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reincarnated genius RAW novel - Chapter 88
088. 어느 미술가의 영감 (2)
“흐으으음!”
쭉 늘어난 치즈를 피자에 돌돌 말아 한입에 밀어 넣는 이호익.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던 양한길이 피자 위에 얹어진 파인애플을 툭툭 골라내며 물었다.
“그래서 호익이 넌 어디 갈지 생각 좀 해봤어?”
“난 아무래도··· 안 갈 것 같아. 대학교.”
“그럼?”
“글쎄. 고민 좀 해보려고. 넌?”
“난 갈 수 있는 과 가서 취업 준비해야지.”
“지극히 평범한 루트네.”
“정석적이라고 해줄래?”
“그래, 확실히 정석적이지. 얘네들에 비하면.”
우물거리던 이호익이 포크로 옆에 앉은 두 사람을 가리켰다.
······나와 채이연이었다.
그러자 양한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낀다. 뭔가 이상한 걸 발견이라도 한 듯, 날 보며 물어왔다.
“근데 넌 왜 여깄냐?”
“못 있을 곳이야?”
“평소에 밥 먹자 해도 항상 작업실로 뛰어가니까 그런 줄 알았지.”
서운한 듯 퉁퉁거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교수님 뵙기로 했는데, 배고플 것 같아서.”
아아. 양한길이 주억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녀석의 시선이 멈춘 곳엔 피자를 내려다보며 군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있는 채이연이 있었다.
“넌?”
“응? 나? 나도 오늘 따로 일정이 없어서.”
“아니, 그거 말고. 왜 안 먹어.”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축축하게 젖어 뚝뚝 떨어진다.
“······오늘은 우울한 목요일이거든.”
“우울한 목요일?”
이호익이 스파게티를 국수마냥 들이켜며 툭 말했다.
“채이연 얘, 수요일이 치팅데이거든. 연예인이잖아. 식단 관리해야지. 스피타도 식단을···.”
“응, 알았어. 먹어 먹어.”
양한길이 피자 조각 하나를 더 떠서 이호익 접시에 턱 하고 올렸다. 비로소 조용해진다.
“어쨌든···다 같이 모이니 좋긴 하네. 먹방찍는 것 같은 거만 빼면.”
양한길이 주변을 둘러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테이블은 물론이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시선들까지 다양하다. 누구는 한서호를 보며 놀라고, 또 누군가는 채이연을 보며 호들갑을 떤다.
“덕분에 스파게티 서비스로 받았잖아.”
“사장님이 서호 팬일 줄이야. 어쩐지 아까부터 웬 피자집에서 클래식이야 싶었다.”
양호익이 웃으며 파인애플이 말끔히 제거된 피자를 한 입 베어 문다.
여전히 입맛만 다시며 음식들을 내려보던 채이연이 불쑥 말했다.
“난 연극영화과 갈 것 같아.”
“보통 아역 배우들은 다들 그렇더라. 연영과는 어디가 제일 센데?”
“센 건 몰라도, 제일 유명한 건 역시 한국 예술 대학교일 거야.”
“음악도 한국 예대가 가장 유명하잖아?”
양한길이 내 쪽을 돌아보며 물어왔다.
근데 어쩌나.
“···그래?”
나도 잘 모르는데.
“네 분야인데 네가 ‘그래?’하고 있으면 어쩌냐.”
“서호 입장에선 한국 예대나 다 고만고만해 보일 수 있지. 세계 일류 대학에 갈 거라는 얘기가 파다하던데.”
“하긴. 그래서 어디 갈 건데? 기사들 보니까 다들 이런저런 얘기가 많더라.”
세 사람의 눈이 모두 나에게로 쏠렸다.
“나···?”
#
호오오오오—.
나는 지금 윤 교수의 낯선 모습을 감상 중이다.
뉴욕에서 산 연습용 바이올린을 품에 안고 입김을 불어가며 슥슥 닦고 있는.
그런 와중에도 유일하게 셀린 교수의 싸인이 있는 부분은 융이 빗겨나간다.
“그거 유성 매직으로 받았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냐. 지워지면 어뜩—.”
은은하게 웃으며 지켜보자 그가 말을 멈춘다. 여전히 손으론 바이올린을 열심히 닦으며.
어깨를 으쓱거리며 책장에 놓인 음반들을 구경했다. 내 것도 있었다.
“크흠. 그래서. 애들이랑 대학교 얘길 했다고?”
“네.”
윤 교수가 슬그머니 바이올린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일단 유학은 생각 없다고요.”
“······.”
말없이 주억거리는 윤 교수를 보며 내가 물었다.
“의외로 뭐라 안 하시네요?”
“뭐가. 내가 유학 꼭 가야 된다고 강요라도 할 줄 알았어?”
“생각해보라고는 하실 줄 알았어요.”
솔직한 대답에 윤 교수가 푸스스 웃었다. 그리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내 얘길 받았다.
“사실 가끔 생각해 봤었다. 네가 어디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 말이야.”
꽤 진지한 얘기 같아 만지작거리던 앨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파리 고등 음악원? 줄리어드? 바드? 골드스미스? 나름 천재들의 성지라 할 수 있는 곳들은 다 떠올려 봤는데······모르겠더군. 거기라고 널 가르칠 교수가 있을지 말이야.”
“어······그런 말들은 좀 민망한데요.”
“민망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인걸. 심지어 지금은 더더욱 그래. 마에스트로 알버트가 지휘를 부탁하는 학생을 대체 누가 가르칠 수 있는지 난 모르겠구나.”
잠시 말을 멈춘 윤 교수가 다른 생각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고 대학을 갈 필요가 없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음악가의 영감은 마르지 않는 샘이 아니니까. 하다못해 지금 나오는 이 곡도 네가 여기서 본 풍경 아니냐.”
‘눈 덮인 아트센터’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그 말에 공감하여 끄덕이자 윤 교수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어디든 상관없겠더구나. 애초에 넌, 네 스스로 배우는 녀석이니까. 그저 네가 뭘 표현하려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하다못해 학교에 지각해서 달려가는 순간이 네겐 영감이 될지도 모르니.”
“지각은 좀··· 가까운 곳으로 가야겠는데요?”
“음? 야, 그런 뜻이 아니잖냐!”
버럭 하는 윤 교수를 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 진로(?)에 대한 이야기가 인터넷상에서 심심치 않게 나온다는 걸.
모두가 내가 대학을 갈지 안 갈지, 간다면 대체 어딜 갈지. 그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근데, 난 그것보다···.
그땐 내가 어떤 걸 보고 뭘 느낄지.
그래서 무슨 음악을 만들지.
그게 더 궁금하다.
내 눈앞의 스승도 마찬가지인 듯, 나직하게 말한다.
“궁금하네. 성인이 된 너는 어떤 음악을 하게 될지.”
“저도요.”
그렇게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던 윤 교수가 불현듯 손목을 확인하며 내게 말했다.
“심 교수 레슨 끝났겠다. 얼른 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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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미술가와 떠오르는 음악가의 만남이라니······재밌는 작업이겠네요.”
윤 교수의 교수실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한 또 다른 교수실.
예술의 전당에서 미술부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심 교수가 날 보며 웃었다.
“옛날부터 클래식과 미술은 떼려야 뗄 수가 없었죠. 그래서 각종 전시회에서 둘을 잘 섞어보려는 시도도 많았고. 물론 대부분 그저 그런 평가를 받았지만요. 근데 이런 섭외력이라니. 확실히 요즘 SJ 엔터가 문화 예술 쪽에 욕심이 있긴 한가보네요.”
윤 교수가 만들어준 자리.
내가 그녀를 만나러 온 이유는 간단했다.
워낙 미술엔 문외한이잖나.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음악에 표현하는 거야 쉬울지 몰라도 이번엔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궁금한 게 뭔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닐 하우저의 작품을 보고 느꼈던 것들을 쭉 풀어놓았다.
그리고 흥미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내가 본 게, 제대로 미술을 감상한 게 맞는지.
그러자 심 교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당연하죠. 원래 미술을 보는 것엔 정답이 없어요. 천 명의 사람이 봤으면, 천 명의 방법이 있는 거죠. 그래서 나는 전시회를 ‘물어보는 자리’라고 불러요.”
보여주는 자리도 아니고, 확인받는 자리도 아닌······.
물어보는 자리.
어쩌면 음악도 비슷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내가 말했다.
“그러면, 닐 하우저도 반대로 물음표를 던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의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빛과 어둠은 어떤 모습인지.
······나에게 빛과 어둠은 뭐였을까?
평범하기만 했던 한서호에 국한한다면 쉽지 않은 물음이었다.
하지만 브리너로 영역을 넓힌다면, 허무할 정도로 예정된 답이 튀어나온다.
내게 어둠은 병마였고, 빛은 음악이었다.
그렇다고 백한길 회장을 위로할 때처럼 굳이 그것에 대해 표현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디까지나 그림을 그린, 닐 하우저의 ‘물어보는 자리’잖나.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은 그가 하는 질문이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그림으로 그랬듯 나도 음악으로 빛과 어둠을 고스란히 표현해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들어온 녹음 부스.
적막이 텅 빈 캔버스처럼 내려앉았다.
나는 팔레트같이 여러 색을 내는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천천히 채색해 나갔다.
아주 짙고 어두운 음색으로.
거친 질감의 기교로.
소리는 그림과는 달리 파동처럼 번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이 공간에까지 스며들었다.
완연한 어둠이 찾아온 부스 안. 이제 빛을 그릴 차례였다.
나는 건반에서 손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붓 대신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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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와다다다— 달려온 소년이 허리춤에 폭 안긴다.
신수아는 그런 막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 사이, 안쪽에서 나온 교복 차림의 동생이 왔냐며 끼니부터 챙긴다.
“언니 밥은?”
“먹었어. 녹음실에서 주더라고.”
“다행이네.”
주억거리는 동생에게 싱긋 웃으며 방으로 들어간 신수아가 편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머리도 돌돌 말아 똥머리를 만들고서 다시 롱패딩을 걸친다.
“바로 연습실 가는 거야?”
“응. 내일도 녹음할 게 있어서.”
“또···?”
아래쪽에서 서러운 말꼬리가 튀어 올랐다.
막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본다.
신수아는 그런 아이의 머릴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나 금방 올게.”
잠시 멈칫거리던 막내의 눈이 둘째 누나에게로 향한다. 그리고는 이내 꾹 참는 얼굴로 외쳤다.
“응! 나 씩씩하게 기다릴게!”
신수아가 푸스스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겠다며 집을 나섰다.
“언니 조심하고!”
“누나 잘 다녀와!”
손을 휘적이며 골목을 나선다.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은 이어폰에선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흘러나온다.
명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견고히 수놓아지는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이중주.
······그녀는 바이올린 소나타 3번 4악장을 듣고, 이어서 1번의 2악장을 들었다.
두 곡은 분위기부터가 확연히 다르다. 특히 브람스의 곡들 중에서도 대비가 두드러지는 순서였다.
정말과 어둠이 혼재되어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3번과 희망에 기대려 하는 1번.
그중에서도 2악장은 마냥 밝다기보단 잔불처럼 빛나는 희망을 노래한다.
짙게 깔린 피아노 위로 얹어지는 바이올린.
신수아는 항상 이런 식으로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었다.
작곡의 시간순이 아닌, 그녀가 정한······그녀가 바란 순서대로.
언제나 끝은 희망이고 싶으니까.
그때 품 안에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누나, 저예요. 서호.
“어···무슨 일이야?”
-지금 어디예요?
“나? 지금 연습실 가는 중인데?”
-그럼 혹시 저 지금 거기로 가도 돼요?
“뭐? 왜, 왜?”
-일 얘기예요.
“안 될 건 없긴 한데······.”
-그럼, 연습실에서 봬요.
······전화를 끊은 신수아가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승낙을 해버렸다. 일 얘기라잖나. 목소리도 꽤 급해 보였고. 무슨 일인지 나도 궁금하기도 하고···.
그때였다.
개판인 연습실이 머릿속에 스친 건.
“윽···!”
머리를 쥐어뜯은 신수아가 곧장 연습실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