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or, stand again RAW novel - chapter 176
「요즘 젊은 사람들은 다 하지 않나? 안 해?」
「음······. 계정이 없는데.」
「이런! 젊은 사람이 나 같은 노인보다 몰라서야!」
「죄송합니다······.」
「후후. 어쩔 수 없지만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상황이 역전된 것이 기뻤던지, 록셀은 자신 있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그도 어린 배우들의 도움으로 계정을 열었던지라, 대부분의 조언은 케빈에게서 흘러나왔다.
***
그의 열정과 기백이 마음에 들었는지 록셀은 태화에게 자신의 대기실을 보여줬다.
연극의 주역답게 그는 홀로 하나의 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화장대의 구석에는 가족들과 함께 찍은 것 같은 사진, 손녀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와 웃고 있는 사진, 극단 동료들과 졸업사진 찍듯 모여 있는 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이 진열되어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7월에 사고 난 이유가······.’
록셀의 추억을 살피던 태화는 미소 지은 한 여자의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소녀라고 하기엔 성숙해 보이고, 어른치곤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여성이었다.
‘고등학생이라고 했지.’
록셀이 지나가듯 자랑한 손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는 사진 속 여자 아이를 바라봤다.
7월의 사고는 록셀이 고향에 있는 손녀딸을 만나러 가는 도중 일어났다.
그가 지나던 도로는 여름의 긴 해와 뻥 뚫린 수평선이 맞물려 저녁 8시쯤 되면 선글라스 없이는 눈이 부셔 시야를 확보할 수 없는 장소였다.
북부에서도 산이 없는 지역엔 그런 장소가 흔했다.
그렇기에 사고 소식을 들은 이들은 어째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트레일러 운전사가 그것을 간과했는지는 모르겠다며 의문을 드러냈다.
트레일러는 크기가 크기 때문에 한번 사고가 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쉬웠다.
그러나 그 날 사고는 상당히 특이하게도 사상자가 1명, 월리엄 록셀 뿐이었다.
록셀의 팬들이 그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여긴 이유였다.
「무슨 생각을 하나?」
「손녀분이 예쁘네요.」
사진 속의 여성은 젊음이 묻어나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뺨에 앉은 주근깨가 짓궂어 보이기도 했으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아이 특유의 구김 없는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못 주네. 아직 어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아이야.」
태화의 대답을 들은 록셀은 인자했던 웃음을 싹 지우며 굳은 눈으로 태화를 응시했다.
기특한 후배를 보듯 호의적이던 시선이 순식간에 도둑놈을 대하는 것처럼 변했다.
「······네? 아니, 저도 고등학생에겐 관심 없는데요.」
태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돌변한 록셀을 쳐다봤다.
회귀를 무시하고도 태화의 나이는 벌써 스물여덟.
만으로 스물여섯이었으며 당연히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아이에게 어떠한 매력도 못 느꼈다.
「그레이시가 얼마나 귀여운 아이인데! 자네 게이인가? 아니면 연상 취향?」
하지만 록셀은 그 두 가지 선택지가 아니면 그레이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단정 지었다.
둘 사이의 오해를 종식 시킨 것은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케빈이었다.
「빌. 태화는 스물여섯이야.」
「뭐? 스물이 넘었다고?」
워낙 고르게 정돈된 피부와 동경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빛 때문에, 록셀은 지금껏 태화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연기 전선에 뛰어든 어린 청년이라 생각했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대하듯, 태화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건넸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크흠. 미안하네.」
오해한 것이 무안했던지 록셀을 붉어진 얼굴로 사과를 건넸다.
당황했던 태화는 가볍게 웃으며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한껏 콩깍지가 낀 그는 우상의 그런 모습도 참 인간미 넘친다며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
태화가 스물한 살이 넘을 걸 알자 록셀은 둘과 함께 근처 펍(Pub)으로 향했다.
단골이었는지 점원은 그와 케빈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뉴욕에 한동안 머무른다고?」
「네. 또 언제 시간이 나서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흠, 사흘이라. 다 둘러보기엔 부족한 시간이군.」
오는 길에 늦는단 문자를 나래에게 보낸 태화는 일행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밀어 둔 채 록셀의 입술에 집중했다.
이미 그의 품에서 나온 브로드웨이 전체 일정표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조언을 바란다는 눈빛에, 록셀은 다 훌륭한 친구들이라 칭찬하면서 각 작품의 장점을 말해줬다.
오프브로드웨이까지 100개가 넘는 작품들을 록셀은 전부 꿰고 있었으며 어떤 작품에 어떤 배우들이 출연하는지도 알았다.
덕분에 태화는 본인에게는 참 알찬, 타인이 보기엔 당혹스런 스케줄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근데 태화. 나한테 하지 못한 말이라도 있나?」
맥주 한 잔 마시고 잠들어버린 케빈을 내버려 둔 채 록셀은 태화에게 물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동경과 함께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던 청년이, 단둘이 되자 더욱더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다.
「······사실, 월리엄이 7월에 차를 운전해서 시라큐스까지 간다는 게 걱정돼서요.」
「같은 뉴욕 주 내인데 무얼. 3시간 줄이겠다고 비행기를 타는 것보단 중간중간 도시도 들러 가며 쉬엄쉬엄 가는 게 마음 편하지.」
한국은 몰라도 미국에서는 고향에 가기 위해 8시간, 길게는 48시간 운전하는 일도 종종 있다며 록셀은 태화의 걱정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했다.
「전 월리엄을 상당히 좋아하니까. 제 비밀을 한 가지 알려드릴게요.」
그런 그를 보며 태화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불안하다는 듯 주변을 살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에, 록셀도 몸을 낮춰 그가 할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전 미래를 볼 수 있어요. 아니, 알 수 있어요.」
둘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태화는 록셀에게 사기를 쳤다.
‘회귀했다는 것보다 훨씬 믿을 만하지.’
사실 태화는 그에게만큼은 자신의 비밀을 말해볼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회귀는 미래를 보는 것보다 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상대를 설득할 때 우연과 운이 없다면 거짓말쟁이로 취급당해도 할 말이 없는 현상.
때문에 태화는 그와 비슷하면서도 ‘설명 가능한’ 예지를 들먹였다.
예지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이들에게 종종 보이는 재능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통계와 변수 계산에 능통한 이들이 ‘미래를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고’ 전달하는 예언과 달리, 예측은 의외로 많은 부분이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했다.
‘물론 정말 그런 계산을 하는 재능은 없지만······.’
그러나 태화는 정말 미래를 알았고, 그 미래를 바탕으로 ‘사실들’을 끼어 맞춰 연기할 자신이 있었다.
「······그것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태화의 말을 초능력으로 이해한 록셀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의자에 기댔다.
젊은 사람이 농담도 참 진지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는 탁 풀린 긴장감을 그대로 던져둔 채 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5년간 7, 8월 I-86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교통사고는 총 5,721 건. 그 중 57퍼센트에 해당하는 3,261 건이 해가 지는 시간인 오후 8시부터 10시 사이에 발생.」
그런 록셀을 멈칫하게 한 것은 태화의 딱딱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5년 중 두 달만 계산한 것이니 일로 따지면 301일. 하루 약 11건의 사고가 발생하는 셈입니다.」
「똑똑하군. 그런데······.」
「그 열한 번 중 평균 여덟이 60이 넘은 운전자에 의해 발생했죠.」
「······.」
그 시간대에 그 도로를 지나는 노년 인구가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지만 이십 대, 삼십 대 운전자보단 적을 게 분명했다.
「······자네 수학을 참 잘하는군.」
막힘없이 나오는 숫자의 향연에 록셀은 질린다는 얼굴로 태화를 바라봤다.
미국인들은 의외로 숫자에 약했다. 계산기를 자주 쓰기 때문에 곱셈 나눗셈을 손으로 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숫자가 많아지면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잦다는 의미다.
‘역할 때문에 연습을 좀 했죠.’
그런 록셀을 보며 태화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할리우드에서 소모되는 동양인 캐릭터는 크게 둘로 나뉘었다.
수학 잘하는 똑똑한 범생이, 체술이나 검술에 능한 무술가.
빌런 이외의 모습을 ‘전형적인 동양인 캐릭터’로 연기할 생각이었던 태화는 그에 알맞게 ‘똑똑하게 보이는’ 연기를 연습했다.
암기력이 받쳐줬기에 주문 같은 원서를 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I-86을 지나는 트레일러 수가 요 3년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5년이란 평균을 이야기했지만 사고는 3년을 따지면 더 높고······ 알다시피 해가 질 무렵엔 트레일러가 늘죠.」
야간엔 차량이 적기 때문에 대형 트레일러들은 해가 진 저녁에 더 활발히 움직인다.
태화가 지적한 것은 그 점이었다.
「잘 들었네. 그러나 수치는 수치일 뿐이야. 그런 불운이 나에게 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그렇게 따지고 들면 일도 하지 못하지.」
「그러나 안전한 길이 있다면 안전한 쪽을 선택하는 게 올바르죠.」
‘But’으로 시작한 문장을 다시 ‘but’으로 받으며 태화는 비행기의 안전성을 역설했다.
한국에선 비행기를 대중교통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비행기도 대중교통에 속했다.
특히 땅이 큰 미국에서는 주와 주, 심지어 도시 사이를 이동할 때도 사용되는 흔한 탈 것이었다.
「······자네 사실 항공사 직원인가?」
「어차피 돈에 구애되지 않는다면 좀 더 효율적인 길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요새 체력도 많이 떨어졌잖아요. 아닌가요?」
원래 하루 두 번 있었던 록셀의 공연은 올해부터 하루 한 번으로 줄었다.
주연인 록셀을 배려해서다.
아직 정정하다곤 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었고 그의 체력은 조금씩 줄고 있었다.
「젊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뼈가 아프군. 나도 많이 늙었어.」
「그래도 10년은 더 무대에 서주세요. 월리엄이 없는 브로드웨이는 상상할 수 없네요. ······그리고 왠지 월리엄의 계획을 들었을 때 불안해져서요. 전 감이 좋거든요.」
「풉. 왠지 마지막 문장이 핵심 같은데.」
웃음을 터뜨린 그는 잔에 담긴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잔잔한 미소로 태화를 응시했다.
「그래. 뭐 한 번 정도는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도 좋겠지. 안 그래도 딸이 장거리 운전하는 게 불안하다고 불평이 많았으니까.」
네가 그리 말해서 넘어간 게 아니라며 록셀은 사족을 덧붙였다.
‘······바뀌었다.’
그런 록셀의 대답을 들으며 태화는 희열을 느꼈다.
어쩌면 내년에도 정정하게 정기 공연을 이어가는 록셀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잠시 그럼 원래의 사고는 어떻게 되는 걸까란 의문이 스치기도 했으나 태화는 곧 그런 의문을 지웠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미래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해서 기억하는 모든 사고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흔들리는 트레일러가 있다고 전화는 넣어둬 볼까.’
잠시 미래를 떠올리던 그는 록셀이 내민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며 현재를 즐겼다.
일단은, 록셀의 비극을 비틀었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록셀과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3일 후 아침.
태화는 거뭇하게 자라난 수염과 피곤해 보이는 얼굴, 그리고 감지 않아 떡이진 머리를 한 채 거리를 떠돌았다.
누가 봐도 노숙자로 보이는 행색이었다.
끝
ⓒ 마늘소금
태화는 초췌한 얼굴로 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갔다.
벨 소리에 문 쪽을 돌아본 직원이 태화를 알아보고 눈빛을 흐렸다.
「오늘도 엉망이네요. 늘 먹던 거?」
「아, 응. 고마워.」
「태하. 신용카드가 있는 사람이 왜 이렇게 노숙자처럼 있어요? 호텔 방도 있다면서요.」
신용카드를 건네받은 직원은 두꺼운 코트와 털모자를 쓴 태화를 보며 혀를 찼다.
처음 왔던 날 신분증을 확인했기에 그는 신분증을 달라는 말 대신 잔소리를 퍼부었다.
「······어제저녁에도 말했지만 여기가 너무 좋아서?」
24시간 패스트푸드 점에서 4시간 정도 구겨 잔 태화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가 뉴욕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4일. 정확히는 4박 5일이지만 내일은 LA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연극을 관람할 시간이 없다.
원래 일정이 반으로 줄어든 만큼 태화는 호텔을 오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왜 브로드웨이 주요 연극들은 비슷한 시간에 공연하는 걸까······.’
태화가 주로 보고 있는 연극은 오프브로드웨이(500석 미만의 극장)나, 오프오프브로드웨이(100석 미만의 극장)의 작품들이었다.
대극장의 작품들에 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양한 시간에 열리기 때문이다.
록셀의 조언으로 짠 스케줄의 빈칸들까지 빼곡하게 채운 그는 문자 그대로 ‘극장에서 살았다’.