 보고는 눈을 반짝였다.
제 발로 사지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청군 보급대가 매복지 한가운데에 들어서자 흑치영은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쏴라!”
그러자 양쪽 측면에 숨어 있던 별동대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일제히 편전을 발사했다.
슈슈슉! 슈슉! 슉!
“헉! 매복이다.”
“방패로 화살을 막아!”
적장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청군 병사들은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나름 빠른 대응이었지만 신기전과 함께 조선이 자랑하는 비밀 병기인 각궁과 거기에서 쏘는 편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소나기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편전은 나무로 만들어진 방패를 종잇장처럼 가볍게 뚫어 버리고는 그대로 적군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후두두둑.
“꾸엑.”
“컥!”
방패가 소용이 없자 적병들은 당황한 얼굴로 짐마차 밑으로 들어가거나 황급히 엄폐물 뒤로 몸을 피했다.
상당수의 적들이 편전에 맞아 나뒹굴며 비명을 내질렀고 행군 대열이 크게 흐트러졌다.
그러자 어느새 말 위에 올라타 있던 흑치영이 언월도를 치켜들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공격!”
“우와아아!”
말 옆구리를 가볍게 차며 구릉을 내려가는 흑치영을 뒤따르면서 검을 빼 든 기병들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렇지 않아도 소나기처럼 쏟아진 편전 세례에 기가 꺾인 적군은 구릉지 양쪽 사면을 타고 쏟아져 내려오는 별동대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충 봐도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에 전의를 완전히 잃고 말았다.
벌써 앞뒤로 퇴로를 다 막아 버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이를 꽉 깨문 적장이 품속에서 폭죽을 꺼내 밑에 달린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펑.
슈우우우웅! 꽈아앙!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로 솟구친 폭죽은 푸른 하늘에 붉은 색 꽃을 피우며 터졌다.
“……!”
상대가 갑자기 터트린 폭죽이 신경 쓰였지만 이미 전투가 시작된 상태였기에 흑치영은 불안감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눈앞에 보이는 적에게 집중했다.
“흐이이익.”
잔뜩 겁에 질린 채 창을 들고 엉거주춤 서 있는 적병의 목을 언월도로 가볍게 날려 버린 흑치영은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고 적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순한 양 떼 속에 들어간 굶주린 늑대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마구 휘둘러 댔다.
츄악.
시뻘건 피가 시야를 가리면서 어지럽게 튀었고, 뒤이어 돌입한 별동대 기병들도 적을 향해 사정없이 검을 내려쳤다.
제대로 방어대형조차 갖추지 못한 적들은 별동대의 말발굽 아래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나뒹굴었다.
거의 일방적인 학살에 적들은 무기를 버리고 양팔을 들며 항복했다.
적장도 별동대 기병들이 둘러싼 채 살기를 뿌리자 저항을 포기했다.
이미 대부분의 부하들이 죽거나 항복한 상태에서 더 이상 저항을 해 봤자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든 것이었다.
“투항하겠소.”
적장이 항복하자 남은 적들도 싸움을 포기했다.
그러자 흑치영은 쓸데없는 살생을 자제시키고 포로들을 한곳에 모은 뒤 적들이 수송하려던 홍이포와 탄약을 없애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천을 벗기고 짐마차 안을 살펴본 별동대 병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화약이 들어 있어야 할 통에는 모래만 가득했고 포탄은 철이 아닌 나무로 만든 가짜였다.
그뿐만 아니라 포가에 올린 홍이포 또한 굵은 통나무를 잘라 그럴듯하게 검은색으로 칠을 해 놓은 것이었다.
보고를 받고 황급히 말에서 내려 직접 짐마차 안을 살핀 흑치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럴 수가…….”
“아무래도 함정에 걸린 것 같습니다.”
옆으로 다가온 홍종수의 말에 고개를 든 흑치영은 다급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여길 빠져나간다. 다들 어서 말에 오르라고 해!”
“옛.”
지시를 내린 흑치영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병사 한 명이 한쪽 팔을 들어서 앞을 가리키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적이다!”
고개를 돌리자 정말 청군 보급대가 왔던 방향에서 일단의 기마가 쏜살같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포위됐습니다. 사방이 다 적입니다!”
이어진 외침에 주위를 둘러본 흑치영은 이를 꽉 깨물면서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전투 준비! 어서 전투대형을 갖춰라.”
여기저기 흩어진 채 긴장을 풀고 있던 별동대 기병들은 황급히 호각과 고함을 지르며 전투대형을 만들었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홍종수의 물음에 흑치영은 언월도를 고쳐 잡고는 사방을 포위한 채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왼쪽 측면을 뚫어 포위망을 돌파한다! 서둘러라.”
“옛.”
함정을 파고 기다린 적과 맞붙어 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일단 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었지만 최정예인 팔기군이 삼만이나 포함된 청군을 뿌리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동대의 움직임에 당장 포위망을 급격히 좁히고는, 퇴로를 막고 앞뒤에서 강하게 압박해 들어왔다.
이내 양군은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충돌했다.
콰콰쾅!
서로 부딪치는 순간 별동대와 청군은 기합성을 내지르며 각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휘두르거나 찔러 넣었다.
“이얍!”
“합!”
시뻘건 피가 뿌려지고 충격을 받은 이들이 중심을 잃고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히히힝.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도 달리는 말에서 떨어지며 목뼈가 부러지거나 뒤따르던 기마에 밟혀 숨이 끊어졌다.
그들의 애달픈 비명은 주인을 잃은 말의 투레질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에 뒤섞여 전장 가득 울려 퍼졌다.
별동대를 찾기가 쉽지 않자 가짜 보급대를 만들어 미끼를 던지고 몰래 뒤따라와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데 성공한 야골타는 득의만만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포위망을 더 단단히 조여라!”
신호 깃발이 흔들리고 뿔 나팔 소리가 울리자 청군은 넓게 퍼져 있던 간격을 빠르게 좁히며 포위망을 두껍게 만들었다.
단번에 치고 나가는 데 실패한 별동대는 청군과 난전에 휩싸였다.
지휘관임에도 불구하고 흑치영은 몸을 사리지 않고 가장 선두에 서서 적과 싸웠다.
그의 두 손에 들린 언월도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상대의 갑옷이 찢겨 나가고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동료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것을 보고 당황하던 적병은 언월도 창대에 옆구리를 얻어맞고는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낙마한 적병은 흑치영이 신고 있던 송곳이 박힌 철 신발에 안면을 가격 당해 그대로 허물어지듯 엎어졌다.
흑치영뿐만 아니라 별동대 기병 모두가 고군분투를 하며 용감히 싸웠지만 수적 우위를 앞세운 청군의 공격에 하나둘 쓰러져 갔다.
군호 직위에 있는 장수인 야수난마저 앞장서서 퇴로를 뚫다가 십여 명이 넘는 적병에 둘러싸인 채 온몸을 난도질당하고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모습을 본 흑치영은 신음을 삼켰지만 당장 자신도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느라 여유가 없었기에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언월도를 크게 휘둘러 적과의 거리를 벌린 흑치영은 눈을 무섭게 부라리며 노호성을 내질렀다.
“날 죽이려면 네놈들도 최소 백은 목숨을 내놔야 될 것이다!”
살기를 가득 피워 올린 흑치영은 말을 몰아 앞으로 움직이며 적들을 향해 언월도를 마구 휘둘러 댔다.
그의 뒤로 피와 살이 뒤범벅이 된 혈로가 새로 만들어졌다.
벌써 그의 손에 숨이 끊어진 적병이 수십에 달했으나 흑치영은 정말 백을 채우려는 듯이 앞을 가로막는 적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두려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적병의 몸을 언월도로 양단해 버리는 순간, 옆구리에서 뜨거운 인두로 살을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큭.”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어느새 옆으로 접근한 적장 한 명이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고통을 안겨 준 적장은 자신이 흑치영한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며 희열에 찼다.
그것도 잠시, 몸을 돌린 흑치영은 분노에 찬 얼굴로 언월도를 내리그었다.
“이놈!”
“헉.”
촤아악.
당황한 적장이 검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흑치영의 언월도는 그것마저 함께 잘라 버리며 상대를 양단해 버렸다.
뿜어 나온 피에 흑치영이 입고 있던 갑옷이 흠뻑 젖었다.
하지만 흑치영의 몸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 검에 찔린 옆구리를 한쪽 손으로 움켜잡으며 휘청거렸다.
그가 검에 찔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다가온 홍종수는 흑치영을 부축하고는 빠르게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가 깊어 찢어진 갑옷 사이로 피가 많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본 홍종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다들 장군님을 모셔라. 여길 빠져나간다!”
홍종수의 외침에 근처에서 적과 싸우던 기병들이 황급히 흑치영 옆으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흑치영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나만 도망칠 수 없다. 끝까지 남아 부하들과 싸울 것이야.”
“이 몸으로는 무립니다.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함께 전장을 탈출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빠르게 말을 한 홍종수는 흑치영이 뭐라고 대꾸를 하기 전에 그의 몸을 타고 있는 군마에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주위를 둘러싼 기병들과 함께 왼쪽으로 달렸다.
적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홍종수와 기병들은 사력을 다해 탈출로를 뚫었다.
다른 별동대 기병들도 탈출을 시도했지만 적군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면서 상당수가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여야 했다.
그렇게 유격 전술로 청군을 괴롭히던 별동대는 야골타가 판 함정에 빠져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겨우 천여 명만이 가까스로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도현은 두꺼운 이불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불을 끄고 누운 게 벌써 한 식경 전인데, 아무리 눈을 감고 잠을 청해도 점점 더 정신만 말짱해질 뿐 도통 졸리질 않았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낮은 풀벌레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칠현을 불렀다.
“상선.”
“예, 폐하.”
얇은 문을 사이에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칠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잠이 안 온다.”
“…….”
불쑥 내뱉은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두워서 보이진 않지만 분명 저 너머에서 ‘어쩌라고요, 자장가라도 불러 드려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따뜻한 차라도 한 잔 올릴까요?”
“됐다. 넌 무슨 일만 있으면 내 입에 먹을 것을 물리려고 하더라?”
물론 배가 부르면 성질이 너그러워지는 도현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짓이다.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이제 그걸 눈치챘냐고 타박을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칠현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또 야밤에 트집이십니까. 전 그저 배 속이 따뜻하게 데워지면 온몸에 혈기가 돌고 자연스레 잠도 잘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 건데요.”
“진짜야?”
“아무렴요.”
그동안 는 건 말재주밖에 없는지 아주 그냥 줄줄 늘어놓는 게 시장 바닥의 약장수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차는 필요 없어. 괜히 밤에 먹으면 더부룩하기만 하고.”
그러면서 도현은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칠현이 방으로 들어와 촛불을 붙이자 어슴푸레한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겉모습이나 구조는 명나라, 내부는 조선식으로 꾸며져 있어 어딘지 친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공존하는 방이었다.
얇은 침의를 입고 있던 도현이 위에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나갈 채비를 하자 칠현이 물었다.
“갑자기 어딜 나가시려고 하십니까?”
“잠이 도통 안 오니 바깥바람이라도 쐬어야지 안 되겠다.”
“그래도 이런 야밤에요?”
“그냥 조금 걷는 것뿐인데 뭘. 어차피 계속 누워 있어 봤자 머리만 아플 게 뻔해.”
“예에, 정 그러시다면야.”
원체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칠현은 왜 굳이 따끈한 방을 나가서 찬 바람을 맞고 오겠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칠현을 뒤꽁무니에 달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주위를 지키고 있던 위사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미 안쪽에서 불이 켜졌을 때부터 도현이 잠을 자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기에 크게 떠들진 않았지만, 어딜 가느냐며 뒤에 바짝 달라붙을 기색이기에 칠현이 잽싸게 중간에 끼어들어 손가락으로 도현을 가리키곤 다시 눈을 찡긋거렸다.
대충 몸짓 발짓으로 ‘따라오는 건 좋지만 너무 가까이 가서 귀찮게 굴진 말라’는 뜻을 전한 칠현은 어느새 저만치 멀리 가 있는 도현을 향해 종종걸음을 쳤다.
자연스레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찾아 아무렇게나 발길을 옮기던 도현은 작은 관목들과 흰색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후원 끝자락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치형으로 휘어진 돌계단 아래 제법 폭이 넓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수면을 바라보다, 문득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 도현은 둥그렇게 떠 있는 커다란 달을 보고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붉은 달이라니…….”
시리도록 맑은 빛을 내는 은색 달빛 대신,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붉은색 달이었다.
물론 붉은 달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저쪽에 있던 시절엔 대기오염이니 뭐니 해서 종종 달빛이 붉게 변했기 때문에 딱히 신기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속에서 멀미가 나듯 이상스레 요동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도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괜스레 신경이 쓰이는 게 짜증스러웠다.
갑작스레 인상을 찡그리는 도현의 모습에 칠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뎁쇼.’ 하는 칠현의 눈빛에 도현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전장에 있는 병사들을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십니까?”
“다들 밥은 먹고 있는지, 잘 싸우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달을 보기 전까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 대꾸하는 도현의 표정은 자연스럽기만 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용맹스러운 조선의 병사들이 아닙니까.”
칠현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도현을 위로했다.
“폐하.”
“왜 그러나?”
줄곧 뒤에서 잠자코 있던 위사들 중 한 명이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 밤바람이 찹니다. 옥체가 상하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그러고 보니 살짝 찬기가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해 도현이 잠자코 돌아서려는데, 어디선가 급한 발소리가 일행을 향해 곧장 다가왔다.
칠현이 본능적으로 도현을 막아서고 위사들이 바짝 긴장하여 경계를 취하는 순간, 도현의 눈앞으로 온통 땀범벅이 된 장수가 뛰어 들어왔다.
“폐, 폐하!”
장수는 도현을 보자마자 쓰러질 것처럼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칠현과 위사들을 옆으로 물린 도현이 나서서 물으니 장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별동대가 청군의 함정에 빠져 괴멸당했다고 하옵니다.”
“뭐야!”
말을 듣자마자 도현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