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of the Fox RAW novel - Chapter 45
45화(完)
“전 선생님, 결혼 축하드려요.”
실로 오랜만에 보는 전 선생님은 눈부신 신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늘 무표정에 뚱한 얼굴이라 몰랐는데, 환하게 웃는 전 선생님의 얼굴은 하얀 백합을 떠올리게 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수줍은 신부의 모습으로 전 선생님은 웃었다. 여태껏 몇 번 결혼식을 다녀온 적 있었지만, 오늘 이 결혼식은 왠지 모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신랑과 신부 둘 다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아까 얼핏 봤는데, 오늘 태수 오빠 되게 멋있더라구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내 말에 부끄러운 듯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전 선생님을 보고 있자니 5년 전, 신월고에서 근무했던 그 짧은 한 달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전 선생님과 태수 오빠가 결혼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때 나에게 유독 까칠하게 굴었던 것도 혹시 그녀가 태수 오빠를 좋아했기 때문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전 선생님이 귀엽게 느껴져 웃음이 터졌다.
“어, 여운아. 와줬구나.”
아직 본격적인 예식이 시작되기 전, 신부대기실에서 나오면 이번엔 태수 오빠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많은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내 손을 붙들고 반가움을 전하는 그를 보며 웃어 보였다.
“이제 유부남이 이렇게 외간여자 손 붙들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하하, 그런가?”
태수 오빠가 쑥스럽게 웃었다. 늘 트레이닝복차림만 보다가 이렇게 단정한 정장에 머리까지 깔끔하게 넘긴 태수 오빠를 마주하니 꼭 그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새신랑 태수 오빠에게선 가만히 있어도 행복이 가득 묻어나는 것 같았다.
“오빠, 행복하세요.”
“그래, 고맙다. 참, 오늘 지호 경기 아닌가?”
“네, 이따 저녁에…….”
말끝을 흐리며 슬쩍 웃는 나를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는 태수 오빠였다.
“역시 둘이 만나고 있었구나.”
“네, 뭐…….”
“지호 한국 들어오면 한번 다 같이 보자.”
태수 오빠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웃었다.
아름다운 커플 한 쌍의 탄생이었다.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전 선생님도 오늘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여린 한 송이 꽃 같았고, 늘 카리스마 있게 아이들을 지도하던 태수 오빠도 긴장과 설렘 가득한 새신랑처럼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혼식 덕에 감독님이나 다른 코치님들과 같은 반가운 이들과도 오랜만에 조우했다. 듣자하니 한 코치는 중간에 큰 사고를 치고 다른 학교로 이직을 한 모양이었다.
전 선생님과 태수 오빠의 결혼식을 내내 지켜보면서 난 끊임없이 상상하게 됐다. 몇 년 후 웨딩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과 내 옆에 서있을 원지호의 모습을.
실감이 안 나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날이 진짜 오긴 할까.
결혼식에 참석했던 백재신은 예식이 끝나자 다시 연습을 하러 갔고, 희수는 수업을 마저 듣고 와야 한다며 간호학원을 잠시 들렀다 오겠다고 사라졌다. 여름방학을 맞아 신월고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훈이는 식후 피로연에 참석한다고 했고, 난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세시. 이제 몇 시간 후면 녀석의 경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시종일관 가슴이 뛰어대는 탓에 경기 시작 전까지 잠을 청할까도 싶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괜한 긴장감에 수다나 떨 생각으로 애리에게 전화를 걸면, 애리는 혼수 때문에 예비 시어머니와 가구점에 왔다며 무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1년 전 내가 결혼에 대해서 물었을 땐, 몇 년 후의 일이라며 사람일은 가봐야 아는 것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던 애리는 이제 두 달 후에 찬희의 아내가 된다. 그녀말대로 사람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라고, 두 사람은 속도위반으로 애를 덜컥 가진 후 촉박하게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인연. 1년 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별로 많이 달라진 것 같지 않으면서도 내 주위의 많은 것이 달라져있다. 참 재밌는 일이다.
* * *
“웬일이야? 누나 너 원지호 경기 생중계로 안 보잖아.”
한껏 의아한 기색이 담긴 백재신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쇼파에 자릴 잡고 앉았다. 재신이. 희수. 훈이까지.
낮까지 다들 개인볼일로 집을 비웠던 그들은 지금 이제 조금 뒤에 시작될 경기중계를 기다리며 치킨에 맥주 캔을 따고 있었다. 긴장감어린 얼굴로 쇼파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훈이가 맥주 한 캔을 내밀었다.
“누나도 드세요.”
“아니야, 난 됐어.”
“왜요? 올림픽은 치맥이 진리죠. 한 잔 해요~”
치맥이고, 나발이고 지금 난 물도 한모금 목으로 안 넘어갈 지경이었다. 티비 화면엔 「20XX 프랑크푸르트 올림픽. 남자 400M 자유형 결선(원지호 선수 출전)」이라는 문구가 떠있었다.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왔다. 나도 이렇게 떨린데, 녀석은 오죽할까.
“야야, 나문희. 너라면 지금 이 치킨쪼가리가 눈에 들어오겠냐? 지금 이 올림픽이 누나한테 그냥 보통의 올림픽이겠냐고~남자친구의 운명이 걸린 건데. 아, 그나저나 원지호 이번에 금 못 따면 어떡하냐? 작년에 워낙 큰 사고들을 쳐서 이번에 못 따면 순식간에 역적 될 텐데.”
백재신은 친구긴 하지만 그래도 남 일이라고 참 속편한 소릴 해댔다. 희수가 내 눈치를 살피며 재신의 옆구릴 쿡쿡 찔렀다. 훈이는 크게 웃었고, 녀석은 잘 해낼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나긴 CF메들리가 끝나고 이번 올림픽 공식로고와 함께 경기가 열리는 커다란 수영장이 화면에 잡혔다.
「네, 여기는 잠시 후 남자 자유형 400M 결선경기가 열릴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 체육관입니다. 해설에는 장주영 스포츠…….」
“어어, 시작한다!”
티비 화면을 가득 메운 체육관 관객석은 만석이었다. 해설위원들이 프랑크푸르트의 현재시각이나, 선수들의 컨디션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카메라는 풀장을 비췄고, 관객석에서는 각나라의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관중들이 보였다. 그중엔 태극기를 들고 원지호를 응원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민들도 눈에 띄었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레 원지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런 존재구나,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아, 긴급 입수된 영상입니다. 경기 전에 사전인터뷰를 여간해선 응하지 않는 원지호 선수의 독점 인터뷰를 저희 SBC에서 어렵사리 따냈습니다. 지금 연결해보겠습니다.」
어리둥절한 마음도 잠시, 화면에는 원지호의 얼굴이 찼다. 태극마크가 가슴에 새겨져있는 올림픽 공식 유니폼을 입고 기자의 물음에 차분하게 대답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원지호 선수, 오늘 컨디션 어떠신가요?」
「좋습니다.」
내 앞에서도 빛나지만, 화면에서 더 빛나는 것 같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인터뷰가 어색한 듯 살짝 웃는 녀석이었다.
「네, 오늘따라 상당히 컨디션이 좋아보이시는데요. 이대로라면 금메달 문제없는 건가요? 하하.」
몇 시간 전에 인터뷰한 걸로 추정되는 인터뷰는 계속해서 원지호의 컨디션이나 경쟁자로 생각되는 선수, 경기에 임하는 소감을 물었다. 리포터의 말대로 긴장이나 초조함이 묻어나지 않는 녀석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번 올림픽이 원지호 선수가 출전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하신다고 공식 발표를 하셨는데요. 아직 스물넷 한창때인데 조금 이른 선택 아닌가요? 아니면 선수생활을 끝내고 뭐, 따로 하고 싶으신 게 있나요?」
기자의 말마따나 스물네 살의, 수영 선수로서의 가장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원지호의 은퇴 발언에 대해서 항간에선 여전히 말이 많았다. 궁금증에 내가 원지호에게 물었던 적도 있다. 왜 그렇게 빨리 은퇴를 하느냐고.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그에 대한 녀석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쉼 없이 달려왔고, 그만큼 해볼 만큼 다 한 것 같다고. 이제 더 이상은 수영에 미련이 없다고도 한 것 같다.
리포터의 물음에 문득 녀석이 장난스레 웃었다.
「하고 싶은 일은 있습니다.」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결혼하고 싶네요.」
그와 동시에 “꺄악!”하는 비명 아닌 비명이 어디선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앞집이나 옆집에서도 원지호의 인터뷰를 생중계로 보고 있는 듯, 문을 열어놓아 소리가 고스란히 넘어오는 모양이었다. 그에 ‘오올, 결혼~’하며 나를 쳐다보는 백재신의 반응에 얼굴이 빨개졌다.
생각지도 못한 원지호의 발언에 리포터는 당황한 듯했고, 카메라 플래쉬가 팡팡 연달아 터졌다. 이 와중에도 녀석은 태평하게 웃었다.
「아아, 그럼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대고 하고 싶은 말 해주시길 바랍니다.」
코치 측에서 무어라 말을 하자,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듯, 리포터는 다급한 목소리로 원지호에게 마이크를 내밀었다. 그에 마이크를 잡고 카메라를 지그시 응시하는 녀석. 그에 마치 원지호가 내 눈앞에서 나를 그대로 쳐다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지금 바로 내 앞에 있는 것만 같다.
한참 동안 카메라를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던 원지호가 문득 씩 웃었다.
「돌아갈게.」
돌아갈게.
「너를 위해.」
너를 위해.
「오늘 내가 딸 메달…… 네 거야.」
“미친놈. 연애하는 거 겁나 티내네.” 백재신이 고갤 절레절레 흔들었고, 희수는 “어머, 어머”하며 나보다 더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난 정신이 멍해져서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어머, 언니 어떡해요! 어쩜!”
“미친 것 같은데, 멋있긴 하네. 하여튼 저 새낀 옛날부터 멋있는 건 혼자 다 해먹는다니까.”
“누나, 지호랑 결혼해요?”
호흡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얼빠진 얼굴의 나를 세 사람이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난 그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친 듯이 뛰는 이 심장박동을 잠재우는 데에만 급급할 뿐.
그와 동시에 영상이 바뀐 티비 화면에는 이제 경기장으로 차례대로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1번 레인에 벨기에 선수, 2번 레인에 중국 선수. 3번 레인에 미국 선수, 그리고 4번 레인에 그가 나타났다.
「4번 레인에 대한민국의 원지호 선수가 등장합니다! 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선수죠. 신장 187cm에 현재 스물네 살입니다. 사실 너무나도 유명한 선수지만, 그래도 짤막하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원지호 선수는 서울 신월고등학교 출신이구요, 자유형 부문 세계 신기록 보유자인 미국 다니엘 브랜든 코치 밑에서 꾸준히 지도받아왔습니다. 이 선수는 재작년 아시안게임과 작년에 있었던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에 빛나는 아주 유능한 선수죠. 그러다 보니 이번 올림픽 원지호 선수에게 거는 국민적 기대가 굉장히 높은데요, 이번 경기를 끝으로 은퇴한다고 공식발표해서 국민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자, 마지막 경기이니 만큼 오늘 이 경기가 아주 기대가 되는데요, 과연 오늘 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우리 대한민국의 애국가가 울려 퍼질 수 있을지 한번 기대를 걸어보겠습니다.」
나는 시야가 흐려지고, 너무 긴장이 돼서 제대로 화면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입술을 깨물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내 옆에 없어도 그 순간, 네가 보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가 날 더 강하게 만드니까.’
그가 했던 말처럼, 내가 보고 있다는 이 보잘것없는 작은 사실 하나가 너에게 전달되길. 그래서 하루빨리 네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길. 여전히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내 마음을 알아주길.
해설위원이 긴장어린 목소리로 중계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잡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열어놓은 유리창 사이로는 여름밤의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고, 향긋한 아카시아 꽃내음이 바람결을 타고 들어왔다.
「자, 이렇게 모든 선수의 소개를 마치고…… 이제 어떻게 보면 운명적인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데요. 자, 정말 긴장되는 순간입니다. 아, 지금 제 눈앞 거의 10m 거리에 원지호 선수가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여름밤의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끈적거리는 바람.
왠지 너를 닮은 것 같은 그 여름 바람이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린다.
「자, 스탠바이…….」
너는 알고 있을까.
「출발했습니다!」
너를 지독히도 닮은 그 여름 바람에, 나는 이 여름이 앞으로도 끝나지 않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을.
뜨거운 태양빛에 녹아내릴 것 같았던 여름. 때로는 시원한 가랑비가 며칠째 계속되던 여름. 초록의 나뭇잎들이 햇살에 반짝거리며 눈부시게 빛나는 여름. 결코 지치지 않고, 생동감 넘치는 그 계절, 여름.
그 여름을 닮은 네가 내 옆에 있는 한, 나의 여름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여우의 여름.
여운의 지호.
그리고 그 뜨겁고, 눈부시도록 찬란했던 날들을 기억하며.
외전그 해 여름. 1
한국의 여름은 미국의 여름보다 덥고 습했다. 쨍쨍한 태양빛이 강렬하지만, 그늘 밑은 선선하고 여름철에도 꽤 선선한 LA와 달리, 한국은 찌는 듯한 무더위와 살갗에 닿는 끈적임이 적응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날은 그 무더운 여름철의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고, 그 날은 그가 죽고 싶었던 날이었으며, 그리고 그 날은 지호가 여운을 처음 본 날이기도 했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감히 어디서…… 건방진 것. 너도 니 애미처럼 죽어봐. 누가 눈 하나 깜빡할 줄 알아?’
온갖 난리를 피우던 그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최 여사의 한 마디였다.
아버지에게 맞아 터진 입술보다도, 제 분에 못 이겨 유리창을 깨버린 오른손보다도, 저 한마디가 더 아팠다.
그래도 조금은 미안해할 줄 알았다. 생활고에 우울증으로 죽어버린 생모에게 조금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그 생모의 아들 앞에선 미안한 척 연기라도 해줬으면 했다.
미국에 있을 때, 생모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로 인해 늘 집안에서 감돌았던 불편한 기류의 원인을 파악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스스로 감당하기엔 벅찬 상처였고, 9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여전했다. 아니, 더 잔인했다.
“다 좆같아.”
지호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태웠다. 지금쯤 그의 주 종목인 자유형 경기가 한창이겠지만, 안으로 들어가 출전할 생각은 없었다. 오늘 경기에 안 나가도 어차피 자신은 수영 특기자로 한국의 어느 유명한 체육고등학교에 입학할 터였다. 큰 형님이 그렇게 손써둘 테니까.
아버지는 수영하는 것을 싫어하시지만, 큰 형님은 은연중에 자신이 아예 수영 쪽으로 나가길 바라고 있다는 걸 그도 안다. 물론 그를 위해서는 아니다. 그렇게 돼야 나중에 재산권 분할 싸움에서 자신이 별 미련 없이 물러설 것이라고 예측하는 철저한 계산에서 나오는 호의 혹은 거래였다.
“다 그만두고 싶다.”
애초부터 관심도 없었다. 돈을 둘러싼 밥그릇 싸움이나, 칼을 등 뒤에 숨기고 돈 앞에 무릎 꿇는 가식적인 사람들. 가족 간의 온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한 저택 따위도. 이젠 그냥 다 버겁기만 했다. 다 그만두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지금만큼은 그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인 수영마저도 버겁게 느껴졌다.
잠깐이지만 그는 이대로 죽는다면 어떨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해보았다. 손목을 그을까, 투신을 할까. 그것도 아니면 목을 맬까. 어느 방법이 가장 아프지 않고, 편안히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대신 그는 어느 방법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을 줄지 생각하던 때였다.
“어? 아…….”
누군가 옥상에 오르다 벤치에 앉아있는 지호를 발견한 듯, 조금 당황스런 얼굴로 멈춰 섰다. 하늘색의 우산을 쓴 어느 여자 한 명.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의 여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 *
여운은 아침부터 입이 댓 발 나온 상태였다. 여름방학 전부터 친한 친구들 몇 명이서 세웠던 휴가 계획. 가까운 캠핑장으로 1박2일 놀러가기로 하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코피 터지게 기말고사를 준비했다. 그 간절한 열정으로 성적도 올리고 겨우 허락까지 받아냈는데, 하필 휴가를 떠나는 날이 재신의 소년체전이 있는 날일 줄이야.
어차피 재신은 누군가 자신의 경기를 보러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오늘만큼은 친구들과 놀러 가면 안 되겠냐고. 오랫동안 학수고대해온 계획이라며 거의 울먹이기까지 했는데,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운은 반드시 자신과 재신을 응원하러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이번 체전에 재신의 앞으로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르는 고등학교 선발이 걸려있는데, 누나가 돼서 오늘 같은 날, 놀러가고 싶다는 말이 나오냐며 핀잔까지 들었다. 엄마의 아들사랑은 어릴 때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만큼 그게 억울하고 서글프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
결국 엄마의 손에 이끌려 체전이 열리는 체육관까지 따라왔건만,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운의 마음은 온통 지금쯤 캠핑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친구들에게 가있었다.
기집애들, 비도 오는데 기어코 오늘 갈 줄이야.
장마라고는 하지만, 거의 가랑비에 가까운 가벼운 빗방울에 그마저도 드문드문 내리고 있다. 여운은 차라리 폭우가 쏟아졌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거라 탄식했다.
예선은 이미 치렀고, 이제 조금 있으면 남자부 자유형 본선경기가 열린다는 말에 여운은 바깥으로 나왔다. 엄마에겐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 말했지만, 다시 들어가 경기를 관람할 생각은 없었다. 여운은 오는 듯 마는 듯 마치 분무기처럼 내리는 비 오는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챙겨온 우산을 꺼내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으로 못 올라가게 막아놨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는 길목의 계단에는 진입금지 팻말이 없었다. 아니, 없다기 보다는 누가 치워놓은 듯 밑으로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예전부터 남들이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던 그녀이기에, 잠깐 머뭇거리던 여운은 그대로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누가 고의로 팻말을 떼어버린 건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그녀가 한 일은 아니다. 나중에 걸려서 왜 들어갔냐 추궁이라도 하면,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다.
하지만 출처 모를 호기와 반항심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그녀는 옥상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그 씩씩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아…….”
누군가 있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한적하고 텅 빈 옥상에는 이미 누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다 젖은 채로.
“비 오는데…….”
왠지 이상한 사람 같다. 이 날씨에 우산도 안 쓰고 비를 다 맞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도 없는 옥상에 혼자 앉아있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눈 마주쳤는데 피하지도 않아.
잠깐이지만 여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단을 내려가는 게 어떨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서 호기롭게 옥상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그 행동을 후회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담배까지 피우고 있을 줄이야. 거기다가 점점 가까워지는 그녀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은 무서우리만큼 텅 비어있었다.
여운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의 얼굴. 추워서 그런 건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얀 얼굴에 서늘한 눈. 거기다가 무겁게 닫힌 입술은 붉기까지 하다. 매혹적이리만큼 눈에 띄는 얼굴이지만, 그보다도 남자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하고 어두운 포스에 여운은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위험하다. 위태롭다.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선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서서 지호를 쳐다보던 여운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인근 중학교 교복이라는 것에 놀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뭐야, 중딩이었어?”
성인 남자. 아니면 아무리 어려도 또래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의 생김새를 갖고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분위기나 눈빛. 그래, 저 눈빛. 고작 중학생 주제에 저렇게 세상 다 살아버린 눈을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지.
그래도 자신보다 어리다고 생각하니, 여운은 왠지 그가 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해봤자 사춘기 중딩에 비행 청소년이리라. 이미 재신의 방황기를 뼈저리게 겪었던 그녀는 더 이상 치기 어린 비행 청소년의 패기 따윈 겁나지 않았다. 여운은 꺼지라고 욕이라도 하면 어쩌지, 속으로 생각하며 겁먹었던 방금 전의 모습을 까맣게 잊고 어느덧 지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재건중 다녀?”
원래 여운은 딱히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누군가와 친해지는 데에도 적정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토록 그녀가 대담하게 말을 건넨 것은, 지호에게서 남동생인 재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한창 재신이 엇나갈 때가 떠올랐다.
보아하니 나이도 얼추 맞는 것 같고, 얼굴에 난 상처들이나 반항적이고 무심한 얼굴도 그렇고. 무엇보다 오른손에 감겨있는 저 붕대까지. 답 나왔다. 여운은 역시나 사춘기 중학생이 치기 어린 반항을 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며,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손은 왜 그래?”
“…….”
“아팠겠다.”
재건중을 다니냐는 물음에도, 손이 왜 그러냐는 물음에도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독히도 무심한 얼굴로 대꾸도 않는다.
잠깐 당황한 여운은 싸움질을 하다 손을 다쳤다고 대답하기가 창피해서 그런 거라며 혼자 결론짓고서 우산을 들어 그의 위로 씌워줬다.
뭐하냐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 남자가 여운을 올려다봤다.
“다친 데에 물 들어가면 안 아물어.”
한때 내 동생이 많이 그러고 다녀봐서 알아.
그래, 자신이 생각해도 뭔 오지랖인가, 싶지만 왠지 눈앞의 그를 잡아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사는 곳도, 아무것도 모르는 난생처음 보는 남자애에게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여운을 쳐다보던 지호는 피식 웃으며 고갤 돌렸다. 지호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였겠지만 그 웃음에 비로소 여운은 마음이 놓였다.
“너도 수영하는 애야?”
역시나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운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젠 아예 벤치 옆자리에 앉기까지 해서.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축축하게 젖어들었지만 그런 것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딱 보니까 사춘기 방황기 같은데……맞지?”
이 누나가 다 알아, 인마.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힘내고 정신 똑바로 차려. 어차피 네 인생이야. 네가 안고 가야 한다구.”
재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 동생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뭐가 그렇게 힘든지,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는 몰라도, 네가 안고 가야하는 삶인데 스스로를 포기하진 말라고.
물론 이 말을 하기 전에, 재신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기에 입 밖으로 내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네가 제일 불행하고, 네가 제일 심각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우스워질 거야.”
여운은 그의 상처를 상상도 못할 것이고, 타인 주제에 남의 인생에 참견할 권리는 없었지만 그냥 뭐든 말해주고 싶었다. 온몸으로 슬퍼하는 것 같은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지호가 물끄러미 여운을 쳐다봤다. 여전히 표정이 읽히진 않았지만, 여운은 그를 향해 생긋 웃었다.
“나 원래 이렇게 오지랖 떠는 성격은 아닌데…… 네가 내 동생 같아서 해주는 말이야. 미친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경계 안 해도 돼.”
장난스레 농담까지 건넸건만, 지호의 표정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통성명도 안 했네. 넌 이름이 뭐니?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나 알자.”
머쓱해진 여운이 서둘러 말을 돌렸는데, 지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눈으로 앞만 응시할 뿐.
아니, 이쯤 됐으면 이제 ‘고마워요, 누나. 열심히 살게요-’까진 아니라도 뭐라 말이라도 한 마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너 혹시 말할 줄 모르니?”
순간이지만, 눈앞의 남자애가 벙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 여운이었다. 여전히 지호에게선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결국 민망함에 어쩔 줄 모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여운의 귀로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냐.”
여운은 잘못 들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 대뜸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니. 심지어 중딩 주제에 저렇게 낮게 깔린 목소리로.
“뭐?”
여운이 되물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머쓱해진 그녀가 더듬더듬 천천히 말을 이었다.
“글쎄…… 천국 가지 않을까?”
여운은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그가 물은 질문에 어떤 대답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름 고심 끝에 한 대답에 지호가 피식 웃었다. 왠지 시니컬하게.
“kill myself라도?”
“자살…… 말하는 거야?”
지호가 대답해달라는 듯 여운을 직시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여운은 진땀이 나오려고 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크 포스로 저런 걸 묻다니.
“그렇다고 해주라.”
“응?”
“자살해도 천국 간다고.”
그 순간, 소년의 눈에서 보이는 간절함에 여운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독하게 가라앉은 눈에, 잠긴 목소리에 엉겁결에 여운은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지호는 한층 마음이 놓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상한 남자애. 그보다도 여운은 자꾸 이상한 쪽으로 생각이 되고 있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너 자살하게?”
처음 옥상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지던 남다른 다크 포스도 그렇고, 처음으로 입을 열어 한다는 말들도 그렇고. 눈빛에서도 아무런 생기가 읽히지 않아 여운은 덜컥 겁이 났다.
“그러면 안 돼. 그러면 큰일 나.”
“…….”
“너, 자살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너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은? 가족들이나, 부모님. 그래, 낳아준 부모님께 그건 엄청난 불효야.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그리고 네 친구들도 얼마나 슬프겠니?”
자살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달래는 방법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다. 여운은 난생처음 맞닥뜨린 낯선 상황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초조한 기색으로 허둥대며 그를 만류할 뿐이었다. 막상 당사자인 지호는 무심한 무표정으로 일관하는데, 놀란 쪽은 여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둥지둥 눈앞에서 혼자 당황하는 여운을 묘하게 쳐다보고 있던 지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없으면.”
“응?”
“나 죽어도 슬퍼할 사람 없으면, 죽어도 되는 건가?”
여운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무 진지한 눈으로 저렇게 묻는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어째서 자신의 가슴이 이렇게 쿵 가라앉아버리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지호가 여운을 지그시 쳐다봤다.
“내가 슬플 거야.”
“…….”
“그러니까 그런 말, 차마 입에도 올리지 마.”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여운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저 오늘 처음 본 이 낯선 남자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째서 이렇게 눈물이 터져버리는 걸까.
어느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는 여운을 지호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차마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듯, 멍하니 앉아있는 지호를 빨개진 눈으로 쳐다보던 여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이만 가볼게.”
“…….”
“그런데…… 널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죽지 말라는 말을 돌려서 한 말이었다.
처음 본 사람에게 이렇게 과하게 감정이입을 했다는 사실이 왠지 부끄러워진 여운은 붉어진 얼굴로 쭈뼛거리다가 자리를 떴다. 점점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여운의 뒷모습을 지호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천천히 입구쪽을 향해 걸어가던 여운이 멈춰서더니, 뒤를 돌았다. 지호와 눈이 마주친 여운이 큰 결심을 한 듯, 다시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거 써.”
“…….”
“감기 걸려.”
그리고 우산을 지호에게 건네는 여운이었다. 조금 민망한 듯 그와 눈도 못 마주치는 여운을 지호가 말없이 올려다봤다. 그 집요하리만큼 직선적인 시선에 당황한 여운은 재빨리 뒤를 돌았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아마 없겠지만, 그가 부디 죽지 않고 행복해지길 바라며. 적어도 저렇게 공허한 눈으로 혼자 비를 맞고 있지는 않길 바라며.
그렇게 여운이 옥상을 빠져나가자, 다시 혼자 남은 지호는 손에 쥐어진 하늘색 우산을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이상하네.”
자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자살을 해도 천국에 갈 수 있냐는 물음은 자신의 모친을 생각하며 던진 것이었다. 이상하게 저 여자애가 하는 말이면 다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미 그의 곁을 떠난 엄마가 하늘에서라도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사정을 모르는 여운은 그가 죽을 결심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한참을 이상한 소릴 해댔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서 조금 더 장난을 쳐본 거고. 그런데 빨개진 눈으로 한참을 허둥대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지호가 피식 웃었다.
“날 얼마나 안다고…….”
내가 죽으면 지가 슬플 거래.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지. 거기다가 따뜻하기까지 하다. 거의 난생처음 느껴보는 것 같은 사람의 온기에 지호는 기분이 묘해졌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사람. 또래 아니면 기껏해야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자애가 했던 말들이 왜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지. 다시는 볼일이 없다는 게 왠지 아쉽다. 그녀의 말대로, 널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호는 여운이 준 우산을 들고 한참 동안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었다. 그 이상한 여자애의 얼굴을 떠올리며.그 해 여름. 2
쉬지 않고 레인 왕복을 4번 이상 하면, 말 그대로 숨이 턱 끝까지 찬다. 이럴 때면 지호는 때때로 자신이 수영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야, 오늘 우리 집 갈래?”
지호와 함께 쉬지 않고 레인 왕복을 마친 재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됐어, 새끼야.”
집에서는 이미 눈 밖에 난 자식이고, 가족들과의 사이는 최악을 달린다. 그것을 대충 눈치로 짐작하고 있는 재신은 종종 지호를 자신의 집에서 재워주곤 했다. 집에 가봤자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아는 재신의 배려인 걸 알지만, 영 내키지 않는 지호였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건 질색이다.
“어차피 우리 집 오늘 비어. 누나 년은 대학 가서 자취하고, 엄마 아빠는 지금 대구에 집 알아보러 내려가셨거든. 애들 불러서 놀자.”
“너 누나도 있었냐?”
“응, 한 명. 올해 대학 갔다.”
“이뻐?”
장난 섞인 지호의 물음에 재신이 피식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지호 역시 가볍게 웃으며 고갤 돌렸다.
결국 재신의 말대로 불타는 금요일의 홈 파티를 벌이게 된 집에는, 아이들이 북적거렸다.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일탈 아닌 일탈을 즐기는 그들 사이에 얼마간 끼어있던 지호는 숨길 수 없는 피로에 2층으로 올라섰다. 역시나 사람 많고, 시끄러운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계단을 타고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들려오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피곤해서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어딜 들어가야 할지를 몰라 고개를 돌리던 지호는 테라스 옆에 나있는 방 앞에 서서 노크를 두어 번 했다. 역시 예상대로 아무도 없는 듯했다. 들어가도 되나, 싶어서 잠시 멈칫하던 그는 천천히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재신이 말했던 누나의 방인 듯, 여자 방 특유의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방. 지금은 여기 안 산다는데, 깔끔하고 잘 꾸며진 방은 빈방 특유의 썰렁한 한기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지호는 의자에 앉아 있다가 책상 위의 작은 액자를 발견했다.
“……백여운. 여운…….”
고등학교 졸업 사진인지, 명찰을 단 교복을 입고 있는 여자애 사진. 긴 머리의 청순한 분위기. 그러면서도 끝이 살짝 올라간 눈은 묘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익숙하다. 재신과 조금 닮아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해보지만,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얼굴에 지호는 더 뚫어져라 액자 속 여운의 얼굴을 응시했다.
* * *
그렇게 지호가 한참 동안 액자 속 여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예정에 없이 본가로 들이닥친 여운은 눈앞에 닥친 난관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 네가 여긴 웬일이야?”
뻔뻔도 유분수지, 하나뿐인 동생이라는 작자는 현관에 덩그러니 서있는 자신을 보며 저런 말이나 씨부리고 앉아 있다.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얻고서 부터는 좀처럼 드나들지 않았던 집이고, 그렇기에 오랜만에 보는 재신이었지만 그는 여운을 보며 어떤 반가움의 기색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은 듯, 왜 또 왔냐는 타박의 뉘앙스였다.
순간 기분이 상한 여운은 확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재신의 이런 비행을 알리려다 말고, 애써 태연하게 집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그토록 열렬히 짝사랑했던 혜준과 사귀게 된 날이기에 이 설렘과 즐거움을 변질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누님!”
날 언제 봤다고 대뜸 누님이래?
사실 누님 말고 또 마땅한 호칭이 없다는 걸 알지만, 여운은 괜히 모든 게 다 꼬여 보였다. 하나같이 멀뚱멀뚱 일어서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재신의 친구들을 보며 대충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서둘러 2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노는 건 좋은데, 뒷정리는 꼭 하고 가라고 신신당부를 남긴 채.
하지만 진짜 복병은 다른 데에 있었다. 1층까지는 용납할 수 있다. 얼마나 시끄럽게 놀든, 엉망진창으로 해놓든 그냥 안 내려가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2층, 그중에서도 자신의 방에 침범한 낯선 이를 보는 순간, 여운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심지어 불도 켜지 않은 채 내가 들어온 줄도 모르고, 제 방인양 의자에 앉아 책상 위를 구경하고 있는 남자애라니.
“흠, 흠.”
대뜸 나가라고 소릴 지를까, 싶었지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 서둘러 불을 키고 인기척을 냈다. 그제야 누군가 들어온 걸 알았는지 의자를 돌려 뒤를 쳐다보는 지호와 여운의 눈이 마주쳤다.
“…….”
그리고 여운과 눈이 마주치자 얼어붙은 지호였다.
“재신이 친구니?”
숨이 멎을 만큼 잘생긴 얼굴에 여운은 저도 모르는 사이 나긋나긋하게 묻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낯선 이방인은 대답도 않고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을 정도로 빤히.
“내가 이 방 주인인데…….”
좀 나가달라는 함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말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지호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 어. 그래…….”
큰 기럭지에 떡 벌어진 어깨. 삼각 김밥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한 바람직하고 균형 잡힌 몸에는 아마 복근도 있으리라. 뭐, 그래도 여기까진 수영을 하는 재신 또래 남자애들 대부분이 그러니까 별 감흥 없다. 그런데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얼굴도 모자라서 낮은 목소리까지. 이런 남자는 분명 어디서 본 적이 없을 텐데,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여운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쉬세요.”
지호는 그 한마디만 남겨놓고 방을 나갔다. 아까 지호가 여운을 쳐다봤던 것처럼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쫓던 그녀는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어디서 본 적이 있나?”
그럴 리 없을 텐데. 내가 저렇게 잘생긴 남자를 한번 보고 잊을 리가 없다. 아니면, 연예인 누구를 닮았나.
짧은 만남이었지만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지호의 얼굴을 떠올려보다가, 여운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좋아해마지않던 혜준 오빠와 사귄 첫날인데 다른 남자 얼굴 보고 가슴 떨리면 쓰나. 그녀는 서둘러 머릿속 지호의 얼굴을 지워버리고, 휴대폰을 꺼내 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저예요…… 아니, 나야.”
* * *
사진으로 봤을 땐, 낯익다 정도의 느낌뿐이었지만 실제로 여운을 마주한 순간, 지호는 온 세상이 멈춘 것만 같았다.
방문에 기대 간간히 들려오는 여운의 목소리를 들으며, 지호는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남자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듯 애교 섞인 목소리로 연신 수줍어하는 여자.
분명 그 여자다. 그때 그 여자. 2년 전 여름, 자신의 마음 깊숙이 들어왔던 그 여자. 그 사이 머리스타일도 바뀌고, 얼굴에는 옅은 화장기도 있었지만 분명 그 여자가 맞다.
대회에 나갈 때도 좀처럼 긴장하지 않았던 그인데, 여운을 알아본 지금 지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 이름이 백여운이었구나.”
어떻게, 이름까지도 예쁘지?
그때 그녀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이름도 채 묻지 못한 것을 얼마나 후회했던가. 다시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때 그 장소를 찾았건만, 단 한번도 그녀를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잊혀져 갔다. 아니, 잊혀졌다 생각했다. 그저 스쳐지나갈 여름 바람 같은 인연이라 생각하며, 그때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그 따뜻하고 상냥한 마음을 안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다치지 않고 잘 살길 진심으로 바랐었다.
“네 말대로 됐네.”
널 보는 게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다니.
여운은 그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았지만, 지호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 걸 기억했으면 쪽팔려서 죽고 싶었을지도.
그렇게 지호는 한참 동안 여운의 방문에 기대 서있었다. 2년 전 그 해 여름 그에게 다가왔던 그녀를 떠올리며.
왜인지, 자꾸만 웃음이 나는 그였다.그 해 여름. 3
올해도 어김없이 초여름의 장마가 시작됐다.
“좆같은 날씨네.”
비를 싫어하는 지호에게 장마는 결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었다. 그가 비를 싫어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하진 않지만, 비 오는 날씨에도 강행했던 전지훈련에서 호되게 당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 빗물이 발목에 튀는 것도 짜증난다. 사방이 우중충한 것도, 습도가 올라가는 것도 모두 마음에 안 든다. 그렇게 비를 싫어하는지만, 매년 여름마다 장마가 찾아올 쯤이면 지호는 절로 여운을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무슨 생각하길래 실실 쪼개?”
창밖을 쳐다보다 말고 갑자기 피식거리는 지호가 이상하다는 듯, 쇼파에 앉아 리모컨을 돌리던 재신이 한마디 했다.
“너네 누나 생각.”
“야, 원지호.”
“농담이야, 새끼야.”
3년 전, 여운과 지호의 첫만남을 알 리 없는 재신은 여운에 대한 지호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다. 재신에게 지호는 친구로서는 괜찮지만, 남자로서는 영 별로인 타입이었다. 비단 희수 일뿐만이 아니라, 저 좋다는 여자애들에게도 무심하고 차가운 걸 넘어서 짓궂기까지 한 지호는 나쁜 남자 타입에 가깝기에 순진하고 여린 누나의 짝으로는 영 마뜩잖다.
언젠가부터 여운에게 노골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지호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여운에겐 혜준이 있을뿐더러 여운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는 재신이기에 여운이 매니저 일을 하겠다는 것도 기꺼이 눈감아준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여운이 먼저 지호에 대해서 묻는 경우도 있었기에, 재신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야, 지호야.”
“왜.”
“우리 누나는 안 된다. 알지?”
농담 반, 진담 반 뉘앙스의 말에 지호는 피식 웃었다.
여운에 대한 지호의 관심이 단순히 호기심 그 이상은 아닐 거라 지레짐작한 재신은 도대체 지호가 여운의 뭐에 꽂혔는지도 궁금했지만,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저 여운에 대한 지호의 관심을 애초에 끊어버리는 게 가장 현명한 방책일 것이다.
“백재신.”
“…….”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거 모르지.”
“야, 너!”
“이것도 농담.”
항복한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인 지호가 재신을 향해 씩 웃었다.
하여튼 저 맘에 안 드는 새끼. 재신은 지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오늘 여운이 반찬통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혜준의 자취방으로 향한 걸 알기에, 집에 그를 데려온 것이다. 요즘 본가에서 거의 나와 살다시피 하는 지호를 알지만, 여운이 집에 있는 한 그를 자주 데려오기는 아무래도 힘들다. 친한 친구인데 너무 매정한 게 아닌가, 싶어서 슬며시 미안한 마음도 드는 재신이었다.
“야, 여기 근처에 편의점 있냐?”
“편의점은 왜?”
“담배 떨어졌어.”
“꼴초 새끼. 좀 끊어라.”
재신의 타박에도 지호는 씩 웃을 뿐이었다. 재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갤 흔들며 편의점 위치를 설명했다. 10분쯤 걸어서 큰길까지 나가야 하고,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있다며 재신의 설명을 듣고서 지호는 집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 편의점으로 향하는 도중, 지호는 반바지 트레이닝복 밑의 무릎과 다리에 튀는 빗물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인상을 찡그려 잠깐 멈춰서있던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습관처럼 고쳐 쓰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빨리 사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재신의 말대로 편의점은 집에서 10분정도 떨어진 큰길가,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둘러 담배 두 갑을 사들고 밖으로 나왔는데, 버스 정류장에 미동 없이 앉아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오는 길에 얼핏 봤을 때도 아무런 기척 없이 앉아있던 여자. 잠깐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곧 귀찮다는 듯 정류장을 지나치던 지호의 걸음이 멈췄다.
더 이상 다니는 버스도 없을 만큼 늦은 시각, 아무도 없는 버스 정류장에 죽은 듯이 앉아있는 여자. 고개를 숙인 채로 쫄딱 젖어있는 옷차림. 거기다 구두까지 벗은 한쪽 발은 보기 흉할 만큼 퉁퉁 부어있기까지 하다.
지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왠지 모를 이상한 느낌에 천천히 다가가는 와중, 그녀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기분 나쁘게 쿵쾅거렸다.
“…….”
어느새 그녀 앞에 선 그의 우산에서 툭 투둑 불규칙적으로 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기척에 고개를 든 여자는, 분명 여운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늘 따뜻하던 얼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항상 생기 넘치던 눈빛은 텅 비어있고, 얼마나 비를 많이 맞은 건지 머리카락에선 물까지 뚝뚝 떨어진다.
할 말을 잃고 서있는 지호를 알아본 여운의 눈이 잠깐 커지더니, 이내 곧 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싸늘하게 식어있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울컥 원인 모를 뜨거운 화가 치미는 지호였다.
이 여자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참고 있는 걸까.
지호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화를 간신히 참고, 여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빗물이 발목에 닿는 것조차 싫은 그인데, 다리가 더러운 흙탕물에 젖어 들어가는 것도 모르는 채 여운의 발을 들여다보는 지호였다.
“아아…….”
지호가 조심스레 만진 발뒤꿈치가 쓰라린 듯, 신음을 내는 여운이었다. 신음도 크게 내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일이 있는 듯, 여운의 목소리에는 힘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순간, 3년 전 아무렇게나 붕대를 감고 있던 자신의 오른 손을 보며 여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팠겠다.”
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여운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참아왔던 가슴 속 응어리가 밖으로 터져 나온 듯, 아이처럼 서럽게도 우는 여운을 보며 지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발은 또 왜 그런지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물을 수도 없었다.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울고 있는 그녀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 말없이 담배만 태울 뿐이었다.
“다신 안 할 거야…….”
한참을 오열했던 여운이 웬만큼 진정된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신 사랑 같은 거 안 할 거야…….”
텅 비어버린 공허한 눈으로 앞을 응시하는 여운이 안쓰럽다. 쳐져있는 저 작은 어깨를 안아주고 싶고, 생기를 잃은 눈도 예전처럼 따뜻함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누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호가 여운을 불렀다.
“잘해줄게요.”
왜인지 이 여자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지 않도록. 다치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눈물만 참고 있지 않도록.
“사귈래요?”
그렇게 시작된 여름밤의 인연.
그 날은 지호와 여운이 함께 맞는 세 번째 여름철의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고, 그 날은 여운이 지난 사랑에 배신을 당했던 날이었으며, 그리고 그 날은 지호가 여운을 사랑하게 된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까진 지호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여운의 존재가 어느덧 자신의 안에서 그렇게 커져있었는지. 여운을 향한 그의 감정이 그저 관심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지. 그의 눈동자 안에 가득 찬 이 여자를 평생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마저도.
-외전, 그 해 여름.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