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Corpse-Collecting Warrior RAW novel - Chapter 302
승천과 고향(2)[완]
치이이 기름 튀는 소리. 잔 부딪히는 소음과 그 사이사이에 뒤섞이는 사람들의 왁자지껄함.
후덥지근한 열기가 얼굴을 뜨끈하게 달군다. 불판 위에서 팬이 웅웅 돌아가며 매캐한 연기를 빨아들였다.
“다들 올해도, 정말 고생 많았다! 내가 우리 팀들 사랑하는···.”
저 멀리 이미 알딸딸하게 취한 부장의 건배사를, 적당히 한 귀로 흘려듣고 기울이는 유리잔.
씁쓸한 싸구려 에탄올의 향취 뒤로 밀려오는 알딸딸함에 눈살이 반쯤 억지로 찌푸려졌다. 고기가 노릇해지면서 흘러나오는 기름진 육향이 코를 자극했다. 좋은 냄새였다.
“안 대리님 요즘 운동하세요?”
누군가 사내의 팔뚝을 툭툭 치며 물었다. 고개를 돌리니 옆 부서 여직원이었다.
어깨쯤 기른 머리칼. 피부톤에 맞춘 화장. 보통보다 조금 큰 눈. 이름이 어떻게 됐더라.
떠오르는 건 자신보다 나이가 몇 살 어리다는 것뿐이었다. 연초쯤에 옆 부서랑 협업할 때 몇 번 같이 일했던 것 같은데.
“이 주임 몰랐어? 안 대리 올 여름부터 환골탈태했잖아.”
“환골탈태···?”
“아아, 많이 바뀌었다고. 얘 요새 장난 아니야. 휴가 다녀오더니 사람이 확 달라졌잖아.”
맞아 이 주임이었지. 때맞춰 끼어든 맞은편 동기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름은 여전히 생각 안 나지만 상관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여직원을 두고 그 대신 동기가 열심히 떠들어대는 중이었으니까.
“몸이 다부져져서 그런가, 키도 더 커 보이고. 말투나 눈빛도 남자다워졌지, 다른 사람이라니까.”
“아···어쩐지. 분위기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봤잖아요. 저, 순간 신입사원인가 생각했어요. 운동하시면서 동안이 되셨나?”
“휴가 쓰고 어디 면벽수련이라도 하고 온 거 아닌가 싶다니까. 업무 처리하는 속도도 무슨···어휴. 옆에 있다보면 아주 자존심 상해. 이런 사기캐는 두고 우리끼리 짠 하자고. 짠!”
“······짜, 짜안.”
대뜸 술잔을 들이미는 동기에게 여직원이 적당히 사무적인 웃음으로 잔을 맞댄다. 사내는 문득 웃음이 나와서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거 좀 재밌는데. 한 쪽은 그다지 재미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여직원은 금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뭐야, 웃으니까 좀 사람 같네. 인상이 훨씬 부드러워지셨어요.”
“그런가요?”
“네. 완전. 웃고 다녀요. 그래서 휴가때 뭐하셨어요? 신기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지?”
술집의 지저분한 조명에 검은 눈이 반짝거렸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냥 외국 좀 다녀왔죠.”
“외국? 어디요?”
“한 나라만 다닌 건 아니라서요.”
여직원의 눈이 조금 더 반짝이는 듯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이었다.
문득 사내의 머릿속에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인 누가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웃었다.
“완전 궁금하다. 그럼 외국에서는 영어 이름 썼어요?”
본인에게 웃어주는 거라 생각한 건지, 더 커진 여직원의 미소.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직하게 답했다.
“댈런.”
“댈···?”
“제 이름은 댈런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쓰는 이름 말이에요.”
***
연말연시의 강남은 번잡했다. 도로에 꽉꽉 들어찬 차들 곁으로 수만 명의 그림자가 허깨비처럼 스쳐갔다.
회사원. 연인. 대학생. 종업원. 백수. 공시생. 택시 기사. 전단지 알바.
도심가에 사람 많은 건 어느 세계나 비슷했다. 각자 남에게 관심 없고, 저마다의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는 점도 그랬고.
다른 부분이 있다면 복장이었다. 옷의 일차적인 기능이 무엇보다 중요한 중세랜드와는 달리, 부드러운 천과 매끈한 가죽으로 만든 짧은 옷들은 종종 보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가하면 긴 인조 모직으로 길게 짠 코트나 플라스틱 섬유로 만든 덮개 안에 깃털을 꽉꽉 채운 방한복들도 즐비했다.
적어도 복장의 다양성만큼은 중세랜드보다 이곳이 월등하다고 볼 수 있었다.
“···후우.”
댈런의 복장은 단조로웠다. 긴팔 흰티에 청바지, 자켓 하나만 걸친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겨울이었다.
폐부를 식히는 공기가 시원한 계절.
새하얗게 맺히는 숨결은 영역의 설산과 대륙 북부의 차르국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고보니 돌아오고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벌써 반 년 전인가.”
현대 지구에 돌아온 지도 반 년이 넘게 흘렀다.
영역의 모든 정경을 에낙사구스의 다섯 대지옥에 부딪히고, 두 세계가 서로 소멸하는 광경이 중세랜드 몇 년 기억의 끝부분.
밝은 빛과 함께 눈을 감았다 뜨니 그가 살던 원룸이었다. 윙윙 돌아가는 컴퓨터는 마치 이 모든 일이 하룻밤 꿈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지.’
하룻밤 꿈이라기에는 모든 것이 생생했다.
외딴 설산에 떨어져 겪은 수많은 싸움과, 그 과정에서 변화하고 깊어져간 스스로의 사고관 역시도.
육신 역시 중세랜드의 영향인지 상당히 달라졌다.
순식간에 살이 빠지고 키가 조금 더 커지는 건 물론, 거울로 느껴지는 분위기 자체가 게임 속 북방인 전사의 모습에 가까워졌으니까.
그렇게 돌아온 지 반 년.
의외로 댈런은 지구의 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머리가 본능적으로 고향 생활을 기억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변화된 생각과 육신이 빠른 적응을 도와줬기 때문인지.
어느 쪽이건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키와 체형은 자세 교정에 개인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둘러댔고, 복잡한 술식체계에 익숙해진 두뇌는 현대 지구의 문화나 회사 업무 정도야 금방 능숙하게 수행했다.
물론 중세랜드에서만큼 초월적인 지능 수치는 아니었지만 뭐 어떠랴.
가끔 그 세계에서의 신적인 능력을 이곳에서도 쓸 수 있으면 어떨까 싶었지만, 이내 부질없는 상상이라는 결론으로 다다랐다.
‘전세계 정보국에 쫓기고 싶지도 않고. 외계인이라면서 해부할지도 모르는데.’
피식 웃으며 떠올린 건 주문을 날리며 국가기관과 싸우다가, 끝내는 외딴 사막에서 핵무기를 처맞는 가상의 시나리오.
설령 이길 수 있다 해도 그런 생활은 사절이었다. 현대 대한민국이 제공하는 문명의 편리성을 포기하긴 싫었으니까.
[흐흐흐. 한국이 편하긴 편합니다요, 주인님. 냉장고에 가스레인지도 있으니 부려먹어질 일도 거의 없고. 달달한 음식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츄르릅,]“침이나 좀 닦고 말해라.”
[히히, 그래도 야식 드실 거죠?]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 별나무 아르보르였다.
아르보르를 포함한 머릿속 식객들은 그의 중세랜드 생활이 꿈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였다.
특히나 별나무는 본디 세계선과 차원을 넘나드는 초월적인 존재라던가.
에낙사구스를 쓰러뜨리며 권능을 되찾은 놈은, 더이상 악마의 거무튀튀한 몸뚱이에 갇혀있는 신세가 아니었다.
두 세계와 함께 소멸할 뻔했던 댈런이 지구로 돌아온 데, 놈이 기여한 바가 상당히 크다고 했지.
물론 그 과정에서 차원의 벽을 뚫으며 너무 많은 권능을 소모했다는 말도 덧붙였었다. 예의 그 찰떡 같은 몸뚱이로 돌아와 아공간에 틀어박힌 건 그런 이유라고.
[댈런, 내가 볼 때 저건 그저 핑계일 듯하구나. 별나무는 분명 이곳의 달짝지근한 음식들이 마음에 든 것일 테야. 그러니 힘을 회복할 때까지는 아공간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걸 빌미로···.] [저, 적창! 쉿! 쉿!]“그래. 넌 이따 좀 맞자.”
[끄아아악.]악마였던 것의 죽는 소리에 댈런은 낮게 웃었다. 눈앞에 하얗게 맺히는 숨결을 흘려보내며 그는 야식으로 뭘 먹을지 생각했다.
악마의 요청이 없더라도 그건 오늘 가장 중요한 고민이었다. 피자를 먹을까 햄버거를 먹을까. 치킨도 나쁘지 않았다. 탄산을 곁들인 패스트푸드는 언제나 옳았으니까.
그러고보면 치킨은 중세랜드에서도 먹을 수 있었지.
기름과 향신료, 닭만 있으면 얼추 비슷하게는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가 직접 하는 건 순리에 어긋난다, 댈런.]“······.”
[차라리 성기사에게 맡기거라. 그 편이 보는 내 입장에서도 마음이 놓인다만.]틀린 말은 아니었다. 심상 속 고룡은 그의 요리 실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 니가 치킨 튀기는 건 에바야 새꺄.] [크하하, 대장간 기술만큼이나 요리도 무거운 엉덩이가 필요하다네. 자네는 쉽지 않을 걸세.] [신의 자비하심은 우리의 결점에도 나타난답니다. 부족한 부분을 통해 타인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게 해주죠.] [하이 오크 친구들 요리 실력이 너보다는 나을 거다.]심상 속에 들어앉은 다른 식객들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댈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다들 조용히 집이나 갑시다. 제발.”
조금 의지를 집중하자 시끌시끌하던 목소리들이 한결 작게 들렸다. 댈런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지르며 밤길을 걸었다.
지하철로 들어가 사람 가득한 객실에 몸을 구겨넣는다. 이십 분쯤 열차에 실려 이동한 뒤, 다른 호선으로 갈아타서 다시 십여 분.
역에서 나와 찬 공기를 맞으며 골목길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지어진 지 오 년쯤 된 오피스텔. 그가 사는 방은 건물 14층.
띠리링-
집으로 들어가 습관적으로 불을 킨 뒤, 난방을 틀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오늘은 라면이다.”
화장실을 나와 몸을 닦으면서 불을 올린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라면 다섯 봉지 묶음을 전부 넣고, 다른 묶음 하나는 책상 위에 올려뒀다.
빠르게 식사를 마친 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 년 전에 큰 돈 들여 맞췄던 컴퓨터는 아직까지도 쌩쌩하게 돌아갔다.
엄지발가락으로 전원을 누르고 화면이 뜨길 기다린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금새 게임 화면이 그를 반겼다.
“밥값은 해야지.”
[끄윽. 매개점 확인.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주인님.]다섯 봉지 중 셋쯤을 먹은 아르보르가 배를 두드리며 몸을 움직였다.
댈런은 라면 봉지를 손에 쥔 채 편안하게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아시겠지만 약간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저도 열댓 번은 더 해봐야 익숙해질 것 같아서 말아죠.]댈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짧은 상념에 잠겼다.
고대 대전쟁의 영웅이 천상을 포기하고 지상에서의 싸움을 택했다던가.
어떻게 보면 댈런 역시 같은 선택을 한 셈이었다. 소원의 돌을 얻은 뒤 지구의 고향을 포기하고, 대륙에 남아 악신과 싸우기로 했으니까.
천상과 지상을 모두 얻었다는 전사신과 비슷한 결과를 얻은 건, 그와 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지도 못했고, 여전히 차원 간 존재율이며 권능의 일체화 같은 주문쟁이 소리들은 알아듣기 힘들었으니까.
‘뭐, 이제 와서는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고.’
댈런은 픽 웃으며 눈을 떴다.
익숙한 술집의 전경이었다.
잘 정리된 의자. 바테이블 뒤의 술병들. 은은한 마력석 조명. 푸근한 나뭇결 냄새.
바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네 사람이 앉아있었다. 바텐더와 마녀, 마법사와 성기사였다.
“허허, 그렇게나 맛있는 음료인가? 나도 한 번 마셔보···음?”
“뭐야. 오늘 온다는 이야기는 없없잖아?”
[원래 인간은 변덕의 생물이지.]“댈런······.”
놀람과 반가움의 눈빛들. 술집 공기만큼이나 따뜻한 감정들.
“그냥 들러봤소. 심심해서.”
이건 그의 지난날 싸움들이 허상이 아니라는 마지막 증거였고.
“멜론드 하이랜더 한 잔 부탁하지.”
동시에 그가 지키고자 했던,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상이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