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ory of a Knight In A Ruined Fantasy World RAW novel - Chapter (78)
마법이 풀린 어둔숲의 모습은 몽환적이었다.
여전히 햇빛을 가린 나무들 탓에 초저녁처럼 어두컴컴하지만,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슴푸레 길을 비췄다.
해가 조금씩 들어오는 덕분인지, 본 적 없는 화려한 식물들이 나무 사이사이에 자라나 수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부로 넘어온 이래 심심하면 속을 메슥거리게 만들던 역겨운 쇠비린내가 사라져 있었다.
나약한 일반인들이 영지와 성채에서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제약, 독기(毒氣)가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냄새 좋다······.”
“그러게. 밖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보통 영지나 성채 내부에는 이렇게까지 나무가 빽빽한 숲 같은 공간이 거의 없기에, 수목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내기는 어려웠다.
영지 밖에서야 역겨운 독기 때문에 말할 것도 없고.
아르센은 그냥 오랜만에 이런 기분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정도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모습에 넋이 나간 듯했다.
그렇게 반쯤 혼이 나간 일행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에서 색다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토끼, 사슴, 여우, 까마귀······야생에서는 강력한 마수에게 밀려나, 그 존재를 찾아보기 힘든 작고 약한 짐승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준의 마수들이 있었다.
“오, 저기 눈꽃여우다.”
“저놈 보물인데.”
새하얀 털을 가진 여우 하나가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병사 몇 명이 호들갑을 떨었다.
리노가 큰 목소리로 그들을 단속했다.
“이상한 데 정신 팔지 마. 주위 경계 열심히 하고!”
다시 주위를 경계하고자 시선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아르센은 눈앞에 떠다니는 빛을 응시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인도하고 있는 이 빛은, 일행이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고 있었다.
마치 게임의 퀘스트 마커처럼.
엘로이즈가 빛을 향해 손을 뻗더니 물었다.
“이것도 환상일까?”
“글쎄, 어쩌면.”
조금 전 대화를 나눴던 숲 역시 환상이었으니, 어쩌면 이렌느는 어둔숲 내에서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무엇이든 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본인이 원한다면 그 환상이 현실에 영향을 끼치게 만들 수도 있는 것 같았고.
만약 그렇다면, 이 안에서는 신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빛을 따라 한참을 걷자, 마침내 숲이 끝났다.
어둔숲을 나온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건너편에 하늘 높이 솟은 숲이 또 있었으니.
숲의 한가운데, 나무가 자라지 않은 구역이 있었다. 마치 숲이 원형 탈모라도 생긴 듯한 모양새였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여, 아르센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 안에 자리 잡은 마을의 모습은, 적어도 아르센의 눈에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무질서하게 늘어선 통나무집. 문 앞에는 빨래가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작게 피운 불 위로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연기로 그을리고 있는 것은 아마 훈제를 하려던 것이 아닐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체격이 좋고 건장한 것이 궁핍해 보이지는 않았다.
늘어선 통나무집을 본 병사들이 입을 헤 벌렸다.
보통 영지나 성채에서는 집을 나무와 돌, 짚을 섞어 만드는데, 커다란 통나무 역시 영지에서는 희귀한 자원인 탓이다.
정화 구역 밖에서 자라는 뒤틀린 나무는 구불구불한 모양새 탓에 건축 자재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통나무를 아낌없이 써서 지은 이런 통나무집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바즈칼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영주님도 저런 집은 안 짓겠네.”
그때, 마을 사람들 역시 아르센의 군대를 발견했다.
“외, 외지인이다!”
“어떻게 들어왔지?”
그들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군대를 보고 겁을 먹은 듯했다. 어떻게 안심시킬지 고민할 새도 없이, 남자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그놈 때문에 온 거야! 그 바깥 놈!”
“도망쳐!”
“수호자님께 알려!”
“으아아아!”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비명을 지르거나 집 안, 혹은 다른 어딘가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진정하라고 소리쳐봐야 겁만 더 먹을 것 같았기에 해결책을 고민했지만, 다행히 아르센이 무언가 행동에 나설 필요는 없었다.
앞에서 들려온,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마을 사람들을 진정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만-! 모두 조용-!”
낮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이 다들 멈춰서서 뒤쪽을 돌아보았다.
거기서 나타난 것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강인하고 매서운 이목구비에 사자처럼 풍성한 단발, 어지간한 남자들은 간단히 압도할 수 있을 것 같은 큰 키와 근육질 체격이 인상적이었다.
허름한 천 옷을 걸쳤을 뿐인 마을 사람들과 달리, 마수 가죽 갑옷을 입고 큼지막한 도끼까지 한 자루 들고 있었다.
“여기 이자들은 수호자님이 초대하신 손님이다! 다들 하던 일이나 마저 해! 신경 쓰지 말고!”
놀랍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혼란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외침에 침착함을 되찾았다.
“정말 괜찮나?”
“지샤란이 괜찮다고 했으니 뭐······.”
“아무렴 허튼소리를 할까. 빨리 무나 캐러 가자구.”
“괜히 놀랐네.”
이제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신기해서인지 흘깃거리며 훔쳐보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전 소리 지르던 여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수호자님의 대리인인 지샤란이라고 합니다.”
“아르센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지샤란의 키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180cm쯤 될까, 부대에 있는 남자 병사 중에서도 그보다 큰 이가 몇 명 없을 정도였다.
풍채에 걸맞게 말투나 몸짓 역시 강인하고 절도가 있어서, 군인 같은 인상을 풍겼다.
“수호자님께서 손님들이 머무르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도우라 명령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뒤, 아르센이 제일 먼저 물어본 것은 숙박 문제였다.
“일단, 저희가 쉴 곳을 마련해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상당히······피곤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실제 싸움이 아니었다 한들, 바로 조금 전 격한 전투를 치른 상황이었다.
조금 전 입은 상처는 모두 치유할 수 있었지만, 쌓인 피로는 풀리지 않았기에 온몸이 물먹은 듯 노곤한 상태였다.
“따로 머무실 곳을 마련하긴 어렵습니다. 저희 마을이 손님 받을 일이 없어서요.”
지샤란은 마을 한쪽에 있는 공터를 지목했다.
“천막을 가지고 오셨다면, 저쪽에 설치해 주시면 됩니다.”
공터에 천막을 세워 휴식 공간을 만들고 나니, 지샤란의 지시를 받은 것인지 마을 사람들이 음식과 물을 가져왔다.
병사들은 이를 받은 뒤 바로 먹지 않고, 차분한 태도로 아르센의 지시를 기다렸다.
행여나 독이 있을 수도 있으니 대장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먹고 마시지 말라 교육한 보람이 있었다.
[엘리, 정화 주문 부탁해.] [알았어.]“아가씨가 직접 확인하신 음식과 물만 섭취하도록.”
“알겠습니다!”
엘로이즈는 확인하는 척 돌아다니며 음식과 물을 정화했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고립된 마을인 만큼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생각보다 풍부한 식단이 제공되었다.
고기나 나물, 거기에 젤리 비슷한 음식까지 있을 정도였다.
아르센만 처음 보는 음식이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 역시 그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이야, 이거 몰캉거리네요. 되게 신기하네.”
“이걸 무슨 수로 먹지? 이렇게 부서지는데.”
“오, 이거 보십쇼! 짓누르니까 통 튀는데요.”
아눈과 바즈칼은 음식을 먹는지 가지고 노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행태를 벌이고 있었다.
아르센은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 할까 했지만, 그것도 나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이 그런 장난을 멈춘 것은, 묵이 통 튀어 옆에 있던 병사의 얼굴을 맞췄을 때였다.
두 사람은 머쓱한 얼굴로 식사에 몰두했다.
아르센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피로 때문인지 영 식욕이 돌지 않았지만,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영양분이 필요했다.
그 모습은 식사라기보다는 연료 공급에 가까웠다.
[센.] [왜?] [엄청 맛없는데 억지로 먹는 거 같아 보여.] [······아냐, 맛있어.]엘로이즈의 말을 들은 아르센은 속도를 늦추고 음식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고 먹어보니, 묵은 나름 고소하면서 새콤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 견과류와 과일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향이 강한 채소와 함께 볶은 닭고기는 양념이 너무 강한 것만 빼면 꽤 괜찮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병사나 마법사들의 반응 역시 극과 극이었다.
누구는 맛 좋다는 듯 신나게 먹고 있었지만, 누구는 거의 입에 대지도 않고 있었다.
아르센은 그 병사들이 조금 전 환몽 속에서 죽었거나 큰 상처를 입은 병사임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것 때문에 식욕이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즐겁고 누군가에게는 괴로운 식사가 끝난 뒤, 식기를 정리하고 있으니 지샤란이 나타났다.
“수호자님께서 두 분을 뵙길 바라십니다만, 피곤하시다면 더 쉬다가 오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할래?] [난 괜찮아. 센은?] [나도.]내심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호의를 가진 상대를 기다리게 해서 그 마음이 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몇 가지 주의사항만 전하고 가겠습니다.”
우선, 아르센은 머무는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술을 마셔서도 안 되며, 용변 등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아예 야영지를 벗어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또한, 지샤란이 듣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 뒤 한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만약 목숨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공격을 받는다면 망설이지 말고 반격해라. 죽여도 상관없다.”
당부를 마친 후, 두 사람은 지샤란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가던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두 분이 약혼한 사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엘로이즈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그때는 분위기에 취해 냅다 내뱉었지만, 사실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약혼을 맺은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취급했을지언정, 그들은 친구보다 친하면서 연인이라기엔 싱거운, 그런 애매한 사이였을 뿐이다.
눈만 살짝 돌려 아르센의 얼굴을 훔쳐보았지만, 투구를 쓰지 않았음에도 그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기는 힘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듯이.
그렇기에, 아르센의 단호한 대답에 엘로이즈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맞습니다.”
엘로이즈의 기분이 하늘과 구름 사이 어딘가를 날아가는 가운데, 지샤란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태도가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조금 전 그 당당한 사람과 동일인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마법사와 결혼하시겠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그러니까, 그······그것을 어떻게 이겨내신 겁니까?”
지샤란이 제대로 지칭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이 마법사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 그것을 말한 것이리라.
아르센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얼버무린 대답에 진심이 없음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들려온 대답은 침울했다.
“그렇습니까······아니, 죄송합니다. 괜한 것을 물었군요.”
말없이 걷기를 잠시, 이번에는 아르센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 사람들은 모두 이 안에서만 살아온 겁니까?”
“다양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온 토박이도 있고, 몇 대 전에 밖에서 흘러들어온 사람의 후손도 있고, 우연히 마을에 들어와서 나가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고······.”
그녀가 그렇게 말하던 순간, 앞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들려왔다. 누군지는 몰라도, 거의 목이 찢어지도록 악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 여기다-! 날 봐라! 기사아아!”
고개를 돌려보니, 밝은 금발을 한 청년 하나가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마을 사람 두 명에게 붙들린 상태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여기다! 빨리 날 구해라! 빨리이-! 내가 바즈라의 이락이다아아아아악!”
“누굽니까?”
아르센은 이미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예의상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예상한 대답이 들려왔다.
“동쪽 바즈라 영주의 아들입니다. 아무래도 손님들을 보고 자기를 구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착각한 모양입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년은 이내 마을 사람들에게 붙들려 어딘가로 끌려갔다.
강제로 숲에 유배당하게 된 모양새가 안쓰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 도움을 줄 방법은 없었다.
반쯤 자업자득이기도 했고.
아르센은 청년의 모습을 기억 한편으로 밀어넘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마을의 한쪽 끝에 있는 커다란 통나무집에 도착했다.
다른 집과 달리 무려 2층으로 되어 있었다.
돌과 짚까지 아낌없이 쓴 덕인지, 다른 집에 비해 좀 더 영지나 성채에 있는 주택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집 앞에 도착한 지샤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수호자님. 두 분을 모셔왔습니다.”
대답 없이,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저 혼자 열렸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같이 안 들어가십니까?”
“수호자님은 다른 사람이 집 안에 들어가는 것을 반기지 않으셔서요.”
흐릿하게 웃은 지샤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편하게 대화하고 나와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