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77
「누가 들으면 연극의 망령인 줄 알겠네요.」
직원, 루이스는 태화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래도 첫날 봤을 때 태화의 행색은 피곤함이 보이긴 했으나 평범한 관광객이었다.
꺼내 든 여권 사본도 카드 국적과 일치했고 눈썹이 금색이라 이상하긴 했어도 그 외엔 멀쩡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난 지금은 그냥 노숙자로 변했다.
깎지 않은 수염은 제멋대로 자라나 매끈했던 얼굴을 엉망으로 바꾸었고 어느새 쓴 모자는 그를 뉴욕 거리에 흔한 홈리스 1로 만들었다.
‘처음엔 꽤 잘생겼던 거 같은데.’
「오늘도 화장실 좀 써도 돼?」
「그래요. 쓰세요. 어차피 손님도 이 시간엔 없으니까.」
루이스는 선선히 화장실 열쇠를 건넸다.
태화는 아침마다 가게의 화장실에서 꼼꼼한 세안을 하고 토너와 로션, 선크림까지 발랐다.
엉망인 옷차림과 떡진 머리, 관리 안 된 수염을 생각하면 참 이상한 행동.
하지만 뉴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행을 떠올리고 루이스는 태화도 그런 이상한 사람 중 한 명으로 치부했다.
「진짜 열심히 가꾸네요.」
「안 그러면 엄청 혼날 게 분명하거든. 일단 얼굴이 자산이기도 하고.」
「어? 그러고 보니 옷도 바뀌었네요?」
「너무 더러워서 새로 샀어.」
「아, 네······.」
하는 행동을 보면 태화는 돈 없는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쓰고 있는 화장품들이나 입고 있는 옷들도 싸구려 제품이 아니었고 의외로 고운 피부는 곱게 자란 티를 냈다.
단지 두꺼운 코트, 털모자, 풍기는 분위기, 초췌한 행색이 겹쳐져 노숙자로밖에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 가게 오는 이유도 레스토랑에서 거부당해서라고 하니 뭐······.’
연극의 경우 티켓이 있는 그를 막지 않았으나 식당은 달랐다.
관광지의 식당들은 드레스코드가 파격적이다 못해 글러 먹은 태화를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으니까.
태화가 브로드웨이 구석에 있는 햄버거집의 단골이 된 이유였다.
「아직 링컨을 보지 못했다고 했죠?」
「어. 계속 로터리에 참여하는데 영 안 되더라고.」
그는 따끈따끈한 빵을 입에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록셀의 공연도 유명했지만 현재 브로드웨이의 1위 연극은 단연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를 다룬 연극, ‘링컨’이었다.
BBA도 구하지 못한 연극이자 언제나 매진이라 떨이(rush)도 없는 공연.
그나마 예매 없이 볼 방법은 추첨(lottery)뿐이었는데, 이건 완벽히 운인지라 매일 응모해도 되지 않았다.
‘오늘 못 보면 정말 인연이 없는 거네. 음······.’
차라리 암표라도 있다면 구해보련만, 애국심이라도 발휘된 것인지 ‘링컨’은 암표조차 없었다.
살짝 침울해진 태화를 보고 루이스는 감자튀김을 건넸다.
「이거 먹고 힘내요. 연극이 링컨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쉽다는 얼굴로 태화는 햄버거를 하나 더 주문했다.
허름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이 가게는 꽤 질 좋은 고기로 수제 버거를 만들었다.
야채도 매일 아침 주방장이 직접 사와 싱싱했으며 빵도 아는 제빵사에게 공수해왔다.
당연히 그만큼 비싸서, 외관을 보고 대충 때우러 온 이들은 의외의 가격에 놀라 관광객을 노린 바가지로 착각하곤 했다.
「고마운데 튀김은 사양할게. 피부에 안 좋아서.」
「······태하는 진짜 괴짜네요.」
외관과 행동을 보면 막장 인생 같은 데 묘하게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루이스에게 태화는 알 수 없는 생물이었다.
***
“누나. 제가 좀 바빠서 그런데 이따가 연락할게요. 미안해요.”
-야!!! 이······!
태화는 담담하게 나래의 연락을 끊고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돌렸다.
연극 끝나고 연락한다 말했으면서 자주 잊은 것은 미안했으나, 그래도 지금은 현실에 집중하고 싶었다.
‘마지막 문자가······. 아, ‘ㅇㄱㅂ’이라고 보내고 말았네. 이러니 화가 났지.’
이렇게 적어 보내곤 연극이 끝나자마자 다른 연극을 보러 길 건너 극장에 들어가 버렸다.
사실 본인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자 욕심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늘도 저녁엔 잔소리 듣겠네······.’
연락을 끊고 잠적한 것은 아니기에, 태화는 연극들이 전부 끝난 한가한 시간엔 나래에게 전화를 하고 한국에 있는 부모에게도 연락했다.
물론 끌려갈 것 같아 정확한 위치는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착실하게 그녀가 말하는 내용들을 지키고 매일 저녁 대본 연습도 빼먹지 않았다.
‘아, 오늘은 호텔에 돌아갈 거니 엄청 혼날지도.’
전화 너머로도 분노가 전해질 정도다.
나래 성격상 어떻게 이리 무책임하냐부터 시작해 비난을 퍼부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알렉이 내 위치는 안 말해서 다행이야.’
물론 태화도 생각 없이 돌아다니진 않았다.
GPS기능과 생체 정보가 전달되는 스마트워치로 알렉산더에게 위치를 알리고 있었으며, LA에서 필요한 것들도 전화나 문자로 전달해 왔으니까.
단지 나래에게만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잠시 속으로 사과를 건넨 태화는 초조한 얼굴로 계단에 서 있는 청년을 응시했다.
오후 다섯 시.
‘링컨’의 현장 추첨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추첨이라는 것은 일부 좌석을 남겨 두었다가 응모한 이들 중 일부를 선정, 저렴하게 판매하는 방법이었다.
떨이는 없어도 추첨은 있다는 말처럼 아무리 인기 있는 연극이라도 여분의 좌석을 남겨 추첨을 진행했다.
‘아, 제발. 혼나더라도 이건 보고 가고 싶은데.’
그렇게 열심히 빌었으나 태화는 운이 없었다.
이름이 불려 환호하는 이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지만 그것이 그는 아니었다.
「어머. 정말 됐네.」
심지어 바로 옆에서도 당첨된 사람이 나와서, 태화는 더더욱 우울해졌다.
‘난 정말 인연이 아닌가······.’
추첨이 끝나고 흩어지는 인파 사이에서 태화는 쓸쓸하게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링컨’을 놓쳤으니 차선으로 다른 공연이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저기. 얘.」
만약 옆에 있는 누군가가 부르지 않았다면, 태화는 곧 발걸음을 옮겼으리라.
「링컨을 보지 못해서 그러는 거니?」
「아.」
그에게 말을 건 인물은 방금 전 마지막으로 당첨된 중년 여성이었다.
약간 해진 옷으로 보아 관광객이 아닌 지역 주민으로 보였고, 히스패닉계 특유의 초콜릿 빛 피부와 후덕한 인상이 어우러져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친근감을 일으켰다.
「······네. 연극 즐겁게 보세요.」
갑자기 말을 건 이유는 알지 못했으나 태화는 씁쓸한 미소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나려 했다.
늦었지만 다른 티켓이라도 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내가 티켓을 양보할게. 난 어차피 볼 여력이 안 되거든. 원하는 사람이 보는 게 맞지.」
그러나 예상치 못한 천사의 강림에 태화는 멍한 얼굴로 여성을 바라봤다.
그녀의 뒤에서 후광이 비췄다.
「저, 정말 괜찮나요?」
「응. 사실 내가 응모한 게 아니라 아는 단골이 멋대로 한 거라 곤란했거든.」
한 치 망설임도 없는 태도에 태화는 감격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부인! 정말 잘 볼게요! 부인은 제 은인이에요!」
「음, 그렇게까지······. 그래. 재미있게 봐.」
아들 또래로 보이는 젊은 노숙자가 불쌍해서 호의를 보였던 마리아는 감격하는 태화를 보고 떨떠름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자 표를 양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태화는 정말 만족스럽게 ‘링컨’을 관람했다.
특이하게 현대 발레와 접목한 ‘링컨’은 링컨의 업적을 역동적이게 표현했고 마지막에 피살당하는 장면 또한 완벽하게 그려냈다.
‘과연 1위는 감동이······.’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좋았던 공연은 역시 록셀의 정기 공연이었지만 ‘링컨’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럼 코인 사물함에서 짐을 찾아서 호텔에 가야지.’
아직 지하철이 다니는 시간이었기에 지하철을 통해 호텔로 돌아가려 하던 태화는 코를 간질거리는 냄새에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약간 출출하던 차, 핫도그의 향기로운 냄새가 그를 유혹했다.
‘길거리 음식은 안 되는데······.’
자기 관리와 식욕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던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노점 쪽으로 옮겼다.
뉴욕의 길거리 핫도그는 나름 유명했다.
여기까지 와서 안 먹고 가기엔 조금 아쉬웠다.
「어, 부인.」
「어서오······. 어머. 아까 그 청년이네. 연극은 재미있게 봤어?」
「네. 부인 덕분에.」
「부인(ma`am)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돼. 그냥 마리아라고 불러.」
극장 앞에 위치한 핫도그 가게는 ‘링컨’의 티켓을 양보했던 마리아의 가게였다.
그녀는 푸근한 미소로 태화를 반기며 어린 나이에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고 핫도그 하나를 건넸다.
태화는 티켓에 이어 공짜로 주어진 선의에 당황했다.
「저, 살 돈이 있어요.」
「괜찮아. 아들이 생각나서 그래. 내 아들이 딱 청년만한 나이거든.」
태화를 노숙자로 착각한 마리아는 그가 핫도그를 먹는 사이 ‘인생은 길다’, ‘한번 실패는 별거 아니다’와 같은 조언을 건넸다.
「청년도 연극을 좋아하나 봐. 내 아들도 그래. 이 거리에서 태어나서 쭉 봐온 게 배우들이라 그런지 꿈이 배우가 되었거든.」
고등학교도 때려치우고 뛰쳐나갔을 땐 상당히 걱정했다며 그녀는 아들, 카를로스의 사진을 보여줬다.
「속을 많이 썩이긴 해도 내 하나뿐인 아들이야. 청년도 부모님이 걱정할 테니 어서 집에 들어가.」
마리아의 아들 카를로스는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당당한 배우가 된 후 돌아오겠다’란 말만 남긴 채 가출했다.
같은 동네 살면서 사춘기 소년 특유의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아들 때문에 마리아는 마음이 아팠다.
단골인 주변 배우들이 쭉 카를로스의 안부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속병을 앓다가 병을 얻었을지도 몰랐으리라.
「정말 말 안 듣는 아들이네요.」
「그래도 내일이면 오디션을 보고 집에 돌아올지 몰라.」
카를로스는 말로만 배우가 되겠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그는 오프오프브로드웨이에서 잡일을 하며 연기를 배웠고, 기회를 얻어 한 대극장의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내일 이 극장에서 오디션을 본대. 단골이 알려줬지.」
오늘 ‘링컨’공연이 있던 극장을 응시하며 마리아는 아련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약간의 뿌듯함이 담겨있었다.
「청년도 배우가 꿈이라 여기 온 거야?」
「연극배우였어요. 지금은 다른 일을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위해 극단을 나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하고 있었구나. 아, 아직도 미련이 있어서 여기 온 거야? 그럼 내일 같이 오디션 구경하러 갈래?」
혼자 결론을 지은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태화를 보며 제안을 건넸다.
젊은 나이임에도 이미 꿈을 포기했다고 말하는 태화가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네?」
「원래 외부인들이 들어가진 못하는데, 단골, 필립이 찰스 일이니까 몰래 와서 구경하라고 했거든. 그래 그러면 되겠다. 내일 새벽 6시에 시간 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절해야했다.
비행기는 저녁이라 해도 LA로 출발할 준비를 미리 해야 했으며 4일간 쉰만큼 이젠 오디션에 집중해야했으니까.
「······물론이죠, 마리아.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엄청 기쁠 건데.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그러나 태화는 연기와 관련된 유혹에 약했다.
‘무려 브로드웨이 오디션이라잖아. 어떻게 이뤄지는지 구경할 수 있는 천우의 기회를 놓치는 건······. 으, 혼나려나.’
「물론이지! 필립이 마음이 약해서 내가 부탁하면 또 거절을 못하거든! 그럼 내일 같이 가자.」
「네. 감사합니다. 아, 제가 핫도그 값을 못 냈으니 팁이라도 받아주세요. 그럼 내일 뵐게요!」
태화는 품에 있던 구겨진 100달러를 팁통에 쑤셔 넣고 재빨리 빠져나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작 100달러로 오늘 입은 은혜를 다 갚을 순 없었지만 약간이나마 값을 지불하고 싶었다.
「저렇게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은데······. 참.」
설마 그가 100달러를 넣었을 것이라 생각 못한 마리아는 사라지는 태화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