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ojong - Chapter 18
18권
거점 확보
뜨겁게 내리쬐는 남국의 태양 아래 돛대에 봉황 깃발을 내건 열두 척의 커다란 선박이 함대를 이룬 채 파도를 헤치며 항진하고 있었다.
바다는 잔잔했고 순풍에 돛이 한껏 부풀어 있어 배들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면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제일 앞에 위치한 기함 선수에는 가벼운 경장 차림의 서지호가 서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육전대 지휘를 맡은 김진석이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부사 어른, 여기에 나와 계셨군요.”
“김 군호, 어서 오게.”
사직이었던 김진석은 왜국과 요서 점령전에서 세운 전공을 인정받아 정사품에 해당하는 군호로 승차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파도가 높아 고생했었는데 오늘은 아주 잔잔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병사들의 상태는 어떤가?”
서지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김진석은 아무 염려 말라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지만 다들 바다에는 이골이 난 이들이라 그 정도 파도에는 끄떡없습니다.”
“다행일세.”
“그나저나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할 때가 됐지 않습니까?”
“오늘 안에 육지가 보일 걸세.”
“장수로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가능하면 화란과 충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나도 마찬가지일세.”
화란과 싸워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럭저럭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오던 상대와 부딪쳐야 된다는 것이 조금 껄끄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가로 지원을 계속해 준다고 도현이 직접 약속하기는 했어도 본국과 수만 리나 떨어진 섬에서 외롭게 임무를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 서지호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화란이 아국의 행보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군.”
“그나마 저들이 세운 요새와 많이 떨어진 섬 북동쪽에 상륙할 예정이니 초반부터 부딪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우리의 행동이 곱지 않을 테니 절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걸세.”
“물론입니다.”
두 사람이 향후 해야 될 일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높다란 돛대 위에 올라가 주위를 살피던 견시수가 한쪽 팔을 들어 전방을 가리키며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육지다!”
“……!”
대화를 멈추고 황급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정말 수평선 너머에 희미하게 시커먼 육지가 보였다.
오랜 항해 끝에 도착한 육지를 보고 수병들 대부분이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하는 가운데, 서지호만은 이제부터 화란의 텃세를 이겨 내고 임금인 도현이 내린 임무를 완수해야 된다는 생각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조선군이 도착한 곳은 대만 북동쪽에 위치한 합자난蛤仔難과 인접한 해안이었다.
대만 원주민인 카바란噶瑪蘭족의 집단 거주지이자 바다와 함께 상당히 넓은 평야가 인접해 있어 풍요로운 곳이었다.
원래는 스페인이 소수의 한족을 앞세워 교회를 세우고 포교 활동을 하며 이곳을 지배했지만 십 년 전 네덜란드와의 세력 다툼에서 밀려났다.
지금은 네덜란드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최근 영국과의 전쟁이 터지면서 많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마디로 무주공산無主空山이라는 뜻이었다.
먼저 선발대를 보내서 해안 근처에 교두보를 확보한 서지호는 머뭇거리지 않고 본대를 상륙시켜 요새 건설에 착수했다.
서양 세력을 등에 업고 상전 노릇을 하던 일부 한족들이 조선군의 출현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조선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두 명도 아니고 수천이 넘는 조선군을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한족들은 일단 물러선 채 잔뜩 경계를 하며, 급히 네덜란드가 대만을 통치하는 식민 수도인 젤란디아Zeelandia 요새로 전령을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는 대만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총독을 임명하고 각종 세금을 거둬들였다.
삼 대 총독인 루벨라 자작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한족들의 대규모 이주에 측근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또 상당한 규모의 한족들이 섬에 유입됐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왼편에 앉아 있던 관리 한 명이 루벨라 총독의 물음에 살짝 굳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오백여 명 정도가 배를 타고 중동부 해안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들어온 한족이 모두 얼마나 된다고 했지?”
“몰래 들어와 사는 자들도 있어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지만 족히 사오만은 넘을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루벨라 총독은 대번에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나 많단 말인가?”
“아무래도 중국 대륙의 정세가 불안하다 보니 푸젠성福建省 남부와 광둥성廣東省 동부의 한족들이 대거 이리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인즉슨 앞으로도 더 늘어날 거라는 거군.”
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필요에 의해서 한족의 이주를 용인해 왔지만 이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그러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간부로 대만 지역 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포름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 문제를 총독께 말씀드리고 대책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족들이 섬에 들어오는 걸 그냥 내버려 둔 건 농지를 개간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는 데 필요한 일손을 충당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반항적인 까오산高山족을 견제하고 힘을 빼기 위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네덜란드는 교묘하게 이주해 온 한족과 원주민인 까오산족의 갈등을 조장해서 식민 지배에 대한 반발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하지만 이대로 한족들의 숫자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늘어난다면 자칫 저들에게 우리가 잡아먹힐지도 모릅니다.”
“껄끄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닙니까?”
젤란디아 요새 주둔군 지휘관인 바벨 대령의 반박에 루벨라 총독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닐세. 포름 총관의 말이 맞아. 지금 손을 쓰지 않는다면 나중에 큰 골칫거리가 될 거야.”
“저도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적으로 긴 해안을 다 막아 버릴 수도 없고 배를 타고 건너오는 한족들은 제지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바벨 대령이 난색을 표하자 한쪽 손을 들어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쓸어 넘기며 잠시 고심하던 루벨라 총독은 이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떻소?”
“무슨 묘안이 있으신 겁니까?”
다들 기대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루벨라 총독이 생각해 낸 것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한족을 우대하던 걸 없애는 것과 동시에 농지 소유를 불허하고 중과세를 물리는 거요. 그럼 자연스럽게 이주민 숫자가 줄어들지 않겠소.”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탄성을 내뱉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거 괜찮은 생각입니다.”
“한족은 땅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니 농지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겁니다.”
“바로 그걸세.”
이것 말고도 루벨라 총독은 한족들한테 추가로 세금을 거둬 최근 영국과 전쟁을 벌이는 데 부족한 전비를 일부 충당할 요량이었다.
“다들 동의를 하는 것 같으니 최대한 빨리 세부 조항을 만들어 시행하도록 하겠소.”
“예.”
그 뒤로도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젊은 장교 한 명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회의를 방해받은 루벨라 총독이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쳐다보자 장교는 약간 주눅이 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합자난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루벨라 총독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급보라니?”
“전령이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합자난 해안에 조선군이 대거 상륙했다고 합니다.”
“조선군이라고!”
“옛.”
날벼락 같은 말에 루벨라 총독뿐만 아니라 회의실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술렁였다.
“명나라 해적이나 왜구가 습격해 온 걸 잘못 안 것이 아니냐?”
값비싼 교역품을 가득 실은 배들을 노린 명나라 해적과 왜구 들이 득실거리며 가끔씩 육지에 상륙해 노략질도 했기에 충분히 그런 의심을 할 만했다.
“분명 조선군이라고 합니다.”
“조선군이 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루벨라 총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포름 총관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혹시 다른 곳으로 가던 중에 선박이 파손됐거나 필요한 물자를 구하려고 상륙한 것이 아닐까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것도 있지만 동양 국가들을 몇 수 아래로 여기는 우월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 루벨라 총독과 사람들은 설마하니 조선이 대만에 세력을 뻗치려고 한다는 걸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소식을 전한 장교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수천의 병력이 상륙해 해안 근처에다가 요새를 짓고 있답니다.”
“요새라고 했나!”
당황한 루벨라 총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이런!”
명백한 도발 행위에 루벨라 총독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분노했다.
“감히 우리 네덜란드의 영토를 넘보다니.”
“이건 절대 묵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맞습니다.”
모여 있던 간부들도 조선을 성토하며 크게 화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 식민지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부를 쌓고 있었기에 조선의 행동을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걸로 받아들였다.
그런 가운데 총독 다음으로 발언권이 강한 포름 총관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전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우선 행동에 나서기 전에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걸 고려해서 조선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흐음.”
화를 내기는 했지만 사실 영국과의 전쟁 때문에 여유 전력 대부분을 바타비아에 보낸 상태라 당장 조선하고 전쟁을 벌일 입장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명나라를 제치고 최근 조선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최대 교역국이라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무턱대고 조선과 싸울 수 없었던 루벨라 총독은 팔짱을 낀 채 고심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하면 사신으로 누가 가겠소?”
그러자 포름 총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포름 총관이 직접 말이오?”
“예. 제가 의견을 내기도 했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조선말을 조금 할 줄 아니 다른 사람보다는 의사소통을 하기 편하지 않겠습니까?”
통역을 거치는 것보다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가 된다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쉬웠기에 루벨라 총독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소. 바벨 대령.”
“말씀하십시오, 총독 각하.”
“저들이 수천의 병력을 끌고 왔다고 하니 눈치 빠르고 똑똑한 장교를 한 명 총관 일행에 동행시켜 은밀히 전력을 살펴보고 오도록 하게.”
만약을 대비해 상대를 미리 정탐해 놓으려는 루벨라 총독의 의도를 파악한 바벨 대령은 얼른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루벨라 총독은 가뜩이나 이것저것 골치 아픈 문제가 많은 상태에서 들려온 급보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음 날 아침 포름 총관은 루벨라 총독이 붙여 준 호위 스무 명과 함께 말을 타고 급히 조선군이 상륙했다는 합자난으로 달려갔다.
한편 조선군은 서지호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육지에 상륙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임시 선착장과 주변을 둘러싼 목책을 완성했다.
목책 안에는 백여 개가 넘는 천막을 세워 임시로 병사들과 일꾼으로 데려온 포로를 수용했다.
“이 정도면 최소한의 방어는 될 테니 한시름 놨군.”
서지호가 길게 늘어서 있는 목책을 보며 하는 이야기에 김진석이 살짝 웃으며 말을 받았다.
“벽돌 가마도 다 완성돼서 이제 곧 성벽을 쌓아 올리게 되면 아무도 쉽게 공격해 오지 못할 겁니다.”
“그때까지 충돌이 안 생긴다면 얼마나 좋겠소.”
조선군은 기존에 바윗돌이나 흙을 이용한 방법 대신 벽돌을 구워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 계획이었다.
석성에 비해 공사 기간과 일손이 크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벽돌 사이에 흙을 채워 넣고 단단히 다져 성벽을 두껍게 만들면 포격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고 보수도 쉬웠다.
“그건 그렇고 요즘도 한족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나?”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서지호가 묻자 부관이 약간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아군의 군세가 많아 대놓고 저항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반응을 보이며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해서 정찰을 제외하고 가급적 병사들이 교두보 밖으로 나가는 걸 자제시키고 피치 못할 경우에는 항상 열 명 이상 무리를 지어 움직이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서지호는 미간을 찡그렸다.
“흥. 원래 저들 땅도 아니고 제 놈들도 이곳에 이주를 해 온 주제에 가당치도 않게 텃세를 부리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옆에 있던 김진석도 볼을 씰룩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괜히 문젯거리를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 참으시게.”
살짝 흥분한 김진석을 다독인 서지호는 부관을 보며 다시 이야기를 했다.
“고산족(카바란족)들은 어떤가?”
“여전히 우릴 경계하지만 얼마 전 도호부사께서 직접 대족장을 방문하고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교환하면서 조금은 분위기가 좋아졌습니다.”
“다행이군. 이 지역 거주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산족과 관계가 틀어지면 향후 계획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을 테니 관계 개선에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옛.”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주둔지를 둘러보고 있을 때 하급 장수 한 명이 다급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장군.”
“무슨 일인가?”
“방금 순찰대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덜란드 총독이 보낸 사신이 이리로 오고 있다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네덜란드 측에서 반응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른 행동에 서지호는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벌써?”
“아무래도 부근에 있는 한족들이 젤란디아에 소식을 알린 모양입니다.”
김진석의 짐작에 서지호는 인상을 쓰며 짧게 혀를 찼다.
“쯧.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한 서지호는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중에 싸우더라도 일단은 서로 대화를 해 봐야겠지. 여봐라.”
“예.”
“화란 사신이 도착하면 내게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군례를 취한 하급 장수가 물러나자 서지호는 수하 무장들과 함께 주둔지 중앙에 위치한 지휘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뒤 포름 총관 일행이 십여 기의 조선군 기병들한테 둘러싸여 주둔지에 도착했다.
“저긴가 보군.”
그러자 총독이 호위로 붙여 준 빌헤름 중위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다가 정면을 유심히 살펴보며 이야기를 받았다.
“주둔지 규모로 볼 때 적어도 오륙천 명가량 되는 것 같습니다.”
“으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에 포름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바타비아 요새에 있는 네덜란드군을 다 합쳐 봐야 천 명이 겨우 넘는데, 다섯 배나 많은 병력이 상륙해 있다니 절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더군다나 칼과 활 같은 냉병기를 쓰는 군대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병력이었기에 더욱 위축이 됐다.
목책 입구를 통과해 주둔지를 가로지르면서 근심은 더 깊어졌는데,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도 완전히 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군기를 유지하는 모습에, 군의 운용에 대해 잘 모르는 그가 봐도 정예들임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가능하면 대화로 원만히 일을 해결했으면 하는 마음에 서지호는 휘하 무장들과 함께 지휘 천막 밖에서 포름 총관 일행을 맞이했다.
그러자 말에서 내린 포름 총관은 조금 어색한 조선말로 인사를 받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만 총독 각하를 대신해서 온 미하엘 포름이라고 합니다.”
상대가 조선말을 할 거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서지호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반색을 했다.
“조선말을 할 줄 아시는군요. 이거, 놀랐습니다.”
“여길 찾는 조선 상인들과 거래를 하다 보니 조금씩 배웠는데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거래라고 하시면……?”
“아, 이곳 동인도회사 책임자로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자, 여기서 이야기를 할 것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예.”
넓은 지휘 천막 안은 회담을 위해 나무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자리에 앉자 당번병이 따뜻한 인삼차를 내왔다.
진한 인삼 향기가 천막 안을 가득 채우자 포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향이 아주 좋군요.”
“귀한 분들이 오신다고 해서 특별히 준비를 한 겁니다. 어떻게, 입맛에 맞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상거래를 하면서 인삼차를 제법 많이 접해 봤지만 이건 그중에서 상上품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다행입니다.”
가벼운 대화로 분위기를 푼 서지호는 용건이 뭔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앞에 앉아 있는 포름 총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절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으시다고요?”
그러자 포름 총관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국 영토인 대만에 사전에 아무런 허락도 받지 않고 조선군이 상륙한 것에 대해 총독께서 심히 우려를 하고 있으십니다. 양국의 우호 관계를 감안해서 이번 한 번만은 그냥 넘어갈 테니 조속히 철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순간 천막 안은 한겨울 삭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서지호가 정색을 하며 포름 총관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상체를 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오해라고요?”
“그렇습니다. 귀국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최근 이 주변 해역에서 극성을 부리는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온 겁니다.”
“…….”
서지호의 말에 포름 총관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문제라면 이렇게 몰래 상륙할 것이 아니라 젤란디아 요새로 와서 정식으로 협조를 구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는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지적을 여유롭게 받아넘겼다.
“해적들이 설치는 장소가 북쪽 바다인데 섬 남쪽에 있는 젤란디아 요새는 너무 멀 뿐만 아니라 최근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우리 조선군 단독으로 토벌을 하려고 했소이다. 그리고 자꾸 몰래 상륙을 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상황이 좀 정리되면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그쪽에서 빨리 찾아온 것일 뿐이오.”
“그쪽 주장이 맞다고 쳐도 이렇게 보란 듯이 목책까지 세우며 주둔지를 만든 건 무슨 의도입니까?”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인삼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서지호가 이야기를 했다.
“토벌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물자를 보관할 장소가 있어야 되지 않겠소.”
뻔한 수작에 포름 총관은 인상을 찡그렸다.
“해적을 없애면 우리 조선뿐만 아니라 화란에도 좋은 일이니 부디 편의를 좀 봐줬으면 좋겠소이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자 포름 총관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튼 인정할 수 없으니 빨리 철수해 주십시오.”
상대가 재차 철수를 종용하자 서지호도 얼굴에서 미소를 살짝 지웠다.
“정말 이렇게 깐깐하게 나오셔야 되겠소?”
“보급기지가 필요하다면 이곳이 아니라 젤란디아 요새를 이용하면 될 겁니다.”
“거긴 거리가 너무 멀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포름 총관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한 서지호는 정색을 하며 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께서 내게 하명하신 임무를 완수하게 위해서 이곳에 주둔지를 세우고 당분간 머물 예정이니 그렇게 아시오. 귀국과는 그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으니 이번 일도 충분히 이해해 줄 것이라 믿소이다.”
“허어.”
더 이상 협상은 없다는 듯이 서지호가 못을 박아 버리자 포름 총관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도 계속 포름 총관이 철수를 요구했지만 서지호는 고개를 내저었고 결국 첫 번째 만남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서로 간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끝났다.
포름 총관 일행이 조선 측에서 제공한 숙소로 가자 대화를 지켜보던 김진석이 서지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순순히 양보를 할까요?”
그러자 서지호는 다 식어 버린 차 대신 새 찻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저들 입장에서는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불청객이나 다름이 없으니 분명 쉽게 용납하지 않을 걸세.”
“그럼 낭패지 않습니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김진석과 달리 서지호는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처음 임무를 맡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지 않나. 대화로 풀리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저들이 무력을 동원하려고 든다면 우리도 거기에 맞춰 상대를 해 주면 될 것이야.”
“그렇지요.”
김진석은 약간 경직된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도 해가 뜨기 무섭게 포름 총관이 찾아와 귀찮게 했지만 서지호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해적 토벌을 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네덜란드 측이 제대로 주변 해역을 관리하지 못해서 자신들이 여기까지 토벌을 온 것이 아니냐며 따지는 뻔뻔함(?)마저 보였다.
그렇게 나흘이 넘게 대화를 했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자 포름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다시 젤란디아 요새로 돌아갔다.
한편 한양에서는 1652년 임진년 새해를 맞이해서 하례식과 함께 대소신료들이 모인 첫 조회가 열렸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된 왕좌에 앉은 도현은 근엄한 얼굴로 좌우에 시립해 있는 신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올 한 해도 짐을 도와 아국을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들 주시오.”
“황공하옵니다, 전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회를 시작하려고 할 때 총리대신인 박황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전하, 현안 보고를 드리기 전에 건의드릴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나라가 커지고 국력 또한 높아진 만큼 그에 걸맞은 궁궐이 있어야 되지 않겠사옵니까. 지금 거처하고 계신 창덕궁은 그런 면에서 여러 가지로 손색이 많으니 하루빨리 정궁인 경복궁을 재건해야 된다고 생각하옵니다.”
조선왕조가 지은 궁궐 중에 제일 먼저 지어졌고 규모 또한 가장 컸던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약탈을 당하고 화재가 나면서 모두 소실돼 지금은 터만 남아 있었다.
“총리대신께서 바른말을 하셨습니다.”
“그렇사옵니다. 경복궁을 저대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저 역시 찬성입니다.”
정궁으로서 경복궁이 가지고 있는 권위도 있거니와, 왜적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아픈 역사가 모두에게 쓰린 상처로 남아 있었기에 박황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도현은 그만하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경들 생각은 잘 알겠네. 하나 아직은 시기가 이른 듯하니, 일은 차후에 다시 논하는 것이 좋을 거 같군.”
“어째서 때가 아니라 하시는 것입니까?”
경복궁을 재건하는 것은 언젠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지금처럼 민심이 평안하고 군왕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때도 찾아보기 힘들거늘, 어째서 본인만이 저리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왕가의 권위를 세우는 것도 좋지만 아직 대외적으로 불안 요소들이 많고, 무엇보다 청과의 전쟁이 다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자금과 인력이 동원되는 대규모 공역을 벌이는 건 형편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경복궁 문제는 정세가 안정되고 여유가 있을 때 다시 거론하는 게 맞을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정궁인 경복궁을 저리 폐허로 놔둔다면 선대왕들을 뵐 낯이 없을뿐더러, 백성들에게도 왕실의 위신이 제대로 안 서지 않겠사옵니까.”
완고한 박황의 태도에 다른 대신들도 덩달아 동조했다.
“총리대신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하, 재고해 주시옵소서.”
너도나도 한 목소리로 떼를 쓰자, 도현의 얼굴에 난감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끄응.”
잠시 뜻을 누그러뜨리는가 싶었으나 이내 그는 고집스럽게 입가를 한일자로 굳히고 말했다.
“경들의 충심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나, 아무튼 시기상조라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네.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시오.”
더 이상 물고 늘어지면 불벼락이 떨어질 거라는 경고를 담은 눈빛으로 그리 말하니, 박황을 비롯해 그의 편을 들었던 대신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경복궁 재건 문제를 뒤로 미루고 다른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조회를 끝낸 도현이 희정당으로 돌아와 막 한숨 돌리려고 하고 있을 때 이번엔 숙안 공주가 그를 찾아왔다.
“공주가? 갑자기 무슨 일이라 하더냐?”
“전하께 드릴 물건이 있다 하시던데요.”
손아래 동생들과는 달리 숙안은 침착하고 조신한 편이라 도현이 먼저 불러들이지 않으면 좀처럼 희정당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아이가 제 발로 먼저 찾아왔다고 하니 도현은 기쁘면서도 약간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라.”
“예.”
칠현이 나가고 얼마 안 있어, 숙안 공주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되는 숙안 공주는 제 어미를 많이 닮아 마른 체형에 하얀 피부, 선이 가는 것이 영락없이 젊은 시절의 중전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을 많이 듣곤 했다.
얼굴에 얼기설기 그려져 있는 마맛자국만 아니라면 꽤 미인이었을 텐데.
자식들은 다 사랑스럽고 어여쁘지만, 숙안 공주는 볼 때마다 부모로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에 유독 아픈 손가락이었다.
“아바마마.”
하나 그런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리기라도 하듯 도현을 바라보는 숙안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본인도 어렸을 때는 얼굴의 마맛자국이 부끄러워 매일 숨기곤 했는데, 도현과 중전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니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아진 모양이었다.
“숙안이 왔느냐. 어디,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도현은 속으로 감탄하면서 숙안에게 손짓했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가끔씩 이리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항상 제 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걱정하던 괴짜 공주는 어디로 가고, 딱 제 나이 때 처녀다운 풋풋함을 뽐내는 소녀가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내가 너무 나이를 먹었나?”
“후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숙안 공주는 도현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듯 작게 웃었다.
하긴 왕위에 올라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소년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와 청년의 푸르른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도현이다 보니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마치 오빠와 여동생 같을 뿐 도저히 부녀지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중전이 가끔 전하께서는 불로초라도 드시는 게 아니냐면서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서 말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네가 여기까지 다 오고?”
“사실은 아바마마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흐음? 어디 보자꾸나.”
선뜻 손을 내민 도현과 달리 숙안 공주는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러느냐?”
“그게, 좀 부끄러워서요. 제가 보잘것없는 솜씨로 만든 것이라…….”
그 말에 도현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예. 어마마마께서 여자는 수를 놓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요즘 배우고 있어요.”
왕실의 자손으로서 남부끄럽지 않게 학문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여성스러움을 갈고닦는 것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열심히 설득했을 중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럼 더 좋지.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물건 아니더냐.”
“아바마마.”
어쩜 저렇게 듣고 싶은 말만 쏙 골라서 해 주는 걸까.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다 도현과 같다면 지금 당장 혼인식을 치러도 아무런 불만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숙안 공주는 잘 익은 복사꽃처럼 볼을 발그레 붉혔다.
“보고 웃지 마셔요.”
그러면서 숙안이 내민 것은 봉황과 용이 수놓인 머리끈이었다.
폭은 손가락 두 마디만 하고, 여성용보다는 다소 길이가 짧은 이것은 남자가 주로 이마에 두르는 용도로 쓰는 것이었다.
“하하, 뭘 그리 걱정하느냐?”
서툰 솜씨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선이 삐뚤빼뚤하고, 몇 번 실패해서 다시 수놓은 자국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도안이 화려하고 세세한 장식이 들어가 있어 그리 흠이 되진 않았다.
“처음치곤 꽤 괜찮게 잘 만들었구나.”
도현이 칭찬하자 숙안 공주는 매우 기쁜 듯한 얼굴로 환하게 안색을 밝혔다.
“정말이셔요?”
“아무렴.”
“다행이다. 아바마마께서 싫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우리 딸이 처음으로 내게 준 선물인데 어찌 그러겠느냐?”
도현은 ‘넌 이 아비를 뭐로 보고.’라며 투덜거리곤 숙안 공주가 준 머리띠를 즉석에서 둘러매 보았다.
“멋지셔요, 아바마마.”
“하하, 내가 좀 그렇지? 어떠냐, 칠현아?”
“…….”
헤벌쭉한 도현의 얼굴을 보고 영 마뜩찮은 표정을 짓고 있던 칠현은 갑자기 숙안 공주의 시선이 이쪽으로 돌려지자 황급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공주 마마의 실력이 무척 뛰어나십니다, 전하.”
“그렇단다, 숙안아.”
“아버님도 참, 과찬이셔요.”
들뜬 가슴으로 숙안이 자리를 물러난 후, 계속 웃는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던 도현이 불쑥 말했다.
“그러니까 머리띠만 멋있단 얘기지?”
“예?”
“머리띠는 멋지고 예쁜데, 나는 안 괜찮다 이 얘기렷다.”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그런데 왜 머리띠만 칭찬하냐고.”
“어…….”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변명할 거리를 찾던 칠현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근데 숙안 공주 마마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순 없었…… 쿠엑!”
대답 대신 딱딱한 베개가 날아와 칠현의 얼굴에 직격했다.
“아, 말하라고 해서 말했는데 왜 성질이세요!”
“그 입 다물라!”
버럭버럭 소리치고 드잡이질(?)을 해 대는 방 안의 소란에 바깥에 서 있던 궁녀들은 오늘도 평화로운 하루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군신 간에 가벼운 애정(?) 확인의 시간을 가진 뒤 숙안이 만들어 준 머리띠를 잘 챙겨 넣고 도현이 올라온 서류를 살펴보고 있을 때 국방대신 임경업이 급히 희정당을 찾았다.
“아까 조회 때 봤는데 또 무슨 일이오?”
“급히 전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뭔지 말해 보시오.”
그러자 임경업은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하나 양손으로 받쳐 들며 말했다.
“남방으로 떠난 서 도호부사가 보낸 첫 번째 장계이옵니다.”
“오, 그래. 어서 가져와 보게.”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기에 도현은 반색을 했다.
칠현이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가져오자 그는 얼른 매듭을 풀고는 옆으로 펼쳐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장계는 대만에 도착한 첫날 보낸 것으로 무사히 목적지에 상륙해 요새 건설에 착수한다는 내용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도착했다니 다행이군.”
“그렇사옵니다. 하지만 진짜 힘든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않겠사옵니까.”
“맞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시선을 들며 말했다.
“임무를 수행하는 데 어려운 것이 없도록 국방대신이 각별히 챙기도록 하시오.”
“염려 마시옵소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영길리와 화란의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전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영길리가 최근 들어 다시 해협 봉쇄에 나서면서 화란 동인도회사의 사업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하옵니다.”
“그럼 조만간 두 번째 충돌이 벌어지겠구먼.”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동방 무역을 통해 국가 경제를 유지하는 네덜란드였기에 교역로가 차단되는 건 그야말로 숨통이 막히는 거나 매한가지였다.
특히나 본국에서도 영국과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필요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동방 무역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기에 말라카 해협을 틀어막아 상대의 숨통을 조이려는 영국과 교역로를 지키려는 네덜란드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었다.
“이거 괜히 두 나라의 싸움에 아국 상인들이 피해를 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실제로 이미 그동안 활발한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던 조선 상단들은 유럽과 연결되는 교역로가 막히면서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나마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는 마카오를 통해 일부 물품을 판매하고 왜국과의 교역이 다시 늘어나지 않았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대만에 거점을 확보하는 것과 맞물려서 어느 나라가 유럽으로 가는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는지는 아국 입장에서도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니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도현은 남방 문제와 청국에 대해 임경업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한편 돌아온 포름 총관으로부터 조선 측의 주장을 전해 들은 루벨라 총독은 얼굴을 시뻘겋게 상기시키며 언성을 높였다.
“뭐, 해적 토벌? 이자들이 날 바보로 아나 정말 그딴 헛소리를 지껄였단 말인가!”
그러자 포름 총관 역시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해적 토벌은 핑계일 뿐이고 은근슬쩍 합자난 지역에 엉덩이를 붙이고 눌러앉으려는 속셈이 분명합니다.”
“그걸 그냥 보고만 왔단 말이오!”
흥분한 루벨라 총독이 질책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포름 총관은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것이…… 수차례 항의를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에잉!”
누가 가든 작정을 하고 버티면 방법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루벨라 총독은 혀를 차며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지금 조선군은 어찌하고 있나?”
고개를 옆으로 돌린 총독의 물음에 포름 총관과 함께 합자난에 다녀왔던 빌헤름 중위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얼른 대답했다.
“우리가 떠나올 때쯤 이미 선착장과 주둔지 설치를 마치고 목책 외곽으로 성벽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옛.”
왼편에 앉아 있던 바벨 대령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주 대놓고 일을 진행하는 것 같군요. 빌헤름 중위, 조선군의 규모는 얼마나 되던가?”
이런 질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빌헤름 중위는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이야기를 했다.
“머무는 동안 돌아다니는 데 제약이 있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소 열 척이 넘는 선박에 병력은 족히 사오천은 될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 이천은 노역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포로였지만 이런 사정을 모르는 빌헤름 중위는 그들도 모두 병력에 포함시켰다.
아무튼 상당히 많은 숫자에 루벨라 총독을 위시한 젤만디아 요새 간부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으으.”
“오천이라니…….”
“그리고 병력 대부분이 잘 훈련된 강병 같았습니다.”
숫자도 많은 데다 군기까지 제대로 잡힌 정예라니 간부들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갈수록 태산이군.”
“쪽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미개한 동양 군대지 않겠습니까. 명령만 내리시면 제가 수비대를 이끌고 가서 모조리 다 바다로 쫓아내 버리고 오겠습니다.”
바벨 대령이 호기롭게 내뱉는 말에 평소라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격려했겠지만 루벨라 총독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닐세. 조선군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닌 데다 동인도회사의 동방 교역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돼.”
“하면 이대로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 작정입니까?”
바벨 대령이 살짝 언성을 높이면서 묻자 루벨라 총독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럴 수는 없지.”
섬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을 오랜 싸움 끝에 겨우 몰아내고 전체를 장악한 지 얼마 안 되는데 다른 세력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 처해 있는 네덜란드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았다.
당장 젤란디아 요새에 있던 군함 여섯 척 중에 절반이 넘는 네 척이 영국 함대와의 전투를 지원하기 위해 바타비아로 간 상태였다.
여기다 지상 병력도 요새를 지킬 인원을 제외하면 조선군과의 전투에 나설 있는 숫자는 많아 봐야 오백 남짓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각종 향신료와 함께 조선에서 나오는 여러 물품들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교역품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함부로 충돌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하기 어려운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걸 보여 주듯 얼굴을 굳힌 채 한참 고심을 거듭하던 루벨라 총독은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이 문제는 우리 독단으로 처리하기 어려우니 마침 바타비아에 계시는 도르네바르드 백작께 상황을 알려 행동을 결정하도록 하세.”
네덜란드군주인 오렌지 공의 측근이자 전권 대사인 도르네바르드 백작을 끌어들여 정치적인 책임을 덜겠다는 생각이었다.
“저들은 벌써 요새를 만들고 있는데 그러면 너무 늦지 않겠습니까.”
군인인 바벨 대령이 불만을 표시했지만 루벨라 총독은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조선군이 아무리 빨리 공사를 진행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요새를 세우려면 최소한 몇 달은 걸리지 않겠나. 쾌속선을 이용하면 바타비아까지 금방 다녀올 수 있으니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걸세.”
“그렇긴 하지만…….”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포름 총관이 루벨라 총독의 의견에 찬성하며 힘을 실어 줬다.
“저도 그러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섣불리 대응을 했다가 자칫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내 말이 바로 그거요.”
루벨라 총독과 마찬가지로 포름 총관 역시 윗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더군다나 조선하고 교역을 해서 매년 큰 이익을 거두는 동인도회사였기에 관계가 악화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바벨 대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벨라 총독은 대응을 잠시 미룬 채 바타비아로 쾌속선을 띄웠다.
하지만 루벨라 총독의 기대와 달리 조선군이 가진 힘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거기다가 당장 눈앞에 닥친 영국 함대와의 일전에 집중하느라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네덜란드 측의 예상을 깨고 벽돌을 이용해 성벽을 쌓고 이천 명이나 되는 인력을 투입한 조선군은 하루가 다르게 요새를 세워 나갔다.
촤악!
“빨리들 움직여!”
채찍을 든 감독관의 다그침에 포로들은 눈치를 보며 가마에서 구워진 벽돌을 수레에 실어 나르거나 해자를 만들면서 파낸 흙을 가져와 성벽 사이에 넣고 다졌다.
작업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각 조마다 할당량을 주고, 성과에 따라 대우를 달리하면서 은근히 경쟁까지 유도했다.
그래서인지 공사는 처음 계획한 것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서쪽 성벽은 거의 다 완성이 됐군.”
서지호의 이야기에 수행을 하던 부관이 얼른 말을 받았다.
“네. 내일 성문을 단다고 했습니다.”
“호오. 그래.”
요새가 완성이 되면 그만큼 유리한 고지에 올라설 수 있었기에 서지호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공사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 때 하급 장수 한 명이 급히 달려왔다.
“장군, 지금 선착장에 본국에서 온 보급선이 도착했습니다.”
먼 외지에 나와 있을 때 본국의 소식을 알려 주고 무엇보다 필요한 물품을 가득 실고 오는 보급선만큼 반가운 손님이 없었기에 서지호는 반색을 했다.
“그럼 가 봐야지.”
서지호는 그대로 말 머리를 돌려 선착장으로 향했다.
확장을 거듭해 이제 대여섯 척의 큰 선박이 한꺼번에 접안할 수 있을 정도인 선착장에는 이미 보급선 두 척이 닻을 내리고는 보급품을 하역하고 있었다.
쌀 같은 식량은 물론이고 나무통에 담긴 화약과 포탄 그리고 여러 종류의 가축까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말에서 내린 서지호는 선착장 한쪽에 서서 고함을 치며 하역 작업을 감독하고 있는 장수가 낯익은 걸 발견하고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박 만호가 아닌가!”
그러자 고개를 돌린 상대도 서지호를 보곤 반가운 얼굴을 했다.
“도호부사 어른.”
“정말 반갑구먼.”
“저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예전 왜국 원정 때 함께 참전을 해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며칠은 더 있어야 도착할 줄 알았는데 빨리 왔구먼.”
“다행히 오는 내내 순풍이 불어서 날짜를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서지호는 한창 하역을 하고 있는 보급품들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물품이 상당히 많군.”
“예. 주상 전하께서 국방대신께 각별히 챙기라고 말씀하셨다더군요.”
“그런 황공한 일이…….”
국왕인 도현이 잊지 않고 자신과 병사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서지호는 황공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전하의 특별한 하사품도 있습니다.”
“그게 뭔가?”
궁금한 얼굴로 서지호가 쳐다보자 상대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입니다.”
“술?”
“대궐에도 진상되는 안동소주安東燒酎를 특별히 전하께서 지시해 오십 통이나 가져왔습니다. 먼 타지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내리신 어주御酒입니다.”
“이런 황공스러울 때가 있나.”
경상남도 안동 지역에서 주조되는 안동소주는 개성, 제주와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삼 대 소주 중 하나였다.
고려 시대부터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역사 또한 오래됐는데 뒷맛이 깔끔하고 숙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상처 소독과 소화불량, 식욕부진, 배앓이 등에 효력이 좋아 응급약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렇게 애주가들이 한 번쯤 마셔 보기를 소원한다는 명주를, 그것도 임금이 하사를 해 줬다고 하자 서지호는 더욱 감격했다.
도현이 하사한 어주뿐만 아니라 이번에 들어온 보급선은 병사들 가족들이 보낸 편지도 함께 가져와서 큰 환영을 받았다.
술도 좋지만 아무래도 멀리 타지에 나와 있는 병사들한테 고향 소식만큼 반갑고 기쁜 것도 없었다.
서지호도 집에서 아내가 보낸 서찰을 박 만호에게 건네받고는 소중하게 품속에 집어넣었다.
“정말 고맙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같은 수군으로서 이 정도 일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정 그러시면 나중에 저도 어주 맛을 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하하. 알겠네.”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같이 미소를 짓던 박 만호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화란 측과 한 차례 접촉이 있기는 했지만 보시다시피 아직까지는 별다른 일 없이 거점을 만들고 있다네.”
“그렇군요.”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박 만호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이야기를 했다.
“영길리와 화란 간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왜, 그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아무래도 자신이 맡은 임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에 서지호는 귀를 세우며 관심을 보였다.
“오는 중에 마침 마카오에서 장사를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던 상선을 만나, 들은 소식인데 두 나라가 다시 맞붙어서 크게 싸웠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양쪽을 합쳐 서른 척이 넘는 군선들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하더군요. 벌써 마카오 일대에서는 그에 관련된 소문이 파다하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에 서지호는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누가 이겼다고 하던가?”
“영길리가 화란 측 군선을 다섯 척이나 격침시키고 두 척을 나포하며 대승을 거뒀다고 하더군요.”
“지금 영길리라고 했나?”
뜻밖의 결과에 서지호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박 만호는 믿기 어렵다는 서지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번 패전으로 화란이 말라카 해협은 물론이고 빈탐 섬 부근 바다의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합니다.”
“허어. 최근 영길리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남방 지역을 좌지우지해 온 화란이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다니 정말 놀랍군.”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 참.”
턱을 매만지며 서지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가운데 박 만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길게 보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우리한테 이롭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박 만호의 말대로 해전에서 화란이 대패를 당했다면 당분간은 이쪽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였다.
다행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서지호는 머릿속으로 이 일이 향후 남방 정세를 어떻게 요동치게 만들지 계산이 복잡해졌다.
이틀 뒤 본국에서 쾌속선 한 척이 도착해 서지호에게 방카 섬 해전의 승패와 보다 자세한 소식을 알려 줬다.
한편 네덜란드 동방 식민지 경영의 중심지인 바타비아 요새는 방카 섬 해전에서 겨우 살아남은 군선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면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부두 곳곳은 비명과 고통을 호소하는 병사들로 가득 찼고 든든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여기저기 피로 범벅이 되고 엉망으로 부서진 군선의 모습에 요새 거주민들은 패배를 뼈저리게 느끼며 절망했다.
이 순간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들은 바로 반데볼크 총독을 비롯한 요새 수뇌부들이었다.
지난번 영국 함대의 습격 때 받았던 피해를 몇 배로 쳐서 되갚아 주겠다며 전의를 불태웠었기에 더욱 좌절감이 컸다.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오!”
그러자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얼굴과 한쪽 팔에 붕대를 감고 있던 빌더스 제독이 머리를 숙이며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저의 실책입니다.”
빌더스 제독은 쉽사리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동양함대 제독이자 자작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으로서, 타인의 선망과 존경 어린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사내가 저리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오다니.
이런 상황은 본인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굴욕이었지만 회의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어색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하고 일단 앉으시오.”
더 이상 그런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듯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빌더스 제독을 채근해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부상을 당해 몸이 불편한 빌더스 제독은 부관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의자에 앉았다.
회의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해전에서의 패배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문제는 지금부터요. 승기를 잡은 영국 함대가 분명 이곳을 노릴 것이 분명한데 어서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소.”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방 지역에 있는 전력을 박박 긁어모아 벌인 해전에서 대패를 당하는 바람에 현재 바타비아의 방어력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승리를 거둬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는 영국 함대를 상대해야 되니 암담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지난번 습격 때 집중 포격을 받아 무너진 포대도 아직 다 복구를 못 한 상태였다.
“일단 급한 대로 포대 복구를 서두르라는 지시를 내려 뒀지만 영국 함대가 올 때까지 다 끝마칠 수 있을지…….”
반데볼크 총독이 말끝을 흐리며 자신 없는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소. 반작크 장군.”
“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나 되오?”
그러자 바타비아 주둔군 지휘관이자 준남작의 작위를 가진 반작크 장군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요새 수비군 이천 명이 있고 무리를 하면 의용군을 오백 정도 더 모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포병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 주게.”
“지난번 적 함대가 습격을 해 왔을 때 항구 쪽에 있던 포대들이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건 아실 겁니다.”
시가지를 오갈 때마다 흉물스럽게 무너져 있는 해안 포대가 보였기에 참석자들은 머리를 끄덕였다.
“포대들이 당하면서 배치되어 있던 대포도 함께 망실되거나 크게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당장 쓸 수 있는 대포가 열여섯 문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그런…….”
“허어.”
이런 사정을 알고 있던 반데볼크 총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크게 놀란 얼굴로 웅성거렸다.
“더 심각한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대포들도 포탄과 화약 재고가 부족해 다 사용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작크 장군을 봤다.
“내성 무기고에 항상 충분한 수량을 보관해 두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니었소?”
“그랬지요. 하지만 해로가 막혀 한동안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지난번 습격 때 많은 양을 소모한 데다 출정하는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을 대부분 꺼내 주는 바람에 무기고가 텅 빈 상황입니다.”
“끄으응.”
이야기를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절망적인 상황에 앓는 소리만 냈고 다른 참석자들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영국 함대가 들이닥치면 보나 마나 포격을 퍼부어서 방어선을 와해시키려고 들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데 맞대응할 수단이 없다면 그야말로 맨몸으로 적을 상대해야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포탄과 화약을 보충할 방도가 없겠소?”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심각한 얼굴로 묻자 반작크 장군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영국 함대가 바닷길을 꽁꽁 틀어막고 있는 이상 보급은 어려운 상황입니다. 운이 좋아 본국에 지원 요청을 한다고 해도 물자를 준비해 여기까지 가져오려면 못해도 두세 달은 걸릴 텐데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소.”
“맞습니다.”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봐야지요.”
참석자들이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말에 동조하며 그를 다그치자 반작크 장군은 약간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화약을 구할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게 뭐요?”
방법이 있다는 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몸을 당겨 앉으며 물었다.
“남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각 거점에서 보관 중인 화약과 포탄을 가져오는 겁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미간을 찡그렸고 다른 참석자들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반작크 장군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필요성을 역설했다.
“영국 함대의 공격에서 바타비아를 지키려면 꼭 필요한 일입니다. 만약 제때 화약과 포탄을 보충하지 못한다면 요새는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질 겁니다.”
“으음.”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고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반작크 장군의 말대로 한다면 당장 필요한 화약과 포탄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는 있겠지만 대신 바타비아 이외에 다른 거점들을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키는 것이 됐다.
아니,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각 거점을 맡고 있는 수장들이 지시에 순순히 따를지 의문이었다.
“그러면 다른 곳들이 위험해지지 않겠나?”
“어차피 바타비아가 함락당한다면 나머지 거점들도 오래 버틸 수 없을 겁니다. 하나씩 각개격파를 당할 바에야 차라리 힘을 합쳐 대항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옳은 말이기는 한데 각 거점을 맡고 있는 수장들이 순순히 말을 들으려고 할지 모르겠군.”
“애써 일궈 놓은 것들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오렌지 공의 측근이시자 전권대사이신 백작님께서 나서서 설득하신다면 무조건 고집을 피우지는 못할 겁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한참을 고심하던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이내 어찌할지 결정을 내렸는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소. 내가 편지를 쓰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날 밤 쾌속선 한 척이 급히 바타비아를 떠나 남방 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 거점을 돌아다녔다.
처음 이야기를 들은 각 거점 수장들은 펄쩍 뛰었지만 오렌지 공의 측근이자 백작 작위를 가진 도르네바르드가 편지를 써서 도움을 요청하는 데다 현실적으로 동방 무역의 중심지인 바타비아가 함락당하면 다른 지역도 버티기 어려웠기에 어쩔 수 없이 보관 중인 물자를 내줬다.
대만에 있는 젤란디아 요새도 마찬가지였는데 지원은 고사하고 무기고에 있던 포탄과 화약을 절반이나 화물선에 실어 바타비아로 보내면서 합자난에 상륙한 조선군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의 몰락
도현의 아침은 항상 후원 연무장에서 시작했다.
임금으로서 처리해야 될 업무가 많았지만 매일 아침 한 시각씩 나와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무예 수련을 빠지지 않았는데, 나태해지지 않게 심신을 단련시키고 체력을 유지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장검을 들고 펼쳐 내는 검법은 물이 흐르듯 매끄러우며 일격에 상대를 베어 버릴 날카로움이 담겨 있었다.
가볍게 몸을 푼 뒤 곧바로 친위대장인 신철과 격렬한 대련을 해서 실전 감각을 유지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이마에는 숙안 공주가 손수 만들어 준 머리띠가 둘러져 있었다.
채챙! 챙!
내리치고 베며 수십 합의 공방을 나눈 두 사람은 거칠어진 호흡을 내쉬며 떨어졌다.
“후우. 신 대장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 힘이 넘쳐나는 것 같군.”
“전하께서 하사해 주신 홍삼을 매일 달여 먹은 덕분입니다.”
신철의 재치 있는 대답에 칠현이 건네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던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거, 신 대장한테 이기려면 홍삼부터 끊어야겠구먼.”
“그러시면 제 마누라가 전하를 많이 원망할 겁니다.”
“뭐? 아! 하하하하.”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도현은 이내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차리고는 연무장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트렸다.
진중하고 빈틈이 없는 성격의 신철 친위대장이었지만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수행하고 유쾌한 그의 영향을 받아 가끔씩 이렇게 농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땀을 식히며 쉬고 있을 때 붉은색 관복을 입은 이완 단장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전하.”
“이 단장이 아침부터 어쩐 일인가?”
“긴히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정보를 취급하는 주작단 단장인 이완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할 이야기라면 중요한 일일 것이 분명했기에 도현은 표정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뭔지 말해 봐.”
“영길리 함대가 화란의 남방 교역 중심지인 바타비아 요새를 닷새 전에 전격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으음. 결국 그렇게 됐군.”
살짝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도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첩보가 하나 더 들어왔는데 영길리가 왜국에서 용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다 합니다.”
“용병을?”
“예.”
“이미 꽤 많은 숫자의 왜국 용병을 데리고 있는 걸로 아는데, 거기서 더 모은단 거야?”
“그렇습니다.”
“무슨 생각이지?”
머리를 갸웃거리자 이완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바타비아에 그치지 않고 기세를 살려 남방 지역에 있는 화란의 거점들을 모두 손에 넣으려는 속셈인 것 같사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표정을 짓던 도현은 시선을 들며 물었다.
“그래서 왜국 용병을 얼마나 모으고 있는 거지?”
“하는 행동으로 볼 때 족히 이천은 채울 것 같사옵니다.”
“이천이라…… 그 정도면 화란에 상당한 타격을 입힐 수 있겠군.”
“가뜩이나 해로가 막히고 패배로 수군 전력이 거의 와해된 상태에서 치명적인 일이 될 겁니다.”
칼과 창 같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무기를 가진 왜병들이라지만 이천이라는 숫자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영국 함대가 측면에서 함포 지원을 해 준다면 좁은 바타비아에 고립된 네덜란드군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한 수가 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화란 측에 불리한 소식이 하나 더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마카오에 있는 불랑기(포르투갈)군이 이 기회를 노려 대만에 다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합니다.”
“불랑기가?”
“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도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남방 진출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려고 하는 판에 갑자기 포르투갈이 끼어든다니, 이건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도현이 불평을 터트렸다.
“그놈들이 갑자기 왜?”
이완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원래 향신료 무역을 쥐고 있던 것이 자신들이었으니 화란이 흔들리는 틈을 이용해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오려는 속셈 같사옵니다.”
설명을 들은 도현은 짧게 혀를 차며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힘이 다 빠져 껍데기밖에 안 남은 주제에 가당치도 않는 욕심을 부리다니…… 쯧.”
“그만큼 동양과의 무역이 부를 가져다준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하긴.”
도현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만 해도 화란을 통해 인삼과 각종 공예품들을 유럽에 팔아 막대한 재물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유럽 역사를 살펴봐도 동방 무역을 장악하는 나라가 헤게모니Hegemony를 쥐고 강력한 패권국으로 떠올랐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었다.
15세기부터 대항해시대의 첫 장을 화려하게 열며 남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포르투갈이었기에 누구보다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찰나에 자신을 밀어내고 패권국이 된 네덜란드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예전 영광의 재현을 노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카오에 있는 포르투갈의 전력이 얼마나 되지?”
“전열함 한 척에 프리킷 여섯 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있고 지상 병력은 사천 명가량을 보유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꽤 많군.”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어째서지?”
“일단 전열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군선이 건조한 지 오 년이 넘어가는 노후 선박인 데다 탑재된 대포도 구형에 숫자마저 영길리나 화란보다 적사옵니다. 그나마 지상 병력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는 걸 빼고는 솔직히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입니다.”
“그래도 젤란디아 요새에 있는 화란군한테는 상당한 압박이 되지 않겠어?”
“그건 그럴 겁니다.”
“영길리를 상대하기도 벅찬데 불랑기까지 덤벼든다면 정말 가망이 없겠군.”
턱을 매만지며 잠시 뭔가를 고심하던 도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이완 단장을 봤다.
“요즘 완도에 있는 화란 상관 분위기는 어때?”
“화란 상인들이 계속 남아 있기는 하지만 영길리 함대가 교역로를 막아 버린 여파로 거래는 벌써 두 달째 중단된 상태입니다. 아국 상인들도 물건을 완도 상관으로 가져가지 않고 지금은 직접 배를 띄워 마카오나 왜국으로 가져가 판매하고 있사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뜸을 들이던 도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길리 함대가 빈탄 섬에 거점을 두고 있다 했지?”
“그렇사옵니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 그쪽 분위기를 탐색해 보도록 해.”
“……!”
그러자 이완이 놀란 얼굴로 도현을 봤다.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현 상황에서 조선이 은밀히 양쪽에 다 손을 뻗는다는 건, 네덜란드 입장에서 보면 배신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화란을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어느 한쪽을 버린다던가, 취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그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거지.”
도현은 오히려 그런 이완을 보고 뭘 그리 호들갑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군주 된 입장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는 건 당연하지 않겠나. 이대로 화란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우리 조선의 해상 교역에 막대한 피해가 갈 거야. 그럴 때를 위한 방책은 마련해 둬야지.”
“알겠습니다.”
그 말에 수긍한 듯 이완이 고개를 숙이고 연무장을 물러나자, 도현은 어깨를 느슨하게 덮고 있던 용포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희정당으로 돌아가자.”
어쩐지 날이 흐리다 싶었더니 회색 구름 사이로 가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펼친 손바닥 위로 눈송이가 내려앉아 녹아가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도현이 용포를 펄럭이며 돌아서자, 칠현과 신철 친위대장도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며칠 뒤 주작단 요원이 도현의 친서를 가지고 비밀리에 빈탄 섬을 향한 가운데 남방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싸움에 포르투갈이 끼어들면서 한층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급보가 도현에게 날아들었다.
바로 청국의 기세에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밀려났던 명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북진에 나섰다는 소식이었다.
예상하고 있던 대로 당왕 주율건이 총사령관을 맡았고 동원된 군세는 무려 이십만이나 됐다.
북경을 잃고 쇠락한 명나라의 국력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짜내 화북 탈환에 나선 거였다.
제남에 자리를 잡은 왕영의 세력과 섬서성陝西省으로 도망친 오삼계를 압박하려던 청나라는 명군이 양자강을 넘어 진격해 오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영과 오삼계를 정리하고 곧장 산해관을 넘어 조선을 치려던 도르곤(예친왕)은 분을 삼키며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가 세 곳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불안감이 감돌던 요서 지역은 당분간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벽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요새가 어느새 제대로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새로 만든 성문 앞에는 소총을 어깨에 둘러맨 경비병 둘이 서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었다.
누구 보는 이 하나 없어 잠시 딴청을 피울 법한데도 빳빳한 자세로 미동 하나 없이 서 있는 두 사람의 시야에 멀리 군마를 탄 기병 하나가 먼지구름을 피워 올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매섭게 채찍질을 해 대며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급속히 가까워지자 경비병 둘은 재빨리 경계태세를 취했다.
“멈춰…… 음?”
막 소리를 지르려던 경비병은 군마 위에 올라탄 인영이 낯익은 얼굴임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경비병 둘이 소총을 내리고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군마는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는 일 없이 그대로 성문을 통과했다.
겉은 그나마 제법 번듯했으나, 요새 안은 공사가 전혀 안 돼서 번듯한 건물 하나 없이 천막들만이 거미줄처럼 여기저기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를 질풍처럼 가로지른 기병은 주둔지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지휘 천막 앞에 다다라서야 고삐를 잡아 쥐었다.
“워, 워!”
이히히힝.
얼마나 빠른 속도로 달려왔는지, 울음소리를 길게 내뱉으며 헐떡이는 말을 겨우 진정시킨 기병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쳐다보는 병사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천막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군!”
갑작스러운 부름에 휘하 장수들과 함께 탁자를 둘러싸고 회의 중이던 서지호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뭐?”
순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서지호가 눈을 껌뻑이는 가운데 소식을 전하러 온 하급 장수의 보고가 이어졌다.
“섬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 수천이 곽회일郭懷一이라는 자의 선동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수천이라고 했나?”
“예.”
“허어.”
수천이라는 말에 서지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가 뭐야?”
그러자 하급 장수가 얼른 대답했다.
“최근 바뀐 화란 측의 정책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옆에 있던 김진석이 설명을 해 줬다.
“급격히 늘어나는 이주를 막기 위해 화란 측에서 한족의 토지 소유를 허가해 주지 않고 세금을 늘렸다고 하더니 결국 사달이 난 것 같습니다.”
농사꾼 출신이 대부분인 한족 이주민들한테 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던 서지호는 짧게 혀를 찼다.
“쯧쯧. 양인들이 큰 실수를 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거점을 확보해야 되는 우리 입장에서는 화란 측의 통제력이 흔들리면 좋은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김진석의 말에 머리를 끄덕인 서지호는 하급 장수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상황이 얼마나 더 확산될 것 같나?”
“세금을 거두러 왔던 양인 징수관을 붙잡아 때려죽이고 관청을 불태우는 걸로 봤을 때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 분위기입니다.”
“우리 쪽에 영향은 없겠나?”
“당장은 화살이 화란 측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 오늘부터 요새 주변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린 서지호의 지시에 육전대 지휘를 맡고 있는 김진석이 머리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옛.”
“그리고 척후조를 더 많이 내보내서 이번에 반란을 일으킨 한족들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도록 해.”
“알겠습니다.”
서지호는 복잡한 시선으로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펼쳐 놓은 대만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만 중부에서 시작된 반란은 삽시간에 젤란디아 요새가 있는 남부까지 불길이 번져 갔다.
단순히 숫자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청군을 피해 도망쳤던 일부 명군 출신 장수와 병사들까지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빠르게 조직화됐다.
그러자 합자난에 상륙한 조선군과 포르투갈의 침공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던 루벨라 총독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허겁지겁 삼백 명의 무장 병력을 내보내 진압을 시도했지만 이미 만 명이 넘어가 버린 반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진압은 고사하고 참패를 당하면서 오히려 반란군의 사기만 올려 줬다.
급기야 세력을 계속해서 불린 반란군이 젤란디아 요새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후방 지원을 해 줘야 될 바타비아가 영국 함대에 고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기에 달리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결국 절벽 끝에 몰린 루벨라 총독이 고심 끝에 손을 벌린 곳은 바로 합자난에 있는 조선군이었다.
“누가 왔다고?”
“지난번에 찾아 왔던 포름 총관이라는 자가 장군님을 뵙고 싶답니다.”
부관의 말에 서지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반란군 때문에 정신이 없을 텐데 여긴 어쩐 일이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하던 서지호는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리로 데려와.”
“예.”
얼마 안 있어 포름 총관이 수행원 한 명과 함께 부관의 안내를 받아 지휘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최근 연속해서 화란 측을 덮친 악재 때문인지 포름 총관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조금은 여윈 모습이었다.
“어서 오시오.”
“반갑습니다.”
서양식으로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천막 한쪽에 있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요즘 섬 전체가 뒤숭숭한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온 겁니까?”
탐색전도 없이 다짜고짜 서지호가 본론을 물어 오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포름 총관은 당번병이 갖다 놓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한족 반란군과 관계해서 조선 측에 도움을 요청할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도움이라…….”
순간 서지호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진압에 필요한 탄약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병력도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화란 측의 항복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단으로 합자난에 상륙해 요새를 짓는 걸로 대립각을 세우던 상대를 찾아와 머리를 숙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 봐도 현재 화란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서지호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봤다.
“그것 참 곤란한 부탁이군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일부러 잠시 뜸을 들이던 서지호는 은근슬쩍 상대를 떠봤다.
“우리보다는 바타비아에 있는 귀국 군대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빠르지 않겠소이까?”
사면초가에 놓인 네덜란드의 상황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서 속을 긁는 상대의 행동에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 불리한 건 자신이었기에 포름 총관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쪽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것 참, 아쉽게 됐소이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글쎄올시다. 가능하면 도와주고 싶지만 본인이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서………… 일단 본국에 계시는 주상 전하께 장계를 올리도록 하겠소.”
서지호의 말에 포름 총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조선까지 배를 띄우고 허락이 떨어지는 걸 기다리려면 너무 늦습니다.”
“하지만 군을 움직이는 일을 본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소이까?”
그가 난색을 표하자 포름 총관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반란군이 갈수록 세력을 확대하며 젤란디아 요새 턱밑까지 밀고 들어온 상태에서 조선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대만에 있는 네덜란드 세력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튼튼한 요새를 방패로 방어전을 펼치면 되지 않겠냐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성안의 무기고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상태인 데다 성문을 닫아걸고 버틴다고 해도 언제쯤 지원이 올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영국 함대에 의해 해로가 끊기고 남방 지역 최대 거점인 바타비아가 공격당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지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동안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걸 생각해서 제발 도와주십시오.”
“허어. 이거 참…….”
상대가 체면도 버리고 매달리자 서지호는 짐짓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더 애를 태웠다.
그러다가 힐끗 포름 총관의 얼굴을 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상 전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쪽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본관도 조정에 내세울 명분이 있어야 되지 않겠소.”
뭔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걸 눈치챈 포름 총관은 살짝 긴장을 하면서도 워낙 다급한 상황이었기에 미끼를 덥석 물었다.
“뭘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합자난을 아국에 넘겨주시오.”
“……!”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포름 총관과 달리 서지호는 아주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양국이 마찰을 일으킨 원인인 아군의 주둔 문제를 깔끔히 해결하고 이 정도는 돼야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아니겠소.”
말은 그럴듯했지만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요구였다.
조선군이 세운 요새를 인정해 달라는 것도 속이 쓰릴 지경인데 상당한 곡창을 품고 있는 합자난 지역 전체를 넘겨 달라니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뻗쳤다.
다른 때라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지만 포름 총관은 그럴 수가 없었다.
탁자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협상을 시도했다.
“너무 과한 요구입니다. 그러지 말고 금화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서지호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화를 냈다.
탕!
“우리가 무슨 용병인 줄 아시오!”
“그게 아니라…….”
“사정이 급한 것 같아서 기껏 도와주려고 했더니, 싫으면 그만두시오!”
서지호가 강하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한 건 포름 총관 쪽이었다.
“그러지 마시고 우리 쪽 사정도 좀 이해를 해 주십시오.”
“그래서 조건을 제시했지 않소이까.”
“하지만 이건…….”
포름 총관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서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럼 원래 요구한 것에 더해서 아군 군선 두 척을 젤란디아 요새로 보내 함포 지원을 해 주겠소이다.”
“선착장에 정박해 있는 배들을 말입니까?”
“그렇소. 각각 서른 문이 넘는 대포를 탑재하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으음.”
새로운 제안에 포름 총관은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모두 합쳐 육십 문에 달하는 대포를 탑재한 군선 두 척이 해안에 바짝 붙어 요새를 지원해 준다면 반란군의 공격을 막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본관이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제안이오.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소이다.”
마음이 흔들리던 포름 총관은 서지호의 말에 결정을 내렸다.
“일단 귀측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제 권한 밖의 일이니 젤란디아로 돌아가서 협의를 한 뒤에 다시 대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걸 잘 알기에 서지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그렇지만 아군도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가급적이면 빨리 결정을 내려 줬으면 좋겠소이다.”
“그러지요.”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 포름 총관은 하룻밤 쉬고 가라는 서지호의 권유를 사양하고 타고 온 쾌속선을 이용해 젤란디아 요새로 돌아갔다.
선착장까지 배웅을 나온 서지호가 점점 멀어지는 쾌속선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김진석이 옆으로 다가왔다.
“화란에 합자난 지역을 통째로 넘겨 달라고 하셨다던데 맞습니까?”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린 서지호는 피식 웃었다.
“거참, 소문 한번 빠르군.”
“상대가 구석에 몰려 있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배짱이 두둑하십니다.”
“어째 어려움에 처한 이의 옷까지 벗겨 먹는다고 타박을 하는 것 같구먼.”
“그럴 리가요. 냉혹한 국제 관계에서 도움을 주면 대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후후후. 그렇지.”
“한데 저들이 요구를 받아들일까요?”
약간은 회의적인 김진석과 달리 서지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사방이 다 꽉 막힌 저들 입장에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걸세. 뭐 거부한다고 해도 합자난 지역을 우리가 장악하는 건 달라지지 않을 게야.”
상대가 제안을 거절하면 상황을 방관하다가 한족 반란군에 의해 네덜란드가 밀려나면 그때 나서서 합자난 지역을 확보할 생각임을 김진석은 바로 눈치챘다.
“아무튼 일이 재미있게 됐군요.”
“맞아.”
포름 총관을 통해 조선 측의 제안을 전해 들은 젤란디아 요새의 수뇌부들은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상당한 넓이의 땅을 통째로 꿀꺽하려는 것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곽회일이 이끄는 반란군 이만 명이 젤란디아 요새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반란군이 요새를 반포위한 채 화살을 쏘며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을 넘으려고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성벽을 방어막으로 겨우 버티고는 있었지만 병력은 물론이고 무기마저 부족한 상황이라 얼마나 오래 요새를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측의 제안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며칠 동안 갑론을박 논의를 한 끝에 반란군에 져서 대만 전체를 잃는 것보다 일부인 합자난을 넘기는 게 이익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시 포름 총관이 유일하게 열려 있는 통로인 해로를 이용해서 합자난에 주둔 중인 조선군을 찾아갔다.
완전히 두 손 두 발을 다 든 포름 총관은 상대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고 루벨라 총독을 대신해 합자난을 조선에 영구히 할양한다는 협정서에 서명했다.
원하는 걸 얻어 낸 서지호는 쾌속선을 한양으로 띄워 도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한편 즉시 약속대로 신형 판옥선 두 척을 젤란디아 요새로 급파했다.
동시에 김진석이 지휘하는 육전대 일천을 남진시켜 한족 반란군을 아래위에서 강하게 압박했다.
순풍을 타고 하루 만에 젤란디아 요새에 도착한 조선 군선 두 척은 성벽을 둘러싸고 한창 공성전을 벌이고 있던 반란군에게 뜨거운 불벼락을 안겨 줬다.
수십 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으며 포탄을 쏴 대자 반란군은 기겁을 하며 요새에서 물러났다.
바다에 떠서 포격을 퍼부어 대는 조선 군선의 출현은 마땅한 대응책이 없던 반란군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젤란디아 요새에도 포대가 있었지만 상당수 대포가 영국 함대를 상대하기 위해 바타비아로 옮겼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화약이 부족해 마음껏 쓸 수 없었다.
이런 네덜란드군의 상황과 달리 조선 군선은 마치 육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작정인지 쉬지 않고 포탄을 쏟아부었다.
포격에 수많은 병사들이 사지가 찢기고 목숨을 잃자 반란군의 사기는 대번에 꺾여 버렸다.
여기다가 김진석이 이끄는 육전대가 남하하면서 배후를 위협하자 반란군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분루를 삼키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반란군이 물러서고 조선군에게 배 한 척 분량의 탄약을 넘겨받은 젤란디아 요새 수비대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의 대가로 합자난 지역을 조선에 영구히 할양해야 됐고 후퇴를 하긴 했지만 한족 반란군이 여전히 만만치 않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 무렵 서지호가 쾌속선에 실어 보낸 장계가 한양에 있는 도현한테 전달됐다.
“호오. 서 도호부사가 제대로 한 건 했군.”
장계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도현이 감탄 어린 표정을 짓자 앞에 앉아 있던 국방대신 임경업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저도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화란한테서 땅을 받아 낼 거라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불만이 없지는 않겠지만 양국의 우호 관계를 최대한 헤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것 이상을 얻어 내다니, 정말 절묘하구먼.”
원래 조선의 계획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대만에 해상 교역로의 안전을 지킬 거점을 확보하는 거였다.
요새 하나만 해도 충분히 만족했을 텐데 거기에서 더 나가 상당한 넓이의 배후지까지 손에 넣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내려야지. 상선.”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도호부사 서지호를 정삼품 수군절도사로 승차시키고 새로 확보한 대남요새와 그 주변 지역을 관장토록 하겠노라. 상선을 직시 궁내부에 알려 교지를 만들어 보내도록 하라.”
“알겠사옵니다.”
대남大南요새는 조선이 대만에 새로 세우고 있는 거점에 붙인 이름이었다.
이로써 서지호는 도호부사가 된 지 일 년도 안 돼서 다시 한 품계 승차를 하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국방대신.”
“예.”
“상당한 영토가 확보된 만큼 대남요새를 정식 수영水營으로 편입시키고 전력을 추가로 배치토록 하시오. 이번에 새로 건조된 치우 급 전함도 보내는 것이 좋겠군.”
“치우 급 전함을 말씀이시옵니까?”
“그렇소. 교역을 위해 아국 상선들이 빈번하게 통행하는 곳인 데다 최근 서양 국가들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는 지역이니 그 정도는 돼야 함부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오.”
“예. 그리하겠사옵니다.”
무려 일만 냥에 달하는 거금의 건조비가 들어가는 치우 급 전함을 배치하고 수영으로 대남요새의 급을 격상시키는 것만 봐도 도현이 이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임경업이 물러나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봉황상단을 맡고 있는 장 총관을 희정당으로 호출했다.
“전하, 봉황상단 장태범 총관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허락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문이 좌우로 열리더니 관복을 갖춰 입은 장 총관이 살짝 허리를 굽힌 자세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췄다.
“신, 장태범 전하의 부르심을 받고 왔사옵니다.”
“바쁜데 오라고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니옵니다.”
“일단 자리에 앉게.”
“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장 총관을 보며 도현이 입을 열었다.
“경을 오라고 한 건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네.”
“하교하시옵소서.”
“지난번에 화란 상인을 통해 구한 사탕수수를 제주에서 재배해 보라고 한 건 어찌 되고 있나?”
임금인 도현의 관심이 각별해서 그가 직접 챙기고 있는 사업 중 하나였기에 장 총관은 머뭇거림 없이 바로 대답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작년 한 해 동안 재배법을 어느 정도 숙달해 올해부터는 면적을 두 배로 늘릴 계획이옵니다.”
“그렇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질문을 했다.
“수확량은 얼마나 되나?”
“한 마지기에 설탕 두세 가마 정도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지만 평균적으로 밭 한 마지기는 이백 평을 뜻했다.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군.”
“예. 설탕은 아주 귀하게 팔리기 때문에 같은 면적이라면 쌀을 키우는 것보다 이윤이 더 좋사옵니다.”
어느새 이야기를 하는 장 총관의 표정이 살짝 들떠 있었다.
사실 처음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저 도현이 좋아하는 걸 따로 조금 키워 진상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수확을 하고 몇 가지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설탕을 보자 장 총관은 장사꾼답게 단번에 돈이 되는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그냥 돈이 되는 게 아니라 아주 떼돈을 벌어 줄 상품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단맛을 볼 수 있는 건 꿀밖에 없었다.
당연히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고 양반과 돈 많은 중인들만이 먹을 수 있고 일반 백성은 맛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설탕은 꿀보다 손쉽게 그리고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으니 시장에 내놓으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아무리 돈벌이가 좋다고 해도 진상품으로 올릴 물건을 함부로 시장에 내다 파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장태범 총관 자신이 하늘처럼 믿고 떠받드는 도현에게 바쳐지는 물건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걸 미리 예상하기라도 한 듯 처음 사탕수수 재배를 맡겼을 때부터 도현이 봉황상단의 주력 상품으로 만들어 보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거리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도현의 명을 받들어 대량생산해 낸 설탕으로 왕실 곳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처음 해 보는 재배를 성공적으로 해내다니 대단하군. 하지만 원래 사탕수수가 나는 곳보다 수확량이 적은 건 아쉬워.”
상념 속을 헤매고 있던 장 총관은 조금 미련이 남는 것 같은 도현의 말을 듣고 갑작스레 깨어났다.
“그렇긴 하옵니다만, 조선에서 가장 기후가 온난하고 따뜻한 곳이 제주도이니 어쩔 수 없지요.”
“흠.”
도현이 뭔가를 생각하듯 검지로 보료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번에 대만 북쪽에 있는 합자난 지역이 아국 영토로 편입되었네.”
“그런 일이 있었사옵니까?”
미처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장 총관이 반문했다.
“대만이라면 제주도보다 훨씬 남쪽에 있어 따뜻하고 겨울에 눈도 오지 않지. 그곳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떠한가?”
그러면서 도현은 슬쩍 장 총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사시사철 재배를 할 수 있다는 이점 덕분에 지금 제주도에서 걷는 것보다 더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을 걸세. 거기에 농장을 만들 땅도 충분히 여유가 있으니 이게 바로 금상첨화 아니겠나.”
“묘안이십니다, 전하.”
도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동시에 타고난 장사꾼인 장 총관의 눈이 번뜩 빛났다.
대만까지 물자와 인력을 이동시키는 비용과 사탕수수 판매로 인한 이득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따져 봤을 때 도현의 제안이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것임은 분명했다.
단번에 돈 냄새를 맡은 장 총관의 얼굴이 활기를 띠는 것을 보고, 도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담당하는 관리에게 미리 말을 해 놓을 테니 장 총관이 알아서 계획을 세워 진행해 보게.”
“알겠사옵니다.”
의욕에 넘치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인 장 총관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봉황상단 일에 대해 도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은 대화 끝에 장 총관이 마침내 자리를 물러나자 도현은 그제야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앞으로 설탕이 벌어들일 막대한 이득을 생각하니 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돈이 없다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튼튼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물건이었다.
괜히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니까.
물론 거기엔 금괴나 보석 같은 현물도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현은 잠시 금은보화로 가득 찬 곳간을 노니는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들었다.
며칠 뒤 장 총관은 승차 교지를 가져가는 선전관 일행과 함께 봉황상단 직원들을 대남요새로 보내 합자난 지역이 사탕수수 농장을 조성하는 데 적합한지 면밀한 조사에 들어갔다.
훗날 생길 이야기였지만 일 년 내내 기온이 따뜻하고 강수량도 풍부한 대만은 사탕수수 재배에 최고의 조건이었고, 봉황상단은 합자난에 엄청난 넓이의 농장을 조성해 운영했다.
여기서 생산되는 설탕은 조선은 물론이고 왜와 명나라에까지 수출돼 도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줬다.
한편 조선군의 도움으로 젤란디아 요새에 있던 네덜란드군은 겨우 한숨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태를 이어 갔다.
협약에 따라 신형 판옥선 두 척은 여전히 요새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지만 후방을 압박하던 육전대 병력은 반란군이 후퇴를 하자마자 곧바로 남하를 멈추고는 견제만 했다.
그러자 젤란디아 요새 공격에 실패하면서 흔들리던 한족 반란군은 대만 중부 지역을 장악한 채 전열을 추스를 시간을 얻었다.
당연히 네덜란드 측이 크게 반발하며 항의를 했지만 서지호는 조선군 단독으로 한족 반란군을 상대하기에는 병력 차이가 크고 무엇보다 협정에 그런 내용이 없다는 걸 들어 단칼에 거부했다.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했지만 실제로 협정서에는 젤란디아 요새의 함락을 막기 위해 병력을 지원해 준다는 것만 명시되어 있지, 조선이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대만은 젤란디아 요새가 위치한 남부는 네덜란드가 그리고 중부는 반란군이 마지막으로 합자난을 포함한 북부는 조선군이 장악하며 삼등분되어 버렸다.
비록 삼분의 일로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어찌 됐건 거점을 유지하고 있는 대만과 달리 영국군에 포위된 바타비아 요새는 시간이 갈수록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초반에는 주변 거점들을 희생시켜 끌어모은 탄약으로 그럭저럭 버텼지만, 계속되는 영국 함대의 파상공세에 방어선이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특히 육지로 상륙해 요새를 둘러싼 뒤 공성전을 펼치는 왜국 용병대의 공격에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무장이 빈약한 왜국 용병대였지만 영국군 포병대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달려들 때마다 요새 수비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앞뒤로 협공을 펼치며 두들겨 대는 영국군의 공격은 네덜란드군을 더욱 힘들게 했다.
아마 젤란디아 요새의 높은 성벽과 주위를 둘러싼 깊고 넓은 해자가 아니었다면 버텨 내기 어려웠을 거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면 언젠가는 본국에서 지원군이 올 거라는 희망이었다.
위태위태하면서도 네덜란드군이 저력을 보여 주며 견디자 전투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 하는 끈기 싸움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가운데 영국 측과 은밀히 서신을 주고받던 도현은 한양에서 정식으로 교역 협정을 체결했다.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두 번째 외교 협정이었는데 별도의 상관을 두지 않고 제주도 개항장을 이용한다는 걸 빼고는 네덜란드와 맺은 내용과 거의 비슷했다.
아니, 오히려 영국보다는 조선 측에 많이 유리한 협정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미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교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이제 막 대양에 진출한 상태였기에 입장 자체가 달랐다.
그렇다고 영국에 불리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번 협정을 계기로 영국은 조선을 통해서 황금 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인 동방 무역에 끼어들 수 있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외무대신 박노에게서 협정서를 받아 든 영국 측 대표가 잉크를 적신 깃털 펜으로 신중하게 서명했다.
흐르는 듯한 필기체로 이름을 적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 양측에서 미소와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도 귀국과 함께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길 빌겠소.”
“물론이지요. 우리로서도 기쁜 일입니다.”
박노가 건넨 말에 영국 대표가 호의를 띤 미소로 대답했다.
모두가 만족해하는 분위기 속에 이루어지는 협정도 드문 일이라, 마지막으로 나누는 악수 역시 힘이 넘쳤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제주도 상관을 중심으로 영국과의 교역이 시작되었다.
역동하는 조선
위이이잉~!
쿵! 쿵!
쉬이이익.
하얀 증기를 내뿜으며 집채만 한 쇳덩이가 돌아가는 모습에 도현이 감탄성을 터트렸다.
“이게 새로 만든 증기기관인가?”
옆에 서 있는 병기장 박호가 자부심 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기존에 있던 것에 비해 효율은 삼 할이 더 좋아졌고 크기는 절반으로 줄였습니다.”
증기기관을 좀 더 좋게 개선시키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지 아는 도현은, 박호와 한쪽에 도열해 있는 병기창 소속 장인들을 보며 치하를 했다.
“애들 썼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이렇게 해내다니 정말 대단해. 다들 안 그런가?”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묻자 함께 온 대신들이 얼른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맞사옵니다, 전하.”
“신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그럴 게야. 상공대신.”
“예, 전하.”
그의 부름에 상공대신 유형원이 대신들 사이에 있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증기기관을 개선하는 데 공을 세운 장인들의 명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작성해 궁내부로 올리도록 하게. 짐이 상급을 내릴 것이야.”
“알겠사옵니다.”
도현의 말을 들은 장인들은 감격한 얼굴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하하. 다 그대들이 열심히 노력해 준 결과이네.”
장인들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개량 증기기관을 좀 더 살펴보고는 병기창 내에 있는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증기기관의 성능이 좋아진 만큼 더욱 많은 곳에서 사용이 가능하겠군.”
찻잔을 내려놓으며 도현이 말하자 상공대신 유형원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제물포 제철소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병기 공장에 새로 만든 개량형 증기기관을 올해 안에 추가로 열 기 이상 설치할 계획이옵니다. 그리고 봉황상단을 비롯한 민간 상단에서도 증기기관을 쓸 수 없냐는 문의가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민간 상단에서?”
“예.”
조금 더 시간이 지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용도가 제한되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 증기기관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민간 상단에서 필요로 한다고 하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도현의 생각을 눈치챈 유형원은 얼른 보충 설명을 했다.
“봉황상단을 본떠서 다른 민간 상단들도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하나둘 짓다 보니 수요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각종 철제품이나 대형 광산 그리고 얼마 전 발명된 방적기紡績機가 보급되면서 동력을 전달하는 증기기관에 대한 수요가 더욱 커지고 있사옵니다.”
“호오. 그렇군.”
그제야 도현은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적기는 말 그대로 실을 뽑아내는 기계였는데 예전부터 물레를 사람이 손으로 돌려서 하던 일이었다.
그러던 것을 병기창에서 근무하던 장인 중 한 명이 증기기관을 이용하면 수작업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고 대량으로 실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발명해 냈다.
몇 개의 원통을 장착해 실을 늘리는 아주 초기 단계의 기술이었지만, 도현은 시제품을 보고 아주 기뻐하고는 금화 일천 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기계에 대한 권리를 왕실에서 사들였다.
특허 개념이 아직 희박하고 발명자가 국가 기관인 병기창 소속이었기에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아무리 전제주의 사회라고 해도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걸 대가도 없이 가져가 버린다면 장인들의 의욕이 저하된다는 생각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상을 했다.
그러고는 발명자한테 높지는 않지만 작은 벼슬과 함께 십여 명의 장인과 실학자를 붙여 줘서 연구를 계속하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도현의 행동은 장인들에게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
얼마 안 있어 처음 만들어 낸 제품에 방추紡錘가 부착되는 등 개량이 거듭됐고 어느새 방적기는 공장에서 충분히 쓸 수 있을 만큼 실용화가 됐다.
그러자 제일 먼저 제물포에 있는 군수공장에 설치돼 실을 뽑도록 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수작업으로 할 때보다 훨씬 많은 물량을 단시간에 생산해 냈다.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 상단주들이 이걸 그냥 넘길 리 없었고 바로 상공부를 통해 민간에도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산업화를 권장하던 도현은 당연히 이걸 받아들였고 수백 대의 방적기를 만들어 판매하면서 다시 상당한 액수의 금화를 벌어들였다.
그렇게 판매된 방적기들은 질 좋고 값싼 면사를 대량으로 뽑아내며 조선의 산업화를 가속화시키는 동시에 각 상단들이 많은 돈을 벌게 해 줬다.
한번 재미를 본 상단들은 면직물 생산뿐만 아니라 철제품과 광산 등 여러 분야로 증기기관의 사용을 넓혀 갔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시대가 백여 년 가까이 빨리 영국이 아닌 조선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거였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인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지.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몇 대가 됐건 판매하도록 해. 대신 증기기관과 관련된 기술이 타국으로 유출되는 건 철저히 막아야 될 것이야.”
마지막 말은 유형원이 아니라 동석해 있던 이완 단장을 쳐다보면서 했다.
시선을 받은 이완 단장은 살짝 머리를 숙이며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철저히 단속하고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유형원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증기기관의 사용이 늘어나면 자연히 연료인 석탄의 소비가 커질 텐데 수급에는 이상이 없겠나?”
“제물포에 대규모 석탄 하역장이 있고 새로운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마포 인근에도 올해 안에 보관소를 조성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봉황상단에서 운영하는 석탄 광산들도 생산 여력이 충분하옵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증기기관의 사용이 폭증할 테니까 그에 맞게 석탄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도록 신경을 써야 될 거야.”
“명심하겠사옵니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어려운 점을 직접 들어 준 도현은 대궐 수라간에서 만든 음식과 술을 풍성하게 내려 병기창 장인들의 노고를 풀어 줬다.
얼마 뒤 도현의 지시로 개량된 증기기관이 각 군수공장과 민간에 공급되면서 조선의 산업화는 더욱 속도가 붙었다.
더불어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여러 가지 기계들이 속속 발명되며 생산력이 점점 커졌고 백성들의 생활 또한 윤택해졌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민간 소비도 커졌지만 가장 큰 수혜를 받게 된 곳은 다름이 아니라 군대였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기계들이 만들어져 군수공장에 하나둘 설치되면서 예전에는 장인 여러 명이 달라붙어 꼬박 하루를 작업해야 될 일도 불과 한두 시진 만에 끝이 났다.
말 그대로 대량생산과 분업화 체계가 갖춰진 거였다. 덕분에 조선군은 새로 개발한 무기들을 짧은 시간에 대량으로 만들어 내서 일선 부대에 배치할 수 있었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고 처마 밑에 소복이 눈이 쌓인 겨울이었지만 남산 병기창 내에 위치한 대포 공장 안은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흔들리면 안 되니까. 단단히 고정시켜!”
“예.”
작업반장의 말에 단단한 체격의 장인 네 명이 쇠사슬로 육중한 무게의 대포를 작업대에 꽁꽁 묶었다.
“다 됐습니다.”
“어이, 시작해.”
눈으로 고정된 부분을 확인한 작업반장이 신호를 주자 커다란 기계 앞에 서 있던 장인이 툭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포신 안에 끼여 있던 드릴이 증기기관과 연결돼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강선을 파냈다.
끼끼끽!
“이제 뒤로 빼!”
우우웅.
기계를 끄고 드릴을 천천히 뒤로 빼자 작업반장은 포신 안에 머리를 넣어 강선이 제대로 파였는지 직접 눈으로 꼼꼼하게 확인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깔끔하게 파인 강선에 몸을 바로 한 작업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음 거 가져와!”
“네.”
“으쌰!”
대답과 함께 고정되어 있던 쇠사슬을 푼 장인들은 공장 천장에 달리 도르래를 이용해서 완성된 포신을 다음 공정으로 넘겨줬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새 포신을 가져와 아까 했던 작업을 반복했다.
윙!
드릴 소리를 들으며 포신을 작업반장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때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인 하나가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뭐가?”
“저 기계들 말입니다. 예전에는 두세 명이 달라붙어서 종일 작업을 해도 대포 한 문을 완성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서른 문도 너끈하지 않습니까.”
“난 또 뭐라고.”
심드렁하게 말은 하지만 작업반장도 감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증기기관 덕분에 일은 더 쉬워지면서도 작업 효율은 몇 배나 높아졌으니 놀랍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좀 편해졌기는 했지만 결국 마무리는 우리가 해야 되니까 실수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강선 하나 잘못 파면 애써 만든 대포를 그대로 다시 용광로에 집어넣어 녹여야 된다는 거 알지!”
“예.”
작업반장의 말에 장인들은 잡담을 멈추고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그렇게 남산의 대포 제작 공장은 매일 각종 구경의 대포를 마흔 문씩 새로 만들어 내 일선 부대로 보냈다.
하루에 두세 문을 겨우 만들어 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산력이었는데, 다 증기기관과 그걸 이용한 여러 공작기계들이 설치되면서 이루어진 성과였다.
대포뿐만 아니라 신형 머스킷 소총과 포탄도 이런 식으로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조선군은 하루가 다르게 더욱 강력한 군대로 변모해 갔다.
산업화와 더불어 도현이 중점적으로 힘을 쏟는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인구 증가였다.
강대국의 요건 중 하나가 바로 인구하는 걸 누구보다 잘 알던 도현은 등극 초기부터 여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화수분처럼 끊임없이 병력을 만들어 내는 상대와 달리 번번이 병사 수에 발목이 잡혀 마음껏 전술을 펼치지 못했던 그는 더욱 인구 증가에 관심을 가졌다.
단순히 군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구가 많으면 경제에도 큰 이득이었다.
아무리 대외 교역을 통해 물건을 내다 판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기에 탄탄한 내수는 경제 발전에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이유로 거란족을 백성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최근 점령한 요서 지역에 거주하는 한족들도 만리장성 너머로 쫓아내지 않고 선별적으로 품어 조선화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여기에 국가 재정이 풍성해지며 여유가 생기자 도현은 출산을 적극 권장하며 아이를 셋 이상 낳은 가정에는 여러 가지 혜택을 줬다.
혜택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이를 가지면 무조건 임신과 동시에 각 지역의 혜민서惠民署에서 의원과 의녀 들이 정기적으로 임산부를 진료해 주며 출산을 하면 쌀 두 섬과 미역 그리고 몸을 보양하는 약제들을 나라에서 지어 줬다.
그리고 넷째 이상을 낳으면 나라에서 두 달마다 쌀을 한 섬씩,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공짜로 지급했다.
점차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여서 자식이 곧 일손인 상황이라 많은 아이를 낳던 백성들은 이런 혜택들이 주어지자 보통 한 집에 예닐곱 명씩 자식들을 가지게 됐다.
도현은 단순히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때까지만 해도 온갖 질병으로 많은 갓난아이들이 안타깝게 죽었던 걸 상기하고는 의료체계 정비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마마媽媽 또는 두창痘瘡, 포창疱瘡으로 불리며 유아는 물론이고 어른들도 걸리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천연두 예방을 위해 세계 최초로 종두법을 실시했다.
종두법이란 소의 두창을 살짝 사람의 피부에 접종해서 약하게 앓게 만든 다음에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얻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원래 영국의 외과의사 E. 제너가 1796년에 알아내 보급하게 되는 거였지만 도현은 그것보다 백 년 가까이 일찍 조선에서 보급을 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각종 질병에 대해서도 예방과 치료를 실시해 백성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줬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도현이 원하는 대로 인구 또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성과를 얻었다.
물론 처음 종두법을 실시하자 반발이 적지 않았다.
우두를 맞으면 사람이 소로 변한다는 헛소문이 돌 정도였는데 그런 이유로 백성들이 접종을 기피하자 도현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어의에게 접종을 받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중전과 자식들한테도 우선 우두를 맞히고 종친들 또한 무조건 접종을 받게 하자 반발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조선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도현이 먼저 우두를 맞으며 솔선수범을 보였는데 계속 거부하는 건 대역죄였기 때문이었다.
“여깁니다요.”
혜민서 관리로 봉사奉事 벼슬을 가지고 있는 젊은 의원은 앞에 보이는 초가집을 쳐다보고는 관아 아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이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꼬마 하나가 쭈그리고 앉아 작대기로 바닥에 낙서를 하고 있다가 의원 일행을 보며 일어섰다.
“누구세요?”
아전이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부모님 어디 가셨냐?”
“안에 계세요.”
바깥에서 주고받는 목소리가 안에까지 들리기라도 한 듯, 아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바로 방문을 열고 사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게 누구요?”
나이는 이제 한 서른 후반에서 사십 대 초 정도 됐을까.
다 해진 소매 끝을 몇 번이나 기운 자국이 있긴 하나 아내가 부지런한 덕인지 그럭저럭 깔끔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보통 체구의 평범한 사내였다.
“이보게, 덕구.”
“어, 아전 나리, 오셨습니까.”
이리저리 오가며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안면이 있는지라 사내가 금방 일어서서 아전을 맞았다.
“아침부터 미안하구먼. 밥은 먹었나?”
“예.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전에 이야기는 한번 했지? 오늘은 자네 집 식구들이 종두 접종을 받을 차례라네.”
“아…….”
그러자 덕구라 불린 사내의 눈이 아전 뒤에 서 있는 의원과 의녀를 향해 향했다.
행여나 실례가 될까 봐 금방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축인 소한테서 난 걸 사람 몸에 집어넣는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덕구는 쭈뼛거리는 몸짓으로 아전에게 슬쩍 속닥였다.
“진짜 괜찮은 겁니까?”
“예끼, 이 사람아. 아무렴 나라님은 물론이고 대궐에 계신 왕자 공주님께서도 다 맞으셨다는데 무슨 소릴 하나.”
아전의 꾸중에 사내가 풀이 죽어 물러났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의원이 웃으면서 그를 달랬다.
“맞아도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일랑 하지 마시오.”
의원까지 덩달아 두둔을 하고 나서는 데야 더 이상 이길 재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덕구는 방문을 열고 사람들을 안으로 들였다.
“어쨌든 밖에 서 있는 것도 뭐하니 이리 들어오시지요. 얘야, 너도 얼른 손 씻고 와라.”
아버지의 말에 계속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네에.”
얼른 우물가로 달려가 찬물에 손을 참방거리며 대충 적시곤 달려오자, 의원 일행까지 합해서 총 여섯 명이 한방에 모여 앉게 되었다.
“일단 몸부터 녹이시지요.”
“고맙네.”
덕구가 숯이 든 화로를 의원 일행 쪽으로 밀어 양보하자, 의원이 고맙다며 답하곤 들고 온 보따리를 바닥에 늘어놓았다.
“어디 보자. 부인께서 배가 많이 부르셨구먼. 산달이 언제인가?”
“산파가 다음 달 중순이면 나올 거라 했습니다.”
불룩 솟아오른 배를 보이는 게 부끄러운 것처럼 부인이 수줍어하며 말했다.
“그런가? 맥 좀 한번 짚어 보세.”
그러고선 부인의 손목을 잡고 눈을 지그시 감은 상태로 몇 번 손가락을 대더니 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몸에는 별 이상이 없는 것 같군. 그래도 애를 낳을 때까진 조심하셔야 하네.”
의원은 그리 당부하고선 고개를 돌려 남편 쪽을 바라보았다.
“부인은 산달이 가까웠으니 이번엔 안 되고 다음에 하세.”
“예.”
부인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벽 쪽으로 물러앉자, 의원은 남편을 손짓해 불러 가까이 오게 했다.
“조금 따끔할 걸세.”
“많이 아픈가요?”
“하하, 그냥 모기한테 물린다고 생각하게나.”
의원은 옆에 앉은 의녀에게서 잘게 자른 깨끗한 무명천을 건네받아 소독약에 적시고는 팔뚝 위쪽에 살살 문질렀다.
시원한 느낌에 사내가 잠시 긴장을 푼 순간, 무언가 뾰족한 것이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 전해졌다.
“으.”
이상한 감촉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금방 의원이 손을 떼고 다시 새로운 무명천으로 둘둘 감아 주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끝났습니까?”
“그러네. 별것 아니지? 그러니까 너도 나중에 울지 말고 씩씩하게 있어야 한다.”
의원은 아빠 옆에 딱 붙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보고 있던 아이를 향해 쾌활하게 덧붙였다.
“너도 얼른 맞자꾸나. 오늘 이 집뿐만 아니라 앞집 뒷집 가야 할 곳이 많으니 나도 바쁜 몸이란다.”
어린아이를 대할 때면 으레 그러하듯 의원은 너스레를 떨면서 아이를 붙잡아 앉혔다.
아버지와 똑같이 차가운 천으로 팔뚝을 닦고, 침을 놓는 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 짝이 없었다.
“흐앙. 으아앙!”
하지만 지레 겁을 먹은 아이가 불현듯 울음을 터트리자 덕구는 난처한 얼굴로 허둥거렸다.
“어허, 이 녀석이 왜 이래? 뚝!”
“아파, 아파요오~!”
엄마를 찾으며 서럽게 울어 대는데, 덕구가 암만 으름장을 놓아도 울음소리는 더 커져만 갈 뿐 전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의녀가 소맷자락에서 손가락만 한 엿을 꺼내 들었다.
“자아, 착하지.”
말한테 당근을 주는 것처럼 아이의 눈앞에서 엿을 흔들어 대는 품세가 제법 익숙했다.
마치 이 정도쯤은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능숙하게 상냥한 목소리로 살살 달래니, 어느새 아이의 울음은 뚝 그쳐 있었고 눈동자는 엿에 고정되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때를 노려 의원이 재빨리 침을 놓았고, 이를 눈치챈 아이가 인상을 일그러뜨리자마자 의녀가 신속하게 엿을 물려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대,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에 덕구는 무슨 진기명기라도 본 듯 넋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뭘, 아무것도 아니라네.”
“침 때문에 우는 아이들을 달래다 보니 생긴 요령이지요.”
존재감 없이 평범하게만 보였던 의녀가 새삼 위대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부인, 몸조리 잘하십시오.”
“제가 저 앞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봤자 기껏해야 한두 걸음밖에 안 되는 앞마당까지였지만, 덕구는 허리를 숙이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의원 나리. 아전 어른.”
“어여 들어가 보게.”
멀리 가지도 않으니 배웅해 줄 필요 없다며 아전이 손을 내저었다.
그 말을 듣고 덕구가 지켜보니, 과연 몇 걸음 걷지도 않고 아전과 의원 일행이 바로 근처 이웃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여기저기 돌 데가 많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침놓은 자리가 근질근질한 느낌에 무의식중에 긁으려던 덕구는 며칠 동안 물 닿게 하지 말고 손대지도 말라던 의원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쩝 소리와 함께 뒤로 돌아 집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동장군의 위세가 한풀 꺾이며 남쪽에서 살랑살랑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이 됐다.
오늘도 어김없이 도현은 가볍게 아침 수련을 끝낸 뒤 희정당에서 업무를 봤는데 얼마 있지 않아 바깥에서 대기하던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국방대신과 주작단 단장께서 오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예.”
미닫이문이 열리고 약간 굳은 얼굴의 임경업과 이완이 나란히 안으로 들어와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며 예를 갖췄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오?”
도현의 물음에 연장자이자 품계도 높은 임경업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급히 아뢸 일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이거 두 사람이 정색하며 앉아 있으니 괜히 겁부터 나는군. 그래, 뭔지 말해 보시오.”
“최근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구라파歐羅巴(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영길리가 화란을 이겼다고 하옵니다.”
“그게 사실인가?”
회귀 전 기억 덕분에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그는 담담한 얼굴로 이완 단장을 보며 확인했다.
“예. 마카오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 하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은밀히 알아본 결과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바타비아에 있는 네덜란드군이 더욱 궁지에 몰리겠군.”
“그러게 말이옵니다. 가뜩이나 포위를 당한 상태로 몇 달째 어렵게 농성 중인데 이런 사실이 전해지면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옵니다.”
“지금까지는 잘 버텨 왔지만 이렇게 되면 조만간 함락을 당하거나 스스로 백기를 걸고 항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완의 이야기에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며 다른 의견을 보였다.
“아니, 짐의 생각은 다르네.”
“예?”
두 사람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몸을 바로 한 도현은 아주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구라파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며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이번 한 번의 전쟁으로 영길리가 화란을 완전히 꺾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게야. 지금까지 그렇게 주목받지 못하던 나라로 좁은 섬 안에서만 갇혀 있던 영길리와 달리 화란은 대양을 누비고 다니며 그동안 해상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아 놓은 저력이 있으니까 말이야.”
“하면 전하께서는 아직 화란에 승산이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임경업의 물음에 도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만 해상 교역의 패권을 영길리가 틀어쥐었다고는 할 수 없을 걸세. 굳이 따진다면 이제 서로 동등한 입장이 됐다고 할까. 화란도 대패를 당했다고는 해도 자신들의 돈줄이 달린 일인데 이대로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듣고 보니 그렇사옵니다.”
도현의 말대로 전력의 열세를 이겨 내고 극적인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아직 전쟁을 지속시킬 여력이 남아 있는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아마 양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면 바타비아에 대한 포위도 조만간 풀릴 거야. 물론 그때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텨야 되겠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실제로 얼마 뒤 양국은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체결해 신대륙에 위치한 식민지인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s를 네덜란드가 영국에 양도하는 걸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면 한동안 두 나라의 다툼이 계속되겠사옵니다.”
“맞아. 이런 때일수록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줄다리기를 잘해 아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필요해.”
“예.”
방금 들은 말을 곱씹으며 머릿속으로 남방 문제를 어찌 대처해야 될지 고민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도현은 입가에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화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대남요새에 전력을 증강하는 건 다 마무리됐나?”
“네. 하교하신 대로 치우 급 전함 한 척을 포함해서 세 척의 군선을 추가로 배치했고 육전대도 일천 명을 더 증강했사옵니다.”
“육전대에 거란 출신 기병 오백 명이 포함됐다고?”
“아무래도 한족 반란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이 필요할 것 같아 신이 중원 병력에 넣었사옵니다.”
“잘했어. 대남요새는 아국이 제주도 이남의 해상 교역로를 장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거점이니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참. 포르투갈이 젤란디아 요새를 노린다고 하더니 어째 잠잠하군.”
시선을 받은 이완 단장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움직임이 있었사옵니다만 한족 반란이 일어나고 우리가 섬 북부를 장악한 걸 보고 싸움을 벌여 봤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지금은 출정을 포기한 것으로 아옵니다.”
“마카오 총독이 그래도 제법 상황 판단을 할 줄 아는 것 같군.”
“젤란디아 요새에서 자꾸 한족 반란군 토벌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는데 이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도현은 심드렁한 얼굴로 임경업을 봤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에 귀한 병사들을 희생시킬 수 없으니 그냥 무시해 버리게.”
“예.”
병사들을 아끼는 마음도 있었지만 도현은 궁극적으로 대만을 지금처럼 삼등분시켜서 네덜란드의 시선을 한족 반란군에게 돌리려는 속셈이었다.
그 뒤로도 남방 상황에 대해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두 사람은 희정당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채 보름이 안 돼서 도현이 말한 대로 영국과 네덜란드가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바타비아 요새를 공격하던 영국 함대는 포위를 풀고 빈탄 섬으로 철수했다.
동시에 그동안 꽉 닫혀 있던 뱃길도 열렸는데 대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들은 말라카 해협으로 진입할 때마다 영국에 일정액의 세금을 내기로 했다.
네덜란드로서는 비용 측면은 물론이고 자존심에 큰 상처가 생겼지만 남방 함대가 괴멸되고 본국의 사정이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영국도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더 이상 전쟁을 이끌어 갈 능력이 안 됐기에 이쯤에서 만족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양쪽이 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기에 언제 다시 전쟁의 불길이 되살아날지 몰랐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해상 교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해로가 막혀 제대로 장사를 하지 못했던 상인들은 그걸 다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이 바쁘게 뛰어다녔다.
개점휴업 상태였던 완도 상관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와 상인들로 다시금 북적였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네덜란드의 독점이 아니라 영국이 조선 물건 구매에 끼어드는 바람에 상품값이 크게 올랐다.
“홍삼 한 근에 금화 열 냥이라고 했소?”
수염을 길게 기른 네덜란드 상인이 놀란 얼굴로 되묻자 송상에서 나온 중년인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한 근에 금화 여섯 냥이면 됐는데 갑자기 넉 냥이나 더 내놓으라니 너무한 거 아니오!”
역관을 통해 네덜란드 상인의 말을 들은 중년인은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싫으면 마시오. 우린 당신이 아니라도 제주 상관에 가져가서 영길리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 되오. 그쪽은 열한 냥에도 없어서 못 사는 판이오.”
“끄으응.”
제주 상관에 와 있는 영국 상인들을 거론하며 배짱을 부리자 네덜란드 상인은 앓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겼다.
그냥 가격을 올리기 위해 튕기는 것이 아닌 게 실제로 많은 영국 상인들이 유럽에서 인기가 많은 조선 상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잔뜩 몰려와 있었다.
물건은 한정이 되어 있는데 수요가 크게 늘어나며 경쟁까지 붙자 경제 논리에 따라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런 현상은 홍삼뿐만 아니라 도자기와 연필, 각종 인삼 제품 그리고 자개 가구까지 조선에서 만들어지는 특산품 전반에 적용됐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유럽으로 가져가서 팔아 보통 세네 배씩 많은 시세차익을 올리던 네덜란드 상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익이 대폭 줄어드는 건 물론이고 물량을 두고 영국 상인과 경쟁해야 되는 골치 아픈 상황에 놓인 것이다.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겠소이다.”
상대가 협상을 끝내려고 하자 네덜란드 상인은 다급하게 중년인을 붙잡았다.
“이렇게 가시면 어쩝니까?”
“가격을 제시했는데 그걸 못 맞춰 주겠다니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소.”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그러지 마시고 그동안 거래해 온 정이 있는데 가격을 조금만 낮춰 주시지요. 열 냥이나 주고 사면 남는 게 정말 없습니다.”
네덜란드 상인이 통사정을 했지만 중년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나마 계속 거래를 해 왔기에 이렇게 물량을 남겨 둔 것이오. 그리고 자꾸 이윤이 안 떨어진다고 하는데, 그럼 열한 냥에 사가는 영길리 상인들은 뭐요? 아무튼 이 가격 밑으로는 절대 팔 수 없으니 그렇게 아시오.”
중년인이 딱 잘라 말하자 네덜란드 상인은 낮게 침음성을 삼켰다.
한꺼번에 너무 가격이 올랐지만 그렇다고 빈 배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네덜란드 상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상대와 달리 송상에서 나온 중년인은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마시는 여유를 보였다.
어차피 결과는 나와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참 머릿속으로 주판을 튕겨 보던 네덜란드 상인은 떨떠름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가격에 매입을 하지요.”
“하하하. 잘 생각하셨소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짓는 중년인과 달리 네덜란드 상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번 거래로 네덜란드 상인은 가격 결정권이 완전히 조선 측에 넘어간 걸 뼈저리게 느끼는 것과 동시에 상황을 이렇게 만든 영국 상인들한테 이를 갈았다.
봉황상단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조선 상단들은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의 경쟁을 교묘하게 부추기면서 물량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적절히 분배해 큰 이익을 올렸다.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도 손해를 보지는 않았는데 오른 가격만큼 유럽으로 가져가 비싸게 팔아 차익을 메웠다.
원래부터 조선에서 가져가는 물건의 소비자가 대부분 귀족이나 부유한 자본가 들이었기에 이 정도 가격 상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교역로가 봉쇄돼 물건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는 바람에 수요가 더 커져,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덕분에 조선은 곳간 가득 금과 은을 채워 넣을 수 있었고 도현은 이렇게 벌어들인 재물을 그냥 썩혀 두는 것이 아니라 산업화와 군비 강화에 투자했다.
“작년보다 십만 냥이나 더 벌어들였군.”
완도와 제주 상관에서 행해진 거래 결과를 받아 든 도현이 흡족한 표정을 짓자 장 총관 역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거래 물량은 비슷했지만 두 나라가 경쟁이 붙어 가격이 폭등한 영향이 컸사옵니다.”
“바람직한 일이야. 화란이 아국 물건을 구라파에 소개한 공은 있지만 솔직히 그동안 독점을 하며 돈을 많이 챙긴 게 사실이지. 안 그런가?”
“맞사옵니다.”
“값이 오른 데 대해 불만은 없던가?”
“왜 없겠사옵니까. 하지만 예전과 달리 영길리 상인들이 물건을 받아 가기 위해 잔뜩 몰려와 있는 걸 의식해서인지 대놓고 표현은 못 하고 어떻게든 물량을 더 확보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뭐든지 경쟁이 있어야 제값을 받는 법이지.”
작게 머리를 끄덕이던 도현은 이내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고 너무 값을 올려 버리면 자칫 아국 물건에 대한 수요를 줄여 버리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으니 장 총관이 상단들을 잘 관리하도록 하게.”
“예. 염려 마시옵소서.”
“그래. 옆에 그대가 있어서 짐이 항상 든든하네.”
도현의 말에 장 총관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린 도현은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완 단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청나라 분위기는 어때?”
“여전히 전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옵니다. 특히 당왕 주율건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양자강을 넘어 하남성河南省까지 진격해 들어가자 황제인 도르곤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도현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요즘 청군이 전력을 제대로 집중시킬 수 없다고 하지만 벌써 하남성까지 치고 들어가다니 대단하군.”
“혼란스러운 틈을 노린 것이 주효했지만 당왕 주율건이 상당히 뛰어난 통솔력을 보이고 있사옵니다.”
청나라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려줘서 고맙기는 했지만 명나라가 다시 예전 국력을 회복하는 것 역시 조선 입장에서는 그리 탐탁지 않은 일이었기에 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대륙에서 일어선 나라들은 대부분은 중원을 통일하면 넘쳐나는 힘을 주변 국가에 쓰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명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여전히 조선을 조공국으로 여기는 경향이 컸기에 마찰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이 단장.”
“말씀하옵소서.”
“명군의 상승세가 얼마나 이어질 것 같나?”
질문을 받고 잠시 고심하던 이완 단장은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진격을 해 왔지만 청 황제인 도르곤이 직접 팔기군을 이끌고 나선 이상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사옵니까.”
“확실히 타고난 무장인 도르곤이 친정을 한다면 무게감부터 다르겠지.”
“그렇사옵니다. 제남에 있는 왕영군과 서부로 간 오삼계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약간의 변수가 있겠습니다만 명군이 더 이상 치고 올라오기는 어려울 겁니다.”
“짐도 같은 생각이네. 하면 전선이 당분간은 하남성에서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겠군.”
“예.”
“가장 좋은 건 지금처럼 대륙이 네 등분 나 있는 건데 말이야.”
보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도현은 문득 생강이 난 듯 이완 단장을 봤다.
“왕영군이 명나라와 손을 잡을 낌새는 없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희박하옵니다.”
“왜 그렇지?”
“기본적으로 왕영과 그를 따르는 세력들은 청 황제를 모셨던 이들이었기에 명나라 입장에서는 배신자들이기 때문이옵니다.”
“그런 문제가 있었군.”
“명군한테는 청나라와 함께 타도 대상일 뿐이지 결코 속에 품을 상대가 아닐 겁니다. 이런 걸 잘 알고 있는 왕영군도 조만간 개국을 선포하며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할 거라 생각 되옵니다.”
“그럼 두 세력이 손을 잡게 될 여지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니 청나라 입장에서는 희소식이겠군.”
“꼭 그렇지만도 않사옵니다.”
“왜지?”
“청나라 내부의 이신 세력이 속속 도르곤을 떠나 왕영 쪽에 가담하고 있는 데다 그쪽도 싸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청군 전력이 분산되기 때문이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나라로 넘어갈 수 없는 이들이 왕영 쪽을 선택한다는 것이군.”
“바로 맞히셨사옵니다.”
이완 단장의 수긍에 도현은 잠시 침묵하며 생각했다.
“아국의 내정이 안정될 때까지 청나라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력이 없게 만들어야 해. 그럴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깊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세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크게 늘어난 수익에 기뻐하는 조선과 달리 지난번보다 더 비싼 값에 물건을 구입해야 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인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거래를 모두 끝마친 뒤 완도 상관 내에 위치한 동인도회사 지부에 모인 상인들은 저마다 잔뜩 얼굴을 구긴 채 불만을 토로했다.
“인삼 한 근을 얼마에 산 줄 아십니까! 열 냥입니다, 열 냥!”
“도자기와 자개장도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세 냥씩 올려 받았습니다. 그것도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화물칸 절반을 겨우 채웠습니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유럽에 물건을 팔지도 못했을 거면서 어찌 이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동감이오!”
“조선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영국 놈들입니다. 사실 그자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가 독점하던 것이 깨지고 경쟁이 붙는 바람에 상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것 아니겠소이까.”
조선과의 거래뿐만 아니라 뒤늦게 해상 교역에 뛰어든 영국이 곳곳에서 네덜란드의 이권을 넘보며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기에 긴 탁자를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아 있던 상인들은 다들 분풀이라도 하듯 거친 말들을 쏟아 냈다.
“영국 촌놈들…….”
“그냥 섬에 처박혀 양이나 키우고 있을 것이지 주제도 모르고 여기까지 기어와서 물을 온통 다 흐려 놓는구먼.”
“내 말이 그거요.”
그때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상인 한 명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값이 오른 거야 유럽에 가져가서 우리도 그만큼 올려 받으면 되지만 더 심각한 건 다음 거래 때 원하는 만큼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는 거요.”
날카로운 지적에 방 안 분위기가 무거워지며 다들 우려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번에도 영국 놈들이 값을 비싸게 불러 물량을 다 차지하려는 걸 겨우 막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이런데 한번 물건을 팔아 재미를 보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거요.”
“끄응.”
암울한 전망에 상인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말을 꺼냈던 중년 상인이 가운데 앉아 있는 발데 총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뭔가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상인들의 시선이 모이자 팔짱을 풀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웃돈을 조금 더 줘서라도 다음 거래 물량을 선매수해 놓을 생각이오.”
“가능하겠습니까?”
자신들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상인들은 앞으로 몸을 바싹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협상을 해 볼 생각이오.”
기대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연 조선 측이 선매수를 받아들일지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매수자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하나뿐이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영국 상인들이 있었기에 가만히 있어도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데, 굳이 선매수를 해서 물량을 묶어 둘 이유가 없었다.
서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중년 상인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운 좋게 선매도를 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안 되지 않겠습니까?”
“나도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다른 방법이 없지 않소.”
그렇지 않아도 만족스럽지 않은 거래에 심기가 불편하던 발데 총관은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조선 놈들의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파는 상품 중에 가장 인기가 좋은 인삼을 자체적으로 재배하는 게 어떻습니까?”
“……!”
뜻밖의 말에 발데 총관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다른 상인들도 눈을 크게 뜨며 술렁였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뿐이었고 발데 총관은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라고 왜 그런 생각을 못 했겠소. 하나 조선 측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인삼 씨앗을 순순히 넘겨줄 것 같소. 우리한테 파는 것도 생인삼은 하나도 없고 전부 바짝 말린 거나 아니면 아예 홍삼으로 만들어서 넘기는 걸 보면 모르겠소.”
실제로도 조선은 가장 중요한 특산물인 인삼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씨앗은 물론이고 재배하는 농사꾼들까지 철저하게 관리했다.
이걸 위해 송상에서 하던 인삼 재배를 국가가 넘겨받아 농산부와 주작단이 직접 운영하고 있었다.
인삼 재배권을 포기하는 대신 송상은 구형 판옥선 십여 척을 불하받아 외국과 교역에 나서게 됐고 십 년 동안 홍삼 생산량의 삼 할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리고 담뱃잎 생산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저도 압니다.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조선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수 있지 않습니까.”
“으음.”
자신도 모르게 인삼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계산해 본 발데 총관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고 좌우에 앉아 있던 상인들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인삼을 재배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모험을 걸어 볼 만합니다.”
“저도 찬성입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지 않습니까?”
몇몇 상인들이 바짝 몸이 닳아 말했지만 발데 총관은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성급하게 말할 일이 아니오. 씨앗을 구하기도 어려운 데다 자칫 이런 움직임이 조선 측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뒷감당하기 어려워질 것이오.”
그러자 처음 말을 꺼냈던 중년 상인이 얼른 말을 받았다.
“무슨 일이든 큰 수익을 얻으려면 위험부담이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서워서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주도권을 빼앗기고 조선 측에 질질 끌려 다녀야 될 겁니다.”
이미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었기에 마지막 말이 발데 총관과 모여 있는 상인들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사실 발데 총관도 남방 향신료 무역에 이어 조선 특산물까지 영국 상인들이 치고 들어오는 것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소?”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조선과의 교역을 총괄하는 직책에 있는 발데 총관은 섣불리 결정을 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조선 측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조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인삼 씨앗을 구하려고 해도 우리 같은 서양인들은 상관 구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되어 있는 데다 외모부터 확 차이가 나는데 은밀히 일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하겠소?”
발데 총관의 말에 중년인이 은근한 어투로 말을 했다.
“그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왜국인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러자 한쪽에 앉아 있던 상인이 무릎을 치며 감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왜국인이라면 조선 사람하고 똑같이 생겼으니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기 좋지요.”
꼬리를 자르기 쉽다는 이야기에 발데 총관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상단과 관련된 왜국인을 쓰면 금방 들통이 날 텐데 적당한 이가 있소?”
“예.”
머리를 끄덕인 중년 상인은 좌중을 둘러보고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혹시 이가 닌자 가문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이가 닌자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발데 총관은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막부를 어둠 속에서 지킨다는 그 닌자 가문을 말하는 거요.”
“맞습니다. 허락을 하신다면 그자들한테 의뢰를 할 생각입니다.”
“어떻게 그자들과 인연이 닿은 거요?”
발데 총관뿐만 아니라 다른 상인들도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도 우연치 않게 그들과 끈이 닿게 됐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형편이 궁해져 돈만 충분히 준다면 어떤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이가 닌자라면 쇼군인 도쿠가와 가문을 직접 모시는 자들인데 돈이 궁하다니 그게 정말이오?”
“저도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입니다.”
“거참…….”
조선군이 왜국을 정벌했을 때 도현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로 이가 닌가들이 도쿠가와 가문에서 내쳐진 걸 모르는 발데 총관과 네덜란드 상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왜국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닌자들을 우리가 쓸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참을 고심하던 발데 총관은 이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중년 상인을 보며 말했다.
“정말 조선에 안 들키고 인삼 씨앗을 구해 올 자신이 있소?”
“예, 틀림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발데 총관은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주위의 상인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 의견에 찬성하시오?”
그 물음에 상인들 사이에서 긍정하는 답변이 흘러나왔다.
“한번 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를 듣곤 발데 총관이 알겠다는 듯 다시 중년 상인에게 시선을 줬다.
“좋소. 대신 만에 하나 발각이 되더라도 절대 우리가 개입됐다는 사실이 드러나서는 안 될 것이오.”
“염려 마십시오.”
며칠 뒤 구매한 물건들을 다 선적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배들은 선단을 꾸려 완도 상관을 떠나 일 차 목적지인 바타비아 요새로 향했다.
중간에 작은 쾌속선 한 척이 선단을 이탈해 나가사키長崎로 갔다.
왜국 유일의 개항장인 나가사키에는 외국 상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여관이나 가게들이 많았다.
거리로 나가 보면 노란 머리 파란 눈을 한 서양인들이 행인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들려오는 것은 각국의 독특한 억양이 섞인 이국의 언어였기에, 간혹 여기가 왜국이 아니라 어디 다른 나라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로만은 그런 번화가 한복판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간혹 무언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목적지를 향한 그의 발끝은 거침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한쪽, 주변 건물들에 비해 화려한 느낌이 드는 가게를 발견하자 로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아직 밝은 대낮이라 가게 앞에 매달린 홍등엔 불이 꺼져 있었으나 열린 문 앞에 서니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누구?”
긴 담뱃대를 물고 나른한 눈빛으로 입구를 지키고 있던 여자가 나와서 로만을 맞이했다.
그녀는 첫눈에 그가 돈 많은 상인이라는 것을 알아챈 듯 이내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손님을 맞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뭐, 상관없어요. 우리 가게는 처음 같은데, 어떤 아이가 취향이에요? 말만 하면 원하는 대로 다 맞춰 드리죠.”
“여자는 됐소.”
로만은 그보다 중요한 용건이 있다는 투로 대꾸했다.
“어떤 사내를 찾고 있는데…….”
“훗. 유곽에서 사내라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 아녜요?”
“아마 손님으로 이곳에 묵고 있을 거요. 긴테스라는 사람이오만.”
“아…….”
그제야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는 알겠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유메.”
여자의 부름에 열두세 살쯤으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층 안쪽 방이야. 긴 씨한테 안내해 드리렴.”
“예.”
긴이라는 여자의 말에 로만은 잠시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여자가 사내를 부르는 별명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닫고 로만은 얌전히 기모노를 입은 소녀의 뒤를 따랐다.
“이쪽입니다.”
격자무늬 장지문 앞에 소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소녀가 소리 없이 열어 준 장지문을 넘어 성큼 발을 내딛은 로만은 방 안 풍경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제법 넓은 다다미방 한복판엔 아직 이불이 그대로 깔려 있는 상태였고, 그 위에 반쯤 벌거벗은 여자가 비스듬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유곽 아가씨들 중 한 명으로 보이는 그녀는 로만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머리맡에 벗어 놓은 겉옷을 들어 상체를 가렸다.
그리고 창가엔 긴테스가 벽에 등을 대고 앉아 홀로 술을 홀짝이며 로만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오랜만이오.”
“내가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군.”
“뭘, 종일 빈둥거리는 것도 이제 지겨워지던 참이니 잘됐지.”
그러면서 긴테스는 옷을 입는 여자의 목선을 진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다 입었으면 이리 와서 술 좀 따라 봐.”
“아이 참, 피곤한데…….”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어머, 어젯밤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래요.”
새침하게 말대꾸를 하면서도 여자는 순순히 긴테스의 말을 따랐다.
어느새 소녀가 가져다 놓은 새 술병과 잔을 받아 들고선 이불을 치우고 간단하게 로만이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솜씨가 제법 노련했다.
“계속 여기 있을까요? 아님…….”
“나가 있어.”
이만하면 됐다는 듯 긴테스가 턱짓으로 여자를 내보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론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음흉한 행동에 여자는 찰싹 소리 나게 손등을 때려 떼어 놓고선 살랑거리는 몸짓으로 로만을 지나쳐 나갔다.
“제법 괜찮은 여자 아뇨? 이 가겐 물이 좋은 편이니 나중에 한번 이용해 보시오.”
로만은 그 말엔 대답하지 않고 여자가 깔아 놓은 방석 위에 앉았다.
“한데, 잘나가는 상인께서 어쩐 일로 나를 찾으셨나?”
술을 물처럼 꿀꺽 마셔 대는 긴테스지만 상대방을 탐색하는 눈빛은 예리했다.
“의뢰를 맡길 게 있네.”
“흐음. 얘기해 보쇼.”
“조선에 가서 인삼 씨앗을 가져와 줬으면 하네.”
술잔을 기울이던 긴테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뭐라고?”
“두 번 말해 줘야 되나.”
똑같은 말 반복하긴 싫다는 듯 로만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아니, 알아들었소. 그런데 너무 갑작스러운 얘기라…….”
긴테스는 술잔을 내려놓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조선에서 인삼이 타국으로 유출되는 걸 무척 싫어하는 건 그쪽이 더 잘 알 텐데.”
“그러니 자네한테 부탁하는 거지. 정상적인 방법으로 손에 넣을 수 있으면 굳이 이런 수고를 하지 않아.”
“쉬운 일이 아니오.”
“자네 같은 실력자도 약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니, 의외인걸. 이가 닌자 가문의 명성도 땅에 떨어졌군.”
순간 긴테스의 눈동자에 불꽃이 확 피어올랐다.
“입조심하시오.”
그가 뿜어내는 서릿발 같은 날카로운 살기에 방 안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로만은 얼굴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등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품속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냈다.
로만이 주머니를 바닥에 툭 던지자 금속이 부딪히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느슨하게 풀린 끈 사이로 번쩍거리는 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선수금이네. 의뢰를 무사히 끝마친다면 그것의 두 배를 보수로 주지.”
긴테스는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대충 가늠하듯이 손바닥 위에서 툭툭 치고는 로만을 바라봤다.
“단단히 작정을 하고 나오셨구먼?”
그가 피식 웃는 것과 동시에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좋아, 좋아.”
“받아들여 주는 건가?”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게 더 깨부수는 재미가 있지.”
긴테스는 주머니를 받아들고 히죽 한쪽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 의뢰, 내가 하겠소.”
인삼 씨앗을 지켜라
로만이 제공한 배를 타고 나가사키를 떠난 긴테스와 이가 닌자들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해 곧장 인삼 산지인 개성으로 잠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의 삼엄한 순찰에 전라도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야밤을 이용해서 변산반도에 긴테스 일행을 몰래 상륙시켰다.
조선인으로 변장한 이들은 전주와 천안을 거쳐 조심스럽게 이동한 끝에 일주일 뒤 목적지인 개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 밖 한 야산 기슭에 있는 버려진 암자에 숨어 있던 긴테스는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동작을 멈추고는 대나무 작대기로 위장한 검을 집어 들었다.
다른 일행 두 명도 긴장한 얼굴로 발검 자세를 잡았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 문밖에 와서는 낮게 말했다.
“저, 요헤이입니다.”
정보를 수집하러 갔던 일행의 목소리에 긴테스와 부하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삿갓을 쓴 젊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왔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관아의 눈을 피해 멀리 돌아오느라고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검이 숨겨진 대나무 작대기를 옆에 내려놓고 바닥에 앉은 긴테스는 약간 굳은 얼굴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들은 대로 이곳에 인삼 재배 농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 뿌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지?”
“농장 주위를 조선군 세 개 천인대가 완전히 둘러싼 채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데다 개성부 포졸들이 수시로 검문과 순찰을 해서 접근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저도 외곽까지만 겨우 들어가 농장을 멀리서 확인만 했습니다.”
전문적으로 침투술을 익힌 부하가 접근에 실패했다고 하자 긴테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예 침투도 못 할 정도란 말이야?”
“무리를 하면 가능은 하겠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긴 어려울 겁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자들은?”
“안에 마을이 하나 있어 거기서 생활했습니다.”
“그럼 바깥으로 전혀 안 나온다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농장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으음.”
매년 조선에 엄청난 돈을 벌어다 주는 작물인 만큼 보안이 철저할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상황에 긴테스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자 후미오라는 이름을 가진 부하가 옆에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망설일 것이 뭐 있습니까? 그냥 오늘 밤에라도 농장에 숨어들어서 밭에 있는 인삼을 몇 뿌리 챙겨 여길 빠져나가지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오래 머물수록 노출될 가능성이 커지니 최대한 빨리 치고 빠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부하들의 말에 긴테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 가지고 나왔는데 중요한 인삼 씨를 받지 못하는 거라면 어떻게 할 거야. 일을 확실히 처리하기 위해서는 농장 내부 정보가 더 필요해.”
“그렇기는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한참을 고심하던 긴테스는 고개를 들어 정탐을 하고 온 부하를 봤다.
“요헤이.”
“옛.”
“농장 일꾼들이 가끔 밖으로 나온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놈들 중 한 명을 포섭해서 정보를 캐내도록 하지.”
“그러면 너무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후미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긴테스는 짧지만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
“조선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두 번은 기회가 없을 거야. 그럼 조금 지체되더라도 확실하게 하는 것이 나아.”
“알겠습니다.”
수긍하는 표정을 짓자 긴테스는 지체 없이 지시를 내렸다.
“우리들 중에 조선말을 제일 능숙하게 하는 요헤이가 적당한 먹잇감을 물색하고 나머지는 농장 주위를 살펴 침투로와 도주 방법을 세운다. 조선 놈들한테 들키지 않게 다들 조심해서 움직이는 걸 명심하도록 해.”
“예.”
긴테스의 말에 부하들은 눈을 날카롭게 번득이며 고개를 숙였다.
오덕팔은 할아버지 때부터 송상에서 인삼 재배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으로 그 역시 소속은 국가로 바뀌었지만 인삼을 키우는 걸 천직으로 알고 있었다.
오랜 경력을 인정받아 작업반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휘하에 서른 명이나 되는 일꾼을 거느린 채 인삼밭을 가꾸는 일을 했는데, 노는 날이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탁주를 마시러 개성부 안에 있는 저잣거리로 나왔다.
오늘도 몇몇 동료들과 어울려 개성부로 들어왔다.
“난 주막에서 먼저 탁주 한 사발을 하고 있을 테니까 필요한 것들 사서 그리로 와.”
“같이 안 가고?”
“목구멍이 칼칼한 게 한 사발 마셔야겠어.”
“사람 하고는.”
“내가 부탁한 것도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대신 술은 자네가 사는 걸세.”
“알았네.”
동료들과 헤어진 오덕팔은 익숙한 걸음으로 단골 주막에 들어갔다.
“주모, 여기 탁주 한 사발이랑 국밥 한 그릇 말아 주게.”
그러자 손님들이 먹고 간 상을 치우고 있던 주모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다른 분들은 어쩌고 혼자 왔어요?”
“섭섭하게 나보다 그 친구들이 더 보고 싶었나 봐.”
“호호호. 그럴 리가 있어요. 금방 상을 차려서 나올 테니까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요.”
“탁주부터 한잔 먼저 갖다 주게.”
“알았어요.”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부엌으로 간 주모는 이내 막걸리가 든 호리병과 대접을 가져와 그가 앉은 평상 위에 내려놨다.
“크으. 좋다.”
막걸리를 시원하게 한 사발 쭉 들이켠 오덕팔은 입가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는 안주로 나온 김치를 우적우적 씹었다.
잠시 뒤 나온 국밥까지 떠먹으며 어느새 술병을 반쯤 비웠을 때 봉놋방 문이 벌컥 열리며 웬 사내가 한 명 시끄럽게 떠들면서 밖으로 나왔다.
“뒷간에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대로 놔둬!”
“알았으니까 어서 갔다 오기나 해.”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반쯤 닫힌 문 사이로 서너 명의 사내가 둘러앉아 투전판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떴다!”
“어서 패 다시 돌려.”
왁자지껄한 모습에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던 오덕팔은 마침 지나가던 주모를 붙잡고 물었다.
“저치들은 누구야?”
“아, 전라도에서 온 보부상들이라는데 장사는 안 하고 며칠째 저렇게 판을 벌리고 놀고 있다우.”
“그래.”
“투전판에 끼어서 좋은 꼴 난 사람을 본 적 없으니 행여나 관심 가지지 마시우.”
“누가 뭐랬나.”
그래도 단골손님이라고 충고를 해 줬지만 오덕팔은 방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그걸 본 주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자기 할 일을 하러 갔다.
막걸리를 마시며 계속 힐끗힐끗 투전을 벌이는 걸 곁눈질하고 있을 때 아까 뒷간에 갔었던 사내가 돌아오다가 그걸 보고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시오?”
“아, 아니오.”
“거, 계집처럼 훔쳐보지 말고 보려면 안에 들어와서 구경하시오.”
“그래도 되겠소?”
반색을 하며 묻자 사내는 심드렁한 어투로 대답했다.
“구경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생각 있으면 따라오시오.”
“그럼.”
안 그래도 호기심이 동하던 오덕팔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뒷간에 갔다가 아예 똥까지 푸고 왔나? 왜 이렇게 늦어.”
“재촉은…….”
퉁명스럽게 말을 받으며 사내가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자 패를 돌리던 털보가 문 쪽에 멀뚱히 선 오덕팔을 쳐다봤다.
“누구야?”
“아, 지난번에 장사를 하러 왔을 때 안면을 튼 사람인데 밖에서 우연히 만났어.”
태연스럽게 둘러대며 고개를 옆으로 돌린 사내가 한쪽 눈을 깜빡이자 오덕팔도 얼떨결에 장단을 맞췄다.
“오가요.”
“관아 끄나풀 같은 건 아니겠지?”
“어딜 봐서.”
“하긴.”
피식 웃은 털보는 오덕팔을 보며 말했다.
“형씨도 낄 거요?”
잠시 망설이던 오덕팔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한쪽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털보는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금방 지우고는 다시 손으로 죽패를 섞었다.
“어디 보자, 뭐가 들어왔을 라나?”
서로 패를 확인하는 가운데 오덕팔도 앞에 놓인 죽패 두 개를 집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적혀 있는 글자를 봤다.
“자, 돈들 걸어.”
“두 냥.”
왼편에 앉은 남자가 구리돈 두 개를 가운데 던지자 오덕팔을 데려온 사내가 바로 판돈을 키웠다.
“쩨쩨하게, 열 냥으로 올려.”
“돈 없는 놈 서러워서 살겠나. 살살 좀 해.”
“겁나면 죽든가.”
“쳇.”
쨍그랑.
사내의 말에 다른 이들이 투덜거리며 판돈을 넣었다.
“형씨는 어쩔 거요?”
“첫판인데 패는 봐야 되지 않겠소.”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놨다.
“난 세 끗.”
“젠장, 두 끗이야.”
“그걸 가지고 어딜 따라와 이 정도는 돼야지.”
“그쪽도 패를 까야지.”
눈이 쭉 찢어진 사내가 팔뚝으로 툭 치며 하는 말에 오덕팔은 손에 든 패를 내려놨다.
“이게 뭐야!”
“다섯 끗이잖아.”
“젠장!”
이겼다고 좋아하던 사내의 얼굴이 바로 일그러졌고 첫 판부터 돈을 딴 오덕팔은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가운데 쌓인 판돈을 가져왔다.
“이거 첫판부터 운이 따르는 모양이네.”
“혹시 꾼을 데려온 거 아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패나 다시 돌려!”
운이 따라 주는 날인지 오덕팔은 그 뒤로도 계속 돈을 땄고 아쉽게 두세 번 지기도 했지만 판돈을 몇 배로 불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해가 지고 바깥이 어두워졌다.
“일곱 끗이오!”
“에이 썅!”
“패도 더럽게 안 붙네.”
“졌소.”
“판돈도 다 털렸고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하세.”
희희낙락하며 판돈을 가져가던 오덕팔은 털보의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술시戌時(저녁 7~8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끝내려고요.”
그러자 힐끗 오덕팔을 쳐다본 털보는 품에서 짧은 곰방대를 꺼내 담뱃가루를 채우며 말했다.
“새벽 일찍 까막골에 물건을 팔러 가야 돼서 안 되오.”
“그러시오.”
중간에 장을 보고 온 일행도 먼저 보내고 돈 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오덕팔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털보가 은근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대신 내일 오후에 다시 돌아오니까 더 놀 생각이 있으면 그때 오시구려.”
또 판이 벌어진다는 말에 오덕팔은 반색을 했다.
“알겠소. 꼭 오리다.”
앞에 쌓여 있던 돈을 챙겨 주머니에 넣던 오덕팔은 판돈을 쓸어 가는 것이 미안했는지 슬그머니 은화 두 냥이 내려놨다.
“밤에 술이나 한 잔씩들 하고 자시오.”
“고맙소.”
“그럼.”
묵직한 돈주머니를 품에 챙긴 오덕팔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봉놋방을 나갔다.
덜컹.
문이 닫히고 오덕팔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벽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던 털보가 정색을 하며 곰방대를 내려놨다.
“제대로 미끼를 문 것 같군.”
“일부러 져 주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보부상으로 위장해 오덕팔과 투전판을 벌인 사내들은 바로, 인삼 씨앗을 훔쳐 가기 위해 잠입한 긴테스와 부하들이었다.
수염을 붙여 변장한 긴테스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놈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들 해.”
“저런 놈 하나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
“요혜이.”
“예.”
“저자가 농장 작업반장인 것이 확실하지?”
그러자 뒷간에 다녀오는 척하면서 오덕팔을 자연스럽게 투전판으로 끌어들인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몇 번이나 확인을 했습니다.”
“좋아.”
긴테스는 눈을 서늘하게 번득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이후 주막 봉놋방에서 매일 밤 투전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패가 딱딱 달라붙으며 돈을 따 가던 오덕팔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잃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가져온 돈을 다 털리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과 보름도 안 돼서 오덕팔은 그동안 땄던 건 물론이고 조금씩 모아 둔 돈까지 전부 다 잃는 것도 모자라서 빚까지 졌다.
“열 냥!”
“열 냥 받고 금화 다섯 냥.”
긴테스가 금화 다섯 개를 집어 가운데로 던지자 왼편에 앉아 있던 요혜이가 괜히 엄살을 부리며 분위기를 잡았다.
“너무 지르는 거 아냐?”
“다 할 만하니까 그러는 거지. 자신 없으면 패를 내려놔.”
“쳇. 지금까지 넣은 본전이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지.”
그러면서 요혜이가 오른 판돈만큼 돈을 집어넣자 사람들의 시선이 오덕팔에게 향했다.
“갈 거요, 말 거요?”
며칠 사이에 사람이 몰라보게 초췌해지고 눈까지 붉게 충혈된 오덕팔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손에 든 패를 확인했다.
기다란 죽패 두 개에 적혀 있는 숫자는 구九였다.
가장 높은 패 중 하나를 쥔 오덕팔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힐끗 앞에 있는 판돈을 봤다.
다들 괜찮은 패가 들어왔는지 처음부터 판돈이 계속 올라 상당한 금액이 되어 있었다.
부담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액수였으나 지금 그의 손에 쥔 패라면 이길 확률이 꽤 높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맞이한 절호의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오덕팔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지금 요헤이의 도발에 응해 따라가면 수중에 있는 돈을 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쥔 패보다 더 높은 패가 나온다면?
그런 일말의 망설임이 오덕팔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왜 말을 못 해?”
머뭇거리는 오덕팔의 행동이 답답했는지 요헤이가 인상을 찡그리며 재촉했다.
“큭.”
더 이상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던 오덕팔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간다, 가!”
이제 와 물러나기에는 이미 잃은 돈이 너무 컸다.
한동안 어찌할지 갈등하던 그는 결국 일확천금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판에 뛰어들고야 말았다.
쫘르륵.
오덕팔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밀어 넣자 긴테스는 눈을 번뜩였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나머지 사람들도 판돈을 걸고는 한 명씩 패를 까 보였다.
“난 이땡.”
“씨팔. 여섯 끗인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양옆에 앉은 이들이 내민 패를 본 오덕팔은 자신보다 한참 낮은 점수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고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손에 쥔 패를 바닥에 탁 내려놨다.
“하하하! 구땡이오. 이번 판은 내가 먹은 것 같소.”
오덕팔이 가운데 놓인 돈을 가져가려고 할 때 맞은편에 있던 긴테스가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뭐요!”
“아직 내 패는 확인 안 했지 않소.”
“…….”
순간 불길한 느낌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대가 내려놓은 죽패에는 십十이라는 숫자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십땡이오.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말과 다르게 긴테스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멍한 얼굴로 상대가 판돈을 가져가는 걸 보고 있던 오덕팔은 이내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 너희들 다 짜고 치는 거 아니야! 맞아. 그게 아니면 이렇게 될 리가 없어!”
“오 형, 말이 좀 지나친 것 같은데.”
긴테스가 정색을 하며 노려봤지만 이미 돈을 다 잃은 오덕팔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놈들아. 내 돈 내놔!”
실성이라도 한 듯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자 긴테스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안 되겠구먼. 정신 좀 차리게 해 줘.”
“예.”
대답과 함께 양쪽에 앉아 있던 요헤이와 후미오는 악을 쓰는 오덕팔의 발을 걸어 쓰러뜨린 뒤 봉놋방 한쪽에 놓인 이불을 가져와 덮어씌우고는 마구 두들겨 팼다.
“어디서 행패질이야!”
“어이쿠!”
퍽! 퍽퍽!
“아이고. 나 죽네!”
죽는다고 소리를 쳐 댔지만 두 사람은 인정사정없이 계속 구타를 가했고 긴테스는 곰방대에 불을 붙여 입에 물고는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봤다.
그렇게 한참을 두들겨 맞은 오덕팔은 아까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던 기세는 다 사라지고 잔뜩 겁에 딜린 얼굴로 긴테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제 정신 좀 차렸어.”
“……예. 옛.”
“그러게 왜 진상을 부려서 매를 버나.”
긴테스가 곰방대를 뒤집어서 바닥에 탁탁 쳐 다 탄 담뱃가루를 털어 내자 오덕팔은 그걸로 자신을 때릴까 봐 몸을 움찔거렸다.
“돈을 잃은 건 잃은 거고 계산은 정확히 끝내야지.”
그러면서 긴테스가 눈짓을 하자 왼편에 서 있던 요헤이가 품속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오덕팔의 눈앞에 펼쳤다.
“자, 거기 적혀 있는 걸 보면 알겠지만 오늘까지 오 형이 나한테 빚을 진 게 모두 금화 오십 냥이야. 많이도 가져갔군. 이걸 어떻게 할 거야?”
오십 냥이라는 말에 오덕팔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꽤 많은 봉급을 받는 오덕팔의 수입으로도 몇십 년을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시, 시간을 주면 어떻게든 갚겠소.”
“사흘이면 되겠어?”
“그렇게 빨리는…….”
“그럼 언제까지 되는데?”
인상을 쓰며 긴테스가 다그치듯 묻자 오덕팔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아직 매를 덜 맞은 모양이군.”
“아, 아닙니다!”
그가 기겁을 하며 황급히 손을 흔들자 긴테스는 곰방대 끝으로 오덕팔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치며 으름장을 놨다.
“사흘이야. 그 안에 못 갚으면 어찌 될지 알아서 생각해.”
“…….”
“항상 지켜보고 있을 거니까 행여나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고. 그리고 사정을 봐주는 만큼 우리도 챙기는 것이 있어야겠지. 이자는 하루에 이 할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왜 싫어 그러면 지금 당장 돈을 갚든가.”
하루에 금화 한 냥이 붙는 엄청난 고금리에 발끈하던 오덕팔은 긴테스가 눈을 부라리자 이내 고개를 숙였다.
기가 완전히 꺾인 오덕팔은 긴테스가 시키는 대로 새 차용증에 지장을 찍고는 봉놋방에서 내쫓겼다.
“놈이 기간 안에 돈을 구해 오면 어쩌지요?”
오덕팔을 보내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후미오의 말에 긴테스는 새로 쓴 차용증을 접어 품속에 넣으면서 걱정 말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한두 푼도 아니고 제깟 놈이 어디서 그 많은 돈을 마련하겠어.”
“하긴 그렇습니다.”
“그것보다 엉뚱한 짓 못 하도록 감시나 잘해 어렵게 작업을 해 놨는데 괜히 야반도주라도 한다면 말짱 헛일이니까 말이야.”
“예.”
오덕팔은 돈을 구하기 위해 농장도 나가지 않고 동분서주했지만 금화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관아에 고발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사기도박에 걸려들었다는 심증만 있지 억울함을 보일 증거가 없었고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 농장에서 쫓겨나고 긴테스 일당한테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겁이 났다.
그렇다고 야반도주도 할 수 없었는데 어디서 감시를 하는지 농장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일당 중 한 명이 아주 보란 듯이 따라다녔기에 꼼짝달싹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가운데 결국 약속된 날짜가 되고 말았다.
덜컹.
문이 열리며 그사이 얼굴이 반쪽이 된 오덕팔이 요헤이한테 반쯤 끌려 들어오자 한쪽에 앉아 탁주를 마시고 있던 긴테스가 고개를 들었다.
“왔군, 어떻게 돈을 가져왔어?”
오덕팔은 그의 눈치를 보며 품속에서 주머니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여기…….”
“어디 볼까.”
주머니를 받아 열어 본 긴테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뭐야?”
그러자 오덕팔은 바닥에 엎드리며 사정을 했다.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그것밖에 못 구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꼭 다 갚겠습니다.”
오덕팔이 가져온 돈은 금화 다섯 개가 전부였다.
그것도 마누라가 시집왔을 때 손가락에 끼워 줬던 금가락지와 큰딸이 시집가면 해 주려고 틈틈이 모아 둔 비단과 그릇 같은 걸 탈탈 다 털어서 마련한 거였다.
피눈물을 삼키며 구해 온 돈이었지만 긴테스는 그런 걸 상관하지 않았다.
“이건 이자밖에 안 돼!”
“시간을 더 주면…….”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아무래도 안 되겠구먼. 이봐.”
“예.”
“이놈한테 다 큰 딸이 하나 있다고 했지?”
긴테스의 말에 요헤이가 일부러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예. 제법 얼굴도 반반하고 엉덩이도 튼실한 계집년이 있습니다.”
왠지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번쩍 든 오덕팔의 눈이 흔들리는 가운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조금 손해는 보지만 돈이 없으면 딸이라도 대신 데려가는 수밖에.”
“아,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순간 이성을 잃은 오덕팔이 고함을 내지르며 긴테스한테 달려들려고 하자 뒤에 있던 요헤이와 후미오가 그의 어깨를 잡아 억지로 다시 앉혔다.
“놔, 이 자식들아!”
“이게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먼.”
거칠게 몸부림을 치자 후미오가 주먹을 휘둘러 오덕팔의 얼굴과 복부를 마구 때렸다.
퍽! 퍼퍽.
“끄헉.”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긴테스는 오덕팔이 배를 부여잡은 채 엎드려 거친 숨을 토해 내자 한쪽 팔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주먹질을 하던 후미오가 구타를 멈추고 한쪽으로 물러섰다.
자리에서 일어난 긴테스는 얼굴이 엉망이 된 오덕팔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쪽 손으로 상대의 턱을 잡아 위로 들었다.
“으으윽.”
“하루에 이자가 이 할인데 그걸 벌어서 갚겠다고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해?”
“크흑.”
그도 시간을 번다고 해도 원금을 갚기는 고사하고 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딸을 대신 팔수는 없었다.
“대신 날 노비로 데려가시오.”
“계집도 아니고 너 같은 늙다리를 어디다 쓰라고.”
“내 딸은 안 돼! 차라리 날 죽여.”
악에 받친 듯 오덕팔이 소리치자 긴테스는 품속에서 작고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 상대의 뺨에 갖다 댔다.
“헉.”
“죽는다고 빚이 없어질 것 같나? 네놈 가족들한테 찾아가 이자까지 다 쳐서 받아 낼 거야. 마누라에 자식들까지 끌고 가 멀리 북방에 가져다 팔면 그럭저럭 돈이 떨어지겠군.”
“흑룡강 너머에 있는 노서아露西亞(러시아) 놈들한테 넘기면 제법 값을 짭짭하게 쳐준다고 합니다.”
“그 전에 딸년은 우리가 맛을 좀 봐야지.”
“큭큭큭. 이거 기대되는데.”
일당들이 지껄여 대는 말에 오덕팔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런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투전판에 끼어든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고, 죽패를 들었던 손을 작두로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됐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제발…….”
오덕팔은 절망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흐느꼈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긴테스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짓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애틋하군. 그래서 말인데 내 부탁 한 가지를 들어주면 돈을 안 갚아도 차용증을 돌려주지. 어때 관심이 있나?”
“……!”
한 가닥 구원 동아줄과도 같은 말에 오덕팔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게 뭡니까?”
“농장 상세 지도와 인삼 씨앗을 보관하는 곳을 가르쳐 주면 돼. 어때, 간단하지?”
순간 오덕팔은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처음부터 이러려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걸 눈치챘지만 긴테스는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이제 알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어려운 일도 아니잖나? 그냥 우리한테 이야기만 해 주면 빚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리고 돈도 주지. 어때?”
그러면서 긴테스가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오십 냥이야. 이 정도면 그까짓 농장 일 따위 다 때려치우고 남은 인생을 편히 살 수 있잖아.”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린 것에 분노하던 오덕팔은 어느새 반쯤 열린 주머니 사이로 번쩍이는 금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잘 생각해 봐. 이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야.”
“하지만 그러다가 만약 관아에 발각이라도 되면…….”
쉽게 뿌리치기 어려운 제안이었지만 나라에서 얼마나 인삼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철저히 막고 엄히 처벌하는지 잘 알고 있던 오덕팔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긴테스가 지금까지 보여 주던 위압적인 모습과 달리 부드러운 어투로 그를 설득했다.
“직접 창고에서 인삼 씨앗을 훔쳐 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는 걸 말해 달라는 건데 걸릴 것이 뭐가 있겠나? 설사 일이 잘못되더라도 오 형의 이름은 절대 발설치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정말이오?”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바로 차용증부터 불태워 없애도록 하지.”
“으음.”
오덕팔은 크나큰 갈등에 휩싸였다.
들켰을 경우 받게 될 처벌이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양어깨를 짓누르는 빚을 단번에 없애 버리고 더불어 금화 오십 냥이라는 거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흔들렸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긴테스가 은근하게 재촉했다.
“고민할 거 뭐 있나. 그냥 눈 딱 감고 해 버리는 거야.”
“으…….”
설령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녀가 알몸으로 유혹한다 해도 이보다 더 뿌리치기 힘들 수는 없으리라.
이리저리 방황하던 그의 시선이 일순 긴테스의 손에서 팔랑거리는 차용증에 닿았다.
“조, 좋소.”
“하겠다는 소린가?”
“그렇소.”
오덕팔은 마치 사약이라도 삼킨 죄인처럼 쓰디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긴테스의 입가에 걸린 비릿한 웃음을 본 순간 뭔가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이미 한번 내뱉은 말은 결코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긴테스는 보란 듯이 차용증을 크게 흔들고는 그대로 옆에 있는 화로에 던져 버렸다.
화르륵.
순식간에 재로 변해 스러지는 차용증을 보고 오덕팔의 눈에 안도하는 기색이 깃들었다.
“그럼 이번엔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긴테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을 지키고 있던 부하 중 하나가 지필묵을 가져와 오덕팔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얀 백지를 마주하고 나니, 새삼스레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어차피 이제 차용증도 사라졌겠다, 어떻게든 그냥 이 자리를 모면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약삭빠른 생각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 심경의 변화를 눈치라도 챈 것처럼 긴테스가 그의 앞에 다시 쭈그리고 앉았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긴테스의 시선이 오덕팔의 몸을 한번 훑을 때마다 그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오덕팔은 덜덜 떨리는 팔을 다른 한쪽 손으로 꽉 부여잡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아픔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제기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욕설을 속으로 삼키면서 오덕팔은 거칠게 붓을 잡고 종이 위로 몸을 굽혔다.
얼마 뒤 오덕팔은 품에 금화 오십 냥이 든 돈주머니를 가지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주막을 나섰는데, 어둠 속에서 그런 그를 주시하는 눈동자가 하나 있었다.
국왕인 도현의 직속 기관으로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주작단은 국내외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탐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집하기 위해 주작단은 주요 도시는 물론이고 거점 지역마다 지부를 설치해 은밀히 운영했다.
전조의 도읍지인 데다 지금은 많이 쇠락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수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큰 성읍이고 특히나 조선의 주요 수출품인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시설이 밀집한 개성은 그 중요도만큼 당연히 주작단 지부가 만들어져 있었다.
주작단 개성 지부를 삼 년째 맡아 오고 있던 김상용은 오늘도 어김없이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집무실에 남아 수집된 각종 정보들을 살펴봤다.
무작위로 수집된 정보들을 하나로 취합해 버릴 건 제외시키고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상부로 올려 보내는 게 그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언뜻 앉아서 서류만 보면 되니까 쉬워 보일지 몰라도 하루에도 수십 장씩 보고되는 정보들 가운데 옥석을 가려내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국가의 존망에 영향을 끼칠 중요한 정보를 실수로 놓칠 수도 있었고 잘못된 자료를 보내 큰 위기를 초래할지도 몰랐기에 고도의 집중과 분석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시간만큼은 웬만한 일이 아닌 이상 단원들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불문율을 깨는 사람이 있었다.
“지부장님.”
한참 집중해서 보고서를 읽고 있던 김상용은 문밖에서 들린 소리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뭔가?”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
그가 이 시간에 방해를 받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보고를 하러 왔다는 말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김상용은 표정을 굳혔다.
“들어와.”
끼익.
경첩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이는 개성 지부 소속 조장인 진성준이었다.
탁자 앞까지 다가온 진성준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하자 김상용은 읽고 있던 보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급한 일이라는 것이 뭔가?”
“인삼 농장에 관한 겁니다.”
들어 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화를 내려던 김상용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은 저 멀리 사라져 버린 채 미간을 좁혔다.
“자세히 설명해 보게.”
“갑 급 보호 대상인 인삼 농장을 감시하던 중에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는 이가 있어 며칠 전부터 집중 관찰에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수상한 무리와 만나는 걸 포착했습니다.”
인삼 농장에 문제가 생겼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김상용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수상하다는 거지?”
“일단 이자들이 전에는 한 번도 개성부에 왔던 적이 없었고 무엇보다 보부상이라고 하면서 물건을 팔러 다니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노린 것처럼 인삼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유인해 투전판을 벌인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의심이 가지 않는 게 없습니다.”
“흐음.”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김상용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 정도면 의심을 넘어 충분히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냄새가 풍겼다.
“놈들한테 걸려든 자가 누구지?”
“오덕팔이라고 인삼 재배를 담당하는 작업반장입니다.”
“양쪽 다 감시를 하고 있겠지?”
“예. 우리 조원들을 배치해 뒀습니다.”
주작단은 보통 조장까지 포함해 열한 명이 한 조를 이뤘다.
“만약 인삼 재배에 관한 걸 외부로 유출시키려는 거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야. 인원을 더 증원시켜 줄 테니까 자네가 책임지고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려 들면 바로 다 체포해 버려. 알겠나?”
“옛.”
“지금부터 이 일과 관계된 건 최우선적으로 나한테 바로 보고하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진성준이 방을 나가자 다시 혼자가 된 김상용은 두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겁도 없는 놈들 감히 인삼 농장을 노렸다 이거지.”
한편 긴테스와 부하들은 필요한 정보를 모두 알아내자 행여나 오덕팔이 변심하기 전에 일을 벌이기로 했다.
다음 날 바로 짐을 싸서 그동안 머물던 주막을 나와 지난번에 은신처로 삼았던 성 밖의 버려진 암자로 옮긴 뒤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자 긴테스와 부하들은 산등성이를 타고 인삼 농장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인적이 없는 험한 산을 헤치며 갔지만 특수훈련을 받았기에 큰 어려움 없이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 시진가량 산길을 내달린 긴테스와 부하들은 인삼 농장을 둘러싸고 있는 토벽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조선은 인삼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서 토벽을 쌓아 농장 전체를 아예 외부와 차단시키고 국왕 직속의 근위군단 병력 삼천 명을 배치해 요새처럼 만들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교대 시간입니다.”
그동안 개성부에 머물면서 오덕팔을 함정에 빠뜨리는 한편 농장 경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철저히 파악해 뒀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교대를 한다고 토벽 위가 조금 소란스러워지며 경계 순간적으로 느슨해졌다.
이걸 기다리고 있던 긴테스는 지체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긴테스를 선두로 검은색 야행복을 입고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부하들이 재빨리 숨어 있던 덤불을 밖으로 나와 토벽 밑에 바짝 등을 붙이고 섰다.
힐끗 고개를 들어 위를 살핀 긴테스가 수신호를 하자 언제 꺼냈는지 어깨에 둘러매고 있던 줄을 풀어 손에 든 후미오가 팔을 크게 돌리며 앞에 달린 갈고리를 던졌다.
휘리릭. 탁!
갈고리가 성가퀴에 걸려 단단히 고정되자 후미오는 재빨리 줄을 잡고 토벽을 올라갔고 나머지도 그 뒤를 따랐다.
토벽 위에 올라선 긴테스와 부하들은 줄을 다시 회수해서 침투한 흔적을 지우고는 교대를 끝낸 경비병들이 오기 전에 얼른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농장 안에도 네 명씩 짝을 지은 경비병들이 수시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긴테스와 부하들은 어렵지 않게 들키지 않고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물론 가끔씩 눈에 띄지 않게 설치된 감시 초소에 걸릴 뻔하기도 했지만 오덕팔이 그려 준 지도를 보고 사각지대로 교묘히 빠져나갔다.
지금 같은 밤에는 뭔지 구분이 어렵게 위장이 되어 있었기에 오덕팔의 도움이 없었다면 발각돼 벌써 비상종이 울렸거나 어쩔 수 없이 처리를 했어야 됐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긴테스와 부하들은 농장에서도 가장 안쪽에 만들어진 한 창고에 도착했다.
“저깁니다.”
요헤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다른 건물과 달리 주위를 화톳불로 환하게 밝히고 경비병 다섯 명이 지키고 서 있는 걸 보면 뭔가 중요한 걸 보관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속하게 처리하고 물건을 확보한다.”
“예.”
짧게 대답한 부하들이 독이 발린 표창을 양손에 하나씩 꺼내 들자 긴테스도 시퍼렇게 날이 선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손을 쓰려는 순간 커다란 고함과 함께 횃불이 여기저기서 켜지며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멈춰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멈칫하며 긴테스가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 포위를 한 건지 완전무장한 병사 수십 명이 창을 겨눈 채 그와 부하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검은색 무복을 입고 검을 뽑아 든 채 병사들 앞에 나와 있던 진성준이 당황한 긴테스를 보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다 끝났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항복해라!”
“제길!”
긴테스가 낮게 욕설을 내뱉자 부하들이 그를 보며 다급히 말했다.
“이제 어쩌지요?”
그러자 긴테스는 이를 악물며 손에 든 단검을 진성준에게 던지며 외쳤다.
“어차피 잡히면 죽은 목숨이야. 이렇게 된 거 힘으로 강행 돌파한다!”
“옛.”
대답과 함께 부하들도 가지고 있던 표창을 힘껏 투척하고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휘이익. 챙!
날아오는 단검을 재빨리 검으로 쳐 낸 진성준은 상대가 항복을 하지 않고 덤벼들자 눈을 날카롭게 치켜떴다.
“부나방 같은 놈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모두 제압해라!”
“와아아!”
채챙! 챙! 챙!
“꾸엑.”
“컥!”
순식간에 양쪽이 한데 뒤엉키며 창고 앞마당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으로 가득 찼다.
과연 막부의 숨은 검이라는 이야기를 듣던 이가 닌자 가문 출신답게 다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져 병사들이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도 쉽게 상대를 제압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닌자들의 무술이 침투와 암살 등에 특화된 거였기에 시간이 갈수록 밀리는 기색을 보였다.
거기다가 이들 못지않은 무술의 고수인 진성준과 주작단 단원들이 가세해 압박하자 금방 수세에 몰렸다.
결국 부하인 요헤이와 후미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치명상을 입은 채 제압당했고 긴테스도 옆구리 깊숙이 검상을 입고 말았다.
“크흑.”
한쪽 손으로 시뻘건 피가 배어나는 옆구리를 감싼 채 긴테스가 주춤 뒤로 물러서자 진성준이 검 끝을 겨누면서 차갑게 말했다.
“포기해.”
“흥! 죽어도 네놈들 손에는 안 죽는다.”
“……!”
불길한 느낌에 진성준이 눈을 치켜뜨자 긴테스가 입을 오물거리더니 뭔가를 깨무는 행동을 했다.
긴테스가 자결을 하려는 걸 알아차린 진성준은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젠장 할! 놈을 잡아.”
진성준이 앞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함께 근처에 있던 주작단 단원들도 긴테스한테 덤벼들었고 상대는 크게 저항을 하지 않고 누군가 휘두른 주먹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지독한 놈!”
벌써 독기가 돌기 시작했는지 눈이 하얗게 뒤집힌 채 긴테스가 거품을 물자 상태를 본 단원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하지요?”
“일단 입부터 벌려!”
소리를 친 진성준은 다급한 마음에 단원들이 움직이는 걸 기다리지 않고 한쪽 다리를 꿇고 앉아서는 쓰러져 있는 긴테스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는 손가락을 안으로 넣었다.
“커. 컥.”
어렵지 않게 이빨 사이에 있던 작은 독약 주머니를 찾아냈지만 이미 절반 이상 삼킨 뒤였다.
얼굴을 구긴 진성준은 재빨리 품속에서 검은색 환약을 하나 꺼내서는 긴테스의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만약을 위해 주작단 단원들이 소지하고 다니는 해독약이었는데 긴테스가 먹은 독약에도 효과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뿐이었다.
“여기 의원이 있지?”
“예.”
“어서 그리로 옮겨라. 배후를 알아내려면 어떻게든 살려야 돼!”
“알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대답한 단원들이 긴테스를 양쪽에서 들어 황급히 의원으로 옮기자 몸을 일으킨 진성준은 고개를 돌려 나머지 두 명의 상태를 살폈다.
큰 부상을 입고 제압당한 요헤이와 후미오는 방금 전 상황을 본 단원들에 의해 자결을 하지 못하도록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살아는 있었지만 피를 많이 흘렸는지 얼굴이 온통 하얗게 창백해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이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인삼 씨앗을 훔쳐 가려던 놈들을 잡아 배후까지 몽땅 다 캐내려던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진성준은 인상을 쓰며 짧게 혀를 찼다.
충격적인 사건에 인삼 농장은 비상이 걸렸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에 퇴근을 하지 않고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던 김상용은 보고를 받자마자 바로 현장으로 달려왔다.
“여기에 있었군.”
초조한 얼굴로 농장 내 치료소 마당을 서성이던 진성준은 단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김상용 지부장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어떻게 됐나?”
다짜고짜 던지는 물음에 진성준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셋 중에 하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었고 독단을 깨문 놈은 의원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 아직 인사불성입니다.”
“중독된 놈이 우두머리라고 했지?”
“예.”
힐끗 앞에 서 있는 진성준 너머에 있는 치료소를 쳐다본 김상용 지부장은 정색을 하며 재차 물었다.
“그놈 살릴 수 있는 거야?”
“그게, 독이 이미 전신에 다 퍼진 상태라…….”
“어렵다 이거군.”
“죄송합니다.”
“거기서 자결을 할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나. 그나저나 배후를 알아내야 되는데 큰일이군.”
김상용 지부장이 고심에 찬 표정을 짓자 진성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왜국에서 건너온 닌자들 같습니다.”
그러자 김상용 지부장은 눈에 이채를 띠며 진성준을 봤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놈들이 쓰는 무술이 왜국 닌자들의 것과 유사했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지난번 왜국 원정 때 저도 참전을 했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때 입에 담기도 송구스럽지만 막부가 국왕 전하를 암살하려고 침투시킨 닌자들과 맞부딪쳐 싸운 적이 있는데 오늘 잡은 놈들하고 움직임이 똑같았습니다.”
“으음.”
뭔가 부족하다는 얼굴을 하자 진성준이 쐐기를 박는 말을 했다.
“그리고 과다출혈로 죽은 자가 마지막 순간에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분명 왜국 말이었다.”
“확실한 거겠지?”
“저뿐만 아니라 다른 단원들도 똑똑히 들었습니다.”
김상용 지부장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럼 막부가 꾸민 일이라는 거야!”
“그렇게 확정짓는 건 아직 성급한 것 같습니다.”
진성준의 말에 김상용 지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쏘아봤다.
“방금 자네가 습격해 온 놈들이 왜국의 닌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만 지금 막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아무리 아국의 인삼이 탐난다고 해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겁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에도 성 바로 옆에 주둔 중인 아군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막부와 맺은 협정에 따라 조선군 수천 명이 에도 성 부근 요새에 장기 주둔 중이었기에 진성준의 말처럼 언제든지 상대의 목줄을 틀어쥘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재 막부는 조선군한테 에도성을 함락당한 이후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각지에서 반란과 항명이 속출해 예전처럼 힘을 못 쓰고 있었다.
한마디로 내부를 추스르기에도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는 거였다.
그런 상태에서 왜국과 청나라를 연파하며 강대국으로 올라선 조선의 콧수염을 뽑는 무모한 짓을 벌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럼 배후가 어디라는 거야?”
“막부보다는 그에 반하는 지방 번주이거나 상단 아님 왜국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삼의 곳일 수도 있습니다.”
김상용 지부장은 낮게 침음성을 흘리며 인상을 썼다.
“음. 결국 원점인 거잖아.”
“…….”
짜증 섞인 김상용 지부장의 말에 진성준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이딴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확실히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배후를 알아내야만 돼.”
“알고는 있습니다만 열쇠를 쥔 놈의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
“다른 한 녀석이랑 술수에 걸려든 오덕팔은 심문을 해 봤나?”
진성준의 회의적인 얼굴로 대답했다.
“오덕팔은 처음부터 이용만 당한 것이고 나머지 한 놈은 부상이 심해 아직 본격적으로 심문을 하지 못했지만 나올 것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끄응. 자결을 시도한 놈의 입을 열어야 된다 이거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는 긴테스가 겨우 생명을 붙여 놓고 있었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정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이대로 사건이 마무리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심하던 김상용 지부장은 뭔가 결정을 내렸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 우두머리라는 놈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고 했지.”
“예.”
“아편을 써서 놈한테 자백을 받아 내도록 해.”
김상용 지부장의 지시에 진성준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까딱 잘못하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배후를 알아내야 되는데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리고 어차피 이대로 놔둬도 죽을 녀석이라면서 그러니 되든 안 되든 모든 수단을 써 봐야지!”
상당히 잔인한 명령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으로라도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야 된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결심을 굳힌 진성준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결정이 내려지자 다음 일은 아주 신속하게 진행됐다.
즉시 치료소 방 안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는 긴테스에게 아편이 투여됐고, 왜국 말을 할 줄 아는 진성준이 직접 그를 심문했다.
처음에는 이가 닌자 가문을 보호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긴테스가 입을 다물고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자 진성준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치사량에 가까울 정도로 아편을 더 먹였다.
그러자 아편에 완전히 취한 긴테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묻는 대로 모든 걸 실토하고 말았다.
무리하게 약을 쓰는 바람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진성준은 배후가 누군지 어느 정도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아낸 정보를 모두 취합한 김상용 지부장은 지급으로 보고서를 한양에 위치한 주작단 본부로 보냈다.
“인삼 씨앗을 훔쳐 가려고 했다니 그게 사실인가!”
도현이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묻자 앞에 앉아 있던 이완 단장 역시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꽝!
손바닥으로 앞에 놓인 서탁을 세게 내려친 도현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누구 짓이야!”
“농장에 침투한 흉수들을 붙잡아 조사한 결과 왜국 이가 닌자인 걸로 판명됐사옵니다.”
지난번 왜국 원정 때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었던 도현은 이가 닌자라는 말에 바로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이에미쓰 이놈이 감히!”
도현이 바로 막부가 이번 일을 꾸민 것이라 생각하자 이완 단장이 신중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막부가 아니라 제삼의 세력이 일을 꾸몄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흉수들을 붙잡아 심문하는 과정에서 로만이라는 이름의 서양 상인에게 사주를 받았다는 자백을 받아 냈다고 하옵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서양 상인이라고?”
“예. 씨앗을 훔치면 동래 왜관을 통해 나가사키로 빠져나가서 넘겨줄 계획이었다고 하옵니다.”
“막부가 관련이 없는 건 확실한 거야? 혹시 우릴 교란시키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잖아.”
“그것도 고려를 해 봤습니다만 지난번 왜국 원정 때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책임 추궁을 받는 걸 두려워한 막부가 이가 닌자 가문을 가혹하게 내팽개쳐서 둘 사이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하옵니다.”
도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가운데 이완 단장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요 몇 년 사이에 인삼의 효능이 알려지면서 서양으로 많이 팔려 나간 걸 고려해 볼 때 서양 상인 가운데 누군가 씨앗을 훔쳐 내 재배를 시도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옵니다.”
“으음.”
낮게 침음성을 내뱉은 도현은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드러난 정보를 하나씩 차분히 정리해 봤다.
그가 생각을 해도 이미 큰 타격을 입고 내부 소요를 정리하기에도 벅찬 막부가 잘못되면 조선과 전면전을 각오해야 되는 일을 벌일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거기다가 정보대로 막부와 이가 닌자 가문이 서로 등을 돌린 상태라면 더욱 아귀가 안 맞았다.
그럼 서양 상인이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인삼을 손에 넣기 위해 일을 꾸민 것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졌다.
이럴 경우 이가 닌자들이 개입된 것은 외모에서 차이가 나는 서양인들이 직접 조선 내로 들어와 씨앗을 훔치기는 어려우니 거액을 주고 의뢰를 했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가닥이 잡힌 도현은 크지는 않지만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 일이라면 일개 상인 혼자서 꾸미기는 어려웠을 테고 영길리와 화란 둘 중에 어딘 것 같나?”
그러자 이완 단장의 사건의 심각성을 잘 알기에 아주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물건을 넘겨받기로 한 장소가 다른 곳이 아닌 나가사키라는 것에서 실마리를 찾았사옵니다.”
“계속해 봐.”
“왜국 유일의 개항장으로 서양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곳이지만 십 년 전부터 막부가 취한 크리스트교 금교와 통상 수교 금지 정책으로 인해 아국과 명나라를 제외하면 포교 활동을 하지 않는 화란 상인만이 유일하게 출입이 허용되고 있사옵니다.”
“그럼!”
“화란 동인도회사가 배후이거나 최소한 화란인이 일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옵니다.”
주작단 수장답게 아주 논리적인 추리에 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거기다가 최근 아국이 대만 북부를 장악하고 영길리 상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걸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침묵하고 있지만, 화란이 심기가 크게 상해 있으니 이런 짓을 벌였을 동기가 충분하지 않겠사옵니까?”
“이놈들을 그냥!”
서탁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움켜쥔 도현은 고개를 들어 이완 단장을 보며 말했다.
“이완 단장.”
“옛.”
“이번에 확실히 버릇을 고쳐 놓지 않으면 언제고 또다시 이런 짓을 벌일 거야. 분명 저 뻔뻔한 것들은 항의를 하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 테니 화란이 그러지 못하도록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확보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시옵소서.”
자신 있게 대답하는 이완 단장의 모습에 도현은 신뢰가 가득한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면서 강한 어조로 지시를 내렸다.
“놈들이 누굴 건드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도록 해!”
“알겠사옵니다, 전하.”
고개를 숙이는 이완 단장의 눈에서는 진한 살기가 감돌았다.
추궁
희정당을 나온 이완 단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본단 간부들을 모두 소집해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가 닌자들에게 일을 맡긴 로만이라는 상인에게 직접 자백을 받아 내는 것이 가장 낫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이완 단장은 김근행을 책임자로 하여 특수조를 꾸리게 한 다음 왜국으로 파견하는 수순을 밟았다.
코를 찌르는 향신료의 냄새.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바다의 짠 냄새와 먹이를 찾아 지붕 위를 선회하는 갈매기들.
국적 불명의 외국어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사내들의 웃음소리와 손님을 유혹하는 상인들의 외침이 모두 한데 섞여 오늘도 나가사키의 항구 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행인들로 북적거렸다.
인종도 성별도 심지어 옷차림새도 전혀 다른 사람들이 활기찬 발걸음으로 오가는 가운데, 별다른 특징 없는 한 중년 사내가 어떤 건물에서 나와 손을 들어 인력거를 잡아탔다.
흥정을 하는 모양인지 인력거꾼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자리에 올라타곤 출발 신호를 보냈다.
인력거가 사람들을 헤치며 어디론가 향하자, 그 뒷모습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두 쌍의 눈동자가 있었다.
“저자입니다.”
길 건너편, 차와 경단 등을 파는 찻집 바깥 평상에 앉아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를 쑤시고 있던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대꾸했다.
“다행히 호위 같은 건 없군.”
“예. 가끔씩 상단 직원을 데리고 다니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지금처럼 혼자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예.”
그의 말에 대답하는 청년 역시 주위에 흔히 지나다니는 왜국인들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늦은 점심을 즐기는 평범한 두 친구처럼 보였지만 실상 이들은 이완의 명을 받고 왜국으로 파견된 김근행과 그 부하였다.
주변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래도 둘은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좋아. 그럼 가 볼까.”
두 사람이 소리 없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먹은 값을 정확히 계산한 동전만이 접시 위에 놓여 작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을 더 지켜보며 목표의 동선을 파악한 김근행은 나가사키에 도착한 지 나흘째 되는 날 작전을 결행하기로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선착장 근처에 위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부에서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한 로만은 신시申時(오후3~5시)가 되자 건물을 나와 숙소로 가기 위해 인력거를 잡아탔다.
덜그럭. 덜그럭.
흔들리는 인력거에 몸을 기댄 채 멍하니 거리 풍경을 바라보던 로만은 원래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를 삐죽 내밀어 주위를 둘러본 로만은 능숙한 왜국 말로 인력거꾼을 불렀다.
“이봐, 이 길이 아니잖아.”
하지만 인력거꾼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가자 로만은 눈가를 찡그리며 화난 어투로 소리를 쳤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야!”
그러자 인력거꾼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천천히 뒤로 몸을 돌렸다.
얼굴을 드러낸 인력거꾼은 바로 얼마 전 김근행과 함께 있던 주작단 단원이었다.
“긴테스라고 알지?”
“……!”
인력거꾼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로만은 흠칫 눈을 치켜떴다.
“깜작 놀라는 걸 보니 네놈이 시킨 것이 맞나 보군.”
“넌 누구냐?”
“조선에서 왔다.”
“뭣이!”
조선이라는 말에 로만은 일이 잘못됐다는 걸 바로 깨달았다.
“다치기 싫으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흥! 미친놈, 내가 얌전히 따라갈 줄 알았냐?”
버럭 고함을 내지른 로만은 몸을 앞으로 일으키면서 감춰 놓고 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기에 혼자 움직이던 거였다.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인력거꾼으로 위장한 사내는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여유로웠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바로 그때 언제 몰래 접근했는지 왼편에서 다른 주작단 단원 한 명이 재빨리 덤벼들어 권총을 든 로만의 손을 세게 내려쳤다.
퍽!
“크윽.”
극심한 고통에 로만은 그만 권총을 놓치고 말았다.
떨어진 권총을 집어 든 사내는 가소로운 얼굴로 금방 퉁퉁 부어오른 오른쪽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로만을 봤다.
“이럴 줄 알았지.”
“워, 원하는 것이 뭐요?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소!”
“그냥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이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지 몰랐지만 로만은 본능적으로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유일한 자위 수단인 권총을 너무나 어이없이 빼앗겨 버린 그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급해진 로만은 주위의 도움이라도 구하려고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질렀다.
“사람 살려!”
“이 자식이.”
그러자 사내가 얼굴을 구겼고 왼편에 있던 단원이 인력거 안으로 뛰어올라 하얀 무명천으로 로만의 입을 강제로 막았다.
“읍. 읍.”
팔과 다리를 거칠게 움직이며 마구 발버둥을 치던 로만은 이내 무명천에 묻혀 둔 약물에 취해 정신을 잃고 축 늘어졌다.
뺨을 때려 로만이 완전히 쓰러진 걸 확인한 사내는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일부러 인적이 거의 없는 후미진 골목길로 들어왔지만 조금만 나가면 번화가였기에 혹시라도 로만의 고함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면 큰일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사내는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짓고는 옆에 있는 동료를 보며 말했다.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고.”
“그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밧줄로 손과 다리를 단단히 묶은 두 사람은 로만을 인력거에서 빼내 미리 준비해 둔 짐마차로 옮겼다.
짐마차에는 나무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열어 정신을 잃은 채 늘어져 있는 로만을 구기듯 집어넣었다.
“으쌰!”
“더럽게 무겁네.”
혹시나 누가 열어 보지 않게 못까지 쳐 버린 두 사람은 인력거를 골목길 한쪽에 버려두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짐마차를 끌며 다시 큰길로 나갔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지나다니는 행인들로 북적거리는 번화가를 느릿느릿 지난 짐마차는 곧장 바닷가에 위치한 선착장으로 향했다.
왜국 유일의 개항장답게 넓은 선착장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각양각색의 선박들이 가득 정박해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조선에서 온 배들도 있었다.
판옥선을 개조해서 만든 조선 상선들은 다른 나라 배들과 확연히 차이가 났는데 봉황상단 깃발을 돛대 위에 높이 매단 배 한 척이 이제 곧 출항을 하려는지 분주히 물건을 선적하고 있었다.
주작단 단원들은 자연스럽게 짐마차를 그쪽으로 몰고 갔다.
그러자 상인으로 위장한 김근행이 두 사람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오며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오면 어떻게 해!”
“아이고. 죄송합니다. 물건이 늦게 도착해서 그만…….”
“에잉. 어서 배에 올리게 저리로 가져가!”
“예.”
허리를 굽실거리며 두 사람이 짐마차를 상선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하자 한쪽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막부 관리가 다가왔다.
“이건 뭐요?”
“아, 예. 조선으로 가져갈 구리괴입니다.”
“한데 왜 지금에서야 오는 거요?”
막부 관리가 트집을 잡자 김근행이 미소를 띤 얼굴로 슬쩍 시선을 가리며 말했다.
“제가 서두르라고 했는데 느려 터져서 이거, 죄송합니다.”
“금수품이 아닌지 확인을 해 봐야 되니 상자를 열어 보라고 하시오.”
“이제 조금 있으면 배가 출항해야 되는데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규칙이니 어쩔 수 없소.”
언제부터 원리원칙대로 일을 했다고 상대가 깐깐하게 나오자 김근행은 소매에서 작은 돈주머니를 하나 꺼내 막부 관리의 품에 찔러 줬다.
“해가 떨어지면 배를 띄우기 어렵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시지 마시고 고생하시는데 이걸로 목이나 축이십시오.”
처음부터 이걸 노렸는지 뇌물을 주자 막부 관리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바로 태도를 바꿨다.
“흠흠.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시는 이러지 마시오.”
“물론이지요.”
“그럼 난 가 보겠소.”
뒷짐을 진 막부 관리가 휘적거리며 수행원들과 함께 선착장을 떠나자 얼굴에서 미소를 지은 김근행이 차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쥐새끼 같은 놈.”
“접장님, 물건을 배에 실었습니다.”
인력거꾼으로 위장했던 사내가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자 김근행은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흔적은 안 남겼겠지?”
“물론입니다.”
“좋아. 시끄러워지기 전에 여길 뜨자고.”
“예.”
몸을 돌린 김근행이 사내와 함께 배에 승선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상선은 닻줄을 끌어 올리고는 천천히 선착장을 빠져나와 먼 바다로 나갔다.
바다로 나오자 김근행은 약에 취한 채 나무 상자에 들어 있던 로만을 꺼내 선실에 가두고는 본격적인 심문을 벌였다.
처음에는 이번 일이 얼마나 파급력이 클지 잘 알고 있던 로만이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며 인삼 씨앗을 훔쳐 오라고 한 걸 부정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고 김근행이 증거를 하나둘 보여 주며 협박하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한번 의지가 무너지자 그다음부터는 붓물 터지듯 아는 걸 전부 다 실토했고 주작단은 이번 사건의 전후 사정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추가로 결정적인 증거들을 몇 개 더 수집한 이완 단장은 며칠 뒤 대궐로 가서 도현에게 최종 보고를 했다.
“그러니까 화란 동인도회사가 꾸민 일이라 이거지!”
엄밀히 말하면 발데 총관의 묵인 아래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중 하나인 로만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거였지만 상대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려는 도현의 의도를 파악한 이완 단장은 굳이 지적을 하지 않았다.
“그렇사옵니다. 사주를 받은 닌자들이 인삼 씨앗을 훔쳐 내면 그걸 자신들의 세력 아래에 있는 남방 섬으로 가져가 몰래 재배하려고 했다 하옵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들이 있나!”
이야기를 들은 도현이 보료를 연신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분을 삼키지 못하자 왼편에 앉아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역시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에 대해 화란 측에 엄중히 항의를 해야 될 것이옵니다.”
그러자 희정당 안에 있던 다른 대신들도 이구동성으로 화란 동인도회사의 행동을 지탄했다.
“총리대신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그냥 있어서는 절대 아니 될 것이옵니다.”
도자기와 자개장, 연필 등 여러 가지 수출품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삼이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고 오직 조선에서만 만들어지는 거였기에 이런 반응은 당연한 거였다.
도현 역시 이번 사건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만.”
손을 들어 대신들을 조용히 시킨 도현은 이완 단장에게 물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정말 확실한가?”
“예.”
“이 사실을 공론화시키면 양국 사이에 큰 분쟁이 일어날 거야. 행여나 상대편한테 책을 잡히는 일이 없어야 될 걸세.”
정색하고 말하는 도현에게 이완 단장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옵니다.”
그런데 이때 상공대신 유형원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전하, 중차대한 일이긴 하오나, 좀 더 사정을 두고 보았다가 판단을 내리시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그 말을 들은 이완 단장이 날카롭게 상공대신을 노려보았다.
“상공대신께서는 우리 주작단의 정보가 미덥지 못하단 말씀이시오.”
“그런 게 아니라, 이번 사건이 끼칠 파장이 막대하니 신중하게 다루자는 것이외다.”
신중론을 제기하는 윤원형에게 또다시 반대 의견이 날아들었다.
“이미 모든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마당에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소?”
그리고 성격이 불같은 국방대신 임경업 장군은 도현에게 직접 호소했다.
“전하, 그들이 다시는 이딴 짓을 하지 못하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 줘야 합니다.”
“국방대신은 무조건 힘으로 다 해결하실 작정이시오? 청나라와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또 병사들을 불러 모은단 말입니까?”
“그럼 상공대신은 그냥 참고만 있자는 소리요?”
“어허, 그러니까 아까부터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고 있지 않소. 일이 막중하니 일단 대화로 먼저 해결해 보자는 것이지요.”
잠시 잠잠했던 방 안이 다시 대신들의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워질 기미를 보이자 도현은 앞에 있는 서탁을 내리쳐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그만하시오!”
서릿발 같은 호령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가 시장 바닥도 아니고, 어찌 이리 경망스럽게 군단 말인가.”
도현은 기분 나쁜 듯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뒤로 비수를 숨기고 있는 자하곤 절대 신뢰를 나눌 수 없는 법. 설사 화란과 전쟁을 벌이는 한이 있어도 이번 일은 반드시 시시비비를 확실히 가릴 것이오. 이게 나의 뜻이니 경들은 그리 알고 계시오!”
“예.”
도현의 결정에 반색을 하는 대신들과 달리 화란 동인도회사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발생할 피해를 처리해야 되는 상공대신 유형원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의 핵심 수출품인 인삼 씨앗 유출 시도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도현의 명령이었기에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국방대신.”
“하교하시옵소서, 전하.”
“힘을 써야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함대를 동원해야 될 테니 총참모부는 그에 따른 계획을 수립하시오!”
“알겠사옵니다.”
대답을 하는 임경업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충분한 응징을 가해 어느 누구도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도록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줘야 되겠지만, 그에 따른 명분을 쌓고 저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이야기를 들어 봐야 될 테니 외무대신은 완도 상관에 있는 화란 측 대표를 불러 이번 일에 대해 추궁토록 하시오!”
비둘기파에 속하는 외무대신 박노는 무조건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여지를 두는 도현의 지시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겠사옵니다.”
그렇게 결정이 내려지자 어명을 받은 선전관이 배를 타고 곧장 완도 상관으로 내려갔다.
아직 일이 모두 다 들통 났다는 걸 모르고 있던 완도 상관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지부는 갑작스러운 소환 명령에 발칵 뒤집혔다.
비상회의를 소집한 지부장 헤나로는 상관 관리소를 통해 전달 받은 소환장을 앞에 두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한양으로 올라오라니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다가 소환장을 줄 때 분위기가 어쩐지 평상시와 달랐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
“무슨 이유인지 조금이라도 짐작되는 것이 없나?”
방 안에 모여 있던 간부들은 헤나로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걸 보며 헤나로가 답답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루고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상인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혹시 그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요.”
“무슨 일을 말하는 건가?”
“인삼 씨앗을 빼내 오기로 한 거 말입니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지은 헤나로 지부장은 자신들밖에 없는데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책망하듯 말했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함부로 입에 담는 건가!”
“하지만 그거 말고는 딱히 조선 측이 소환장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상공부가 아닌 외무대신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으음.”
타당성이 있는 주장에 헤나로 지부장과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행여나 사실이라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기에 애써 부정을 했다.
“이쪽이 드러나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했는데 그건 아닐 걸세.”
“저도 그러기를 바라지만 소환장이 온 것도 그렇고 여태까지 개성에 간 이들이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게 불안합니다.”
“뭔가 사정이 있겠지. 그리고 인삼 씨앗을 훔쳐 내는 것이 쉬웠으면 다른 데서 벌써 수를 썼지 않겠나.”
“맞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잡혔다면 조선 측에서 가만히 있겠소이까? 일이 벌어져도 벌써 터졌을 것이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불길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전부 아닐 거라고 말하자 루고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라면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분위기가 약간 흐트러진 가운데 지부 간부 한 명이 헤나로를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시선을 내려 앞에 놓인 소환장을 쳐다본 헤나로 지부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일단 가 봐야겠지.”
“무슨 용건인지 파악할 때까지 출발을 조금 뒤로 미루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잠시 고심을 하던 헤나로 지부장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날짜까지 명시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그거야 적당히 핑계를 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들통이라도 나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그냥 저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그럼 만약을 대비해서 바타비아 요새에 가 계시는 발데 총관께 연락이라도 해 두시지요.”
“뭐라고 말인가?”
“그냥 사실대로 이런 일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랬다가 별일이 아니면 어쩌려고?”
괜히 문제를 키우는 것 같아 헤나로 지부장이 썩 내켜 하지 않자 간부가 다시 그를 설득했다.
“소환장까지 보냈다는 건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흠.”
팔짱을 낀 채 어찌할지 망설이던 헤나로 지부장은 머리를 들며 말했다.
“어차피 좀 있으면 정기 연락선을 띄울 때가 됐으니 그 편에 편지를 써서 보내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나가사키에 사람을 보내서 은밀히 로만을 만나 일이 어찌 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게.”
“예.”
아닐 거라고 하면서도 헤나로 지부장 역시 마음 한편으로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거였다.
다음 날 배를 띄워 나가사키로 간 루고는 벌써 며칠째 로만이 실종 상태인 걸 알고 화들짝 놀랐다.
워낙 은밀히 진행되는 일이었기에 로만이 뭘 하고 있었는지 까맣게 모르던 나가사키 지부에서는 그가 실종되자 백방으로 손을 써 찾고 있으면서도 정작 바타비아나 완도 상관으로는 연락을 전혀 해 주지 않았던 거였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루고는 바로 완도 상관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헤나로 지부장한테 알리려고 했지만 갑자기 날씨가 안 좋아져서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출발 날짜가 임박해 왔는데도 루고가 돌아오지 않자 헤나로 지부장은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한양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수도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예전부터 전략적인 중요성을 인식해 수군만호를 두고 지켰던 제물포는 도현의 치세에 들어서면서 물류의 중심지로 더욱 성장해 몰라볼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넓은 선착장에는 각지에서 온 배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물건을 하역하고 선적하기 위해 수많은 일꾼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가운데 다른 배들과 달리 뱃머리가 뾰족하게 생긴 서양 범선 한 척이 선착장 한쪽에 도착해 닻을 내렸다.
예전에 발데 총관과 함께 제물포를 방문한 적이 있던 헤나로 지부장은 난간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여긴 그사이에 더 커진 것 같군.”
그러자 수행원으로 온 한센이라는 이름의 상인이 말을 받았다.
“왕성인 한양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가 모이는 곳이니 그럴 수밖에요. 이걸 보면 조선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군.”
확실히 조선이 발전해 나가는 걸 보면 놀라울 정도였다.
인삼과 도자기 등 여러 가지 귀한 상품을 생산해 내기도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왜국을 누르고 청나라를 만리장성 너머로 밀어내며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패자로 우뚝 선 조선은 이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입장에서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국가가 됐다.
그래서 이번 소환 명령이 더욱 그의 마음을 무겁고 복잡하게 만들었다.
“지부장님, 잔교가 설치됐습니다. 이제 내려가시죠.”
“알겠네.”
선장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헤나로 지부장은 수행원들과 함께 잔교를 이용해 배에서 내렸다.
가져온 물건들이 하역되길 기다리며 조금 서 있자 조선 관리로 보이는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헤나로 지부장 되시오?”
“아, 예. 그렇습니다.”
“도성으로 올라가야 되니 어서 마차에 오르시오.”
상당히 퉁명스러운 조선 관리의 말에 헤나로 지부장과 수행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바로 가자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아니, 이제 막 도착했는데 그건…….”
옆에 있던 한센이 가볍게 항의를 했지만 조선 관리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난 내일까지 그대들을 한양 객관으로 데리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오.”
“이것 참.”
꽉 막히고 어쩐지 딱딱한 조선 관리의 태도에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크게 당황스러웠다.
“그럼 짐이라도 다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상대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자 한센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조선 국왕 전하께 진상할 물건들이라 우리가 가지고 가야 됩니다.”
“흠.”
다른 것도 아니고 진상품이라고 하는데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조선 관리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신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최대한 서두르시오.”
“알겠습니다.”
선원들이 화물을 서둘러 하역하는 가운데 약간 떨어진 곳에 서서 감시하듯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조선 관리를 힐끗 보며 한센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지부장님,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러자 아까부터 표정이 굳어 있던 헤나로 지부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느꼈네.”
“정말로 로만이 추진하던 일이 탄로 난 게 아닐까요?”
“…….”
잠시 말이 없던 헤나로 지부장은 경직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섣불리 나서지 말게. 그리고 일행한테도 행동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지시해 둬.”
“예.”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몸을 잔뜩 사린 채 조선 관리를 따라 준비된 마차에 나눠 타고 한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갑갑한 희정당이 아닌 후원 정자로 나온 도현은 따뜻한 봄바람과 함께 파릇파릇 새싹을 틔우고 있는 식물들을 바라보며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벌써 겨울이 다 지나갔군.”
동석해 있던 총리대신 박황이 도현의 말에 정자 밖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옵니다.”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으려면 올해도 농사가 잘돼야 될 텐데 걱정이오.”
“서설瑞雪이 아주 많이 내려 줬으니 풍년이 될 것이옵니다.”
“그럼 얼마나 좋겠소.”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라 살림에서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던 박황은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왜 그러시오?”
“송구스러우나 제가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사옵니까?”
“말해 보시오.”
“화란과 정녕 전쟁이라도 벌이실 생각이시옵니까?”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도현은 박황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되물었다.
“경은 짐이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박황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 이번에 화란이 저지른 일은 용서하기 어려운 큰 잘못이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저들 나라에 군대를 보내 징치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상공대신이 우려하는 것처럼 양국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입게 될 경제적인 손실도 만만치 않사옵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자는 거요?”
“그게 아니오라, 저들을 불러 따끔히 혼을 내기는 하되 무력을 사용하는 건 자제해야 된다는 것이 신의 생각이옵니다.”
“깊숙한 내지까지 들어와 아국의 보물을 훔쳐 가려고 했는데 말로 끝을 내자고?”
화가 난 듯 그가 약간 언성을 높였지만 박황은 물러서지 않고 충언을 계속했다.
“무조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겠사옵니까? 때로는 한마디 말이 수만 군대보다 큰 압박이 될 때가 있사옵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박황에게 도현은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가 관용을 베풀어도 상대가 그것을 쉬이 여기면 그 때는 어찌할 텐가? 때로는 과도한 아량이 모자란 것보다 나쁠 때가 있다는 걸 모를 사람이 아닐진대 답답하군.”
그러나 박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청원했다.
“신 또한 한 가지 길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그들이 아국을 업신여기고 분수에 맞지 않게 날뛴다면 그때는 철저하게 응징하는 것이 옳겠지요. 다만, 먼저 손을 내밀어 베푸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옵니다.”
허공에서 도현과 박황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냉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도현에 반해, 박황의 눈빛은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맑은 호수처럼 잔잔하여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곧은 심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침묵 속에, 불현듯 도현이 정자가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무척 즐거운 듯 무릎을 두드려 가며 웃는 도현의 모습에 박황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아, 미안하오. 총리대신 같은 충신이 내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그만.”
“과찬이시옵니다.”
방금 전까지 주변에 충만했던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마치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총리대신의 충언은 잘 들었소.”
도현은 그제야 웃음을 멈추고 살짝 누그러진 얼굴로 박황을 바라보았다.
“그럼 경의 충언에 따라, 일단 힘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 두도록 하지. 어차피 곧 있으면 저들의 대표가 한양으로 올라올 테니 어떤 변명을 늘어놓는지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은 여흥거리가 되겠군. 그 뒤에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고 모든 걸 결정하겠소.”
“참으로 현명하신 선택이시옵니다, 전하!”
박황은 고개를 숙여 절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딱딱한 이야기는 되었으니 편히 앉아 차라도 즐기시오. 모처럼 이렇게 좋은 날 밖에 나왔는데 즐기지 않으면 아깝지 않겠소.”
그러면서 도현은 따사로운 햇볕이 한가로이 내리쬐는 정자 주변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오늘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바람도 살랑살랑 불고, 정자 아래를 졸졸 흐르는 물소리 또한 청아하니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그렇군요.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박황 또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고 답했다.
받아 든 찻잔에서는 코끝을 간질이는 파릇한 새싹의 향기가 나, 차와 여유를 즐기는 데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듯했다.
한편 도성 내에 위치한 객관에 도착한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다음 날 바로 육조 거리에 있는 외무부 청사로 불려 나왔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관청들이 길게 늘어선 육조 거리는 조선 정치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나라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모든 행정 업무들이 처리됐고 조금만 더 나아가면 상업 중심지인 운종가가 있어 평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원래는 그냥 흙길이었지만 도현의 도성 정비 계획에 따라 지금은 바닥에 두꺼운 박석을 깔아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예전에 예조였던 외무부의 커다란 솟을삼문을 지나 안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로 안내됐다.
대놓고 표시를 내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해서 느껴지는 적대적인 시선에 헤나로 지부장 일행은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실 안 분위기도 상당히 무겁고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덜컹.
“화란인들을 데려왔습니다.”
“들이게.”
“예.”
끼익하고 열린 커다란 방문을 지나쳐 들어가는 순간, 송곳처럼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기다란 탁자 맞은편에 앉아 헤나로 지부장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역관을 대동한 외무대신 박노와 차관인 이척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전에 상관 설치 문제로 몇 번 만나 안면이 있었던 헤나로 지부장의 살뜰한 인사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했다.
보통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거나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전혀 없으니 먼저 입을 연 헤나로 지부장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치를 보다가 일단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외무대신 박노가 선공을 날렸다.
“그대들이 왜 이곳까지 불려 왔는지 아는가?”
앞뒤 다 싹둑 자르고 본론부터 꺼내는 직설적인 화법에 헤나로 지부장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난색을 표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녕 무고하다 여길 만큼 일품인 연기였다.
아니, 실제로 어렴풋이 짐작되는 건 있어도 무슨 이유로 소환장을 받았는지 아는 것이 없었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참으로 뻔뻔한 자들이로군.”
이에 박노가 노골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헤나로 지부장은 억울함과 불쾌함이 반반 섞인 얼굴로 반박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말씀을 해 주셔야 알 것 아닙니까?”
“흥!”
박노는 크게 코웃음을 치고선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과연 그 입을 언제까지 놀릴 수 있을까?”
그러면서 박노는 탁자 중앙을 향해 문서 한 장을 던졌다.
의아한 얼굴로 문서를 받아 들어 앞의 몇 줄을 읽는 순간 헤나로 지부장의 눈에 낭패한 기색이 스쳤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로만의 자백을 정리한 서류로, 화란이 조선의 뒤에서 몰래 꾸미고 있던 일들이 낱낱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내심 절대 이것만은 들키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진 꼴이었으니 헤나로 지부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명백한 증거가 여기 있는데도 계속 잡아뗄 생각인가!”
외무대신 박노의 서슬 퍼런 호령이 채찍처럼 공기를 갈랐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던 헤나로 지부장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수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명색이 아국의 우방이라 하면서 뒤로 이런 치졸한 짓을 꾸몄다니 정말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자들이 아닌가!”
아주 모욕적인 말들을 해 대는데도 불구하고 헤나로 지부장과 한센은 너무나도 큰 충격에 한마디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외무부 청사로 오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인삼 씨앗을 훔치려던 것이 발각됐을 수도 있다는 예상은 했지만, 나가사키에 있어야 되는 로만의 자백서가 튀어나올 줄은 정말 상상조차 못한 거였다.
“자, 어디 변명을 해 보시오.”
박노가 매서운 시선으로 노려보자 헤나로 지부장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애써 이야기를 꺼냈다.
“오해십니다.”
“오해라?”
“예.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적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동인도회사가 아니라 로만, 이 사람이 혼자서 벌인 일입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생각에 헤나로 지부장은 로만의 단독 범행으로 몰고 가려 했다.
하지만 뻔히 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조선 측이 아니었다.
비둘기파에 속하며 가능하면 화란과 대화로 일을 해결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박노였지만 상대가 뻔뻔하게 오리발을 내밀며 관련된 걸 부정하려고 들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맛살을 찌푸린 박노는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내려치며 상대를 다그쳤다.
꽝!
“이미 로만이 화란 동인도회사의 지시를 받았다고 모든 걸 다 털어놨는데 이제 와서 발뺌을 하겠다, 이건가!”
“그게 아니라…….”
“다 필요 없고. 인삼은 아국의 보물로 왕실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품목이자 씨앗은 물론이고 생 뿌리마저 유출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 것을 왜국의 닌자까지 동원해 몰래 훔쳐 가려고 했다는 것에 국왕 전하께서 크게 진노하시고 계시오!”
헤나로 지부장이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박노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듣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요! 이번 사건에 대해서 귀측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이야기를 해 보시오.”
“갑자기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변명은 필요 없다 하지 않았소!”
말을 중간에 자른 박노가 그를 매정하게 다그쳤지만 헤나로 지부장은 사과 말고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한 시진 넘게 상대를 몰아붙인 박노는 일방적인 통보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한 달의 시간을 주겠소. 만약 그때까지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충분한 보상과 사후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아국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오!”
“필요한 조치라고 하시면……?”
잔뜩 긴장한 채 쳐다보는 헤나로 지부장의 시선을 받으며 박노는 단호하면서도 아주 차가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모든 종류의 제재를 가하게 될 것이오. 물론 여기에는 무력 사용도 포함되어 있소.”
“헉!”
“그, 그런…….”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조선 측의 태도에 헤나로 지부장과 한센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대로 내쫓기듯 나온 헤나로 지부장은 어떻게든 조선 정부를 달래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썼지만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누구도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의금부에 잡혀 있다는 로만도 겨우 사정을 한 끝에 면담은 못하고 잠시 얼굴만 확인하는 걸로 만족해야 됐다.
그러면서 로만이 포도청이 아니고 중대한 국사범들을 주로 다루는 의금부에 잡혀 있다는 것에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다.
헤나로 지부장은 즉시 타고 왔던 배를 완도 상관으로 내려 보내서 바타비아에 있는 발데 총관에게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그사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압박하는 조선 측의 첫 번째 제재가 전격적으로 취해졌는데 완도 지역을 관할하는 전라수영 병력이 상관을 봉쇄하고는 네덜란드 상인과 배의 출입을 막았다.
동시에 조선인들의 출입 또한 금지돼 상관 내에서의 모든 상거래가 중단되어 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가져온 상품을 처분하고 인삼과 도자기 같은 조선의 특산품을 구입해 유럽으로 돌아가 팔아야 되는 화란 상인들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수뇌부가 인삼 씨앗을 몰래 훔쳐 내려고 했다가 조선 정부에 발각당했다는 소문이 급속히 퍼지면서 네덜란드 상인들은 반발은 고사하고 불똥이 자신들한테 튈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런 가운데 봉황상단을 비롯해 송상과 만상 등 조선 측 상단들 역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갑자기 거래가 중단되면 손해가 상당했지만 중요한 상품인 인삼을 상대가 훔쳐 내려고 했다는 사실에 공분하며 조정의 지시에 적극 협조했다.
그만큼 인삼이 조선 상단들한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상품이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예전과 달리 네덜란드 대신 영국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면 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영국 상인들이 이용하는 제주 상관이 활기를 띠며 거래가 크게 늘어났다.
이런 가운데 헤나로 지부장이 보낸 편지가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가능하면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했겠지만 조선 측이 제시한 시간이 촉박한 데다 무엇보다 무력 사용을 언급했기에 발데 총관은 어쩔 수 없이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반데볼크 총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어렵게 바타비아 요새를 지켜 내기는 했어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판정패를 당해 침울해 있는 상황에서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에 다들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인삼 씨앗을 빼내려고 했던 거요?”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정색을 하며 묻자 발데 총관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예.”
“아니, 가뜩이나 사정이 안 좋은데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한 거요!”
“영국이 조선과의 교역에 끼어들면서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그걸 만회하려고 하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습니다.”
“그럴 거면 들키지나 말 것이지, 이게 뭐요?”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화가 나고 곤혹스러운 사람이 바로 그였지만 어찌 됐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실수를 한 건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발데 총관은 묵묵히 쏟아지는 질책을 들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요?”
“어떻게든 조선을 달래야 되겠는데 워낙 태도가 강경해서…….”
발데 총관이 말끝을 흐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반데볼크 총독이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건 어떻소? 증거라고 해 봤자 그 로만이라는 상인의 증언뿐이니 단독 범행으로 몰아가면 조선도 계속 우릴 압박하지는 못할 것 아니오.”
로만한테는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그 하나를 희생시키고 이번 일을 묻어 버릴 수 있다면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훨씬 이익이었다.
하지만 발데 총관은 머리를 내저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통보와 동시에 완도 상관을 봉쇄해 버리며 아주 강경하게 나오는 조선의 태도를 보면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거요?”
답답하다는 듯이 이맛살을 찡그린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약간 언성을 높이자 발데 총관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단 적절한 보상을 해 주며 저들을 최대한 달래 볼 생각입니다.”
“하면 동인도회사가 벌인 일이라는 건 인정하겠다는 것이오?”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금전적인 손해는 물론이고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감수해야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정부 입장에서도 국가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거였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발데 총관은 이내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가능하면 그것만은 피하고 싶지만 협상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면 각오를 해야 된다 생각합니다.”
“이보시오, 발데 총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물론입니다.”
발데 총관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자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짧은 탄성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허어.”
그러자 반데볼크 총독이 못마땅한 얼굴로 발데 총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저자세로 나가야 되겠소?”
“총독께서도 조선과의 교역이 동인도회사 매출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굴욕적이지 않소! 하찮은 것들의 눈치를 보며 머리를 숙여야 된다니, 이거 참 자존심이 상해서…….”
발끈해서 툴툴거리는 반데볼크 총독을 발데 총관이 살살 달랬다.
“어찌하겠습니까, 상황이 이리 불리한데. 그렇다고 가뜩이나 영국 상인들이 치고 들어오는 요즘 정세에 조선과의 교역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벌여서는…… 쯧.”
투덜거림을 멈출 기미가 없는 반데볼크 총독의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했지만 발데 총관은 애써 화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점점 과열돼 가는 방 안 분위기를 보고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흠. 발데 총관의 이야기대로 조선과의 교역은 우리로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니 자존심은 잠시 접어 두고 우선 사태를 수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게 좋겠소. 협상은 어떻게 할 것이오?”
도르네바르드 백작의 물음에 발데 총관은 약간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직접 조선으로 갈 생각입니다.”
“하긴 일개 지부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그게 좋겠군. 다른 건 도와줄 것이 없소?”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진지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동인도회사가 타격을 입으면 아국의 남방 경영 전체가 흔들리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하시오.”
“그러겠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식민지 확장과 해상 교역의 첨병이자 중심이 바로 동인도회사였기에 이들이 타격을 받는 건 곧 네덜란드의 몰락이었다.
한시가 급한 발데 총관은 본사에 현재 상황을 알리는 보고서를 보낸 뒤 다음 날 바로 배를 타고 완도 상관으로 향했다.
한편 도현은 수년간의 공역 끝에 드디어 완성된 한양과 부산포 간 가도 개통식에 참여했다.
동시에 마차 넉 대가 마주 보며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만들어진 가도는 바닥을 일명 로마 콘크리트라고 불리는 석회와 화산재를 적절히 섞어서 만든 회반죽으로 깔았다.
그 덕분에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진창이 되지 않고 사람과 마차가 문제없이 다닐 수 있었다.
길이는 무려 일천백 리에 달했는데 이건 아직 긴 터널을 뚫는 기술이 부족해 산을 둘러가는 식으로 가도를 냈기 때문이었다.
시원하게 쭉 뻗은 가도를 직접 걸어 보며 도현은 공사에 참여한 이들을 치하했다.
“아주 멋진 길이 만들어졌군. 다들 수고가 많았네.”
“아니옵니다, 전하.”
도로를 관리하고 만들기 위해 만든 가도청 소속 관리들은 도현의 말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상공대신.”
“예, 전하.”
“그동안 고생한 관리와 인부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내려 위로하고 공이 있는 자들은 푸짐한 상급을 하사해 치하토록 하게.”
“알겠사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상을 내리라는 말에 관리들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공사 중에 크게 다치거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이 많다고 들었네.”
“예. 안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워낙 난공사들이 많아…… 송구스럽사옵니다.”
상공대신 유형원이 고개를 숙이며 죄스러운 표정을 짓자 도현이 가볍게 팔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이런 큰 공사를 하다 보면 다소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불행한 사건을 겪은 이들이니 각별히 신경을 써 줘야 될 게야.”
“그러지 않아도 충분한 보상과 함께 남은 가족들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고 있사옵니다.”
“잘했네.”
힘들고 위험한 일은 대역죄를 짓고 노예가 된 이들이나 청과 왜군 포로들이 도맡아서 했지만 워낙 규모가 큰 공사이다 보니까 일반 백성들도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다치거나 심할 경우 목숨을 잃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발생했고, 이렇게 희생된 이들은 도현이 정한 법률에 따라 나라에서 보상을 해 주고 있었다.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걸 외면하지 않고 하나하나 챙기고 어루만져 주는 도현의 행동에 백성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아무리 치세를 잘한다고 해도 이렇게 대규모 공사를 한꺼번에 여러 개 추진하다 보면 불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었지만 전혀 그런 것 없이 오히려 백성들의 지지는 갈수록 높아져 갔다.
그리고 진시황처럼 자신의 권위를 세우거나 사치를 부리기 위해서 대규모 공사를 벌이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기에 국력이 쇠하기는커녕 더욱 기반이 탄탄해져 갔다.
한쪽에 준비된 대형 천막 아래로 자리를 옮긴 도현은 개통식에 참석한 신하들과 함께 간단히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그대가 공사를 총감독한 도제조라고?”
신하들이 따라 주는 술에 살짝 취기가 오른 도현이 묻자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앞에 선 관리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런 큰 공사를 맡아서 진행한다고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먼. 자! 그런 의미에서 짐이 술을 한잔 따라 줄 터이니 가까이 오게.”
직접 어주를 하사받은 큰 영광에 중년의 도제조는 감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깐 채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받게.”
황공스럽다는 얼굴로 도제조가 양손으로 잔을 내밀자 도현은 칠현이 건네준 주전자를 들어 술을 한가득 따라 줬다.
쪼르륵.
“앞으로도 짐과 나라를 위해 지금처럼 열심히 일해 주길 바라겠네.”
“신명을 다하겠나이다.”
“어서 마시도록 해.”
“예.”
살짝 얼굴을 옆으로 돌린 도제조는 감격한 마음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술을 넘겼다.
그 뒤로도 도현은 가도 공사에 크고 작은 공이 있는 관리들을 일일이 앞으로 불러 치하의 말을 하며 어주를 손수 따라 줬다.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에 임금을 직접 알현할 기회가 거의 없는 하급 관리들은 큰 감명을 받으며 충성심이 커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던 도현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상공대신 유형원을 보며 말했다.
“가도를 이용하면 한양에서 부산포까지 며칠이나 걸리나?”
“마차를 탄다면 넉넉잡아서 나흘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하하. 나흘이라 정말 대단하군.”
회귀 전과 달리 기차나 자동차는 고사하고 말도 귀한 시대였기에 한양에서 멀리 남쪽 끝인 부산포까지 나흘 안에 간다는 건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었다.
막말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양에 한번 가려면 괴나리봇짐에 갈아 신을 짚신을 네다섯 개씩 준비하고 한 달 가까이를 죽어라 걸어만 가야 됐다.
하지만 지금은 오십 리마다 하나씩 역참이 세워져 있고 나라에서 운영하는 여객 마차를 타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손쉬워지면서 자연적으로 상업 발달이 촉진됐다.
여기에 잘 닦인 가도를 이용해서 어디든 반란이나 외적의 침입이 발생하면 중앙에 있는 정예군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가도 하나를 깔아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동시에 얻는 거였다.
“의주와 평양을 잇는 가도는 언제쯤 완성이 될 것 같나?”
“거친 산악 지형이 많아 공사가 쉽지 않지만 이제 곧 날이 완전히 풀리면 정상적으로 작업을 할 수 있을 테니 늦어도 올해 안에는 개통이 가능할 것이옵니다.”
“오호. 그래?”
“그리고 한양과 광주를 연결하는 가도도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완공이 될 것이옵니다.”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군. 앞으로 가도는 나라의 핏줄과도 같은 역할을 할 아주 중요한 것이니 길을 닦는 데 만전을 기하도록 하게.”
“명심하겠사옵니다, 전하.”
궁극적으로 도현은 그 옛날 로마처럼 한양을 가운데 두고 조선의 모든 도시와 마을 들을 가도로 연결하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힘든 계획이었지만 완성이 된다면 수양제隋煬帝가 대운하大運河를 만들어 대륙 남북을 연결한 것처럼 길이 평가될 역사적인 업적이 될 것이다.
물론 수양제처럼 악명이 아닌 현군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될 게 분명했다.
그렇게 개통식을 모두 끝낸 도현은 하급 관리와 인부 들이 편하게 잔치를 즐길 수 있도록 대궐로 돌아가는 왕실 마차에 올랐다.
딸그락. 딸그락.
말발굽 소리에 맞춰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기대고 있던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완도 상관 분위기는 어떤가?”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이완 단장이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여전히 크게 당황스러워하고 있습니다만 저들이 잘못한 걸 알고 있는지 봉쇄 조치에 대한 반발 없이 바짝 웅크린 채 우리의 눈치를 보는 중이옵니다.”
“흥. 당연히 그래야지. 아국 상단들의 피해는?”
“봉황상단을 중심으로 출하 물량을 적절히 조절해 제주 상관에 있는 영길리 상인들한테 좋은 값에 물건 대부분을 넘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인삼이 외부로 유출되면 조정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비교적 협조가 잘됐다고 합니다. 그래도 중간에서 장 총관이 조율을 한다고 애를 많이 썼다고 하옵니다.”
“나중에 따로 불러서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해 줘야겠군.”
“그러시면 크게 기뻐할 것이옵니다.”
“아직까지는 대화에 별다른 진전이 없지?”
“예. 아무래도 헤나로 지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이 되어 있지 않겠사옵니까.”
“하긴.”
“하지만 조만간 바타비아에서 발데 총관이 올 테니 뭔가 제안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완 단장의 말에 도현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발데 총관이 온다고?”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전권을 가지고 이번 일을 해결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정보를 다루는 이완 단장은 도현을 제외하면 조정 대신들 중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실체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예측이 가능했다.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올지도 모르겠사옵니다.”
귀에 익은 이름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현은 이내 누군지 떠올리며 말했다.
“그자라면 예전에 오렌지 공의 전권 대사라고 찾아와 동맹 체결을 요구했던 자가 아닌가?”
“맞사옵니다.”
“아직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나?”
“예. 급작스럽게 터진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귀로가 막힌 것도 있지만 화란 국왕에게 남방 지역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렌지 공이 직접 통치에 나선 건가?”
“그건 아니고 일종의 대리인 격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동인도회사 주도로 이루어지는 식민지 경영에 이제부터라도 간섭을 하겠다 이거군.”
“솔직히 일개 상단이 국가를 대신해 식민지를 운영한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게 사실이었사옵니다.”
모든 것이 군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중앙집권적 사고방식이 강한 조선인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는데 도현도 그걸 알기에 굳이 지적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화란 측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이라 예상하나?”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이완 단장은 신중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동인도회사가 사주한 일이 아니라 의금부에 붙잡혀 있는 상인의 단독 범행으로 몰고 가려 할 것이옵니다.”
“그렇겠지. 그게 덜 부담스러울 테니 말이야.”
“맞사옵니다. 하지만 자국 상인이 붙잡혀 있고 인삼 씨앗을 몰래 훔쳐 가려 했다고 자백까지 한 마당인 데다 무엇보다 아국과 등을 돌려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에 가능하면 많은 걸 양보하더라도 대화로 일을 해결하려 들 것이옵니다.”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며 버티지는 않을 거라는 건가?”
“예. 영길리와의 전쟁으로 남방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던 전력을 거의 다 상실한 지금 아국과 싸움을 벌여 봤자 이길 수 없다는 걸 저들도 잘 알고 있지 않겠사옵니까.”
“전쟁 이후로 화란의 전력 보충이 여전히 지지부진한 모양이지?”
“최근 화란 본국에서 군선 두 척이 도착하긴 했사오나 그 정도로는 바타비아 요새를 방어하기에도 벅찰 지경이옵니다. 거기다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고 해도 바로 코앞에 영길리 함대가 둥지를 틀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면 당분간 바타비아 요새 북쪽 해역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군.”
“그것 때문에 해적들의 노략질이 극심해져 상선들의 피해가 크다고 하옵니다.”
그러자 도현이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국도 피해를 입고 있나?”
“우리들은 중무장한 군선의 호위 속에 여러 척이 선단을 이뤄 움직이기에 아직까지는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만 안심할 상황은 아닙니다.”
“다행이군.”
“해적 이야기가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왜국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사옵니다.”
“각지에서 반막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도현의 말에 이완 단장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보충 설명을 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며 막부가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는 핵심 수단인 참근교대參勤交代마저 거부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사옵니다.”
참근교대란 막부가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고 힘을 빼기 위해 만든 제도로 영주가 가신들과 함께 일 년은 에도에 그리고 다음 일 년은 영지에서 머물게 하는 걸 말했다.
이걸로 영주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두는 것과 동시에 에도를 오갈 때마다 막대한 재물을 쓰게 만들어 지방이 힘을 키울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막부의 핵심 통치 수단인 참근교대제가 흔들린다는 건 곧 도쿠가와 가문을 중심으로 한 왜국식 중앙집권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에미쓰가 골치를 좀 썩고 있겠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또 뭐가 있지?”
“지난번에 있었던 아국과의 전쟁 이후 가뭄과 홍수가 반복해서 일어나는 바람에 현재 왜국의 식량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사옵니다.”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왜국 최대의 쌀 생산지인 에치고 국越後国(현재의 니가타)에서마저 주민들이 먹을 게 없어 나무껍질을 벗기고 유리걸식을 한다 하옵니다.”
“으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도현은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자국도 아니고 바다 건너 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왜 신경 쓰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웃한 나라인 만큼 예전부터 문제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조선에 영향을 끼쳐 왔기에 주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가 되고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린 임진왜란도 따지고 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국을 통일한 이후 넘치는 지방 영주들의 힘을 소모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문제로 인해 조만간 막부에서 사신을 보내올 것 같사옵니다.”
“사신을?”
“그렇사옵니다.”
“곡물 수출을 늘려 달라는 요청을 하겠군.”
“그것도 있고 현재 에도 근처에 위치한 아군의 주둔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할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현은 손등으로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주둔 연장이라…….”
“언제든 반막부군이 결성돼 에도로 진격해 올 수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는 반증일 것이옵니다.”
“경의 생각은 어떤가?”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아국 군대를 왜국에 계속 주둔시키는 것이 좋을지 묻는 걸세.”
이완 단장은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잠시 생각을 해 보고는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다.
“장단점이 있사옵니다. 우선 단점으로는 잘 훈련된 정예병력이 적절히 활용되지 못하고 왜국에 장기간 발이 묶여 있어야 된다는 것이옵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이들이 적진 한가운데 고립되어 아국의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계속해 봐.”
“반대로 아국 군이 왜국의 심장인 에도를 언제든지 노릴 수 있는 위치에 주둔해 있으면서 막부가 허튼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영향력을 끼치는 장점도 있사옵니다. 둘 중 어느 쪽에 무게가 더 쏠리느냐고 물으신다면 신은 막부를 통제하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주둔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도현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짐도 같은 생각이야. 그 문제는 막부에서 사신을 보내오면 다시 조정대신들과 심도 깊게 논의토록 하지.”
“예.”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마차는 대궐에 거의 다 도착했고 도현은 희정당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며칠 뒤 이완 단장이 예상한 대로 동인도회사에서 아시아 지역 무역을 총괄하는 발데 총관이 급히 완도 상관을 거쳐 한양에 도착했다.
조선 측의 강경한 태도에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하던 헤나로 지부장은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상급자의 등장에 반색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굳은 표정의 발데 총관은 지부 간부들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으며 자리에 앉자마자 상황 파악부터 했다.
“로만이 조선 측에 잡혀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예. 그것도 중죄인을 주로 다루는 의금부라는 곳에 투옥되어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아니, 나가사키에 있던 사람이 어쩌다가 조선 측에 붙들린 건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입장에서는 정말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는데 로만만 아니라면 그런 일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겠지만 그의 존재로 인해 관련성을 부정하기가 어려워졌다.
“나가사키 지부에 알아본 결과 얼마 전에 갑자기 실종됐었다는 걸 보면 조선 측에 의해 납치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끄응. 그런 일이 있었으면 재깍재깍 보고를 했어야지!”
“그게…… 로만이 이번 일을 추진 중이었다는 건 비밀이었기에 사정을 모르고 있던 나가사키 지부에서는 미처 그것까지 생각을 못 한 것 같습니다.”
“젠장!”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발데 총관은 각 지부 간에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아 조기에 사건을 수습할 기회를 놓친 것에 짜증이 났다.
“로만이 어디까지 실토를 한 건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헤나로 지부장은 이내 발데 총관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조선 측이 제시한 자백서를 보면 거의 다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전부 다 말인가!”
“예. 완도 상관에서 열렸던 회의 중간에 일이 결정됐고 상관 운영 자금 중 일부를 빼내 지원해 준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면 이미 감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쪽의 행적이 다 노출됐다는 뜻이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얼굴을 와락 구긴 발데 총관은 머리가 아픈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놈을 믿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니 이게 무슨 꼴이야!”
이제 와서 후회를 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최대한 피해를 줄이며 사태를 수습하는 거였다.
“저쪽의 요구 사항이 뭔가?”
“일단 우리가 인삼 씨앗을 몰래 훔치려고 했다는 걸 인정하라는 겁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에 발데 총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안 돼!”
“저도 계속해서 동인도회사가 아니라 로만 개인의 일탈 행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조선 측이 요지부동입니다. 만약 이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협상도 없다며 아주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게 대화의 전제 조건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미치겠군.”
가장 껄끄러운 문제를 상대가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말에 발데 총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요구 조건은?”
“먼저 배후임을 인정하고 조선 국왕한테 사죄를 한 다음에 배상 내용을 제시하라고 합니다.”
“끄으응. 차라리 이리저리 해 달라고 요구를 받는 것이 낫지 정말 골치 아프게 됐군.”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 발데 총관이 한숨만 나왔다.
“상대가 뭘 원하는지 잡히는 것이 전혀 없나?”
“여기저기 끈을 대 알아봤습니다만 아무도 이야기를 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답답하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해 보게.”
“조선 국왕의 분노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어서 웬만한 걸로는 화를 달래기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냥 엄포를 놓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보복을 가하기 위해 함대를 준비 중이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헤나로 지부장의 말에 발데 총관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하, 함대라고 했나!”
“예. 보복에 나서게 되면 목표는 바타비아 요새가 될 거라고 합니다.”
“이런!”
조선 수군의 강력한 전력을 익히 알고 있고 며칠 전 완도 상관에 도착할 때에도 먼 바다에서부터 감시하듯 따라온 치우 급 전함을 보며 위협을 느꼈던 발데 총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영국과의 전쟁으로 전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네덜란드 남방 함대가 조선군을 막아 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굳이 바타비아에 상륙을 하지 않더라도 백여 문 가까이 되는 대포를 탑재한 치우 급 전함이 앞바다에서 포격만 가해도 요새는 쑥대밭이 될 게 뻔했다.
가뜩이나 영국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남방 지역의 해상 교역권을 쥐고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게 조선과의 충돌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신대륙에 있던 식민지를 영국에 빼앗긴 상황에서 향신료 무역 거점인 남방 지역의 패권까지 밀린다면 네덜란드로서는 나라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돼.”
다급해진 발데 총관은 헤나로 지부장을 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조선 측과 만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게.”
“알겠습니다.”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일부러 하루가 지난 뒤 네덜란드 측과 만남을 가졌다.
헤나로 지부장과 함께 외무부 청사를 찾은 발데 총관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조선 측 대표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다시 뵙는군요.”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예를 갖췄지만 반대편에 앉은 외무대신 박노는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별로 안녕하지 못하오. 일단 거기에 앉으시오.”
“아, 예.”
시작부터 냉담한 태도에 발데 총관 일행은 머쓱한 표정으로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잠시 뒤 청사에 속한 여시종이 차를 갖다 놓고 나갈 때까지 양쪽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말 한마디 없이 침묵만 지켰다.
발데 총관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지만 선뜻 먼저 말을 꺼낼 입장이 아니었기에 애꿎은 차만 마시며 상대의 눈치를 봤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더 흘렀을까 외무대신 박노가 그를 쳐다보며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제 이번 사건의 배후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오?”
다짜고짜 민감한 이야기를 꺼내 들자 순간 당황하던 발데 총관은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차분히 말했다.
“우선 본의 아니게 양국 사이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게 돼서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결코 우리가 나쁜 마음을 먹고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석한 역관을 통해 발데 총관의 이야기를 들은 박노는 대번에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 말은 왜국 닌자를 시켜 인삼 씨앗을 훔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건가!”
넓은 회의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박노의 목소리에 발데 총관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동인도회사가 아닌 로만이라는 자가 개인적인 욕심에 저지른 일이라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부디 오해가 없으셨으면 합니다.”
발데 총관이 개인적인 문제로 분명히 선을 그으려고 하자 외무차관인 이척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로만과 직접 행동에 나섰던 왜국 닌자들이 모든 걸 다 실토했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낯짝이 두껍구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도 몇 명 없는 총관 자리에 오를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발데는 초반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던 걸 벗어나 어깨를 펴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왕 우기기로 한 마당이니 얼굴에 철판을 단단히 깔 작정이었다.
그런 발데 총관의 태도에 이척은 기가 막힌지 연신 헛바람을 내뱉었다.
“허어.”
동인도회사의 관련성을 철저히 부인한 다음에 적당히 상대가 혹할 만한 당근을 제시해 조선을 설득하려는 계책이었다.
하지만 나름 고심 끝에 생각해 낸 발데 총관의 계획은 회담을 나서기 전에 도현한테 모종의 언질을 받고 나온 외무대신 박노가 아예 판을 뒤집어 버리면서 허무하게 깨져 버렸다.
“그래서 배후라는 걸 인정 못 하겠다 이건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한 상인 개인적인 일탈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어찌 됐건 우리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던 만큼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그만!”
발데 총관의 말을 중간에 끊은 박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들의 잘못도 인정하지 않고 계속 변명만 해 대는데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을 필요는 없지. 대화는 이것으로 끝이오! 이 시간 이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화란 측에 잘못이 있으니 그렇게 아시오.”
“……!”
반발은 있겠지만 그래도 밀고 당기며 협상을 계속 이어 나가면서 적당히 합의점을 찾으려고 할 거라 생각했던 발데 총관은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상대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이렇게 일어나시면 어쩝니까?”
“아국이 사죄를 요구했는데 그걸 할 수 없다니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는 것 아니오!”
“그래도 양쪽이 툭 터놓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 만족할 만한 합의점을 찾지 않겠습니까?”
다급한 나머지 발데 총관이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는 실수를 하자 그걸 바로 알아차린 박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더욱 강경하게 나갔다.
“몰랐다 시치미를 떼다가 적당히 재물을 던져 주면 아국이 혹할 줄 알았소! 그랬으면 아국에 대해 단단히 오판하고 있었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겠소.”
차갑게 일갈한 박노는 발데 총관의 손을 뿌리치고 조선 측 대표들과 함께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꽝.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자 옆에 있던 헤나로 지부장이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발데 총관을 봤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데 이제 어쩝니까?”
지금 이 순간 제일 곤혹스럽고 정신이 없는 건 바로 발데 총관이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멍하니 문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박노는 그길로 곧장 대궐로 들어가 도현에게 네덜란드 측과 있었던 일을 소상히 보고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군.”
보료에 앉은 도현이 짧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박노가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명하신 대로 강하게 나가기는 했사옵니다만 계속해서 저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실 생각이시옵니까?”
상체를 편 도현은 박노를 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어야겠지.”
“설마 정말로 무력을 사용하실 것이옵니까?”
“가능하면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게 안 될 경우에는 수군을 출정시키는 걸 머뭇거리지 않을 걸세.”
단호한 도현의 어투에 박노는 그냥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거 같으니 이참에 짐의 각오를 보여 주는 것도 괜찮겠군.”
“어쩌시려고……?”
“저들이 타고 온 배가 정박해 있는 제물포 앞바다에서 함대를 모아 놓고 사열식을 거행하는 거야. 마침 새로 건조를 끝낸 치우 급 전함의 시운전이 예정되어 있으니 그걸 겸해서 함포사격 연습까지 같이하면 되겠군.”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치우 급 전함이 백여 문에 가까운 함포를 일제히 쏴 대며 훈련을 한다면 단순한 무력시위를 넘어서 네덜란드 측은 큰 위협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박노가 질린 표정을 짓는 가운데 고개를 돌린 도현은 왼편에 앉아 있는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국방대신.”
“말씀하시옵소서, 전하.”
“방금 말한 것들을 준비할 수 있겠소?”
그러자 아까부터 열기 가득한 눈을 번득이던 임경업은 머리를 숙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옵니다. 이미 통제사가 지휘하는 기동함대가 영종도에서 대기 중이니 하명만 하신다면 언제든 사열식과 훈련을 실시할 수 있사옵니다.”
“좋소. 그럼 당장 통제사에게 명령을 내리도록 하게. 이번 훈련은 짐이 직접 참관할 것이오.”
“알겠사옵니다.”
“그리고 외무대신.”
“예.”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박노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자 도현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당분간 화란 측과의 접촉을 일체 중단하시오.”
“……?”
시선을 든 박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도현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설프게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몸을 바짝 닳게 만든 다음에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소.”
“아, 예. 그러겠사옵니다.”
“후후후. 며칠 뒤 화란 측 인사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되는구먼.”
합의
나흘 뒤.
도현이 지시한 대로 제물포 앞바다에서 대규모 관함식觀艦式이 열렸다.
며칠 전부터 저잣거리에 소문이 돌았고 원래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한민족이었기에 당일 아침이 되자 행사가 열리는 백사장 주변은 몰려온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세워진 행사장 주변에는 친위대와 근위군단 병사들이 전날 밤부터 빙 둘러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예전에 지금처럼 많은 인파가 모이는 개선식에서 도현이 시해를 당할 뻔한 적이 있었기에 이런 경호는 당연한 거였다.
오히려 그 사건 이후 심하다 싶을 정도로 경호에 신경을 쓰게 된 근위군단장 박영식이 백성들을 좀 더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조선 함대의 늠름하고 강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 줘야 된다는 도현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뜻을 꺾어야 했다.
대신 박영식은 네 개 천인대 병력을 행사장 요소요소에 배치해 두고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이런 가운데 한양 객관에 머물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대표들도 관함식 이야기를 듣고는 허겁지겁 제물포에 와 있었다.
“하아. 정말 엄청나군.”
괜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백사장이 아닌 항구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소유의 상선 갑판에서 구경을 하던 발데 총관은 바다 위에 강력한 위용을 뽐내며 떠 있는 조선 군함들을 보며 복잡한 얼굴로 탄성을 내뱉었다.
함께 있던 헤나로 지부장을 비롯한 다른 간부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에 일격을 당해 약간 주춤하기는 하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부와 힘을 가진 해상 패권국이었던 네덜란드이기에 당연히 막강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전력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이들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조선 함대는 그들의 자신감을 꺾어 놓기에 충분했다.
스무 척에 달하는 신현 판옥선들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이들을 주눅 들게 만드는 건 거대한 선체를 자랑하는 치우 급 전함이었다.
서양에서 사용하는 그 어느 전함보다 큰 덩치에 좌우 선체가 전부 포문으로 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많은 대포를 탑재한 이 배는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이미 몇 번 본 적이 있는 발테 총관은 물론이고 상회 간부와 배에 타고 있던 네덜란드 선원들은 엄청난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나 이번 관함식에는 도현의 전용함인 봉황함까지 참가해 치우 급 전함이 무려 세 척이나 바다에 떠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저런 군함이 세 척이나 있다니…….”
“도대체 대포가 몇 개나 달린 겁니까?”
“정말 괴물이 따로 없구먼.”
처음에는 놀란 얼굴로 치우 급 전함과 조선 함대를 쳐다보던 간부들은 점차 감히 대적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해 갔다.
“가뜩이나 전력이 약해진 남방 함대가 저들과 부딪친다면…… 결과는 보나 마나겠군.”
“후우.”
“큰일이야.”
딴에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한다고 했지만 간부와 선원 들의 동요가 발데 총관의 귀에도 들렸다.
그렇지만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그 자신도 조선 함대의 위용을 실제로 목격하자 충격에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막연히 이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걸 눈앞에서 목격하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아직 놀라기에는 일렀는데 더 충격적인 모습이 남아 있었다.
다른 곳보다 높게 단을 쌓아서 올린 귀빈석 왕좌에 앉아 있던 도현은 힐끗 선착장 쪽에 떠 있는 네덜란드 상선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지금쯤 너무 놀라 입을 못 다물고 있겠지.”
그러자 옆에 있던 통제사 손억기가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어깨를 펴며 말했다.
“놀라다 뿐이옵니까. 이제부터는 감히 아국에 대적할 꿈도 꾸지 못하도록 기를 팍 죽여 놓을 것이옵니다.”
“이거 말만 들어도 통쾌하구먼. 그럼 더 시간 끌 것 없이 어서 관함식을 시작하도록 하시오.”
“옛.”
힘차게 대답한 손억기가 손짓을 하자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호수들이 커다란 뿔나팔을 입에 대고는 있는 힘껏 불었다.
부우웅! 부우웅!
넓은 백사장 가득 울려 퍼지는 뿔나팔 소리를 신호로 바다 위에서 진형을 갖춘 채 도열해 있던 수군 군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돛을 활짝 펼친 군함들은 한 척씩 진형을 빠져나와 도현이 있는 귀빈석 앞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정복을 입고 갑판 위에 도열해 있는 장교와 병사 들은 귀빈석을 지날 때마다 도현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군례를 올렸다.
“추~웅!”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군례 소리가 크게 울렸고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크게 뛰고 가슴이 벅찬 모습에 백사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백성들은 군함이 지나갈 때마다 두 팔을 들어 올리거나 목이 터져라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
“멋있다.”
“천세! 천세!”
“대조선국 천세!”
이런 열렬한 반응은 눈에 확 띄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치우 급 전함 세 척이 줄을 지어 지나갈 때 절정을 이뤘다.
커다란 돛대가 세 개나 설치된 치우 급 전함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마치 지금껏 웅크리고 있다가 날개를 활짝 펴며 비상하려는 조선의 도약을 상징하는 것 같아, 지켜보던 도현마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며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뜨거운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열을 끝낸 함대는 다시 조금 떨어진 바다로 나가서 함포사격 시범을 보였다.
첫 주자로 나선 건 신형 판옥선들이었는데 다섯 척이 하나의 대형을 이뤄 길게 늘어서서는 포격 자세를 잡았다.
“수많은 백성들은 물론이고 주상 전하께서도 친히 나오셔서 우릴 지켜보고 계신다.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옛!”
“방포 준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포술장의 지시에 포수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하며 각자 맡은 대포를 쏠 준비를 했다.
평소에도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정예들이었지만 이번 관함식을 앞두고 지난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격 연습을 거듭한 결과 포수들의 움직임에는 약간의 트집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준비가 모두 끝나고 이내 함교와 연결된 전성관을 통해 사격 지시가 하달됐다.
“방포!”
그러자 포술장은 한쪽 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크게 외쳤다.
“쏴라!”
명령과 동시에 횃불을 손에 든 포수가 심지를 당기자 이내 천둥이 치는 듯한 폭음이 울리며 대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꽝! 꽝! 꽝!
금방 매캐한 화약 냄새와 뿌연 연기가 포실 안을 가득 채운 가운데 포술장은 포수들을 닦달했다.
“재장전!”
“어서 서둘러.”
“으쌰!”
그리고 바로 이어서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며 조선 수군의 뛰어난 연사 능력을 보여 줬다.
슈우우웅.
콰꽈꽝!
쿠쿵!
하얀 물기둥이 솟구치며 과녁으로 놔둔 폐선박이 삽시간에 산산조각 나 버리는 모습에 구경하던 백성들은 다시 한 번 박수를 치거나 목청껏 천세를 외쳤다.
“와아아!”
짝짝짝.
“주상 전하, 천세!”
한편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똑같은 장면을 보면서 조선 백성들과 전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포탄에 맞아 박살 나는 폐선박이 마치 자신들의 배인 것처럼 생각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괴물 배도 그렇지만 조선 군함들은 도대체 저 많은 대포들을 다 어떻게 싣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충 세어 봐도 배 한 척당 대포가 서른 문 이상은 있는 것 같습니다.”
“허어.”
당시 네덜란드가 보유한 가장 크고 강력한 군함에 탑재된 대포가 마흔 문 정도인 걸 생각할 때 조선군의 화력은 가히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양측이 맞붙는다면 치우 급은 고사하고 신형 판옥선마저 상대하기 벅차다는 결론에 네덜란드 측은 우려를 감추지 못하며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발데 총관 또한 이들과 다름이 없었는데 무시무시한 조선 함대의 위력 시위에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시아에 저런 엄청난 함대가 숨어 있었다니 우리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나 마찬가지였구나.”
평소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니며 유럽 최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네덜란드와 동인도회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발데 총관의 입에서 이런 한탄 섞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조선군이 보여 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압감을 주는 치우 급 전함이 사격 시범을 끝낸 신형 판옥선들 뒤를 이어 천천히 진형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제 저 괴물 배 차례인 모양입니다.”
“허. 선체를 뒤덮다시피 한 포문들을 보시오.”
“저기서 일제히 대포를 쏜다면…… 으. 생각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킨 간부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면서 발데 총관은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가운데 전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배가 이번에 새로 건조된 건가?”
한쪽 눈에 망원경을 갖다 댄 채 치우 급 군함을 천천히 살펴보던 도현의 물음에 통제사 손억기가 얼른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그동안 축적된 실전 경험과 건조 기술을 바탕으로 선체를 조금 더 키우고 장갑을 두껍게 만들었사옵니다.”
“그럼 무게가 많이 나가는 만큼 속도가 줄어들었겠군.”
“자세히 보시면 선수부에 보조 돛을 추가로 설치해 기동력을 계속 유지시켰사옵니다.”
“호오. 그래?”
설명을 듣고 망원경으로 선수 쪽을 살펴보자 정말 기존 치우 급과 달리 보조 돛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폐선이 아니라 치우 급 전함의 강력한 화력을 보여 드리기 위해 멀리 왼편에 보이는 돌섬을 과녁으로 삼을 것이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앞바다에 위치한 작은 돌섬에 붉은색 대형 깃발이 세워진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거 기대되는군.”
어느새 앞으로 나선 치우 급 전함은 왼쪽 측면을 드러낸 채 사격 자세를 갖췄고 백사장에 늘어선 백성들은 어떤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 줄지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뒤 귀빈석에서 붉은색 삼각 깃발이 흔들리는 걸 신호로 치우 급 전함은 엄청난 굉음을 울리며 일제 포격을 가했다.
콰쾅! 꽝! 꽝!
무려 오십 문에 육박하는 대포들이 한꺼번에 사격을 가하자 그 위력이 얼마나 센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치우 급 전함이 순간 크게 들썩였고 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에 눈이 부셔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였다.
휘이이익! 꽈꽝!
쿠쿵! 쿵! 쿵!
거의 일천 보가 넘는 거리를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들이 떨어지자 돌섬은 삽시간에 뿌연 연기에 휩싸이며 불기둥이 연이어 치솟았다.
시커먼 포연 속에 섬광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고 돌섬을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도 부족했는지 포탄들이 주위에 떨어져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잠시 뒤 안개처럼 뿌옇게 낀 포연이 바람에 흩어지면서 서서히 드러난 돌섬은 폭우처럼 쏟아진 포격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 두 개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 충격적인 모습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정적이 흐르던 백사장은 이내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짝. 짝짝짝!
“우와아아아!”
“최고다.”
“정말 대단해!”
귀빈석에 있던 대소신료들도 차원이 다른 치우 급 전함의 화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도현은 박수를 치며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치우 급 전함의 함포사격 모습은 언제 봐도 감탄성이 절로 나오는군. 특히 목표를 정확히 타격한 수군 병사들의 포격 실력도 최고야! 수군 함대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
도현의 칭찬에 통제사 손억기는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다 전하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신 덕분이옵니다.”
“아닐세. 돈만 준다고 강군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지 통제사와 여러 장수들이 부단히 애를 쓴 걸 짐도 알고 있네. 경들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야.”
사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한 것처럼 별거 아니었지만 도현이 노력을 알아주고 치하를 하자 통제사 손억기는 크게 감동했다.
“황공하옵니다.”
머리를 끄덕인 도현은 다시 시선을 바다로 돌려 천천히 선회를 하며 진형으로 돌아가는 치우 급 전함을 바라봤다.
그렇게 모든 시범이 끝나자 도현은 기분 좋은 얼굴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이런 강한 함대가 바다를 지키는 한 그 어떤 적도들도 감히 아국을 넘보지 못할 것이오! 국방대신.”
“예, 전하.”
“오늘 시범을 보이느라 고생한 장졸들에게 술과 고기를 푸짐히 내려 노고를 위로토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도현의 말에 국방대신 임경업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이번 관함식을 준비하느라 꽤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군부의 사기를 올리고 백성들에게 조선군의 강함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끝까지 인삼 씨앗을 훔치려고 했던 걸 부인하며 버티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측의 기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지금도 서서히 주둔지인 영종도로 돌아가는 조선 함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다들 좀처럼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끝났군.”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발데 총관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헤나로 지부장이 고개를 돌렸다.
“예?”
“조선과의 줄다리기가 끝났단 말일세.”
눈을 동그랗게 뜬 헤나로 지부장은 행여나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설마 이번 사건의 배후가 우리라는 걸 인정하시려는 겁니까?”
“맞네.”
“총관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헤나로 지부장과 달리 발데 총관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뒷감당을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이 사실이 본사에 알려지면 발칵 뒤집힐 겁니다.”
“그럼 자네가 조선군을 상대해 보지 그러나.”
“예엣?”
경악한 외침과 함께 헤나로 지부장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발데 총관이 턱을 까딱였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게.”
“…….”
두 사람 근처에 있던 동인도회사 간부와 선원 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시선은 저 멀리 사라지는 조선군 함대에 고정되어 있으며, 입은 칠칠맞지 못하게 헤벌어진 것이 누가 봐도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조선 국왕이 저리 과시하듯 화력 시범까지 선보였는데, 아직도 모르겠나? 만약 일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즉시 함대를 남방으로 내려 보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자넨 그걸 우리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그건…….”
헤나로 지부장은 말끝을 흐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그 자신도 무지막지한 조선 함대의 화력을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는데 선뜻 나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조선군선에 실린 대포들이 네덜란드 선박을 향해 겨눠진다고 상상만 해도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발데 총관은 헤나로 총관이 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씁쓸하게 말했다.
“전쟁이 벌어진다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우리 네덜란드 함대는 순식간에 무너질 걸세. 아니, 어쩌면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소문이 나,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에 선원들이 지레 겁먹고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지.”
뭐라 반박하고 싶었던 헤나로 지부장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야 말았다.
“처음부터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조선 쪽이었던 거야.”
자조하듯 중얼거리며 이제 수평선 너머로 거의 사라진 조선 함대를 보던 발데 총관은 힘 빠진 모습으로 돌아섰다.
“그만 돌아가세.”
“……예.”
헤나로 지부장과 간부들은 마치 패잔병처럼 쓸쓸한 뒷모습으로 배에서 내려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선착장을 벗어났다.
다음 날.
발데 총관은 조선 측에 만남을 요청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아무리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부탁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조선 측이 기다렸다는 듯 승낙을 하며 그날 오후 지난번과 같이 육조 거리에 위치한 외무부 청사 회의실에서 양쪽이 마주 앉았다.
참석자들의 얼굴에서 이미 승자와 패자가 확연히 갈렸다.
어깨를 펴며 기세등등한 조선 측과 달리 발데 총관을 비롯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아직도 어제 봤던 관함식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힘이 빠진 채 표정마저 굳어 있었다.
“용건이 뭐요?”
외무대신 박노가 딱딱한 어투로 묻자 반대편에 앉은 발데 총관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후우. 본의는 아니었지만 우리 회사가 이번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됐음을 인정합니다.”
눈에 이채를 띤 박노는 일부러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며 되물었다.
“너무 작게 이야기를 해서 못 들었소? 뭐라고 했소이까.”
“으음.”
확인사살을 하는 박노의 행동에 발데 총관은 침음성을 내뱉으며 살짝 눈가를 찡그렸지만 이미 모든 걸 인정하기로 한 이상 괜한 자존심을 세워 봤자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다시 이야기를 했다.
“우리 회사가 이번 사건에 관여됐음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며칠 전 도현이 이야기한 대로 관함식을 보고 겁을 먹은 상대가 백기를 흔들자 박노는 살짝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렵게 큰 산을 넘기는 했지만 아직 해결해야 될 것들이 많았기에 이내 미소를 지운 박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늦게나마 배후라는 걸 인정한다니 좋소. 그럼 구체적으로 아국이 입은 피해를 어찌 보상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여전히 퉁명스러운 조선 측의 태도에 발데 총관은 화가 났지만 이미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발데 총관이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한센이 준비해 온 서류를 한 장 조선 측에 건네줬다.
그걸 받아서 천천히 읽어 본 박노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탕!
“이딴 걸 보상이라고 내놓다니 아국이 무슨 거지인 줄 아시오!”
앞에 있는 탁자를 손바닥으로 세게 내려치며 박노가 호통을 치자 발데 총관이 상대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받았다.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한도 안에서 최선의 제안을 한 겁니다.”
“그게 금화 일만 냥이라는 거요! 그것도 한꺼번에 다 주는 것도 아니고 이 년에 걸쳐서 분할해 상환하겠다니. 인삼 씨앗의 가치가 이것밖에 안 된다니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함대를 끌고 가서 바타비아 요새에 포탄을 퍼부어 주상 전하의 진노를 풀어 드리는 것이 백번 더 나을 것 같구먼.”
이젠 아예 대놓고 협박을 해 대자 어이가 없으면서도 네덜란드 측은 그것이 그냥 협박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막말로 조선 측이 협상을 다 때려치우고 어제 봤던 함대를 바타비아 요새 앞에 끌고 와 대포를 들이밀며 압박을 가한다면 네덜란드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서 협상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발데 총관은 탁자 밑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조선 측에서 원하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잠시 앞에 있는 발데 총관을 쳐다보던 박노는 고개를 돌려 동석한 외무차관 이척을 보며 말했다.
“이 차관.”
“예.”
“그걸 건네주게.”
“알겠습니다.”
이척이 내민 두루마리를 받아 펼쳐 본 발데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해 왔는지 두루마리에는 네덜란드 어로 조선 측의 요구 사항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선 측의 요구는 발데 총관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많았다.
“거길 보면 알겠지만 이번 사건의 배후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걸 공식적으로 밝히고 주상 전하와 조정에 사죄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과 함께 그 피해 보상으로 화란 금화 오만 냥을 일시불로 지급하고 셀레베스Celebes 섬을 아국에 할양해 주시오.”
보상금 액수도 컸지만 땅을 그것도 향신료 무역에서 중요한 지점을 차지하는 셀레베스 섬을 달라고 하니 발데 총관으로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다.”
“뭐요!”
박노가 눈썹을 치켜 올린 가운데 발데 총관이 애써 차분한 어투로 이야기를 했다.
“보상금 액수도 너무 크지만 주요 무역항이 있는 셀레베스 섬을 넘기라니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입니다. 설마, 조선이 향신료 무역에 끼어들려는 겁니까?”
마지막 말에 발데 총관은 유독 힘을 주며 상대를 노려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과의 교역도 중요하지만 향신료 무역은 네덜란드가 막대한 부를 쌓고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 준 핵심적인 사업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향신료가 생산되는 몰루카 제도에 인접해 있으며 일종의 중계지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셀레베스 섬이었기에 발데 총관이 날을 세우며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가 강하게 반발하자 지금까지 고압적인 자세를 보이던 박노가 슬쩍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
“아국은 향신료 무역에 관심이 없소.”
“그럼 왜 이런 요구를 하시는 겁니까?”
워낙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박노가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데 총관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식량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사시사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필요한 것뿐이오.”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에 네덜란드 측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향신료 무역을 노리는 영국의 거센 도전을 막아 내는 것도 힘에 부치는 판국에 막강한 함대를 거느린 조선까지 끼어든다면 네덜란드로서는 현재의 위치를 지켜 내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지정학적 위치상 조선이 직접 향신료를 유럽에 가져가 팔기는 어렵겠지만 무역 전체를 독점하는 것과 단순히 이익 일부를 얻는 데 그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자칫 동인도회사의 존립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 거라면 차라리 대만 중부 지역을 대신 넘겨 드리지요.”
대만 역시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지역을 오가는 데 아주 중요한 곳이었지만 셀레베스 섬보다는 가치가 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한족 이주민들의 반란에 골치를 썩이며 중부 지역은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기에 솔직히 넘겨줘도 큰 손해가 아니었다.
짧은 사이에 여기까지 계산을 끝내고 제안을 던진 발데 총관이 대단했지만 조선 측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번에 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박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반란이 일어나 어지러운 곳을 선심 쓰듯 주겠다고 하다니 너무 뻔뻔한 것 아니오.”
내심 찔끔했지만 발데 총관은 노련한 상인답게 담담한 얼굴로 조선 측을 설득했다.
“조금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조선군이라면 거뜬히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기에는 멀리 떨어지고 정글로 뒤덮인 셀레베스 섬보다 날씨가 온난하고 조선과도 가까운 대만이 훨씬 좋지 않겠습니까.”
“골칫덩이를 은근슬쩍 아국에 떠넘기려는 걸 모를 줄 아시오!”
“셀레베스 섬을 양보할 수 없으니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과를 한다면 응당 이쪽에서 원하는 걸 들어줘야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된다고 하다니 진정으로 아국과 화해를 할 마음이 있는지 의심스럽소이다!”
“그건 조선 측에서 너무 과한 요구를 하니 그런 것 아닙니까.”
“애초에 인삼 씨앗을 몰래 훔치려고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잘못을 인정했지 않습니까?”
“그런 자들이 이렇게 뻣뻣하게 나오는 거요?”
양측의 입장이 워낙 첨예하게 대립되다 보니 서로 날 선 공방이 오갔다.
하지만 지난번하고 다른 점이 있었는데 바로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과 달리 이번에는 조선 측이 끈기를 가지고 상대와 대화를 계속 이어 가고 있다는 거였다.
이것만 해도 큰 진전이었고 협상으로 문제를 풀어 갈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입장 차이가 너무 컸기에 좀처럼 의견이 좁히지 않았고 결국 첫날은 서로의 조건을 확인하는 선에서 협상을 끝냈다.
“어찌 됐나?”
도현의 물음에 협상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희정당으로 온 외무대신 박노가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전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셀레베스 섬을 할양하는 것에 크게 반발을 했사옵니다.”
“저들 입장에서는 향신로 무역을 계속 독점하기 위해서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지역 중 하나일 테니 그럴 수밖에.”
이런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도현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셀레베스 섬 대신 대만 중부를 넘기겠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대만을?”
“그러하옵니다.”
도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발데 총관이 그런 제안을 했다는 건가?”
“예.”
“후후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물이군. 그래서 어떻게 했나?”
“당연히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딱 잘라 거부했사옵니다.”
“잘했네. 한족 반란군 때문에 넘겨받아 봤자 지금은 골치만 아플 뿐이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차차 우리 쪽으로 넘어올 곳인데 구태여 이 좋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버릴 수는 없는 일이지.”
“맞사옵니다.”
여기서 도현이 셀레베스 섬뿐만 아니라 장차 대만을 완전히 수중에 넣으려고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반발이 크겠지만 주도권은 우리한테 있으니 밀리지 말고 과감하게 상대를 압박하도록 하게.”
“네.”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고.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적당히 숨통을 틔워 주는 것도 잊지 말게.”
“알겠사옵니다.”
예전과 달리 단순히 제향祭享을 올리거나 빈객을 맞이하는 일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 크게 세력을 키워 나가는 도현의 치세에 따라 다른 나라와 적극적인 외교 업무를 수행해야 했던 박노는 이제 상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저, 하온데, 전하…….”
“왜, 따로 할 이야기라도 있나?”
“반발이 클 것을 아시면서 왜 처음부터 칼리만탄(보르네오) 섬이 아닌 셀레베스를 요구하신 것이옵니까?”
여기서 또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났는데 도현이 이번 사건을 핑계로 네덜란드 측으로부터 받아 내려는 땅은 셀레베스 섬이 아닌 칼리만탄이었다.
금빛 비단 보료에 앉아 있는 도현은 박노의 물음에 짧게 혀를 찼다.
“쯧. 협상의 기본인데 그런 것도 아직 모르고 있다니 경은 아직 멀었구려.”
“송구하옵니다.”
머리를 숙이는 박노를 보며 도현이 이야기를 했다.
“잘 들으시오.”
“예.”
“경이 화란 측 대표라면 처음부터 칼리만탄 섬을 달라는 것하고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를 했다가 한발 양보하는 척 조건을 바꾸는 것 둘 중에 어느 게 더 잘 먹힐 거 같소?”
그제야 도현의 의도를 파악한 박노는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칼리만탄 섬 역시 화란한테는 중요한 곳이지만 향신료 무역과 직접 연관되는 셀레베스보다는 덜할 것이오. 협상을 이어 가다 상대가 지칠 때쯤 슬쩍 칼리만탄 섬 이야기를 흘리면 상대는 썩 내키지는 않아도 거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게요.”
“역시 대단하시옵니다.”
간단한 심리지만 이것만큼 효과가 확실한 것도 없었고 상대가 눈치를 채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튼 이번 협상은 아국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 행여 잘못되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경이 꼼꼼히 챙기게.”
“염려 마시옵소서.”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도현은 어떻게 협상을 이끌어 갈지 박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보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협상이 계속됐지만 셀레베스 섬 할양 문제에서 걸려 좀처럼 진전이 되지 않았다.
느긋한 조선과 달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졌는데, 다행히 올해 인삼 구입은 끝마쳤지만 완도 상관 폐쇄가 길어지면서 다른 도자기와 나전칠기 같은 조선 상품의 거래가 꽉 막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폐쇄 조치가 내려질 때 상관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네덜란드 상선 여섯 척의 이동까지 제한되면서 배와 선원을 그냥 놀려야 됐다.
이런 식으로 쌓이고 있는 손해가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인 데다 동인도회사 상인들을 더욱 애태우는 건 바로 이 틈을 노려 잉여 물품을 싹쓸이하고 있는 영국 상인이었다.
제주 상관에 터를 잡은 영국 상인들은 조선 특산품들을 몽땅 사들여 유럽으로 가져가 큰 이익을 올렸고 조선과의 마찰을 벌이며 네덜란드가 살짝 위축된 사이 왜국은 물론이고 명나라와의 교역까지 빠르게 확장시켜 나갔다.
아직은 이제 막 대양으로 나온 영국의 능력이 부족해 확실히 치고 나오지 못했지만 이 상태로 가다가는 동아시아 교역의 주도권을 빼앗길 위험까지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 측의 요구를 들어주고 서둘러 협상을 끝내기에는 셀레베스 섬의 중요성이 너무나도 컸다.
결국 발데 총관을 비롯한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네덜란드 측이 머물고 있는 객관으로 평소 거래를 하며 안면이 있던 봉황상단 행수 한 명이 헤나로 지부장을 찾아왔다.
“이거, 바쁜데 제가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중년인이 약간은 어색한 네덜란드어로 이야기를 하자 헤나로 지부장이 손사래를 치며 의자를 내줬다.
“아니오. 그렇지 않아도 답답했는데 잘 오셨소이다.”
“일이 잘 안 풀리시는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조정과 협상을 하고 있다는 건 이미 다 소문이 나 비밀도 아니었기에 헤나로 지부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라도 빨리 상관을 다시 열어 거래를 재개해야 되는데 계속해서 협상이 평행선만 달리고 있으니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소이다.”
“그렇군요. 우리도 완도 상관이 폐쇄되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일 빨리 물량을 제주 상관으로 가져가 영국 상인들한테 웃돈까지 받으며 팔아 큰 이익을 본 걸 알고 있는데 능청스럽게도 상대가 앓는 소리를 하자 헤나로 지부장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상인답게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걱정이 크시겠소이다.”
하지만 빈정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는지 은근슬쩍 뼈 있는 말을 던졌지만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완도 창고에 있던 상품들을 다시 배에 실어 제주까지 옮겨 가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르실 겁니다. 다행히 영길리 상인들이 있어서 그나마 손해를 크게 보지 않고 처분했지요.”
“아, 그렇소이까.”
속이 쓰렸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애매했던 헤나로 지부장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다음 인삼 판매 시기에는 거래를 재개할 수 있겠지요?”
“글쎄올시다…….”
헤나로 지부장이 말끝을 흐리자 상대는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우리야 영길리 상인들한테 물량을 처분하면 되지만 참 딱하게 되셨소이다.”
위로를 하는 건지 아니면 일부러 신경을 긁으려는 건지 도통 감이 안 잡히는 가운데 상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뭡니까?”
딱히 대답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헤나로 지부장은 노골적으로 귀찮은 표정을 짓고 말했다.
“셀레베스 섬을 할양하는 문제 때문이지, 그 외에 달리 뭐가 있겠소.”
그러자 행수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거기라면 그쪽에서도 귀하게 생각하는 곳이 아닙니까?”
“그러니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나도 골치가 아파 죽겠소이다.”
한탄하는 그의 말투에 상대는 동정심이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조선 측에서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어려운 요구를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그만큼 조정이 이 일을 심각하게 여긴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뭐하러 인삼 씨앗은 훔치려 들어서…… 쯧쯧.”
“끄응.”
어차피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꺼내서 후벼 파니 기분이 나쁜 건 당연했다.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본 행수가 슬쩍 미끼를 던졌다.
“셀레베스 섬을 정 포기하기 힘들면 대신할 만한 다른 땅을 조정에 바치는 수도 있지 않겠소?”
그 말에 헤나로 지부장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쉬었다.
“누군들 그 생각을 안 해 봤겠소.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더이다.”
“대체 어디를 주겠다고 했기에 그런 반응이?”
“대만 중부 지역을 넘길 셈이었소.”
“과연.”
행수는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조정 대신들이 바보인 줄 아십니까? 그 지역이 멀쩡한 땅이 아니라는 걸 우리 같은 상인들도 다 알고 있는데 윗선에서 어찌 모르겠소.”
어디 그뿐이랴, 말을 꺼낸 순간 오히려 괘씸죄가 더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대만 중부 말고는 딱히 넘길 땅이 없는데 어쩌란 말이오!”
그 역시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은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어쨌든 그것 참 어렵게 되셨소이다.”
같은 상인으로서 헤나로 지부장이 처한 상황이 안돼 보이기도 해서, 위로의 말을 던지던 행수가 순간 무언가 생각난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지. 거긴 어떻습니까?”
“어디를 말하는 거요?”
“그 왜, 예전이 귀국이 아국과 군사동맹을 맺으려고 했을 때 주상 전하께서 넘겨 달라 하셨던 섬이 있잖습니까.”
잠시 머리를 기울여 생각하던 헤나로 지부장이 퍼뜩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설마 칼리만탄 섬을 말하는 거요?”
“거기라면 주상 전하와 조정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꽤 좋은 생각 아닙니까?”
“하지만 그 섬 또한 우리 화란에겐 중요한 곳인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이 협상 자체가 아예 이루어질 수도 없을 겁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기 싫어하는 게 우리 상인들의 습성이라지만 때로는 각오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행수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리고 향신료 무역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인 셀레베스 섬을 넘기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행수의 제안을 곱씹던 헤나로 지부장은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허둥거리며 일어섰다.
“말씀 잘 들었소이다. 그런데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누가 봐도 어색한 헤나로 지부장의 태도에 행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덩달아 장단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슬슬 가 봐야겠군요.”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그의 모습에 반색하며 헤나로 지부장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급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헤나로 지부장의 뒤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행수가 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누구도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바로 이걸 노리고 도현이 행수를 보내 우연을 가장해서 상대가 칼리만탄 섬을 고려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헤나로 지부장은 그것도 모르고 바로 부리나케 발데 총관한테 달려갔고,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네덜란드 측은 도현의 손바닥 위에서 그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칼리만탄 섬을 대신 넘겨주자고?”
협상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이 많이 상해있던 발데 총관은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렇습니다. 거기라면 조선 측에서 예전부터 관심을 보이던 곳이니 분명 솔깃해할 겁니다.”
“하지만 그곳 역시 남방 지역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거점이 아닌가?”
발데 총관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헤나로 지부장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설득했다.
“물론 그렇긴 해도 향신료 무역의 중계항인 셀레베스 섬을 넘겨주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지금 상태라면 협상이 체결되기 어렵습니다. 상관이 폐쇄되면서 입고 있는 손해도 막심하지만 행여 조선 국왕이 지난번에 본 함대를 정말 바타비아 요새로 내려 보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최악의 사태만은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협상을 벌이는 내내 네덜란드 측이 조선에 끌려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함대 이야기를 꺼내자 발데 총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칼리만탄 섬을 넘겨주는 건…….”
“벌써 완도 상관이 폐쇄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사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손해를 입었는지 총관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손해액이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무엇보다 영국 놈들이 이런 상황을 틈타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겁니다.”
영국 상인 이야기가 나오자 발데 총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애써 만들어 놓은 상권을 영국이 야금야금 파고들며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장 조선과의 거래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네덜란드가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향신료 무역까지 침을 흘리고 있으니 좋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섬을 넘겨준다고 해도 조선은 계속 우리와 협력 관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지만, 영국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생각해 주십시오.”
헤나로 지부장의 말대로 조선이 유럽까지 상품을 가져가 팔려고 하지 않는 이상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이익을 크게 침해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달랐는데 노리는 것이 같은 이상 애초에 공존 자체가 불가능했고 서로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꺼꾸러뜨려야 되는 피나는 경쟁만이 존재했다.
그래도 아무리 영토에 큰 욕심이 없는 네덜란드라고 해도 칼리만탄 섬은 선뜻 넘겨주기에 그 중요성이 너무나도 컸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발데 총관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센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왠지 불길한 느낌에 발데 총관이 묻자 한센이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조, 조선 함대가…….”
“조선 함대가 왜?”
“남방으로 출항을 한다고 합니다.”
“뭐야!”
충격적인 소식에 발데 총관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나로 지부장도 눈을 크게 뜨고는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그게 뭔 소린가!”
“저도 방금 들은 소식인데 지난번에 화력 시범을 보였던 함대가 남방으로 내려간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조선이 정녕 우리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거야!”
화가 난 듯 고함을 내질렀지만 발데 총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었다.
“갑자기 그런 엄청난 전력을 가진 함대를 내려 보내는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경악한 외침을 터트리는 발데 총관을 향해 헤나로 지부장이 말했다.
“이러다가 정말 조선 함대가 바타비아 요새로 가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허어…….”
허탈한 한숨과 함께 발데 총관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들에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가능한 것은 오로지 조선의 의지대로 끌려가는 것뿐.
어찌할 수도 없는 무력감에 참담한 심정을 느끼면서 발데 총관은 헤나로 지부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선 측에 연락해 약속을 잡도록 하게.”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최선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책이라도 붙잡아야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헤나로 지부장의 생각에도 그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서 외무부에 연락을 취하게.”
“예.”
지부장의 지시를 받은 한센이 급하게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묵직한 소리가 마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 더욱 우울해진 발데 총관은 헤나로 지부장을 향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술이라도 한잔 먹고 싶은 기분이로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발데 총관의 얼굴엔 쓰라린 패배감이 가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육조 거리에 위치한 외무부 청사 회의실로 향하는 발데 총관 일행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누구 하나 쉽게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 청사 안을 걸어가는 도중 스쳐 지나간 관리 중 몇 명은 어디서 초상이라도 났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일찌감치 도착한 발데 총관 일행은 조선 측 관리들이 도착할 때까지 초조한 기분으로 기다렸다.
불과 몇 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어찌나 느리게 흘러가는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외무대신 박노를 비롯한 조선 관리들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들의 쭉 뻗은 등과 당당하게 편 어깨에선 감출 수 없는 자신감이 흘러나와, 발데 총관 일행에 비해 마치 빛과 어둠 같은 대조를 이뤘다.
비어 있던 의자에 앉은 박노는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한 연유가 무엇이오?”
잠시 머뭇거리던 발데 총관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귀측에 제안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박노가 팔짱을 끼며 심드렁하게 묻자 발데 총관이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셀레베스 섬 대신 다른 곳을 할양하면 어떻겠습니까?”
“대만 중부는 싫다고 하지 않았소.”
딱 잘라 거부 의사를 밝히자 발데 총관이 한쪽 손을 내저었다.
“거기가 아니라 다른 곳입니다.”
“흐음. 계속해 보시오.”
발데 총관이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한센이 준비해 온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쳤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한곳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 칼리만탄 섬 북부를 넘겨 드리겠습니다.”
상대의 입에서 칼리만탄 섬의 이름이 나오자 눈에서 이채를 띠던 박노는 이내 담담한 얼굴로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섬 전체도 아니고 고작 일부만 떼어 내서 할양하겠다는 거요?”
“그것만 해도 순수하게 면적만 계산한다면 처음 요구하신 셀레베스 섬보다 넓을 겁니다.”
그러자 박노가 다른 걸로 빈정거리면서 딴죽을 걸었다.
“지난번에 군사동맹의 대가로 주상 전하께서 요구하셨을 때는 식민지가 아닌 독립된 왕국이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고 하더니 그사이 상황이 바뀐 모양이오.”
“그건…….”
대답이 궁해진 발데 총관이 말끝을 흐리며 당황한 표정을 짓자 약점을 잡은 박노는 매섭게 눈을 번뜩이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설마 협상만 해 놓고 아국보고 알아서 정리하라고 은근슬쩍 떠넘기려는 속셈인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발데 총관이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박노가 쐐기를 박듯 말했다.
“하면 귀측이 우리한테 할양할 땅을 깨끗이 비워 줄 것이오?”
“……?”
“우리는 농사를 지을 땅이 필요한 것이지 말썽을 피울 사람은 원하지 않소.”
상당히 잔인한 이야기였지만 조선이 할양받게 될 땅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원주민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이들을 강제로 쫓아내야 되니 당연히 지저분하고 피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그걸 네덜란드에 떠넘기려는 거였다.
조선 측의 요구에 발데 총관은 오히려 반색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고 노예 매매는 쉽게 큰돈을 버는 유망한 사업이었기에 원주민들을 잡아들이면 이번 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입은 손실을 어느 정도 메워 넣을 수 있었다.
“좋습니다. 협상이 끝나는 즉시 해당 지역을 우리가 말끔히 정리하지요.”
발데 총관의 대답에 박노는 허리를 펴며 머리를 끄덕였다.
“뭐, 썩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지만 일단 주상 전하께 여쭤 보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시종일관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조선 측과 달리 네덜란드 쪽은 많은 걸 양보하면서도 상대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드디어 원하던 제안을 받은 박노는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곧장 대궐로 들어가 도현을 알현했다.
“외무대신께서 오셨사옵니다.”
밖에서 내관이 아뢰는 소리에 도현은 보고 있던 보고서를 덮고 말했다.
“들라 하라.”
미닫이문이 열리며 방 안으로 들어서는 박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보군.”
박노는 우선 예를 갖춘 뒤 방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역시 전하의 눈은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방금 화란 대표들과 만났는데, 드디어 칼리만탄 섬을 할양하겠다는 말을 들었사옵니다.”
“호오. 그래?”
“봉황상단을 통해 옆구리를 찌르는 방법이 제대로 통한 것 같사옵니다.”
“잘됐군.”
“한데 조금 문제가 있사옵니다.”
“그게 뭔가?”
“섬 전체가 아니라 북부 지역만 할양해 주겠다고 하옵니다.”
박노의 말에 도현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잔머리를 굴리다니 역시 상인답군.”
“어찌할까요?”
잠시 생각을 하던 도현은 크게 상관없다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어차피 칼리만탄을 통째로 받아 내도 그걸 다 감당하기에는 아직 아국의 능력으로는 벅찬 데다 필요한 건 북부 지역이니 적당히 밀고 당기다가 수용하도록 해. 대신 다른 데서 이득을 챙기는 걸 잊지 말고.”
“맡겨만 주십시오. 혼이 쏙 빠져나가게 아주 탈탈 털어 버리겠습니다.”
좀처럼 비속어를 쓰는 일이 없는 박노가 이런 말까지 하는 걸 보니 그도 도현의 성품에 아주 많이 감화된 모양이었다.
“경만 믿겠네.”
‘예.’ 하고 물러나려던 박노가 웬일인지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도현의 물음에 박노는 들썩이던 엉덩이를 다시 방석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협상이 원하는 대로 되고 있으니 함대 출정은 취소시키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당연한 수순이었는데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 순수하게 네덜란드 측을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이제 원하는 걸 얻었으니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
특히나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엄청난 돈을 잡아먹는 것이 군대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운용 비용을 소모하는 함대를 한번 움직이면 들어가는 군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현의 생각은 다른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원래 계획대로 함대를 움직일 것이야.”
“예?”
박노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도현은 차분한 어투로 이유를 설명해 줬다.
“여기서 협상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칼리만탄 섬 같은 전략 요충지를 넘겨주는 일을 발데 총관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렇지요.”
“십중팔구 바타비아에 있는 윗사람들의 허락을 받아야 될 텐데 그자들이 쉽게 승인을 해 주려고 하겠나.”
“아, 그럼 그들을 압박하기 위해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박노가 탄성을 내뱉자 도현은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맞네. 바로 코앞에 아국 함대를 갖다 놓으면 저들도 협정을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게야.”
“역시, 전하의 심계는 따라갈 수가 없사옵니다.”
“아예 화란 대표가 바타비아로 갈 때 아국 함대와 함께 보내는 것도 좋겠군.”
“그러면 확실한 압박이 되겠습니다.”
치우 급 전함을 보고 기겁할 바타비아 요새 주둔군의 모습을 떠올린 도현은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셀레베스 섬 대신 칼리만탄을 할양받기로 하자 양측은 이제 국경선을 어디에 그을 건지를 가지고 밀고 당기는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조선은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 가려고 했고 네덜란드는 그 반대였다.
사흘간 이어진 피 말리는 협상 끝에 칼리만탄 섬을 동서로 가로 지르는 카푸아스 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한 지역을 전부 조선에 할양하기로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금화 이만 냥을 배상금으로 조선 조정에 이 년에 걸쳐서 지급하기로 했다.
전체가 아닌 일부를 할양하는 대신 배상금 액수가 두 배로 늘어났지만, 발데 총관은 칼리만탄 섬 절반을 계속 보유하며 조선이 향신료 무역에 끼어드는 걸 견제할 수 있는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모든 조항에 합의를 본 양측은 영토 할양 문제를 발데 총관이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었기에 최종 서명은 잠시 유보했다.
오렌지 공의 전권대사인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동인도회사 본사의 승인을 받기 위해 발데 총관은 며칠 뒤 바로 제물포를 거쳐 조선을 떠났다.
그런데 바타비아로 돌아가는 발데 총관의 옆에는 치우 급 전함 두 척이 포함된 조선 함대가 동행을 했다.
그로서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조선은 대만 북부에 있는 대남요새에 물자를 수송하고 최근 기승을 부리는 해적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함대를 내려 보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네덜란드 측을 압박하기 위한 것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실제로 조선 함대의 출현에 바타비아 요새는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조선 함대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밝히면서 일단은 한시름 놨지만 발데 총관이 조선과 합의한 걸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거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발데 총관이 가져온 합의서 읽어 본 도르네바르드 백작과 동인도회사 간부들은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지만 항구 앞에 수백 문의 대포를 탑재한 조선 군함들이 떠 있는 상황에서 반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군사력뿐만 아니라 먼저 조선의 보물인 인삼 씨앗을 몰래 훔치려 했다는 명분마저 밀렸기에 결국 도르네바르드 백작은 합의서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고 동인도회사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바타비아 요새 근처에서 대규모 포격 훈련까지 하며 충분히 위력 시위를 한 조선 함대는 유유히 귀환길에 올랐다.
조선 함대는 사라졌지만 산처럼 거대한 치우 급 전함이 천둥치는 소리를 내며 백여 문에 달하는 함포를 일제히 발사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은 네덜란드인들은 좀처럼 공포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이 고스란히 적힌 보고서가 쾌속선에 실려 네덜란드 본국으로 보내졌고 상당한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영국하고 해상 교역 주도권을 두고 피 튀기는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막강한 함대를 보유한 조선과 싸울 수는 없다는 판단에 최종적으로 합의서를 승인했다.
그해 유월 이번 사건의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소환된 발데 총관 대신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한양으로 가서 외무대신 박노와 합의서에 정식 서명을 했다.
이로써 조선은 금화 이만 냥의 배상금과 함께 칼리만탄 섬 북부를 영구 할양받았다.
네덜란드도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막판에 도르네바르드 백작이 협상력을 발휘해 오 년간 바타비아에서 조선 상단의 관세를 완전 면제해 주는 대신 같은 기간 동안 양국이 군사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걸로 네덜란드는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이 함부로 바타비아를 건드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